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29 21:41:00
보호자이지 못하는 어른들
<보호자> 영화리뷰
이 영화는 터키 영화 이며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추운 겨울 남자 기숙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남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메모라는 학생이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는 체벌을 당한 그 다음날 일어나지 못한다..
메모의 친구 유수프가 그의 곁을 지키면서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선생님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선생님들과 어른들은 서로의 탓이라고 우기기만 하고 결국 마지막에 유수프가 메모를 데리고 몰래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러 가다가 메모가 파이프를 머리에 맞았다는것을 알고는 안심하는 듯이 끝난다.
터키 기숙학교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무책임한 어른들의 모습을 마치 다큐 처럼 영화가 흘러간다. 이 영화의 배경이 고립된 시골에다가 겨울이어서 교도소와 비슷한 이미지 였다. 영화 초반부터 계속 창문이 깨지고 문이 덜렁 거리는 등 불안한 전개를 계속 암시한다. 또한 메모를 보건실에 거의 방치 해두고 선생님들이 보건실로 들어 올 때 어른들만 보건실의 문 앞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정작 아이들은 미끄러지지 않고 제대로 걸어온다. 선생님들이 들어올 때 메모의 열을 재고 열은 안난다며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다. 이런 장면들이 부당한 관습과 폭력성이 반복 될 것을 의미한다. 유수프가 마지막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가 아프다고 말 하지만 엄마 마저도 친구는 무시하라고 하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게 유수프에게 진정한 보호자는 존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유수프만 머리만 밀려있고 똑같은 샤워실, 초반이랑 똑같이 샤워를 하며 끝이 난다.
선생님들은 메모의 병에 대한 책임을 유수프에게 떠넘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책임에 대한 벌도 유수프만 받은 것이다. 유일하게 이 학교 상황을 메모의 사건으로 고발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지만 유수프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이 악습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영화가 끝나도 영화 속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맞고 아파도 제대로된 보호 조차 받지 못한 채 살 것 같다. <보호자>라는 제목도 좋았었다. 메모의 진정한 보호자는 유수프 뿐이었다. 이 학교의 보호자인 어른들은 보호자의 의무와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 마지막 머리가 깎여 있는채로 샤워를 하고 있는 결말이 엄청 강렬했었다. 결국 잘못에 대한 죄를 받은 사람은 어린 유수프 단 한명 뿐이었다. 과연 메모가 아프게되어 병원에 실려가기 전까지 잘못한 사람은 어린 유수프 한명 뿐이었을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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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주변에서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본다. 대중매체의 발달로 개인이 겪은 끔찍한 일들도 아주 세세하게 전달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도 대중적으로 급속히 퍼지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다시 그것을 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아마도 현대 사회의 매체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이고 인간이 가진 호기심이 더더욱 그것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그만큼 사건사고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이고 완전히 외면하기 어려운 문제들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고나 참사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그 끔찍한 일에 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 진실을 찾아낼 때 영상이나 음성 같은 물리적인 증거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일을 직접 경험했거나 옆에서 보게 된 사람들의 증언은 중요하다. 수사기관들이나 기자들이 관련자들을 만나고 그때의 일을 들으려고 하는 노력은 진실을 찾으려는 가장 보편적인 노력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 증언을 하는 사람의 말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밀실 살인 사건 피의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영화
영화 <자백>은 어떤 사건과 관련 있는 한 남자와 그가 고용하려는 변호사가 주고받는 대화로 구성된 이야기다. 한 호텔 방 안에서 세희(나나)가 살해당한 채로 발견된다. 방에 같이 있던 민호(소지섭)는 범행을 부인하지만 그 방 안에는 두 사람만 있었고 다른 문은 없었다. 그 상황에서 민호는 실력 좋은 변호사인 신애(김윤진)를 고용해 자신의 상황을 돌파하려고 한다. 영화는 민호와 신애가 한 별장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바탕으로 사건 이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차근차근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신의 알리바이나 증언을 말하고 있는 민호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다. 민호는 사건의 처음부터 세희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초반에는 민호가 하는 증언은 한줄기뿐이다. 그래서 민호의 말은 아주 강한 신뢰를 가진다. 그러다 중반부부터 증언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민호의 이야기는 점점 신뢰를 잃어간다. 그러니까 영화는 대부분을 민호가 이야기하는 증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말의 힘이 점점 빠져가는 과정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 힘을 빼는 건 숨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변호사 신애의 힘이다. 정곡을 짚어내며 이야기의 약점을 보강하려는 신애의 노력은 고객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파악하여 변론에 활용하려는 것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힘이 된다.
