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6-26 18:59:10
엘리오 | 픽사라서 평가절하될 우주 탐험기
<엘리오>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모두 사고로 잃고 고모 '올가'(조 샐다나)에게 맡겨진 소년 '엘리오'(요나스 키브레브). 고모에게서도, 학교에서도, 잠깐 맡겨진 캠프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엘리오는 차라리 외계인이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바라기 시작한다.
어느 날, 사고를 친 후 올가 사무실에서 고모를 기다리던 엘리오는 우연히 외계인과 연락이 닿는다. 보이저호에 실린 황금 접시를 본 외계인들이 지구로 보낸 통신이 올가가 근무하는 공군 기지에 도착한 것. 이에 엘리오는 지구 대표를 자칭하며 외계인들의 모임인 '커뮤니버스'로 소환된다. 엘리오는 마음을 나눌 친구 '글로든'(레미 에드걸리)을 만나 꿈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이내 그의 앞에는 우주를 위험에 빠뜨릴 위기가 닥친다.
‘픽사다움'의 두 얼굴
"픽사답다" 혹은 "픽사가 픽사했다." 지난 30여 년간 픽사가 제작한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평가할 때 통용된 대표적인 찬사다. 애니메이션 영화인데도 유별나게 성인 관객을 울리는 데 특화된 픽사 고유의 미덕을 담아낸 표현이기도 하다. 픽사의 첫 장편 영화인 <토이 스토리>부터 가장 최근의 10억 달러 돌파 작품인 <인사이드 아웃 2>에 이르기까지 '픽사다움'은 순간순간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유지됐다.
'픽사다움'에는 몇 가지 원동력이 있다. 사소한 일상에서 대부분의 아이가 보편적으로 느끼고 겪는 감정과 경험을 발견하는 관찰력. 누구나 한 번쯤은 머릿속으로 그려봤을 법한 그림과 보편적인 경험을 하나로 엮는 상상력. 익숙한 감정을 시류에 맞는 현대적인 소재와 관점으로 풀어내면 창의력. 이 모든 것을 스크린 위의 현실로 불러올 수 있는 기술력. '픽사다움'은 이 역량들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픽사의 진가는 <인사이드 아웃>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라일리'의 이야기는 사춘기를 겪었거나 겪을 모든 관객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을 가득하다. 이 보편적인 이야기는 의인화된 감정들이 일하는 감정 본부라는 상상력 덕분에 독특해진다. 더 나아가 감정 본부의 존재는 현대적 관념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영혼, 자아, 감정마저도 뇌 화학물질의 작용일 뿐이라는 생리학적 관점이 감정 본부라는 설정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픽사답다'라는 표현이 마냥 칭찬이 아니기도 하다. 픽사 특유의 스토리텔링이 반복되고 정형화되다 보니 이야기 자체의 독창성이 줄어들었기 때문. 이는 <엘리멘탈> 같은 영화가 여전히 참신한 소재와 뛰어난 영상미로 무장을 해도 과거에 비해 인상적이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다. <엘리오>도 마찬가지다. 우주와 외계인을 매개로 삼아 현대인의 소속감을 성찰한 픽사의 신작은 어떤 의미로든 너무나 픽사답다.
픽사다운 장점
<엘리오>에서도 픽사만의 감각은 빛난다. 우선 소재의 장점만 영리하게 활용할 줄 안다. 우주와 외계인은 사실 아이들이 공룡 못지않게 관심을 두는 주제다. 그러다 보니 우주 배경으로 외계인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E.T.> 아류작처럼 보일 수 있다. <엘리오>는 보이저호를 등장시켜 이 함정을 피해 간다. 우주탐사선에 실린 '골든 디스크'를 발견한 외계인이 지구와 인류에 답장을 보냈다는 상상력을 발휘해 차별점을 확보한다.
무엇보다도 픽사의 유기적인 스토리텔링이 돋보인다. <엘리오>는 네 주인공의 서사를 '소속감의 부재'라는 한 키워드로 묶는다. 그들은 각기 속하고 싶은 공동체가 있지만 소망을 이루지 못해 부유 중이다. 엘리오와 올가는 가족을 되찾고 싶어 한다. 두 외계인 캐릭터의 처지도 유사하다. 하이러그 종족의 군주인 '그라이곤'(브래드 가렛)은 커뮤니버스와 아들 글로든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고, 글로든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과 노력은 묘하게 엇갈린다. 올가는 엘리오와 새롭게 가족을 꾸리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역효과만 난다. 공군 소령인 고모가 본인을 돌보느라 우주비행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 나머지 자신을 장애물로 여긴다고 느낀 엘리오는 오히려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기 때문. 대신 엘리오는 어려서부터 소망이었던 외계인들에게서 인정받고자 하고, 커뮤니버스의 일원이 되기 위해 그라이곤과의 교섭에 자원하기까지 한다.
