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두codu2025-03-10 20:20:08
브래디 코베의 정육면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브래디 코베 감독 <브루탈리스트>(2025)
전쟁과 홀로코스트로 인해 국경을 넘지 못했던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은 먼저 미국 땅에 당도해 있던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가 한창 작업 중인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의 도면을 보며 말한다. “당신을 보고 있어.” 라즐로와 오랜 기간 마음을 주고받았을 에르제벳은 헝가리에서 타국으로 건너와 생활하고 있던 남편 라즐로의 속내를 건축 도면에서 읽는다. 건축가이자 남편인 라즐로 토스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걸 에르제벳은 알고 있다. 에르제벳은 라즐로를 이해하는 만큼 마음과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동반자다. 에르제벳이 라즐로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터전을 잃은 유대인 건축가가 사라지지 않을 건축물이자 자기 자신을 건설하려는 이야기다.
<브루탈리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이민자의 역사나 자본의 폭력성보다 한 예술가의 집착에 가까운 신념이다. 라즐로는 직접 정육면체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라즐로는 건축, 즉 자신의 예술품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예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는 건축가에게 3,4미터의 높이나 대리석의 종류와 색은 절대로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자신의 급여를 내놓아서라도 지켜내야만 한다.
라즐로가 건축을 택한 이유는 그 ‘영속성’에 있다. 시간과 침식 속에서도 견고한 본질을 잃지 않는 것. 파시즘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춰 해석되더라도 침식되지 않을 건축이야말로 라즐로의 삶이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조피아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인스티튜트’와 수용소의 유사성을 근거로 홀로코스트의 잔학성과 숭고한 유대주의를 기린다. ‘과정보다 목적지가 중요하다’는 라즐로의 말은 어느새 유대인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변모한다. 라즐로의 건축물은 영원히 남겠지만 그에 덧붙여지는 메시지는 언제고 달라질 수 있음을 내포한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4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진 <브루탈리스트>에서 에필로그는 불필요해 보인다. 1980년 제1회 건축 비엔날레에는 ‘라즐로 토스: 현재 속의 과거’라는 이름의 회고전이 진행되고 있고 휠체어에 탄 라즐로를 뒤로 한 채 조피아가 연설을 맡는다. 이 연설은 자못 유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힌다. 영화의 서막에 등장했던 조피아의 심문 시퀀스가 다시 펼쳐짐으로써 유대인 박해의 부당함과 유대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듯하다. 그러나 에필로그 속에서 라즐로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조피아의 딸이 젊은 조피아를 연기한 라피 캐시디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서막에서 조피아는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을 심문받는다. 에필로그의 라피 캐시디는 또 한 번 유대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앞의 시험대에 서서 정체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시험을 받고 있다. 무력하게 앉아 침묵하는 라즐로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다. 그의 건축물에 유대인을 기리는 특별한 의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라즐로와 조피아가 향하는 목적지가 다름에도 침식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건축물을 꿈꾸는 예술가를 보며 현대를 살아가는 몇몇 관객의 앞에는 처참히 부서진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라즐로가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 이민자가 결국 어떻게 정착을 이뤄냈는지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는 예술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탈리아의 카라라 대리석의 아름다움을 탐미하던 해리슨(가이 피어스)은 술과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라즐로를 강간한다. 에르제벳은 밴 뷰런 가족의 식사시간에 해리슨의 행동을 폭로한다. 해리슨은 식사 자리에서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진다. 가족과 일꾼들은 해리슨을 찾기 위해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를 훑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탈리아의 아름답고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 위로 십자가의 달빛이 뒤집혀 떨어진다. 거대 자본에 유린당하는 숭고한 예술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이 신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그려내고자 한 목적지에 가까운 장면이다. 브래디 코베 감독이 선보인 <브루탈리스트>라는 정육면체는 많은 이야를 품고 있지만 빛은 단연코 그 장면을 비추고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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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건만 할 수 있는 영화
MCU에서 감초 같은 매력을 뽐내는 우주의 수호자들이 마지막 편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가 개봉하고 극장에서 영화를 봤을 때, 히어로답지 않은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우스꽝스러운 면모는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이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2>(2017)은 전편보다 더 휴머니즘이 녹아들고, 어울리지 않았던 이들의 케미가 화려한 폭죽처럼 폭발했던 시리즈였다. 그리고, 이번 마지막 편은 여태껏 메가폰을 잡은 제임스 건 감독의 가히 '걸작'이라고 표현해도 될 법한 영화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스틸컷
제임스 건 감독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를 각본, 감독한 사람이다. 누구보다 캐릭터들의 매력과 장단점을 확연히 알고 있을뿐더러, 제임스 건 특유의 B급 개그와 휴머니즘 정서에 매우 잘 맞는 영화가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다. 이번 영화를 끝으로 제임스 건 감독은 마블에서 떠나기 때문에 영화는 그가 쏟아낼 수 있는 능력을 마음껏 쏟아붓는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다 드러낸다. 특히, 하이 에볼루셔너리 전투선에서 선보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이하 가오갤) 멤버들이 펼치는 롱테이크 전투 장면은 캐릭터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보여주는 연출이었다. 그 밖에도 영화 전체적으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를 담당했던 감독답게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을 남김없이 활용한다.