진실이 바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그것은 아주 깊숙이 숨겨져 있다. 민호가 가지고 있는 진실도 마찬가지다.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무척 생동감 있고 설득력 있지만 진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야기의 허점이 보일 수밖에 없다. 관객들은 일단 민호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며 볼 수밖에 없다. 관객들에게는 일차원적인 정보가 먼저 주어지고 영화 상영시간에 순차적으로 제공되는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겹쳐지는 영화의 이야기
최근 한국에 큰 참사가 있었다. 모든 국민들이 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매체에서 보게 되었다. 그 참사가 왜 일어났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양한 증언과 재구성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 영화 <자백> 속에서 증언하는 사람은 한 명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많은 순간 혼란스럽다. 참사 일어난 직후 그런 증언이나 정보들이 적었다. 그 순간에는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다행히도 현실에서는 다양한 목격자와 증언들이 공존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일의 이면에 있는 일들을 좀 더 정확하게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현실에서는 그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진실이 드러나고 명확하게 책임져야 할 사람이 나온다. 영화 <자백>의 이야기도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영화의 초반에는 진실이 모호하고 어떤 사람이 그 사건에 죄가 있는지 알 수없다. 하지만 서서히 그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그 진실의 대가를 누군가가 치른다. 여전히 모호한 현재의 상황과 무척 상반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는 스페인 영화는 <인비저블 게스트>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과 동일하게 진행되는 초반과 중반은 크게 다른 점을 느낄 수 없다. 적절히 어울리는 한국 배우들을 각 캐릭터에 캐스팅했고, 그들의 연기가 주는 생동감도 영화에 힘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조금 더 박진감이 넘치게 재구성되었다. 이야기의 반전을 일찍 공개하고 그 이후에 다른 작은 반전을 추가하면서 관객의 시선을 꽉 끌어당긴다. 원작에서 다소 약했던 권선징악의 강도를 좀 더 센 방식으로 재구성하면서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좀 더 극대화시켰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스페인 원작의 담백하지만 임팩트 있는 결말을 좋아했던 관객들에게는 한국식 스릴러의 긴박하고 박진감 있는 결말이 너무 나갔다거나 다소 번잡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한국식 클라이막스로 변형된 리메이크 영화
대체적으로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역할에 잘 맞는데, 특히 세희 역을 맡은 나나의 연기가 무척 좋다. 민호의 이야기에 따라 인물의 성향이 상반된 형태로 화면에 등장하게 되는데 그 분위기에 따라 딱 맞는 연기 변화로 극에 설득력을 높여준다. 가해자 또는 피해자의 연기 모두를 소화하는데 전혀 이질감이 없이 훌륭하게 연기하고 있다. 최근에 시리즈 [글리치]에서도 자연스럽고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 나나는 향후에 다양한 작품에서 활동할 것으로 기대된다.
개봉한 지 한 주가 지난 영화 <자백>은 한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통쾌함이 있다. 10.29 참사 이후 벌어지는 일들 때문인지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만 이 영화에서의 민호가 하는 행동이 현실에서 다른 증언을 하고 사과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서는 가해자가 그가 한 짓의 대가를 치루지만, 현실에서는 아직 누구도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아직 진행 중인 현실의 이야기도 영화의 결말처럼 진정한 사과와 대가가 내려지길 기원한다. 그것이 그 일에 희생당한 사람들과 유가족들, 그리고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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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이 번식하는 사악한 방법
논어에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에서 '예가 아닌 것 = 사악한 것'으로 인식되어 이 말은 일본에서 귀와 눈과 입을 가린 원숭이로 표현된 것으로 유명하다. 서양에서는 이를 'See No Evil, Hear No Evil, Speak No Evil'이라고 표현한다. 제목은 그 마지막을 따온 것이다. 원작은 동명의 덴마크 영화지만, 결말이 다르다. 하지만 이번에 개봉한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스픽 노 이블>이 더 제목에 걸맞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
미국인 가족인 벤과 루이스, 딸 아그네스는 이탈리아 휴양지에서 한 영국인 가족 패디, 키아라, 아들 앤트를 만난다. 나중에 벤과 루이스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를 하게 되고, 거기서 패디와 키아라 가족의 초대를 받고 그 집으로 주말여행을 가게 된다. 거기에서 패디 가족의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줄거리만 보자면 뻔한 스토리의 스릴러물 같고, 캐릭터도 엄청 독특하거나 다층적이진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스릴러와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광기의 살인마와 그 공포를 기대한다면 초반이 아주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덩치 크고 조금 무례하게 느껴지는 이 묘한 인물인 패디(제임스 맥어보이)는 등장부터 불편하다.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게 조용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벤과 루이스에게, 패디와 키아라 가족은 아무렇지 않게 시끄러움과 무례함으로 조금씩 선을 넘나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버릴 수 없는 것이, 중간중간 들어가는 친절함과 솔직한 모습들이 보여주는 매력이다. 이 영화는 낯선 환경,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을 교묘하게 잡아낸다. 불편하지만 감당해야 하고, 싫어도 좋은 척해야 하는 우리의 삶 그 자체다. 영국에서 운전하던 벤은 자신이 살던 미국과 운전 방향을 헷갈려 교통사고를 낼 뻔한다. 서로 다른 삶에서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한지 구분해 낼 수 있을까? 좌측 운전이 선한가 우측 운전이 선한가?
패디가 이 가족들을 옭아매는 방식은 너무나 헐렁해서, 그냥 벗어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그 지점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수준의 불편함이라, 그것은 문화가 다른 외국인들을 만나서도 서로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악인 줄도 모르고 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니까. 그렇게 악은 우리 안에 교묘하게 스며든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앤트의 이상한 행동들이 조금씩 보일 때, 이 영국인 가족의 진실이 드러난다. 패디는 여행 중인 가족들을 초대해 살해하고, 그 아이를 잡아두고 키우고 다시 죽이는 연쇄살인범이었다는 것. 앤트는 이전에 여행온 덴마크 부부의 아들이었고, 앤트의 친부모는 죽었으며 앤트는 혀가 잘린 채 아들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초반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고, 범죄 스릴러에서 종종 나오는 콘셉트의 살인범 유형이라 크게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영화의 메시지는 반전이나 잔혹한 싸움과 살인의 모습 등이 아니다. 사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악의 대물림이고, 그것이 대물림되는 방식이다.
