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18 23:35:37
풋풋하고 싱그러운 남녀의 성장 - <시시콜콜한 이야기>
<시시콜콜한 이야기> 영화 리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로스쿨을 보고 이수경 배우의 연기가 너무 인상 깊어서 필모그래피를 훑던 중 보게 된 단편 영화이다.
로스쿨에서 비춰진 냉정한 모습이 아닌 따뜻하고 호기심 가득한, 그리고 이수경 배우만의 수수한하고 청초한 이미지가 너무나도 신선했고, 특히 엄태구 배우가 눈에 들어왔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이 웃던 배우였나..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항상 진지하고 무거운 역할들을 맡아서 그런지 영화를 보면서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영화 줄거리는 감독 지망생이자 시나리오 작가, 도환(엄태구 배우)과 대학생, 은하(이수경 배우)가 지인 추천으로 사설모임에서 만나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이다. 특히 둘은 공통으로 좋아하는 '글쓰기'란 소재로 서로에게 더 다가가면서 알아간다. 낯도 많이 가리고 옛 연인을 잊지 못한 채 계속 똑같은 시나리오만 쓰던 도환이었는데, 은하를 만나고 나서 별거 아닌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이어나가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옛 연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정리할 수 있었고 아예 새로운 테마로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계기가 된다. 은하도 항상 궁금했던 '글쓰기'에 대해서 도환한테 '뭐 써요?, 무슨 내용이에요?' 등과 같은 질문을 통해 더욱더 도환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산책하면서 또는 전화를 하면서 서로에 대해 궁금해하며 누구는 자신의 과거를 흔쾌히 떨쳐내는, 누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다가오는 상반된 이미지가 연출되어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임팩트가 강했던 것 같다. 32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이었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적 배경 덕분에 산뜻하고 시원한 공간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서로가 천천히 밀고 당기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 그래서 그런지 여운이 더욱더 남았던 것 같다.
32분이라고 못 느낄 정도로 보는 동안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갔고 알차고 편안하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제목 그대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한 층 더 발전된 인간관계를 형성하여 등장인물 모두, 그리고 시청자로서 보는 나 또한, 성장할 수 있는 영화였던 것 같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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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네트> 영화의 화려함이 가린 진실을 찾아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과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린다. 행복한 만남을 이어가고 결혼을 약속하며 함께 인생을 노래하는 두 사람. 그러나 이미 쇼비즈니스의 스타가 되어버린 둘을 언론은 가만히 두지 않고, 끊임없이 가십으로 그들을 소비한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한 헨리는 자신의 콘서트를 망치는 등 조금씩 커리어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반면에 안은 커리어는 성공적으로 이어가지만, 헨리로 인해 결혼생활과 딸 아네트의 양육에 조금씩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고 부부 사이에는 어둠이 늘어난다. 그리고 이 어둠이 가장 짙어지는 순간 부부의 삶은 조용한 바다가 폭풍우를 만나듯 전혀 다른 국면에 진입한다.
<아네트>는 '프랑스 천재 감독'으로 불리는 레오 카락스 감독이 <홀리 모터스> 이후 9년 만에 선보인 작품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처음 시도된 영어 영화이자 뮤지컬 영화다. 이 작품으로 2021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는 아내와 사별한 후 딸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진 자신의 개인사를 반영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었고, 실제로 <아네트>는 그러한 바람이 적극 반영된 작품으로 보인다. 감독이 딸과 함께 직접 등장하는 영화의 오프닝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아네트>는 헨리와 안 부부의 연애와 결혼생활과 남겨진 부녀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들이 심연 깊은 곳으로부터 마주해야 했던 정과 진실을 담아낸다.
