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2021-11-13 13:13:51
[넷플릭스] 더 체스트넛 맨 [The Chestnut Man] 덴마크 드라마
형사물 / 다크 / 소설 원작 / 살인 / 몰입도 높음 / 덴마크 드라마 / 청소년 관람불가 / 넷플릭스 드라마 /
잔인하게 살해당한 시신 근처에서 밤과 나무로 만든 인형인 체스트넛맨이 발견된다. 범인은 누구고, 왜 이토록 잔인한 살인을 이어가는 걸까?
형사이자 싱글맘인 툴린은 사이버 범죄부로 옮기기 전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배당받는다. 인력이 늘 부족한 경찰에서 잘릴지 말지 애매한 포지션의 유랑자 헤스를 파트너로 삼게 된 툴린. 사회성은 없지만 실력만은 출중한 헤스의 능력으로 사건에 조금씩 근접해 간다.
더 체스트넛 맨 [The Chestnut Man]은 총 6회차로 호흡이 짧은 편인 드라마이지만, 높은 몰입도와 울림이 있는 드라마다. 잔잔하게 조여오는 심리 스릴러 분야에서 탁월한 덴마크 드라마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다.
시종일관 어둡지만 잔잔하고, 잔인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형사물이자 스릴러. 학대, 입양, 방치. 사회의 어두운면을 긁어내며 진행되는 이야기가 불편하지만 흡입력 높게 진행된다.
보통 드라마보다는 짧고, 영화보다는 호흡이 긴 작품이 보고 싶다면.
넷플릭스에서 더 체스트넛 맨 [The Chestnut Man]을 스트리밍 하시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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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언 쿠글러의 야심, 미쳤다!
<씨너스: 죄인들>을 보지 않는 자 모두 죄인!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있다. 올해 상반기 영화 중 가장 매력적인 영화라고 자부한다. 이토록 오감을 자극하며 이야기 자체에 빨려들어간 경험은 참 오랜만이다. 내 자신이 놀라웠다. 그도 그럴것이 이 영화는 미국 작품이면서 인종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 흑인 인권 역사를 그린 작품 아닌가. 외국인에게도 극 중 이야기를 설득시킬 정도니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연출력은 대단하다. 놀라웠던 건 감독이 비로소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쓴 오리지널 작품으로.
1932년,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마이클 B. 조던)은 시카고 갱단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미시시피로 돌아온다. 그리고 과거 운영했던 제재소 건물을 사들여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듣고 춤을 출 수 있는 술집을 연다. 이들의 컴백에 들뜬 건 음악 천재 사촌 동생 새미(마일스 케이턴). 목사인 아버지의 만류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형제가 운영하는 술집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곧바로 술집을 개시하고 백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마친 흑인들은 삼삼오오 이곳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들도.
<씨너스: 죄인들>의 장점은 너무나 많다. 이 말도 안되는 호러, 갱스터 액션 장르의 혼합, 그 안에 담긴 미국의 역사, 더불어 이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사용한 블루스 등의 음악이 너무나 잘 믹싱되어있다. 마치 섞일 것 같지 않은 다인종, 다문화 국가인 미국처럼 잘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이질적인 것들을 혼합한 감독의 재주는 가히 상상이상이다.특히 주목하고 싶은 건 앞서 말했던 야심이다. 영화를 다보고 나왔을 때 생각난 감독이 있었는데, 바로 조던 필이다. 조던 필 감독도 <겟 아웃> <어스> <놉> 등 호러 장르를 통해 미국 내 암울했던 흑인 역사를 길어올렸다. 특히 <놉>에서는 SF 장르와 호러를 혼합해 할리우드 영화 역사 속 알려지지 않았던 흑인들의 역사를 스크린에 투영했다. 그 노력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과 잘 부합시키면서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흑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보여줬다. 그만큼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그동안 마음 속 품고 있었더 야심을 드러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영화로 이 미국이란 땅에서 살고 죽은 흑인들의 대단한 역사를 꼭 보여주고 말겠단는 그 마음이 보였다.
그리고 3년 만에 라이언 쿠글러도 비슷한 야심을 드러낸다. 백인 경찰의 강압 수사에 목숨을 잃은 실화를 담은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를 시작으로, <크리드> <블랙 팬서> 시리즈 등 어떻게든 블랙 무비를 멋들어지게 만들어 낸 인물 아닌가. 드라마, 스포츠, 히어로 장르 영화를 거친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비로서 자신이 하고자 했던 영화를 만든 느낌이었다. 중요한 건 이 감독은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면서 그 영역을 점차 넓혀왔다는 점이다. 마치 그동안 쌓았고, 영역 확장을 해왔던 경험을 이번 영화에 쫙 풀어놓은 것처럼.
