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지금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성별의 이슈에서도,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서도, 심지어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임에도 사소한 무언가를 꼬투리 삼아 비난하려 하는 우리의 관계에서도, 우린 타인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생각해봐야 할 점은 혐오의 시대가 어쩌다 만들어졌는지,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마저도 알지 못 한다는 것이다. 출처도, 신빙성도 없는 누군가에 대한 루머, 실수, 관념들은 우리의 귀까지 은닉하여 스며들어 마치 진실인 것마냥 자세를 취하고, 나만의 올바른 자세를 취하기 무섭게 그것들을 믿는 사람으로 나를 변모시킨다. 그럼 이런 혐오의 시대가 현재의 21세기에만 존재했을까? 가까운 근현대사로만 넘어가도, 냉전 시기가 만든 엄청난 정치적 혐오의 시대가 존재했고,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들을 향한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혐오를 넘어 무분별한 증오의 시대였다. 'Never Again'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우리 일류는 되내이고, 다짐하고, 결심했지만 결국은 'Do Again'을 들고 일어섰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속 "안나"와 같은,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빌 펄롱"과 같은 희망이 이 혐오의 시대를 종식시킬 인류의 최고 무기임을 앎에도 어째서 우린 그 무기를 홀대하고 혐오를 택한 것일까.
영화 <화이트 버드>는 인류 세계사 중 어쩌면 가장 끔찍한 혐오의 시대라였던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속 희망과 희망 속에 피어나는 10대 청소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직접적으로 나치군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인물들의 작지만 거대한 용기들이 한데 모여 서사를 이끈다는 점이 본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영화는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화 <원더>에 등장했던 "줄리안"과 줄리안의 할머니 "사라"의 대화를 외화로 두고, 내화엔 "사라"가 "줄리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즉 영화의 본 이야기 "사라"와 "줄리안"의 서사로 진행된다.
내화의 초반부와 중반부 조금 그리고 종반부까지 "사라"의 나레이션을 통해 내화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사건의 진행을 소개하는데, "사라"가 "줄리안"에게 설명하는 거지만 마치 "사라"가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외화는 학교 폭력으로 퇴학당해 전학 온 새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아직 뉘우치지 못한 "줄리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주려는 "사라"의 대화 장면과 종반부 어둠을 극복한 "줄리안"과 연설을 통해 "줄리안"에게 전한 교훈을 관객에게 다시 상기시켜주는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영화는 내화와 외화를 정확히 구분짓지 않고, 오가는 식의 진행을 선보이는데, 외화와 내화를 번갈아가면 간혹 관객의 몰입도를 해칠 수 있어 위험성이 있는 연출법이지만, 영화 <화이트 버드>는 그런 점이 크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또한 거시적 관점에서 영화의 구조는 어두웠던 소년이 할머니의 교훈을 통해 극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서, 그렇기에 영화가 극의 대비감과 반전된 상황들을 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초반부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본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친구에게 차갑게 대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무시하고, 비하하는 일진에게 아무런 대응하지 못하던 "줄리안"을 종반부에서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변신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영화가 매우 안정적이었고, 관람하는 데에 있어 편함만을 즐길 수 있었다.
파리와는 멀리 떨어진 프랑스의 한 고즈넉한 마을에 "사라"라는 소녀가 살고 있다. 화목한 가정, 평범해서 더욱 따뜻했던 "사라"의 집은 어느날 마을로 들이닥친 나치 군대의 점령에 혼란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이였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이민을 떠나려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나치군이 학교로 쳐들어왔고, "사라"는 그런 나치군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위기의 순간, 동급생이자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왕따 당했던 "줄리안"에게 도움 받아 "사라"는 그의 곳간에 들어가 나치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영화의 초반부와 중반부, 이 곳간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영화는 "사라"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줄리안"은 어떤 식으로 그녀를 도와주는지, 두 청소년 남녀의 관계는 어떻게 변하는지를 다룬다.
영화 <화이트 버드>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런 주객전도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공주처럼 잘 커왔던 한 소녀와 장애로 인해 왕따 당하고, 무시받던 소년의 관계가 나치의 홀로코스트라는 상황으로 인해 역전되어, 무시와 홀대의 관계에서 도움과 구원의 관계로 바뀌었다는 점이 영화의 핵심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비유대인이더라도 유대인을 도왔을 경우 죽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구원하고, 자상함을 베풀 수 있었던 데에는 사랑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영화는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관계의 역전성을 통해 일러주었고, 또한 이를 성인의 사랑이 아니라 10대 청소년의 애틋한 사랑이었기에 더욱 가슴 따뜻해지고, 그들을 응원하고 싶게 했다.
