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29 21:41:00
보호자이지 못하는 어른들
<보호자> 영화리뷰
이 영화는 터키 영화 이며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추운 겨울 남자 기숙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남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메모라는 학생이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는 체벌을 당한 그 다음날 일어나지 못한다..
메모의 친구 유수프가 그의 곁을 지키면서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선생님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선생님들과 어른들은 서로의 탓이라고 우기기만 하고 결국 마지막에 유수프가 메모를 데리고 몰래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러 가다가 메모가 파이프를 머리에 맞았다는것을 알고는 안심하는 듯이 끝난다.
터키 기숙학교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무책임한 어른들의 모습을 마치 다큐 처럼 영화가 흘러간다. 이 영화의 배경이 고립된 시골에다가 겨울이어서 교도소와 비슷한 이미지 였다. 영화 초반부터 계속 창문이 깨지고 문이 덜렁 거리는 등 불안한 전개를 계속 암시한다. 또한 메모를 보건실에 거의 방치 해두고 선생님들이 보건실로 들어 올 때 어른들만 보건실의 문 앞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정작 아이들은 미끄러지지 않고 제대로 걸어온다. 선생님들이 들어올 때 메모의 열을 재고 열은 안난다며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다. 이런 장면들이 부당한 관습과 폭력성이 반복 될 것을 의미한다. 유수프가 마지막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가 아프다고 말 하지만 엄마 마저도 친구는 무시하라고 하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게 유수프에게 진정한 보호자는 존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유수프만 머리만 밀려있고 똑같은 샤워실, 초반이랑 똑같이 샤워를 하며 끝이 난다.
선생님들은 메모의 병에 대한 책임을 유수프에게 떠넘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책임에 대한 벌도 유수프만 받은 것이다. 유일하게 이 학교 상황을 메모의 사건으로 고발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지만 유수프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이 악습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영화가 끝나도 영화 속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맞고 아파도 제대로된 보호 조차 받지 못한 채 살 것 같다. <보호자>라는 제목도 좋았었다. 메모의 진정한 보호자는 유수프 뿐이었다. 이 학교의 보호자인 어른들은 보호자의 의무와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 마지막 머리가 깎여 있는채로 샤워를 하고 있는 결말이 엄청 강렬했었다. 결국 잘못에 대한 죄를 받은 사람은 어린 유수프 단 한명 뿐이었다. 과연 메모가 아프게되어 병원에 실려가기 전까지 잘못한 사람은 어린 유수프 한명 뿐이었을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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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란의 칼춤 속 보이는 작금의 현실
혼란의 시대! 말 그대로 <전, 란>은 혼란스럽다.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이 아닌 그 이후를 본격적으로 다룬 이야기에는 전쟁보다 더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이 그려진다. 그래서일까. 왜란이 벌어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놓인 조선의 현실을 마주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낯설지 않다. 지금과도 별반 차이 없는 암울한 사회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조선에서 벌어진 혼란의 칼춤으로 소환된 작금의 현실은 무엇일까?
양민이었지만 빛 때문에 노비가 된 천영(강동원)은 콧대 높은 무신 집안의 종으로 들어간다. 그가 하는 일은 그 집 귀하디 귀한 아들 종려(박정민)가 검을 잘못 다를 때마다 대신 맞는 것. 너무 많이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천영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밤마다 종려를 불러 검술을 연습한다. 이후, 천영은 회초리의 위협에서 벗어나 종려의 검술 스파링 상대가 된다. 시간은 흘러, 매번 무과 시험에 낙방하는 종려를 대신해 천영은 무과 시험에 합격하면 면천(免賤, 천민의 신분은 면하고 평민이 됨)을 해주겠다는 약조를 받고, 당당히 장원급제를 한다. 하지만 종려 아비는 면천 대신 천영을 죽이려 한다. 오해의 또아리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이들은 임진왜란을 맞는다.
<전, 란>은 시작부터 “조선시대 양민과 천민은 친구가 될 수 있는가?”란 물음을 던진다. 이 질문의 무게감을 더하듯 영화는 신분과 계급을 떠나 누구든 평등하다는 의미의 ‘대동(大同) 사회’를 꿈꿨던 정여립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대동의 의미는 곧 왕권을 향한 반란으로 해석한 선조(차승원)는 정여립의 목을 광화문 시장에 전시하고,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곳에 추노에게 붙잡힌 천영이 등장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철저한 계급사회가 존재했던 조선 시대에서 양반과 천민의 우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못 박는 듯하다. 천영과 종려는 어렸을 때부터 쌓아온 유대감을 통해 한 때 동무를 꿈꿨던 이들이긴 하지만 왜란을 겪고, 오해와 불신을 거듭한 이들에게 남은 건 분노와 후회가 점철된 칼부림뿐. 계급과 처한 위치에 따른 둘의 대립은 조정과 의병들의 싸움으로 번진다. 이는 생각과 이념이 다른 이들의 싸움처럼 보이고, 결은 다르지만 지금도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도 흡사해보인다. 청과 적의 싸움 등 입는 옷 색깔, 손에 쥔 환도의 모양만 봐도 영화의 제목처럼 이들이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다.
앞서 소개했듯이 <전, 란>의 주요 이야기는 왜란 이후의 이야기다. 선조를 위시한 기존 세력은 무너진 왕권과 사회를 정립해 나가려하고, 천영을 대표로 한 새로운 세력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쟁한다. 마치 보수와 진보의 싸움과도 같아 보인다.
