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epless2021-11-18 11:36:46
중국의 포용일까, 포섭일까?
할리우드 장기 상영
중국 영화 당국이 11월 17일 수요일, 할리우드 개봉작인 <듄>과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지역 극장에서 한 달 추가 상영하기로 결정하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2달 내내 세계 최대 영화 시장에 걸려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10월 22일 개봉작인 <듄>은 12월 22일까지, 10월 29일 개봉작인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12월 29일까지 상영될 예정인데요. 세계적으로 극장이 살아나는 연말 상영이 확정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입니다.
중국 시장에서 영화들은 기본 한 달 동안 상영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흥행이 보장된 영화의 경우 두 달까지 연장될 수 있는데요. 그 이상의 장기 상영은 '선전 영화'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2020년 7월부터 2021년 4월까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약 3달 동안 상영되었던 할리우드 대작들 덕분에 중국 시장도 한 숨 돌릴 수 있었 던 건 사실인데요. 이 시기에 할리우드 영화들이 중국 시장 매출 회복에 도움이 된 것이 이번 연장 상영에 기여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듄>과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팬데믹 이후 할리우드 첫 연장 상영작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2021년 5월 이후 그 어떤 영화도 중국 시장에서 1달 이상 상영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데요. 심지어 지난 5월 21일 개봉한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가 중국 시장에서 2억 400만 달러를 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7월 1일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영화 상영을 위해 한 달 만에 극장에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8월 말 개봉한 <프리 가이> 역시 9,48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충분한 흥행 성적을 달성하였음에도, 10월 1일 국경절로 인하여 극장에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세계 최대 시장이 된 중국 시장에서 할리우드 대작들이 연장 상영을 따낸 것이 제작사 입장에서 반가운 소식임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듄>과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연장 상영 기간동안 기타 중국 영화들에 밀려 충분한 스크린 수를 확보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기에 큰 매출 상승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현재까지, <듄>은 중국에서 세계 매출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인 3,900만 달러 (약 2억 4900만 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경우, 전 세계 매출 7억 달러 중 6,290만 달러를 중국 시장에서 벌어들였는데요. 이는 중국 시장에서 각각 흥행 수입 영화 7위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향후 더 커질 가능성이 큰 중국 시장인 만큼, 할리우드 대작들이 중국 작품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팜을 가져갈 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바입니다.
위드코로나와 함께 다양한 영화들이 극장을 찾아주고 있는 요즘
극장 영화들과 함께 영화로운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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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죠스는 인재(人災) 영화다
줄거리
애미티는 여름 피서객을 상대로 한철 장사를 하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그러나 해수욕장 개장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의 마을에 비상등이 켜진다. 바다에서 상어한테 물어뜯긴 듯한 시체를 발견한 것. 바다를 싫어하는 경찰서장 브로디는 당장 해수욕장을 폐쇄하지만, 시장은 장사를 해야 한다며 경비를 강화하고 그대로 해수욕장을 열기로 한다.
결국 한 소년이 상어의 습격을 받게 되고, 시장은 그제야 상어를 잡아야 한다는 브로디의 말에 따른다. 많은 상어 사냥꾼이 몰려오지만, 브로디의 눈에 띈 건 딱 두 명. 상어를 연구하는 박사 '매트 후퍼'와 마을의 어부인 '퀸터' 선장. 세 사람은 함께 상어를 사냥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감상 포인트
1. 눈썰미 좋은 사람들한테는 티날 수 있지만, 나 같은 막눈에게는 상어가 제법 리얼하다.
2. 언제 일이 터질 지 모른다는 압박감과 공포감으로 보는 영화.
3. 죠스는 과연 천재(天災)일까, 인재(人災)일까.
감상평
'빠밤~ 빠밤~'
지금 아무런 음이 없는데도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죠스]라는 영화에서 이 음악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려준다. 엄청난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하면서 평화로운 화면에서조차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마력의 음악이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컨저링이 개봉할 당시에 포스터에 적혀있던 말이다. 이 말의 시초가 바로 죠스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영화 [죠스]는 상어에 관한 이야기지만 상어가 나오는 장면은 손에 꼽는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완벽한 상어 모형을 만들고 싶어 했지만, 결국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봇까지 만들었지만 물에 들어가니 고장 났다고.
오히려 그게 감독에게 발상의 전환을 안겨준 셈이니,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상어 나오는 장면 없이 무서운 상어 영화"를 만든 셈이다.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다리, 그런 사람에게 다가오는 지느러미, 상어 시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여기에 깔리는 음악까지. 더할 나위 없이 무섭다.
게다가 실제로 상어 사냥을 나갔을 때는 그들의 배에 접근하는 노란 부표만으로도 엄청난 긴장감을 보여주고, 부표의 거센 움직임으로 긴박한 전투를 보여주었다.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옛날 작품이다 보니 모형이 리얼하진 않다. 전체적으로 튀어나오는 모습을 볼 때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왜 이 모형을 숨기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은.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막눈이라서 그런지 '그래도 제법 리얼한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같이 보던 동생은 모형인 게 너무 티 나서 순간 긴장감이 확 죽어버렸다고. 눈썰미 좋은 살마들은 웬만해선 흐린 눈 하고 보기를 추천.
상어보다도 내가 더 관심 있었던 것은 인간의 욕망이었다.
서장이 자신의 권위와 장사 수익만을 위해 해수욕장을 열었기 때문에 어린 소년이 희생당했다.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는 점에서 이건 인재(人災)였다. 그래서 아이의 엄마가 검은 장례식 복장을 입고 우는 장면에서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개봉한 영화인데, 왜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날까.
게다가 그런 어머니를 옆에는 버젓이 거짓말하는 인물들이 서 있다. 바로 상어 사냥꾼들. 영화 내에서 유추해 보자면, 그들은 상어를 직접 잡은 게 아니라 어디서 가져온 상어를 잡아온 것처럼 말한다. 실제로 소년을 잡아먹은 그 상어가 아닌데도 말이다. 그리고 서장은 이 거짓된 사진을 앞세워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생각밖에 없다. 결국 희생자의 부모 앞에서도 욕망에 젖은 이기적인 인간들의 모습은 상어의 모습보다도 소름이 끼친다.
영화 [죠스]는 이런 인물들 간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어 사냥을 나가는 세 사람의 모습을 더 집중적으로 비출 뿐이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이런 비판적인 이야기를 주류로 다룬다고 한다. 원작 소설이 있었다는 건 영화를 보고 알았는데, 오히려 영화보다 책이 나와 더 잘 맞을 것 같다.
