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2021-08-22 23:15:16
히든 피겨스 (2017)
거인의 그림자 뒤에서 써내려가는 고요한 투쟁의 역사
“여성들을 주로 지지자로 삼는 데만 익숙해 있는 일군의 성직자들 사이에서 한 명의 여성, 그것도 나이든 여성인 내가 지도부에 낄 자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종속적인 위치에 존재하는 여성들
흑인 여성이자, 흑인 인권 운동가였던 엘라 베이커가 당시 사회를 비판한 말을 인용하며 영화 <히든 피겨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6.25전쟁, 그리고 경제 대공황을 겪은 후의 미국.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에는 남성들이 사라진 자리에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언제나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들에게는 언제나 반복적이고 단순한 사무직의 자리를 비롯한 종속적인 사회적 위치가 허용되었고, 보수는 남성들의 1/3에 불과했으며, 여성들은 유권자의 50%를 차지하지만, 입법부에서 여성의 비율은 4%밖에 되지 않았다. 우선 여기까지는 ‘여성’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 불평등이다. 그리고 여기에 흑인이 겪어야 했던 차별을 계속해서 적어보자.
냉전 시대의 개막과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
2차 세계대전 종전후 미국 사회에는 분명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양한 변화의 바람이 있었지만, 영화와 관련되어 이야기할 변화의 바람은 냉전시대의 개막과 유색인종의 대거 유입이다. 냉전시대와 유색인종의 유입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전혀 연관성이 없어보이는 두 사안이 기묘하게 연결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인류 최초로 유인우주선을 보낸 고도로 발달된 문명 국가의 비이성적인 면모를 볼 수 있게 된다. 영화속에서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낸 캐서린에게 소련의 스파이냐고 취조하는 부분이 이에 대한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미국 지도부들은 자신들 내부의 유색 인종들이 공산 혁명과 결합될 수 있는 위험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위험을 잠재우고자 트루먼 대통령(1945~1953)은 인종차별에 대한 몇가지 법을 개정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인종분리는 불법이었으나 여전히 진행중인 문제였으며, 인종분리에 대한 법이 집행되지도 않았고, 고용과 임금에서도 유색인종들은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투쟁의 역사
이런 차별이 쌓여 1960년대에 이르게 되면 미국 전역에서 흑인들에 의한 각종 인권 투쟁 운동이 발생한다. 미국의 저명한 흑인 운동가들이 활동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남부에서 평화적인 인권 시위를 주장했던 마틴 루터 킹과 흑인이며 여성의 위치에서 인권운동을 했던 엘라 베이커, 북부에서 차별당하고 억압받는 수많은 흑인들의 기저에 깔려있는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며 과격한 시위를 이끌었던 말콤, 총기 무장을 주장한 로버트 윌이엄스 등을 중심으로 미국 내부에서 유색 인종들의 수많은 평화 시위와 봉기, 반란이라고 부를만한 소요가 일어난 것이 바로 1960년대의 미국이다.
거인의 그림자 뒤에서 써내려가는 고요한 투쟁의 역사
<히든 피겨스>는 바로 이 격동의 시대인 196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속 곳곳에서 보여지는 흑인과 여성에 대한 분리 정책과 시선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색인 여성에게는 교육의 권리마저도 배제하고, 전문직으로 진출할 기회마저도 막혀있으며, 버스나 화장실도 분리된 공간을 사용해야하는 차별적인 현실 그리고 실제로 발생했던 자유승차단원들이 린치를 당하는 장면 등은 이 영화가 당시의 부조리한 시대상을 담아내고 있는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서, NASA의 직원인 흑인 여성 세 명은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들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투쟁한다. 이들이 부조리한 사회에 반발하여 투쟁하는 방식은 내적 용기와 엘리트적인 위엄에 기대어 진행된다. 캐서린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재능을 살려 팀의 업무에 열중한다. 캐서린은 단기적인 소요와 폭력보다는 능력으로 인정받고, 미국 사회의 구시대적 편견과 차별에 맞선다. 도로시 본 또한 단기적인 소요나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위엄과 용기로 흑인 여성들에게 전문직을 개방하지 않는 NASA에 맞서고, 메리 잭슨은 현명하게 자신의 권리를 찾고 성장하기 위해서 분투한다.