커뮤니버스에 가입하려는 엘리오의 노력도 역효과를 낸다. 엘리오는 협상에 실패한 뒤 투옥됐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글로든을 만난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강인한 전사가 되지 못한 글로든은 보호자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그들은 서로에게 공감하며 절친이 된다. 그러나 이 우정은 도리어 상황을 악화한다. 엘리오가 글로든을 인질 삼아 떠난 나머지 그라이곤은 아들과도, 커뮤니버스와도 관계를 개선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픽사다운 감동
<엘리오>는 엇갈린 화살들의 경로를 조정해 왕도적이지만, 감동적인 결말에 도착한다. 그 중심에는 '가족의 재발견'이 있다. 상황을 꼬이게 만든 엘리오와 글로든의 우정은 사실 낯선 일이 아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혼자인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을 맞이한 아이들이 가족보다 친구들에게서 위안을 찾는 경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이 다시 가족을 찾는 일도 자연스럽다. 부모에게 환영이나 사랑받지 않는다고 느꼈던 아이들은 어른들의 진심을 확인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돌아오곤 하니까. 이러한 감정선의 변화는 극 중 복제 진흙을 통해 드러난다. 엘리오와 글로든 자기랑 똑같이 생긴 복제품을 고모와 아버지에게 보내서 그들을 완전히 속이고, 가족의 품을 떠나려 한다.
하지만 정작 올가와 그라이곤은 진실을 재빨리 눈치챈다. 아이를 키우는 게 처음이라서 힘들고, 육아는 처음인 상황을 이해해 주지 않는 아이들에게 서운하면서도, 처음이기에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잘 알고 사랑하기에 그들은 엘리오와 글로든의 속임수에 당하지 않는다. 친구를 만들러 아이들이 떠나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는 보호자들의 노력과 사랑 덕분에 두 아이는 오해를 풀고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온다.
위와 같은 감정 변화를 11살 엘리오의 선택과 결정의 동기로 제시하면서 <엘리오>는 몰입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성인 관객으로서는 과거 경험을 떠올리며 후회할 수도 있고, 현재 자기 가족 상황에 투영하면서 더 깊이 공감할 수 있기에 두 배로 감동적일 수 있다. 이에 더해 이른바 '정상 가족'이 아닌 주인공 덕분에 더 많은 관객의 감정이입도 유도할 수 있다. '픽사가 픽사했다'라는 표현이 안 나올 수 없는 이유다.
지금 '소속감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이유
엘리오와 주인공들이 겪는 소속감의 부재가 단순히 우정과 가족애의 차원에 머무르는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기에 <엘리오>는 더 인상적이다.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한 엘리오의 고독은 겉보기에는 그저 한 어린아이의 아픔이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한 꺼풀 벗겨보면 본래 소속된 공동체가 사라진 가운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지 못한 채 현대사회를 부유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지적했다. 자기 자신을 취업 시장, 결혼 시장 등에서 성공적으로 팔려고 노력하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게 최우선 목표가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본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킨 나머지 개인은 가족이나 이웃 같은 기존의 공동체와 멀어지고 하나의 원자, 곧 '고립자'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개개인은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회적 존재니까. 그 결과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이지만, 그만큼 외로워한다. 무한한 네트워크 수단을 동원해 수많은 사람과 교류하지만, 그 누구와도 진정으로 깊이 대화하고 관계 맺기 어려워한다. 피상적인 관계가 반복될수록 허무함과 고독만 깊어질 따름이다.
그렇기에 <엘리오>의 이야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 설령 익숙할지라도 간과하고 있었던 가치들을 일깨워주기 때문. 현대인들처럼 무한한 공간에서 소속감을 찾으려 애썼고, 친구도 만들면서 나름 성공적인 결실도 거둔 엘리오조차도 결국에는 고모와 지구로부터 보금자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따뜻한 위로이자 가능성을 일깨우는 격려일 수 있는 이유다.
픽사다운 이상 혹은 순진함
그런데 현대적 맥락 안에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준 <엘리오>의 메시지와 메타포는 의외의 부메랑이기도 하다. 커뮤니버스라는 설정의 정치적 맥락을 곱씹다 보면 <엘리오>가 변화를 반영하지 못 하거나 안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극 중 커뮤니버스는 우주 버전 유엔이나 다름없다. 두 단체 모두 각 행성/국가나 종족/민족의 대표가 모여 평화를 추구하고, 분쟁과 갈등을 대화와 토론으로 해소하려고 노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커뮤니버스와 유엔은 민주주의 제도와 자유주의적 가치에 기반하면 범국가/행성적 협력이 가능하다는 믿음 위에 존재하는 셈이다. 하이러그 종족처럼 일견 폭력적인 상대와도 대화로써 공통점을 찾으면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엘리오와 글로든의 우정, 올가와 그라이곤의 공통점이 우주적 갈등을 해소하듯이. 이는 냉전 이후 세계화라는 명목하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세계 각국에 전파한 미국의 국제 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엘리오>의 설정은 최근 변화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미국의 협조로 WTO 가입했던 중국이 도리어 미국과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고, 동유럽과 중동에서 다시 분쟁이 격화되는 등 자유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다시금 신냉전 구도로 전화되는 추세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주판 유엔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역설하는 스토리텔링은 좋게 말하면 이상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이브해 보인다.
물론 혹자는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이니 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픽사'라는 이름값을 생각했을 때 조금만 더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을 떨치기는 어렵다. 현대인의 존재론적 문제에 관한 고찰과 국제 정치적 맥락을 다루는 사유의 층위가 균형을 못 이룬 나머지 평면적이고 유치한 인상이 유독 진하기 때문이다.
