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두codu2025-03-10 20:20:08
브래디 코베의 정육면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브래디 코베 감독 <브루탈리스트>(2025)
전쟁과 홀로코스트로 인해 국경을 넘지 못했던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은 먼저 미국 땅에 당도해 있던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가 한창 작업 중인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의 도면을 보며 말한다. “당신을 보고 있어.” 라즐로와 오랜 기간 마음을 주고받았을 에르제벳은 헝가리에서 타국으로 건너와 생활하고 있던 남편 라즐로의 속내를 건축 도면에서 읽는다. 건축가이자 남편인 라즐로 토스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걸 에르제벳은 알고 있다. 에르제벳은 라즐로를 이해하는 만큼 마음과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동반자다. 에르제벳이 라즐로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터전을 잃은 유대인 건축가가 사라지지 않을 건축물이자 자기 자신을 건설하려는 이야기다.
<브루탈리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이민자의 역사나 자본의 폭력성보다 한 예술가의 집착에 가까운 신념이다. 라즐로는 직접 정육면체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라즐로는 건축, 즉 자신의 예술품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예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는 건축가에게 3,4미터의 높이나 대리석의 종류와 색은 절대로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자신의 급여를 내놓아서라도 지켜내야만 한다.
라즐로가 건축을 택한 이유는 그 ‘영속성’에 있다. 시간과 침식 속에서도 견고한 본질을 잃지 않는 것. 파시즘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춰 해석되더라도 침식되지 않을 건축이야말로 라즐로의 삶이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조피아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인스티튜트’와 수용소의 유사성을 근거로 홀로코스트의 잔학성과 숭고한 유대주의를 기린다. ‘과정보다 목적지가 중요하다’는 라즐로의 말은 어느새 유대인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변모한다. 라즐로의 건축물은 영원히 남겠지만 그에 덧붙여지는 메시지는 언제고 달라질 수 있음을 내포한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4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진 <브루탈리스트>에서 에필로그는 불필요해 보인다. 1980년 제1회 건축 비엔날레에는 ‘라즐로 토스: 현재 속의 과거’라는 이름의 회고전이 진행되고 있고 휠체어에 탄 라즐로를 뒤로 한 채 조피아가 연설을 맡는다. 이 연설은 자못 유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힌다. 영화의 서막에 등장했던 조피아의 심문 시퀀스가 다시 펼쳐짐으로써 유대인 박해의 부당함과 유대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듯하다. 그러나 에필로그 속에서 라즐로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조피아의 딸이 젊은 조피아를 연기한 라피 캐시디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서막에서 조피아는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을 심문받는다. 에필로그의 라피 캐시디는 또 한 번 유대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앞의 시험대에 서서 정체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시험을 받고 있다. 무력하게 앉아 침묵하는 라즐로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다. 그의 건축물에 유대인을 기리는 특별한 의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라즐로와 조피아가 향하는 목적지가 다름에도 침식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건축물을 꿈꾸는 예술가를 보며 현대를 살아가는 몇몇 관객의 앞에는 처참히 부서진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라즐로가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 이민자가 결국 어떻게 정착을 이뤄냈는지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는 예술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탈리아의 카라라 대리석의 아름다움을 탐미하던 해리슨(가이 피어스)은 술과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라즐로를 강간한다. 에르제벳은 밴 뷰런 가족의 식사시간에 해리슨의 행동을 폭로한다. 해리슨은 식사 자리에서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진다. 가족과 일꾼들은 해리슨을 찾기 위해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를 훑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탈리아의 아름답고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 위로 십자가의 달빛이 뒤집혀 떨어진다. 거대 자본에 유린당하는 숭고한 예술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이 신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그려내고자 한 목적지에 가까운 장면이다. 브래디 코베 감독이 선보인 <브루탈리스트>라는 정육면체는 많은 이야를 품고 있지만 빛은 단연코 그 장면을 비추고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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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국일기] 밴드에 베이스가 필요한 이유
위국일기
갑작스러운 사고로 엄마, 아빠 두 분 모두를 떠나보낸 ‘아사’는 하나뿐인 소설가 이모 ‘마키오’를 만납니다. 얼떨결에 함께 살기 시작한 두 사람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합니다. 국내에서는 10월 2일 수요일 개봉한 순정 만화 원작 일본 영화 ‘위국일기’입니다.
우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화력이 강력한 폭탄이길 거부합니다. 오히려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주제 측면에서 제이크 질렌할 주연 ‘데몰리션’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데몰리션’은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제이크 질렌할이 아내의 죽음 이후, 어딘지 붕괴하기 시작하는 평화로운 삶의 모순과 아픔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대한 이질감을 차분하지만 거대한 파도로 덮치듯 그린 작품입니다. 많은 관객은 슬픈 장면이 많음에도 슬퍼할 수 없고, 제이크 질렌한이 춤을 추며 대중을 지나가는 장면에서 재미보다 해학을 느낄 수 있었죠.
