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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oDAY2025-06-26 18:59:10

엘리오 | 픽사라서 평가절하될 우주 탐험기

<엘리오>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모두 사고로 잃고 고모 '올가'(조 샐다나)에게 맡겨진 소년 '엘리오'(요나스 키브레브). 고모에게서도, 학교에서도, 잠깐 맡겨진 캠프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엘리오는 차라리 외계인이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바라기 시작한다. 

 

어느 날, 사고를 친 후 올가 사무실에서 고모를 기다리던 엘리오는 우연히 외계인과 연락이 닿는다. 보이저호에 실린 황금 접시를 본 외계인들이 지구로 보낸 통신이 올가가 근무하는 공군 기지에 도착한 것. 이에 엘리오는 지구 대표를 자칭하며 외계인들의 모임인 '커뮤니버스'로 소환된다. 엘리오는 마음을 나눌 친구 '글로든'(레미 에드걸리)을 만나 꿈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이내 그의 앞에는 우주를 위험에 빠뜨릴 위기가 닥친다. 

 

 

 

 

 

 

 

 

 

 

‘픽사다움'의 두 얼굴

"픽사답다" 혹은 "픽사가 픽사했다." 지난 30여 년간 픽사가 제작한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평가할 때 통용된 대표적인 찬사다. 애니메이션 영화인데도 유별나게 성인 관객을 울리는 데 특화된 픽사 고유의 미덕을 담아낸 표현이기도 하다. 픽사의 첫 장편 영화인 <토이 스토리>부터 가장 최근의 10억 달러 돌파 작품인 <인사이드 아웃 2>에 이르기까지 '픽사다움'은 순간순간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유지됐다. 

 

'픽사다움'에는 몇 가지 원동력이 있다. 사소한 일상에서 대부분의 아이가 보편적으로 느끼고 겪는 감정과 경험을 발견하는 관찰력. 누구나 한 번쯤은 머릿속으로 그려봤을 법한 그림과 보편적인 경험을 하나로 엮는 상상력. 익숙한 감정을 시류에 맞는 현대적인 소재와 관점으로 풀어내면 창의력. 이 모든 것을 스크린 위의 현실로 불러올 수 있는 기술력. '픽사다움'은 이 역량들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픽사의 진가는 <인사이드 아웃>만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라일리'의 이야기는 사춘기를 겪었거나 겪을 모든 관객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을 가득하다. 이 보편적인 이야기는 의인화된 감정들이 일하는 감정 본부라는 상상력 덕분에 독특해진다. 더 나아가 감정 본부의 존재는 현대적 관념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영혼, 자아, 감정마저도 뇌 화학물질의 작용일 뿐이라는 생리학적 관점이 감정 본부라는 설정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픽사답다'라는 표현이 마냥 칭찬이 아니기도 하다. 픽사 특유의 스토리텔링이 반복되고 정형화되다 보니 이야기 자체의 독창성이 줄어들었기 때문. 이는 <엘리멘탈> 같은 영화가 여전히 참신한 소재와 뛰어난 영상미로 무장을 해도 과거에 비해 인상적이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다. <엘리오>도 마찬가지다. 우주와 외계인을 매개로 삼아 현대인의 소속감을 성찰한 픽사의 신작은 어떤 의미로든 너무나 픽사답다.

 

 

 

 

 

 

 

 

 

 

 

 

픽사다운 장점

<엘리오>에서도 픽사만의 감각은 빛난다. 우선 소재의 장점만 영리하게 활용할 줄 안다. 우주와 외계인은 사실 아이들이 공룡 못지않게 관심을 두는 주제다. 그러다 보니 우주 배경으로 외계인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E.T.> 아류작처럼 보일 수 있다. <엘리오>는 보이저호를 등장시켜 이 함정을 피해 간다. 우주탐사선에 실린 '골든 디스크'를 발견한 외계인이 지구와 인류에 답장을 보냈다는 상상력을 발휘해 차별점을 확보한다.

