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8-23 15:18:52
차세대 조커라 불리던 '배리 케오간'
아일랜드에서 피습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에서 소름 끼치는 연기를 선보이며 차세대 히스 레저로 꼽히기도 했던 배우 '배리 케오간'이 <이터널스> 개봉을 앞두고 피습을 당했다고 할리우드 통신 "The wrap"이 전했습니다.
배리 케오간은 아일랜드의 서부 도시인 골웨이에 방문했다가 변을 당했는데요. 아일랜드 신문사인 “Sunday World”에 따르면, 케오간은 골웨이의 한 호텔 앞에서 얼굴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곧바로 골웨이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베인 상처 등을 치료한 뒤 퇴원했다고 전해지는데요. 할리우드 배우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얼굴 부상에도, 그는 사건에 대해 별다른 기소 없이 넘어간다고 밝혀 화제 되고 있습니다.
배리 케오간은 2017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각인시켰는데요. 최근,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A24 작품 <그린 나이트>에서 다시 한번 씬스틸러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습니다.
케오간은 <그린 나이트> 이전까지 휴식기는 중요치 않다는 듯, 마블과 DC 영화에 동시에 캐스팅되며 큰 화제를 모았는데요. 그는 ‘클로이 자오’ 감독이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더욱이 기대를 모으고 있는 MCU의 <이터널스>에서 드루이그 역을 맡아 ‘길가메쉬’ 역의 마동석 배우와 호흡을 맞출 예정이며, 10년 만에 돌아온 배트맨 실사 영화 <더 배트맨>에서는 스탠리 머클 역을 맡아 블록버스터 양대산맥에 모두 출연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배리 케오간 배우의 쾌유를 빌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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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연대로 만든 따뜻한 한 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미안해요, 리키>(2019) 이후 약 4년 만에 켄 로치 감독이 세 번째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나의 올드 오크>(2023)는 켄 로치 감독의 3부작이자 은퇴작으로 남는 작품이기에 더 뜻깊은 선물로 다가온다. 켄 로치 감독 3부작은 사회 구조와 복지 제도의 어두운 단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관객에게 깊은 성찰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의 올드 오크>(2023)는 마지막까지 영국 북동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다른 전작들보다 영국 문화가 짙게 물들어 있고, 가장 따뜻한 영화다.
※본 영화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으로 참석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난민
난민 문제는 오늘날 해결해야 할 숙제로 자리 잡고 있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 전쟁과 내전으로 넘어온 선량한 난민 이주자를 유럽이 가장 많이 수용하고 있다. <나의 올드 오크>(2023)는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민 수용의 갈등 문제를 그리고 있다. 시리아 내전으로 영국으로 온 야라(에브라 마리)네 가족을 본 동네 주민들은 난민 이주에 탐탁지 아니한다. 야라네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거주하는 난민들의 복지가 자신들이 받는 복지보다 난민에게 더 큰 복지를 받는다는 불만과 위선을 보인다. 야라의 카메라를 망가뜨리거나 도움을 받아도 난민이란 프레임에 도리어 욕을 먹고,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The Old Oak’라는 펍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난민의 인식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함께 밥을 먹고, 영상을 보며, 점차 관계의 벽을 허물어간다. 마침내 야라 아버지 추모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이 추모하러 오는 장면은 모두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휴머니즘에 도달한다.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연대
영화 배경인 영국 북동부 마을은 어질러진 퍼즐과 같았다. 광산이 폐광되며 쇠퇴해 버린 마을은 각자가 살아가기 위해 바빠졌다. TJ(데이브 터너)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죽음, 아내의 이혼, 아들과 깨져버린 신뢰로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자살을 택하려던 그에게 다가온 건 ‘마라’라는 강아지였다. ‘마라’는 광부 용어로 친구와 동료 그 이상의 연대를 일컫는 말이다. TJ는 다시 살아가는 용기를 얻고, ‘The Old Oak’라는 펍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이곳은 옛날 광산 노동자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쉼터이자 놀이터였다. TJ는 야라와 타니(데비 허니우드)와 함께 난민 가족들과 소외된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40년도 더 된 펍 안쪽 방을 개방한다. 과거 폐광을 막기 위한 노동자들의 연대가 있었다면 지금은 지역 주민들의 연대라는 퍼즐 조각을 맞추기 위해 분투한다. 연대의 퍼즐이 맞춰지는가 하나 모종의 사건으로 부서져 버린 듯 보였다. 하지만, 야라의 아버지 장례식을 마을 사람들이 추모하러 오면서 아름다운 연대의 퍼즐이 맞춰졌다는 걸 알아챈다.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희망
<나의 올드 오크>는 각자가 품은 희망을 보여준다. TJ는 가족의 회복, 야라는 아버지의 생존, 펍의 단골들은 과거의 영광 등이 있다. 야라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희망과 용기가 생긴다고 한다. 야라가 찍은 사진 속 마을 사람들의 화목한 미소는 처음 마을에 도착해서 찍었던 모습과 대비된다. 의심과 낯섦에서 공존과 희망, 마을의 공동체 정신으로 변신한다. 희망은 신뢰를 통해 만들어지는 대사는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작용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 <미안해요, 리키>(2019) 보다 희망의 메시지를 그리며 극복하는 과정은 켄 로치 감독 3부작 중에서 가장 희망 있고, 따뜻한 영화다.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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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일단 첫걸음부터 나가면 죽다 살아날지도 모른다, 담요를 입은 사람
담요를 입은 사람 (Blanket Wearer)
-박정미
시놉시스
주인공 정미는 돈을 사용하지 않고 생존할 방법을 찾아 나선다. 낭비되는 자본을 이용해 식사와 주거를 마련한다. 하지만 자신의 원함에 가깝지 않아, 주인공 정미는 다른 커뮤니티(환경)을 찾아 나선다. 자급자족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공동체, 자연과 일체 되는 커뮤니티, 히피와의 트럭 여행, 그리고 히치하이킹을 통해 터키, 이란, 인도까지 모험이 이어진다. 이렇게 처음에는 ‘영국에서 돈 없이 1년 살기’라는 프로젝트는 정미의 삶의 목적의식을 찾아 나서는 모험으로 서서히 바뀌어 간다.