그렇지만 <아네트>는 단지 한 가족의 일상을 춤과 노래로 담아낸 작품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작가주의적 경향이 뚜렷한 갑독답게, 뮤지컬 영화의 익숙한 외양과 형식을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쉽고 대중적인 길을 선택하는 대신 카락스의 뮤지컬은 간단한 이야기를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일상을 반추하게 만드는 거울로 탈바꿈시킨다. 더 나아가 영화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도 되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영화의 의도, 메시지, 수단에 대한 힌트는 작중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바로 카메라의 존재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서 멋지게 공연을 마무리하고 극장 밖에서 만난 헨리와 안 커플은 수많은 기자들의 카메라에게 둘러싸인다. 뒤이어 카메라에 일거수일투족 포착되는 그들의 연애와 결혼은 그 자체가 하나의 해프닝, 가십이 되어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구성을 반복한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도,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코미디언으로서의 입지가 나날이 줄어드는 헨리와 나날이 명성이 높아지는 안의 대비되는 커리어도, 그리고 그들의 휴가와 그곳에서 벌어진 사고와 어린 아네트의 놀라운 노래 실력까지도. 이 모든 것은 진실과는 무관하게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카메라에 의해 제시되고, 소비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작중 등장한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관객을 일치시키는 연출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카메라로 인해 관객이 외면적인 것만 보고 평가하고 관찰하는 입장에 놓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연극과 달리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일방향적이다. 무대 위의 배우와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연극의 관객과 달리 영화 관객은 철저히 카메라에 찍히고 보이는 것만 볼뿐이다. 즉, 작중 카메라는 사실을 자극적으로 변형시키는 뉴스와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이나, 영화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관객이나 본질적으로 겉모습 뒤에 숨은 진실을 보지 않거나 못한다는 공통점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네트>는 간단한 이야기와 달리 독특한 형식적 특징을 살려 카메라로 인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밝혀내려고 한다. 깔끔하게 완성된 세련된 뮤지컬 영화의 모습이 아닌, 거칠고 모난 모습을 통해 보기 좋은 것 너머의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아네트>를 볼 때 유독 의아하고 실망스러운 대목이 눈에 띄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송스루(song-through) 뮤지컬답게 영화 속 넘버는 대부분 주인공들의 심리를 노래하는데, LA 글램락의 전설이라고도 칭해지는 밴드 ‘스파크스’가 참여한 음악이 귀를 즐겁게 하는 것에 비하면 노래 가사는 지나치게 일차원적이다. 수영장에서 노래하는 안이나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노래처럼 '나는 괴롭다, 슬프다, 후회한다, 기쁘다, 억울하다'와 같은 직접적인 가사만이 되풀이된다. 또한 노래를 감싸는 배경도 조악하다. 파도치는 바다를 표현한 CG나 아네트가 인형으로 등장하는 것은 한눈에 봐도 어색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기저에 진실과 본질을 왜곡하고 가리는 카메라, 곧 영화를 비판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보면 위의 단점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겉치레를 버리고 영화의 본질과 이야기의 원형에 집중시키려는 의도된 연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아네트>의 형식과 구성 전반에서 영화의 가장 원형적 형태인 고대 그리스의 연극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주인공의 직업인 스탠드업 코미디언과 오페라 가수는 그리스 연극의 두 축인 희극과 비극의 조합을 연상시킨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마치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와 같은 형식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대한 영화에 집중하길 바란다는 도입부 코러스의 가사 역시 쇼비즈니스의 대명사가 된 뮤지컬 영화에서 화려한 춤과 노래 대신 설령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소중한 이야기에 주목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다름없다. 더 나아가 이는 작중 헨리나 안이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이는 퍼포먼스를 가능한 실황 라이브를 보듯 현장감을 살리는 방식으로, 그리고 관객석에서 무대를 보는 구도로 연출한 이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아네트라는 인형의 인형극은 헨리가 아네트를 대하던 태도처럼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보고 듣지 못하고 인물의 심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세테를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어색한 CG나 과도하게 편의적인 노래 가사들도 비록 덜 다듬어지고 거칠고 화려하거나 세련되지는 않아도 가장 본질에 가깝고 원형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그 결과 <아네트>는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려는 이야기와 감정 그 자체보다는 단지 화려한 시각효과와 같은 기법처럼 영화 속 엔터테인먼트 영역이 점점 커지는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될 여지도 남긴다.
물론 뮤지컬 안에 수많은 극형식을 혼합시키고 영화에 한 편의 통일성을 불어넣지 않는 시도는 굉장히 실험적인 인상을 주며, 실제로도 상당히 난해하고 어렵다. 그래서 초현실적인 이미지, 배우의 연극적 제스처, 화려함과 어두움을 오가는 색채, 희극과 비극이 한 데 어우러지는 서사의 만남은 영화의 메시지와 의도에 공감하거나 동의하지 못할 경우 그저 괴상한 조합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시도는 분명 단순해 보였던 <아네트>의 이야기가 삼중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인상적이다. 우선 영화는 희극을 통해 관객을 죽이게 웃기려 하고 비극을 연기해 관객의 죽음을 대신 맛보게 하는 두 배우의 연애 과정과 결혼 이후의 삶을 통해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깨닫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다음으로는 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과도한 형식적 특징을 살려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의 쇼로 만들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삶을 영화를 통해 훔쳐보고 있는 관객에게 혼란을 안기면서 영화의 본질과 현실을 곱씹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엇보다도 <아네트>는 자신을 보는 모든 이에게 인생의 진실을 일러준다. 헨리와 안 부부처럼 우리 역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내던 자신의 바람과 감정, 그리고 진실을 항상 유념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감독이 딸과 함께 직접 영화 서사에 등장하고, 주인공의 공연을 보는 관객이 뮤지컬에 함께 참여하여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는 난해하고 어려운 만큼 다양한 측면에서 깊은 여운과 생각거리를 남긴다.
A(Acceptable, 무난함)
영화의 상징과 기원의 도움을 받아 삼중의 진실을 찾아 나서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아네트>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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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차'를 떠올리게 하지만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8★/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리에와 그의 아들 유토. 리에는 둘째가 병으로 죽었고, 그 이후 남편과 이혼했으며, 최근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상실의 슬픔을 통과하는 중이다. 별일 없다는 듯 의연한 표정으로 가게를 정리하지만 느닷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이내 일그러지고야 마는 그녀의 얼굴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는, 그녀가 마주한 압도적 슬픔의 크기를 관객에게 단번에 확인시켜준다.