극 중 왜장 겐신(정성일)이 등장하지만, 영화 속 주적은 배가 고파 시체를 먹는 민중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의병 활동으로 왜놈들을 물리친 이들에게 공을 인정하기지도 않은 채 무너진 경복궁(왕권) 재건에만 힘쓰는 선조다. 이 왕은 최악의 지도자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건 물론, 피난길에 부실한 음식 투정을 하고, 살기 위해 나룻배에 매달린 백성을 처참히 죽이라 명하는 등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처럼 희화화 하는 선조의 모습은 백성을 일개 종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보인다. 이는 누가 지도자를 맡느냐에 따라 변모하는 왕권사회의 헛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 여기에 한 술 더 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어떻게든 지속하기 위해 친일파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의 등장과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는 이들의 행동은 울분과 침통함을 곱절 느끼게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화는 천영의 성장 서사를 굳건히 다진다. 이는 이름을 통해 드러난다. 자신의 이름에 뜻이 없었던 천영은 종려를 통해 ‘따를 천’, ‘그림자 영’을 받는다. 이후 의병장 자령(진선규)은 ‘하늘 천’, ‘빛날 영’이란 이름을 받는다. 아무 의미 없었던 평민이 세상과의 대립과 싸움을 거쳐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얻는 과정은 양민도, 노비도, 창의검신도 아닌 본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후 함께 의병 활동을 했던 범동(김신록)의 이름을 따서 그 의미를 부여하는 위치까지 이른다.
다만, 흥미롭게 진행되는 역사적 이야기에 비해 극 중 인물들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주요 인물은 천영과 종려는 역사라는 무게감에 짓눌렸는지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머리로는 울분과 비통함을 알겠으나, 마음까지는 설득되지 못한다. 차승원, 김신록의 연기는 돋보였지만, 이 또한 마음을 이끌어내는 데는 다소 약하다. 대신 알고 있었지만 영상화된 좌절의 역사를 보는 것 자체는 그 의미가 깊다. 극화된 부분임에도 고난의 연속이었던 민중의 삶을 두 눈으로 담을 수 있는 계기는 영화의 큰 의의다. 수위가 높음에도 학생들에게 널리 보여주고 싶은데 특히 마지막 선조가 열라하는 궤짝 장면은 시청각교재로 꼭 쓰고 싶다.
아쉬움을 달래듯, 영화의 가진 주제의 무게감을 덜어내듯 화려한 검술 액션 눈길을 사로잡는다. <군도: 민란의 시대>만 봐도 강동원이 검을 들면 엑션이 산다는 건 당연지사. 이번에도 그의 검술 액션은 멋진 감상 포인트다. 박정민과 정성일의 검술 액션도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마지막 해무가 가득한 해변에서 이들이 검술 대결은 그 자체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전, 란>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본디 영화제의 개막작이라고 한다면 그 시대를 반영하는 주제를 갖고 있거나 영화제가 지향하는 주제가 담겨 있기 마련.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OTT 오리지널 영화로서 첫 개막작 선정이라는 의미로 그치지 않는다. 보면 안다. 왜 영화제가 이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정했는지를 말이다. 멋진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역사를 통한 정치, 사회적 이슈를 활용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였는지는 보는 이들에게 갈리겠지만, 이 영화를 통해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는 건 모두다 마찬가지일 터.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사진제공: 넷플릭스
평점: 3.0 / 5.0
한줄평: 혼란의 칼춤 속 보이는 작금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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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과속스캔들 결말 줄거리 살펴보기
여기 정말 재미있는 코디 영화가 있어요! 박보영의 리즈시절과 차태현의 조합으로 코미디 가족 드라마로 만든 영화 과속스캔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자동으로 BGM이 깔리는 마법 같은 영화, 보면서 배 아플 수 있는 영화가 여기 있어요~ 잘나가는 연예인에서 갑작스러운 딸이 생겼다?!
영화 과속스캔들 리뷰 시작해 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코미디, 드라마, 가족
감독 : 강형철
각본 : 강형철, 이병원
출연진 : 차태현, 박보영, 왕석현
개봉일 : 2008년 12월 03일
평점 : 9.20
스트리밍 : tvN , 웨이브, 쿠팡 플레이, 왓챠
기획 의도
한때 아이돌스타로 10대 소녀 팬들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남현수(차태현). 지금은 36살 나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잘나가는 연예인이자, 청취율 1위의 인기 라디오 DJ. 어느 날 애청자를 자처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오던 황정남(박보영)이 느닷없이 찾아와 자신이 현수가 과속해서 낳은 딸이라며 바득바득 우겨대기 시작하는데 그것도 애까지 달고 나타나서...
집은 물론 현수의 나와바리인 방송국까지. 어디든 물불 안 가리고 쫓아다니는 스토커 정남으로 인해 완벽했던 인생에 태클 한방 제대로 걸린 현수. 설상가상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 그에게 정남과 스캔들까지 휩싸이게 되는데...
나 이제 이거 한방 터지면 정말 끝이다 끝!
여담
영화 과속스캔들은 2008년 개봉 당시 초 대박을 터트리며 2008년 흥행 성적 1위를 달성했다.
원래 영화 제목은 '과속 삼대'였으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할 것 같아 '과속 스캔들'로 바꿔서 흥행에 성공했다.
차태현은 <엽기적인 그녀>이후에 오랫동안 히트작이 없었고, 박보영 역시 무명 신인에서 벗어나 어엿한 배우로 성공하였다.
후기 및 결말
영화 과속스캔들 결말을 살펴보자면...