4일, 밤에, ‘담요를 입은 사람’을 관람하였다. 원래는 4일에는 영화제에서 영화를 볼 생각이 없었지만 어떤 마음에 이끌려 가볍게 한 편만 보고 가자는 마음을 먹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작품을 탐색할 때, 표기된 영화의 시놉시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일대기를 다루는 이야기라니, 정적이고 너무 학습적인 내용이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래서 덕분에 별 기대감을 갖지 않고 상영관에 가서, 2시간 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전주에 와서 4일 만에 드디어 울었다. 이후에 ‘이 영화 참 좋다’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는데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했다. 정말 좋은데, 어떻게 알릴 수 있지. 그래도 부족한 언어더라도 슬쩍 맛보고 궁금하다 싶은 사람들은 꼭 시간 맞춰서 영화를 관람하는 기회를 얻기를.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 ‘정미’가 챗바퀴 같은 삶에 지쳐, 영국으로 떠났지만 거기서도 삶을 위한 돈을 벌고, 돈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에 분한 정미는 돈 없이 살아보겠다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프로젝트는 반자본주의 활동이나 환경주의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 ‘스킵다이빙’을 통해 쓰레기봉투에 버려진 음식을 발굴하고,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폐건물에 주거생활을 꾸리는 ‘스퀏팅’을 한다. 초반의 이야기는 언뜻 ‘자본주의-환경’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 줍는 사람들’이 많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자본에 의한 낭비와 폐기는 얼마나 많은 배고픔을 외면하고 있는가에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스퀏팅’에 관해서는 방랑자의 모나가 생각나기도 했다. 아녜스 바르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분명 첫인상부터 흥미롭고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정미는 아직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여전히 ‘의존’이 필요하며 ‘돈’이 필요한 상황이란 것이 바뀌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미는 자급자족의 공동체로 간다.
그러나 공동체란 다른 사람과의 협력과 의존이 필수적이었고, 또다시 길을 떠난다. 여러 목적지에 도착하고, 떠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정미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보다 자신의 자아를 들여다보는 수련의 길처럼 변한다. 이런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심지어는 체계적이다까지 생각이 들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계획을 쌓아 만든 탄탄한 일대기를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는 정미가 자신의 마음 속 소리에 집중하여 계획 없이 떠도는 사이에 생긴 것들이다. 정말 누군가 길을 내려준 것일까.
처음에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다큐멘터리일 거라 생각했는데, ‘목적’을 찾아가는 이야기였으며 그 과정이 흥미로워서 나도 정미와 함께 그 모험을 함께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고 일련의 사건들을 뒤돌아보면 무슨 ‘계시록’이라도 읽은 느낌에 어벙벙해진다. 무계획이란 계획을 실천한다는 것은 이 또한 계획적인 일인 것이다.
내가 갖고 있던 두려움(정미 같은 경우에는 ‘돈’이었다)을 인정하는 방법이나 내 진정한 편안함을 찾기 원한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다소 ‘자기계발’적으로 들릴지 모르더라도 ‘자기성장’을 좋아한다면, 이 영화를 싫어할 수가 없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좁아 너무 아쉽다. 이런 나의 벅찬 마음을 다른 사람도 느껴보면 좋겠다. 이는 절대적으로 공유해야 할 가치이자 태도라 느꼈다.
결국, 구체적으로 왜 좋은지에 관해서 이야기는 못하고 상투적으로만 표현하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려 새로운 정답을 찾은 듯한 기쁨에 도달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직접 영화를 보고 그 과정을 밟아 갔으면 하는 욕심도 있어 굉장히 일부러 숨겨놓은 것도 있다. 다들 꼭 발견하시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쓸데없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생긴 모험을 하나 소개하자면, ‘산티아고 순례자길’을 꼭 걸어보고 싶다, 세계를 나와 스스로 궁지로 들어가 하나하나 나아갈 때 나는 어떤 삶을 바라게 될까. 정말 ‘나’가 궁금해졌다.
<상영 정보>
05.04. 20:30 담요를 입은 사람 (GV)
(CGV 전주고사관 1관)
05.06. 17:00 담요를 입은 사람 (GV)
(CGV 전주고사관 1관)
05.08. 17:30 담요를 입은 사람
(CGV 전주고사관 6관)
<영화제 기간>
5월 1일~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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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늦게 온 DCEU의 마지막 편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부동생 '옴'(패트릭 윌슨)의 야욕을 꺾고 아틀란티스 왕국의 왕좌를 차지한 '아쿠아맨/아서 커리'(제이슨 모모아). 왕비 '메라'(엠버 허드)와 행복한 신혼을 보내고, 아들을 키우며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던 그에게 과거의 악연이 다시 찾아온다. 아쿠아맨에게 아버지를 잃은 '블랙 만타'(야히아 압둘마틴 2세)가 지구를 파괴할 무기인 '블랙 트라이던트’를 손에 넣고 아틀란티스를 공격한 것.
예기치 못한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아서는 과거 블랙 만타와 손을 잡은 바 있는 옴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다. 사막 감옥에 갇힌 옴을 찾아가고, 그를 감옥에서 꺼내준 아서. 의심과 불신 속에 한 팀을 이룬 아서와 옴은 이제 남태평양의 한 섬으로 향한다.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켜 지구를 파괴하려는 블랙 만타와 그를 조종하는 사라진 왕국의 '코닥스 왕'을 무찌르기 위해서.