영화 개봉 전부터 제임스 건 감독은 이번 영화는 '로켓'을 메인으로 잡았다고 언급했었다. 확실히, 로켓의 과거와 함께 플롯이 진행한다. 필자는 영화를 접하기 전, 감독의 의도를 로켓이 희생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오히려 로켓이 새로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리더가 되는 시리즈의 마무리이자 새 시작을 알리는 '가오갤'만의 '엔드 게임'이었다. 애초에 로켓이 리더가 될 거라는 복선은 영화 초반부터 있었다. '퀼'(크리스 프랫)을 상징하는 낡은 미디어 플레이어 '준'을 로켓이 처음부터 들고 노래를 트는 장면부터 로켓이 나중에 저 '준'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준'은 욘두가 퀼에게 준 유품이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뮤직 플레이어다. 그전에 사용했던 '소니 워크맨'만큼이나 퀼이 전투를 할 때나 우주선을 비행할 때 등 늘 그의 곁에 같이 있는 소중한 물건이다. 그런 물건이 로켓한테 갖고 있다는 것은 퀼에게 어떤 이유로 가오갤에 함께할 수 없게 되고 더불어 비어있는 리더의 자리를 로켓이 맡을 것이라는 복선이 된다. 그리고, 퀼은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은퇴와 그 자리를 로켓이 맡게 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2>(2017)에서 욘두가 퀼에게 남긴 '준' 플레이어는 전부터 사용했던 '소니 워크맨'보다 최신 기종이었기에 이번 영화는 보다 다양한 시대와 장르 음악이 등장해 다채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가오갤'의 시작을 알렸던 퀼을 등장 음악 'Redbone-Come and get your love'을 들려주며 가오갤 시리즈의 수미상관을 선보인다. 니체가 말한 '음악 없는 삶은 실수다.'라는 말처럼 영화는 음악으로 영화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휘어잡는다. 모두가 음악을 들으며 신나게 춤추는 장면은 가오갤만의 재미와 각 캐릭터들의 연대가 어우러져 여운을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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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오는 4월 30일부터 5월 9일까지 진행되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가 한국 영화의 거장 배창호 감독 특별전 개최 소식을 알렸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과 공동 주최하는 코리안시네마 섹션 미니 특별전 ‘배창호 특별전: 대중성과 실험성 사이에서’는
대중성과 실험성을 사이를 고뇌하며 작품활동을 해온 감독의 삶, 영화 철학, 내면세계 등을 조명하며,
다큐멘터리 <배창호의 클로즈업>과 디지털 복원작 3편(<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황진이>, <꿈>)을 포함해 총 4편이 상영될 예정입니다.
영화 상영과 더불어, 관객들이 배창호 감독을 만날 수 있는 GV도 준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일정과 게스트는 추후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니, 잊지 마세요!
배리 젠킨스 차기작, SF 스릴러 <더 내추럴 오더>
<문라이트>, <무파사: 라이온 킹>을 연출한 배리 젠킨스 감독이 차기작을 확정했습니다.
유니버설이 판권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 <더 내추럴 오더>는 맷 올드리치의 원고를 바탕으로 하며,
“영생을 향한 추격전”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SF 스릴러로 알려졌습니다.
<탑건: 매버릭>, <트위스터스>를 출연했던 글렌 파월이 주연을 맡았고,
앞으로 몇 주 내로 추가 캐스팅이 발표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르면 올해 촬영이 시작될 것으로 보입니다.
콜린 파렐, DCU 영화 <서전트 록> 출연 논의 중
다니엘 크레이그가 갑작스럽게 하차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DCU 영화 <서전트 록>에 콜린 파렐이 출연을 논의 중입니다.
파렐은 DCU 영화 <더 배트맨>에서 ‘펭귄’을 연기한 바 있으며,
이번 작품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를 상대하는 ‘이지 컴퍼니’의 리더, 프랭크 록 중사 역을 맡을 예정입니다.
<서전트 록>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연출을, 그의 오랜 협업자 사욤부 무크디프롬이 촬영을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클로버필드 2>, 여전히 제작 진행 중
영화 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클로버필드>의 새로운 속편 소식입니다.