더불어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걸 느꼈다. 상어를 잡는 사냥꾼들이나, 퀸트 선장을 보며 회의감이 들었다고 할까. 특히 퀸트 선장의 배에 수많은 상어 이빨을 보며 역겨웠다. 그냥 해수욕장을 비워서 먹이가 없다는 걸 알았으면 상어는 다시 해안가로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애당초 상어가 해안가로 온 이유도 먹이가 부족해서는 아니었을까.
여러 이익이 충돌하는 현대 사회에서 오로지 답은 없겠지만, 상어가 갑자기 나타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변했을 때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우린 때론 그 이유를 찾기보다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해결하는 데에 더 목을 맨다.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왜?'를 묻는 것이다.
영화 [죠스]에서도 사람들이 조금만 더 '왜'를 물었더라면 훨씬 나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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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뇨 아빠가 인간이었을 때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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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타공인 '지브리 스튜디오'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 덕후다. 일본 방송에 지브리 매니아로 두 번이나 방송에 나간 적도 있다.
영상을 보면서 환경을 생각하게 된 것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클지도 모른다.
<벼랑 위의 포뇨>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에 4년 만에 들고 온 신작이었다. 은퇴한다고 했었는데 새로운 작품이 나온 것도 기대되었지만 이번에는 어떤 내용으로, 어떤 캐릭터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줄까 매우 기대가 되었다.
포뇨를 본 뒤, 어른을 위한 동화를 기대하고 있었던 팬과 평론가들에게는 실망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귀여운 포뇨와 소스케 때문이 아니라 포뇨의 아빠 때문이었다.
<벼랑 위의 포뇨>는 호기심이 어마어마한 물고기 소녀 포뇨가 육지의 소년 소스케를 만나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마 인어공주를 재해석하여, 혹은 모티브로 하여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 역시 다른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과거로의 회귀', '자연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그 깔려있는 스토리는 포뇨의 아빠가 끌어가고 있다. 포뇨의 아빠라고 부르고 있지만 엄연히 '후지모토'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그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리뷰라고 하지만 상상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봐도 무관할 것 같다. 후지모토는 인간이었다. 아니, 아직까지 바닷속에서 편하게 숨을 쉬지 못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애를 잃고 바다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다. 인간인 소스케를
좋아하는 딸 포뇨가 육지로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그는 딸바보, 극성 아빠라며 수많은 욕을 먹었지만 그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주는 이는 없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포뇨의 등장은 쓰레기가 가득한 바다로부터 시작한다. 인간들은 바다에 쓰레기를 마구 버렸고 그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배는 그물을 이용해 바다의 바닥을 긁어낸다. 쓰레기만 치우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다 보니 바다의 생물들은 쓰레기 때문에 피해를 받고, 쓰레기를 치우는 과정에서도 또 피해를 받는다. 인간으로 인해 자연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후지모토가 육지로 올라갔을 때 깨끗한 물을 주위에 뿌리는 행동이나(물론 제초제로 오해받았지만) 소스케와 차를 타고 가는 포뇨를 따라가면서 바닷속의 쓰레기에 계속 맞는 모습으로도 확인할 수도 있다. 후지모토가 더러워진 모래와 뻘에 질색팔색 하는 것은 덤이다.
후지모토가 말하길 그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는 언제부터 인간이길 포기했고, 언제 바다의 여신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까?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일까? 이는 그는 말한 것으로 조금은 추론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물과 공기는 더럽고 인간은 어리석은 생물이다. 인간은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갈 뿐이다."
"나도 한때는 인간이었고, 인간을 그만두기 위해 얼마나 노력..."
아마도 그는 어느 사건으로 인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바다의 여신과도 만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으로 인해 죽을 위기였으나 바다의 여신이 구해줬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포뇨의 현재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는 그는 떨린다며 혼잣말을 했다. 그 떨림은 과연 설렘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이 의문 역시 그가 바다의 여신을 만났을 때 그녀의 손길이 그에게 닿았을 때 확신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 모습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두려움 혹은 경이로움에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떨어진 생명의 물을 먹으러 바다 생물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바다의 결계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한다. 후지모토는 인간이 망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인간이 너무 우점해 있고, 그로 인해서 다른 자연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간 것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되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아놓는 우물의 방의 번호는 1907이다. 1907년은 환경운동의 역사에 한 축인 '레이첼 카슨'이 태어난 해이다. 방 안에 있는 병에 쓰인 숫자인 1957년에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민간 환경운동 단체인 '시빅 트러스트'가 만들어졌고, 세계기상기구가 주관하여 체계적으로 오존량을 관측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병의 숫자인 1871년은 찰스 다윈은 식물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친구인 조셉 달톤 후커에게 진화론의 가설을 편지에 써서 보낸 해이면서 '인간의 유래'라는 책을 출판한 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인지 후지모토가 언제부터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인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이 오래되었다면 후지모토는 환경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던 해의 생명의 물을 소중히 모아 놓았을 것이다.
결국 후지모토도 아버지이기는 한 것인지 자녀인 포뇨의 성장 과정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난다. 포뇨가 소스케의 피와 오랜 시간 모아놓은 생명의 물을 먹어서 파워업되었다고도 알린다. 5살의 사리 분별 못 하는 않는 어린아이에게 무서운 무기를 맡긴 것 같은 말 그대로 긴급상황이다.
하지만 바다의 여신은 딸과 인간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마법의 힘이 가득 차 있고, 데본기의 바다로 돌아간 것 같다며 그 상황을 즐기고 좋아한다. 만약에 후지모토가 바다의 여신을 사랑해서 오로지 그 이유로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었다면 여신의 이 한 마디는 뿌듯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포뇨를 걱정한다. 인간이 싫다면서도 '브륀힐트'라는 딸의 이름을 놔두고 소스케가 지어준 이름인 '포뇨'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을 알 만도 하다. 후지모토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한다. 실제로 인류애를 잃은 것이라면 그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딸 덕분에 그 멸망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다만 사람으로 인해 훼손된 자연이 그 옛날 과거로 돌아갔으면 하고 있었다.
딸이 사랑을 얻는 것에 실패해서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도 후지모토다. 엄마인 바다의 여신은 '원래 물거품이었는데 뭐'라면서 아주 쿨하게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남은 자식이 많더라도 오래된 마법에 자식의 생사를 결정하도록 하는 건 너무 매정한 엄마다.