<아쿠아맨 2>를 보는 두 시선
2018년에 개봉한 DCEU(DC 확장 유니버스)의 <아쿠아맨>은 시리즈 초석 역할에 충실한 영화였다. 전작 <저스티스 리그>에서 큰 임팩트를 남기지 못해 그저 '물고기랑 대화하는 애'였던 아쿠아맨. 그의 이미지는 '호쾌하고 상남자스러운 바다의 지배자'로 180도 달라졌다. <컨저링> 시리즈와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의 메가폰을 잡았던 제임스 완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흥행 성적도 훌륭했다.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국내에서도 5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국내에 개봉한 DC 원작 영화 중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조커> 다음으로 좋은 성적이었다. "물맨(아쿠아맨) 봄은 온다"는 밈이 유행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1편의 평가와 성적만 놓고 보면 5년 만에 돌아온 속편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을 기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DCEU의 현황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연출한 제임스 건이 총괄 기획을 맡은 DC 유니버스가 새 출발을 알리면서 세계관 자체가 취소됐기 때문. 그 결과 DC 유니버스로 편입되지 못한 <아쿠아맨 2>은 굳이 봐야 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숱한 재촬영과 재편집 뉴스도, 조니 뎁과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한 엠버 허드의 출연도 희소식은 아니었다.
엇갈린 시선 속에 도착한 <아쿠아맨 2>는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준다. 전편에서 스쳐 지나간 환경 문제를 주요 소재로 삼아 예상 못한 큰 그림을 보여줬고, 아쿠아맨의 서사도 한층 풍성해졌다. 근래 히어로 영화 중에서도 손꼽히는 액션의 쾌감도 강렬하다. 하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크다. 미처 못 지운 재촬영의 흔적 때문에 영화는 전반적으로 산만하다. 특히 존재 의의가 없다는 한계를 뒤엎을 한 방은 끝끝내 보여주지 못했다.
다급한 현실을 직시한 큰 그림
MCU의 전성기였던 2010년대 후반만 해도 MCU의 장점은 현실성이었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호크아이 등은 당장 지구에서 활동해도 위화감이 없어 보이는 영웅이었다. 그랬기에 관객들도 그들의 서사에 기꺼이 빠져들었다. 반면에 DCEU의 다소 비현실적인 히어로들은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솔로 영화가 나온 슈퍼맨과 원더우먼만 해도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외계인과 신화 속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MCU와 DCEU에 대한 평가가 마침내 뒤바뀐 듯 보인다. 멀티버스 사가에 힘을 쏟은 마블은 점점 공허해졌다. 다중 우주와 양자 영역, 시간여행이 중심 소재가 되면서 MCU 영화들은 관객들이 발 딛고 있는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반면에 DCEU는 오히려 지구에 가까워졌다. 지구 온난화라는 환경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아쿠아맨 2>의 메시지는 그 어떤 히어로 영화보다도 현실적인 위협과 맞닿아 있으니까.
물론 전편에서도 환경 문제는 중요한 소재였다. 해양 오염 문제 때문에 옴이 이끄는 아틀란티스 군대가 육지 침공을 계획했을 정도였다. 단지 1편이라는 특성상 부각되지 못했을 뿐이다. 거시적인 문제를 화두로 던지기 전에 아쿠아맨 캐릭터 소개, 아서와 옴의 왕위 싸움, 아서와 메라의 로맨스만 다뤄도 러닝타임이 부족했으니.
<아쿠아맨 2>는 다르다. 빌런의 동기, 행적, 계획 모두 지구 온난화와 맞닿아 있다. 당장 극지방이 녹지 않았다면 블랙 만타는 블랙 트라이던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더해 블랙 만타를 통해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켜 남극 빙하에 갇힌 사라진 왕국 '네크루스'를 부활시키려는 코닥스 왕의 음모도 이뤄질 수 없다. 이는 지구 온난화 때문에 영구 동토층에 얼어있던 고대 바이러스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경고를 환기시킨다.
야심 찬 그림 위에서 뛰어놀다
이처럼 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야심 찬 큰 그림은 아쿠아맨이라는 영웅의 서사를 풀어내는 데 최적화된 도구이기도 하다. 여러 능력이 있지만, 아쿠아맨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소통'이기 때문. 특히 기껏해야 물고기와 대화한다고 놀림거리가 되는 이 능력이 의외로 가장 영웅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적 관점에서 볼 때, 영웅은 인간과 신의 세계를 넘나들며 소통하는 인물이다. 영웅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예언을 실천하는 이다. 동시에 인간 중 가장 뛰어난 자로서 신이 정한 운명에 도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간극은 그리스 비극의 원천이었다. 오이디푸스도, 아킬레우스도, 테세우스도 인간으로 태어나 신의 세계에 도전하다 파멸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아서 커리의 서사도 다르지 않다. 그는 아틀란티스의 왕이자 육지와 바다의 전쟁을 막은 영웅 아쿠아맨이다. 육지와 바다를 자유로이 오가며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두 세계의 공존을 가능케 한 셈이다. <아쿠아맨 2>는 이제 그의 영웅성을 다른 방향으로 확장시킨다. 두 세계의 가교 역할을 넘어서서 두 세계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과업을 아서에게 부여한다. 지구를 지키는 일은 인간과 아틀란티스인 모두의 생존을 위한 일이니까.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블랙 만타는 아버지를 죽인 아쿠아맨을 증오하고, 인간은 미지의 국가인 아틀란티스를 막연히 두려워한다. 옴을 비롯한 아틀란티스인들은 바다를 파괴하는 육지에 세계에 분노를 품고 있다. 그렇기에 아서는 블랙만타와 그를 조종하는 코닥스 왕과 대적하고, 자기와 반목했던 이부동생의 마음을 되돌려 협력해야 한다. 모든 적개심을 극복할 때 비로소 바다와 육지가 협력하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장점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더 나아가 <아쿠아맨 2>는 슈퍼 히어로 영화다운 방식으로 아쿠아맨의 과업을 보여준다. 바로 액션이다. <아쿠아맨 2>의 액션은 영화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남태평양의 한 섬에 도착해 블랙 만타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 대표적이다.