2022년 파라마운트가 <클로버필드>의 후속작을 바박 안바리 감독이 연출할 예정이라고 발표한 후,
몇 년간 소식이 없어 프로젝트가 취소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했던 가운데, 최근 진행된 인터뷰에서 안바리 감독은
“너무 말하고 싶지만, 그 팀은 아주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어요.”라고 답하며, 프로젝트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암시하는 답변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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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스완>, <위플래쉬>? 형만 한 아우 없네
스포츠 스릴러를 표방하는 영화 〈더 노비스〉는 〈블랙스완〉, 〈위플래시〉와 닮은 구석이 있다. 성취 대상을 향해 집요하게 달려드는 인물의 심리를 스릴러 장르와 접목했다는 점이 그렇다. 주인공은 경쟁과 강박이 몸에 새겨진 듯 보이는 알렉스다. 학업‧조정을 병행하며 두 영역 모두에서 성과를 내고자 하는 그녀의 열정은 놀랍다. 그러나 ‘과도한 열정’은 광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항상 자신에게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알렉스. 처음에는 그녀의 열정과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주변 사람들도 언젠가부터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알렉스는 자그마한 부분에서라도 지는 걸 견디지 못하고, 그럴 때마다 온몸으로 불쾌함‧열등감을 표출하여 주변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정은 팀 스포츠다. 동료들과 팀이 되지 못하면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없다는 소리다. 알렉스가 목표에 몰두할수록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지는 역설이 발생하는 건 이 때문이다. 이는 영화가 스릴러의 긴장감을 자아내고자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노력과 반비례하는 결과물을 마주하는 알렉스의 괴로운 심리를 비춤으로써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관객에게 어떤 공감‧몰입의 순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블랙스완〉, 〈위플래시〉보다 이 영화가 더 새롭고 강렬하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선 도대체 알렉스가 왜 이토록 학업‧조정에 미친 듯이 몰입하여 경쟁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게 첫 번째 문제다. 두 선배 영화가 이를 영화 전반에 자연스레 녹여냈다면, 〈더 노비스〉는 다소 뜬금없는 대사만으로 캐릭터에 서사를 부여하려 든다. 때문에 알렉스는 팀원뿐만 아니라 관객과도 점차 멀어진다. 아무도 동참하지 않는 광기 어린 질주는 긴장이 아닌 아리송함을 자아낼 뿐이다.
빈약한 서사‧개연성 말고도 이 영화의 흠은 더 있다. 일정하지 않은 호흡이 한 예다. 긴장감이 고조되어야 할 순간에 갑자기 이완시켜버리는 엇박자 연출이 반복되어 완급조절에 실패해버린 것이다. 스릴을 배가하기 위해 공들여 선택한 듯 보이는 OST도 엇박자만 내며 어떻게든 끌어 모은 긴장감을 깨기 일쑤다.
〈오펀: 천사의 비밀〉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눈도장을 찍은 이사벨 퍼만이 〈더 노비스〉에서도 호연을 펼쳐 강렬한 캐릭터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더 커진다. 강렬한 캐릭터만으로 진부함, 엉성함을 돌파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블랙스완〉, 〈위플래시〉와 닮은꼴 영화를 표방해 마케팅 포인트로 잡았다면, 최소한 그들만큼의 완성도는 보여줬어야 한다. 괜한 비교로 관객의 기대만 성급히 키워 실망을 만들어낸 것 같아 안타깝다. 적어도 이번에는,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맞았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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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스와 보낸 여름> - ‘마지막으로 남은 공룡은 외로웠을까?’
테스와 보낸 여름
(My Extraordinary Summer with Tess)
개봉일 : 2020.09.10. (한국 기준)
감독 : 스티븐 바우터루드
출연 : 소니 코프스 판 우테렌, 조세핀 아렌센, 트에보 게리츠마, 제니퍼 호프만
‘마지막으로 남은 공룡은 외로웠을까?’
“혼자 남겨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여느 때처럼 찾아온 뜨거운 여름이 끝나갈 때쯤, 소년은 한가지 걱정이 생겼다. 모든 동물과 인간은 언젠간 죽는다. 강아지도, 저기 바닷물 안에서 펄떡이고 있는 물고기도, 나도, 사랑하는 가족들도 결국 언젠간 죽을 것이다. 소년은 해변가에 구덩이를 파고 누워 언젠가 닥쳐올 이별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소년은 몇 가지 고민을 거쳐 언젠가 다가올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기로 결심한다. 외로움에 익숙해지면 혼자 남겨졌을 때 보다 잘 적응할 수 있을 테니까.