현수(차태현)는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봉필구 연예부 기자로 다른 사건을 통해 한 명의 연예인을 나락 가게 만든 그 연예인이 현수의 기자회견으로 들어와 봉필구를 마구 두들겨 패면서 현수의 기자회견은 난장판이 난다. 결국 한때 잘 나갔던 연예인이지만, 연예인이 인기가 없어서 아저씨 콘셉트로 바꾸면서 인기 없던 연예인에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영화 과속스캔들은 결말까지 진짜 완벽하게 웃기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재미있게 봤었고, 아역 배우였던 왕석현이 어엿한 어른이라니.. 새삼 세월이 빠르다는 걸 다시 한번 일깨워준 영화랄까?..
한줄평 : "아마도~ 이건 사랑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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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회와 시대 속에서의 예술의 역할, 그리고 거장의 존재
한 사회와 시대 속에서의 예술의 역할, 그리고 거장의 존재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리뷰
감독] 로라 포이트러스
출연] 낸 골딘
시놉시스] 전설적인 사진작가 낸 골딘의 삶, 예술, 투쟁, 그리고 생존 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사진은 나의 유일한 언어였다. 나는 생생하게 반짝이는 뉴욕에서 죽어가는 친구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포착했고, 있는 그대로의 내 얼굴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이제는 내 모든 명성을 걸고 거대 제약회사에 맞서 싸운다. 생존과 투쟁의 기록이 담긴 나의 일기장을 당신에게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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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이렇게나 솔직한 거장이라니
사실 낸 골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예 아는 바가 없었다. 전시회를 보러 가더라도 사진전 보다는 그림 전시를 선호하는 편이어서 사진작가에 대해서는 그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양한 시각적 정보들이 쏟아지던 시사회장에서 낸 골딘이라는 사람을 처음 접했다. 그런 그녀의 첫인상은 정말 지독하게도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치부는 감추고 싶을만할텐데도 영화 속에서는 서스름없이 공개했다. 물론 인터뷰 장면이나 나레이션 장면에서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녀의 인생을 사실적으로 풀어냈고,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모두 공개했으니 말이다.
낸 골딘의 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유는 그녀에 대한 인정이 없었던 가족 구성원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언니의 성정체성을 거부했고, 그녀의 다름에 대해서 인정하기보다는 외면을 하는 쪽을 택하면서 계속해서 시설로 언니를 보냈다. 언니는 끊임없이 자신과 그리고 사회의 편견과 싸우고 있었고, 이를 인정해준것은 자신을 상담하던 정신과 전문의 밖에 없었다. 그 전문의의 소견서에 나온 문장이 바로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테’다. 그렇게 언니의 죽음을 경험한 골딘은 그 길로 독립을 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녀가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랜 무명시절을 거치기도 했지만 무명시절 동안 그녀는 꾸준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그녀의 작품활동은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유명한 사람을 찍는 것이 아닌 평범한 자신과 그 동료를 찍으며 현재의 브이로그와 같은, 인스타그램 피드를 장식하는 사진과 같은 일상을 표면에 내새우면서 사진예술의 고정관념에 도전했다. 그녀의 작품들을 보고 업계 사람들은 예술이 아니라며 비난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만의 솔직한 일상을 담은 사진으로 사진, 영상예술계의 거장으로 성장했다. 이 기반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솔직함이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적나라한 성행위를 비롯한 나체 등 은밀한 개인의 일상 모습을 사진을 찍음으로서 공중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자신이 마약을 했을 때, 남자친구에게 데이트폭력을 당했을 때 등 암담하고 우울한 상황에서의 자신마저도 사진을 통해 기록을 남김으로써 그 역시 하나의 기록예술로 기능했다.
권력은 이렇게 쓰는 것
거장이 된 골딘은 자신의 명성과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미국은 현재 펜타닐과 같은 마약 중독 문제로 엄청난 후폭풍을 맞고 있는데 골딘은 그런 마약중독과 관련된 거대 제약회사와의 긴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예술로 승화하면서 자신의 본업과 연결시키고 사람들을 일깨우고 결국 그 싸움에서 일정 부분 승리를 거둔다. 골딘이 마약중독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건 그녀가 그 중독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간간히 해왔던 대마를 넘어 그녀는 치료 목적으로 옥시콘틴을 처방받은 적이 있었다. 의사 처방에 따라 받은 마약성 진통제였지만 옥시콘틴은 한번 먹을 때마다 그 양을 점차 증가해야만 효능이 있었고 그녀는 결국 옥시콘틴에 중독이 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옥시콘틴의 부작용과 약물 과용에 대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생산을 멈추지 않은 제약회사 세클러가에 대한 분노를 느낌 골딘은 새클러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명성과 권력을 활용해서 말이다. 이미 거장이었던 그녀는 매년 다양한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는 콜을 받는다. 그녀는 이를 이용해 박물관과 미술관에 후원을 하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좋게 맘들고 있는 새클러가를 공격하기로 한다. 자신의 작품을 걸고 싶으면 새클러가의 후원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박물관과 미술관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더불어 이와 함께 박물관 로비와 입구앞에서 비폭력 시위를 하면서 그들이 새클러가에서 받는 후원금이 약물 과용 부작용을 일으키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옥시콘틴을 만드는 회사임을 지속적으로 알린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빛을 본다. 테이트 박물관, 현대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등 세계 각국의 박물관, 미술관, 대학교는 새클러가에서 받던 후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세클러관 이라는 이름 역시 명칭을 변경했다. 그렇게 골딘은 한 단계 한 단계 넘어가며 새클러가의 만행을 밝혔고, 재판에서는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배상금을 받아냈다. 오랜 기간의 투쟁이었지만 그녀는 예술이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고, 또 힘이 있는 예술계 거장이 사회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해야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너무나도 급진적인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와 시대 속에서 예술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보여준 낸 골딘의 삶을 풀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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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젝트 사일런스'보다 부실한 것 같은 기획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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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중 추돌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청와대 행정관 차정원(이선균)이다. 딸(김수안)과 함께 사는 싱글파더 정원. 직장이 청와대인 탓에 위에서도 어깨가 무겁지만 그의 입장에 더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딸이 랩(힙합)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낸 해결방식은 호주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다. 운전 중인 정원. 그전에 이상한 양아치 조박(주지훈)와 말다툼이 있던 것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다. 한참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데 사건이 벌어진다. 콰콰쾅하는 소리가 난다. 앞에서 확인하니 수많은 차량이 추돌사고를 일으켰다. 어수선한 도로. 군인들이 모여 도로를 정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개 한 마리가 혼자서 돌아다니더니, 이내 곧 군견들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황하는 사람들. 골프선수 유라(박주현), 병학과 순옥(문성근/예수정), 과학자(김희원) 역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생지옥이 된 도로.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
