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집단 '텐 링즈'의 수장인 아버지 쑤웬우의 손에서 암살자로 자라난 쑤샹치. 그러나 끝내 암살자의 길을 벗어던지고 학창 시절 친구인 케이티와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던 샹치는 어느 날, 버스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곧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한다. 그렇게 자신과 함께 가려는 케이티와 함께 웬우를 만난 샹치는 가족의 비밀을 알아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벌이지는 일들을 다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5번째 작품이다. 일단 꽤나 재미있게 보았다. 괜한 반중 감정 때문에 저평가 받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운 수작이었다.
액션도 좋고 악역도 좋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당연하게도 액션이다. 개인적으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포함한 모든 마블 영화들 중에서 가장 좋았는데, 초반에 나오는 버스 액션신부터 시작해서 중반에 빌딩 액션신, 그리고 후반에 텐 링즈를 이용한 액션신까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특히 초반에 볼 수 있는 버스 액션신은 역대급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잘 뽑혔고, 기가 막히는 OST를 적재적소에 깔아놓은 덕분에 쭉쭉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 액션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텐 링즈라는 무기를 굉장히 임팩트 있게 연출한 것도 마음에 들었는데, 원작과는 달리 채찍과 비슷한 용도로 바뀐 것이 약간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화려하고 멋져서 눈 호강 하나만큼은 제대로 해준다. 그리고 양조위가 연기한 웬우라는 캐릭터는 마블 영화 역사상 최고의 악역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빌런이었다. 영화의 서사나 감정선이 샹치에게 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조위의 연기가 하드캐리를 한 덕분에 웬우의 이야기에도 굉장히 몰입을 하면서 볼 수 있었다.
훌륭히 그려낸 '아버지 살해 신화'
그리고 이야기 또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기본적으로 필자가 '샹치' 류의 스토리, 그러니까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루는 스토리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가 꽤나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기초이자 바탕이 되는 서사인 '아버지 살해 신화'를 단순히 답습하지 않고 뒤틀었다는 점에서 좋았는데, 주로 아버지 살해 신화는 자의적이나 운명적인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죽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전개이다. 그러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이 틀을 부수고, 샹치와 웬우의 갈등을 지극히 '복수'라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묶어놓았다는 점이 재미있다. 먼저 샹치는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가 필요했던 자신을 그저 암살자로만 키운 동시에 어머니의 고향까지 쓸어버리려는 급진적인 행동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고, 웬우는 빌런이 된 것부터가 아이언 갱에 의해 아내를 잃고 아내를 내친 고향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아내가 죽어갈 동안 방관만 하고 있던 자식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심이 이 영화 갈등의 중심이 된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대결을 단순한 선과 악으로 확실히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개인적인 복수심을 가지고 행동했고, 이들의 행동을 쉽게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입체감과 무게감이 늘어났다고 본다.
따뜻한 메시지
그리고 이 점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 또한 매우 좋았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주먹을 쥐고 상대의 눈을 마주 보기를 거부했던 사람이 주먹을 펴고 눈을 마주 보게 되는 과정을 마블식으로 뭉클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샹치와 웬우 모두 복수심에 눈에 멀어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는커녕 오히려 주먹을 쥐고 덤비기만 했지만, 그랬던 두 인물이 과거의 아픔(아내, 어머니의 사망)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고, 아들을 구한 뒤 손을 펼쳐 텐 링즈를 줌으로써 부자간의 갈등을 해소했다. 그리고 영화는 이 부분을 통해서 이 영화는 서로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서로'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마블 영화들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비극 스토리를 가장 따뜻하게 풀어낸 '착한 영화'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의미 있는 세대교체
거기다 웬우가 '어둠의 드웰러'한테 죽은 것도 마음에 들었는데, 이 어둠의 드웰러는 과거의 아픔으로 인해 피어난 분노를 상징한다고 본다.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하고 있고, 무차별적으로 온갖 영혼들을 앗아가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온갖 영혼들을 앗아갔다는 점이 웬우랑 꽤나 닮아있다. 웬우 역시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대며 영혼들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매번 과거의 아픔을 지니며 영혼을 빼앗아가던 웬우가 아내가 진짜 죽은 것이었다는 진실을 알아채게 되고, 그 뒤 자신의 눈을 막고 족쇄처럼 끌고 다녔던 과거의 분노 '드웰러'와 함께 다음 세대들에게 미래를 맡기며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드웰러가 수면 위에서 죽는 장면, 마지막 장례식 장면) 그리고 웬우가 과거에 짊어지고 다녔던 무기인 텐 링즈가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면서 이 영화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의미 있는 세대교체를 이루어낸다. 또 과거의 분노를 상징하는 어둠의 드웰러가 주먹이 아닌 주먹을 편 손에 의해 죽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