<테스와 보낸 여름>의 주인공인 소년 샘은 자신이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공룡’과 같은 운명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가족들과 함께 온 여름휴가지만 샘은 외로움에 적응하겠다며 매일같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별 후에 닥쳐올 상실감을 예방하기 위해서 말이다. 필요 이상의 마음을 주지 말자고 다짐한 소년의 마음을 단박에 이끈 건 섬에 살고 있는 소녀 ‘테스’였다.
처음 만난 소년 샘에게 다짜고짜 살사를 함께 배우자며 울타리를 열어주던 소녀는 엄마 몰래 비밀스러운 계획을 실행한다. 서로를 엉뚱하다고 말하는 샘과 테스는 의외로 쿵짝이 잘 맞는다. 둘은 어른들은 모르는 비밀을 나누며 샘의 여름휴가가 끝나기 전, 비밀의 주인공에게 모든 걸 고백하기로 한다.
샘이 테스를 만난 그 해 여름은 유난히 이상했고, 행복했고, 새로웠다. 매해 찾아오는 여름이지만 테스를 처음 만난 그 해는 샘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향을 가진 다음 여름이, 또 다른 색을 가진 또 다음 여름이 샘과 테스에게 찾아올 것이다. 둘에게, 우리 모두에게 앞으로 더 행복한 여름만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외로움에 대해 고민할 틈조차 없는 그런 행복한 여름말이다.
테스와 보낸 여름 시놉시스
엉뚱한 소년 ‘샘’은 가족과 함께 떠난 바닷가 휴양지에서도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공룡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하던 ‘샘’은 언젠가 혼자 남겨질 경우를 대비해 ‘외로움 적응 훈련’에 돌입한다.
그런데 섬에서 만난 소녀 ‘테스’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한다. 첫 만남에 다짜고짜 살사 춤을 추자고 하는 더 엉뚱한 소녀 ‘테스’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샘’을 놀라게 한다. 그러던 중 어른들은 모르는 ‘테스’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알게 된 ‘샘’은 이에 동참하게 되는데…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의 끝, 그전에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너 살사 출 줄 알아?”
여름휴가 첫날, 샘은 해변에 구덩이를 파고 누워 언젠가 닥쳐올 가족들의 죽음과 남겨질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고민을 거듭하며 잡히지 않을 연을 향해 손을 뻗던 샘은 밝게 자신을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다. 좀 전까지 무거운 고민을 했지만 아이는 아이인 건지, 금방 아빠, 형과 어울려 해변을 뛰어다닌다. 한참 재밌어지려는 찰나, 형 요러가 샘이 누워있던 구덩이에 빠져 발목을 다친다.
요러는 샘 때문에 다쳤다고 짜증을 내고 샘은 구덩이를 못 본 형이 잘못이라며 티격태격한다. 병원에 도착한 세 부자는 진찰을 기다린다. 아빠는 툭하면 투닥이는 두 아들을 잠시 떼어놓기 위해 샘을 밖으로 내보낸다. 샘은 자신이 좋아하는 생선튀김을 사고 아빠와 형을 기다리며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걷고 있다.
마을을 구경하며 걷던 중 우연히 눈을 마주친 소녀 테스는 처음 본 샘에게 살사를 출 줄 아냐고 묻더니, 함께 배우자며 울타리를 열고 샘을 마당 안으로 이끈다. 뜬금없이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공룡의 외로움’에 대해 고민하던 샘도 엉뚱하지만, 갑자기 함께 살사를 배우자며 처음 본 소년을 마당으로 끌고 들어오는 테스도 보통 엉뚱한 아이는 아닌듯하다.
“나중에 혼자 남겨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샘은 테스를 만난 순간, 좀 전까지 고민했던 ‘마지막 공룡의 외로움’은 완전히 잊어버린다. 엉뚱하지만 밝은 소녀와 영상을 보며 살사를 추는 시간이 그저 즐겁다. 하지만 테스가 샘을 길가에 내려둔 채 홀로 쌩-가버린 저녁, 샘은 다시 외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저녁까지 함께 살사를 배워야 한다고 해놓고, 손님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쌩하니 가버리다니. 샘은 테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한순간에 혼자가 돼버린 저녁. 샘은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움 적응 훈련을 시작한다.
여행객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해변, 파도에 쓸려온 물건들을 주워 만든 샘만의 훈련 장소가 만들어진다.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샘은 완전한 외로움을 느끼며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테스와 언젠가 사라질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2시간을 견딘다. 2시간, 4시간, 6시간, 8시간, 10시간. 샘은 이번 여름휴가가 끝날 때쯤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듯하다. 샘은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을 저-멀리 밀어놓고 조금씩 벽을 쌓아가고 있었다.