소스케와 포뇨를 약속의 장소로 데리고 가려고 할 때도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토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은 속아서 갔다고 했지만 후지모토는 그냥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회유책을 썼을 뿐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다리가 나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이동하는데 더 편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데 머리 좀 길고, 스모키 화장을 했고, 화려한 옷을 입고 귀걸이를 했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 후지모토는 가엽기까지 하다. 그리고 요놈 딸내미 아무리 남자 친구가 좋아도 그렇지 아빠한테 물이나 뱉고 있으니 약간의 무력은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지구에 가까이 온 달 때문에 지구의 중력은 달라졌고, 쓰나미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 포뇨 자체가 쓰나미라는 해석이 많다.
결국 소스케의 사랑이 포뇨를 지켰다. 그리고 지구와 세계를 지키게 되었다. 후지모토는 인간의 소스케의 배를 찾아주고, 인간이 소스케에게 악수를 청한다. 지상의 공기와 땅을 더러워하던 그인데 정말 큰 변화이다. 인간이길 포기하기까지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는 그이기 때문에 사실 안타깝기도 하다. 그는 쓰나미 즉 자연재해로 인해 자연의 위대함과 두려움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을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가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들의 삶의 회복을 위해 '급진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후지모토는 한발 물러섰다. 딸의 행복을 위한 아빠의 마음이었을 수도 있으나 남편을 부르는 리사의 오른쪽에 보이는 산에 꽂힌 송전탑을 보면서 생태주의자이자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냥 해피엔딩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캄브리아기로 바꾸려고 했었는데, 그보다 이후 시대인 데본기로 바뀌어도 인간이 살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안 후지모토는 다른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후지모토는 환경운동가였던지, 생물학자였던지, 역사학자였을 것이다. '별의 중력장 붕괴 제2단계' 같은 걸 얘기하는 걸 보면 과학자였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그가 인류애를 잃고 지구와 바다를 과거로 회귀시키고 싶게 된 사건은 결국 알지 못한다. 사실 지금의 행보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고, 바다의 여신이 심심할까 봐 혹은 자신의 마력을 높이기 위해 후지모토에게 일거리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바다의 여신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생각보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인간들 중에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후지모토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환경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으면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의외로 외로운 싸움이기 때문이다.
후지모토를 포함한 이 온 세상 환경운동가들, 힘내시고 평화가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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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하는 방법
그러니까, 안 가면 안돼? 웃는 얼굴에 농담투로 말했지만 사실 진심이 한 9할쯤 담겼다. 그러니까 며칠 전의 나는 여자 친구가 생겨도 안 할법한 짓을 하고 있었다. 이것뿐일까? 난 갑자기 내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가 이런 말도 듣고 저런 말도 들었어. 아무 맥락도 없이 나는 내 장점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이 말의 이면에는 지질함이 배어있다. 너도 나랑 멀어지면 후회할걸?이라는 마음이 내 말 안에 담겨있는 것이다. 다 불안감 때문이다. 얘는 정말 오래오래 보고 싶었다. 친분이 있던 사람들 그 누구보다 얘는 잘해주고 싶은 사람에 가까웠다. 항상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준에도 부합했다. 갑자기 문득 정신이 들어왔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안돼. 이러다간 내 장점도 다 가려질 만큼 추해질 것 같다고. 나는 내 체면을 내려놓을 만큼 나는 얘가 맘에 들었나 보다. 항상 이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길 바랬다. 왠지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난 아무 말이나 막 질렀다. 있던 일들이 생각났다. 오래간만에 일러스트도 켰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즐거웠다. 이 기간 동안 있던 일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기분이 복잡했다. 3달이 금방 갔다.
3달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런 시간이었다. 다시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안 하던 짓도 하게 되는 게 사람이구만. 한 200번째 느낀 교훈이지만 오늘은 더 선명히 머릿속에 남을 것 같다. 추한 내 모습을 지우려 또 다른 깊은 생각에 빠진다. 뇌 비우고 잘해주기만 하고 싶은 사람을 참 오랜만에 만났다. 이게 처음은 아니다. 그분을 처음 봤을 땐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 선택은 옳았다. 근데 난 이것 빼고 나머지의 모든 걸 다 후회한다. 어렸던 시간이 자랑스럽다면 그건 소시오패스에 가까울 것이다. 난 더 행복할 수 있었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다. 그런데 난 자의건 타의건 그걸 고르지 못해 더 나은 내가 되지 않았다. 이것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이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 고맙다. 돌아오지 않는 화양연화를 한번 더 만들고 싶었던 게 원인이 되어 즐거운 추억이 또 생겼으니 말이다. 이 기억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화양연화>는 시간에 대한 영화다. 2000년대 가장 위대한 영화 손 들어보세요! 하면 대표적으로 뽑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덕인지 코로나19로 인한 왕가위 특별전이 기회가 되어 이 작품을 처음 보게 되었다. 감독 특별전이 나올 만큼 왕가위라는 이름은 어마어마하게 유명하다. 난 홍콩과 단 1도 관련이 없는 사람임에도 왕가위라는 이름은 알았으니 말이다. 이 덕인지 기대를 잔뜩 하고 극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난 꾸벅꾸벅 졸았다. '왕가위 하면 미장센'이라는 말도 사실 잘 체감하지 못했다. 이런 심심함에는 영화의 내용도 한몫한다. 서로 이어져선 안 되는 남녀 둘이 만나 잊힐 수 없는 추억을 만든다. 이게 끝이다. 결말 부도 이 영화의 도입부만 봐도 사실 예측 가능하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왓챠피디아에 들어가 '화양연화' 탭에 들어가면 '다들 위대하다고 칭찬하는 영화인데 나는 못 느낀다'라고 답한 글이 베스트 댓글에 올라가 있다. 이 영화는 심심한 영화가 맞다. 왕가위는 다른 영화보다들보다 진중한 화법으로 과묵하게 관객들에게 접근한다. 과연 <화양연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관객에게 물으면서.