작품의 초반부, 외화 속 "줄리안"이 등교하는 길, "줄리안"이 하교하는 길 등 영화는 "줄리안"의 행하는 길, 행하는 움직임 등에서 모두 '어울리지 못함', '혼란스러움'을 하강하는 시선을 통해 표현했다. 또한 유리창 사이 작은 공간에 비춰지는 그의 연약한 모습들을 비추곤 했는데, 이는 내화 속 창문틈과 벽 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과 지붕 틈에 앉은 하얀 새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이 '틈과 벽'을 통해 마치 외화와 내화 간의 이동을 대화와 나레이션을 사용하여 영화의 구조에 있어 벽을 표현한 것처럼 "사라"가 곳간과 외부 간의 간극, 즉 "줄리안"의 보호와 희망으로 존재하는 공간과 나치의 혼돈과 공포만이 흐르는 공간을 구분지었고, 이는 비록 작은 틈, 얇은 벽이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극대화시켰다. 이 점에서 인상적인 점은 "줄리안"과 "사라"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는 놀이가 바로 '상상놀이'와 '영화'라는 점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 아닌 것들을 통해 현실과 같이 즐기려 그들의 행위는 상상을 통해서라도 행복감을 구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결국 관객이 그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더욱 몰입하고, 그들에게 더욱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영화는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사라"와 "줄리안"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돕고, 이해하며, 자상함을 베푸는 지 풀어내고, 후반부에 도착하여 극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 점만큼은 필자에게 있어 다소 아쉬웠다. 등교하는 길에 실수로 통행증을 안 가지고 와 나치군에게 "줄리안"이 붙잡히게 되고, 그로 인해 "사라"의 존재를 알게 된 나치군이 곳간으로 가 추격씬을 펼친다. "사라"는 늑대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게 되지만, "줄리안"은 도망치던 와중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암시한다. 물론 주연인 인물이 절대적으로 사망해서는 안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야기의 메인을 담당했던 캐릭터가 사망하게 된다면 그에 마땅한 씬 소비를 했어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화이트 버드>가 "줄리안"이라는 인물을 관객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공들여 쌓아올린 탑을 생각한다면 영화가 그 탑을 허무는 과정도 소중히 대하는 게 서사적으로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는 너무 한순간에 탑을 무너뜨려 소비시켰고, 그의 죽음이 희생이 되어 무언가 남는 것이라도 있었다면 영화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점도 없었기에 좀처럼 영화의 그러한 선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영화의 이 모든 것들이 의도였고, 이를 통해 '어쩔 수 없는 그런 슬픈 상황'이라는 점을 살리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점을 생각해보아도 어색함을 감출 순 없었다.
또한 내화의 초반부를 외화 속 "사라"의 나레이션을 통해 장식하고, 배경을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화의 종반부를 외화 속 "사라"의 나레이션으로 마무리지었는데, 너무 이르게 결론짓고, 황급히 마무리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비록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사라"와 "줄리안"의 슬픔 속에 피어난 사랑이고, 결국 내화도 외화 속 변화의 매개체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외화와 내화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작품에서 내화를 본 작품과 같이 끝내는 것은 무리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화를 방점 찍는 과정에서 급작스럽게 의심되었던 이웃들이 사실은 유대인들을 돕고자 했던 가족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어느날 갑자기 찾은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떠나게 된 "사라"의 뒷이야기를 설명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관객을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관객에게 정보를 던져주는 식의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초반부와 중반부까지의 진행이 굉장히 편하고, 안정적이었어서 상대적으로 종반부의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는 것일지 몰라도, 결국 종반부의 완성도로 인해 영화 전체의 완성도가 다소 아쉬워졌다. 더불어, 초반부와 중반부마저도 극의 안정감과 완만함에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하지, 예술적 창의성이나 색다름의 측면에서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그렇기에 영화의 후반부와 영화가 결론짓는 방법이 매우 중요했다. 영화의 초반부 진행과 순서는 관객들 모두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서 일어났고, 그 단조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청소년 남녀의 사랑으로 장식하려 했지만 모두 채우기엔 무리가 있기에 영화의 후반부에 무언가 킥이 필요했지만 부실한 킥으로 인해 이 모든 계획이 다소 어긋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관점에서 종반부가 초반부와 중반부에 비해 너무도 아쉬워 혹평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 교훈, 메시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중요한 이슈로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혐오의 시대를 다시금 반복하지 말자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반복하고 있는 우린 무엇 때문에 다정함을 잃었을까. 어째서 우린 인류의 가장 큰 무기인 다정함을 놓아버리고, 가장 큰 원흉인 혐오를 택한 것일까. 사랑으로 서로를 품을 순 없는 것일까. 많은 분들이 본 작품을 통해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실 수 있으면 좋겠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씨네랩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