‘외로움에 익숙해지기!’라는 샘의 여름휴가 목표가 바뀌게 된 건 테스의 비밀 계획을 알고 나서부터였다. 테스가 피크닉을 준비한 날, 샘은 테스가 자신이 아닌 휘호와 피크닉을 가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테스와 다른 방향의 길을 타고 숙소로 돌아온다. ‘나는 테스를 좋아하지만, 테스는 내가 아닌 휘호를 좋아하고 있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던 샘에게 테스가 먼저 다가온다. “휘호는 우리 아빠야.” 테스가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하던 날, 샘의 아지트는 사라졌고, 여름휴가의 목표도 바뀌게 된다.
엄마의 여행수첩에 남은 이름을 단서 삼아 아빠 휘호를 찾아낸 테스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내기 위해 휘호와 앨리서를 별장으로 초대한다. 샘과 테스는 휘호에 대해 알기 위해 퀴즈게임을 준비하고, 두 사람의 반응을 살핀다. 테스는 처음으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고, 어깨동무를 해본다.
5752일(11년)의 시간. 테스는 아빠와 함께 만든 추억이 없었다. 그에 반해 샘은 네 가족이 함께 살았기에 자연스레 아빠, 엄마, 형과의 추억을 쌓아온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샘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외로움’에 대해 걱정하고, 어쩌면 테스가 아빠를 모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빠’라는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그 이후에 따라올 슬픔과 외로움을 한 번 더 견뎌야 하니까.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휘호의 말에 충격을 받은 테스가 집으로 뛰어가고 여름휴가의 마지막 날이 온다. 샘은 엄마 아빠의 걱정과 꾸지람을 뒤로하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갯벌에 발을 묻고 외로움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던 샘은 자신의 발이 뻘에 깊이 묻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해 위험한 순간을 맞이한다.
“현재는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현재는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병원 벽에 걸려있던 그림에 적혀있던 문장이다. 마지막으로 남을 미래와 외로움을 걱정하던 샘은 가장 소중한 현재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미래를 준비하기보단, 언젠가 닥쳐올 외로움에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현재의 외로움을 택한 것이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있던 샘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 건 힐러 할아버지였다. 뻘에 발이 묻힌 샘을 구해준 할아버지는 샘에게 이별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심어준다. 이별 또한 우리들의 삶이며 인생이고, 혼자 남겨지는 것을 걱정하기보단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을 모으라는 할아버지의 말.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아내와 이별을 겪은 그의 말엔 홀로 남겨진 슬픔과 추억을 되짚는 사람의 웃음이 함께 담겨있는 듯하다.
“최대한 많은 추억을 모으거라”
힐러 할아버지가 샘에게 건넨 한마디가 이 이야기의 중심을 한순간에 관통한다. 스티븐 바우터루드 감독은 힐러 할아버지를 통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현재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새로운 추억 만드는 건 어떠세요?”
휘호에게는 딸이, 테스에게는 아빠가 생겼다. 5752일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모르고 있었던 아빠와 딸은 이제 새로운 추억을 쌓기 시작한다. 샘은 홀로 살고 있는 힐러 할아버지를 파티에 초대해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샘의 그 해 여름휴가는 가장 이상한 최고의 일주일이었다.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의 소중함과 추억을 놓치고 있던 소년은 이제 걱정 없이 추억을 쌓기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빛깔로 물든 샘의 그 해 여름 위에 다음 여름의 추억이, 또 다른 계절이 쌓이고 그 추억들은 언젠가 다가올 외로움과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순수하고 엉뚱한 소년 소녀의 상상과 계획으로 가득했던 여름의 끝자락 이야기 <테스와 보낸 여름>. 정말 한없이 사랑스럽고 무해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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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제주 바다, 여전히 아름다운지
짧은 상영시간 안에 함축적으로 메시지를 담아내는 단편 영화는 일반 상영관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어 더 특별합니다. 때로는 짧기에 더 강렬한 공명을 자아내기도 하죠. 제20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이름을 올린 <돌고래와 헤엄치는 법>도 그런 단편 영화 중 하나입니다. 고향집을 처분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영남’과 제주에서 오염수 방류 중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유림’의 이야기를 그리죠. 20분 내외의 짧은 영화 속에 담긴 제주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요?
돌고래와 헤엄치는 법
How to Dive with Dolphins
Summary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고 시간이 흘렀다. ‘영남’은 고향집을 정리하기 위해 제주에 내려간다. 그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해양 쓰레기를 청소하는 옛 ‘유림’을 재회한다. (출처: 제천국제음악영화제)
Cast
감독: 서윤수
출연: 우영남, 정은선
큰 문제 앞의 너무 작은 우리들
사회의 문제들은 언제나 겹겹이 쌓인 이해관계에 의해 그 몸집을 불려 갑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서 개인은 너무 작은 존재에 불과하죠. 가치가 돈으로 결정된다는 논리가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당장의 금전적인 이익이 없는 무언가를 지키려는 개인의 노력이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합니다.