이번 ‘위국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손을 쓸 수 없는 거대한 파도에 잠식당한 소녀 ‘아사’의 심리적 상태에 집중합니다. 부모님, 두 분 동시에 치러지는 상갓집에서 ‘아사’에게 전해지는 위로나 걱정, 염려, 응원은 진심으로 ‘아사’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사를 외톨이의 구렁텅이로 강제로 집어넣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죠. 영화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아사의 심리 상태, 마키오의 감정 상태 등 등장 캐릭터가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마음을 화면에 투영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 작품 ‘괴물’이 생각나는 장면도 주인공의 속마음을 알 수 있던 장면이었습니다. 이야기적으로도 떠나간 이에 대한 얽혀 있는 두 사람의 사슬이 마주쳤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고요.
그렇다고 해서 마냥 어둡지만도 않습니다. 부모님이 떠난 후, 함께 살기 시작한 아사와 마키오가 보여주는 낯선 일상은 어딘지 모르게 웃기지만 슬퍼 보였죠. 특히 직업이 소설가, 나름 유명한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찾는 팬들이 많은, 마키오는 인간과의 관계 자체가 폭이 좁고 경계가 짙은 성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감정적인 상황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우선시하는 합리적인 성격이죠. 이와 반대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입학한 10대 소녀 아사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우정, 사랑, 변화에 집중하고 매번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각각의 인물의 감정에 집중합니다.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아사는 마키오의 기분에 집중하고,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마키오는 매번 아사에게 직설적이며 현실적인 상황에 관해 설명합니다. 성격이나 행동에 있어서 극명하게 갈리는 두 사람의 에피소드를 감상하는 것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포인트였습니다.
영화는 140분으로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갖고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러닝타임이 긴 영화를 선호하시지 않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을 관람하는 것이 굉장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일단 영화가 시작하고 아사와 마키오에게 집중하기 시작하면 도전보다는 감상에 가깝게 변할 겁니다. 저는 씨네랩 덕분에 9월 30일 시사회에서 먼저 본 작품을 수백 명과 함께 관람했습니다. 관람 중 문득 아래를 바라보니 단 한 분도 졸거나 주무시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건 영화 자체가 흥미롭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돼버린 주인공과 떠나가 버린 부모, 아사의 엄마를 증오하는 마키오의 입장에서부터 극적인 흥미는 시작합니다. 마키오 입장에서도 언니를 잃어버린 것이 맞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언니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언니의 자식인 아사를, 하나뿐인 조카를 거둬드리고 함께 생활하죠. 언니에 대한 분노는 언니에게만 적용하고, 조카는 조카대로 사랑하는 처절히 이분법적으로 나눈 판단을 내린 것이죠. 이런 마키오를 아사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엄마를 미워하는 이유에 집착하고 마키오 이모를 조심하게 되는 이유로 굳어지죠. 이처럼 영화의 이야기는 철저히 분리했던 사촌지간 가족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남아 있는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분명 아쉬운 점은 존재합니다. 러닝타임 자체도 길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도 차분하며 후반부에서 다뤄질 엄마에 대한 비밀과 이것을 풀어가는 방법도 반전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매 순간 영화의 모든 장면이 후반부를 위한 떡밥이거나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것을 영화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견은 없습니다. 오히려 영화 스스로 추모와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로운 관점에서 다양한 각도로 다루고 있습니다. 졸지에 부모의 그늘에서 한참을 어리광 부리거나 사춘기를 겪어야 할 고등학생 소녀는 모두의 측은지심 속에서 홀로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했죠. 언니에 대한 굳은 증오심이 뿌리 깊게 박힌 소설가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천천히 사그라트리며 자신과 부모 그리고 사랑에 대해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설명해 가는 전개나 방법이 다소 예상이 간다는 점만 빼면, 분명 흥미로운 영화가 맞습니다. 특히,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자녀가 있으신 부모님이라면 정말 강추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단절하며 시작합니다. 어차피 남이니까, 어차피 친구니까, 어차피 피로 이어진 관계이니까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이자 사건의 중심점에 존재하는 ‘아사’에게 손을 뻗는 건 ‘마키오’와 몇몇 친구들뿐입니다. 그들조차도 정확히 ‘아사’의 창백한 얼굴에서 피어나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사’가 비행 청소년이 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릴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더더욱 ‘아사’에게는 ‘마키오’와 친구들이 함께한다는 것이 소중해집니다. 그녀의 마음을 진정 이해할 수 없을지언정 그저 비를 가려줄 우산처럼, 슬픔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는 존재들이죠. 오히려 ‘아사’를 위한다며 심심한 위로를 전하거나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위선적으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아사와 마키오가 의도하지 않게 풀어가는 가족에 대한 정과 삶의 이유 그리고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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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라라랜드〉만큼 매혹적인, 어쩌면 더 진득한
치코와 리타/Chico & Rita
Spain, UK | 2011 | 93min | DCP | Color | Animation
'제천 리와인드' 섹션
1948년 쿠바 아바나. 재능과 야심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치코는 어느 클럽에서 노래하는 리타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치코의 적극적 구애로 팀을 이룬 두 사람은 차차 명성을 얻고, 리타가 뉴욕의 연예기획사 사장의 눈에 들어 미국에까지 진출한다. 리타가 점점 스타가 되어가면서 두 사람은 종종 어긋나지만 끝내 노년이 되어 재회한 후 못다 한 사랑을 나눈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끈적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엇갈리고야 마는 순간의 안타까움을 탁월하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치코와 리타〉는 자신보다 4년 늦게 개봉한 〈라라랜드〉와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 취향을 전제로 하자면, 내게는 〈치코와 리타〉가 더 매력적이었다.
