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로진2021-10-27 11:17:33
무심은 너무 쉽고 다정은 너무 어렵다
<디태치먼트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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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태치먼트(Detachment)'는 '무심'을 뜻한다. 애착을 뜻하는 'Attachment'에 부정 접두어 De-가 붙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애착의 반대는 무심이다.
열네 살 때 누군가가 물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뭔지 아니.
나는 대답했다. 미워하는 거?
아니. 무관심이래.
중학생의 감수성으로도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안다.
내가 미워하는 무언가는 나와 닮아 있다는 것, 미워하는 마음도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 정도.
결핍은 사랑 받기를 원했던 대상에게 사랑 대신 무심, 무관심을 받을 때 생긴다. 누구나, 여러모로, 다양한 종류의 결핍을 가지고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결핍이 애정결핍이 아닐까. 실제로 '나 애정결핍이야' 하고 말하는 사람도 꽤 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자. 그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나. 어린애처럼 행동하거나, 지나치게 의존적이거나, 자학적이거나, 너무나 거만하거나, 혹은 너무나 세상에 무심하거나. 프로이트식으로 심플하게 리비도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그러기엔 찜찜하고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무심은 사람을 건조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무심, 타인에 대한 무심, 세상에 대한 무심.
인터넷을 보다 보면 '중립기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자동차를 중립기어로 두면 자동차는 기울어진 방향, 즉 비중이 큰 쪽으로 미끄러진다. 중립과 침묵은 힘이 센 쪽을 지지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무심은 세상을 바꿀 수 없고, 힘 센 쪽이 제멋대로 세상을 굴려가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무심한 편'이라는 사람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무심할 수 있겠나. 우리는 쉽게 무심해지고, 노력을 필요로 하는 다정함을 잊는다.
애착과 관심이 필요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던 어른들 비슷하게 성장한 청소년기 정도. 다 큰 것 같지만 아기 같고, 아기 같지만 생각보다 성숙한 존재들. 누군가의 인정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들.
<디태치먼트>의 주인공 헨리가 기간제 교사로 만나게 되는 학생들도 그러한 존재들이다. 선생들이 기어이 학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학교의 문제아들. 아무리 앉으라고 해도,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선생의 권위 따위는 이미 저세상 갔다. 대관절 선생의 권위라는 건 무엇일까. 특히나 헨리가 가르치는 문학 수업 따위를 대체 어디다 써먹는다는 건가.
헨리의 반에도 헨리의 가방을 던지고, 위협을 가하려 하며 반항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러나 정교사가 될 생각이 없는 베테랑 기간제 교사 헨리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당신을 조져버리겠다는 학생을 '네 행동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며,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상대한다. 이렇게 대단한 선생이, 한 직장에 안정적으로 다니지 못하는 것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헨리는 배움이 왜 필요한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왜 배워야 할까.
그의 요지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배워야 한다는 것.
역설적으로 영화에는 마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한 트럭이다.
우선 헨리. 헨리는 어릴 때 엄마가 화장실에서 자살했고, 그 장면을 목격했다. 남겨진 헨리는 외할아버지가 키워주셨는데 그 할아버지도 치매다. 모두 다 잊어도, 딸이 화장실에서 죽었다는 사실만은 잊지 못한다. 화장실 문을 닫을 때마다 병원이 발칵 뒤집어진다. 학교에서 참을성 있던 헨리도 병원에서 실수로 화장실 문을 닫는 바람에 난리가 나는 것만은 참지 못한다.
그렇게 병원을 뒤집어놓고 엉엉 울며 버스에 탄 헨리의 눈에 몸을 파는 가출 청소년 에리카가 들어온다. 에리카는 말해 뭐하겠는가. 갈 곳도 없고, 몸팔아 번 돈으로 하루하루 그냥 존재할 뿐이다. 삶이라는 것도 없다. 헨리는 갈 곳 없는 에리카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에리카는 헨리가 당연히 관계를 요구할 줄 알았지만, 헨리는 에리카를 잘 돌봐준다.