어민들은 오염수 방류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생존을 위한 필수 노동을 경시하는 씁쓸한 경향이 있습니다. 오염수 방류는 환경을 등한시한 결정일뿐만 아니라, 1차 산업 노동자들을 무시한 행태이기도 하지요. 제주 사람 '유림'은 그들을 지키고자 오염수 방류 중단 시위를 벌이지만, 외려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혐오할 수 있으니 그만해 달라는 어민들의 부탁을 받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에 마음이 아프지만, '유림'은 대신 해양 쓰레기를 주우면서 소셜 미디어에 상황을 알리는 것에 힘쓰기로 합니다. 자신의 노력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죠.
해녀들이 바다에서 수확한 해산물을 잠시 넣어두는 바구니를 '테왁'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해산물 대신 해양 쓰레기를 넣는 장면은 실로 인상적입니다. 해산물을 수확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는 전복이나 소라가 다시 붙기 마련인데요. 영화 속 플로빙 장면을 보면, 쓰레기를 수거한 자리를 채우는 것은 분명 또 다른 쓰레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연의 힘은 강하고 그 속의 인간은 한낱 미물일 뿐이라는데, 인간의 간섭과 횡포가 얼마나 강력하고 악하길래 자연을 거스르기만 하는지 부끄러움이 차오릅니다.
거대한 자연보다도 더 거대한 문제들 앞에 선 너무 작은 우리들. 인간이 초래한 결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 존재하며 돌고래와 함께 헤엄치는 방법이 있는 걸까요?
화자와 청자, 나는 누구인가
극 중에서 '유림'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내뱉는 화자입니다. 작지만 행동을 멈추지 않고, 그러면서도 돌고래에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반면 '영남'은 청자입니다. 그는 자연이나 환경보다는 '유림'을 향한 관심으로 플로빙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그 관심이 점점 '유림'이 있는 바다로 옮겨 가지요.
영화가 끝날 무렵, 바다를 가만 응시하는 '영남'의 표정은 참으로 묘합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기도 하고, 일견 허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얼굴을 단독 숏으로 잡아 보여주는데요. 화자는 유림인데, 청자의 얼굴을 자꾸 비추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남'은 행동하지도 발화하지도 않는 수많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뉴스 기사에서 보이지 않으면 쉽게 관심을 저버리는 사람들, 자신 앞에 닥친 현실을 견디느라 사회의 문제를 무시하는 사람들. 우리는 삶의 작은 괴로움 하나만으로도 사회의 거대한 문제를 쉽게 제쳐 버립니다. 그래서 사회의 문제들은 언제나 거대하지만 희미하죠. 관객은 20분 내외의 상영 시간 동안 개인의 문제에 밀려 희미해져 버리고 만 사회의 문제를 마주합니다.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했던 것들, 그러나 모른 척하기엔 너무 거대했던 문제를 말입니다.
엔딩 이후의 '영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렇지 않은 듯 현실로 돌아가 개인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갈까요, 아니면 '유림'처럼 화자로 변모할까요? 문득 제 자신도 돌아보게 됩니다. 그간 단 한 번이라도 화자인 적이 있었는지, 청자에만 안주해 있지는 않았는지.
제주 바다, 아름답지요. 하지만 아름다움 뒤에 곪아 있는 상처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청자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관성을 이겨내고 싶어지는 영화, <돌고래와 헤엄치는 법>이었습니다.
One-Liner
돌고래와 헤엄치는 법을 정말 몰랐던 건지, 아는데 모르는 척했던 건지, 그저 미안할 뿐이다.
Schedule in JIMFF
2024.09.09(월) 세명대 블랙박스 실험극장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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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와 삶의 관계에 대한 스필버그의 회고록
운명처럼 다가온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은 무섭다. 어린 새미. 엄마, 아빠랑 손 잡고 극장에 가기로 했다. 극장이 무섭다는 아들의 말에 엄마 미치와 아빠 버트는 아들을 달랜다. "상영관에 가면 막상 사람들이 거인처럼 보일 거야. 근데 그건 다 연기하는 거라고." 귀엽게 설명한다. 용기를 내는 새미. 손 꼭 잡고 극장으로 들어간다. 새미와 부모님이 보기로 했던 영화는 <지상 최대의 쇼>다. 러닝타임이 재생된다. 영화에 정신이 팔려 미친 듯이 빨려가는 새미. 특히 그 영화의 한 장면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장면은 기차가 추돌사고를 일으키는 신이었다. 대박! 어떻게 저렇게 만들지? 설마 진짜 기차를 부술리는 없을 테고. 금세 집으로 돌아가서 이 장면을 구현하고 싶어졌다.
