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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llow2021-10-24 23:06:08

나를 외면하고, 진실을 피하고, 흘러서 결국

영화 <아네트>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니체, 선악을 넘어서

 

 

영화 <아네트>를 보러 가기 전에 줄거리를 읽어보았다. 오페라 가수 '안'과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 첫눈에 반한 둘, 그리고 빛과 어둠. 파도를 배경으로 한 포스터는 꽤 격정적으로 보였고, 이것을 사랑의 소용돌이쯤으로 해석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게 있었다. 장르에 로맨스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 사랑을 노래하는 뮤지컬 영화인데 왜 분류를 이렇게 해뒀을까?

영화를 보던 중에 이해했다. 이건 사랑 영화가 아니구나.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답게 시작은 음악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음성이겠다. 숨도, 웃음도, 말도 허락하지 않는 사회자의 말. Ladies and Gentlemen.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에 할 법한 시작과 달리 그가 하는 말은 다소 기이하다. 노래부터 웃음, 하품, 눈물처럼 다소 즉각적인 반응, 심지어는 숨 쉬는 것마저 이 쇼에서는 금지된다. 우리 개인의 자유와 의사결정을 모두 빼앗듯이.

이제 밴드의 녹음 현장에서 실제 감독이 나와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So may we start. 플래시몹처럼 한 무리에 사람이 하나둘씩 불어나고, 끝으로 주인공들이 걷고, 걷다가 흩어진다. 이때부터 영화의 큰 특징이 드러났다. 함축과 생략. 대사가 곧 노래 가삿말이 송스루 뮤지컬 영화다운 면모다. 다만 <레미제라블>을 떠올리면 조금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아네트>는 서사 전개 방식이 평이하지 않다. 인물의 삶과 방향성,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중요한 대목은 가십 뉴스 형식으로 짧게 보여준다. 그것도 음악과 어우러지니, 뉴스보다는 광고에 가까운 느낌이다. 시간을 뛰어넘기 용이한 구조다.

 

 

어느새 인물은 미래에 와있고, 생각이나 감정은 '무대'라는 공간을 통해서 드러난다. 오페라 가수 안, 스탠드업 코미디 헨리 모두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연기하는 사람이니까.

안이 맡은 배역은 늘 배신과 고통이 뒤따르며, 캐릭터의 죽음으로 끝난다. 옷과 역할은 바뀌지만, 그의 결말은 전혀 달라지는 게 없다. 이것이 하나의 운명인 것처럼. Where is the moon? Where is the starlight? 별빛도, 달빛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을 맴도는 안. 꼭 미래의 복선 같은 노랫말이 들린다. Though I thought that I knew him, I am wrong. I don't know him. He is a stranger. Tonight. 

헨리는 무대에 오르기 전, 자신만의 루틴을 반복한다. 담배를 피우고, 바나나를 먹고, 가볍게 뛰면서 펀치를 휘두르고, 복싱 가운의 후드를 뒤집어쓴다. 관객들의 웃음, 환호, 박수를 받던 헨리. 유쾌함으로 물든 공간에는 하나의 물음이 끝없이 뒤따랐다.

Why did you become a comedian? 헨리는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안의 이야기를 한다. 안과 약혼했다고. 한창인 나이 때에 자유가 끝났다고 표현하자, 관객석 한 곳에서 약간의 타박이 들렸다. 다시, 헨리가 반응했다. 안은 너무 완벽한데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느냐고. Yes, Yes, Yes. 이 대답은 실제 헨리가 들었던 반응일까, 아니면 헨리의 자격지심일까?

영화의 빌드업은 끝났다. 이제 차곡차곡 쌓인 불안이 모습을 드러내고, 탑이 무너질 때다.

 

 


 

둘은 결혼하고, 아이가 탄생한다. 딸의 이름은 아네트 Annette. 하지만 아네트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보이지 않는 줄로 인형을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Marionette의 모습이었다. 아네트는 보호자의 품에 안긴 채 모든 움직임에 제약받는다. 뽀뽀를 피하려고 고개를 돌려도 그 작은 몸짓은 가뿐히 무시당하고, 결국 보호자는 원하는 바를 취한다. 이 또한 뒤에 펼쳐질 이야기의 단서가 된다.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안과 대조적으로 헨리의 커리어는 퇴행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끝인 셈이다. 타인을 공격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고, 비꼬던 것이 통하지 않자 헨리는 더욱 자극적인 이야기를 펼쳤다. 오늘 안을 죽였다고. 이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 헨리는 이야기를 멈췄어야 했다. 그건 더 이상 웃긴 이야기가 아니라 모욕적인 폄하라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헨리는 과거의 영광에 살면서 현재의 추락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안의 성공과 지위를 시기하기에 이르렀다. 열등감은 소위 '망한' 사람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 커리어가 망한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들, 즉 자기혐오가 열등감으로, 열등감이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발현된다.

그 흔적은 헨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고 온 여섯 명의 여성. Subjected to Henry McHenry's abuses. Witnesses to his violence. And his anger. His anger. 이때 그들의 모습은 꼭 경찰서에서 취조당하는 용의자 같았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나서서 말을 하느냐는 노랫말이 압박감을 더했다.

이때 교차된 장면은 공연장으로 이동하던 안이 잠결에 보았던 산불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헨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보였다. 약간 놀란 듯한 안의 표정에서도.