기시감의 연속과 반복된 문제
이에 더해 볼거리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상상 속에만 존재한 광경을 손에 잡힐 것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한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엘리오>의 세계관은 어디서 본 듯하다. 주된 배경인 커뮤니버스만 보더라도 곡선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지고, 외계 종족이 모인 환상적인 공간이라는 점 외에는 특색이 보이지 않는다. 네 원소의 특징을 도시 설계에 녹여낸 <엘리멘탈> 속 엘리멘탈 시티에 비하면 시선을 끄는 힘이 현저히 부족하다.
<소울> 속 '태어나기 전 세상'과 비교하면 추상적이기도 하다. 사실 두 공간은 '일상에서 깨닫지 못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라는 역할을 공유한다. 그런데 <소울>이 '태어나기 전 세상'의 여러 구역, 영혼을 교육하는 공간, 모든 것의 전당, 사적 공간, 어둠의 구역 등을 스토리텔링에 활용했지만, <엘리오>는 커뮤니버스를 소개하는 데서 그친다. 그 결과 <엘리오>는 <소울>의 발상과 구성을 단순히 답습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캐릭터 활용법도 아쉽다. 픽사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일례로 <토이 스토리>는 분량과 비중에 무관하게 수많은 장난감의 개성을 명확히 각인시켰다. 그에 반해 최근 픽사 작품은 일부 캐릭터만 활용한다. <엘리멘탈>만 해도 물과 불 캐릭터에만 집중했다. <엘리오>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외계인 캐릭터 중 글로든을 외에 뚜렷한 활약을 보여준 인물을 떠올리기 어렵다.
종합하면 <엘리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배부른 불평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절대적인 완성도 자체는 여전히 준수하고,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흐를 정도로 기본적인 재미는 갖춘 영화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작들이 쌓아 올린 '픽사답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엘리오>가 보여준 이상, 평가절하는 감내해야 할 숙명이 아닐까 싶다.
Acceptable 무난함
픽사라서 사랑스럽고, 픽사라서 아쉽고, 픽사라서 감내해야 할 평가절하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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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 설계도
8★/10★
전쟁 중인 유럽을 탈출해 미국에 도착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가 한 성매매 업소에서 남성 성노동자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난 그런 쪽 아니야’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장면은 그가 훗날 마주할 해리슨의 끔찍한 성폭력을 예감하는 것이 아닐까. ‘이쪽’과 ‘저쪽’의 구획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선언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해리슨에게 강제로 자리를 부여받는 라즐로가 느낄 비감이 도입부의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느꼈다.
재능 있는 유대인 건축가가 이주 후 미국 하층부를 전전하다 한 거부의 눈에 들어 대형 프로젝트를 맡은 후 종내에는 영광을 얻는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우리가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본 이방인의 성공 스토리와는 결이 다르다. 노인이 되어 휠체어에 탄 채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전시에 참석한 그의 얼굴은 피로해 보인다. 라즐로 부부를 떠나 이스라엘로 향한 조카 조미아가 정작 라즐로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삼촌의 업적을 설명하는 대목은 그의 피로감에 공허함을 더한다.
‘성공한 유대인’이 있는 것은 맞다. 그들의 성취는 종종 아메리칸드림의 증거로 전시된다. 그러나 그 성공은 아름답지 않았다. 지적 허영과 과시욕, 속물적 근성의 화신, 즉 가장 미국적인 인물인 해리슨은 라즐로를 자신의 자랑스러운 수집품 정도로 대우하고, 라즐로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술 취한 그를 강간한다. 그는 라즐로에게 “넌 그저 밤거리 매춘부야”라고 말한다. ‘선’을 넘지 말라는 선언이다. 라즐로 프로젝트의 철학과 예산이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자 미국 사회의 주인은 돈이며, 그 돈을 가진 사람은 나라는 점, 즉 자신은 성 구매자이며 너는 성 판매자라는 점을 라즐로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방법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라즐로는 그 충격에 휩싸여 더욱 자신의 예술적 목표(혹은 해리슨의 야망)인 건축물에만 집착하고 자신이 쌓아 올린 건축물에 유폐된 듯 영혼을 강탈당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라즐로는 걸작을 창안했으나 영혼을 상실했고, 미국식 속물주의를 대변하는 해리슨은 사건이 폭로된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며, 늙고 지친 라즐로를 기념하는 행사에서는 과거 그를 떠난 조카가 확신에 찬 얼굴로 숙부의 업적을 칭송한다.
이 영화가 아메리칸드림의 오욕에 관한 문제 제기라는 인상을 받은 건 그래서다. 이 세 사람이 이루는 구도에서는 누구도 온전한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일 수 없다.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으로 예술에 대한 심미안 없이 뭐든 돈으로만 하려는 해리슨도, ‘걸작’을 만들었으나 생기를 잃어버린 라즐로도, 홀연히 등장해 숙부의 성취‘만’ 이야기하며 뒤늦게 자신이 라즐로의 혈육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조미아도.