집에 도착했다. 직접 그 장면을 만들어보는 새미. 아버지에게 핀잔도 듣지만 새미를 멈출 수는 없다. 꿈이 생기기 시작한 새미. 꿈을 영화감독으로 정했다. 현재 2023년의 누군가가 말해도 '정말?' 할 말을 1950년대에 했으니 오죽할까. 아버지는 이런 새미의 목표를 취미쯤으로 생각한다. 반면 어머니 미치는 생각이 다르다. 춤추는 걸 좋아했던 미치. 아들 새미가 영화감독으로서 잠재력을 펼치길 바라고 있다. 아무튼 새미 가족은 사이가 좋다. 카메라를 새미에게 사준 아버지 버트. 취미든 아니든 알 바 아니다. 이제 새미의 세상을 만들 때가 왔다. 꿈 앞에 나아가는 새미. 그런 세미 앞에 거친 인생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신이 된 남자
한 분야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도 이 방대하게 넓은 영화 시장에서 게임 체인저가 됐다면 그 공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죠스>로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스필버그. 영화적 상상력은 공간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발현됐다. 외계인들과의 첫 만남을 묘사했던 <미지와의 조우>가 생각난다. 사실 이 영화를 지금 2023년 본다고 하면 살짝 루즈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봐도 신선하다고 느낄 부분이 몇 있다. 스필버그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 모두 다 <E.T>라는 영화를 알고 있다. 골판지 돌돌 말아 만든 것 같은 비주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외계인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어른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만들었던 스필버그. <미지와의 조우>가 스릴러/미스터리적인 특성을 띈 것과는 반대로 <E.T>는 동화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 분이 같은 장르 안에서 템포를 바꾸는 것에만 능한 게 아니다. 그냥 영화를 잘한다.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릴러 <마이너리티 리포트> 로맨스 <영혼은 그대 곁에> 등 장르와 시대를 가로질러 압도적인 능력치를 보여준 것이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나이가 들면 늘 하던 것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이 사람에게 그런 건 없다. 물론 전체적으로 스필버그가 갖고 있는 영화적인 톤은 그대로지만 크고 작은 변화들은 지속해 왔다. 최근 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까지 스필버그는 뭐에 홀린 듯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 <파벨만스>는 스필버그가 홀렸던 ‘어떤 것’에 대한 영화다. 왜 영화를 사랑하게 됐는지를 러닝타임동안 옴니버스 형식으로 설명한다. 또한 두 번째로 영화를 만들 때 어떤 가치관을 바탕으로 만들게 됐는지도 보여준다. 또 가장 결정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청년 스필버그의 영화관에 영향을 줬는지도 보여준다. 엥? 그냥 전기영화 아니야? 이 영화는 뻔한 전기영화와는 다른 감이 있다. 바로 러닝타임 내내 이런 가치들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피소드 하나당 하나가 아니라 사실상 이런 가치들이 하나로 묶여있는 듯한 연출법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의 핵심과도 이어져있다. 예를 들어서 주인공의 부모님은 입체적인 캐릭터다. 아버지 버트는 아들의 꿈이 취미라고 생각하지만 카메라를 사 준다. 또 이 버트라는 캐릭터는 아버지로서 굉장히 훌륭한 사람인 것으로 보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어떤 문제가 있어서 영화의 핵심 사건에 원인을 제공한다. 또 어머니 미치는 아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사람이다. 또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들의 꿈을 후원한다. 이 영화를 좋아하고 예술가적 특성이 마음 안에 있는 그녀가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도 영화에서 재미있게 묘사된다.
무관은 정말 서운해
사실 아카데미를 그렇게까지 신뢰하는 편은 아니다. 뭐 오스카에서 상 하나 못 받았다고 영화 가치가 떨어지나? 그런 건 없다. 글쓴이만 해도 작년 수상작인 <코다>보다 <드라이브 마이카>나 <파워 오브 도그>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건 좀 해도 너무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엄청난 작품이라는 것은 변함없지만 감독상 정도는 줄 만 했잖아?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감독의 역량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느낄 수 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새미는 영화 안에서 몇 작품을 찍는다. 이 작품은 새미의 삶과 별개처럼 보이지만 사실 거의 그대로 현실을 담고 있다. 극 중 극이 품고 있는 서사 중 몇몇 장면이 현실의 어떤 지점에서 영화화되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정밀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를 구성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현실과 영화와의 사이라는 지점은 영화의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과도 이어져있다. 그러니까 그 부분은 이 ‘현실과 영화사이의 교집합’은 곧 ‘새미의 예술관’, 즉 ‘스티븐 스필버그의 예술관’과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렇게 토대가 단단해진 스필버그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아버지가 세계 2차 대전 참전 용사였다는 것(<라이언 일병 구하기>) 외로웠던 유년시절에 판타지적인 요소로 아로새긴 친구(<E.T>), 퇴색되어 버린 가족의 사랑(<A.I.>)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뮌헨>)까지 그의 실제 행보를 생각해 보면 이런 장면들이 작품을 보고 나서도 다른 감동처럼 느껴지게 한다.