패디는 자신의 아버지를 언급하며 거의 악마처럼 묘사하고 굉장히 힘들어한다. 그리고 키아라가 자신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라며 고마워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그 아버지라는 인물도 역시 연쇄살인범이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범죄자였거나, 패디 자신도 친아들이 아닌 납치된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행했던 악한 일들을 증오하지만, 역시 자신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
루이스가 죽기 직전 커터칼로 패디를 그어 창고에서 도망칠 때, 갑자기 패디의 부인인 키아라는 자신도 데려가 달라며 자신 역시 피해자라고 말을 한다. 어릴 때 잡혀와서 지금까지 그러고 있다고. 패디가 키아라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그 말은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키아라는 앤트처럼 적극적으로 도망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패디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이것은 피해자에게 자신의 범죄를 돕게 만들어, 가해자로 만들어 묶어두는 악랄한 방식이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었던 <나는 신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사이비 종교의 여신도들에게 성폭행을 하고 그들에게 여자를 데려오게 시킴으로써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 그럼으로써 더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 교묘한 가스라이팅이 들어가, 피해자의 정신에는 자신이 원해서 악을 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는다.
언듯 스쳐가지만, 패디가 키아라에게 하는 '네가 원해 이 짓을 한 거야''이것은 네 탓이야'라는 가스라이팅은 결혼기간이라고 밝힌 17년간 이어져 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단순 피해자가 아닌 적극적인 범죄자가 되었다. 나 역시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기에 몸서리치게도 끔찍한 부분이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하면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미 범죄자와 하나의 정신을 공유한다. 그렇게 악은 대물림되고 번져나간다.
결말에서 가장 악랄한 부분은 바로 부모가 살해당하고 혀를 잘린 채 아들노릇을 해야 했던, 앤트의 모습이다. 벤과 루이스는 쓰러진 패디를 두고 빨리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앤트는 패디에게 부모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복수를 한다. 그 상황에서 악은, 패디의 입을 통해 사악한 방법으로 자신의 번식을 시도한다. "그래, 그래야 내 아들이지."
나이가 어릴수록, 사람은 주변 어른들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부모가 아이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하지만 패디는 자신이 그렇게 벗어나지 못했던 잔혹한 아버지의 악을, 앤트에게 그 말로 물려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앤트를 더욱 자극해 앤트는 잔혹하게 패디를 살해한다.
'사악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라고 한 것은, 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쉽게 스며들고 번지므로 악한 것 근처에는 아예 가까이하지도 말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그것은 분명 복수였다. 그리고 그렇게 끝을 내야,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악은 정말 대가 끊긴 것일까? 적어도 몇 개월 이상 악과 같이 살았던 앤트에게 패디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그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을 평생 되새기며 살게 되진 않을까? 또 우리는 내가 당했던 피해의 악을 다른이에게 같은 모습으로 가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영화 시작에 조용하게 계속 비추던 백미러 속의 앤트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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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니엄의 환희와 청춘의 질감에 관한 인상적인 스케치
술 냄새가 난다. 담배 냄새가 난다. 땀 냄새가 난다. 정돈되지 않은 지저분한 집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약 냄새가 난다. 제대로 닦아내지 않은 정액 냄새도 문득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다. 시끄럽다. 클럽 음악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진동이 내내 쿵쾅거린다. 싸우는 소리가 난다. 불평하는 소리가 난다. 서로를 원망하는 소리가 난다. 홀로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가 난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난다. 저주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난다. 청춘의 냄새, 청춘의 소리다. 이 지독한 냄새와 소리 속에서, 여성 청년 비키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다.
2001년의 대만, 고등학교를 중퇴한 비키는 남자친구 하오하오와 동거 중이다. 하오하오는 ‘예술적 퇴폐’를 지향하는 남성이 갖고 있는 쓰레기 같은 전형성을 고루 갖추었다. 돈을 벌지 않고 여성의 노동에 의존한다. 아버지의 롤렉스 시계를 훔쳐 경찰 조사를 받을지언정 결코 직접 노동하는 법은 없다. 하오하오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의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비키를 의심한다.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는 망상이다. 자신이 노동하면 비키가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상한’ 하오하오는 이런 가능성을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하오하오는 클럽 음악을 만들고 친구들과 술 마실 때만 생기가 돈다. 가끔 욕구가 일어 다짜고짜 비키에게 관계를 요구할 때만 다정해진다. 자기 신세의 비참함에 심취해 마약을 하고 이를 말리는 비키를 경멸한다. 그렇다. 하오하오는 자신의 자발적, 의도적 비루함을 예술가의 고난으로 오독한다. 비키의 몸과 돌봄, 노동에 극단적으로 기생하면서도 그녀에게 군림하려 든다. 치가 떨릴 만큼 익숙한 인물이다(이상의 〈날개〉를 떠올려보라).
소란 끝에 비키는 하오하오를 떨쳐낸다. 그러고는 클럽 관리자 격인 잭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다. 잭은 책임감이 있고 점잖다. 하오하오가 갖추지 못한 것을 가졌다. 그는 비키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으로 떠난다. 비키는 그가 남긴 흔적을 쫓아 일본에 따라간다. 잭은 그녀를 위해 숙소를 잡아주었고, 편지를 남겼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비키는 끝내 잭의 비밀에 다가가지 못한 채 혼자 남는다. 잭에게는 비키와의 관계보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음지의 일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 두 남자가 떠나간 후, 비키는 그제야 홀로 선다.
비키를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도대체 왜 저런 남자들이랑 붙어 있냐’라는 책망은 그 욕망의 소유자도 적당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물음이다. 우리 모두는 종종 알 수 없는 동기로 이해 못 할 선택을 내린다. 문제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혼란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다. 욕망과 충동의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 후과를 알맞게 갈무리하는 것이 성인의 자격이다.