영화가 한창 건축이 진행 중일 때 고통받던 라즐로를 비추다가 갑자기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노쇠한 라즐로의 얼굴로 점프하는 것은 아메리칸드림에 영광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설계의 일환일 것이다. 사람들은 완성된 건축물만 본다. 그 이면의 설계도를 상상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로 ‘라즐로의 아메리칸드림’에서 완성물이라 할 그의 건축물과 그로부터 피어나는 영광의 순간들을 뺀 채 그 영광의 설계도만 보여준다. 누군가의 장식품으로서만 예술가일 수 있었던 이방인, 그런 이방인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구축되지 않았을 미국이라는 허상, 설계 과정의 문제는 덮고 결과물만 바라보며 찬사를 보내는 사회가 이방인의 아메리칸드림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brutal) 설계도 말이다. 라즐로가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추구하는 브루탈리스트였다는 점은 이 설계도가 품은 역설을 더한층 도드라지게 한다. ‘사람은 죽어도 예술은 남는다’는 통념 혹은 진실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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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리아〉, 새로운 감각과 연결감으로의 초대
7★/10★
‘쿵’. 침대에 누워 있던 제시카가 잠에서 깬다. 별다를 것 없는 일이다. 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제시카는 자꾸 이 ‘쿵’ 소리가 신경 쓰인다. 그래서일까? ‘쿵’ 소리가 점점 더 자주 들려오는 것은.
문제는 이 소리가 제시카에게만 들린다는 점이다. 때문에 제시카는 이전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소리의 정체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음향 전문가에게 가서 자신이 들은 소리를 정확히 재현하고자 하고, 병원에 가서 의사와 상담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리의 정체는 여전히 미궁에 있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 제시카의 여정은 그녀가 숲에서 에르난이라는 남자를 만나며 변곡점을 맞는다. 에르난은 모든 걸 기억하는 남자다. 그의 기억은 길가의 돌에 남은 ‘진동’(소리는 파동이다)으로 그 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하고 세심하다. 에르난의 방식에서 제시카는 자기 머릿속의 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단서를 획득한다. 에르난이 돌의 진동으로 또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연결되듯, 제시카 머릿속의 ‘쿵’ 소리도 그와 또 다른 누군가를 이어주는 소리, 즉 서로 떨어져 있는 존재들의 독특한 연결일 수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메모리아〉는 ‘쿵’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다만 그 소리가 ‘교감’의 한 방편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나아가 그 소리가 콜롬비아의 슬픈 역사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음을 또다시 암시한다. 한 인터뷰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콜롬비아는 오랫동안 내전과 마약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영화를 찍기 몇 해 전 (정부와 반군 간)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여전히 누가, 어떻게 그간의 수많은 죽음을 책임질 것인지 등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억압과 폭력,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고,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 그게 이 나라의 역사였다.”*
즉 제시카가 끝내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그 근원을 궁금해하는 ‘쿵’ 소리는, 마찬가지로 그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콜롬비아인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감각적’ 표현이다. 수면 도중 머릿속에서 폭발음이 들리는 ‘폭발성머리증후군’을 앓은 감독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제시카 캐릭터를 떠올리고, “내가 겪은 이 증상이 콜롬비아가 지닌 기억에 대한 일종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인터뷰 역시 이를 방증한다.
요컨대 〈메모리아〉는 소리라는 감각으로 우리의 집단적 연결감을 확장하고자 하는 영화다. 영화가 명쾌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작고 미세한 감각으로 열리는 집단적 연결감은 결코 분명한 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 언제나 미지의 가능성의 형태로, 즉 늘 새로운 열림과 확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메모리아〉가 소리라는 감각에서 출발하는 영화임에도 OST가 없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다소 긴 러닝타임(136분)의 이 영화는 지극히 느린 템포로 소리의 근원을 찾는 제시카의 여정(그리고 일상)을 좇는다. 영화의 시퀀스는 인과적‧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편집되지 않은(혹은 편집을 최소화한) 일상의 잔잔한 리듬은 역설적으로 ‘감각으로 연결되는 우리’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더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기존 영화가 제공하는 자극적‧정합적 감각으로 인해 닫혀 있던 섬세한 감각을 조심스레 일깨워 관객을 제시카의 여정에 동참케 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감독의 인터뷰를 인용해보자.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 질문하지 말고, 그저 영화와 함께 존재해주세요. 그러면 시간여행을 하는 우주선에 탄 듯,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메모리아〉는 기존 영화가 제공하던 시공간에서 벗어나 미세하지만 사라질 수 없는 새로운 감각‧연결감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는 영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0414#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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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생긴 상처는 관리대상일 뿐 없앨 순 없다
팬지는 말 그대로 '쌈닭'이다. 모든 인간에게 시비를 걸고 모든 인간과 싸운다.
가족이고 뭐고 지나가는 행인이든 그녀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것을 넘어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집착적으로 깨끗함에 목을 매고, 좋은 의도로 다가오는 사람조차 공격으로 여기며 모든 사람들에게 이를 갈며 덤빈다.
그녀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언정 그렇게 보인다.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그녀의 눈치를 본다. 그녀의 동생도 그녀를 버거워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그녀를 무서워하는 것 같다.