이 질문의 답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예시를 들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해피 투게더>를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감독이 생각하는 '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이 작품과 <화양연화>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 이 <해피 투게더>를 한 20번 가까이 돌려보며 느낀 게 있다. 조금 과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가령 엔딩신의 이름 모를 후련함은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잘 못 느낄 것 같다. 또 폭포라는 공간 설정 때문에 작은 화면에서만 보면 실감이 잘 안 날 것 같다. 이건 공간 설정의 측면을 벗어나서도 말이 된다. 시각적으로도 폭포 엔딩신의 색이 진한 느낌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큰 패드나 모니터로 보면 이 느낌이 오롯이 전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큰 스크린에 압도되는 기분이 무엇인지 OTT로 보는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뜻이다. 이 왕가위 영화 감상 포인트의 중요 지점인 '왜 극장에서 봐야 할까'는 그의 작품을 볼 때 굉장히 중요하다. 극장의 큰 미장센이 영화에 몰입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런 쉬운 몰입은 왕가위가 잘 다루는 외로움이란 감정과도 닿아있다. 이 감독이 다루는 주요 정서는 단연 외로움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해피 투게더>에서는 군데군데 낡은 식당 조리실에서 춤만 춰도 이 감정이 잘 드러난다. 아무것도 없는 부엌에서 하는 행동이니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잘 부각되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극장에서 보면 보다 큰 화면으로 보는 것이니 감정의 전달이 더 잘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해피 투게더>처럼 오직 영화만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서서히 쌓아 올린 감정을 마지막 지하철 엔딩으로 터트릴 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동요되는 부분이 있었다. <타락천사>에서 감정을 표현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감독이 적절한 선을 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아비정전>을 보면 발 없는 새라는 모티프가 영화 내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날개도 아니고 발이 없는 새는 가만히 서 있을 수 없다. 이게 영화의 엔딩부를 비롯해 주인공 아비의 행동으로 이어지며 결말부와 시너지를 낸다.
이렇게 왕가위는 연출 지점과 플롯, 내고자 하는 분위기를 잘 어우러지게 연출한 감독이었다. 전작을 통한 감독의 말하기 방식은 미니멀하기보단 극대화의 화법이었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감동을 줬다. <화양연화>는 이 지점에서의 화려함이 좀 덜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절제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영화는 양조위와 장만옥이 연기한 두 캐릭터를 틀에 가둔다. 누군가와 통화할 때나 친구와 대화할 때 항상 주위에 뭔가가 있다. 피사체가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혼자의 모습이 세상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뜻과도 닮아있다. 이는 주인공들은 욕망을 스스로 표현할 수 없고 항상 타인이 규정한 무언가 때문에 자기 혼자서 오롯이 서있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연출에 의한 두 사람의 처지를 암시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이 과정 역시 좀 심심하게 보일 수 있다. 좁은 틈으로 서로 걸어 다니는 모습. 참깨죽을 먹고 싶어 한다는 남자의 말. 왜 오늘은 전화하지 않았냐는 애정 어린 투정까지. 이런 소소한 장면 하나하나를 왕가위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화양연화>다. 이 과정이 주인공들의 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뜻이다. 또 엔딩부에 자막으로 처리되듯 남자는 이 시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두 주인공의 들끓는 감정에 비해서 인생을 관통하는 아름다운 순간이 오히려 소박했다는 뜻이 된다. 이 두 가지 연출법은 결국 '화양연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이뤄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됐던 사랑이었다. 이런 처지를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함이 누군가를 깊게 생각해봤다는 아름다운 순간을 만든 것이다. 이 뿐일까?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것도 사실 둘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다. 돌이켜본다고 하는 건 거의 대부분 소망이 소망으로 그칠 때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성공했으면 그냥 현재를 즐기면 되니까 굳이 과거를 회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화양연화는 이 상황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왕가위의 <화양연화>는 두 주인공이 서로를 추억하는 모든 순간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지만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될 비밀이 됐고, 또 과거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이 행복이 다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럼에도 이 시간들이 나에게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웃기는 일이다.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에 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라니.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그러면 행복해진다. 이것이 생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인간이라서 모든 걸 다 잃기보다는 그런 소소한 무언가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왜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이 오냐고? 근본적으로 이뤄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아쉬워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어차피 무엇이든 행복한 엔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랑의 끝은 좋게 끝나야 <라라랜드>였고, 초극한으로 나쁘게 끝나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었다. 이건 사랑으로 국한 지을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매사가 그렇다. 근데 우리는 이걸 뻔히 다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맞이한다. 그러면 어때.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게 뭐 어때. 우리는 즐거웠기 때문에 이뤄질 수 없었고, 이것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는걸 모두 다 알고 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평생 동안 그리워한다. 근본적으로 절대 완벽하게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자학하며 살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마저 없다면 우린 진짜 별게 아닐지도 모르거든. 다른 화양연화가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거든. 비밀이라고 치부하기에 우리 인생 각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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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Z 세대가 공감할 현실적인 스릴러'가 될 뻔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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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온 지 일주일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건축사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수현이다. 현장에 출근하는 수현. 화장실 쪽에 작업이 이상하게 되어있다. 바로 노동자들을 호출하는 수현. 삼촌 뻘의 직원들이지만 수현이에겐 보이는 게 없다. 원래 윗사람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앞에 보이는 게 없는 건 수현의 직장상사 김 실장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눈빛으로 수현이를 쳐다보는 김 실장. 이런 눈빛이 부담스럽다. 이 눈빛은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할 때 더 부담스러워진다. 호칭이 변한다. ‘자기’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하는 김 실장. 대충 눈치는 준다. 하지만 김 실장의 모습에 물러섬의 기색이란 없다. 애써 던지는 추파를 외면하는 수현. 아무튼 퇴근하면 집이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에서 발생한 큰 문제는 수현이가 퇴근한 이 집에서 일어난다. 세탁기가 고장 났다. 어디서 중고거래로 세탁기를 구하면 어떻겠냐는 직장동료의 말을 떠올린다. 무릎을 치는 수현. 어플을 켜서 세탁기를 검색한다. 적당한 매물을 찾은 수현. 뒤적뒤적 거려 더 나은 제품이 있을까 찾아본다. 없다. 횡재했다. 이 가격으로 물건을 데려온다는 것이 즐겁다. 며칠 지나 제품이 집에 도착한다. 세탁기를 구동해 보는 수현. 고장 났다. 화가 나는 수현. 판매자의 아이디를 추적해서 댓글에다 ‘이 사람 사기꾼이에요’라고 댓글을 단다. 여기서 수현이 직접 비극을 초래했다. 수현이가 타깃으로 설정됐다.