재난에'만' 집중하다
사실 이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재난영화라는 근본을 충실히 쫓아간다고 볼 수 있다. 재난영화의 근본이 뭐야? 기본적으로 현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룬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재난이 벌어진다. 그럼 그 재난을 수습하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지? 그 상황에 대해 이상적인 대처를 보여주나(<비상선언>, <볼케이노>) 한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 비판하거나(봉준호 감독의 <괴물>) 정부차원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연대해서 극복하는 줄거리(<칠드런 오브 맨>)거나 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저열한 인간군상극(<부산행>)이 나올 수 있다. 이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이 특성 중 하나를 그대로 가져왔다. 바로 <괴물>의 사례다. 이것을 잘 살리는 주인공 차정원은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에서 근무하는 인물이다. 그럼 청와대의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어떤 인물이랑 연결됐을까? 바로 유력한 대권후보 정현백(김태우)이다. 이 설정은 이 영화가 한국사회에 대해 비판할 때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또 영화가 하이라이트에서 강조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무언가가 (합을 맞춘 티가 날 지언정) 이 차정원이라는 인물이 이 역할을 맡아 이 이야기를 끌고 가고 이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근거가 된다. 영화가 인물 설정을 통해 무언가를 노리고 이 작품을 기획했는지가 드러나는 셈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가 장르를 공간으로 설정한 방식 역시 돋보인다. 이 영화는 도로에서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장르적인 토대를 만들고 싶어서. 자동차가 30중으로 추돌사고가 일어나 그 여파로 크리쳐들이 풀려난다. 크리쳐들이 풀려나는 계기가 도로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국한 짓는 것이다. 뭐 바닷물에 오염수를 뿌렸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괴물>이 생각난다. 또 그 오염수라는 것에 변수가 좀 있다. 그 안의 생태계라던가 환경단체의 감시 같은 것들이 세계를 이루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있을까?라는 걸 생각해 보면 2020년대에 이런 접근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나름 영화가 독자적인 노선을 고른 것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 영화가 도로라는 공간적 배경을 선택한 이유가 인물들의 소시민적인 특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도로가 뭘까? 기본적으로 양 방향에서 오며 가며 이동하는 것이 도로다. 이 도로에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차에 탑승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 차에 있다. 겉으로 이 안에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건 국무총리건 알 수 없다. 차만 보인다. 인물들 간의 수평적인 관계가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특성을 동력으로 삼았다. 이 영화는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사회 안의 계급을 활용하지 않는다. 플롯에는 기능적일지언정 이야기 안의 문제 해결에는 인물들이 자기 몫 다 한다. 또 자기들끼리 직간접적으로 소통하는 모습도 적지 않게 보인다. 골프선수와 호주 유학 가려는 10대 여학생이 대화할만한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 그리고 서로 아이디어를 내는 데에 있어서도 누가 높고 낮다 이런 게 없다. 각자 캐릭터들이 도로라는 공간적 배경 하에 하나로 집결시킨 것이다. 둘째로 이 영화는 도로의 공간적인 특성이 플롯 안에 새겨놓은 흔적까지 보인다. 도로는 두 방향에서 서로 오고 가는 것이다. 만약 이 것의 한 방향을 자른다면? 한 방향 안에서만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럼 돌아가야 한다. 도로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냥 그 도로 안에 갇힐 수도 있다. 여기서 이 영화가 던지는 윤리적인 문제와도 닿는데, 만약 이 도로를 이용하는 이용객 중 하나가 도로를 관리하는 입장이라면 그게 공정한 것일까? 이 질문을 영화가 도로라는 공간적 배경으로 구현한다. 극후반부를 보면 인물들이 도로를 둘러싼 리액션을 보여준다. 이 리액션이 사실상 영화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공간적 배경이 ‘도로’가 아니었다면 이 구도가 나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간이 영화의 핵심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라진 서스펜스
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하면 긴장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 있어 실질적인 재난에 해당하는 것들은 군견이다. 군견은 적군을 학살하는 것에 있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전적으로 일반적인 군견 같지 않다. 근육이라던가 감각이라던가 기동력이라던가 굉장히 뛰어난 애들이 이 군견들이다. 그리고 다른 설정. 영화가 안개가 자욱하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서스펜스가 생기겠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곳으로 들이닥치는 서스펜스가 있겠지? 영화가 이 서스펜스를 잡았을까? 아니오. 그럼 어떻게 잡았어야 했을까? 바로 청각적인 쾌감을 잡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박(주지훈)이 받아야 할 돈만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네 캐릭터만 반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아니면 정원 부녀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게 영화가 프리미어를 가졌던 칸 영화제와는 다른 분량이라서 애매하게 된 지점이 있는데, 부녀관계가 더 깊숙해야 하는데 매가리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이 부분을 조금 덜 가져가더라도 장르적인 이해도에 주안점을 찍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크리쳐에 해당하는 군견들도 이야기의 흐름에서 굳이? 싶은 점이 많다. 가장 큰 이유. 이 크리쳐들이 개일 이유가 있었을까? 이것은 영화에서 양 박사 캐릭터에게 설명이 부족했다는 과도 이어진다. 영화 안에서 양 박사는 군견들을 탄생시킨 프로젝트의 책임 연구원이다. 그럼 이 프로젝트를 굉장히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이면을 설명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개의 특성을 영화 안에서 핵심 소재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군견들의 단점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서스펜스가 생길 수도 있다. 필요한 물건이 있을 것이고, 그 조건이 발휘되거나 그렇지 않는다라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영화는 이것에 관해 그냥 1차원적으로 활용하고 끝낸다. ‘개코’라는 관용어구가 있는 만큼 냄새로 인물들을 추적한다던가 하는 방식이 영화 안에서 중요하게 작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근육질의 강아지만 보여주는 선에서 상상력을 피지 못한다. 솔직히 이 영화의 재난이 <미스트>처럼 못생긴 괴물이면 어땠을까? 그건 차라리 비주얼이 무섭기라도 해서 '쟤한테 걸리면 끝장나겠다' 겁이 나기라도 한다. 이 영화의 강아지 묘사라면 호랑이, 고양이, 늑대, 하다못해 모기나 파리 같은 곤충들이었어도 큰 문제가 없다. 영화가 서스펜스에 중요한 것들을 놓친 셈이다.