그 정도 되면 그녀와 대판 싸울 법도 한데, 그들은 그녀와 대놓고 싸우진 않는다.
그저 그녀가 선사하는 알싸한 욕을 그대로 듣기만 한다. 어떠한 공격적인 의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그녀가 그렇게 공격적인지는 영화가 자세하게 말해주진 않지만 유년 시절에 그녀에게 어른들이 무심함을 넘어 무관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무관심은 그녀로 하여금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표현하지 못한 울분은 화가 되어 그녀의 삶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집착적인 완벽주의와 그 완벽주의를 남에게 요구하는 모습은 일종의 화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녀도 자신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갈피를 못 잡던 그 때, 그런 그녀를 변화시키는 건 놀랍게도 간단했다.
그녀를 변화시킨 건 동생의 진심어린 걱정과 사과였고, 그 사과를 듣자마자 그녀는 다시 10대의 소심하고 어른들 눈치보던 모습으로 돌아간다.
동생은 몰랐던 언니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면서도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모두 느낀다.
하지만 팬지의 아들이 선물한 꽃을 받고 고맙다고 하면서 펑펑 우는 팬지를 보고 있자니 앞서 모든 사람들에게 욕을 하던 팬지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면서도
그녀가 새삼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아, 뭔가 해소되지 못했던 거구나, 사랑받고 싶었던 거구나, 사랑받지 못해서 엇나갔던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생각보다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는 것은 어리숙해도 진심이 담긴 말과 마음이 담긴 조그마한 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는데
어떤 사유로 남편과 사이가 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은 표면적으로 어떤 사과의 제스처를 취하진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더이상 아들을 들들 볶진 않았지만 남편은 더 미워하는 것 같았다.
한바탕 울고 난 후, 팬지가 평온해졌다고 생각한 남편은 팬지의 분노의 방향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끼곤 그녀의 우울이 그에게 전이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장면이 계속 맴돈다. 이 커플의 결론은 남남이 되는 것일지 어떨지.
정말 팬지의 분노의 방향이 남편에게 향하게 된 데에는 어떤 내막이 숨겨져 있는 걸까. 영화를 보고 나온 지금도 사실 계속 그게 궁금하다.
팬지를 보면서 느낀다.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영원히 마음의 낙인으로 남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한다.
같은 상처를 가졌어도 팬지의 동생은 긍정적으로 살지만 팬지는 그러지 못한다. 상처를 대한 자세가 달랐던 것이다.
팬지를 보면서 다소 안타까웠던 것이 어떻게든 울부짖고 표출했어야했는데 그녀는 쌓아둔 것 같다. 그것이 속병이 되어 세상에 등돌린 것 같다. 보통 무례한 사람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세상이 자신을 등돌렸다고 하던 경우를 종종 보는데 그녀도 비슷한 게 아닐까.
참고로 팬지의 욕을 창의적으로 번역하신 번역가님 대단하신 듯하다. 깔쌈한 욕 번역이영화가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되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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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딩턴_페루에가다
8년 만에 돌아온 《패딩턴_페루에 가다》를 뒤늦게 봤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피난하는 어린이를 지켜본 영국 작가 마이클 본드가 창조한 곰 이야기〈패딩턴〉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제작했던 헤이데이 필름에 의해 2014년 1편이 공개되고, 2017년 2편은 역대급 호평을 들으며 007시리즈를 이를 새로운 영국산 프랜차이즈로 자리매김했다.
프로듀서 로지 앨리슨는 존 루이스 백화점 크리스마스 광고로 유명한 CF/뮤직비디오 감독 출신 두걸 윌슨에게 연출을, 그리고 〈숀 더 쉽〉의 마크 버튼에게 각본을 맡겼다. 초반부부터 CF처럼 상큼하게 시작한다. 영국 시민이 된 패딩턴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방인의 포용, 통합을 강조한다. 패딩턴의 숙모 루시가 머물고 있는 은퇴한 곰을 위한 요양원의 수녀원장(올리비아 콜먼)이 보낸 편지로 인해 그녀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된다. 딸은 대학입시에 바쁘고, 아들은 게임에 푹 빠져 있어 외로운 메리 브라운(에밀리 모티어)는 페루로의 여행이 가족이 모두 함께 모일 수 있다며 환영한다. 한편 신중한 헨리 브라운(휴 보네빌)은 새로운 상사의 조언에 따라 위험에 감수한다. 브라운 부부의 동의하에 패딩턴(벤 위쇼)은 루시 숙모를 찾기 위해 열대우림의 정글에 도전한다.
〈인디아나 존스〉식의 어드벤처와 가족 코미디 영화 그 중간 지점에서 헤매던 영화를 살린 것은 두 가지 덕택이다. 첫 번째는 페루와 콜롬비아에서 촬영된 풍광을 CGI로 보정했지만,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는 해방감을 안긴다. 둘째는 연기다. 예를 들어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엘도라도에 목숨 건 조상의 혼령에 시달리는 선장을 연기하고, 올리비아 콜먼이 〈사운드 오브 뮤직〉의 줄리 앤드루스를 패러디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이야기가 영국을 벗어나면서 브렉시트 이후의 난민 문제로 생긴 반이민정서를 꼬집는 부조리 개그가 사라져 아쉬웠다. 대신에 고향 페루에 돌아간 패딩턴이 자신을 길러준 친부모 같은 루시 숙모를 찾는 모험은 자신의 뿌리를 제확인하는 것이다. 성년에 가까워지며 서로 멀어져 가던 브라운네 식구들이 함께 고난을 헤쳐가며 결속을 다지게 된다. 그런데, 아동 관객을 위해 유머를 설명하느라 템포가 처지고 개그의 밀도가 낮아졌다. 그 점이 아쉽다.