그런 그녀에게 수줍은(혹은 음침한) 얼굴의 한 남자가 다가온다. 이름은 다이스케라 하고,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다이스케는 자주 리에의 문구점에 찾아와 그녀와 안면을 트고, 리에의 요구에 못 이기는 척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따뜻함이 묻어나는 그림이다. 곧 리에와 다이스케는 결혼한다. 다이스케는 과거가 알려지지 않은 외지인이기에 종종 마을 사람들의 근거 없는 험담에 시달린다. 하지만 리에는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 유토를 자기 자식처럼 돌봐주고, 리에와 함께 예쁜 딸을 낳아 키우는 중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해주고 가정에 충실한 다이스케가 주는 일상의 안정감과 안전감이 리에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벌목 일을 하던 다이스케가 작업 중 사고로 사망한 것. 그러나 어렵게 찾아온 행복이 또다시 자신을 배신한 것과 사랑하는 사람이 허망하게 떠나버린 것을 슬퍼할 새도 없이, 리에에게 또 다른 혼란이 찾아온다. 다이스케의 제삿날에 찾아온 그의 친형이 영정을 보고는 그가 다이스케가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리에는 몇 년간 가족을 이루고 산, 사랑해서 아이까지 낳은 남자의 이름을 하루아침에 빼앗긴다. 이제 다이스케는 미지의 존재를 지칭하는 ‘X’가 된다.
리에는 전에 이혼 소송을 도왔던 변호사 키도를 찾는다. 능력 있는 변호사인 키도는 이 사건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강한 끌림을 느껴 X의 발자취를 좇는다. 키도의 아내가 사건에만 열중하느라 그가 가족에 소홀해지고 어딘가 변한 것 같다며 불만을 표할 정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키도가 만난 사려 깊거나, 소름 끼치거나, 리에처럼 수수께끼를 마주한 사람들을 거쳐 마침내 X의 정체와 함께 왜 키도가 이 사건에 그토록 열심이었는지가 드러난다.
X는 살인자의 아들이다. 키도는 재일 3세다. 즉, 둘은 모두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으나 필연적으로 혐오와 차별을 감당해야만 하는 삶을 살았다. X는 자신에게 살인자의 피가 흐른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괴로워햇고, 키도는 심지어 장인어른조차 ‘자네는 다른 재일과는 달라’라고 말할 정도로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했다. 두 사람 서사의 교차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면서, X가 다이스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건 자신의 의지로는 걷어낼 수 없는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기 위한 오롯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난다.
X의 선택, X에 대한 키도의 매혹, 그리고 재일조선인 키도가 X의 길을 따라간다는 결말부의 암시. 〈한 남자〉는 차별·낙인의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내면을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 문법과 결합한다. 그럼으로써 장르 문법을 그저 훌륭히 활용한 것을 넘어 여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언제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될지 모르는 차별·낙인의 대상자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긴장감을 미스터리 장르 특유의 불편한 긴장감으로 변주해 펼쳐내는 것이다.
손가락질받는 소수자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되는 연민과 공감의 정서는 〈한 남자〉가 갖는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를 높여주기도 한다. 미스터리와 드라마가 결합되었다고 하면 작위적 신파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남자〉는 소수자의 삶을 서사의 핵심 동력으로 삼음으로써 그런 함정을 비켜 간다. 리에와 유토는 X의 과거를 알고도 그를 남편/아버지로 인정하고, 키도는 X의 용기에서 자신에게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즉, X에서 리에로, X에서 키도로 이어지고 확장되는 낙인찍힌 자의 서사는 미스터리의 긴장감과 드라마의 따뜻함이라는 이질적 대상을 매끄럽게 연결한다. 주제와 형식, 장르의 측면에서 한국 영화 〈화차〉를 떠올리게 하지만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놀랍도록 매혹적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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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약함은 연대한다 ‘디피컬트’
블랙 프라이데이, 환경 단체가 대형 쇼핑몰을 점거하며 외친다. “1도, 2도, 3도, 오르는 기후. 소비는 반인륜적 범죄” 싼값에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들과 소비를 막으려는 사람들은 과격하게 대치한다. 격렬한 시위 장면으로 시작하는 <디피컬트>는 기후 위기와 환경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원제 ‘A difficult year’가 암시하듯 이 영화는 삶의 힘듦과 우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환경 운동가 캑터스는 기후 우울증으로 무력감을 느낀다. 브루노와 알베르는 대출을 반복하다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 거주지도 불분명한 신세가 됐다. 브루노는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까지 했고, 알베르는 공항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며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 물건을 되팔아 근근이 돈을 마련한다. 환경 운동가와 리셀러,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세 사람이 환경 운동으로 엮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것은 환경 운동과 가난이 맞닿는 지점들이다. 알베르와 브루노는 공짜 맥주와 음식에 혹해서 환경 단체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기후 위기에 코웃음 치지만, 자선 바자회가 물건을 빼돌려 되팔 수 있는 기회라는 걸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환경 운동에 가담한다. 환경 운동에서 떨어지는 콩고물과 캑터스에 대한 알베르의 호감, 시위 현장이 주는 묘한 흥분 등은 이들로 하여금 환경 운동에 가담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이유가 된다.