현실감의 공포
이 영화가 다루고자 했던 정서는 ‘공포’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공포가 산재해 있다. 첫째는 중고거래의 공포다. 중고거래를 어플을 통해 하려면 어플이 필요하다. 물건을 어플에 올리고 가격을 제시한 다음 전화번호를 기재한다. 이 과정에서 전화번호가 유출된다. 중고거래(내지는 인터넷거래)에서 개인정보를 올리는 건 양날의 검이다.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과 거래의 신빙성이 달려있다는 점이 구매자에게 중요하다. 반대로 판매자와 구매자들이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역시 연락처가 유출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 외에, 단지 중고거래 어플사이트만 구경하는 사람에겐 ‘개인정보 노다지’라는 의미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겪을 수 있는 공포를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는 나름 꼼꼼하게 살렸다.
다른 공포는 ‘혼자 사는 여성이 느낄 수 있는 공포’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살아남는 데 있어 두려움을 느낄 만한 요소가 영화에서 큰 장치로 두 개가 삽입됐다. 하나는 주인공이 여성이기 때문에 약자의 입장에서 놓이는 경우가 몇 있다. 영화는 이 공포를 앞 문단에서 서술한 것과 병치시키며 중고거래 살인마만큼 무엇이 두려운지를 묘사한다. 또 영화 내적으로 묘사하는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 역시 최근의 대한민국을 연상케 하는 몇 요소가 있다. 리얼리티가 중요한 영화에서 현실이 연상되는 다양한 공포를 통해 승부수를 둔다.
무의미한 공포
이 영화가 선택한 큰 패착 중 하나는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방식이다. 영화에서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령 <추격자> 같은 경우는 흑막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방식이 아닌 ‘이 사람의 악행을 막아라’였다. 실제로 <추격자>에서는 빌런이 누구인지 초반부에 다 보여준다. <곡성>은 양자택일을 통해 서스펜스를 만들었다. 이란 영화 동시에 이번주에 개봉했던 <한 남자>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서스펜스가 만들어졌다. 보통 영화를 보고 긴장감을 느끼는 건 관객이 이 ‘과정’에 감정적으로 동참하며 이뤄진다. <곡성>이 기존 호러영화의 클리셰를 뒤집어 신선한 장르 문법을 만들어 낸 것처럼 예술에서 감정이입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영화는 관객을 감정적으로 이입시키는데도 실패했지만 기본적으로 인물에 편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악역 캐릭터의 기본 설정에 있다. 영화가 서스펜스를 만드는 방식이 ‘악역이 얼마나 미친 사람인가’ 혹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벌이는가’다. 인물이 ‘이 정도로 돌아이니까 무섭지?’라고 질문하는 게 영화가 견지하는 긴장감이다. 이야기에서 분기점 찍기 전까지 명확한 사건전개가 없다. 그냥 범죄자가 수현 캐릭터를 괴롭히고 덜덜 떠는 게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화적인 과장이 캐릭터의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러닝타임 내내 가해지는 폭력이 불쾌하다. 이 설정에 대한 문제는 영화의 토대와도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중고거래 판매자/구매자라는 설정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포스터에 ‘나는 살인자와 중고거래를 했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들어간 것 말고도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 할당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이 디테일을 살릴 만큼 부지런하지 않다. 심지어 이 두 설정을 뒤바꾼다고 해도 이야기엔 큰 지장이 없다. 심지어 중고거래라는 세팅을 층간소음으로 바꾼다고 하더라고 이야기의 큰 틀은 유지된다.
조금만 더
영화 전체적으로 뒷심이 부족하다. 우선 사운드의 믹싱 상태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다. 대사가 안 들리는 건 차치하고 나서라도 소리가 먹힌 듯 깔끔하지 않다. 단적으로 영화에서 틈입하는 소리가 영화에서 중요하게 삽입되어 있다. 이 소리가 지나치게 크다. 이야기에서 새는 것들이 몇 보이기 때문에 이런 기술적인 문제가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의 기본 설정 상 전자기기와 인터넷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이 부분을 감독이 잘 이해하고 영화에서 묘사했는지 역시 영화에서 단점으로 작용한다.
캐릭터의 몇 설정에서 차마 빚지 못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주인공 수현은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수현이의 직장 묘사도 마찬가지다. 수현의 동료 두 캐릭터는 영화의 메시지를 조성하기 위해 희생된 감이 있다. 굉장히 과하거나 소극적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경찰 조직에 대한 묘사가 후반부에서 매가리가 없다. 초중반부에는 조직에 따라 행동하지만 후반부가 되고 나서는 경찰 구성원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빌런 캐릭터도 지나치다. 이 인물이 실질적으로 이런 일들이 가능할지가 리얼리티가 중요한 영화에서 용인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빌런 캐릭터의 열연이 오히려 이런 허점을 더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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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영화가 만들어져도 '다음 소희'가 나올까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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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발랄
헉헉대는 숨소리. 누군가가 숨 가쁘게 춤을 추고 있다. 안무실의 이 누군가는 선이 있는 이어폰을 끼고 있다. 고등학생인 소희.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굳이 수능 준비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소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취업이다. 소희를 기다리고 있는 담임선생님. 담임선생님은 소희에게 '대기업 일자리가 들어왔다'라며 좋은 소식을 알린다. 대기업? 진짜? 하청 아냐? 반신반의하는 소희. 하지만 '한국통신'이라는 이름과 담임선생님과의 신뢰를 믿기로 한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소희. 사실 담임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친구를 만났었다. 인터넷 방송 크리에이터인 친구. 같이 곱창을 먹고 있다. 친구와 단 둘이 있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런 애들이 뭘 알겠냐. 쟤들은 세금이나 내겠어?" 시비를 걸어오는 아저씨 둘. 그 아저씨의 말에 화가 나 소희는 싸움을 벌인다. 덩치가 있는 남자들과도 싸우는 걸 마다하지 않았던 소희. 이렇게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던 소희는 성격이 점점 마모되기 시작한다. 왜? 담임선생님이 권한 '대기업 일자리 현장실습' 때문에.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
영화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극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이 대사. 사실 이 대사는 굉장히 합리적인 말로 보인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삶의 과정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회사를 그만둔다? 그것도 실습생이? 이거 그만두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원래 회사, 그러니까 조직이라고 하는 것이 실습생 하나 빠진다고 해서 그렇게 큰 지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만둬도 알 빠 아니다. 또 어떤 관점에서 '네가 고른 회사'라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영화는 그 논리를 완파한다. 인물의 선택지가 한정될 수밖에 없고 / 내적으로 그것만 골라야 한다는 것을 묘사하는 셈이다. 영화의 1,2부는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나뉘어 있다. 한 사건을 분기점 찍고 소희가 처해있던 상황에 대해 묘사한다. 이는 즉 또래집단 내지는 주변인들에게 민감할 수밖에 없는 10대들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것이 관련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영화에서 강점으로 작용한다. 우선 첫째. 소희가 회사를 그만두는 데 있어서 제약이 되는 인물이 있다. 이는 사실 초반부에 그렇게까지 두드러지는 사람이 아닌 듯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사실상의 흑막이 되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또 이 캐릭터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물고 물리는 연출로 묘사한다. 이 연출은 쉬워 보이지만 아니다. 이걸 촘촘하게 설계해야 이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를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 묘사했고, 2부에서 주인공 유진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글로 쓴다면 초 강력한 스포일러다. 그러나 이 리뷰에서 이 시스템 묘사가 어땠는지를 간략히 써보자면 글쓴이는 후반부 어떤 인물이 하는 말에 너무 화가 났다. 그런데 할 말이 없었다.