그렇지만 파블로 그릴로와 시각효과 팀의 애니메이션 기술은 놀랍다. 실사 피규어를 적절히 사용해서 이물감을 줄여서 그런지 그럴싸해 보였다. 〈아프리카의 여왕〉, 〈블리트〉, 버스터 키튼에서 착안한 액션/슬랩스틱 시퀀스로 존경의 의미를 표한다.
총평하자면 《패딩턴_페루에 가다》은 전작보다 아쉽다. 그러나 〈패딩턴〉 시리즈가 가진 요소들, 이를 테면 이방인의 포용, 팝업 그림책 스타일의 영상미, 예의범절의 중요성,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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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중국 개봉 가능할까?
마블 스튜디오의 CEO인 케빈 파이기는, 최근 인터뷰에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 대한 중국 팬들의 우려를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파이기는 미국 레드 카펫 시사회에서 중국 영화평론가 레이먼드 저우(Raymond Zhou)와 14분 동안 영어로 단독 인터뷰를 가졌는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 담긴 중국(아시아) 혐오에 대해 집중 조명했죠.
이 영화에 대한 중국 개봉일은 아직 발표된 적 없으며, 공식적으로 검열이 통과됐는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합니다. 과거 마블 스튜디오가 중국에서 거둔 수익을 본다면, 이번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성공도 중국 시장에 달렸다고 볼 수 있겠죠. 박스오피스 수입의 가장 큰 열쇠가 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어벤저스: 앤드 게임>은 중국에서 미국보다 이틀 먼저 개봉했으며, 총 6억 2,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중국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외국 영화가 되었으며, 전체 수입도 6번째로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마블은 이 프로젝트(샹치)가 처음 발표된 이후 중국 현지에서 나타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프랜차이즈의 첫 아시아 슈퍼히어로가 기존 히어로들과 같이 충분한 매력을 갖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중국에서는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을까요? 첫 번째로, 많은 중국 팬들은 원작 만화에서 샹치의 아버지이자 적으로 나오는 푸 만추(Fu Manchu)가 기존 할리우드 영화에서 소비돼 온 전형적인 ‘중국인 악당’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인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죠. 이에 관련하여 파이기는, “초기 만화책의 일부를 가져왔을 뿐”이라고 발하며, “어떤 식으로든, 어떤 형태든 이는 마블 캐릭터가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 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반복했죠.
“푸 만추는 우리가 소유하거나, 소유하고자 하는 캐릭터가 아닙니다. 만화에서 많이, 아주 많이, 아주 오래전에 바뀌었어요. 우리는 이 영화에 그를 출연시킬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푸만추는 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고, 샹치의 아버지도 아니며, 심지어 마블 캐릭터도 아니고, 수십 년 동안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만화에서 때때로 ‘샹치’가 서양을 수용하기 위해 중국 뿌리를 버리는 것으로 그려지고, 심지어 한 줄거리(코믹북)에서는 아버지를 살해하기까지 한다는 것이 중국의 우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파이기는, “이러한 부분은 우리가 변화시킨 요소 중 하나입니다.”라며 중국 팬들을 안심시켰다. “만화는 모두 60년, 70년, 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의 모든 만화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우리는 MCU 방식으로 바꾸고 싶은 요소들을 선택했어요. 그래서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현재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는 “이 영화는 사실 그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라며 샹치가 젊은 시절에 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도망친 후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직면하고 극복할 것인지가 이야기의 일부분이라고 전했죠.
이 외에도, 극 중 악당인 만다린을 연기하는 양조위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하나”라고 표현했으며, 주인공인 시무 리우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습니다. 중국 팬들은 시무 리우가 이 역할을 맡을 만큼 매력적이거나 카리스마 있지 않다는 지적을 해왔는데요. 심지어 이 캐스팅을 인종차별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파이기는 이에 관해, MCU의 새로운 캐릭터는 상당수가 덜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출연했으며, 톰 히들스턴, 크리스 헴스워그, 톰 홀랜드, 크리스 에반스 심지어 초기에 큰 반발을 일으켰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빗대어 해명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성공적으로 진행됐는데, 중국 현지 반응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 영화 블로거는 파이기가 “모호하거나 의도적으로 대답한 것”이 아닌 매우 진실되게 인터뷰에 임했다고 평가했죠. 중국 매체 웨이보의 한 유저는 “이전에는 안 볼까 생각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려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댓글을 작성했습니다. 물론, 다른 네티즌들은 “샹치가 개봉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다”라며 비판하기도 했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포함한 MCU의 미래가 달려 있을 수도 있는 중국 시장, 케빈 파이기의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씨네랩 에디터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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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재력을 터뜨리지 못한 고루한 위인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난 십 대 소년 '김대건(윤시윤)'. 그는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모방 신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먼저 공부를 시작한 '최양업(이호원)', '최방제(임현수)'와 함께 유학길에 나선다. 마카오에 도착한 김대건은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고, 전쟁으로 인해 마닐라로 대피하는 등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착실히 신학 공부를 이어간다. 심지어 기해박해 당시 아버지 '김제준(최무성)'을 비롯해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더욱 큰 신앙심을 키워나간다. 길고 긴 세월 끝에 마침내 부제 서품을 받은 그는 조선으로 되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여러 방면으로 입국을 시도하고, 바다와 육지를 누비며 조선 최초의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딘다.