빈곤과 환경 운동은 또한 같은 해법을 제시한다. 캑터스는 최소한의 소비를 실천한다. 하나의 물건을 들일 때는 하나의 물건을 버리는 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유지한다. 알베르와 브루노에게 도움을 주는 경제 전문가는 물건을 사기 전에 세 번 생각해 보라고 강조한다. ‘꼭 필요한가? 정말 필요한가? 지금 당장 필요한가?’ 최소한의 소비는 환경 문제와 재정적 문제에 봉착한 개인들의 실천이자 투쟁이다.
이는 기후 위기와 빈곤이 끊임없이 달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브루노가 자본의 중심지인 프랑스 은행을 점거하자고 설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행이 화석 연료 기업에 투자함으로써 기후 재난을 가속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사실 그는 채무 변제 서류에 접근하려는 속내를 갖고 있다.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환경 운동과 연결되는 의외의 상황들은 삶의 취약함이 여러 지점에서 우연히 연결됨을 보여준다. 우리의 우울이 결코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발견할 때 취약함은 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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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빛 말고 핏빛어린 디톡스 시청각자료!
이토록 끝까지 갈지 몰랐다. 생각 이상이다. 상영 중 옆에 앉은 중년 부부의 볼멘 소리가 나올정도록 불편한 이미지와 영상은 관객들의 눈과 귀를 괴롭힌다. 나이를 불문하고 노출된 주인공(들)의 몸을 보는 건 점점 힘들어져가고,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자리에서 일어날 힘조차 빼앗는다. 마지막까지 이 기조를 유지하는 감독의 뚝심은 핏빛 잔치를 벌이며 끝내 관객을 넉다운 시킨다. 어쩌면 <서브스턴스>는 왜곡된 미(美) 추구와 젊음을 쫓는 데 혈안이 된 사회적 풍토, 이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횡포, 이 늪에 빠진 이들에게 전하는 공포의 디톡스 시청각자료와 같다.
별도 지기 마련이다. 오스카 상을 수상하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할 정도 큰 인기를 얻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최고의 스타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근근히 먹고 산다. 하지만 제작자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그녀의 50세 생일을 축하(?)하듯 보란 듯이 해고를 전한다. 더 젊고 예쁜 진행자로 교체하려는 그의 속셈에 엘리자베스는 희생양이 되고, 업친데 덮친격으로 교통사고도 당한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우연히 병원 남성 간호사로부터 의문의 USB를 받는다. 안에 담긴 건 한 번의 주사로 젊어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신약 ‘서브스턴스’ 소개 내용. 거울에 비친 생기 없는 얼굴과 중력에 굴복하는 몸뚱이를 본 그녀는 고민 끝에 서브스턴스를 구매한다. 그리고 약물 주입후 자신의 몸에서 매력적인 20대 수(마가렛 퀄리)가 탄생한다. 예상대로 그녀는 하비의 관신을 받고, 엘리자베스가 진행하던 TV 쇼를 맡는다. 하지만 문제는 7일을 기준으로 둘 중 한 명은 잠들어야 한다. 이 균형을 잘 지킨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엘리자베스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수는 이 규칙을 어기고 만다.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를 표방한 사회 풍자극이다. 그 중심에는 빛나는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자리잡는다. 엘리자베스의 직업은 배우다. 스스로 빛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대중들이 있어야 빛나는 이 직업의 운명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그를 옥죈다. 자신보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써야 하고,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다 보니 결국 남는 건 노화된 몸과 쪼그라든 자신감이다. 이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는 과거 빛났던 순간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 뿐이다. 젊음을 그리워하고 되찾고 싶은 그녀를 이해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혐오에 빠지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이는 ‘늙음이 곧 사회적 도태’라는 불안에 잠식된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조금이라도 더 젊어져 사회의 가장자리에 남고 싶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대인들처럼, 그녀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서브스턴스의 유혹에 빠진다.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는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이를 뒷받침 하듯 극 중 ‘서브스턴스’를 소개하는 영상에도 두 개의 노란자로 구성된 계란이 나온다. 엘리자베스와 수를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는 완벽한 균형을 맞췄을 때 공존이 이뤄진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 균형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둘은 규칙을 어기고 서로를 증오한다. 주사를 맞은 후 엘리자베스는 수를 탄생시키고, 젊음과 기회의 빛을 얻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빛에 드리워진 그늘에서 7일을 보낸다. 이들의 간극은 점차 벌어지고, 서로를 증오하고, 결국 망가뜨린다. 결국 ‘당신은 하나’라는 명제를 잊은 채 자신의 삶을 더 영위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모든 일을 그르친다. 영원한 젊음을 원하며 이를 상징한 와인을 탐닉한 클레오파트라, 젊은 하녀의 피로 젊음을 유지했던 피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를 따라하듯 엘리자베스 또한 욕망이란 늪에서 허우적 된다.
<서브스턴스>는 자신의 욕망에 자신이 결러든 여성의 참혹한 최후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받을 정도로 이야기의 힘을 가진 영화는 프랑스 여성 감독인 코랄리 파르쟈가 연출과 각본을 담당했다. 감독은 덫에 빠진 건 여성 자신이지만 더 아름답고 완벽한 나를 원한건 대중, 특히 젊음을 갈구하는 남성들의 시선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횡포도 꼬집는다.