또 영화에서 가장 핵심으로 작동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주인공 소희의 행적이다. 글쓴이가 봤을 때 극에서 강점으로 작동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소희가 하는 행동들이 이해하는 분들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철저할 정도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 우선 소희의 인간관계를 가족/친구/학교/직장으로 단정 짓는다고 해보자. 가족 관계에 대한 묘사가 초반부에 나온다. 소희는 밥 먹다가 멍-하니 엄마를 쳐다보는 신이다. 이 장면은 정주리 감독이 소희 같은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유심히 관찰한 듯하다. 이런 일이 있으면 있을수록 '주변 사람에게 말하지' 싶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또 이 소희를 둘러싼 어머니/아버지의 리액션도 주목할 만하다. 소희의 어머니, 아버지 세대는 사실 이런 상황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이 소희의 바뀐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나름 꼼꼼한 캐릭터 묘사로 잘 표현했다. 또 이 꼼꼼한 묘사는 극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이 영화의 본질적인 부분이 구성된다. 다음은 친구다. 이 친구들은 보통 댄스학원에서 만나거나, 어릴 때부터 소희를 알거나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댄스학원에서 어떤 인물과 어떤 공통점이 있었는지, 또 한 사람은 어떤 관계이며 이 인물은 어떻게 묘사되는지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고, 후자인 '전부터 알던 친구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인물들은 소희랑 비슷한 입장에 놓이지만 어떤 차이점이 있어서 소희의 내면에 닿지 못한다. 이 차이점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영화를 본다면 감상이 넓어질 것이다. 미묘하고 사소한 지점이 소희에게 상처가 된 것이다. 다음은 직장이다. 직장에서의 일은 사실 살짝 아쉽다. 소희를 둘러싼 트라우마, 불안함이 직장에서 묘사되는 것은 좋았다. 좋은 소재였던 순위표가 두드러지는 연출이 2부에서 시너지를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인물과의 관계는 너무 강한 템포로만 이야기를 전개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직장에서 위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직장의 두 인물은 영화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두 사람이다. 체감상 두 번째 인물이 좀 과하지 않았나 생각은 들기도 하지만 감상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실화 바탕
영화는 2014년에 전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다뤘다.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 팀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올랐던 사건. 당시 이 학생이 일하던 곳은 살인적인 업무 환경과 현장실습생이라는 명목 하에 이뤄진 임금 갈취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지금 이 문장만 읽어도 ‘얼마나 일이 고됐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런데 그 뚜껑을 열어보면 더 착잡해진다. 지금 당장 이 사건과 관련된 보도를 찾아봐도 어렵지 않게 당시의 업무환경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학생이 일하던 부서는 ‘해지방어부서’였다. 실제 통신사가 이런 영업방식이 있다고 서서히 이야기가 나오고 있던 곳이었다(왜냐하면 글쓴이도 이 회사에서 다루는 고객들 중 하나였다. 물론 상담사분들에게 폭언은 한 적이 없다). 통신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보통 콜센터에 전화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막말하는 경우가 몇 있다. 요즘이야 이 노동자분들의 감정노동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이 당시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 말은 곧 그 오물 같은 폭언을 10대 소녀들이 다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 소재가 갖는 특성들을 잘 살렸다. 우선 주인공 소희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수능을 준비하지 않는 소희. 이 소희만이 가지는 특성들을 잘 이용했다. 소희가 아무리 멘털이 세다고 해도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반대로 어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묘사했다. 이 소희의 나이라는 특성을, 극에 상상력으로 부여한 것이다. 이 10대라는 특성은 역시 학교생활이라는 점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글쓴이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다. 인간관계도 그냥 그저 그래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사실 잘 모른다. 여기서 글쓴이와 같은 사람들이 소희의 서사에 몰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이를 10대가 갖는 성격적인 특성과 학교생활을 잘 결부시켰다. 이는 역시 2부에서 시너지가 있다. 이 2부에 등장하는 시너지는 극에서 반복되는 한 대사와 함께 영화의 진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정주리 감독의 직업윤리 의식이 빛난 부분이 크다. 후술 하겠지만 글쓴이는 살짝 아쉽다고 느낀 지점이 있다. 그러나 좋은 부분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야기를 1/2부 구성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고 느낀다. 작년에 개봉했던 <네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가 기억이 난다. 이 영화가 처음 보면 장르적인 쾌감으로 잘 이뤄진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불필요하게 가학적인 장면이 몇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그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이 쓸데없이 소상했다는 점이다. 실화 바탕이었다? 그거 치고도 너무 설명하는 건더기가 많았다. 여기서 만든 1/2부 구성은 앞의 작품과는 다르다. 소희가 겪는 스트레스 묘사를 좀 더 줄이고 2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가는 것에 있어 효과가 크다. 이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던 <더 글로리>가 생각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피해자 문동은이 겪는 아픔을 1화로 압축시켜 극에서 복수극에 집중시킨 것이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강약조절을 잘해놔서 소희가 그런 선택을 했던 실질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서 그냥 돈 많고 부모님이 방치하니까로 퉁 친 것과는 다른 결이다. 두 번째로는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이 장면 연출 좋았다. 자극적이지 않게 잘 짰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최고 강점이다. 반대로 이 장면 후에 등장하는 한 시퀀스는 왜 넣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또 영화에서 어떤 사건이 두 번 반복된다. 소희의 주변인에 관한 일이다. 이 분의 선택이 실제 그 콜센터에도 일어났던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영화에서 왜 반복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감상의 폭이 역시 넓어질 것이다. 이 반복되는 두 사건이, 정주리 감독이 현재 한국사회의 청년들이 처해있는 현 위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두 번째 강점이다. 그리고 1/2부 형식 자체가 역시 반복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2부에서는 2부 자체적으로 반복되는 일이 몇 개 있다. 이 두 반복을 차이점으로 표현하는 배두나 배우의 경험치는 역시 빛난다. 유진이라는 인물이 서사가 그냥 없는 수준인데 이 사람을 신뢰할 수 있었던 건 역시 배두나 배우 덕이다.