오리엔탈리즘 없음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이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동양인의 스테레오 타입은 한 번도 묘사가 되지 않으며 ('데스 딜러'에 대한 묘사가 지적이 되던데, 닌자 가면이 아닌 중국의 경극 화장 가면이다.), 심지어 동양인에 대한 편견도 강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영화 초반부에 샹치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애가 샹치에게 '헤이, 강남스타일!'이라고 하자 '나 한국인 아니야, 멍청아.'라는 말을 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거기다 영화 후반부에 볼 수 있는 다양한 동양 생명체들과 설정들, 동양 신화를 잘 담아낸 걸 보면 제작진들이 사전조사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구미호를 미국 영화에서 보게 될 줄은...) 다만 의외로 오리엔탈리즘 범벅이라는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의견은 존중할 수 있으나 도저히 동의는 못하겠다.^^;; 동양 신화를 다루면 그걸 다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머리라고 해서 다 전두환이 아니듯이, 동양 신화를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 혹평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플래시백
더불어 플래시백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지속적으로 나오는 플래시백이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필자는 첫 번째 볼 때는 플래시백의 문제를 잘 느끼지 못했는데, 두 번째 봤을 때서야 몰입감이 약간씩 뚝뚝 끊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플래시백을 마냥 비판만 할 수는 없는 게,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의 플래시백은 단순히 전개의 편의성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닌, 샹치의 심리를 묘사하는 장치 중 하나로 사용된다. 이 영화에서 샹치는 이야기가 진행이 되면 될수록 어렸을 적의 기억들을 하나하나씩 되찾아간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걸 반영하여 중간중간 플래시백을 넣어 작품 자체가 샹치의 머릿속을 담은 것마냥 과거 스토리와 현재 스토리를 교차편집하며 진행된다.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철저히 개인에 몫이지만, 필자는 현재의 의문을 과거로 답해주는 형식 같기도 해서 꽤나 마음에 들었다.
부족한 개연성, 지루한 중반부
이렇게 액션, 비주얼, 이야기, 메시지 전부 다 좋았는데, 아쉬운 부분도 당연히 있었다. 일단 첫 번째로 개연성의 부족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텐 링즈라는 조직은 대체 어떻게 해서 비밀은 지켜왔는지 모르겠다. 무려 샹치의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반인인 케이티를 비밀조직인 텐 링즈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훤히 보여준다던가, 얼굴 없는 생명체인 '모리스'는 대체 어떻게 해서 지하 감옥까지 오게 된 건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모리스가 사는 '탈로'에서부터 지하 감옥까지 거리가 엄청나게 멀다.), 동물인 모리스와 인간인 트레버는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지, 텐 링즈는 또 어디서 난 건지를 영화가 제대로 설명을 해주질 않는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엄연히 영화의 부재가 '텐 링즈의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속편을 위해서 기원조차 다루지 않았다는 게 참 별로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야기의 템포가 느려지는 탓에 지루해지는 중반부다. 초반만 하더라도 영화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덕분에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완전히 몰입한 채로 봤는데, 주인공 일행이 텐 링즈로 가는 순간부터 이야기의 템포가 지나칠 정도로 느려지는 게 작품에게 큰 독이 되고 말았다. 물론 샹치의 내적 갈등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 지루해졌다는 점에서 뼈아픈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전형적으로 변한 마블 서사 구조
그리고, 어쩌면 요즘에 나오는 모든 마블 영화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점인데, 바로 영웅 서사의 구조가 다른 마블 영화들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주인공의 평범한 삶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다가, 중반쯤에 가서는 사건이 터지며 오로지 주인공만이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 + 내적 갈등이 나오고, 후반에 가서는 히어로가 각성하여 액션 한 방 터트려준 다음 해피엔딩으로 가는 구조가 이제는 너무나 지겨워졌다. 물론 누군가는 히어로 영화라면 이러한 구조는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불과 2018년에 이 구조를 탈피해낸 영화가 마블에서 나왔다. 바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인데, 25편이나 되는 시리즈에서 일반적인 틀을 깬 영화가 겨우 1편이라는 점이 참 아쉬울 따름이다. (다만 '인피니티 워'는 애초에 '엔드게임'을 위한 전편이기 때문에 배드 엔딩으로 가는 건 당연한 것이기는 했다.^^;;) 그리고 DC나 폭스로까지 나아가면 [다크 나이트]도 있고 [로건]도 있다. 거기다 심지어 [아쿠아맨]도 주인공을 시작부터 사기캐로 만들면서 이러한 서사 구조를 약간씩이나마 비틀었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도 돋보이는 면은 있다. 샹치라는 캐릭터의 능력치를 처음부터 최대치로 찍어놓은 덕분에 마블 1편에서 보기 힘든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초반부터 버스에서 무쌍을 찍는다거나, 3편에나 가서야 활용할법한 용이 나오는 등) 그러나 [아쿠아맨]을 통해서 이미 한번 본 탓에 큰 신선함은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참 아쉽다. 부디 이번에 나올 [이터널스]가 이러한 구조를 깨는 또 하나의 마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결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고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반중 감정 때문에 저평가 받고 있는 게 참 아쉽지만, 간만에 제대로 나온 마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블 단독 영화를 보고 만족한 적은 2018년 이후로 처음이라 개인적으로 더더욱 애정이 가고 기특해 보이는 작품이다.^^
평점: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