 

무엇보다도 픽사의 유기적인 스토리텔링이 돋보인다. <엘리오>는 네 주인공의 서사를 '소속감의 부재'라는 한 키워드로 묶는다. 그들은 각기 속하고 싶은 공동체가 있지만 소망을 이루지 못해 부유 중이다. 엘리오와 올가는 가족을 되찾고 싶어 한다. 두 외계인 캐릭터의 처지도 유사하다. 하이러그 종족의 군주인 '그라이곤'(브래드 가렛)은 커뮤니버스와 아들 글로든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고, 글로든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과 노력은 묘하게 엇갈린다. 올가는 엘리오와 새롭게 가족을 꾸리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역효과만 난다. 공군 소령인 고모가 본인을 돌보느라 우주비행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 나머지 자신을 장애물로 여긴다고 느낀 엘리오는 오히려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기 때문. 대신 엘리오는 어려서부터 소망이었던 외계인들에게서 인정받고자 하고, 커뮤니버스의 일원이 되기 위해 그라이곤과의 교섭에 자원하기까지 한다. 

 

커뮤니버스에 가입하려는 엘리오의 노력도 역효과를 낸다. 엘리오는 협상에 실패한 뒤 투옥됐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글로든을 만난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강인한 전사가 되지 못한 글로든은 보호자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그들은 서로에게 공감하며 절친이 된다. 그러나 이 우정은 도리어 상황을 악화한다. 엘리오가 글로든을 인질 삼아 떠난 나머지 그라이곤은 아들과도, 커뮤니버스와도 관계를 개선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픽사다운 감동

<엘리오>는 엇갈린 화살들의 경로를 조정해 왕도적이지만, 감동적인 결말에 도착한다. 그 중심에는 '가족의 재발견'이 있다. 상황을 꼬이게 만든 엘리오와 글로든의 우정은 사실 낯선 일이 아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혼자인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을 맞이한 아이들이 가족보다 친구들에게서 위안을 찾는 경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이 다시 가족을 찾는 일도 자연스럽다. 부모에게 환영이나 사랑받지 않는다고 느꼈던 아이들은 어른들의 진심을 확인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돌아오곤 하니까. 이러한 감정선의 변화는 극 중 복제 진흙을 통해 드러난다. 엘리오와 글로든 자기랑 똑같이 생긴 복제품을 고모와 아버지에게 보내서 그들을 완전히 속이고, 가족의 품을 떠나려 한다. 

 

하지만 정작 올가와 그라이곤은 진실을 재빨리 눈치챈다. 아이를 키우는 게 처음이라서 힘들고, 육아는 처음인 상황을 이해해 주지 않는 아이들에게 서운하면서도, 처음이기에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잘 알고 사랑하기에 그들은 엘리오와 글로든의 속임수에 당하지 않는다. 친구를 만들러 아이들이 떠나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는 보호자들의 노력과 사랑 덕분에 두 아이는 오해를 풀고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온다. 

 

위와 같은 감정 변화를 11살 엘리오의 선택과 결정의 동기로 제시하면서 <엘리오>는 몰입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성인 관객으로서는 과거 경험을 떠올리며 후회할 수도 있고, 현재 자기 가족 상황에 투영하면서 더 깊이 공감할 수 있기에 두 배로 감동적일 수 있다. 이에 더해 이른바 '정상 가족'이 아닌 주인공 덕분에 더 많은 관객의 감정이입도 유도할 수 있다. '픽사가 픽사했다'라는 표현이 안 나올 수 없는 이유다.

 

 

 

 

 

 

 

 

 

 

지금 '소속감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이유

엘리오와 주인공들이 겪는 소속감의 부재가 단순히 우정과 가족애의 차원에 머무르는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기에 <엘리오>는 더 인상적이다.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한 엘리오의 고독은 겉보기에는 그저 한 어린아이의 아픔이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한 꺼풀 벗겨보면 본래 소속된 공동체가 사라진 가운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지 못한 채 현대사회를 부유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지적했다. 자기 자신을 취업 시장, 결혼 시장 등에서 성공적으로 팔려고 노력하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게 최우선 목표가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본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킨 나머지 개인은 가족이나 이웃 같은 기존의 공동체와 멀어지고 하나의 원자, 곧 '고립자'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개개인은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회적 존재니까. 그 결과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이지만, 그만큼 외로워한다. 무한한 네트워크 수단을 동원해 수많은 사람과 교류하지만, 그 누구와도 진정으로 깊이 대화하고 관계 맺기 어려워한다. 피상적인 관계가 반복될수록 허무함과 고독만 깊어질 따름이다.   