아쉽기도 해
그렇게 직업윤리적으로 자극적이지 않게 묘사하지 않았고. 인물 내면묘사 좋았고. 배두나, 김시은 배우 연기 좋았고. 딱딱 맞아떨어지는 쾌감이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바로 영화에서 작동하는 성적인 소재다. 몇몇 인물의 대사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냥 불쾌했다. 불쾌하라고 넣은 신 같긴 한데, 이건 좀 그랬다. 별 의미가 없는 느낌. 이 성적인 대사는 소희의 친구인 '태준 오빠'와도 관련이 있다. 너무 직접적인 대사가 초반부에 들어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주인공의 두 친구는 좀 아쉽다. 어떤 인물 중 '크리에이터'있다. 이 직업적 특성은 극 중에서 별로 효과가 없다. 후반부에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긴 하다. 그런데 그냥 백수로 놔둬도 큰 문제는 없지 않았을까? 영화 자체가 젊은 영화다. 어린 학생들의 내면을 김시은 배우의 호연과 함께 잘 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좀 어색하게 유튜브라는 소재가 들어오면 뭔가 이상해진다. 이 소재가 살짝 올드하게 느껴졌다. 또 소희와 묘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 서사가 살짝 이해가 안 됐다. 이 부분은 다른 분들이 다르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일을 겪는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 난 지금 나라의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또 영화의 후반부에 극에서 중요했던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 좀 아쉽다. 이 장면 바로 직전까지 유진은 관객의 분신으로서 활동한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뭐가 실체인지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각본과 연출의 수혜자가 된다. 검정으로 칠했던 의상과 힙합 댄스라는 내적인 표현도구까지 이 감정표현에 좋은 도구가 된다. 그렇게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던 게 인물에게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이유였는데 너무 말하는 느낌? 그리고 이 메시지에 대해서 살짝 반신반의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하면 말하는 사람의 짐이 덜 것이고 글쓴이도 어떤 것이든 다 할 입장이지만 그때까지 쌓아놓은 서사와 흐름이 좀 안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이는 영화 엔딩과도 이어진다. 한 3%쯤 부족해서 감정적으로 과한 느낌이 엔딩에서 더 두드러진다.
진짜 주인공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김시은 배우는 아주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좀 어색한 부분도 있긴 했다. 욕을 잘 못하지 않았나 싶다. 그 외에는 감정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사무실 안에서의 표정연기, '그 장면' 연출, 비빌 곳 없는 현실까지 답답함을 드러내는 연기를 잘 보여줬다. 이거 찍을 때 20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고등학생 비주얼과 말투가 나오는 것 역시 영화를 보고 분노할 수 없는 이유를 잘 닦아놓은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머리가 좋은 배우라고 느꼈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김시은 배우가 맡은 소희가 아니다. 바로 영화에서 지독하게 반복되는 한 단어다. 이 단어는 인물의 동기부여도 됐다가, 실체가 없는 어떤 것을 묘사하는 도구가 됐다가, 극에서 가장 중요한 방점으로 쾅 찍히기도 한다. 이 단어는 특히 2부 후반부에서 '실체가 없다'라는 말과 조응한다. 실체가 없지만 그 무엇보다 굉장히 강력하고, 저항할 수 없는 압박감으로 작용한다. 이 압박감을 여러분도 동의할 것이다. 이 압박감.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 두렵다. 나도 이랬던 건 아닐까 싶어서. 정주리 감독이 이 부분부터 설계하고 인물을 짜 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문제 제기가 기억에 남을 것 같은 건 이 덕이다. 아. 시각적으로 어떤 도표로 형상화되기는 한다. 그런데 그건 정말 작은 상징에 불과하다.
이 진주인공. 몇 년 전부터 이게 문제라는 걸 봤던 것 같은데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에 멈춤이란 없다. 다음 소희? 당연히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정주리 감독 같은 멋진 분들이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글쓴이도 현장실습 일을 하며 부조리한 일을 겪었고,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침대를 주먹으로 퍽퍽 때린다. 또 이 세상에 온갖 진상들은 많아서 여기서 겪는 괴롭힘과 스트레스는 사람을 좀먹기 충분하다. 글쓴이도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의 입장에서 이런 것에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은 화가 난다.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라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는 멍청한 소리는 굳이 대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너무나도 불합리하다. 이 압박감 때문에. 이 압박감을 두고 과연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글쓴이가 내린 답은 간단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사회에 부딪히는 이들에게 더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다. 버텨줘서 고맙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혼자로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사회에 부대끼는 많은 이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글쓴이도 앞으로 이 생활을 해야 한다. 두렵지만, 그래도 살아보자.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 다 우리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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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일어나는 지옥
부럽다. 임용고시에 합격한 친구에게 한 말이다. 보통 취업준비로는 타인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는데 요즘은 그런 기분이 많이 든다. 450여 일의 노예생활이 지나면 자취도 하고 내 돈으로 월급도 벌어서 효도도 하겠지만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야.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아. 나 진짜 열심히는 했는데 말이지." "야. 네가 안되면 누가 안 되냐?" 친구는 나를 위로해줬다. 이 한국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온갖 혐오가 판치고 취업난 구직난이 바글바글한 우리나라에서 1인분 하며 일상을 버틴다는 것은 참 많은 것들을 수반하는 일인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한참 하다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지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미지와 첫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주욱 말했다. 그게 뭐야라고 대답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으로 귀결 지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말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가 누군지만 아는 그 사람이 구린 이유는, 예민한 게 너무나도 많아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 사람을 직접적으로 아는 건 아니라서 내가 뭐라 하는 것 자체가 우습긴 하지. 그런데 우리나라는 좀 멀리 오기는 했다. 사람같이 살려면 참 많은 게 필요하니 말이다. 16년 전 한 신인 감독이 한국사회의 단면과 초자연적인 것들을 가져와 오싹한 공포영화를 만들어냈다. 한국 호러 영화의 수작, <불신지옥>이다.