하비를 비롯해 미디어 수뇌부와 자본가들이 모두 남성인 건 우연히 아니다. 이들의 시선에 응당 응해야 자신이 빛난다는 걸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이 미친 선택을 하며 또 한 번 그들이 마련한 무대에 오른다. 후반부로 갈수록 껍데기는 바뀌었어도 자신의 몸둥아리에서 나온 분신(들)이기에 그 욕망은 변함없다. 하지만 모습이 바뀐 후, 대중들은 사랑이 아닌 혐오의 시선을 보내고, 이를 확인한 그녀는 별빛처럼 빛나는 순간은 핏빛으로 바꿔버린다. 용솟음치는 핏빛은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데,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엘리자베스를 이같은 괴물로 만들 게 한 건 그녀의 욕망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너희(대중)들의 시선도 한 몫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장면에서 핏물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를 유심히 보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충격적이고 불쾌하다. 바디 호러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이 아니라면 상영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계속 자신을 괴롭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다리를 묶고 엉덩이를 들썩이지 못하게 하는 건 데미 무어에 기인한다.
이는 단순히 혼신을 다한 그녀의 광기 연기 때문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곧 데미 무어처럼 보인다. <사랑과 영혼> 등 1990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여배우였지만, 세월을 막을 수 없었던 그녀는 전신 성형을 시도한 바 있다. 거액을 들여 젊음을 유지하려 했던 과거는 물론, 연기와 작품 이야기 보단 온갖 가십 기사로 만났던 그녀의 삶은 엘리자베스와 닮아 있다. <서브스턴스>가 미키 루크의 삶을 투영한 <더 레슬러>의 여성판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데미 무어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듯한 그녀의 연기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고, 말할 기회 조차 없었던 울분을 마구 마구 토해내듯 분기점이 될만한 연기력을 뿜어낸다. 골근글로브에 이어 이번 오스카의 유력 여우주연상 후보로 점쳐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개미친 영화’. <서브스턴스> 런칭 포스터에 담긴 이 강렬한 문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단순히 가학적이고, 파괴적이며, 과감한 노출 등 수위가 높은 충격적 영화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사회상을 정면으로 들이 받는 행동에 있다. 그리고 끝까지 간다. 우리의 마음 속 갖가지 욕망 덩어리를 터뜨리고, 잘못된 시선을 마취 없이 교정하는 그 고통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이 통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카메라가 아닌 자신에게 키스 퍼포먼스를 날리면 된다. 애써 완성한 화장을 마구 마구 지우지 말고.사진제공: 찬란
평점: 4.0 / 5.0
한줄평: 데미 무어의 개미친 연기에 설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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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한 물방울로 그린 세월의 흔적들
이 모든 게 끝이 있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다. 끝이 있다는 말. 그게 언제인지 모르겠는 막연함은 참 답답하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데 명확한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끝이 있다는 것.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삶이란 게 지겹긴 해도 좋은 건가 봐'라고 썼던 글 한 편이 생각난다. 좋은 것 맞나? 그렇게 마지막 날이 오면 세상을 이해할 날이 올까? 일단 내가 '작가님' 소리 듣고 싶어 벌였던 오만 짓이 생각났다. 그리고 사회복무요원 생활 동안 왜 키보드를 놓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런 것들은 이해하고 말고 가 없다. 그냥 내가 그런 삶을 사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 벌이는 일이다.
문득 이런 나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띠리리링. "이 작가의 이상향은 이동진 평론가지만 현실은 그냥 한국의 씨네필 중 하나일 뿐입니다" 라는 문장을 내 마음 안에서 짓는다. 아니거든! 나 그래도 원고료도 받아보고 방송도 나와보고 조회수도 잘 나오거든! 시나리오 봐달라는 메일 온 적도 있거든! 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나는 이미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어차피 남의 시선(들)중 하나 아닌가? 뭔가를 써서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결국 중요했던 건 '나 자신이 왜 이런 것들을 하지 않고서는 못 베기나'에 대한 문제였다. 그렇게 나도 모를 동기부여에 탐구하는 것이 예술하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여기 두 예술가가 영화로, 각자의 마음 안에 들어온 구멍 하나를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와 지난한 세월이라는 구멍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다.
전설적인 아티스트
1929년. 김창열 화백은 그 해에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치하. 어린 시절 서예를 비롯한 미술을 배우며 보냈던 유년기. 화백이 어린 시절부터 미술을 전공했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만 보고 자랐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벗어났던 일제의 수탈을 뒤로하고, 한국전쟁까지 겪었다. 곯고 곯은 김 화백. 그렇게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겪으며 방황하던 화백은 서울과 제주, 뉴욕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다. 동료 예술가 백남준과 시간을 보내다 캔버스 뒤편에 맺힌 물방울을 보게 된다.