불쾌한 냄새와 소음으로 가득 찬 비키의 2001년은 지극한 성장통의 시기였다. 하오하오는 비키가 자신을 떠나려 할 때마다 애원하며 그녀를 붙든다. 그는 자신이 쓰레기인 것을 안다. 만에 하나 ‘예술가’로 성공하면 미련 없이 비키를 버리겠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이 현실로 도래하기까지는 기생할 상대가 필요하다. 그런 자신을 품어줄 여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아는 하오하오는 그래서 비키에게 더더욱 매달린다. 비키는 이를 관계의 특별함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하오하오의 곁에 머물렀다. 잭은 상대적으로 비키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그녀와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비키는 잭에게 사랑의 대상이 아닌 친밀한 타자일 뿐이다.
세상의 떠들썩한 환호와 함께 맞이한 새로운 밀레니엄은 비키에게 지리멸렬한 현실의 연장에 불과했다. 오히려 모두가 희망적인 미래만을 말했기에 비키가 살아가는 현재의 형편없음이 더욱 극화되었다. 2001년 겨울, 비키는 하오하오와 잭을 거친 후에야 자신만의 뒤늦은 밀레니엄을 마주한다.
영화는 내내 명멸하듯 깜빡거리는 불빛과 뿌옇게 번진 빛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카메라에 담긴 대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기 어렵게 만드는, 많은 것을 뒤엉켜 보이게 하는 이 이미지들은 청춘의 열악한 삶을 환기하는 시청각적, 후각적 자극과 맞물려 비키가 살아가는 현실의 혼탁함을 구체화한다. 비키가 문제적 남성들을 떨쳐내고 하얗게 눈 덮인 일본의 한 마을에서 마침내 혼자가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곳곳에 쌓인 하얀 눈은 어둡고 음습한 방의 뿌옇고 경계가 불분명한 혼탁한 이미지들을 단번에 무력하게 만든다. 일상적 장소에서의 이탈은 종종 시공간의 감각을 새로이 배열하여 기존의 감각을 성찰할 자원이 되어주고는 한다.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두 남자에게 연루되어 고통받던 비키는 이 극명한 빛의 대비와 일상적 시공간에서의 이탈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할 계기를 마련한다. 두 남자로 상징되는 벗어날 수 없는 폭력적 수수께끼를 뒤로하고 밀레니엄의 환희에 뒤늦게나마 동참하는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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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과거를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 바꾸는 메시아의 등장
메시아의 등장
이 영화의 주인공은 폴 아트레이더스(티모시 샬라메)다. 아버지(오스카 아이작)가 죽었다. 그리고 살던 왕국이 공격당했다. 멸문당한 아트레이더스 가문. 힘겹게 어머니(레베카 퍼거슨)와 함께 빠져나와 아라키스로 향했다. 모자에겐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 이전에 두 사람은 지금 죽기 5분 전이다. 위기일발의 모자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는 건 아라키스 사람들이다. 모자에게 손을 내미는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 스틸가는 폴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가 '리산 알 가입'으로서 선택받은 자라고 주장한다. 반신반의하는 아라키스 사람들. 그중 한 명은 영화의 다른 주인공 챠니(젠데이아)다. 의심이 늘어난다. 그 의심은 폴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 모든 미래가 폴을 위대한 메시아라고 알려주고 있지만 주인공은 그게 싫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물들과 충돌한다. 살아남고, 복수까지 이뤄야 한다. 과연 아들 폴과 어머니 제시카는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주특기를 보여주다
이 영화 <듄 : 파트 2>의 이야기는 감독 드니 빌뇌브의 인장이 크게 박혀있다고 볼 수 있다. 빌뇌브는 그동안 서서히 쌓아 올리다가 후반부에 터트리는 플롯을 쓰곤 했다. ‘듄’ 시리즈 이전 가장 최근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나 <컨택트>에서도 이런 경향이 보였다. 이런 감정적인 밀도를 쌓아 올리는 이야기 흐름은 이 <듄 : 파트 2>에도 유효한데, 영화에서 폴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방점이 찍힌 장면이 많다. 가령 폴이 영화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한다. 이 선택을 위해 영화는 이야기의 배경을 그전부터 깐다. 폴 이전에 영화 안에서 어떤 인물이 이와 비슷한 선택을 한다던가 특정 인물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폴의 어수선한 내면을 그린다는 것이 그렇다. 이렇게 서서히 쌓아 올린 인물의 내면을 바탕으로 이야기 중반부터 모든 영화는 천둥같이 울린다. 영화를 보면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라는 느낌이 드는데, 티모시 샬라메의 호연을 받쳐주는 연출의 힘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느껴지는 것. 후반부의 폴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연출 때문에 ‘빌뇌브치곤 약한 이야기 아닌가’ 싶은 감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이 영화가 후반부까지 이끌며 전달하는 카타르시스는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기 위해 <듄 : 파트 2>가 고른 다른 선택지는 바로 레이디 제시카서사다. 이야기의 저변을 다양하게 넓힌다는 측면이 아니더라도 이 인물은 <듄 : 파트 2>의 기획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 이 인물은 점점 폴의 행보를 따라가거나 앞서가는 감이 좀 있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딜레마 중 하나와 직결되는 문제라 무조건 들어가야 했던 이야기의 핵심 구조이기도 하고, 또 단선적인 백인 주인공 서사에서 벗어나 이야기의 넓이를 넓힌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그리고 후술 하겠지만 영화가 고전 책들 그러니까 소설이나 역사책들을 오마주한 느낌이 좀 있는데, 이 '레이디 제시카'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무언가를 모티브 삼은 듯하다. 이게 빌뇌브의 연출 특징과도 어울리기도 하지만 이 제시카가 혼자서 당당히 선다는 점에서도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유효했다. 이 인물은 후속작 파트 3에서 이야기의 주제를 더 강조할 인물로 보이는데 안 본 관객들이라면 제시카의 능력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청각을 장악하다
전작의 강점으로 뽑을 수 있었던 시각효과는 본작 <듄 : 파트 2>에서도 장점이다. 글쓴이가 1편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칼라단 묘사다. 이 당시 우주선을 묘사했을 때 왠지 이거 전부 CG를 입힌 것이 아니라 일부는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찾아보면 어떤 우주선들은 빌뇌브를 비롯한 시각디자인 팀이 진짜 우주선을 만들고 어떤 건 입힌 것으로 보인다(실제로도 이 <듄> 1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옐로 스크린’에 대한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이 연출 방식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CG를 사용하되 배우들의 몰입을 위해 어떤 건 실제로 만들고 어떤 건 아닌’ 장면연출은 본작 2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오스틴 버틀러가 맡은 페이드 로타 역은 이야기의 중심 추가 된다는 점에서 핵심인데, 이를 실존인물과 정교한 CG로 이야기를 이끈다는 점에서 좋은 연출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시각화의 관점에서 이야기의 큰 동력이 되는 부분은 모래벌레다. 이 모래벌레에 관한 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될 것이다. 이 모래벌레를 둘러싼 인물들의 모습이나 이 것을 활용한 캐릭터들이나 SF의 생동감을 높이는 좋은 선택이 돋보인다.