음악 활용도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음악을 매개체로 끈적하고도 소울풀한 블루스 음악은 극중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각 인물들의 감정선과 상황까지 전달한다. 특히 극 중 새미가 부르는 블루스는 모든 걸 초월한다. 인종과 시간, 문화의 벽을 허물고, 모든 게 다 혼재되어 있는 그 묘한 쾌감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에서 뱀파이어가 나타난 이유도 바로 새미의 블루스 음악 때문이다. 뱀파이어 무리들 또한 아일랜드 민요를 부르며 등장하는데, 이들은 새미 혹은 블루스를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극중 블루스나 아일랜드 민요는 각각 흑인과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대변하는데,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닌 고통을 잊게 하는 노동요이자 저항심과 희망,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 두 민족 모두 미국이란 땅에서는 피해자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백인 계열인 아일랜드인들은 도리어 흑인을 차별하고 공격하며 가해자가 되어 그들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이런 사회 역사적 부분을 음악으로서 구현해 낸다는 점은 영화의 의의를 더한다.
이 밖에도 <씨너스: 죄인들>은 매력이 많은 작품이다.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클 B. 조던의 1인 2역은 물론, 다양한 장르의 전환에서 빚어지는 당혹함과 흡입력, 귀를 열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음악 등등 알고 보면 더 많이 보이는 작품이다. 장르적 재미와 철학과 역사, 메시지까지 모두 얻을 수 있는 영화. 어찌 보면 영화 매체가 힘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작품이기도 하다. 점차 상영관이 없어지는 상황에서 만약 이 작품을 보고 싶다면 아이맥스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아이맥스로 보지 못해 지금도 후회한다 ㅜㅜ)
덧붙이는 말: 감독 만큼 음악을 담당한 루드비히 고란손의 OST는 미쳤다. 특히 극 중 새미가 부르는 ‘I Lied to You’는 대단하다. 블루스 음악의 힘은 물론, 이 음악이 퍼지면서 시공간의 문이 열리고 모두가 하나가 되는 영상이 구현된다. 마치 음악이 주는 마법의 순간을 구현한 것처럼 말이다. 그 하나됨은 정말 홀리하다. 당시 악마의 노래라 부르던 블루스라서 오히려 더 영적으로 들린 건가?
사진 출처: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평점: 4.5 / 5.0
관람평: 라이언 쿠클러의 야심!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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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 더 무비>와 <탑건: 매버릭>의 상관관계
OG vs NG
전설적인 파일럿 매버릭은 죽은 동료의 아들 루스터와 대립 관계를 갖는다. 한때 주목받는 유망주였지만 끔찍한 사고로 F1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추락한 소니 헤이스는 떠오르는 루키 유망주 조슈아 피어스와 갈등을 겪는다. ‘전설적인 노장이 현역으로 돌아온다.’ 구세대와 현세대의 싸움에서부터 공존을 겪기까지의 구조가 두 영화의 비슷한 형태이다.
결국엔 사람
OG vs NG라는 키워드는 <탑건: 매버릭>에서는 기계와 사람의 대비로도 볼 수 있다. 결말에서 매버릭과 루스터가 적진에서 탈출하기 위햏 구세대 전투기를 모는 것으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신형 전투기와의 압도적 기술 차이에도 불가능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은 결국 조종사라는 것이다. 기계가 사람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에 격하게 대항하는 ‘인간’을 구조적으로 드러낸다.
결국엔 팀 스포츠
소니 헤이스와 조슈아 피어스의 갈등은 레이스가 진행될수록 극대화된다. F1은 드라이버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팀 스포츠다. 그것이 바로 드라이버 챔피언십과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이 따로 있는 이유이다. 옐로 플래그, 피트 스탑을 이용해 유리한 순위를 만드는 방법을 택한 소니. 결국, 루키 스타 조슈아는 자신과 팀의 순위를 올려주기 위한 소니의 영리한 플레이를 깨닫고 그의 전술을 따르기 시작한다. 최단 시간의 피트 스탑, 우승할 수 있는 차, 날카로운 플랜, 그리고 드라이버의 실력까지 모두 따라주어야 포디엄에 갈 수 있고, 우승을 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결국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He is flying.” “그가 날고 있어.”
두 작품 모두 ‘나는 듯한 스피드 체험’을 선사한다.