아서와 옴은 정글에서 거대해진 메뚜기와 식충식물에게 불시에 기습당한다. 블랙 만타가 가공할 만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동안 섬의 생태계가 불안정해졌고, 그 결과 돌연변이 동식물이 등장한 것. 지구의 이상 징후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액션 시퀀스의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셈이다. 그렇기에 괴물이 된 동식물과 아서 형제의 추격전은 마냥 유머스럽지 않다. 꽤 징그럽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물론 메시지, 서사와의 연결성을 빼고 보더라도 <아쿠아맨 2>의 액션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다. 비록 스케일이 전편보다 줄어들었고 CG 티가 나는 부분도 있지만, 아틀란티스에서 펼쳐지는 수중전이나 네크루스 전투는 여전히 화려하다. 다양한 색상의 광원을 활용한 덕분에 액션의 움직임과 흐름을 따라가는 데도 무리가 없다. 이는 너무 어둡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한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탈로칸 연출과 대비를 이룬다.
초기 DCEU 영화의 느낌이 되살아난 장면도 눈에 띈다. 히어로와 빌런이 일 대 일로 맞붙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경쾌한 리듬감과 명확한 카메라워크의 조합 덕분에 아쿠아맨과 블랙 만타가 각자 삼지창을 들고 일기토를 펼치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 눈이 호강한다. 잭 스나이더가 제작에 참여한 <맨 오브 스틸>, <원더우먼> 등이 빠른 템포의 액션씬을 통해 히어로의 초인적인 힘을 강조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대목이다.
부실할 수밖에 없는 기초 공사
하지만 야심 찬 소재와 메시지, 히어로 영화로서 부족함 없는 액션의 완성도는 온전히 빛나지 못한다. 영화의 기본 토대인 각본과 편집이 상당히 불안정하기 때문. <아쿠아맨 2>의 플롯은 크게 세 개다. 1) 숙적이었던 아서와 옴이 함께 모험을 떠나는 버디 무비. 2) 복수심으로 가득 찬 블랙 만타와 그 배후인 코닥스 왕의 계략. 3) 왕이기 이전에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 아서의 가족 이야기.
그런데 <아쿠아맨 2>는 플롯 간의 연관성을 제때 못 보여준다. 1번과 2번의 연결은 자연스럽다. 블랙 만타를 막기 위해 전편에서 그와 관련이 있는 옴을 활용한다는 내용이므로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반면에 세 번째 플롯은 코닥스 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나머지 플롯과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세 플롯 중 등장은 가장 빠르다. 그러다 보니 클라이맥스 직전까지 영화는 전반적으로 산만하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다.
또 각 플롯은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아서의 가족 이야기에서는 아버지로서 아서 커리의 정체성을 강조할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 엠버 허드의 분량을 줄이는 과정에서 내용이 대폭 삭제된 흔적이 역력하다. 할머니가 된 '아틀라나'(니콜 키드먼)의 등장 타이밍은 이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가족 이야기가 펼쳐지는 초반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아틀란티스가 습격당할 때 갑자기 등장해 존재감을 뽐낸다.
아서와 옴의 버디 무비는 진부하다. 특히 <토르: 다크월드> 속 토르와 로키의 이야기를 답습한다. 선조가 패퇴시킨 고대의 적과 맞서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는 설정도, 감옥에 갇힌 동생을 형이 몰래 구해 모험에 참여시킨다는 전개도 빼닮았다. 그나마 옴이 로키보다 콤플렉스가 덜하고 진중한 게 차이점이다. 그런데 이조차도 장점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서 형제의 서사가 토르와 로키의 갈등보다 덜 극적이라는 뜻이니까.
근본적인 한계는 못 넘은 마지막 인사
그뿐만이 아니다. 디테일의 부족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시퀀스 간의 전환은 종종 부자연스럽고, 음악도 전편에 비해 활용법이 어색하다. 전편이 분위기를 환기시킬 때마다 음악을 적재적소에 삽입한 반면, 이번에 활용된 음악은 분위기를 자꾸 끊는다. 개그씬도 맥락이 어색한 경우가 잦다. 그 결과 <아쿠아맨 2>는 전반적으로 마치 밀린 과제를 해치우는 듯하다. 결말을 향해 달려 나가기 바쁘다는 인상이 진하게 남는다.
인상적인 큰 그림과 확실한 장점을 갖추고도 세밀한 완성도가 부족하다면, 결국 불안정한 제작 환경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제임스 완이 주연 배우 사망으로 인해 각본을 수정하고 숱한 재촬영을 진행하면서도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키는 전례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그에게도 DCEU와 DC 유니버스 사이에서 표류 중이던 <아쿠아맨 2> 구조작업이 얼마나 난관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기대 이상의 완성도와 재미를 갖췄지만 <아쿠아맨 2>의 끝은 공허하다. <아쿠아맨 2>의 결말은 <블랙팬서>와 유사하다. 아서의 결단 덕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아틀란티스는 육지와의 협력을 약속한다. 만약 DCEU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이는 세계관의 일대 변화를 기대케 하는 가슴 뛰는 마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럴 일은 없다. 그렇게 <아쿠아맨 2>는 무의미한 자기소개를 마지막으로 DCEU의 문을 닫는다.
Acceptable 무난함
조금만 빨리 왔다면 DCEU의 미래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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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주의] 앨리스:원더랜드에서 온 소년
스포일러가 다분하니, 보실 분들은 뒤로 가주세요. 꼭.