비단 VFX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의 시각적인 요소들은 굉장하다. 우선 공간적 배경인 사막은 어디서 이런 장소를 구해왔는지 이야기의 분위기를 살리는 좋은 로케이션 선택이었다. 또 영화는 색을 굉장히 잘 쓴 편에 속한다. 흰색, 초록색, 파란색, 회색, 흑백화면 등 색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전달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빌뇌브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다. 또 <컨택트>에서 외계 비행선을 둘러싼 풍광이나 주인공이 딸과 노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우울감 같은 것도 영화가 구현을 잘 한 편이다. 가령 차니를 둘러싼 인물들의 정서를 카메라가 어떻게 보여주는지, 또 이 인물을 대하는 폴의 내면은 또 어떨 것 같은지 유추하게 만드는 카메라의 힘이 좋았다. 촬영 구도도 영화 안에서 정교하게 다 짜여있다. 이는 다수와 소수의 시각적인 대비다. 이 대비를 통해 영화가 폴의 어떤 측면을 부각하는지를 염두하고 본다면 이야기를 잘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것 같다.
글쓴이는 이런 시각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청각적 요소의 강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듄 : 파트 2> 전작 <듄> 1편이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일으켰던 이유 중 하나는 특별관의 보급 때문이다. 특히 메가박스의 ‘돌비관’이 엄청난 인기였다(제주에는 이게 없다. 글쓴이는 복통이 느껴지지만). 이는 <듄> 1편이 연출한 청각적인 요소 때문인데, 역시 2편 마찬가지로 아이맥스보다 돌비관을 추천하는 바다. 왜? 이 영화에서 청각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 흐름에서 알람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 사운드가 가져다주는 생동감이 엄청나다. 글쓴이는 아직도 그 두두두두 하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스타일을 장악한 빌뇌브의 연출력이 느껴진다.
장르 이력서
이 영화가 10000년대의 이야기를 핵심으로 삼고 있어 SF판타지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작품은 과거라는 테마는 굉장히 중요하다. 우선 글쓴이가 이 영화에서 ‘과거’를 느낀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는 ‘레이디 맥베스’ 서사를 캐릭터로 갖고 온 것이다. 두 번째는 영화 두 편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아라비아 로렌스>가 그렇다. 또 영화 일부 장면에서 <지옥의 묵시록>이나 <매드맥스>와 <블레이드 러너>가 느껴지는 부분이 얼마 있다(이 외에도 오마주한 영화는 많은데 어떤 장면에서 이를 적으면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세 번째 이야기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 어떤 것이 우리 현대를 살아가는 모습과 겹쳐 보이는 모습이 있다. 이는 우리의 세태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측면에서도 관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신의 모습은 분명히 고전 북미 영화들을 오마주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난다. 이는 드니 빌뇌브가 본인의 덕후스러움을 뽐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영화의 핵심과도 이어지기 때문에 이 영화가 과거를 다룬 이유는 충분하다. 이야기의 흐름과 영화의 연출 의도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빌뇌브의 경험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조명 밑의 그림자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관객들의 만족도를 높인다고 해서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기 전 기준으로 ‘듄’ 세계관 이해 못 하는 분들이 보면 지루해할 확률이 높다. 왜? 솔직히 이 영화가 그렇게 친절하진 않다. 알아야 할 정보가 많다. 윗문단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의 동력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세계사를 가져오긴 했으나 그건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 입장에서나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교양과목이 아닌데 이 세계관을 다 이해하고 갈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빌뇌브 특유의 느릿느릿한 템포 때문에 쉽게 이야기가 꽂히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령 영화 초반부에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데 왜 이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행동해야 하는지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이는 빌뇌브의 느린 템포가 이야기에서 이물질처럼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생동감이 넘친다고 보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특히 젠데이아가 맡은 차니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쉬울지는 의문이다. 이 캐릭터가 이렇게 연출된 것은 핵심을 전달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편을 정말 잘 기억하는 팬이 아니라면 이 인물의 행보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 스틸가의 덕을 좀 봤다. 또 주인공의 반대 지역에 속해있는 인물들은 감정선이 붕 떴다. 이 역시 영화가 의도적으로 고른 선택지인데, 이 때문에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빌런의 존재감이 약하다고 이해하기 쉽다.