먼저 영화의 시공간이다. 1948년 리타를 처음 만난 후, 우여곡절 끝에 치코가 다시 쿠바로 돌아오는 건 1959년 이후로 보인다. 쿠바 혁명(1959)에 들뜬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치코와 리타의 사랑과 음악은 1950년대 쿠바 아바나와 뉴욕을 오가며 연속되고 단절된다. 혁명을 앞둔 쿠바와 인종차별이 횡행하지만 아메리칸드림 역시 가능하던 시절의 뉴욕, 두 공간이 만들어내는 역동적 긴장은 두 사람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긴장감과 몰입감을 증폭시킨다. 재즈를 비롯해 쿠바의 음악인 맘보와 콩가가 대세인 1950년대 뉴욕에서, 검은 피부를 가진 두 남녀가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설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낭만적이다. 눅진한 OST 목록과 두 사람의 진득한 사랑 이야기는 이 낭만적 기대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무턱대고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음악을 한껏 부풀린 영화의 시공간은 동시에 비극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 피어오른다. 치코와 리타가 뉴욕으로 떠난 이후부터, 아니 어쩌면 아바나에서부터, 두 사람은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인 적이 없었다. 사랑과 음악의 중요한 순간마다 늘 외력이 개입해 두 사람을 흩어놓았기 때문이다. 치코를 두고 리타만 뉴욕에 데려가는 기획사 사장, 치코와 리타가 각각 라틴계 남성과 여성으로서 겪은 무시와 착취, 사업적 성공을 위해 두 사람을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으려는 주변인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체념한 채 돌아간 혁명 이후의 쿠바에서조차 재즈가 ‘제국주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연주하지 못하는 치코……. 치코와 리타의 음악과 사랑이 꺾이고 흔들리는 이유가 그들 자신의 문제가 아닌 두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의 개입 때문이라는 점은 이들의 엇갈림에 대한 안타까움을 배가한다. “미래 같은 건 의미 없어. 내가 바라는 건 다 과거에 있거든.” 리타의 이 말은 자기 삶의 주인이기를 부정당한 두 사람의 비애를 대변한다. 꿈 말고는 가진 것 없던 과거는 빈곤하지만 풍요로웠고, 이 풍요로움을 원천으로 치코와 리타는 사랑과 음악의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풍요로움이 소진되었을 때, 두 사람은 스러졌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영화 속 시공간처럼.
치코와 리타가 50여 년 만에 재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결말은 다소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두 사람이 간절히 추구했으나 실현되지 못한 낭만을 ‘실패’한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실패의 아련함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품은 아름다움을 거듭 곱씹을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러나 이런 결말은 치코와 리타, 두 사람에게는 조금 가혹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치코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은퇴한 후 허름한 모텔에서 청소 일을 하며 살아가는 리타에게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과거는 어떤 식으로든 완결될 필요성이 있다. ‘비현실’적이라도, 두 사람에게는 기나긴 슬픔 끝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치코와 리타〉는 24회 유럽영화상을 비롯해 스페인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고야상(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고, 제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주년을 맞이하는 이번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는 이전 영화제에서 사랑받은 작품을 다시 한번 선보이는 ‘제천 리와인드’ 세션에 선정되었다. 진득한 쿠바 음악과 남미 특유의 생기 넘치는 문화, 1950년대의 아바나와 뉴욕이라는 매력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두 연인이자 음악가의 상승과 하강을 낭만적으로 버무린 이 영화를, 부디 많은 관객이 다시금 큰 스크린에서 만끽하기를 바란다. 낭만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아주 깊은 곳부터 적셔줄 영화다.