가장 빠른 드라이빙은 2분 15초만에 임무 완수, 즉 전투기를 몰아 날아오르는 것과 같은 스피드를 선사한다. F1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랩을 흔히 ‘플라잉 랩’이라고 말한다. 극중 소니 헤이스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운전에만 집중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마지막 경기, 소니 헤이스의 질주에서 그대로 구현된다. 미션 완수와 레이스 우승. 모든 이들이 예상하고 기대하는 전개이지만, 나는 듯한 체험은 진부한 서사를 무마시킨다. 이는 극장에서 가장 압도될 수 있는 체험일 것이고, 극장가에서 많은 관객을 사로잡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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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달까지 가는 롤러코스터
DIRECTOR. 안드레스 후라도
CAST. 안토니오 자르코
SYNOPSIS. 냉전의 긴장 속, 콜롬비아와 파나마의 국경 지대 다리엔(Darién)에서 길을 잃은 우주 비행사들이 원주민들 때문에 놀라 깊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들이 목이 잘리거나 야생 식인종에게 잡아먹히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외계 우주 정복자 환영>은 열대 생존 훈련에 사용된 프로파간다 아카이브와 관련 영화들을 재조립해 우주 정복이라는 미션에 새겨진 식민주의적 내러티브에 도전한다.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첫 감정은, 역사 속에서 갈기갈기 찢긴 상처의 조각들을 퀼트처럼 엮은 영화 같다는 것이었다. 파나마의 정글에서 생존 훈련을 받는 우주 비행사들에 대한 뉴스 풋티지 영상을 보여준 다음 "원주민의 콜럼버스 발견은 그들에게 재앙이었다"는 텍스트를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방향성을 명확히 해 준다. 이 영화를 거칠게 요약하면, 달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야심을 식민지 혹은 제3세계 착취에 대한 야심과 대구를 이루도록 병치시켜, 조각조각 자르고 붙인 작품이다.
우선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어원으로 하는 국가명, 콜롬비아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많은 남미 국가들이 그렇듯, 콜롬비아 또한 원주민들이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땅이었다. 천문학과 금 세공에 능했던 무이스카족의 이야기는 훗날 서양에 '엘도라도' 황금 도시의 전설로 전해진다. 그리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 무렵, 스페인이 무이스카 왕국을 정복하고 오늘날까지 수도인 보고타를 설립하면서 길고 긴 식민지배의 날들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주민 인구가 급감할 만큼 잔혹한 학살이 있었다. 게다가 현지 주민들은 유럽인들에게 묻어 온 천연두, 홍역 등의 질병에 면역이 없었으므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은 당시 식민지에서 엔코미엔다라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다. 이는 해당 지역에 파견한 통치자에게 토지와 주민 통치권을 위임하는 것인데, 통치자는 노동력과 세금을 징발할 수 있었고 여기에는 보호와 기독교 개종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사실상 국가로서는 방임이었고, 통치자 입장에서는 현지 주민들을 쥐고 짜서 나오는 만큼 가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착취적인 강제 노동과 폭력으로, 사실상 노예노동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괴롭고 지난한 역사 끝에 마침내 19세기, 뜨거운 심장을 가졌던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독립군을 주축으로, 콜롬비아 사람들은 독립을 이룩한다.
하지만 독립국이 되었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는 미국과의 관계가 협력과 갈등 사이를 미묘하게 오락가락하는 20세기가 시작된다.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영토였는데, 파나마 운하 건설을 원했던 미국이 파나마의 독립을 지원해 버린다. 추후 보상금을 지급하고, 군사와 외교 문제로 미국과 협력은 깊어진다. 남미에서 콜롬비아는 미국의 주요한 "반공" 동맹이었다. 그 결과 영화에서도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미국과 콜롬비아가 협력한다는 내용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우주를 향한 야욕은 패권에 대한 야욕의 다른 표현일 뿐이었으므로, 닐 암스트롱을 비롯한 우주 영웅들이 콜롬비아를 방문했을 때 온 국가가 그들을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질문이 나온다. 저개발 제3세계 국가로서, 우주에 수백만 달러를 태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우주비행사들은 "달에서 돈을 찾은 사람은 없다."는 식의 정보값 0인 문장으로 대답한다. 할 말이 없었겠지.
그러나 달에서 돈을 찾은 사람은 정말 없는가? 애초에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에 충격을 받고 이룩한 성과로, 달 착륙은 철저하게 정치경제적 계산이 깔린 프로젝트였다. 물론 우리가 달에서 무슨 광물을 캐다 사는 건 아니니까 "향후 몇 년간 인류가 얻는 것은 정보일 것"이라는 닐 암스트롱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지만, 수많은 산업이 창출되고 국방 전략 자산화를 했던 것, 소프트파워를 과시한 것을 고려하면 다양한 유무형 자산을 얻은 건 사실이다. 뭐랄까, 1945년에 일본인들이 살던 집을 내버려두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들이 식민지배로 '돈'을 얻지 않은 건 아니니까.