이런 단점들은 영화의 가장 큰 결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이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음’을 <듄 : 파트 2> 자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전편에 비해서 분명히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있다는 건 관객 입장에서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자연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지루해질 만하면 갑자기 재밌는 장면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을까? 차라리 분량을 더 늘리는 한이 있더라도 인물들의 내면을 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설정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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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의 확신이 무너지는 공포에 저무는 한 인간의 우주
더 파더 The Father | 2020 | 플로리앙 젤레 | 97분
※영화 〈더 파더〉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킹 리어〉에서는 권력욕과 암투의 중심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파국을 이끄는 브리튼의 왕이자 세 딸의 아버지가 되고, 〈두 교황〉에서는 신의 대리인이자 한 시대와 평화의 ‘아버지’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신앙과 종교의 역할을 고민하는 한 인간이 되어 자신이 짊어진 무게를 깨닫기도 한다. 심지어 슈퍼히어로 영화 〈토르〉 시리즈에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천상계의 기원이자 아스가르드 왕국의 평화를 위해 자식이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도록 분투한 아버지로 등장했던 ‘안소니 홉킨스’에게 〈더 파더〉처럼 평범한 일상을 담은 현대극의 우리네 아버지를 연기하는 것이란, 연기의 스펙트럼을 재기조차 민망한 그에게 어쩌면 지루하고도 심심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혹적이며 탄탄한 각본을 여전히 경이로운 연기로 끌어가는 여든셋의 노배우가 보여주는 진가란 그 모든 아버지의 모습이 영화 속 ‘안소니’의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에 드러나도록 절묘하게 완급조절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 파더〉는 안소니에게 욕망과 노기로 가득 찬 인간의 서늘한 독설과, 평생 쌓아 온 어떤 것이 이제는 무너지고 있음을 알아차린 연약한 존재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조각나 뒤섞인 기억의 미로에 갇힌 판타지 영화 주인공의 감정을 한꺼번에 요구했다. 이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기에 관객은 그저 그의 눈과 머리를 따라가며 오롯이 체험하기만 하면 된다.
출처 | 다음 영화
기억의 미로를 헤매는 공포
화면이 밝아오면 앤(올리비아 콜먼)은 누군가의 재촉이라도 받은 듯 런던 거리를 바쁘게 걷는다. 그가 다다른 곳은 조용한 주택가의 고급 아파트. 앤을 맞이한 안소니(안소니 홉킨스)는 갑자기 찾아온 딸에 어리둥절하다. 앤은 아버지께서 자기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곧 안소니는 자신을 돌보러 온 간병인이 시계를 훔쳤으니 당장 쫓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앤은 놀라지도 않은 채 대수롭지 않은 듯 화장실 아래를 찾아보라고 말한다. 안소니는 당황하며 앤에게 따지지만 곧 정확히 그가 말한 곳에서 시계를 찾는다.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앤은 새로 만난 프랑스인 연인과 파리로 떠날 거라 자주 찾아뵙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잠시 후 다음 시퀀스에서 안소니는 부엌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그는 낯선 남자(마크 거티스)와 마주친다. 허락 없는 침입에 항의하는 그에게 남자는 자신을 앤의 남편으로 소개하며 우리 아파트에 얹혀살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안소니라고 말한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앤은 애인과 함께 파리로 떠난다고 했는데. 안소니의 상태를 눈치챈 남자는 앤에게 빨리 집에 오라고 연락한다. 현관을 열고 들어온 앤을 보며 그도 관객도 눈을 의심한다. 분명 우리가 알고 있던 앤이 아닌 다른 여자(올리비아 윌리엄스)가 안소니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백발의 노인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다. 지금껏 안소니의 눈으로 이야기를 따라온 관객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 ‘안소니’의 눈에 이 세상은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다. 시공간이 제멋대로 얽혀버린 그의 세계는 지금 자신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 말고는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 혼돈의 공포를 함께 경험하는 관객은 흔한 점프 스퀘어나 악령 없이도 실제와 가장 맞닿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오 년 전에 이혼했다는 남편이 태연히 소파에 앉아 있지만, 잠깐 뒤돌아 본 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내가 잠옷을 언제 갈아입었는지, 지금이 아침인지, 낮인지, 며칠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사소하지만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영화적 기법과 편집은 혼란스러운 극의 서사를 추동한다. 공간의 왜곡과 변주는 원작인 연극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였기에 가능했던 탁월한 지점이다. 집안 가구들은 시퀀스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바뀌어있다. 가구의 위치나 색깔 같은 미세한 변화는 실제 알츠하이머 환자가 느끼는 인식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을 오버랩하며 영화 후반 모든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은 안타까움과 서글픔을 자아낸다. 결국 모든 상황은 내면의 붕괴로 말미암은 환상이다. 영화는 의식의 스위치가 명멸하듯 음악과 이미지를 영화 밖에서 안으로 집어넣고, 다시 안에서 밖으로 내보이는 것을 반복한다. 영화의 배경음악에서 전축으로, 평범한 아파트에서 낯선 병원 복도로 넘어가는 쇼트들은 현실과 꿈, 기억과 실제를 넘나든다. 안소니는 끊임없이 문을 열고 닫는다. 오직 그의 행위로 영화는 역동적으로 운동한다. 그것이 안소니라는 유약한 인간이 가진 마지막 힘이다. 하지만 관객인 우리는 그의 세계 바깥의 현실과 주변 인물들의 참담함을 영화 내내 짐작할 수 있다. 지워지는 기억 앞에 멍하니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안소니의 걸음에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안소니라는 운동, 앤이라는 동력
하지만 뒤죽박죽인 그의 세계 못지않게 안소니도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알츠하이머는 우리가 익히 알던 누군가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앤은 그에게 새로운 간병인 로라(이모겐 푸츠)를 소개한다. 불안한 마음도 잠시,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안소니는 술을 권하며 탭 댄스까지 보여주며 화목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행복은 빠르게 그들을 떠난다. 안소니의 급격한 감정 변화는 딸과 로라에게 큰 생채기를 남긴다. 폭언을 서슴지 않고 생판 남 앞에서 딸을 욕보이는 장면의 에너지는 눈을 뗄 수 없다. 안소니 홉킨스는 유머러스한 농담과 익살스러운 몸짓 다음에 곧장 서늘한 분노로 폭발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상이었다가 누구보다 연약한 아기가 된다. 원작인 연극의 느낌을 느껴보려는 듯 컷도 거의 나누지 않은 그의 연기는 관객을 엄청난 흡입력으로 끌어당긴다. 돌이킬 수 없어 더 안타까운 진실에 이해하려 애쓰는 안소니의 모습은 시종일관 놀랍다.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죽은 딸은 그의 무의식에 남은 죄책감과 고통의 근원이다. 비극적인 사고로 인한 딸의 부재는 외면하고 싶지만 잊어버릴 수 없다. 그에게 시간이 잡으려 해도 늘 도망가는 시계와 같다면 딸을 잃은 슬픔은 오히려 잊고 싶어도 늘 남아있다. 과거를 회상하며 비극적인 감정의 파고를 홀로 묘사하는 장면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에게는 유난히 독백 장면이 많지만 마지막 침대에 걸터앉아 저무는 생을 비유하는 마지막 장면은 필연적 결말임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창밖의 푸르른 잎사귀는 여전히 그대로다. 변하는 자신에 대한 체념과도 같은 고백은 덩그러니 놓인 그루터기처럼 공허하다.