만화가가 꿈이어도 되는 거 아닌가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있어 100% 적합하지는 못했다. 대표적으로 유라라는 캐릭터가 그렇다. 이 인물은 <부산행>의 마동석 배우 캐릭터 같은 느낌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기를 활용해서 크리쳐들을 활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내로 나온 정유미 배우의 캐릭터가 임산부인 것을 활용해 이동이나 보고 듣는 것에 제약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골프선수라는 직업적 떡밥(?)을 해결하는 방식을 보면 조악하다. 사실 유라가 사격선수라면? 군인 출신이었다면? 골프선수보다 후반부의 전제조건에 더 깔끔하게 호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정현백이라는 인물물과 군인들이 가진 현실적인 능력 묘사가 이 영화와 적합했는지는 의문이다. 영화 후반부까지 다 보고 나서 드는 의문이기도 한데, 청와대 조직을 글쓴이 같은 20대 남성이 알 리는 없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 이게 특정 누군가가 이 모든 상황을 컨트롤했다기엔 반론거리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노부부 병학(문성근)과 순옥(예수정)은 이 영화가 둔 가장 큰 패착이다. 이야기를 납작하게 만들 거라는 걸 예측하는 것과 동시에 전 국민이 보고 즐길 오락영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장면이 나온다.
의문스러운 기획
전체적으로 영화가 노리는 바는 있었지만 그것을 이루는 토대가 부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다. 스릴러물로서의 서스펜스? 그렇다기엔 긴장감을 잡으려는 시도가 크리쳐 디자인 말고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이야기의 힘으로 플롯을 끌고 가기엔 인물들이 차정원을 제외하고 극을 이끄는 데 있어 적합하지 못하다. 허점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이걸 총합하면 얕은 영화라는 평이 가능하다. 인물도 다 예상되고. 영화의 핵심 사건도 다 예상되고. 캐릭터들을 기발하게 활용한 것도 아니고. 한국사회의 정치판을 비판하기엔 조직 내부의 알력다툼에 무심하고. 과연 이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덱스터 스튜디오의 CG 기술력만 느껴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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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에 둘러앉아 새해를 맞는 과거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고기를 정성스레 펼치는 칼질로 영화는 시작한다. <커밍 홈 어게인>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은 조심스러운 돌봄의 손길이다. 1997년 쓰인 에세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는, 꼭 문장을 가만가만 읽을 때처럼 소리 없이 앉아 주인공이 누비는 집안을 둘러본다.
아시아계 이민자의 가시화가 어느 때보다도 많은 지금, <커밍 홈 어게인>은 그렇지 못했던 시대의 이야기에 늦은 보상을 하기라도 하듯 영화관에 나타났다. 주인공이 아침 일과를 마치고 식탁 앞에 앉자 카메라는 돌연 뒤를 돌아본다. 혼자 사는 남자인 줄로만 알았던 창래는 순식간에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병하는 아들로서 소개된다.
영화는 제목처럼 집으로 다시, 또 다시 돌아간다. 고기를 손질하고, 야채를 손질하고, 비닐로 꼼꼼히 누르는 손길 사이사이로 그는 어머니가 아프지 않았던 과거를 자꾸만 회상한다. 이건 이렇게 해야지, 저건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다정한 말투와 언제나 편을 들어주는 눈길은 거두지 않는다. 아픈 어머니가 이것저것 혼자 하겠다는 고집을 부리게 되자 그 손길은 창래가 어머니에게 해주는 돌봄의 손길로 변하고, 카메라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근심과 한숨을 지켜본다.
창래는 결국 어머니와 어떻게 이별할지 정하지 못한다. 새해 전 날, 음식을 한 상 차려놓고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해보려 애쓰지만 아버지는 그대로 가부장적이고, 누나는 ‘아픈 엄마’라는 존재에 상심하기만 하고, 엄마는 한 술도 제대로 뜨지도 못한다. 영화는 폭발하고 상실하는 그조차 계속 쳐다보기만 한다.