또 이 영화는 인물에 대한 판단이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우리가 만약에 한 60여 년 동안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60년의 세월 동안 쌓은 입지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해 보자. 우리 지나가다가 만난 아무 나도 '어려운 시기 이겨내서 지금 행복하게 잘 산다'류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떠들곤 한다. 할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이라면 이 드라마틱한 성장서사를 더 전하고 싶지 않을까? 영화는 냉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인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자기 연민에 대한 이야기? 없다. 영화를 위한 거룩한 희생? 감정적으로 들끓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이 사건들을 어떻게 영화화할 것인가?'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감정적인 반응에 강점이 찍힌 건 작품 상영 후를 묘사하는 지점 쪽에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가족들에 대해서 무작정 안 좋게 묘사한다던가, 영화에서 악역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을 무조건 감싸준다던가 하는 일은 없다. 생각해 보면 이 역시 영화의 핵심 중 한 부분('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영화화한다는 것')과도 닿아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도 굉장히 기억에 남는다. 영화 촬영은 엔딩과도 관련이 있다. 엔딩에서 그렇게 연출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흐름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영화에서 두 사람의 촬영방식을 구현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새미가 찍는 극 중 영화, 스필버그가 기획한 장면 연출이다. 또 어떤 장면에서 빛을 활용한 촬영이 돋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영화에서 품기는 분위기를 더 매력 있게 만든다.
이 둘이 부부
사실 이 <파벨만스>를 글쓴이가 전부터 기대했던 이유는 두 주인공 때문이다. 바로 폴 다노와 미셸 윌리엄스다. 폴 다노는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선 굵은 연기를 한 것으로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다. 또 <더 배트맨>에서는 적은 노출로 어떻게 하면 광기를 폭발시킬 수 있는지를 연구한 티가 났다. 이렇게 테크닉 화려하게 때려 박는 연기를 잘하는 것 같지만 이 사람은 따뜻한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연기력으로 두드러지는 부분은 다른 배우들 쪽에 좀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의 테크닉이 다른 영화들처럼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폴 다노는 대체불가한 장점을 과시하며 안정적으로 극을 이끈다. <밀양>의 송강호 배우가 생각나는 연기였다.
미셸 윌리엄스는 연기의 정석을 그대로 옮긴 것 같았다. 폴 다노처럼 개성 있는 해석능력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미셸은 반대로 그 세계와 인물을 오롯이 이해하고 순간마다 서려있는 감정연기를 풍부하게 보여줬다. 이 마치를 가로지르는 캐릭터 특성은 호기심과 신선함이다. 뭔가 새로운 걸 찾아 나서는 성격인 미치. 이 신선함에 대한 강박은 인물을 후반부까지 이끄는 좋은 동력이 된다. 걸핏하면 몰입이 깨질 수도 있는 인물을 영화의 엔딩까지 적절하게 끌고 갔던 것은 이 미셸 윌리엄스의 덕이 크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양자경과 케이트 블란쳇이 유력했던 탓에 이 분이 엄청 언급된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미셸 윌리엄스는 인물의 입체성을 이 세계가 품고 있는 질서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만한 가치가 충분했다고 느낀다.
모든 걸 포함하는 이야기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역시 엔딩이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에게도 가장 인상 깊게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솔직히 처음 극장 문을 나올 때 '이걸?' 싶었다. 그런데 집에 가면서 다시 돌아보니 이 영화의 엔딩으로 이 장면만큼 깔끔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해가 어려운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첫 장면과 끝장면이 왜 그 부분으로 시작할까?를 생각해보신다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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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파일럿으로 변신한 조정석의 압도적 연기 / 빵빵 터지는 코미디 / 매력적인 이주명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파일럿"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과 함께 쿠키영상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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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는 건 없었다. 탈영병은 계속 생기고, 디피는 그들을 데려와야 한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결코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넷플릭스 시리즈 《D.P. 2》 7월 28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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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귀환!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티저 예고편 공개 2024년 극장 대개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