영화의 제목이 ‘안소니’가 아니라 ‘아버지’인 이유는, 무너지는 안소니의 고립된 세계와 시선 곁에 ‘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안소니의 행위로 움직이지만, 모든 혼돈은 그를 돌보며 고민하고 결국 작별해야 하는 앤의 타임라인을 따라간다. 결말까지 안소니를 움직이는 동력인 앤은 아버지의 세계와 외부의 현실 모두를 관찰하며 서사의 중심을 잡아준다. 우리는 안소니의 시선을 따라가지만 실은 앤의 감정에 더 이입한다. 인물과 관객, 두 주체를 끌고 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올리비아 콜먼은 완벽하게 해낸다. 이별을 준비하며 날마다 달라지는 아버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딸을 연기한 그는 어떤 감정이든 금세 관객이 이해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미묘한 떨림과 눈빛은 여러 대사 없이도 충분히 대답해주고 있다. 모두의 삶을 위해 가장 최선이라고 판단한 마지막 선택의 장면에 보이는 처연함과 머뭇거림, 슬픔과 확신이 뒤섞인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저무는 우주의 마지막 모습
동양에서는 우주의 만물을 음양오행으로 구분해 인간의 섭리와 이치를 설명한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합일’이라는 사상의 가르침에 따라 자연의 음양오행을 인체의 오장육부에 대입하며 거대한 세계의 ‘소우주’에 인간의 진리를 담아낸다. 지구 반대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비트루비우스 인체도’에서 인간의 몸을 작은 세계로 칭하던 고대인을 따라 도시와 세계를 구성하는 비율로 삼았다. 최근까지도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 구조가 우주의 은하계 구조와 놀랄 만큼 패턴이 일치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과거와 현재, 뉴런과 은하를 거슬러 인간과 우주는 많은 것을 공유한다. 기억과 정신 능력의 본질인 뇌의 중요성만큼이나 소우주의 칭호는 그리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우주 宇宙라는 단어에는 ‘집’이 두 번 들어간다. 집을 반복해 얻은 놀라운 공간의 확장처럼 영화는 두 개의 집을 중첩시켜 거대한 우주의 안녕을 고한다.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극의 주인공인 안소니의 집에서는 사라지는 인간의 기억이라는 정신적 공간이자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 물리적 공간이 교차하고 어긋나며 공포와 혼란을 가져다준다. 언제나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보호했던 집과 기억이 동시에 사라지며 시간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집과 함께 인간의 우주를 구성해 온 기억의 집은 희미해진다. 한 인간이 그간 구축해 온 모든 것이 사라지는 막막함이란 우주 공간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다. 어두운 심연으로 멀어질 안소니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앤과, 그의 마음을 투영한 관객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반드시 거쳐야 할 불가역적 소멸의 정서와 조응한다. 〈더 파더〉는 담담하고 조용히 삶의 작별을 말한다. 커다랗게 보였던 인간사는 광활한 공간의 한 점이라는 뒤늦은 자각과 함께, 그렇게 우주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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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스러운 이미지만 나열되는 공포영화
과연 신이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그 신이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초월된 어떤 존재를 믿는다. 하느님, 부처, 알라 등 다양한 종교 집단의 믿음을 받는 존재들은 이미 인류의 마음속에 선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런 비 과학적인 존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각 종교에 헌신하고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매주 기도를 하고 자신과 가족의 평안을 위해 종교시설에서 시간을 보낸다.
큰 종교들에서 조금 시선을 돌리면 더 다양한 종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고 작은 분파들을 비롯해 특정 지역에서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오는 토속 신앙들도 있다. 모두 사람들의 신뢰를 받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다양한 신은 그 믿음이 대를 이어 계속 전해 내려오고 해당 신의 믿음을 일반 대중에게 연결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스님, 목사, 신부 등이 대표적이며 지방 신들과 이어주는 무당도 그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 모두 공통적으로 종교의 가르침이나 선한 존재에 대한 것들을 일반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일련의 종교들을 현재까지 존재하게 하는 건 바로 믿음이다.