 

 

두 사람은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고자 요트 여행을 떠났다. 비가 퍼붓고, 배가 흔들리고, 왠지 모르게 스산한 여행을 누구도 상상하진 않았을 테다. 술에 잔뜩 취한 헨리는 비를 맞으며, 그만 들어가자는 안의 말을 모조리 무시했다. 그리고 갑자기 시작된 왈츠. 안은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헨리의 손아귀에 잡혀 마구잡이로 돌고, 휘청이고, 미끄러진다.

헨리는 안의 말을 개의치 않는다. 바람 때문에 목이 상한다는 말도, 이러면 위험하다는 말도. 오히려 그 말에 자극을 받은 듯 움직임은 더욱 과감해졌다. 결국 헨리의 우악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안은 바닷속으로 빠지고 만다. 헨리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작은 배를 타고 아네트와 탈출해 몸져눕는다.

달을 바라보는 아네트, 그리고 억울함에 유령으로라도 주변을 맴도는 안. 이제 안의 복수가 시작된다. 다름 아닌 자신의 딸, 아네트의 목소리로.

 


 

헨리는 아네뜨에게 줄 선물로 램프를 사 온다. 불을 켜면 방 안에 달과 별이 퍼지는 램프. 그때 아네트는 노래를 부른다. 노랫말보다는 멜로디다. 그 흥얼거림을 듣고, 헨리는 안과 오랜 인연이 있던 지휘자를 데려 온다. 그러니까, 자신의 커리어와 명성이 모두 소멸된 헨리에겐 새로운 기회였던 것이다. 지휘자는 이건 아동 착취라고 거부했지만, 그건 처음뿐이었다. 돈 때문이든, 명성 때문이든, 예술적 호기심 때문이든, 혹은 그 모든 것을 위해서든 아네트를 무대에 세웠다.

아네트는 금세 인기를 얻고, 그 인기의 보상처럼 헨리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아네트의 목소리는 멜로디를 부를 때만 들을 수 있지, 평소엔 어떤 말도 조잘대지 않았다. 장난감 악기를 가지고 놀던 뒷모습은 방과 무대에 갇힌  꼭두각시 같았다.

 

 

헨리는 지휘자에게 아네트를 맡겨두고 밖을 떠돈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주고, 환호해 주고, 사랑해 줄 여성들을 만나러. 하지만 헨리는 아무것도 사랑을 하거나 받을 자격이 없다. 이미 자신의 손으로 사랑을 죽였고, 또 다른 사랑은 한 곳에 방치해 뒀으니까.

성공의 궤도에 오를수록 헨리는 불안해진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끝은 또 살인이었다. 아네트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 현장을 제 눈으로 목도하지 않아도 헨리의 살짝 젖은 머리, 눈빛, 숨결에서 느꼈을 테다.

상황의 끝에 다다른 헨리는 갑작스럽게 아네트의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끝까지 돈벌이를 놓지 않았다. 성대하게 펼쳐진 아네트의 은퇴 전 마지막 공연. 언제나 그렇듯 아네트는 벼랑 끝 같은 구조물에 섰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점이 있다. 아네트는 멜로디를 부르지 않고,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Dad kills people.

 


 

재판장.

탕. 탕. 탕.

총소리 같은 나무망치 소리.

 


 

드디어 마지막. 진짜 아네트를 만날 때다. 많이 변했구나, 한 마디로 마리오네트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아네트. 헨리도 변했다. 확 짧아진 머리. 사람을 죽일 때마다 자신의 턱 끝을 물들던 붉은 상흔도 어느새 꽤 큰 크기로 자리 잡았다. 

헨리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며 아네트의 용서를 빈다. 하지만 아네트는 헨리와 안, 모두를 거부한다. 자신을 이용하려고만 했지 진정으로 아껴주고 사랑하지 않았다고. 특히 헨리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아네트는 눈물을 흘리며 다짐한다. 용서하지 않고, 잊지 않고, 강해지겠다고.

마리오네트는 죽고, 이제 아네트는 교도소 밖, 세상을 살아간다.

숨소리까지 허용치 않던 쇼가 끝났다. 엔딩 크레딧에서 우리는 배웅을 받는다. 어쩌면 그들을 배웅하는 걸까. 우리는 그들이 비춰주는 수많은 달을 보며, 길을 잃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테다. 달이 비추는 건 길이지만, 내가 비추는 건 나여야 한다. 남이 나를 어떤 식으로 보든, 내가 나를 잃는 순간 나의 심연은 괴물의 것이 될 테니까.

'괴물'이라고 해서 교활하고 치명적인 게 아니다. 옳고 그름의 판별 능력도, 상황 파악 능력도, 사랑할 능력도 대상도, 그 무엇도 없는 사람. 그러니까 줄이 달린 인형이 되는 셈이다. 그 줄을 끊는 건 결국 나의 보호자도 아닌 나 자신이고. 이 사실을 홀로 깨우친 아네트가 대견스러울 뿐이다.

 

 

 

 

*위 글은 씨네랩(https://cinelab.co.kr/)에서 초대권을 받아 참석 후 기고하였습니다.

작성자 . Hyellow

출처 . https://brunch.co.kr/@hyeandllo/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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