시사회에 당첨되어서 <앨리스:원더랜드에서 온 소년>을 보게 되었다.
그냥 시사회는 아니고, 이 영화가 강원도 올로케라 강원 특별 시사회를 진행했다. 원래는 감독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못 오셔서 자필의 편지를 제작사 대표님이 대독하셨다.
많은 분들이 홍종현배우, 정소민배우를 보고 싶어서 온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정연주배우님이 궁금해서 갔다. SNL의 정연주배우님의 능청능청한 연기가 워낙 내 스타일이었다.
영화의 줄거리를 간추려서 이야기 하면 귀신에 시달리던 어느 소녀, 아니 여성이 여성이 고모의 친구인 무당의 말을 듣고 어느 원더랜드라는 팬션에서 묵으며 벌어지는 호러? 스릴러? 로맨스? 뭐 그런거다.
사실 궁금했던 건 원더랜드와 소년의 조합이었다. 앨리스하면 당연히 '소녀'가 생각나기 마련인데 소년이라니. 신박한데 싶었다.
영화 진행의 초반부터 '소년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해라~' 하면서 진행된다. 근데 이를 어쩌나.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알아도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좀 불편했다. 아마 이것이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배가 다른 남매라고 해도 남매는 남매인 것을 무엇 때문에 넣었는지 알 수 없는 합방 장면이 심으로 불편했다. 가벼운 입맞춤 정도야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겠지만 아무리 귀신이라도 남매간의 성행위라니 불편했다.
1살의 아이가 가지는 순수한 사랑(누나에 대한 애정)을 정말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까? 귀신과의 합방, 귀접이라고 하는 행위인데 이건 귀신이 인간의 기를 빼앗아가는 행위 아닌가?
그것도 그렇지만 '왜?' 라는 것이 너무 결여되어 있었다. 물론 영화가 모든 것을 다 알려주면 재미 없는 것이 사실지만, 적당해야지 싶다. 아이가 누나를 사랑하게 된 계기도 아주아주 많이 부족하다. 누나가 아이를 해치게 되었던 이유도 너무 간단해서 비극이긴 하지만 비극이 극대화 되진 않았다. 왜 그 가족이 그토록 정이 없게 되었던 건지도 안 나오고 여튼 너무 심하게 함축하고 줄였다 싶었다. 영화가 시는 아니지 않은데 말이다.
이승연배우(무당 역)가 말했던 게 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잊으면 어쩌구 이랬다. 애초에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데 어떻게 잊는 것이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뭐 그래도 이건 '목숨이 죽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잊혀져서 죽는다'라는 원피스의 명대사와 일맥한 것 같다. 여기서 이해가 안 간 건,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건 아이의 엄마인데,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귀신으로도 영영 살기를 바란다는 것. 그러려면 여자를 죽여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게 "너 때문에 죽어"라고 하며 분노만 내뱉었다는 것이다.
아이 이게 뭐야.
심지어 막판에는 죽은 사람이 실물 인간이 되어서 나타났다. 그럼 둘이 연애할거야? 남매인데?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면, 나는 위안부로 누드를 찍은 이승연님이 아직 좀 불편하다)
너무 불평만 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좋았던 것을 꼽자면 영상미.
청태산휴양림이 원래 좀 좋긴 한데, 그래도 정말 예쁘게 잘 찍었다. 숲도 예쁘게 나왔고, 꽃잎이 날리는 것 팬션 다 색감이 예뻤다.
한 두 발 양보해서 좋은데, 강원도 올로케인것도 좋고, 정연주님 나오는 것도 좋고, 예쁜 영상과 색감도 좋은데, 나한테 이 스토리는 영 안 맞았다.
혹시 원더랜드와 네버랜드를 헷갈려서 원더랜드라고 한 건 아니었을까 싶다가도 그러면 그냥 "원더랜드에서 온 소년"이라고만 하지 왜 '앨리스'를 붙인건가 역시 헛갈린게 아니었구나 하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세계로 간 여자 주인공 때문에 앨리스라고 한건가? 그렇다면 조금 이해를 해볼 수 있다.
여튼 그렇다. 영화보기 1년 전쯤 보았던 <좀비스쿨>이 생각나면서 몹시 안타까워졌다. 그래도 배우진들이 괜찮아서 볼 사람들은 좀 보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 그래도 연기에 점수를 주자면 중간 점수만큼 줄 수 있을 듯 하다. 역할이 그래서 그냥 묻어갔지만 홍종현님은 연기 연습이 엄청 필요해보였다. 지금은 괜찮지만 그 당시 정소민님의 연기도 그닥이었다. 아마 정연주님과 비교되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강원도에서 지원했던 영화 중에 <조난자들> 같은 영화는 괜찮았는데 연달은 <좀비스쿨>과 <앨리스:원더랜드에서 온 소년>은 정말 안타까웠다. 영화를 선택하는 실무진에서 시나리오를 보는 능력을 늘리던지, 좋은 시나리오를 찾아서 로케를 제안하던지 해야하는 게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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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 나이트>,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
<그린 나이트>,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
활짝 열린 사각의 창틀 너머를 관망하던 카메라가 그 배면에 잠들어 있는 주인공의 얼굴을 담기까지, <그린 나이트>의 도입부는 <이창>(알프레드 히치콕, 1954)의 그것과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다. 두 영화의 카메라는 모두 누군가의 시점처럼 운용되다가 그 시점의 주체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전환시킨다. <이창>에서 건너편 아파트 내부의 은밀한 공간을 훑으며 관객의 ‘훔쳐보기’ 욕망을 자극하던 카메라는 돌연 휠체어에서 잠을 자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추면서 해당 쇼트가 특정 인물의 시점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탄로한다. 이 쇼트는 다름 아닌 관객의 시점 쇼트였다. 그렇게 히치콕은 <이창>이 영화와 관계하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을 다룬 메타 영화임을 드러낸다.
