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9-11 07:34:22
'화차'를 떠올리게 하지만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한 남자〉 리뷰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리에와 그의 아들 유토. 리에는 둘째가 병으로 죽었고, 그 이후 남편과 이혼했으며, 최근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상실의 슬픔을 통과하는 중이다. 별일 없다는 듯 의연한 표정으로 가게를 정리하지만 느닷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이내 일그러지고야 마는 그녀의 얼굴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는, 그녀가 마주한 압도적 슬픔의 크기를 관객에게 단번에 확인시켜준다.
그런 그녀에게 수줍은(혹은 음침한) 얼굴의 한 남자가 다가온다. 이름은 다이스케라 하고,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다이스케는 자주 리에의 문구점에 찾아와 그녀와 안면을 트고, 리에의 요구에 못 이기는 척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따뜻함이 묻어나는 그림이다. 곧 리에와 다이스케는 결혼한다. 다이스케는 과거가 알려지지 않은 외지인이기에 종종 마을 사람들의 근거 없는 험담에 시달린다. 하지만 리에는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 유토를 자기 자식처럼 돌봐주고, 리에와 함께 예쁜 딸을 낳아 키우는 중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해주고 가정에 충실한 다이스케가 주는 일상의 안정감과 안전감이 리에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벌목 일을 하던 다이스케가 작업 중 사고로 사망한 것. 그러나 어렵게 찾아온 행복이 또다시 자신을 배신한 것과 사랑하는 사람이 허망하게 떠나버린 것을 슬퍼할 새도 없이, 리에에게 또 다른 혼란이 찾아온다. 다이스케의 제삿날에 찾아온 그의 친형이 영정을 보고는 그가 다이스케가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리에는 몇 년간 가족을 이루고 산, 사랑해서 아이까지 낳은 남자의 이름을 하루아침에 빼앗긴다. 이제 다이스케는 미지의 존재를 지칭하는 ‘X’가 된다.
리에는 전에 이혼 소송을 도왔던 변호사 키도를 찾는다. 능력 있는 변호사인 키도는 이 사건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강한 끌림을 느껴 X의 발자취를 좇는다. 키도의 아내가 사건에만 열중하느라 그가 가족에 소홀해지고 어딘가 변한 것 같다며 불만을 표할 정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키도가 만난 사려 깊거나, 소름 끼치거나, 리에처럼 수수께끼를 마주한 사람들을 거쳐 마침내 X의 정체와 함께 왜 키도가 이 사건에 그토록 열심이었는지가 드러난다.
X는 살인자의 아들이다. 키도는 재일 3세다. 즉, 둘은 모두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으나 필연적으로 혐오와 차별을 감당해야만 하는 삶을 살았다. X는 자신에게 살인자의 피가 흐른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괴로워햇고, 키도는 심지어 장인어른조차 ‘자네는 다른 재일과는 달라’라고 말할 정도로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했다. 두 사람 서사의 교차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면서, X가 다이스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건 자신의 의지로는 걷어낼 수 없는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기 위한 오롯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난다.
X의 선택, X에 대한 키도의 매혹, 그리고 재일조선인 키도가 X의 길을 따라간다는 결말부의 암시. 〈한 남자〉는 차별·낙인의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내면을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 문법과 결합한다. 그럼으로써 장르 문법을 그저 훌륭히 활용한 것을 넘어 여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언제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될지 모르는 차별·낙인의 대상자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긴장감을 미스터리 장르 특유의 불편한 긴장감으로 변주해 펼쳐내는 것이다.
손가락질받는 소수자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되는 연민과 공감의 정서는 〈한 남자〉가 갖는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를 높여주기도 한다. 미스터리와 드라마가 결합되었다고 하면 작위적 신파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남자〉는 소수자의 삶을 서사의 핵심 동력으로 삼음으로써 그런 함정을 비켜 간다. 리에와 유토는 X의 과거를 알고도 그를 남편/아버지로 인정하고, 키도는 X의 용기에서 자신에게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즉, X에서 리에로, X에서 키도로 이어지고 확장되는 낙인찍힌 자의 서사는 미스터리의 긴장감과 드라마의 따뜻함이라는 이질적 대상을 매끄럽게 연결한다. 주제와 형식, 장르의 측면에서 한국 영화 〈화차〉를 떠올리게 하지만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놀랍도록 매혹적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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