<커밍 홈 어게인>은 삶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경험과 감정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배우가 연기할 시간을 충분하다 남겨 두는 숏들이 꾸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영화는 그렇게 집을 떠난다. 이민자 가족이 새 삶을 꾸리고 자라났던 집. 한편 영화의 길고 긴 숏들은 그 자체로 집 안에 들어온 유령처럼 가만히 앉아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심히 담아내면 아름다웠을지도 몰랐을 장면들은 원작인 에세이를 아무 각색없이 영상화한 듯 건조하게 담아내는 바람에 관객에게 와닿지 않는다. 영화의 막바지에 폭발해 큰 소리를 내는 창래의 모습은 설정을 잘못한 캐릭터처럼 보일 만큼 갑작스럽다. 한국인 이민자들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다는 특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연민으로 막을 내리는 이야기는 영화가 관객을 떠나고 있다는 감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어머니의 반찬으로만 기억되는 과거는 눈물겹게 감동적일지언정 미래로 가지고 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관객은 집을 지키던 카메라 유령의 느릿한 걸음으로 극장을 나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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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픽션보다 약간의 현실이 섞인 픽션이 더 재밌는 법
댓글부대 (Troll Factory, 2024)
100% 픽션보다 약간의 현실이 섞인 픽션이 더 재밌는 법
개봉일 : 2024.03.27.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범죄, 드라마, 스릴러, 블랙코미디
러닝타임 : 109분
감독 : 안국진
출연 : 손석구, 김성철, 김동휘, 홍경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짚고 갈 것은 <댓글부대>는 실화가 아니다. 영화의 도입부에 이건 실화고,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피하기 위해 익명화했다는 상진의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이는 영화가 상진의 글과 생각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나오는 나레이션일 뿐이다. 영화의 크레딧을 보면 이는 허구라는 안내문이 추가로 나온다.
1980년대 중반, 개인 이용자 간 통신이 가능해진 일명 ‘PC 통신의 시기’가 시작된 이후 약 40년. 통신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여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하게 인터넷을 이용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사이 같은 취미,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 기능은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나와 뜻이 비슷한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으거나 함께 소통하고, 어떠한 사회적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는 등의 순기능을 갖고 있지만 이것이 갖고 있는 단점 또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대표적인 단점으로는 익명화(본인 인증 후 가입을 한다 해도 실제 내 이름으로 활동하진 않으니까),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이야기의 확산(루머), 쉽게 형성되는 군중심리 등이 있다.
온라인상에 수많은 정보와 이야기가 범람하고 있는 시대. 항상 앞서 말한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 <댓글부대>는 이 자주 들어봤을, 살짝 삐끗하면 뻔해질 위험이 큰 주제를 지루하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낸다.
동명의 소설 [댓글 부대]를 원작으로 한 영화 <댓글부대>는 한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가끔은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는 ‘여론 조작 댓글 알바’의 세계를 깊이 파내려 가는 이야기다. 그냥 ‘이 회사 제품 좋아요~', ‘제가 써보니 좋아요~’ 하는 식의 속이 빤히 보이는 댓글 알 바가 아니라 군중 심리를 이용해 여론을 움직이는 댓글부대 청년 3명과 사회부 기자 임상진의 이야기다.
임상진은 모두가 피하는 대기업 ‘만전’의 비리 폭로 기사를 쓰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로 오보 판명이 나며 정직을 당한다. 말이 정직이지 사실상 그 업계에서 매장된 거나 마찬가지고 비리를 제보한 피해자인 중소기업 사장은 죽은 상황. 사장의 장례식장을 찾아간 상진은 직원의 ‘경쟁사의 기술은 우리와 다른 것이며 사장님은 피해의식이 심했다’는 말을 듣고 오보 판정에 이어 두 번째 충격을 받는다. 갈 곳도, 할 일도 없어진 상진은 쇼파에 누워 자신에게 온 욕 메시지들을 천천히 넘겨본다. 그러다 “기자님 기사 오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한 언론학 교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그와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상진의 앞에 나타난 건 나이 지긋한 언론학 교수가 아닌 자신이 온라인 여론 조작을 하는 댓글부대라 주장하는 한 청년이었다. 과연, 이 청년의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현실과 픽션의 적절한 조합, 흥미로운 주제와 높은 몰입도
김성철, 김동휘, 홍경. 젊은 세 배우의 훌륭한 합
극 중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100% 진실보다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진실 같다.”
100%의 진실, 100%의 거짓보다 약간의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믿을만하고 재밌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야기도 100%의 픽션, 100%의 현실보다 약간의 진실이 섞인 픽션이 더 재밌게 느껴지는 법이다. <댓글부대>가 딱 그런 영화다. 너무 비현실적이지도 너무 현실적이지도 않은. 픽션에 약간의 현실을 섞어놓은 느낌을 주는 영화다. <댓글부대>는 2017년에 있었던 촛불 시위,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도둑질,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마녀사냥과 신상 털이, 댓글 부대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속 글, 밈, 갑자기 터진 의문스러운 마약 스캔들, SNS 등을 하나의 장치로 사용하며 이야기의 현실감을 높인다.
그리고 그 현실감 위에 손석구, 김성철, 김동휘, 홍경 배우의 연기력이 얹히니 영화 자체의 몰입도가 훨씬 올라간다. 손석구 배우의 우직한 연기력이야 이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이번 영화에서 강조해서 언급하고 싶은 건 김성철, 김동휘, 홍경 배우다. 어울릴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미지의 배우들인데, 셋 사이의 합이 정말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고 각자 연기력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다고 느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홍경 배우의 연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감정을 막 내뿜는 게 아닌 딱 적절한 수준까지만 끌어왔다 다시 꾹 눌러 담는 표현 방식이 정말 좋았다. <악귀>를 통해 홍경 배우의 연기를 처음 봤을 때, “이 사람.. 곧 내 마음에 들어오겠다..”싶었는데 <댓글부대>를 통해 확실해졌다.