이들은 고요하되 위엄을 갖춘 방식으로 투쟁하기를 선택한다. 반면, 영화속 흑인 남성들은 조금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매리 잭슨의 남편과 짐이 두 여성과 다른 의견을 내비추며 갈등을 빚는 장면을 통해, <히든 피겨스>의세 여성들이 차별적인 사회에 저항하고 사회를 바꿔가는 방식이 엘리트적이고 위엄있는 방식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는 행복한 결말을 통해서 마치 이들 세사람이 선택한 방식이 옳은 것처럼 그려내고 있다.
위대한 역사의 이면에 존재하는 숨겨진 인물들(hidden figures)들을 조명하지만, 보다많은 숨겨진 감정들(hidden tears)에는 깊이 있게 접근하지 못하는 <히든 피겨스>
하지만, 고요한 저항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히든 피겨스>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거나, 무작정 엘리트 흑인 여성들의 성공담을 만들기 위하여 그들과 반대쪽에 있는 인권 운동 노선(짐과 매리 잭슨의 남편)을 추락시키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대다수의 유색인종들은 <히든 피겨스>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위치가 아니었다. <히든 피겨스>의 세 주인공은 당시에도 흑인중 상위 10% 이내에 속하는 엘리트 계층이며, 단지 그들만의 고요한 투쟁으로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미국 각지에서 유색인종 수백만명이 시위와 반란에 동참하고, 당국은 공권력으로 유색인 민중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들끓었던 당시 사회의 시대적 분노가 담겨져 있지 않다. 또한,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크고 작은 전쟁들에서 언제나 종속적인 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던 흑인과 여성, 그리고 흑인 여성들의 터져나와야 할 분노와 들끓는 애환이 영화속에선 블랙 코미디의 장르로 유쾌하게 그려내기도 하지만, 그 깊은 분노위에 애국심을 대충 덧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충분히 유쾌하고, 편집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좋은 영화이지만, 실제의 세계와 영화의 세계에는 어느정도의 간극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히든 피겨스>가 유색인종 여성들의 고요한 투쟁을 다룬 영화라면, 그 방식은 누구의 노선을 따르는 것인가? 캐서린이 영화속에서 한 두번 보여주는 분노의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속에는 당시 대다수 흑인들(당시 흑인의 실업률은 12%, 빈곤한 생활을 하는 비율은 흑인 전체 인구의 절반이다)의 분노와 억압의 감정이 감지되지 않는다.
영화속에서도 자유승차단원들이 탑승한 버스가 공격받는 장면이 등장했듯이, 당시 유색인종들의 투쟁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거는 투쟁이었고, 그 때문에 유색 인종들의 투쟁에는 진중한 울분이 서려있거나, 폭발하는 분노가 느껴졌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히든 피겨스>에는 억눌린 민중의 차가운 분노도, 폭발하는 뜨거운 분노의 감정도 감지되지 않는다. 분명 <히든 피겨스>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유쾌하기에 매력적이지만, 그렇기에 그 시대의 수많은 ‘흑인’이자 ‘여성’이었던 사람들 대다수의 삶을 대표하지 못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이며, 영화속 주인공 세 명은 이미 충분히 교육을 받은 흑인 여성으로 나름 유색인종들 중에서는 엘리트에 속하기에, 빈곤한 삶을 영위했던 당시의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흑인들의 이야기를 대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마저 포용하는 방식의 각색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든 피겨스>는 무거운 사회적 문제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영화로 충분히 그만의 가치가 있는 영화이지만, 그 이유때문에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간 수많은 대다수의 민중을 대표하지는 못하는 영화로 각색의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 본문 속 자료들은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2 권>을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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