식민지에 대한 착취는 언제나 다방면으로 이루어진다. 보고 있노라면 '달을 정복'하겠다던 옛 유럽인들의 상상도는 식민지를 향한 제국주의의 탐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래 전 유럽이 상상한 '달 정복'의 풍경은 이렇다. '야만인'과 '유인원'의 중간쯤 되는 존재들이 날아다니고 있고, 꽃잎 위에 여성이 자고 있으며 (와중에 망원경까지 쓰고 보고 있다), 낯선 동물들과 새들이 많다. 이들은 큰 범선을 타고 달에 날아가, '야만인'들의 목에 밧줄을 두르고 채찍질을 하고, 동물들을 사냥해 배에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오는 꿈을 꾼다. 나비 요정 같은 저 여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에서조차,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겠지. 하긴 우주비행사들도 '여성 우주인'이 있어서 안고 자면 좋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너네는 뭐가 그렇게 다 쉽냐?"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인디언'을 '발견'한지 20년 되었다고 그들의 '역사'를 쓰겠다더니, 그들은 '흥이 많고 호전적이다' 뭐 이런 소리나 하고 있다. '이우아나'라는 동물을 육상동물로 분류할지 수상동물로 분류할지 고민하다가 멋대로 어느 한쪽에 귀속시킨다. 이 동물은 훗날 생존 훈련을 받는 우주비행사들에게 먹이로 주어진다. 늘 이런 식이지. 신비화하는 동시에 그 신비를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 것.
이우아나를 보며 일제 강점기 때 숱하게 사라진 우리 개 '동경이'를 떠올렸고, 회사를 차려 금을 채취하는 장면을 보면서 구한말부터 우리도 겪은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픈 사람들을 보낸 곳이 있다기에 병원이라도 지었나 했더니 거기서 '하이바나'를 했단다. 약초에서 기인하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것. '하이바나'가 샤먼이라는 의미임을 생각하면, 치료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자화된다. '인간 사냥꾼', '금속을 좋아하는 사람들' 같은 식으로 신비화되고, 철저하게 세팅된 자리에서 우주비행사가 이들을 만나는 자리를 '크로스-컬처'한 경험이라고 한다. 어떤 문화도 넘나들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이 이제는 언어까지 반지르르하게 넘본다. 대책 없는 착취. 상대를 지속 가능하게 두지 않는 착취. 그게 식민지의 본질이다.
이 모든 야만은 지난 세기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선언하듯, 이 영화는 시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듯한 옛날식 노이즈로 덮여 있다. 오래 전의 풋티지뿐 아니라 모든 장면이 그렇다. 일정한 화면비 안에서 펼쳐지지도 않는다. 달 모양으로 둥근 화면만 한참 보여 주기도, 화면을 양분해 멜리에스의 영화 한 장면과 현실을 나란히 보이기도 한다.
각종 풋티지가 빠르게 전환되고 많은 부분이 텍스트 자막으로 처리되어 지나가다 보니, 배경 지식 없이 이해하는 게 쉽지는 않다. 느낌만으로 따라가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앞에서 뿌린 ("갑자기 왜 이구아나?") 내용이 뒤에서 대구를 이루며 거두어질 때, 그리고 거기서 야만성의 편린이 드러날 때 한 번씩 가슴이 철렁한다. 그래도 가장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은 역시 마지막 풋티지일 것이다. 광고 문구처럼 빠르고 현란하게 지구가 아프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이 식민지배의 야만이 우리 모두의 것임이 피부로 와 닿기 때문이다.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매단 돛단배를 타고 달까지 도달한 순간, 내가 타고 있는 것이 롤러코스터임을 깨닫는다. 신기한 영화적 경험이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30-05.09) 상영일정]
2025.05.02 17:00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
2025.05.03 17:00 CGV전주고사 8관
2025.05.07 20:30 CGV전주고사 8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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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렇게 산이 되었다
간만에 마이너한 영화를 보았다. 정말 러닝타임이 긴 영화였는데, 그만큼 여운도 긴 영화였다. 한 남자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을 넘어 중년을 향해 가는 나이까지를 그린 영화인 만큼 꽤나 대서사시인데, 영화는 고요한 분위기를 놓지 않는다. 마치 우리네의 인생의 대부분은 별일없이 흘러간다는 듯이. 별일 없이 흘러가는 듯 보였지만 고뇌의 끈을 놓지 않았던 주인공의 치열함은 결국 그에게 삶을 선사했다. 비로소 만족할 만한 사람도 얻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도 생기는 희노애락 말이다.
1. 어릴 적 친구에 대한 기억이란
나도 10대때의 기억을 점령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 10대에 주된 기억에 그들이 남아있다. 내 생일 축하 파티에 놀러오던 그들, 가끔은 쓸데없는 기싸움을 하기도 하던 그들처럼 피에트로에게도 브루노는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이었다. 재미없는 도시가 아닌, 예상할 수 없는 일이 가득한 자연에서의 삶을 당연하게 여기던 브루노는 피에트로에게 신기하고도 대단한 아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과 산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피치 못하게 헤어졌을 때에도 꾸준히 서로에 대한 기억을 놓지 못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고, 서로를 좋아했고, 헤어짐이 아쉬웠기에 기억이 오래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2. 사람에게는 각자의 때가 있다.