<그린 나이트>의 도입부에서 창틀 너머의 이름 모를 기사 부부와 가축들을 한동안 관조하는 쇼트는 마치 움직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누군가의 시선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불현듯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까지만 해도 특정 인물의 뒷걸음질로 여겨졌던 쇼트는 후진의 움직임을 계속하면서 그 주체가 작중 인물이 아님을 밝힌다. 동시에 바깥의 세계를 투사하는 틀이 스크린 모양의 사각 창틀이라는 점을 넌지시 드러내며, 여자 친구의 물세례를 받고 번쩍 잠에서 깨어나는 주인공 가웨인의 모습을 하나의 흐름으로 잇는다. 그렇게 카메라는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영화)처럼 표현된 예술 세계와 차가운 물의 성질을 즉각 몸으로 받아들이는 현실 세계를 연계하며 두 세계의 물리적 단절과 내적 긴밀함을 동시에 암시한다. 현실에서 예술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세계를 흐릿하게 처리하며 온전한 현실로 돌아오는 카메라의 시점은 그런 점에서 감독 데이빗 로워리의 시점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카메라가 투신하는 대상인 가웨인은 데이빗 로워리의 분신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린 나이트>에서 데이빗 로워리가 자신의 분신 가웨인을 경유하여 도달하려는 곳은 어디일까, 더 중요하게는 그곳에 가닿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가웨인과 녹색 기사, 현실과 영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에서 왕은 부패한 기사 가웨인에게 무용담을 들려 달라 요청한다. 처음에는 그저 친분을 쌓기 위함인 듯 보였던 이 요청은 이내 원탁의 기사들을 두고 “무용담 하나 없이 어울려선 안 된다.”라고 조언하는 왕비의 말을 통과하면서 “무용담 없이 왕위 계승은 꿈도 꾸지 말라.”라는 일종의 압박이자 명령으로 변모한다. 이로써 가웨인은 왕이 되기 위해 무용담이 필요한 현실적 자리에 머문다. 그는 방탕한 성적 유희로 얼룩져 있는 남자이고, 권력을 노리는 탐욕가이면서 한편으론 엄마와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남루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 그의 앞에, 즉 가웨인이라는 현실 앞에 나무 형상의 초현실적 존재 ‘녹색 기사’가 등장한다. 가웨인의 현실성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녹색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녹색 기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 시퀀스의 포문을 여는 주체가 카메라라는 점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 앞에 서서 수직의 각도로 눈발이 흩날리는 하늘을 잡은 채 예배당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에 다다른 카메라가 내부의 어둠 속으로 점차 들어갈 때, 계단식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문틀로 인해 그 움직임은 마치 깊은 심연 속으로 하강하는 듯 느껴진다. 그렇게 어둠은 기준점이 되어 이전의 쇼트와 이후의 쇼트를 분리하면서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선언한다. 이에 조응하듯 곧이어 문이 열리고, 카메라에 붙잡힌 가웨인은 예배당 상층부에 뚫린 원형의 창에서 사선 아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바라본다. 빛은 원탁의 중심부를 성스럽게 비추는데, 이 형상은 마치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사기 렌즈의 광원처럼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원탁의 중심부는 그 빛이 가닿아 무대화된 스크린이다. 그리고 이 무대 위에 출연하는 녹색 기사는 스크린에서 퍼포먼스를 행하는 영화적 존재, 혹은 영화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녹색 기사가 자신과 겨뤄 승리한 자에게 본인이 당한 만큼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황당무계한 목 베기 게임은 영화와 현실 간의 역학에 관한 메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 가웨인은 이 게임에 참가하여 녹색 기사의 목을 내려치고, 일 년 뒤 그가 기거하는 녹색 예배당으로 여정을 떠난다. 이로써 남루한 ‘현실’이 성스러운 ‘영화’로 다가가는, 그 긴 이행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네 가지 시험
여정을 떠난 가웨인은 전쟁으로 참혹하게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목도하고, 머지않아 정체불명의 소년병과 조우한다. 소년병은 가웨인에게 다가가 전쟁으로 두 친형을 잃은 자신의 암담한 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가웨인은 그의 신세한탄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 피폐해진 전장을 무감하게 지나치던 가웨인은 소년병이 녹색 예배당이 있는 북쪽 길을 안내하자 그제야 그에게 관심을 준다. 다만, 그것은 소년병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이 아니라 녹색 기사를 만나야 하는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결국 가웨인은 길을 알려준 소년병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지 않은 죄로 그의 무리에 포박당하고 소지품을 전부 빼앗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어딘가 이상하다. 왜 소년병은 처음부터 강도 무리를 끌고 와 가웨인을 포박하지 않았을까. 만일 허허벌판이 아니라 우거진 숲에서 범행을 계획한 것이었다 해도 구태여 작은 친절을 바랄 필요가 있었을까. 또한 가웨인이 그것을 베풀지 않았다고 분노할 필요가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 장면은 일종의 시험처럼 느껴진다.
이 대목의 서두를 여는 자막 ‘작은 친절’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연민’일 것이다. 가웨인은 전쟁에 희생된 자들과 그 포악함의 절대적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소년병을 보고도 전혀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만 혈안이었다. 그런 점에서 포박당한 가웨인을 카메라가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을 오가며 360도 회전하는 쇼트는 백골이 된 미래의 형상과 복원된 현재를 교차함으로써 연민의 정을 하사하지 않은 가웨인에게, 그러니까 연민이 거세된 현실에게 가하는 카메라의 협박이자 경고는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녹색 기사와 재회하는 시퀀스를 제외하고, 이 여정을 구성하는 네 개의 시퀀스는 곧 네 개의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험들은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필요한 덕목들에 대한 탐구이자 점검일 테다.