소설 원작과의 차이점
불쾌감은 줄이고 약간의 대중성을 더하다.
소설 [댓글 부대]는 국정원 여론조작 의혹 사건을 모티프로 시작되고, 영화 <댓글 부대>는 한 기업의 여론 조작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소설에 비해 한결 부드럽게 정리되었고 여론 조작의 결과에 죄책감을 느끼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소설에 나왔던 불쾌감을 주거나 논란이 될만한 부분들은 대부분 쳐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소설엔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둥둥 떠다니는데 영화에는 불쾌감이 아닌 의심과 경계심을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엔딩에 대한 호불호
직선이 아닌 돌고 돌아가는 이야기. 흥미롭지만 지루한 느낌도
<댓글 부대>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다.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 게 거짓인지 명확히 제시되지 않으며 사건을 직선적으로 풀어가기보단 사건의 조각들을 천천히 모으며 돌고 돌아가는 느낌이 강하다. 이러한 특징은 영화의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약간의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나는 영화 속 사건들과 비슷한 현실 속 사건들을 떠올리며 영화를 봤기에 개인적으론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빠르고 정확한 전개를 선호한다면 이 영화의 진행 속도가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그리고 <댓글 부대>의 큰 불호 포인트 중 하나, 엔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 물론 나도 엔딩이 아쉽게 다가오긴 했다. 이런저런 조각들을 모아놓고 한순간에 파앗- 흩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영화의 주제를 생각했을 때, 더 좋고 깔끔한 엔딩 아이디어로는 어떤 게 있겠냐고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이 영화의 엔딩은 꽤 괜찮은 편인 것 같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이기 쉬운 만큼 흔들리기도 흩어지기도 쉬운 군중
인터넷 통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예전에 비해 더욱 쉽고, 빠르고, 넓게 인터넷 통신과 그를 통한 소통을 이용하고 있다. 인터넷 통신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극중 인터넷 유료화 시위엔 큰 인원이 모이지 못했고 인터넷 통신이 활발해진 시대엔1600만 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런 소통은 사회적 부당함을 무찌를 수 있게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순간에 해체되거나 누군가를 해하기도 한다. 연예인 마녀사냥이나 일반인 신상 털이 사건, 스캔들이나 찌라시 글에 함께 달려들어 욕하다가도 "아니면 말고" 하며 뒤돌아서 흩어지는 익명의 아이디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면 인터넷을 통한 소통과 여론 형성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위험한 것인지 확 와닿을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다. 게다가 익명성까지 주어지니 이 안에 있을 동안 '나'를 내려놓는 사람들이 참 많다. 자극적인 것에 바로 반응하고 달려드는 사람들. 극 중 댓글부대인 팀알렙은 이들의 심리를 이용한다.
찻탓캇과 임상진이 1인 시위 사건을 이야기하는 장면, 찻탓캇은 1인 시위로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철폐를 주장하는 이용철의 시위를 막기 위해 그의 딸을 온라인 마녀사냥의 사냥감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없애자고 주장하고 있는 한 그의 딸은 억울하게 욕을 먹는다 해도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진행하지 못할 테니 아버지가 시위를 그만둘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한다. 임상진은 '너희 사실 적시 명예훼손이랑 명예훼손이 다른 건 아냐'라고 묻는다. 찻탓캇은 당연히 알고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 뒤이어 '하지만 사람들은 사실적시인지 그냥 명예훼손인지 그런 거엔 관심이 없다.'라고 말한다. 찻탓캇의 이 말은 보통 이러한 자극적 여론 몰이에 달려드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중요한 게 무엇인지 딱히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제대로 이용해 진실과 거짓을 섞어 여론을 조작한다.
가짜 이름의 믿을 수 없는 제보 / 사라진 루머의 유포자
"(제 이름은) 잊어버리기 쉬워요. 너무 평범해서."