지방 신을 믿는 무당과 그 가족의 이야기
영화 <랑종>은 무당인 님(싸와니 우톰마)과 그의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의 이야기를 다루는 페이크 다큐영화다. 태국어로 랑종은 무당이라는 의미로 이 영화가 주인공인 님과 그가 모시는 반야 신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 속 님은 젊은 시절 반야 신에게 신내림을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과거 신내림을 받기 전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몸이 아팠다. 얼마 정도 저항을 했지만 결국 반야 신을 받아들인 그는 대를 이어 반야 신을 섬기는 무당이 되었다.
님은 반야 신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영화 내내 그는 반야 신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행동한다. 신내림 직전 님과 그의 언니가 경험했던 신체의 이상한 아픔이 조카 밍에게도 벌어지자 님은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것이 진짜 신내림인지를 판단하려 한다. 영화는 전형적인 다큐의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님이 가진 시각이나 생각을 인터뷰 형식으로 담는다. 그의 인터뷰에는 반야 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깔려있는데 그것은 결국 반야 신이 선한 신이라는 판단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 속 마을의 사람들은 동물, 집, 산, 나무 등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애니미즘(animism)의 시각이 영화에 담겨있는 것인데, 이 애니미즘은 살아있는 생물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물에 정령이나 혼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주로 원시 문화에서 많이 믿었던 이 개념은 현대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문화의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그런 다양한 혼령이 주변에 있다고 믿는데 특히나 반야 신은 그 모든 것의 균형을 맞추는 존재로 특별히 그를 받아들인 무당 님 또한 특별한 존재로 묘사한다.
사실 영화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특별하지 않다. 님의 인터뷰와 생활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님이 형부의 장례식장에서 밍을 만나 관찰하는 시선으로 전환된다. 밍이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 신체의 아픔 등은 그것이 일종의 신내림이라는 것을 모두가 부인하지 않는다. 밍의 엄마가 자신의 딸이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지만 영화 내의 다른 등장인물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입장에서 결국 밍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반야 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 흔들릴 때 찾아오는 공포
모든 등장인물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반야 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불신하지 않는다. 그 믿음과 신뢰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안정감을 주는데 밍의 이상한 행동들에 불안감이 있지만 무당인 님의 말을 따르면 그런 것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믿음이 곧 사람들을 안심하게 해주는 것인데 그 믿음이 흔들리는 시점부터 영화는 공포의 강도를 높이게 되고 후반부에는 거의 직접적인 이미지로 그 공포를 보여주게 된다.
사실 제작자로 참여하고 있는 나홍진 감독의 영향이 많이 들어갔다고 보여진다.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그 점에서 나홍진 감독의 전작인 <곡성>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두 영화 모두 무당이나 퇴마 의식이 진행되기도 하고, 지역의 신인 바얀 신을 향한 믿음이 어느 정도 있는지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홍진 감독의 색깔이 겹쳐 보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나홍진의 색이 입혀진 것까지는 괜찮지만 영화가 나홍진 영화가 가지고 있는 깊이 까지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랑종> 이 <곡성>처럼 보다 근원적인 공포를 효과적으로 보여줬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중반까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무당인 님의 시각과 설명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하여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예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 후반부의 전개와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화의 중반이 넘어가면 영화는 밍에게 나타나는 이상한 증상들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공포의 수위를 높인다. 그런데 한 번에 수위를 높인 영화는 그 이후 아주 원초적이고 혐오스러운 공포 이미지를 계속 반복해서 보여준다.
일종의 푸티지 영화인 이 영화는 캠코더로 귀신이나 초자연 현상을 찍은 여러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 한국영화인 <곤지암>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처음 몇 장면들은 꽤나 공포스럽지만 영화의 공포스러운 존재의 모습이 계속 반복해서 보여지게 되면서 오히려 무서움이 줄어든다. 아주 직접적으로 공포스러운 장면을 드러내는 후반부는 주인공들의 처절함과 공포심이 화면으로 전달되지만 혐오스럽고 역겨운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가 만들고자 하는 공포심이 극대화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가 여러 번 비슷하게 반복되는 이미지에 완전히 파묻혔기 때문이다. 영화가 던진 주제의 힘은 약하지만 그를 뒷받침해주는 이미지들은 너무 강렬해서 주제가 가져오는 공포는 휘발되버리고 만다.
혐오스러운 이미지만 나열되어 아쉬운 영화
영화가 포함하고 있는 특정한 종교나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핵심적인 질문은 후반부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후반부 하이라이트 장면인 퇴마 의식 장면은 바얀 신에 대한 믿음이나 무당에 대한 믿음 같은, 영화의 초반부터 던지고 있는 질문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저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혐오스러운 공포의 장면들이고 그 이면에 있는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나 주제는 완전히 가려져 버린다. 그래서 영화의 맨 마지막 보여주는 메시지도 큰 울림을 가지기 어렵게 된다.
그만큼 영화는 자신이 가진 메시지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참혹한 영상만을 반복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자신이 파놓은 깊은 우물 밑만 보여줄 뿐 그것을 밖으로 내뿜지 못하고 있다. 나홍진이 제작한 영화이지만 그가 연출한 영화들의 깊이보다는 그가 가진 테크닉과 분위기만 가지고 온 영화라는 한계를 보여준다. 영화는 대부분 신인이나 무명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는데 특히 님의 조카 밍 역을 연기한 나릴야 군몽콘켓의 연기가 훌륭하다. 그는 아주 발랄한 젊은 여성의 연기로 시작해 여러 령에 의해 빙의된 괴이한 존재를 그의 얼굴과 몸짓으로 표현해내 영화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든다. 그의 기이한 행동과 연기는 <부산행>, <곡성>에 참여한 박재인 안무가에게 연기지도를 받아 훌륭하게 표현되었다. 배우들의 연기와 영화가 가진 분위기 자체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주제와 공포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많이 아쉬운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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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종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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