*〈치코와 리타〉 상영 정보 및 예매 페이지
-9월 7일(토)/9:00~20:33/제천의림지자동차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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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스 오브 막시> 여성 영화의 자기 파괴적 발전
<걸스 오브 막시>
여성 영화의 자기 파괴적 발전
새로운 학년을 맞이한 '비비안(해들리 로빈슨)'은 절친인 '클라우디아(로런 차이)'와 등교 첫날부터 학기마다 여학생들을 품평하는 리스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불쾌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려고 한다. 그런 그녀 앞에 전학생 '루시(알리시아 파스칼 페냐)'가 나타난다. 자신을 포함해 여자라면 일단 집적대는 미식 축구부 주장 '미첼(패트릭 슈왈제네거)'에게 명확히 거부의사를 표하는 루시. 그런 그녀를 보면서 비비안은 왜 여태까지 쌓이던 분노를 당당히 표현할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생각에 잠기고, 여성 운동을 펼쳤던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된 후 교내 여성 운동, '막시 Moxie(용기)'를 시작한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할리우드는 물론 국내 영화계 주류를 강타한 트렌드가 있다. 바로 페미니즘이다. 여성 인권 향상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은 <스타워즈>나 <터미네이터>처럼 오래된 프랜차이즈를 리모델링하고 <원더우먼>과 <캡틴 마블>처럼 영역을 넓혀가며 많은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언론사의 성 불평등을 고발하는 <밤쉘>, 능동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상을 조명한 <작은 아씨들>과 <벌새> 같은 작품들은 평단의 호평 속에 시상식을 휩쓸었다.
그러나 모든 빛에는 필연적으로 그림자가 따르듯이, 영화계의 새로운 방향성은 짙은 어둠을 만들기도 했다. 여성 인권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여성에는 백인이나 중산층만 포함하며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 존재하는 사회적, 경제적 차이를 무시하거나, 역으로 남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작품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메시지 전달 방식에 있어서는 페미니즘을 '영화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걸캅스>와 같은 몇몇 영화는 개연성이나 장르의 문법과 같은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페미니즘 철학을 전달하는 데 급급했다. 그 결과 여성 영화에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 내지는 강제하는 프로파간다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제니퍼 마티유의 소설을 영상화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걸스 오브 막시>의 초중반부는 이러한 여성 영화의 부정적 전철을 착실히 뒤따라간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여성 운동을 다루는 이 영화는 상당히 작위적이고 직접적인 연출로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교내 모든 여학생들에 대한 품평이 전체 메시지로 뿌려지고, 남학생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전학생 루시는 이유 없이 미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이 문제를 알고도 교장은 무조건 사건을 덮으려고 애쓴다. 운동 장학생 선거를 앞두고서는 여성 후보인 '키에라(시드니 박)' 대신 미첼에게만 교내 방송 출연이 허가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개연성과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 이전에 무조건적으로 영화의 메시지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장치다.
이에 더해 페미니즘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도덕적인 선악의 범주로 치환시키며 영화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주입한다. 비비안이 막시 운동에 소극적인 클라우디아를 일방적으로 다그치는 장면이나, 미첼에게 독립적인 서사를 주는 대신 필요한 모든 악역을 떠안기는 연출이 대표적이다. 영화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동의하면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이분법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은 결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없다. 왜 백인 중년 남성이 쓴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야 하느냐는 루시의 질문이 그 사례다. 이 질문은 그녀의 의견에 설득력을 더하기보다는 소설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젠더의 이분법으로 무리하게 치환한다는 비판을 낳으며 연출 상의 한계를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을 설정, 활용하는 방식 역시 인종 차별을 방패 삼아 페미니즘의 메시지와 전달 방식에 대한 비판을 도덕적으로 봉쇄하는 듯 보인다. 백인 남성 교사는 여성 운동을 지지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지만, 비비안의 애인이자 동양계 남학생인 세스는 적극적으로 교내 여성 운동인 막시를 지지하며 대조를 이룬다. 운동 특기생 장학금을 두고 경쟁하는 미첼과 키에라의 구도, 가장 먼저 교내 성차별 이슈로 대립하는 루시와 교장의 구도가 모두 흑인과 백인으로 짜인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비비안 외에 막시를 주도하는 캐릭터의 다수는 유색인종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걸스 오브 막시>는 언뜻 보기에 일부 여성 영화들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답습한다.
그러나 <걸스 오브 막시>는 멋진 반전을 선사하면서 점점 짙어지던 그림자를 단숨에 빛으로 전환시킨다. 절친인 비비안이 익명으로 팸플릿을 만들고 캠페인을 계획하며 막시 활동을 이끌고 있음을 눈치챈 클라우디아는 그녀를 돕기 위해 막시를 교내 단체로 정식 등록한다. 그러나 막시를 좌시할 수 없었던 교장은 클라우디아를 비비안 대신 정학시킨다. 소식을 뒤늦게 듣고 찾아온, 자신이 적극적으로 막시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던 비비안에게 클라우디아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백인이라서 내 입장을 몰라." 뒤이어 미국으로 이민 온 동양인의 입장에서 교육과 대학 진학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학교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 대화를 기점으로 비비안은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잘못되어 있었음을 반성한다. 본인이 옳다고 믿었던 일이 모두를 위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는 일은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정작 익명 뒤에 숨은 자신이 가장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익명을 벗고 사람들 앞에, 연단 위로 당당히 나서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그녀의 변화와 함께 영화의 스탠스도 180도로 달라진다. 앞서 보여줬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상황과 분위기 연출, 여성 운동은 무조건 옳다는 신념에는 제동이 걸린다. 인종과 젠더의 대립 구도도 허물어진다. 그 빈자리는 정체성에 관계없이 자신이 받은 차별에 함께 저항하는 연대의 정신이 자리 잡는다. 일부 여성 영화가 초래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답습하던 초반부 연출과 설정을 역이용한 결과 여성 운동과 미투 운동이 현실에서 보여줬던 영향력은 영화 내에서 성공적으로 재현된다.