피에트로는 브루노와의 갑작스런 이별 이후, 많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석 엘리트 코스를 권하는 부모에게 반항을 하고, 내외하면서 살다가 어느 날 아버지의 죽고 나서야 집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불효자가 따로없다. 그 이면에는 친우였던 브루노의 인생에 함부로 개입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는 불만도 있었을 것이고, 틀에 박힌 길을 가고 싶지 않은 그의 모습을 받아들여주지 않은 부모에게 본 때를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이 브루노와 피에트로, 그 둘을 다시 연결시켜 주었는데, 둘은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았던 산 속 집을 지으며 다시 새로운 우정을 쌓아나간다. 그 과정에서 브루노는 본래 자신의 터였던 시골, 자연과 함께하며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낸다. 목장을 지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이다. 참으로 그다운 생각이었다. 거침없이 자신의 뜻을 펼쳐내는 그를 보며 피에트로는 조바심에 사로잡힌다.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 친구에 대한 부러움 등이 그를 고뇌에 빠지게 하려던 찰나, 그는 브루노의 응원을 받고 다시 글을 쓴다. 그리고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찾아간 히말라야에서 사랑하는 여자도 만나고, 그의 인생에 화양연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참 인생은 간사하게도 피에트로에게 봄을 주면서도 브루노의 인생에는 겨울을 준다. 이번에는 브루노가 피에트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간다. 그 교차점을 보면서 '인간은 다 자신의 때가 있구나'라고 느꼈다. 브루노의 화양 연화, 피에트로의 화양연화, 그 시기가 같을 수만은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보면서 괜히 씁쓸했고, 가슴이 아팠다.
3. 산에게 던진 각기 다른 질문
피에트로는 산에서 자아를 찾았다면 브루노는 산에서 살고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계 속 규칙에 맞춰 살려다 보니, 가랑이가 찢어져 버린 것이다. 둘 다 산에서 자신의 답을 찾았지만 산에게 묻는 질문이 달랐고, 그에 따른 답과 결과도 달랐던 것 같다. 피에트로는 산에서 아버지를 발견했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이해하며 자신의 한계를 뚫고 나갔다면, 브루노는 산이 만든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우물 안에서 허우적댄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도시 사람인 피에트로에게 산은 새로운 정답을 선사해 줄 수 있는 곳이지만 브루노에게 산은 고향이지만 자신이 뚫고 나가야 할 한계점이기도 했다. 브루노의 조상은 자연을 벗어나 본적이 없고, 도시 속 인간의 삶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기에 브루노에겐 그것이 더욱 익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도 자급자족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기에 인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브루노는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 약간의 교육이 필요했고, 그 지점을 피에트로의 부모는 궤뚫고 있었지만 브루노의 아버지가 그 기회를 날린다. 그저 자연이 좋았던 어린 피에트로에게는 그런 부모의 행동이 브루노의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했겠지만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엄연히 입장이 달랐던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부모는 오히려 현명한 판단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둘을 보면서 느낀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곳에 있어도 누군가는 오답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정답을 도출해 낸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오답을 발견한 사람은 영원한 실패자일까? 아니다. 그 사람의 답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피에트로의 답이 산에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브루노의 답은 도시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4. 동네 산의 꼭대기를 정복해 산이 되어버린 브루노, 그를 기억하는 피에트로
피에트로는 브루노와 술을 마시면서 자신들의 아지트와도 같은, 그 오두막이 지어진 산을 정복한 자가 브루노고 자신은 그 산을 제외한 여덟개의 산을 정복한 사람이라면 둘 중 누가 더 우월할까를 대결한다. 이 대사가 이해될 듯 말 듯 했는데, 아무리 피에트로가 히말라야를 오르고, 명산에 올라도 그에게 있어 마음 속 에베레스트는 브루노와 놀고, 집을 함께 지었던 그 뒷산인 것이다. 그의 마음 속 에베레스트를 쥐고 흔드는 브루노는 다른 어떤 명산을 다녀온 그보다도 더 우월한 존재로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그는 다시는 그 뒷산을 올라가지 못하고, 다른 낯선 산들만을 해매고 다닐 것이다. 피에트로에게 그 뒷산은 곧 브루노이기에, 낯선 산들을 해매며 브루노를 향한 미안함, 슬픔을 게워낼 것 같다. 청년이었던 피에트로에게 아버지가 자아를 찾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면, 중년에 나이에 다가서는 피에트로에게 브루노가 그의 인생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피에트로 마음 속의 에베레스트, 마음 속 중심이 되어 그의 남은 인생 산행의 별빛이 되어 길을 밝혀주고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아, 이 영화는 산을 담아내는 카메라 무빙이 정말 장관이다. 보실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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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연과 상상(2021)> 리뷰