이후, 가웨인은 잠을 자기 위해 들어간 빈집에서 정령처럼 보이는 의문의 여자 위니프레드를 만난다. 그녀는 가웨인에게 연못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건져와 달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탁을 한다. 그녀 목에 멀쩡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가 허상이라는 얘기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녀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가웨인은 물을 수밖에 없다. “아가씨, 당신은 사람인가요? 정령인가요?” 달리 표현하면,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위니프레드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출제하고 있는 것이다(로워리는 전작 <고스트 스토리>에서 초현실적 존재인 ‘고스트’의 가시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을 믿어 달라 하소연한 적 있다). 다행히 가웨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결정한다. 그는 위니프레드의 부탁대로 물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두개골을 건져 올린다. 시험에 통과한 가웨인은 그 보상으로 소년병에게 약탈당했던 녹색 기사의 도끼를 돌려받는다.
여정의 세 번째 시퀀스는 영화를 통틀어 가장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이다. 가웨인은 이 기이한 시퀀스에서 여우의 하울링을 따라하는 인간 형상의 거인족을 보게 된다. 이는 그간 거쳐 왔던, 문제가 주어지고 그 난관을 헤쳐나가는 식의 시험 유형과는 사뭇 다르다. 이때 눈길을 끄는 건 거인족을 따라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가웨인의 뒤에서 느닷없이 180도로 몸체를 돌려 상하를 반전시키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더 흥미로운 건 카메라가 상하를 완전히 뒤바꾼 다음 점차 전진해 나갈 때, 조금씩 희미해지던 거인족의 형상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화면이 180도 뒤집혔을 때 비로소 거인족이 지배하는 환상이 깨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카메라가 180도 회전하기 전의 화면은 온전한 환상인 것이다. 이와 연계하여 우리는 이 시퀀스의 도입부에서 가웨인이 환각의 버섯을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환각의 버섯은 앞선 두 시퀀스에서 소년병과 위니프레드처럼 일종의 출제자 역할을 한다. 시험지를 받아든 가웨인은 환각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검증받는다. 그러니 엉뚱하게 튀어나온 거인족들은 가웨인의 상상력이 빚어낸 환영이다.
공교롭게도 이 환영들은 영화의 어떤 존재보다 컴퓨터 그래픽의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때 방점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화면에 기입되면서 생기는 생경함에 있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로워리가 초월적 존재인 유령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하지 않은 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구현했을 때 생기는 간극, 말하자면 그로 인해 촉발되는 생경함이라는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워리에게 중요한 건 디지털 기술 자체, 혹은 아날로그 자체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이다. 정리하면 가웨인이 치르는 세 번째 시험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생경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역량 측정이다.
가웨인이 여정을 떠난 후 처음으로 마주한 대상은 기억 속의 여자 친구 에셀이다. 그는 에셀에게 받은 징표의 소리를 매개로 자신에게 청혼을 하는 그녀의 과거 모습과 대면한다. 그러나 가웨인은 수줍게 진심을 고백하는 그녀에게 어떠한 답도 건네지 못한다. 그런 그의 앞에 에셀과 똑같은 얼굴을 한 성주 부인이 나타나 매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이때 성주 부인과 에셀이 신분의 격차로 구별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주 부인의 역할은 명료해 보인다. 네 번째 여정에서 가웨인은 사랑의 윤리에 관한 시험을 치른다. 이 어려운 싸움에서 가웨인은 에셀이 준 징표를 두고 사랑의 징표가 아니라고 말한 뒤 이를 성주 부인에게 헌납한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와 불온한 성적 관계를 맺는다. 가웨인은 사랑의 윤리에 관한 한 완벽한 낙제다.
다만, 이 장면에서 더 중요한 것은 성적 욕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진다는 점이다. 가웨인이 성주 부인에 의해 욕정이 해소되는 과정은 성주 부인으로부터 녹색 허리띠를 선물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차고 있으면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고 영영 상처 입지 않는 녹색 허리띠는 죽음을 거스르려는 욕망이자 의지이다. 말하자면 현실은 욕망으로 팽창하지만 존재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세계이다. 이때 죽음은 성주에 의해 사냥된 짐승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이 이미지는 가웨인이 성을 떠나기 전날 밤 자신이 사냥감으로 표현된 그림을 보는 장면에서 강하게 대두된다. 그는 그와 유사한 그림을 전에도 본 적 있는데, 그때 사냥감으로 채택된 대상은 여우였다. 그렇다면 가웨인과 여우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걸까.
여우는 가웨인이 두려움에 잠식될 때, 예컨대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황막한 숲속을 지날 때나 연못에서 위니프레드의 두개골을 건져 올렸을 때, 그리고 동굴 안에서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을 때, 녹색 예배당을 목전에 두었을 때 불현듯 등장한다. 말하자면 여우는 가웨인이 녹색 예배당에 당도하기 전까지의 모든 여정에 동참하며 네 번의 개별 시험과 별개의, 혹은 그 모두를 관통하는 시험을 내는 출제자다. 이 시험의 핵심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가능성이다. 성안에서 여우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성주의 말대로 집은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가웨인이 성을 떠날 때, 성주가 그에게 여우를 선물하는 것은 그간 잡아두고 있던 그의 두려움을 다시 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필멸의 과정
마침내 녹색 기사 앞에 당도한 가웨인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한 가웨인은 녹색 기사가 휘두르는 도끼를 계속 피하면서, 그곳에서 도망쳐 집으로 귀환한 뒤의 미래를 상상 속에 그려본다. <그린 나이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집으로의 여정’ 몽타주 시퀀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간의 여정에서 끝내 체현하지 못한 덕목들, 예컨대 (전쟁 피해자에 대한) 연민, 사랑의 윤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부문에서 고스란히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을 벌이며 국민을 희생시키고, 여자 친구 에셀을 가혹하게 배반하며, 전쟁통에 끝까지 성안에 머물면서 홀로 쓸쓸히 죽는다. 그런 점에서 이 몽타주 시퀀스는 필수 덕목들을 놓친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었을 때의 끔찍한 결과를 상상 속에서 미리 상연해 보는 것이다. 잘못을 깨닫고 진실을 알게 된 현실만이 영화로 이행될 자격을 얻는다.