찻탓캇은 상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신뢰의 한방을 날리듯 자신의 이름이 '이영준'이라고 말한다. 신분증같이 증명할 만한 것을 내밀진 않지만 지금껏 현실 같은 이야기를 들어온 상진은 영준의 말을 믿고 그의 이름과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해둔다. 하지만 영준은 기사가 나온 뒤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웹 소설 카피 논란까지 생긴다. 이후, 이야기는 어떤 걸 믿어야 할지,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말려들어간다.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글과 카더라들을 보면 대부분 최초 유포자를 찾기 어렵다. 누군가 피해를 보고 사회적인 파장이 일어나도 처음으로 그 글을 쓴 사람, 유포해선 안될 것을 유포한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흔한 이름과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댓글부대에 제보만 남기고 사라진 찻탓캇은 하나의 카더라를 퍼트리고 사라진, 찾을 수 없는 최초 유포자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상진은 찻탓캇이 지어낸 그의 제보를 착실히 옮겼고, 그가 미리 써둔 대본(웹 소설)이 세상에 공개되자 순식간에 정의를 구현한 대기업 저격수가 아닌 망상증을 가진 기레기가 된다. 사람들은 상진이 쓴 글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보이는 건 상진이 사라진 찻탓캇의 글을 카피했다는 것뿐이니까. 잊어버리기 쉬운 평범한 이름의 이영준(찻탓캇), 그는 잊어버리기 쉬운 자신의 이름 대신 더욱 강렬하게 각인될 카피라는 주제를 던져놓고 상진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한 번에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진실
여러 개의 문, 복도가 있는 복잡한 댓글 부대 팀알렙의 집
찻탓캇이 처음 댓글부대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 찻탓캇은 혼자 웹 소설을 쓰고 있고 다른 방에 있는 찡뻤킹과 팹택이 “빨리 와봐!” 하고 소리치며 다급하게 찻탓캇을 부른다. 찻탓캇은 책상에서 일어나 방을 통과하고 또 문을 열고, 긴 복도 같은 부엌을 지나 또 문을 연다. 댓글 부대의 집은 크기에 비해 꽤 복잡한 형태로 되어있고 찻탓캇을 부른 실체인 찡뻤킹과 팹택은 한 번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댓글 부대>의 이야기 진행도 이런 형식이다. 사건에 숨겨진 실체와 진실은 한 번에 드러나지 않고 이야기는 돌고, 돌고, 또 돈다. 보는 이를 계속 헷갈리게 만들던 이야기는 결국 시원하게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진실,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영화의 엔딩, 결말 의미 해석, 관람차
조작 프로세스 글에 달린 조지 오엘의 댓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댓글 부대>는 진실과 거짓을 명확히 구별해 주지 않는다. 엔딩도 그렇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데?"라는 의문이 들것이다. 이는 영화가 남긴 찝찝함을 가진 채 군중 심리, 진실과 거짓, 커뮤니티의 맹점, 각자의 해석 등을 계속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려는 제작자의 의도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이다처럼 범죄자, 대기업 때려잡기! 사회 정의 구현! 을 실현했다면 그건 또.. 멋이 없었을거다. 하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고 답답함만 쌓여있는 상태라면, 다른 이들의 해석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는 상진이 주인공, 만전이 악당이라고 생각한다. 찻탓캇은 실제 만전의 댓글부대 중 한 명이고, 거짓으로 댓글 부대 제보 시나리오를 짠 다음에 그걸 웹 소설 사이트에 미리 올려둔 후, 상진을 자극해 다시 한번 기사를 쓰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카피 논란에 휩싸이게 만들어 사회적인 타격을 줬다고 생각한다. 상진은 처음 찻탓캇을 만났을 때, 찻탓캇의 얘기를 믿지 않기에 녹음기를 바로 켜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찻탓캇은 그런 상진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본인이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고, 누군가는 죄책감을 느꼈고,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 느꼈다.. 하며 어리고 약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이름을 알려주는 것 모두 상진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행위였고 상진은 결국 찻탓캇의 말을 믿었다 뒤통수를 맞는다.
찻탓캇이 말하는 팀알렙의 모습이 나올 때, 그들의 집 창가엔 커다란 관람차와 유원지가 보인다. 보통 이런 시끄러운 유원지 바로 앞에 가정집이 입주하는 경우는 흔치 않고, 반짝이는 관람차는 왠지 꿈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찻탓캇이 말하는 팀알렙의 이야기가 모두 꿈같은 허상, 거짓이라고 느껴졌다. 찡뻤킹이 납치를 당하고 관람차의 불이 꺼진 모습이 나온 후 찻탓캇의 이야기는 끝나는데, 그 이후 상진의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시작된다. 관람차의 불이 꺼졌다는 건 그의 거짓 이야기가 끝났고, 이제 현실의 사건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 느낌이다.
극 중에서 댓글부대 프로세스 글에 '조지 오엘’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이거 올리고 살아계신가요?’라고 적은 댓글이 나온다. 이는 소설가 조지 오웰과 소설 [1984]를 떠오르게 만든다. [1984]는 1949년에 쓰인 오래된 이야기임에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정확히 짚어낸 소설로 정보 기술의 발달로 개개인의 사생활과 신상정보가 쉽게 노출되는 독재 국가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하는 주인공의 윈스턴 스미스가 겪는 사건이 담겨있다. 모두가 국가의 감시를 받고 복종하는 사회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감시를 피해 국가가 숨겨놓은 물건을 사고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키워간다.
<댓글 부대>의 이야기와 결은 다르지만 현대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짚어낸 소설이기도 하고, 어떠한 통제(여론 조작/독재 국가) 안에서도 진실을 찾으려 하는 윈스턴 스미스의 모습이 영화 속 상진의 모습과 닮아있기도 하니 한 번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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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2] (브런치작가/영화리뷰/결말x) 진짜 저스티스리그가 찾아왔다!
잭 스나이더가 하차하면서 자신의 버전을 완성하지 못했던 저스티스 리그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2017년 조스웨던이 완성한 버전은 여러모로 평가가 좋지 못했죠.
이번 HBO max에서 공개된 영화는 한국에서는 Vod로 공개 되었어요.
4시간의 상영시간이 아깝지 않을만큼 완성도 자체는 조금 올라갔어요.
여전히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전 버전에 비해서는 캐릭터 서사가 나아졌고, 액션 장면도 좋아졌어요.
또한 음악감독을 맡은 정키XL의 음악도 영화에 힘을 줍니다.
마지막 전투도 조금 바뀌어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 합니다.
잭 스나이더의 다음 편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래도 좀 더 나은 저스티스 리그를 볼 수 있어 좋네요.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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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리뷰/소개]시간이 흘러도 이 영화가 좋은 이유
#집으로#집으로리뷰#추석개봉영화
추석을 맞이하여 재개봉하는 영화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좋은 영화는 좋은 영화인가 봅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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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메인 예고편
"치명적이게 매혹적이다" 2022년 가장 강렬하고 치명적인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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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밥 로스: 행복한 사고, 배신과 탐욕> 공식 예고편
독특한 헤어스타일, 감미로운 목소리, 낭만적인 풍경화. '참 쉽죠?'로도 알려진 밥 아저씨에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