 

그렇기에 <엘리오>의 이야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 설령 익숙할지라도 간과하고 있었던 가치들을 일깨워주기 때문. 현대인들처럼 무한한 공간에서 소속감을 찾으려 애썼고, 친구도 만들면서 나름 성공적인 결실도 거둔 엘리오조차도 결국에는 고모와 지구로부터 보금자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따뜻한 위로이자 가능성을 일깨우는 격려일 수 있는 이유다. 

 

 

 

 

 

 

 

 

 

 

 

픽사다운 이상 혹은 순진함

그런데 현대적 맥락 안에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준 <엘리오>의 메시지와 메타포는 의외의 부메랑이기도 하다. 커뮤니버스라는 설정의 정치적 맥락을 곱씹다 보면 <엘리오>가 변화를 반영하지 못 하거나 안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극 중 커뮤니버스는 우주 버전 유엔이나 다름없다. 두 단체 모두 각 행성/국가나 종족/민족의 대표가 모여 평화를 추구하고, 분쟁과 갈등을 대화와 토론으로 해소하려고 노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커뮤니버스와 유엔은 민주주의 제도와 자유주의적 가치에 기반하면 범국가/행성적 협력이 가능하다는 믿음 위에 존재하는 셈이다. 하이러그 종족처럼 일견 폭력적인 상대와도 대화로써 공통점을 찾으면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엘리오와 글로든의 우정, 올가와 그라이곤의 공통점이 우주적 갈등을 해소하듯이. 이는 냉전 이후 세계화라는 명목하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세계 각국에 전파한 미국의 국제 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엘리오>의 설정은 최근 변화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미국의 협조로 WTO 가입했던 중국이 도리어 미국과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고, 동유럽과 중동에서 다시 분쟁이 격화되는 등 자유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다시금 신냉전 구도로 전화되는 추세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주판 유엔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역설하는 스토리텔링은 좋게 말하면 이상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이브해 보인다. 

 

물론 혹자는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이니 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픽사'라는 이름값을 생각했을 때 조금만 더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을 떨치기는 어렵다. 현대인의 존재론적 문제에 관한 고찰과 국제 정치적 맥락을 다루는 사유의 층위가 균형을 못 이룬 나머지 평면적이고 유치한 인상이 유독 진하기 때문이다.

 

 

 

 

 

 

 

 

 

 

기시감의 연속과 반복된 문제

이에 더해 볼거리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상상 속에만 존재한 광경을 손에 잡힐 것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한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엘리오>의 세계관은 어디서 본 듯하다. 주된 배경인 커뮤니버스만 보더라도 곡선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지고, 외계 종족이 모인 환상적인 공간이라는 점 외에는 특색이 보이지 않는다. 네 원소의 특징을 도시 설계에 녹여낸 <엘리멘탈> 속 엘리멘탈 시티에 비하면 시선을 끄는 힘이 현저히 부족하다.

 

<소울> 속 '태어나기 전 세상'과 비교하면 추상적이기도 하다. 사실 두 공간은 '일상에서 깨닫지 못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라는 역할을 공유한다. 그런데 <소울>이 '태어나기 전 세상'의 여러 구역, 영혼을 교육하는 공간, 모든 것의 전당, 사적 공간, 어둠의 구역 등을 스토리텔링에 활용했지만, <엘리오>는 커뮤니버스를 소개하는 데서 그친다. 그 결과 <엘리오>는 <소울>의 발상과 구성을 단순히 답습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캐릭터 활용법도 아쉽다. 픽사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일례로 <토이 스토리>는 분량과 비중에 무관하게 수많은 장난감의 개성을 명확히 각인시켰다. 그에 반해 최근 픽사 작품은 일부 캐릭터만 활용한다. <엘리멘탈>만 해도 물과 불 캐릭터에만 집중했다. <엘리오>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외계인 캐릭터 중 글로든을 외에 뚜렷한 활약을 보여준 인물을 떠올리기 어렵다.  

 

종합하면 <엘리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배부른 불평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절대적인 완성도 자체는 여전히 준수하고,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흐를 정도로 기본적인 재미는 갖춘 영화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작들이 쌓아 올린 '픽사답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엘리오>가 보여준 이상, 평가절하는 감내해야 할 숙명이 아닐까 싶다. 

 

 











Acceptable 무난함

픽사라서 사랑스럽고, 픽사라서 아쉽고, 픽사라서 감내해야 할 평가절하

작성자 . KinoDAY

출처 . https://blog.naver.com/potter1113/22391276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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