사실 <걸스 오브 막시>가 반전을 선사할 것이라는 점은 오프닝에서부터 암시된다. 숲에서 쫓기다가 쓰러져 버린 비비안은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하려는 찰나에 악몽에서 깨어난다. 이후 영화는 하이틴 영화의 클리셰를 충실히 재현하며 예상치 못한 오프닝을 잠시 잊게 만든다. 방학 동안 몰라보게 달라진 이성을 향한 호감과 관심, 운동부 주장과 치어리더 팀 주장 간의 연애와 같은 가십, 전학생의 등장과 그로 인한 기존 친구들과의 갈등, 주인공들의 인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교사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모범적인 하이틴 영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비안이 여성 운동과 시위를 펼쳤던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되고, 'Rebel Girl'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막시를 만들기로 결심하는 대목에서 오프닝은 잊혔던 의미를 되찾는다. 꿈이 무의식의 통로라는 고려 하면, 숲에서 헤매는 비비안의 악몽은 모든 여성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하지 않아도 공통된 불안함을 느끼다는 것, 그리고 그 악몽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묻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클리셰처럼 평범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이면에 항상 불안함이 숨어 있고, 이를 직시하고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소 갑작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비비안의 변화에 설득력을 더한다. 이는 홀로 어두운 숲 속에 쓰러져 있던 비비안과 대낮의 밝은 학교에서 친구들 앞에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비비안의 모습이 멋진 대조를 이루는 이유다.
이처럼 <걸스 오브 막시>는 영화 앞 뒤로 예상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에게 쓰인 여성 영화의 부정적인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난다. 여성 영화들의 잘못된 선례를 바로잡고, 자칫 일방적인 프로파간다로 전락할 위험을 영리하게 피해 가며, 이를 원동력 삼아 영화를 접하는 모든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 백인과 유색인종이라는 이분법 대신 여성 문제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각자 처한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 결과 <걸스 오브 막시>는 여성 영화의 몇몇 부정적인 전철과 이미지를 직접 파괴하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모든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법한 반성, 공감, 연대의 여성 영화
* 본 콘텐츠는 브런치 DAY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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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3000년의 기다림(2022)> 리뷰
이야기는 매혹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실체 없는 것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수가 없다. 변형되고, 반복되며, 이따금 자신의 꼬리를 잃더라도 이야기는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과학이 없던 시절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발명되었던 신화이든, 자신의 지혜를 전할 방법이 없어 구전으로 이어져 온 민담이든 간에. 오죽하면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하지만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기록이고, 공동의 기억이자 역사라고. 기록할 수 없었던 자들이 해낼 수 있던 최후의 반향이자 상실에의 저항이라고 말이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로 유명한 조지 밀러 감독의 2022년 작품이다. <옥자(2017)>, <설국열차(2013)>로도 한국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자,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 <콘스탄틴(2005)> 등을 통해 20여 년 전부터 판타지에 자주 얼굴을 비친 바 있는 근사한 배우 틸다 스윈튼과 <어벤저스> 시리즈의 헤임달, BBC 드라마 <루터> 등을 통해 우아한 카리스마를 내비친 배우 이드리스 엘바가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A.S. 바이엇이 1994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집 <나이팅게일의 눈 속의 정령>을 원작으로 삼는다. 생소한 제목이더라도 겁먹을 필요는 없다. ‘알라딘’에 등장하는 지니를 기억하고 있다면.
‘지니’에 대한 언급을 했으니, 3,000년 동안 자유를 갈망한 정령 진(이드리스 엘바)과 3,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면면히 흩어진 인류의 이야기를 채집하며 살아온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의 첫 만남을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다. 알리테아는 유리병을 닦아내며 거대한 정령을 마주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불의 정령 진. 그는 알리테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알리테아는 열망하던 것을 손쉽게 이루고, 진은 오랜 세월 바라 마지않던 자유를 이룰 수 있으니 너무도 완벽한 윈윈의 거래일 게 틀림없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하나 있다. 알리테아가 자신은 현재에 더없이 만족하여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한 까닭이다. 심지어 알리테아는 이렇게 지적하기까지 한다. 소원을 비는 이야기의 교훈은 언제나 경고로 끝난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고.