<그린 나이트>는 <고스트 스토리>와 다른 과정을 거쳐 동일한 결론을 도출하는 영화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응시와 시간성이라는 감각 기능을 탑재하며 영화 그 자체로 환유되던 고스트는 현실의 물질적 기반 위에 살아가는 아내 곁을 맴돌다가 그녀가 문설주 틈에 새겨 넣은 메시지(현실의 진실)를 발견하곤 돌연 소멸된다. 현실의 진실을 알게 된 영화는 그 순간 영화가 아니며 현실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녹색 기사가 끝내 가웨인을 참수하는 것은 영화의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닌 영화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 앞에서 무릎 꿇고, 현실은 영화 앞에서 무릎 꿇으며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인다. 어느 쪽이든 두 세계는 필멸의 과정을 거쳐 독자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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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날 우리 영화 후기 - 15년간의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속에서 얻은 첫사랑의 기억!
첫사랑을 기억하는 저우 샤오치는 수영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저우 샤오치에게는 과거에 특별한 사랑이 있었다. 바로 요우 용치라는 그녀에 대한 첫사랑이다. 고 3 시절에 저우 샤오치는 수영 선수이면서 싸움만 하고 다니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눈에 반한 전학생이 있었으니 요우 용치라는 여학생이었는데 저우 샤오치는 요우 용치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본다. 그러나 둘이 친해질 무렵 수영부 주장인 샤크와 샤크의 무리들이 딴지를 건다. 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샤크를 피해 요리조리 저우 샤오치는 요우 용치와 가깝게 지낸다. 하지만 요우 용치는 어머니와 함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인해 멀리 떠나버리게 되고 시간이 흘러 자우 샤오치는 요우 용치를 잊고 pc방 카운터 알바를 하게 된다. 그런데 자우 샤오치의 친구가 삼수를 하게 되면서 아이폰에 찍힌 대학 사진 속에 요우 용치가 대학생으로 있는 모습을 보게 되고 요우 용치를 만나기 위해 자우 샤오치는 재수를 하게 되어 대학 입학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는데... 과연 저우 샤오치와 요우 용치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둘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학생 때의 첫사랑은 정말 오래 갈 수 있을까?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랑도 깨질 수 있을까?
15년 뒤에 우리 모습은 무엇이 되어있을까?
저우 샤오치와 요우 용치는 학교 담장 너머에 있는 꼬치 구이 가게에서 꼬치 구이를 먹으면서 15년 뒤의 우리 모습은 어떨까라고 생각해본다. 저우 샤오치는 수영을 잘했지만 공부는 못했고 싸움만 하던 막무가내 학생이여서 미래가 불투명했고 요우 용치는 공부를 잘했고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게 꿈이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허나 요우 용치에게는 어머니와 자신에게 폭력을 쓰는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항상 달아나곤 했다. 그렇게 둘에게는 각자의 콤플렉스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만남은 운명이 정해놓은 끈인 것 같다. 이 둘은 학교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대학에서도 만나고 사회에서도 만난다. 마치 천생연분이라는 듯 말이다. 하지만 오래된 인연도 끝이란 게 존재하나 보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성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첫사랑에서 따뜻했던 연인과의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고 헤어짐에서 함께했던 연인과의 공유했던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만남과 헤어짐을 거쳐감으로써 더 큰 사랑으로 발전해 나가는 게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해 보고 싶다.
첫사랑의 기억은 영원한 듯싶으나 영원하지 않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한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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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8] 살인자와 몸이 바뀌었다구? 내 몸으로 살인을 하고 있어!
해피데스데이 1편과 2편의 감독이 새로운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프리키 데스데이라는 영화로 지난 영화들과 비슷하게 코믹호러에 드라마적인 요소도 가미가 되어 있는 영화에요. 전작들과 코드가 맞았던 분들은 관람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잔인하고, 적당히 웃겨서 너무 타협한 것이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들을만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적정 수준의 재미를 보장하고 있어요.
여주인공 릴리 역을 맡은 캐서린 뉴튼이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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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자단의 마지막 여정 엽문4 :더 파이널 [영화리뷰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4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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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토토리! 우리 둘만의 여름> 티저 예고편
아름다운 대자연으로 캠핑 여행을 떠난 ‘베가’와 ‘빌리’.
5살 나이에 딱 걸맞게 모든 게 신나기만 한 ‘빌리’와 달리,
9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베가’는
병원에 있는 엄마의 특명을 받아 아빠와 동생 챙기기에 바쁘다.
그런데 아뿔싸! 아빠가 강가 바위 틈으로 추락했다!
아빠를 구하기 위해 왔던 길을 거슬러 가보지만,
곧 드넓은 숲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모든걸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떠오른 엄마의 한마디.
“포기할 거야? 아니면 슈퍼히어로가 될 거야?”
내 안의 슈퍼파워를 깨우는 마법의 주문!
다 함께 외쳐봐! 토~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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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무도실무관> 공식 예고편
태권도, 검도, 유도 도합 9단 무도 유단자 '이정도'(김우빈)가 보호관찰관 '김선민'(김성균)의 제안으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전자발찌 대상자들을 24시간 밀착 감시하는 ‘무도실무관'으로 함께 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액션 영화 넷플릭스 영화 《무도실무관》 9월 13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