영화는 언제나 양날의 검을 지니고 다닌다. 바로 러닝타임이다. 예술 영화처럼 실험적인 작품이 아닌 이상,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 영화가 통상적인 러닝타임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최근에는 2~3시간가량도 길어서 100분 내외로 러닝타임이 줄어드는 추세다. 이는 단점이자 동시에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원작이 있거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룰 때 러닝타임이라는 한계는 치명적이다. 절대적인 시간 자체가 부족하니 원하는 만큼 풍부한 이야기를 담을 수 없다. 가장 영상화가 잘 된 소설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만 해도 원작 속 온갖 설정과 장면들을 3시간이 넘는 분량 안에 담아내는 데 실패한 바 있다.
하지만 때로는 독특한 장점이 된다. 제작진이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해 창의적인 접근법을 택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이야기와 감정선을 집약적으로 풀어내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 창업자 간의 소송전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시점을 자유롭게 오가며 '페이스북'이라는 거대한 SNS의 탄생을 그려낸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 세 번의 신제품 발표 프레젠테이션 직전 순간에만 집중해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의 내밀하고도 복잡한 개인사를 폭발력 있게 보여준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이다.
안타깝게도 최초의 조선인 가톨릭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일대기를 영상화한 <탄생>은 러닝타임의 한계를 깨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정직하고 고전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스케치한다. 일단 한국 천주교의 초창기를 간단하게 알려주는 자막으로 시작해 소년 김대건이 신부가 되기로 마음먹는 계기를 보여준다. 김대건이 학우인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중국으로 향하고,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모습도 스쳐 지나간다. 부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이 조선에 입국할 경로를 찾는 여정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다. 간신히 조선에 입국한 후 다시 상하이로 향해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되돌아와 사목활동을 이어가다가 끝내 체포되고 순교하는 김대건의 모습은 후반부를 장식한다.
영화는 김대건의 일생에서 분기점이라 할 만한 그 어떤 순간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151분이라는 한정된 분량 안에 25년간의 이야기를 전부 배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탄생>은 모든 사건을 최소한으로 다루며 굉장히 빠르게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의 맥락은 대부분 생략되고, 필요한 장면만 선택되어 재현된다. 의주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오는 김대건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국경 근처에서 천주교 신자들과 접선한 그는 국경을 따로 넘은 후 한 나무 밑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약속이 끝나자마자 카메라는 바로 나무 밑에 서 있는 신자들의 모습과 멀쩡하게 접선 장소에 등장하는 김대건을 비춘다. 과정은 사라지고 사건의 결과만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탄생>은 자연히 전반적으로 급하고 드문드문하다. 영화라기보다는 영상화된 위인전에 가까운 보이는 이유다.
위인전의 방식을 답습한 대가는 크다. 김대건이라는 인물을 매력적인 캐릭터로 포장하는 데 실패했고, 그는 여전히 전형적인 위인상에 갇혀 버린다. 김대건은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주경야독하며 따라잡을 정도로 끈기 있고, 목숨을 걸고 만주와 조선 북부를 돌아다닐 정도로 강단이 있다. 다른 약자들이 피해 보는 걸 가만 볼 수 없을 정도로 인정이 많고 따뜻하다. 심지어 그 누구보다도 새로운 세상에 빨리 눈 뜰만큼 사고가 유연하고, 신앙심이 깊은 만큼 조국을 향한 충성심도 강하다. 결함 없이 모범적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성장과 변화는 그저 서술될 뿐 설명되지 않아서 설득력이 부족하고 지루하다.
물론 그의 감정선을 따라 뚝뚝 끊기는 에피소드들을 연결하려고도 노력한다. 큰 효과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의 감정선이 다른 인물들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와 신학교에서 그를 가르친 다른 신부들과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숱하게 이별하고 재회하고, 목숨을 걸고 조선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동지들이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스토리텔링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단지 지금까지 김대건이 어떻게 지냈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보를 전달하는 선에서 그친다. 긴 세월 동고동락한 최양업과의 관계성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 캐릭터는 김대건이 처한 상황의 변화를 강조하는 데서 역할이 끝난다. 그 결과 김대건 외에 다른 인물들은 기억에 남지 않고, 굵직한 배우들의 출연도 잠깐의 서프라이즈에 그치고 만다.