그렇게 50여 년의 화가 인생을 물방울에 투영하는 김창열 화백. 1970년대부터 그리기 시작했던 작품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데 도화선이 됐다. 백남준과 함께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끄는 트렌드세터가 된 김창열 화백. 예술가로서 입지전적인 명성을 얻은 그지만 그의 내면은 복잡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왜 물방울을 고집했는지, 노자를 신봉하면서도 예술가적인 명성을 마다하지 않았는지, 좋고 밝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아버지가 아닌 달마대사의 에피소드를 전하는 인물이었는지 등등. 아들 김오안 감독은 아버지가 견뎌내야만 했던 삶의 지난함 들을 탐구해보고자 했다.
재미있는 영화
난 다큐멘터리를 별로 안 좋아했다. 어렸을 때 투니버스 볼 시간도 없는데 다큐멘터리 볼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런데 엄마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종종 보곤 했었다. "엄마~ 돌리면 안 돼요?" 징징댔던 나. 그리고 거의 20여 년이 지난다. 20대 중반이 된 나. 역시 나이가 들면 취향은 바뀌는 것일까? 이제는 다큐멘터리에 무덤덤해졌다. 잔잔한 것들도 곧잘 봐서 그런가 싶었다. 나에게 여전히 다큐멘터리는 그냥 잔잔한 영화 장르에 가깝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잔잔하지 않다. 잔잔하지 않다고 느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시각효과 구성이 좋았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돌이켜보는 아들의 시각이다. 당연히 부친 김창열 화백이 화가니까 그의 작품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 장르마다 변환에 효과를 부여한 시각적 쾌감이 대단하다. 어떤 시퀀스에 그림이 연속적으로 제시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굉장하다. 영화에서 제시된 그의 삶을 스르륵 돌아보면서, 굉장히 많은 물방울의 수가 지나간다. 그럼 아련해진다. 아버지가 지나왔던 삶에 아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느껴진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 물방울 그림을 다시 구조화시키는 방식은 굉장히 탁월한 리메이크 노래를 듣는 느낌이다. 한 장르의 비디오 아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이와 살짝 다른 지점이지만 '왜 아버지(김창열 화백)는 물방울을 그리는 데에 집중했을까?'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분명히 김 화백의 아버지가 갖고 있는 과거를 중심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거랑 관련이 있으니까. 감독은 어떤 장면과 나레이션으로 이를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에세이를 읽으면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이 시퀀스는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까지 다 계산한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었다. 이 이유를 듣고 나면 김 화백의 그림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전적으로 아버지를 소재로 했지만 왜 김오안 감독의 작품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시퀀스였다. 이는 김창열 화백의 자의식 탐구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오는 영상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장르에서 가져올 수 있는 특징을 잘 뽑아낸 셈이다.
두 번째. 장면마다 촬영을 잘했다. 김창열 화백 얼굴 나타나는 클로즈업. 눈 오는 설산. 화백이 자 그리고 선 찍 긋는 장면. 이런 장면 하나하나 구도도 잘 잡았고 색감도 예뻤다. 이 영화가 눈이 심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영상미의 아름다움도 한몫했다. 이 영상미는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진다. 심오하게 들릴 수 있는 한 인물의 내면을 직관적으로 딱딱 이해가게 배치한 좋은 연출 방식이다. 영화를 보면서 신기했던 것이, 과거의 뉴스 자료를 갖고 온 방식이었다. 아니 2022년에 보는 데도 어제 찍은 것 같은 동영상들이었다. 이런 거 어떻게 가져왔대? 또 앞 두 가지와는 좀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스릴러, 코미디 장르가 연상되는 장면도 영화 곳곳에 있으니 감독님이 영화를 많이 보신 것 같은 느낌이다.
깊은 자의식을 들여보다
뭔가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어두우면 작품이 쉽게 나온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활용한 것이 아마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일 것이다. 이 감독의 영화를 보며 느낀 건 '생각 많아서 짜증 나겠다'였다. 이렇게 복잡한 사람이 예술가가 되어 자기의 혼을 드러내는 거겠지. 비단 라스 폰 트리에뿐만 아니라 박찬욱, 봉준호 감독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속할 수도 있다. 첫사랑이라 서투를 수밖에 없었던 것(<박쥐>), 모성애의 방향에 대한 탐구(<마더>) 둘 다 어두운 감정을 바탕으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다. 이것 역시 어두운 내면을 소재로 삼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
예술가에게 있어 소재란 무궁무진하다. 온갖 것을 가지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으면 예술가다. 영화는 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직업적 특징을 다뤘다. 아버지가 겪어온 어둠은 무엇인지, 그럼에도 아버지가 추구했던 즐거움이 무엇이었는지, 그 삶이 남기고 간 건 무엇인지 등등을 탐구하며 아버지가 예술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추론하며 제시한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앞에서도 썼듯 이것은 아들 김오안 감독의 영화다. 이 영화에는 김오안이라는 예술가가 생각하는 영화란 무엇인가? 도 담겨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인 메타 영화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굉장히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영화가 전해주는 시각적 재미 중 하나가 여기에서도 온다고 생각한다. '엥? 이게 영화가 되네? 그리고 꽤 잘 만들었네?' 싶은 것이다. 이런 예술가적 창의성은 관객에게 영향을 주기 충분하다. 비단 내가 지금 쓰는 글도 한 종류의 예술이다. 이런 걸 좋아하고 한 30대가 되고 나서도 하고 싶은 나의 입장으로서도 이 영화가 제시하는 방법론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나는 그래서 다른 분들도 많이 보셨으면 좋겠다. 상영관에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다음 주 금요일 14일에 VOD로 출시된다고 하는 것 같다. 뭔가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은 이 영화의 방법론이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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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내라고 하면 힘낼 수 있나요