진은 이러한 알리테아를 이해하지 못한다. 살아있음과 욕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진은, 열망하는 것이 없다는 관조적 자세는 개인의 본성 혹은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행위이며 삶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알리테아가 특별한 추진력 없이 관성적인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가 학자로 살며 쌓아온 시간이 멈춰있었다고 말하는 건 틀림없이 실례일 터다. 다만 알리테아는 개인의 삶에서 일정 부분을 단념한 인물이라고 묘사된다. 아이를 잃은 이후 슬픔을 비롯한 그의 감정은 전반적으로 정지한 상태이다. 이런 모습에 대해 절제의 미덕(진은 어리석음이라 일갈하는)을 언급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의 초조함은 분명하게 표시된다. 그러하므로 진과 영화 내 카메라의 시선에 따르면, 알리테아가 마땅히 지녀야 하는 생(生)에의 원초적 욕구는 체념과 같은 그 어드매의 방향으로 휩쓸려 사라졌다고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알리테아는 빠르게 공감하지 못한다. 둘의 몰이해는 불에서 태어난 정령과 흙으로 빚어진 인간 사이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만, 어쨌든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좁히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단순한 두 인간 사이의 갈등이었다면 헤어지고 끝났을 텐데 3,000여 년의 구속에서 벗어나고픈 진은 절박하다. 그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알리테아의 허락을 구하고자 애쓴다. 자신이 갇히게 된 사연과 자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을 볼 수 있었으나 보지 못한 자,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려는 만남이었으나 사랑에 빠지고 말았던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기꺼이 풀어내는 이유는 그래서다.
이야기 속 이야기가 주요한 축인 영화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진을 거쳐간 이들이 아무도 그에게 물질적 풍요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을 만났던 이들이 모두 특권 계층이어서 여유로운 삶이 가능했던 게 아니었음에도. 이 이야기의 원형일 『천일야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조차 우리는 결핍에서 비롯된 인간의 욕망을 찾아낼 수 있다. 끊이지 않는 파티, 무한할 것만 같은 부와 명예, 갖가지 음식과 사치품. 비현실적인 것을 넘어 때로는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장면이, 영화 <3000년의 기다림>에선 모조리 생략된다. 진에게 소원을 빈 여성들은 각기 다른 것을 원하는 듯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자신이 지닌 한계점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필멸자가 바라는 초월에의 의지는 다양하게 나타나며 인물이 있던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노예로 살던 귈텐은 사랑을 통한 생명의 초월을 소망하여 아이를 임신했고, 여성으로서 사회적 진출에 한계를 절감했던 제페토는 지식을 끝없이 흡수하며 시공간을 초월한 명예와 공적을 원했다. 개인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없던 둘은 신분의 벽과 성별의 벽에 막혀 갇혀 있었으니 병 밖에 있더라도 병 안에 갇힌 진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신세였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알리테아, 진실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그는 무얼 갈망하는가?
인간은 사회적으로 촘촘하게 이어진 존재이니 타자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개인이 바로 서도 사회가 그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탈취한다면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테아는 이전의 여성들과 다른 세상에서 삶을 살고 있으니 그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삶이며 들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역사이다. 사회가 관심 없지만 자신만큼은 들었어야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써야 한다. 그러하므로 알리테아가 발견한 자신의 소망은 고독에의 초월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3000년은 언뜻 진의 시간처럼 보이지만 내겐 보다 알리테아의 것, 아니 알리테아로 대표되는 인간 여성 전체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진의 시간은 추후의 인간들이 발명한 시간에 따라 계산된 것이지 그가 타인과 교류하며 쌓아온 역사의 시간이 아니다. 그가 소비한 대부분의 시간은 신에게 자신의 자유를 갈구하며 기도했던 것으로, 홀로 있어 셈하기조차 어려웠던 공백 그 자체이다. (환상으로 구성되었고 타자의 계산으로 보충된 그의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적 시간 간의 간극을 생각한다면, 사실 진이 경험한 시간은 3,000년이 아니라 30,000년, 혹은 3억 년에 조응할지도 모른다.) 반면 그가 병 밖에서 만나던 여성들의 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회와 시간은 3천여 년의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인간들의 삶 속에서 구르고 변화해 왔다.