이는 천주교 신자이거나 한국 천주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이상 감정적으로 동요하거나 고조될 장면이 거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례로 조선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앵베르 범 주교가 자수하는 장면은 천주교 신자에게 매우 인상적일 것이다. 한국 천주교가 받은 숱한 박해의 참상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수많은 순교자의 사연을 알고 있다면 그의 용기와 신앙심은 애처로우면서도 감동적이다. 그러나 신자가 아니라면 해당 장면은 그냥 역사적 사건을 건조하게 재현한 장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제한된 시간 내에서도 김대건이라는 인물을 재해석할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탄생>의 결과물은 더욱 안타깝다. 사실 그 당시 김대건 신부는 단순한 종교인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조선 사람이 꿈꾸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세상을 먼저 목격한 선구자였다.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구사할 줄 알아서 통역가로 활동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조정이 체포부터 처형까지 3개월이나 지체할 정도로 아까워했던 지식인이었다.
영화도 '지식인 김대건'의 면모를 강조하려 한다.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자신이 보고 배운 내용을 어떻게 '조선인'으로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김대건의 내면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나름대로 당시 시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다. 영화는 아편 전쟁을 겪으며 무너지는 청나라의 현실과 중화 질서가 무너졌는데도 여전히 바다 밖 세상에 무감각한 조선의 실상을 대조한다. 또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영국이 견제하는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에 야욕을 뻗쳤던 시대상도 꼬집는다.
단순히 시대적 배경을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김대건의 구체적인 행적을 묘사하며 재해석에 힘을 더하기도 한다. 그는 조선에서 평화적인 포교와 교역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며 프랑스 군을 설득한다. 프랑스 군의 힘을 빌린다면 천주교 신부라는 지위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조선인으로서 조국과 프랑스의 무력 충돌을 방지하는 걸 더 우선한 것이다. 그와 상하이 주재 영국 영사와의 대담도 인상적이다. 김대건은 대담이 끝난 후 조선이 머지않아 서양 국가들의 사냥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레이트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영국 측이 이미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대건의 모습은 분명 '최초의 사제'로 고정된 이미지를 뒤흔드는 신선한 해석이다.
하지만 <탄생>은 끝내 전통적인 일대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만 봐도 이 작품이 결국에는 종교적 영화로 귀결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영화는 김대건의 참수형을 끝으로 마무리되는데, 카메라는 김대건의 피가 흐르는 장면을 과하다 싶은 정도로 길게 잡으면서 그의 순교를 극도로 강조한다.
그 때문에 김대건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해석 시도는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김대건의 모험가이자 근대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빛나는데, 마지막 순간 조선의 첫 신부이자 순교자라는 고정된 이미지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해 신부 김대건이 아니라 조선인 김대건을 다루려는 시도는 그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셈이다.
오히려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재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결말까지 종교적 색채를 빼지 않은 결과 한 작품으로서의 구심점마저 약해진 까닭이다. 이처럼 매력적인 재해석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가능성도 보여줬지만, <탄생>은 결국 평범하고 뻔한 종교인의 전기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스스로 잠재우고 만다.
물론 한국 천주교 교회가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영화화하는 작업은 충분히 매력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2021년이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이기도 했고, 이를 기념하는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부 벽감에 세워지기로 결정된 사실이 공표되기도 했다. 또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최소한 이름은 한 번 정도 접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니 관심을 받기에도 적합했을 것이고, 기존 사극 영화에 자주 등장한 인물도 아니므로 신선한 시도인 것은 맞다.
다만 의도와 목적을 담아낼 그릇을 잘못 고른 선택이 뼈아프다. 사실 김대건 신부의 생애는 워낙 스케일도 크고 공간적 배경도 다양한 만큼 영화보다는 드라마로 만들기 적합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러닝타임의 한계가 뚜렷한 영화를 그릇으로 골랐을 때는 보다 도전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 필요했다. 특정 순간이나 사건에 집중해 김대건 신부의 몇몇 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시도가 더 적절해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부제 신분으로 조선에 입국한 직후부터 체포되어 순교하는 날까지만 다루더라도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김대건의 참모습 대부분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루한 위인전, <탄생>의 만듦새가 끝내 아쉬운 이유다.
D(Dreadful, 끔찍한)
실제 인물의 업적과 배우들의 라인업이 아까운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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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동석 형네집? 안젤리나 졸리의 로멘스? 이터널스 모든 사건의 중심, 바빌론을 알아보자!
#이터널스 #길가메쉬 #마동석
2021. 06. 02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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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모두가 놓친 장소
00:40 역사의 시작, 바빌론
02:00 길가메쉬 & 바빌론
02:55 안젤리나 졸리의 사랑
03:50 이터널스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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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발신제한 후기 / 조우진 원톱 / 부산을 배경으로 펼치는 추격전 / 로드무비 / 한국에도 폭발물 처리반이?! / 김창주 감독님 데뷔작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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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영상은 없네요~#스릴러, #드라마,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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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지 마요! 뒤에....! ? #로스트시티 급 스릴러 모먼트? 보물 찾는 소설을 썼을 뿐인데... 거머리 무서워하는 허당 근육맨과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드벤처라니? 로스트 시티 보물을 향해 쫓고 쫓기는 대유잼 어드벤처에 함께할 여러분(N명) 4월 20일, 극장에서 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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