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로진2021-09-30 15:31:09
너무 아름다운 꿈일지라도
<바닐라 스카이>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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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다 깨어나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하고 생각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하는데, 지금 내 삶도 누군가의 꿈 속이 아닐까 싶은 거다. 내가 꿈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을 만들어내듯이.
어떤 삶은 자신의 의지대로 굴러가는 게 하나도 없다. 타인의 취향, 타인의 선택, 타인의 눈치. 온통 타인에게 기준을 맞추어 살아가야 할 때도 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았을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껍데기를 둘러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은 현실일까, 꿈일까. 자각이 없는 삶, 스스로가 이끌어가지 않는 삶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차라리 아름다운 꿈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매트릭스>에서처럼 모피어스가 빨간약, 파란약을 건넸을 때, 무엇을 택할 것인가. 그냥 아름다운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직시할 것인가.
<바닐라 스카이>는 어떤 면에서 <매트릭스>와 맥을 같이한다.
물론 <매트릭스> 세계관이 훨씬 복잡하고, 인류가 기계와의 싸움에서 지는 바람에 인류가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르다.
뉴욕 출판계 거물의 아들 데이빗은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산다. 잘생긴 외모에, 아버지가 남긴 부에,
남들이 '드림 걸'이라고 부르는 여자가 그의 캐주얼한 섹스파트너이기까지.
매일 아침 '일어나(Wake up)'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다.
데이빗의 생일파티에 수많은 인사들이 찾아와 데이빗의 생일을 축하한다.
그리고 바로 그날, 친구 브라이언이 데리고 온 여자 소피아에게 첫눈에 반한다.
선물을 위층 침실에 옮겨놓던 데이빗은 침대 위에서 누가 벗어놓은 빨간 드레스 하나를 집어드는데, 그 순간 파트너인 줄리가 알몸으로 나타난다.
데이빗은 줄리에게 '파티는 초대받은 사람만 오는 곳'이라고 말한다. 줄리를 초대한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안 했다.
남들에게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은 것. 말하자면 줄리는 데이빗의 치부 같은 거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볼까. 좋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옆에 두면서, 줄리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면서 즐길 것만 즐기는.
줄리와의 관계가 꽤 오래되었고 줄리가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도 정말 '캐주얼한' 관계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다면, 데이빗의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줄리는 드레스를 갈아입고 파티장으로 내려간다. 데이빗은 소피아에게 접근해서는, 줄리를 스토커라고 말한다. 도와달라고, 연기해달라고.
그렇게 데이빗은 소피아를 집까지 데려다 주게 되는데, 소피아의 집에서 다큐멘터리를 하나 본다.
냉동되었던 강아지가 해동되면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는 비법이라도 되는 것만 같다.
소피아는 그 다큐멘터리를 자주 본다고 한다. 둘은 서로 그림도 그려주고, 분위기가 좋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처럼.
밤을 꼬박 새고도 가뿐하게 출근길에 나선 데이빗 앞에 낯익은 차가 한 대 선다. 줄리의 차. 데이빗을 미행한 거다.
데이빗은 줄리의 차를 타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데이빗에게 배신감을 느낀 줄리는 자기의 행복은 데이빗과 같이 있는 거라며 울부짖다가 액셀을 밟는다. 그대로 줄리의 차는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줄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쳤지만 데이빗의 얼굴은 회복되지 않는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고쳐보라고 해도, 아직 현대의학기술이 망가진 얼굴을 완벽하게 이전으로 복구시키지는 못한다(인과응보일까?).
시련에 빠져 숨어 지내던 데이빗은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소피아에게 찾아가고, 그날 저녁 바에서 소피아와 만나기로 한다.
아직 맨얼굴은 부끄럽고 병원에서 준 가면을 쓴 채로 나간다.
바에 가 보니 어쩐지 소피아와 브라이언이 가까워진 것 같고, 질투심에 눈이 멀어버린 데이빗은 데낄라를 연거푸 마시고 취한 채로 소피아의 집 근처에서 잠든다.
눈을 뜨니 소피아가 있고, 소피아의 지극한 사랑으로 얼굴이 원상태로 돌아오고, 너무 행복한 날을 보내는 데이빗.
하지만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소피아가 아닌 줄리가 옆에 있다.
줄리는 자꾸만 자기가 소피아라고 하는데, 줄리가 죽은 게 아니라 소피아와 바꿔치기 했다는 망상에 빠진 데이빗은 줄리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다 경찰에 붙잡히게 되고, 멕케이브에게 정신과 감정을 받기 시작한다.
여기에서부터는 지난한 과정이다. 술집에서 한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남자는 데이빗에게 '당신은 이 세계의 신'이라고 말한다. 그 남자의 말처럼, 데이빗이 생각하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다.
어느 날, 소피아가 보던 다큐멘터리에서 회사명을 보고 멕케이브와 함께 그 회사로 간다.
자,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진다.
데이빗은 사후 냉동보관을 했고, 지금 이 모든 게 자각몽이라는 것.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거다.
바에서 나와 소피아의 집 앞에 쓰러져있었던 그날부터 소피아와의 사랑도, 얼굴이 말끔히 고쳐지는 기적도, 맥케이브와의 상담도 다 꿈이다.
데이빗의 소망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몰랐다면 그 세계의 신이 되어 영원한 젊음을 누리며 살아갔겠지만 다 꿈이라는 걸 알게 된 데이빗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한다.
덮어두고 자신의 피조물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인가, 150년이 지나버려 돈도 없고 사랑하는 소피아도 친구도 없는 세계에 홀로 던져질 것인가.
<매트릭스>의 네오는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빨간약을 먹었다. 데이빗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는 질문한다.
진짜 세상이 아닌 환상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살 것인지, 무자비한 현실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지. 너무 아름다운 꿈일지라도 꿈은 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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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 <바닐라 스카이>는 모네의 그림에서 따왔다.
데이빗의 생일파티날, 그의 어머니가 구매했다는 모네의 <바닐라 스카이>를 잠시 언급한다.
그리고 데이빗이 깨어나기를 결심했을 때, 그의 뒤로 바닐라 스카이가 펼쳐진다. 환상과 이별하는 순간이다.
너무 아름다운 꿈일지라도 깨어나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바닐라 스카이>는 실존주의적이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의 남자주인공 시어도어 핀치가 '깨어있기'를 새기며 살아갔던 것처럼.
삶은 허무하고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모두가 내 마음 같지도 않다.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인지, 남의 기분이 내 기분인지 분간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회피하고 냉동실에 들어갈 게 아니라, 지독하고 아플 만큼 생생하게 깨어있음으로써 이토록 공허한 삶을 채워가야 할 뿐이다.
+ <바닐라 스카이>는 왓챠에서 볼 수 있다.
+ 톰 크루즈의 20년 전 미모를 감상할 수 있는 영화. 멜로 눈빛의 정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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