알리테아와 진이라는 두 존재가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예정된 만남 –한 단어로 줄여야 한다면 운명-처럼 보인다. 끝내 죽음을 맞이할 운명인 인간, 종말이 예정된 인간이 욕망 없음의 상태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야기가 끝을 맞이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인간의 존재, 역사,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정령의 종막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립과 고독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과 정령을 다시 잇는다. 신비를 지우고 합리에 의지해 지어진 현대사회다. 이곳에서 순식간에 멸종될 뻔한 정령은 이따금 나타나 개인의 감성과 마음을 쓰다듬는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힘을 다시금 얻는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지혜이며 예술만이 건넬 수 있는 위로이지 않을까. 그러한 점에서 <3000년의 기다림>은 현대인에게 필요한 우화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굳이 ‘초월’이라는 단어와 함께 읽어내고자 한 건, 여성 주안공과 사랑이라는 단어를 함께 붙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고집 때문이다. 사실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영화를 읽는다면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매끄러울 것이다. 다만 알리테아의 서사가 아이를 잃은 여성에서 출발하여 진과의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영화의 짜임새가 구시대적이라고 느끼게 될 수밖에 없고, 전체적인 이야기가 납작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2022년에 나온 영화를 2023년의 시청자가 독해하는 자세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어떠한 양가감정을 느낀다. 사랑이란 기실, 가장 값지고 쟁취하기 어려운 가치인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영국 락밴드 퀸Queen이 자신들의 노래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에서 “사랑이란 구시대적 단어이기 때문에Because love's such an old-fashioned word”라고 노래했듯 나는 이 단어의 오용, 사랑 앞에서 수동적으로 변해버리는 여성의 태도를 반성 없이 관습적으로 찍어내는 미디어에 반대하기보단 그저 단어 자체를 거부하는, 더없이 손쉬운 방향을 선택해 버린 것은 아닐까 우려한다. 사랑을 대체하거나 다양하게 소화할 수 있는 단어를 발명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선함과 다정함의 가치를 잊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나는 한 명의 작은 개인일 뿐이지만, 이런 고민을 가진 인간의 발버둥이 쌓인다면 3,000년 후의 사람들에겐 내 고민이 모조리 옛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망을 감히 가져 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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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 학대를 막을 수 있는 방법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여러 학대받는 아이들이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집에서 가족에게 학대를 받는 아이들은 그 학대의 흔적을 지우려고 무던히 애쓴다. 그래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렇게 흔적을 꼭꼭 숨기려 해도 조금씩은 그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 사소한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그 대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그 학대의 모습들을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그런 세심한 관심은 학대를 막거나 멈출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세심히 주변을 둘러보고 손을 건네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많은 복지단체, 복지사, 경찰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직업적으로 또는 개인의 관심으로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그런 이들은 일반인에 비해 학대받는 아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학대를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특히 집에서 벌어지는 학대의 경우, 아이의 부모에게서 아이를 완전히 떨어뜨려 놓기는 힘들다. 제도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것을 막으려 하지만 그 힘이 닿지 않을 때도 많다. 얼마 전에 있었던 창녕 아동학대 사건이나, 인천 의붓아들 학대 사망사건 등 최근까지도 이런 학대는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복지 제도권 안에서 해결해보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멈춰지지는 않았다. 그런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뉴스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정 내 학대를 다루는 영화 <고백>
영화 <고백>은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학대에 대한 영화다. 집 근처에서 조깅을 하던 신입 경찰 지원(하윤경)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불안하게 앉아있는 오순(박하선)을 발견한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지원은 뛰어가다 속도를 멈추고 오순의 옆에 앉게 되어 대화를 나눈다. 그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어색하게 헤어진다. 영화는 우순과 지원의 불안하고 찜찜한 얼굴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가정 학대를 받고 있는 보라(감소현)를 등장시켜 그 주변에서 어떤 반응과 일들이 있는지를 조금씩 보여준다. 뉴스에서는 누군가 아이를 납치하는 일이 벌어지고, 납치범은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국민 일인당 천 원씩 1억 모금을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같은 날 시작된 주인공들의 만남과 납치범의 인질극은 영화 중간중간 묘하게 겹치며 긴장을 만든다.
영화 속 오순은 사회복지사다. 여느 사회복지사가 그렇듯 어려운 일을 돕는데 특히 학대받는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와 그의 동료 미연(서영화)이 학대받는 아이를 돕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연이 차분하게 제도 안에서 그들을 도우려 노력하는 인물이라면, 오순은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를 그곳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는 합리적으로 차분히 아이를 돕는 미연에게 동감하게 되지만, 실제로 학대를 받고 맞는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되면 관객은 점점 오순의 행동에 동감하게 된다. 미연의 도움은 제도권 안의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벌어지기 때문에 실제로 학대받는 아이들에게 원인을 차단할 수 있는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 아이 학대 신고로 아이의 멍든 모습을 보더라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모습은 앞선 도움의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잘 보여준다.
오순은 보다 적극적으로 학대받는 아이 보라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직접 보라 아빠와 각을 세우기도 하고, 소리치고, 몸싸움도 벌인다. 그렇게 영화는 보라가 아빠에게 학대당하는 모습과 그것이 아이의 일상생활을 어떤 식으로 만드는지를 오순의 눈과 귀를 통해 보여준다. 집에서 보라는 늘 겁에 질려있고, 학교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자신이 선생님의 관심에서 멀어진다고 느낄 때 다른 친구에게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많은 학대 아동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학교 생활을 이어나가겠지만, 그것은 의외의 모습을 만들기도 한다. 영화 속 선생님의 말처럼 그런 아이의 모습은 섬뜩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배경을 이해하고 알게 된다면 그 모습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사회제도가 보호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 세심한 관심
영화 속에 신입 경찰 지원은 주변을 아주 세심히 관찰하는 인물이다. 가정 폭력을 받는 여자를 도우려 한다거나 그런 폭력적인 낌새를 눈치채고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려고 한다. 그 역시 경찰이라는 사회제도적 울타리에서 행동한다. 그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경찰에 대한 교육을 할 때 그는 경찰은 주변을 잘 관찰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의 말처럼 경찰은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고 이상한 것이 있는지를 발견해 내야 한다. 보통 가정 폭력 피해자들은 보복 때문에 그것을 주변에 알리기 어려워한다. 영화는 지원의 그런 세심한 관찰을 보여주며 실제로 가까운 사람의 폭력을 어떤 식으로 도와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번이고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도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보라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해주는 오순을 만나며 보이지 않던 웃음을 짓기 시작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보라는 오순과 보낸 짧은 시간을 행복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가 미소 짓는 순간은 영화의 분위기도 밝게 만든다. 그동안 공포에 질려 보낸 집,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학교에서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거나 공포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아빠에게 별 이유 없이 맞고 잘못했다고 우는 모습은 계속 지켜보기 괴롭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도 아빠라는 이유로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고, 멍이나 여러 가지 학대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빠가 때렸는지 증명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경찰의 이야기는 과연 지금의 제도가 가정 학대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질문하게 만든다.