학교 선생들도 다 상처투성이다.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학교를 책임지는 교장은 가뜩이나 학교도 머리가 아픈데 남편과의 관계도 엉망이다. 남교사는 학교 마치고 집에 가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다. 학교에 찾아오는 학부모들은 대개 반쯤 정신이 나갔다. 중요한 건, 그들이 학생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거다. 난 얘 뒤치닥거리 할 시간 없다. 학교에서 애를 잘 돌보면 집에서 신경 쓸 일이 없지 않느냐. 너희가 그러고도 선생이냐.
동네 이사장은 학교가 구려서 동네 땅값이 떨어진다고 한바탕 연설하고, 공개수업일에는 단 한 명의 학부모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메레디스. 학교에서는 레즈비언이라고 놀리고, 집에서는 뚱뚱하다고 윽박지르고, 제법 소질을 보이는 사진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한다. 햄버거 하나도 마음껏 먹지 못해 화장실에 숨어서 먹는다. 뭘 먹는 걸 보면 놀릴 테니까. 메레디스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찍는다. 그의 렌즈에는 사람만 있다. 헨리는 메레디스의 외로움을 빠르게 읽고, 에리카에게 한 것처럼 도움의 손을 뻗는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선생으로서 메레디스를 안아주었지만 메레디스는 이성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또한 청소년기에 흔히 느끼는 전위일 뿐일 것이다.
집에 있는 아버지와는 다른, 이상적인 아버지 상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얼마나 쉬운가.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는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이상적인 아버지'를 두고, 그런 남자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으며, 이상적인 아버지는 더더욱 힘들다.
썸타는 관계였던 동료 교사에게 목격되고, 아동성애자로 몰린 헨리는 종전에 볼 수 없던 분노에 휩싸여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얼마 뒤, 헨리에게 약속된 기간이었던 한 달이 끝나고 마지막 수업날. 그날은 메레디스가 예쁜 컵케익을 잔뜩 구워서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흰색 크림이 얹힌 컵케익들 사이에 검은색 크림이 얹힌 컵케익이 있다.
헨리가 검은색이 맛있어 보인다고 하자, 메레디스는 그건 자기 거라고 말한다. 컵케익을 손에 들고 있는 학생과 선생님들 사이, 처음으로 메레디스가 사람들 앞에서 컵케익을 입에 문다.
그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메레디스. 헨리는 인공호흡까지 하면서 메레디스를 살리려고 하지만, 결국 메레디스는 헨리가 보는 앞에서 자살한다.
헨리는 아동보호소에 보냈던 에리카를 찾아간다. 처음 보호소에 갈 때는 울고불고 난리였던 에리카도 나름 적응해서 잘 살고 있다. 헨리가 찾아오자 에리카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런 애다. 길거리에서 매춘을 하며 살 때의 되바라지고 무례한, 못된 10대가 아니다.
헨리의 행동이 과했는가. 오해를 살 만했는가. 아니다.
어른이 아이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호의 정도다.
약자 혐오가 만연한 현 시대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딱 <디태치먼트> 속 학교의 모습이 될 것이다. 주어를 지칭하기 어려우나, '그들'이라 하자. 그들은 한 번도 아이인 적 없던 것처럼 아이들을 혐오하고,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노인들을 혐오한다. 혐오의 지점을 발견한 자신을 예리하고 냉철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웃자고, 농담이라고,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다는 궁색한 변명들과 함께.
전세계 IT 강국 코리아에서는 혐오의 언어가 네트워크를 타고 광속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 '배움' 자체를 조롱하기 시작한 그들은 가르쳐주려는 사람에게 꼰대, 틀딱이라고 부른다. 사흘이 며칠인지 안다는 이유로, 명징과 직조라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아는 체 하는 재수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 조롱과 혐오의 언어만을 학습하다 보면, 그 언어의 화살이 마침내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헨리는 수업시간에 애드가 앨런 포의 <어셔 가의 몰락>의 한 문장을 언급한다.
"구역질나는 마음의 냉정함"
어찌 보면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의 배경 학교와 학생들이 꼴통인 지점은 비슷한데,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서는 어른이 존재하고, 어른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봐주며 관심을 갖는다는 차이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결과는 달라진다. 우리는 '마음의 냉정함'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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