-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을 감상했다. 러닝타임은 두 시간가량이지만 세 개의 옴니버스가 엮인 영화이기에 각 단편은 30-40분쯤 된다. 이것은 각본이 의도적으로 특정 주제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실제로 영화는 각기 다른 상황의 인물이 ‘우연’ 속에서 ‘상상’하는 모습을 거듭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끊임없이 기대 지평을 배반하는 각본을 통해 관객 역시 영화를 감상하는 도중 여러 상상을 하고, 자신에게 이러한 우연은 없었는지 생각하게 되기에, 제목 자체가 적지 않은 확장성을 지닌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우연과 상상이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보편 경험일 테니.앞서 언급했듯 <우연과 상상>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기묘한 애정 전선을 통해 우연이 낳은 상상을, ‘문은 열어둔 채로’는 앙심을 품은 개인의 상상과 우연이 맞물리며 맞이하게 되는 어떤 파국을, ‘다시 한번’에서는 우연과 상상이 동시 결합하여 빚어낸 가슴 아린 재회를 그린다. 모든 에피소드는 단절되어 있으나 대다수의 장면이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선 분명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특별한 액션이나 빠른 화면 전환조차 없어 단조로워지기 쉬운 세 개의 단편에 감독은 121분 동안 ‘우연’과 ‘상상’을 예상치 못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매번 새로운 활력과 긴장감을 불어넣는데, 이 솜씨가 정말이지 굉장하다. 상영관에서 다른 관객과 웃음과 탄식을 공유하는 건 참 오랜만이었지 않았나, 생각했을 만큼.※ 이하 스포일러 주의세 에피소드각 에피소드의 플롯을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우연히 태어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츠구미(현리)는 업무를 통해 친해진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에게 최근 만난 한 남자,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에 대해 말한다. 그는 아직도 2년 전 헤어진 전 여자 친구를 떠올릴 만큼 순정이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소중했던 순간을 말하는 츠구미의 이야기가 너무도 따뜻한 탓에 그와 카즈아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는 즈음, 영화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카즈아키의 전 여자 친구가 바로 메이코라는 사실이다.두 번째 이야기인 ‘문은 열어둔 채로’ 역시 첫 번째 에피소드처럼 세 사람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취업이 예정되었던 사사키(카이 쇼마)는 교수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가 재학 중 취업자에 대한 특례 인정을 해주지 않아 유급생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어그러진 것에 대해 세가와를 원망하고,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자 불륜을 저지르는 파트너이자 늦깎이 대학생인 나오(모리 카츠키)에게 교수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오는 문이 열린 세가와 연구실에서 그의 신작 소설(심사위원조차 노골적인 행위 묘사라며 지적했던 페이지)을 낭독한다. 연구실의 문이 열려있는 동안엔 그 누구도 나오와 세가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나오의 녹음 파일이 타인의 손에 떨어짐에 따라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운명을 겪게 된다.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번’은 20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의 이야기다. 동창회에 어울릴만한 타입이 아님에도 그는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향을 찾는다. 허탕을 쳤다고 생각했으나, 우연히 나츠코는 기차역 앞에서 아야(카와이 아오바)를 마주한다. 아야의 집에 초대된 후에야 나츠코는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유키)이 아닌 걸 알고, 아야 역시 도쿄로 갔던 다른 동창과 나츠코를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둘의 이야기는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한다.우연/상상을 포용하는 인간의 선택우연이란 무엇인가? 하마구치 감독은 "우연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라고 말했다는데, 운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의 입장에선, 완전한 필연이란 조작된 가상의 세계 – 시나리오 따위 – 에서만 허락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 중 결국 우리가 ‘기억하기로 선택'하여 우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일련의 사건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무엇이지 않을까.만일 우연을 관계에 기초한 불확실성, 그러니까 타인과 자신이 유관하다는 전제 하에서 발생하는 불확실한 사건들의 연속이라 정의한다면,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메이코는 우연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메이코는 자꾸만 모르겠다는 말을 거듭한다. 무책임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메이코에게 있어 ‘모르겠다’는 고백은 자신이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런데 메이코가 츠구미의 이야기를 듣고서 카즈아키를 2년 만에 찾아갔을 때, 관계의 주도권이 옮겨간다. 