진짜 포기하고 싶다. 아니 포기해야겠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을 꿨기 때문에 좌절감도 맛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노력을 무지막지하게 들여도 안 되는 것이 있으니 삶이란 역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메이플스토리의 데미안과 스우를 잡는 것도 숙련도가 올라가면 쉬워지는데 삶은 그런 게 없어 잔인하다. 난 근본적으로 사랑받기엔 못돼 쳐 먹은 인간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만하고 싶다. 죽고 싶은 건 아닌데 당분간 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든다. 모든 것이 싫다. 무엇이든 할 맘이 안 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포기하면 뭐 어쩔 건데? 엄마, 아빠한테 내 정신적인 고통을 줄줄 늘어놓으면 어떤 지점이 달라지나? 사실 선생님에게 최근의 내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기에 이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똑같은 하루의 반복일 것이다. 몸이 고장 난 것도 바뀌지 않을 거고. 뭔갈 사고 싶은 강박은 아마 죽을 때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 맞다. 나는 지친 것 같다. 유럽에 갔다 와도 지친 게 해소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나의 정신적 탈진은 아마 영원할 것'이라고 설레발을 쳤던 때가 생각난다. 다시 생각해보면 1년 동안 지치는 타이밍이 한 번도 안 오는 게 더 이상하다. 어물쩡 넘긴 나 자신이 싫다. 쉬어야 할 때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 지금 닳고 닳았다. 요즘 나는 삶의 동기부여가 단 1%도 남지 않았다. 난 남들에게 위로해주는 법은 알았지 나 자신에게 격려를 하는 법이라곤 단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도 사랑도 다 무섭다. <굿 윌 헌팅>과 <그린 북>이 어쩐지 환상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요즘이다. 가끔은 내가 쓴 글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때도 많은데 요즘은 반대의 기분을 느끼고 있다. 정말 내가 쓴 글이 맞는 말이란 말인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가 돈이라기엔 난 경험해야 할 것들이 많지 않나. 상상과 희망도 재미가 없는 오늘 난 천천히 가는 버스에 기대 잡생각을 하고 있다.
<체리 향기>는 소소한 일상에 관한 영화다. 나의 인생영화 중 한 편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트럭을 운전하는 주인공. 어쩐지 표정에서 사연이 많아 보인다. 이 사람은 갑자기 지나가는 남자 한 명을 태운다. 군인을 태운 주인공 바디. 바디는 군인에게 본인의 사연을 늘어놓는다. 그는 죽고 싶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어디 땅굴에 묻힐 테니 그 조력자가 돼 달라는 부탁을 한다. 군인은 당연히 거절한다. 다음 손님으로 신학도를 태운 바디. 같은 부탁을 하지만 역시 거절한다. 죽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바디는 세 번째 손님을 찾아 나선다.
세 번째 손님은 나비를 박제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들의 치료비가 급해 바디의 제의를 받아들인 이 노인은 주인공과 차를 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제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나 역시 죽고 싶던 때가 있었어요. 내가 인생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코 끝에 스친 체리 향에서 왔죠. 소소한 삶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노인. 바디는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아예 말을 안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바디에게 변화가 있긴 했다. 노인을 다시 찾아간 바디. 내일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니 적극적으로 깨워달라는 요청이었다. 영화는 웃으며 바디의 근심 걱정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노인의 진정성이 통했다고 해서 바디의 우울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바디는 다시 무덤 아래에 누웠다. 생각이 바뀐 게 없는듯한 바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의 요청에서 우리는 뭔가를 기억할 수 있다. 유의미한 차이는 있지만 이 무언가가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정의해주지 않은 채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영화에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바디는 죽을 곳에 다시 누웠다. 그의 생각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다. 난 인생을 얻는 동기부여의 힘이 갑자기 어느 날 번쩍하고 생기는 게 아니라고 본다. 한참을 어두운 터널 속에서 살 때 느낀 게 있다. '힘 내'는 너무 포괄적인 단어라는 것이다. 힘을 내? 힘을 낸다는 게 무슨 뜻이지? 힘 내면 내가 이 뭐 같은 일상을 이겨낼 수 있나? 당연히 이 반응이 '와닿지 않았다'란 말을 자격지심에 빠져 거칠게 하면 나오는 것이란 걸 모르지는 않는다. 말하는 이에게 상처 줄 생각 단 1도 없지만 큰 골자가 되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앞서 쓴 바와 같이 그 말을 하는 이는 내가 다시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것일 테지. 난 살짝 다르다. (그렇다고 힘 내!라는 말을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잘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겪는 비극은 나를 다시 공격할 것이고, 난 같은 방식으로 또 표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디는 모든 걸 웃어넘겨 행복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 조금의 변화만 있었다.
