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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2021-08-16 10:31:43

타임루프를 통해 진화한 로맨스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이 아닌 삶을 사랑해야 한다

소설과는 달리 시각적으로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영화 매체에서 타임루프는 매력적인 소재다.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는 시각적인 묘사만한 게 없다. 두번 이상 반복되는 시간, 위치, 인물, 대사는 보는 즉시 관객에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코믹 요소로도 더할 나위 없다. 최근에는 액션 장르나 심지어 공포 장르에까지 타임루프 소재가 확산되었지만 타임루프를 가장 많이 사용해온 장르는 멜로 혹은 로맨틱 코미디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프 온리>는 반복되는 타임 루프는 아니지만 반복된 단 하루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멜로를 선사하면서 관객의 눈물을 자극했다. 일반적으로 타임루프는 같은 시간(일반적으로 하루)이 영화 내에서 수십 수백번씩 반복되는데 이 반복 자체가 재미 요소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반복 자체가 영화의 백미가 된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이는 반복되는 일상, 그날이 그날같은 하루라고 하지만 실제 관객은 매일 조금씩 다른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인 관객이 겪는 반복은 실제로는 반복이 아닌 셈이다. 마치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 조금씩 다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반복을 통해 달라지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그 성취감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반면 타임루프에 갇힌 우리의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루동안 무언가를 쌓아 놓는다고 해도 다음 날이면 리셋되기 때문이다. 이 리셋은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단 한 명만 하루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인간관계는 얼마나 처참해질까. 타임루프라는 소재를 멜로와 섞어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을 그린 <팜 스프링스>는 멜로의 요소 또한 살짝 비튼다. 누군가와 친해지더라도 하루가 지나면 리셋, 그리고 타임루프에 말려들기 전 사이가 나빴던 누군가와는 영영 화해할 수 없다. 홀로 타임루프를 반복하며 살고 있었던 나일스(앤디 샘버그 분)의 삶은 이 타임루프에 또 다른 주인공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 분)가 끼어들며 달라진다. 매일이 리셋인 나일스에게 세라와의 관계는 유일하게 성취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타임루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일스는 세라와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그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는 데 치중하지만 세라는 타임루프를 통해 삶에 대한 애정을 키운다. 반복되는 사람들의 행동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매일을 다르게 사는 나일스와 세라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던 서사는 여기서 로맨틱 코미디의 결을 달리한다. 나일스는 세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세라는 삶과 사랑에 빠진다.

 

 

관객들은 죽고 못사는 연애 서사에 오랫동안 시달려 왔다. 로맨틱 코미디의 90% 이상은 순정으로 마무리한다. 현실적인 연애를 그렸다는 <연애의 온도>도 결말은 순정이었고(연애 하이퍼 리얼리즘의 끝판왕은 오히려 레즈비언 연애를 그린 <연애담>쪽이다감독병크는잠시무시) 로맨틱 코미디 장인이라 할 수 있는 낸시 마이어스 감독조차 서사에서 사랑을 쉽게 놓지 못한다. 환상을 믿는 관객에게는 안됐지만 누군가 없이 살 수 없는 삶은 심리적으로 건강한 삶이 아니다. 정말 서로 죽고 못사는 커플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커플들은 적당히 만나서 적당히 연애하다가 결혼하고 적당히 살다가 죽는다. <이프 온리>가 한국 관객에게 소구했던 건 권태기가 온 커플에게 비현실적인 사랑 서사를 선사함으로써 개봉 당시 관객 지분율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20대 여성들에게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점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현대 관객은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며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사만다의 대사에 열광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했다. 이제는 타임루프건 뭐건 지고지순한 로맨스 서사는 관객에게 더 이상 소구하지 못한다. <노트북>에 열광했던 관객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조부모님의 이야기를 실제 모델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이 이혼했다는 뒷이야기를 들으며 씁쓸해한다.

 

<팜 스프링스>는 그래서 서사의 중심을 연애가 아닌 삶으로 옮겨온다. 세라와 나일스의 공통점은 타임루프에 말려들기 전에도 그닥 의미없어 보이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나일스는 타임루프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이전의 삶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하루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고 빠져나가려는 세라를 보며 고통은 진짜라고 설파하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면 되지 않겠냐고 말한다. 하지만 세라에게 반복되는 하루는 현실이 아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고통으로 시작해야 했던 세라는 더 이상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다. 타임루프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 세라는 나일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자신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초반부 남성 캐릭터를 이성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감정적으로 그리는 것만 같던 <팜 스프링스>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를 반전시킨다. 반복되는 삶에 안주한 나일스는 그냥 여기서 매일 재밌게 지내면 안되겠냐며 이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세라를 붙잡지만 세라는 단호하게 나일스가 아닌 삶을 선택한다. 세라는 나일스와는 달리 삶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철저하게 준비하기 시작하며 하루하루를 방탕하게 사는 나일스와 대비된다.

 

 

<팜 스프링스>의 특이점은 하필 반복되는 하루가 세라의 동생 탈라(카밀라 멘데스 분)의 결혼식 날이라는 점이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결혼식은 세라에게는 모종의 이유로 떨떠름할 뿐이다. 한편 반복되는 결혼식에 지친 나일스는 이제 정장조차 입지 않고 참석한다. 그 자신이 의미없는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나일스 또한 결혼식이 허상일 뿐이라는 점을 짐작하고 있다. 연애라는 환상에 지친 나일스와 세라는 사랑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만나면서 사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다. 나일스와 세라를 제외한 이들은 사랑이라는 환상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나일스의 여자친구 미스티(메레디스 하그너 분)는 나일스를 사랑하지 않지만 남자친구가 필요하기에 나일스와 헤어지지 못한다. 미스티에게는 타인의 결혼식조차도 한껏 꾸미고 나가야 하며 땀조차 나서는 안되는 중대 행사다. 아름다운 결혼식에 환장해 자기 자신을 꾸미는 데 집착하면서도 연애를 놓지 못하는 여성 캐릭터 자체는 시대착오적이지만 결혼식 이전에 연애조차도 어쩌면 크게 의미가 없을 수 있음을 미스티는 코믹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자신을 구해준 나일스에게 끌렸던 세라는 이제 자기 자신을 구하며 삶과 사랑에 빠진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나일스에게 당신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한 마디를 날리는 세라는 현대 로맨틱 코미디 사에 길이 남을 대사를 뱉은 셈이다. 죽고 못사는 연애만이 정답인 것처럼 그려지던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는 이제 남성 없이도 생존하는 여성을 당당하게 서사의 주체로 내세우며 스스로를 구원하는 구원자이자 구원받는 객체로 이원화한다. 세라는 타임루프 안에서든 밖에서든 삶을 영위할 것이며, 나일스와 함께이든 아니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연애에 구속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탈라의 결혼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축복을 빌어주는 세라는 결혼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세라를 고작 축사로부터 구해주고 생색을 냈던 나일스는 이제 세라를 믿고 따르는 객체로 변한다. 나일스의 서사인 것처럼 시작했던 <팜 스프링스>는 제목 그대로 손바닥 뒤집듯이 세라를 입체적인 존재로 그려내며 현대적인 연애 서사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제 현대 관객들은 연애가 삶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며 운명의 짝 같은 건 없을지라도 때로 삶의 동반자가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본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작성자 . 레이

출처 . https://brunch.co.kr/@screenholic/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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