카즈아키는 분명 헤어진 후에도 메이코를 잊지 못했지만, 최근 관심이 생긴 사람이 그가 아니라면 메이코를 따라가지 말라는 부하직원의 충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 산재한 우연이 인간에게 운명처럼 다가온다고 생각하지만 우연은 기실 우리가 인지하고 운명이라 받아들이는 순간 발생한다는 것을 이보다 더 근사하게 비유할 수 있을까. 결국 메이코는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홀로 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그가 찍는 것은 완공되지 않은 거리의 풍경이며 나뭇가지로 막혀 트이지 못한 하늘이다. 메이코는 예기치 않게 진실을 발견하였을지라도 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불확실성을 확언하는 데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메이코이기에 그가 사랑을 인식하는 데에 시간이 소요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순간이 자신만을 위해 적절하게 찾아오지는 않는 법이니, 상실 역시 마땅한 결과물로 받아들여야 하리라.이렇게 우연 자체의 속성을 파고든 이후 등장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감독은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가 우연이라 적당히 부르는 사건이, 사실은 스스로가 뿌린 씨앗의 결과물이 아닐까 의심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나오와 세가와의 이혼/지위 박탈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사사키의 비대한 자아(자신은 이보다 더 나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를 접점/시발점으로 하여 파생되었을지라도, 뜯어보면 인물 각자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사키는 자신이 프랑스어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으며, 나오는 가족이 있음에도 내연관계를 저버리지 않았고, 세가와는 나오에게 녹음파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나. 그리고 5년 후, 나오와 사사키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다.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속성조차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인생에서 필요하다고 말한 세가와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인지 나오는 사사키를 껄끄럽게 대하던 태도를 철회하고 자신의 명함을 건넨 후 세가와와의 관계를 회복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이는 이전보다 성숙한 모습이었으나 사사키는 거부한다. 나오의 손을 빌려 세가와를 응징하는 데에 성공했음에도 사사키는 자기 우월감에 도취된 상태에서 답보하는 셈이다. 이에 나오는 자발적으로 유혹을 선택한다. 그저 한 번의 마주침으로 끝날 수 있었던 긴장은 그리하여 연장되고, 우연이란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 동일한 패턴으로 영원 회귀할 수 있음이 암시된다.마지막 에피소드는 '당신은 분명히 내 기억 속 누군가일 것'이라는 믿음이 부른 상상의 부산물이다. 충분히 어색해질 수 있음에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완전히 정립한 중년은 흔들리지 않는다. 서로를 나츠코의 옛 연인/아야의 친구라 상상하며 역할극을 진행함으로써 나츠코는 하지 못한 말을 토해내고, 아야는 자신조차 바라보지 못했던 내면을 이끌어낸다. 마음 깊은 곳의 공허를 메웠다기보다는 공허를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은 두 사람은 묘한 연대를 이룩하고, 이는 역 앞에서 헤어지던 순간 아야가 동경했던 20여 년 전 동창의 이름을 나츠코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 아야가 기억해낸 이름이 노조미(소망)이라는 점은 퍽 의미심장하다. 이렇듯 우리는 우연을 통해 후회를 털어내거나 잊었던 꿈을 되찾음으로써 성장할 수도 있는 셈이니,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에게 덤블도어가 건넨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해리,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거란다."영화를 본 후, 우리네 일상을 시나리오로 만든다면 이보다 더 엉뚱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촌극에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영화든 현실이든 기대를 배반당하는 지점은 한결같이 우스꽝스럽다. 역시 삶은 원경에서는 비극처럼 보일지언정 가까이에선 희극인 모양이며, <우연과 상상>은 그런 점에 있어 더없이 훌륭한 리얼리즘 영화일 것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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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니까 청춘 아니고, 청춘시련
영화 <청춘시련> 포스터
청춘시련 (Terrorizers, 2022)
장르 : 대만, 멜로·로맨스 │ 감독 : 호위딩
출연 : 이목(유팡), 임백굉(밍량), 진정니(모니카), 임철희(장둥링)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러닝타임 : 127분아프니까 청춘 아니고, 청.춘.시.련
청춘이라는 단어는 왜 그리 힘든 단어랑 잘 어울릴까. 아프니까 청춘이었는데, 이번엔 ‘청춘시련’이다. 청춘들의 편린을 그려낸 대만의 한 영화 제목이다. 사실 포스터나 제목만 보고는 그저 그런 로맨스일 거라고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영화에는 다양한 주인공들이 나온다. 이야기는 하나로 연결되지만, 주인공의 시점에 따라 옴니버스처럼 펼쳐지는 구성이다. 맨 처음 그려지는 이야기는 귀여운 외모의 여성 ‘유팡’과, 누가 봐도 착하고 건실하게 생긴 남성 ‘장둥링’의 로맨스다. 남자가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여성은 이에 넘어가고, 비 내리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로맨틱하게 키스하고, 미래를 도모하고..., 여기까지만 해도 이 영화는 그냥 일반적인 로맨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기차역에서 칼을 든 채 유팡을 향해 달려드는 남자로 인해 영화의 장르는 바뀌어버린다.