영화에 또 다른 이야기로 등장하는 유괴사건은 그 실체를 명확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일종의 맥거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누가 그 모금을 위한 편지를 보냈는지 왜 모금 계좌를 복지재단으로 했는지 등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납치 사건과 오순, 보라 그리고 지원이라는 세 인물에게 벌어지는 일을 대비시킴으로써 가정 폭력의 가해자와 납치범 각각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교하면서 관객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주인공 오순역을 맡은 박하선 배우는 가정 학대를 한 부모에게는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으로, 다른 한 편으로 피해 아동에게는 차분하고 강한 모습을 보여주며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오순을 잘 표현해낸다. 그 자신도 학대를 받았던 오순이 아직도 그냥 끔찍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오열하는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지금까지 그가 출연한 작품 중 가장 눈에 띄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원 역을 맡은 하윤경 배우도 따뜻한 시선의 좋은 연기로 영화의 사실감을 더한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고백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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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주 차, 영화 위클리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영화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해 보는 '위클리 뉴스'가 찾아왔습니다.
그럼, 지난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대외비> 피렌체 한국 영화제에 공식 초청이원태 감독의 <대외비>가 제20회 피렌체 한국 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다.
<대외비>는 '돈, 권력, 명예, 각자의 욕망을 위해 위험한 거래를 시작하는 세 남자의 배신과 음모를 그린 영화'이다.
조진웅, 이성민, 김무열이 주연을 맡았다.
+ <대외비>는 올해 한국 극장 개봉을 계획하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 4월 개봉 확정65년 연기 경력의 대배우 김영옥의 첫 주연작<엄마를 부탁해>가 4월 개봉을 확정했다.
이 영화는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휴먼 가족 드라마다.
이 영화에는 배우 김영옥 외에
배우 김영민, 박성연, 김혜나, 이정은 등이 출연한다.
<야차> 4월 8일 ‘넷플릭스’ 공개<프리즌> 감독 나현의 신작 <야차>가 4월 8일 넷플릭스에 공개된다.
<야차>는 ‘야차’가 이끄는 국정원 비밀공작 전담 블랙팀과 특별 감찰 검사,
그리고 각국 정보부 요원들의 숨 막히는 접전을 그린 첩보 액션이다.
배우 설경구와 박해수가 주연을 맡았다.
<더 배트맨> 6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영화 <더 배트맨> 6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더 배트맨>의 누적 관객 수는 50만 631명을 돌파했다. (6일 기준)
<해적: 도깨비 깃발> 넷플릭스 전 세계 4위<해적: 도깨비 깃발>는 배우 한효주, 강하늘, 이광수 등이 출연한 영화다.
한국을 비롯해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등 9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배니싱: 미제사건> 티저 예고편 공개출처 | 네이버 영화<배니싱: 미제사건>은 배우 유연석, 올가 쿠릴렌코, 예지원 주연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100% 대한민국 올 로케이션으로 완성된 글로벌 프로젝트로 개봉 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배니싱: 미제사건> 티저 예고편
https://tv.naver.com/v/25498138
<오징어 게임> 채경선 미술감독 수상<오징어 게임>의 채경선 미술감독이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다운타운 호텔에서 열린 제26회 미국 미술감독조합상(ADG)을 수상했다.
에피소드 6 '깐부' 편으로 '1시간 현대극 싱글 카메라 시리즈’ 부문을 수상했다.
이번 주에는 또 어떤 영화 소식이 찾아올지 기대가 되는데요.
그럼 다음 주에 또 새로운 소식으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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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리뷰]부모라면 꼭 봐야할 영화, 어른들의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집]리뷰입니다.
예고편을 다량 사용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수익창출을 포기하겠습니다. 영상만 내리지 말아주세요!사용 예고편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x2TGD...
https://www.youtube.com/watch?v=A__FO...
https://www.youtube.com/watch?v=HySh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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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의 나라> 티저 예고편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 든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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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 메인 예고편
"티모시 샬라메의 완벽한 변신" 밥 딜런의 인생을 노래하다 [컴플리트 언노운] 메인 예고편 공개! 2월 26일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