그렇기에 영화는 사려 깊다. 바디의 인생이 무조건 다 잘 풀릴 거라고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부정적인 순간을 마주할 때를 생각해보자. 어느 순간을 극복했다고 해서 비슷한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행복이 갑자기 뚝 떨어지나? 아닐 것이다. 삶은 같은 순간의 반복이다. 그래서 어느 것을 극복했다는 생각이야 말로 인간의 교만일 수도 있다. 큰 힘을 줘가며 삶의 순간을 지나가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이 이유로 인생에 환기란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 같다. 환기가 안되기 때문에 상처는 누적될 수밖에 없다. 또 힘 내!라는 말에 힘을 내기엔 우리 인생은 너무 곪았다. 모두가 심하게 깊게 파여서 단순히 끌어올리는 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목표에 실패하기.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나기. 영원한 이별. 이런 삶을 가로지르는 실패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이라고 하는 건 우리 머릿속에서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상처와 우울함은 천둥번개 치듯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삶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과거를 지워버린다? 지울 수 있으면 인간이 아니지.
감독은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좀 특별한 시각을 보여준다. 간단하다.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는 극적인 성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생의 목적에서 진 인물이 다시 이겨내는 걸 제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명한 연출 의도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 사람은 같은 곳에서 똑같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여러분은 예외인가? 아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같은 곳에서 머무르는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무언가를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해왔지만 나는 지금의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죽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엄마 아빠가 나한테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외로움인지. 권태인지. 뭔가를 이겨내기 위해 그렇게 노력해왔지만 그게 정말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 언제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게 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내가 나를 속였던 거짓말이었다. 나는 내 20대를 관통하는 동기부여보다 더 얻고 싶은 것을 마음속에 둔 인간이었고 그 관점에서는 사실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이런 나를 보여주는 증거다.
근데 또 삶을 포기하라 한다면 아쉬울 것 같다. 아니 사실 지금 당장은 모든 걸 던져버리고 쉬은 게 맞긴 하다. 당장 이 세상을 뜨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수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아직도 정산 못 받은 돈. 가지 못한 여행지. 공익근무지에 들어오는 바나나우유. 우리나라 아티스트가 나이키와 협업해서 나오는 새로운 스니커즈.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왠지 모르게 사실이 아닐 거라는 기대감까지. 나는 아직도 바라는 것이 많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나 무너져있다고 해서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이 시간은 흘러가 있을 것이고, 나는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한 삶의 터널을 훌쩍 지나있을 것이다. 이 모든 걸 포기하기엔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상태로 살아왔다.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건 좀 많이 어렵다. 사랑받기 위해 이제까지 달려온 모든 시간들에 실패해 지금은 괴롭지만 내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소소한 재미들 덕이었다. 이를 위해 계속 같은 것만 하겠지. 지겹게. 그러나 삶은 원래 지겨운 것이 맞다. 근데 또 지겨워서 좋은 것이다. 실패한 인생을 살더라도 나를 일으켜주는 사소한 무언가가 있다면 하루를 버리기엔 너무 아쉽다. 그래. 사랑받는 인생 다 좋은데. 이것 역시 나에게 중요한 거 맞는데. 돈 많이 벌어서 나 좋은 거 엄마 아빠 멋있는 거 사는 거 다 좋은데. 사실 나는 어느 날 맡은 체리 향기와 같은 소소한 인생의 재미를 좇는 사람이었다. 그런 재미 하나 만드려고 일을 벌이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이다. 난 감독이 삶의 이 지점에 대해 논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를 찾지 못한 당신에게 묻는 것이다. 과연 당신의 삶의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아닐걸. 의외로 우리의 삶을 가로지르는 것은 사소한 무언가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를 바뀌게 하고, 서서히 좋아지게 만들며, 또 살아 숨 쉬게 도와준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 매일마다 감상이 다른 내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한다. 다들 지겨울 것이다. 매일이 현타의 연속이고 우울감은 하루마다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니까 오래 살자. 힘은 되도록이면 내지 말자. 빨리 가지 말고 천천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위해 살자. 그러려면 천천히 걸어야 할 것이고, 남들보다 늦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건 어차피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한번 사는 인생 과연 그 목표가 삶의 전부가 되더라도 우리는 그것보다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을테니 말이다. 고통받으며 살더라도 오래오래 살자. 언젠가 만날 체리 향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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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오갤4는 안 나오나? / DC의 수장이 된 "제임스 건"의 마지막 작품 / 로켓아 많이 아팠겠구나 / 로켓은 정말 라쿤이 아니었나? / 앤트맨으로 집나간 마블팬들아 이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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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남자 영직남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전에 1개, 후에 1개 총 2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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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스케이프 큐브> 예고편
눈을 뜨니 비좁은 통로 안에 갇혀버린 리사.
살기 위해선 함정을 피해 빠르게 탈출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나가지 못한다면 그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딸의 환영까지 뿌리치며 그녀가 무조건 해야 할 것은 탈출!
과연 그녀는 무사히 통로를 탈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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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러브 어페어 :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1차 예고편
소설가를 꿈꾸는 막심은 시골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사촌 형의 여자친구 다프네에게 자신의 복잡한 연애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편 막심의 이야기를 듣던 다프네 역시 남몰래 간직했던 자신의 연애담을 슬그머니 꺼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