그 남자는 왜 칼을 들었을까
유팡을 향해 칼을 들고 달려든 남자는 ‘밍량’. 유팡과 함께 살던 동거인 남성이다. (동거‘남’이 아닌 정말 공간만 셰어 하는 동거‘인’이다) 영화 초반, 소극적이고 과묵하게 그려지는 밍량을 보고 “아, 유팡을 사랑했던 거구나. 그런데 장둥링한테 뺏겨서 화가 났구나. 그래서 칼을 들었구나”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칼을 들어도 분명 미친놈이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하지만 영화는 시점을 꼬아, 이번엔 ‘모니카’라는 여성을 비춘다. 모니카는 진정한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무명배우다. 하지만 배우로 먹고사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고, 현실과 타협해 한 포르노 사이트에 배우로 출연을 하게 되었다. 운명은 장난과도 같았고, 그렇게나 영화배우로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마음과는 달리, 사람들은 포르노에 나왔던 그녀를 무척이나 특별하게 기억한다. 야릇한 표정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듯한 모니카의 연기에 압도당한 팬들 중에는, 유팡을 향해 칼을 들고 달려들던 ‘밍량’도 있었다.
밍량은 포르노 사이트에서 보게 된 모니카에게 정말이지 홀딱 반했다. 그 이후 그녀를 마치 자신의 실제 여자 친구처럼 여기며 몰래 집에도 드나들고 온갖 비밀스러운 스토커 행세를 하고 다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 밍량은 왜 모니카가 아닌 유팡에게 칼을 휘두른 걸까.
진짜 로맨스는 여기에 있었다
다시 영화의 시점은 바뀌고, 이번엔 모니카와 유팡이 함께 등장한다. 모니카와 유팡은 극단에서 만난 사이다. 처음에는 서로를 응원하는 동성친구라고 생각했으나, 둘은 연인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모니카는 배우로 먹고사는 일이 더 급했고, 여차저차 상황에 쫓겨 호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렇게 비극적으로 헤어져야만 했던 여성 커플의 로맨스 뒤로, 건실한 청년 장둥링이 등장한 거였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그제야 퍼즐이 후드득 맞춰진다. 영화 초반에는 조명되지 않아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을 알고 나자, 같은 사건인데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유팡을 향해 칼을 휘두른 밍량은, 유팡을 사랑한 게 아니라 질투한 것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는 가상 여자 친구 ‘모니카’와 사랑을 나누고 몸을 섞는 유팡이 증오스러웠던 것.
그래서 이 영화 뭔 내용인데? 누가 악역인데?
하나의 완벽한 서서를 알고 나자 영화는 괴기스럽기도 하고, 많이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야기’라는 것의 본질적인 특성이 아닐까 싶었다. 이야기란 화자에 의해 조각나고 편집되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살면서, 한 사건이 당사자들에 의해 다르게 엇갈리는 것을 마주하곤 한다. 같은 사건인데도 A가 기억하는 것과 B가 기억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관에 의해 어떤 부분은 거세되고, 어떤 부분은 과장된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결국 누구의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색깔은 달라질 수밖에. 갱생이 불가한 미친 스토커로만 생각했던 ‘밍량’도 순수한 여고생 ‘키키’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구원해준 고마운 사람이 되고 만다. 이렇게 주관에 따라 극명하게 갈려버리는 서사를 보며 관객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누가 나쁘고 누가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그 시절은 그 자체로 혼란이고 시련이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조금 불투명했으나,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대만의 청춘들이 한국의 청춘들과 크게 다르지 않고, 그 시절은 누구나 뜨겁고 혼란스럽고 세상에서 제일 소란스러운 세계라는 것만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제목 그대로, 청춘은 시련 그 자체다. 연인은 떠나가거나 배신하고, 정립되지 않은 자아는 불안으로 요동친다. 그 시기를 지나,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언제 처리할 것이냐가 제일 큰 소란이 된, 30대의 내 고요한 삶이 조금은 고맙게 느껴졌다.
영화 <청춘시련> 스틸컷
가끔 뜨거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프냐고 묻는다면 아니. 이렇게 영화를 통해 간접 체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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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주 최신 개봉영화(베놈2, 졸트, 실: 인연의시작, 십개월의 미래, 푸른호수)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0월 2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베놈2 #졸트 #실 인연의 시작 #십개월의미래 #푸른호수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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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소설과 비교분석하는 영화 '그것2' 리뷰
스티븐 킹의 동명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 비교
그리고 소설에서 빠진 설정과
이에 따른 영화 "그것:두 번째 이야기"의 개연성 논란#그것2리뷰 #그것2 #영화그것두번째이야기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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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베테랑2> 인터내셔널 예고편
칸에서 제일 먼저 공개되는 인터내셔널 예고편! 베테랑 형사가 말아주는 원조맛집 GRAND OPEN? 황정민X정해인, 박진감 넘치는 액션&최강 케미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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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적인걸 : 흑사병의 비밀> 예고편
흑사병이 창궐한 병주성 남쪽.
병주성 도독부는 그 즉시 병주성에 봉쇄령을 내리고
발길이 묶인 백성들은 성안에 갇혀 두려움에 떠는데...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명탐정 적인걸이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