영화 개요로 다 함축할 수 없는, 압도적인 이야기
동생이 사라졌다. 언니 희진이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아빠는 없고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희진. 희진은 곧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 태환은 아픈 아이를 키우고 있는 가장이기도 하다. 태환은 부랴부랴 희진을 만난다. 태환은 그렇게까지 희진에게 협조적이지 않다. 동생 소진의 실종이 단순 가출로 가정하고 주변 아파트 주민들을 취재하는 태환. 점점 이상한 게 눈에 띄기 시작한다. 태환은 경비 아저씨부터 옆집 아줌마 경자까지 '그 집에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증언을 듣게 된다. 태환의 조사는 점점 진행되고, 희진에게 계속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이 과정 속에서 두 영화는 이 희진과 소진 자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중심으로 전개한다.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일이 영화의 주요 소재라고 볼 수 있겠다.
과연 어떤 것이 지옥인가
여러분은 무속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각자 생각하는 무속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들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각각 다를 것이다. 영화는 두 종교가 제시했던 지옥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무속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초자연적인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차용해서 역시 초자연적인 두려움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 둘이 갖고 있는 신적인 공포와 두려움이 전부가 아니다. 영화 안에서 묘사하고 있는 다른 지옥들이 몇 개 있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폭력적인 시각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어떤 공포를 주고 있는가'에 대해 쓰면 깊이에 지장이 갈 것 같아 더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보는 것은 영화 내적으로 묘사하는 인물 갈등이 탁월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희진과 엄마와의 대립, 또 경비 아저씨와 태환과의 대립, 태환과 희진의 갈등까지 누군가가 어떤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를 묘사하는 꼼꼼한 인물 구성이었다.
또 영화가 조명하는 이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아파트라는 건물 속성 자체가 사람들이 작은 공간에서 빼곡히 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덕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밀도가 높다. 영화 안에서 이웃이 태환에게 소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보면, 이 고밀도에 의해 쉽고 가벼운 말을 던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하다. 이외에도 군인 출신들의 사회 적응, 대학생이 살기 너무나도 어려운 사회 현실, 타인을 이용하기 충분한 한국사회, 가해자로서의 한국의 위치까지 신의 존재로 넓은 이야기 범주를 호러라는 키워드 안에 무리 없이 담는다.
깔끔하게 짜인 무서운 이미지
흔히 호러 영화의 클리셰로 '점프 스퀘어'라는 말을 쓴다. 갑자기 유령이 튀어나오거나 하는 것이 그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이 점프 스퀘어가 한 번도 안 쓰인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공포를 만드는 방식은 이와 살짝 다른데, 이 작품은 이미지를 사용해서 무서움을 만들어 낸다. 영화 초중반부 어떤 인물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이야기를 태환에게 전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인물이 대사를 치며 하는 표정, 그 말의 내용, 이 인물의 다음 처지까지 감독은 자칫하면 뻔할 수도 있는 공포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또 이 인물의 의문스러운 행동을 받아주는 태환이라는 인물의 성격도 이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신들림'의 이미지 역시 탁월했다. 신들림은 현실과 신 사이의 3의 존재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인물이 빙의되며 변하는 표정연기나 기타 미술까지 현실감 있는 두려움을 묘사했다. 이 신들림과 비슷한 느낌이 운명적인 죽음 아닌가. 특정 인물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방식 역시 여태까지 봤던 공포영화의 결과는 다를 것이다. 이런 강력한 이미지들이 인물의 행동으로만 쨘하고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초자연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이니 만큼 특정 쇼트들이 관객에게 제시되는데 이 역시 탁월했다. 감독 이용주의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반종교적인 이야기?
<불신지옥>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 작품이 반종교적인 작품으로 읽힐 수도 있다. 난 영화의 소재가 한국사회의 이기주의라고 본다. 그러니까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주가 되는 작품은 아닌 셈이다. 영화는 두 가지 종교를 키워드로 전개한다. 바로 무속과 기독교다. 이 영화가 반종교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어머니 캐릭터가 어떤가에 대해 써야 하는데, 극을 보다 보면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또한 이 영화에서 종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파트라는 공간적 배경이다. 물론 극단적인 믿음이 만들어낸 끔찍한 이야기라는 데에는 여지가 없으나, 난 이 영화의 주요 갈등은 '타인에 대해 폭력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본다. 이 폭력적인 시선이 아파트라는 고밀도의 장소에서 바글바글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이 영화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유령이 등장하는 것도, 소진이 실종했던 것도, 태환이 출동했던 것도 다 아파트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다. 다들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쉽게 보고 가볍게 이용한다. 영화 끝까지 반복되는 '맹신'의 모티브가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후반부 특정 두 인물 간의 갈등을 굳이 묘사한 부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장면이 굳이 있어야 할까? 난 아니라고 본다. 굳이 그렇게까지 장면을 만들지 않아도 그런 느낌은 충분히 줄 수 있다. 근데 굳이 그 장면과 대사를 넣은 이유는 그럴 위치에 있음 안 되는 사람 역시 뒤틀렸을 정도로 한국사회가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닌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정도로 잘했나 싶어
심은경 배우가 1994년생이니까 지금 스물아홉이다. 이 영화 개봉 연도가 2009년이니까 정확히 15살 즈음에 작품을 찍은 것이다. 15살 때 나는 방구석에서 소설책 읽기 바빴는데 이 배우는 극의 설정이 되는 빙의 연기를 해냈다. 또, 영화의 주요 인물인 김보연-문희경-장영남-이창직 배우도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이 네 명의 배우가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아침 드라마에 자주 나오던 배우들이었다. 특히 문희경 배우는 너무 자주 나와서 얼굴만 봐도 '이렇겠네' 싶을 정도다. 그런데 이 배우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패턴들에서 더 깊은 퍼포먼스가 나온다. 각본의 힘으로만 묘사되기 어려운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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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해고 당해 의기소침해진 세 친구 ‘파코’, ‘라몬’, ‘안드라데’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파코의 집에 모인다.
하지만 함께 타고 가려던 안드라데의 차가 고장나서 발이 묶인 상황.
견인 차를 부르고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대화를 시작한다.
안드라데는 그날 아침 식사하러 들른 식당에서 30년 전 자기를 버리고 떠났던 엄마를 만났고,
파코는 2주 전부터 의심해 왔던 아내의 불륜 상대를 알게 된다.
한편 가장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라몬은 생각지도 못했던 큰 비밀을 실토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