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2021-12-05 12:20:35
욕망으로 가득찬 '랑종' , 2021 나홍진 감독작품
The Medium
영화 '곡성'에 관한 리뷰는 블로그에는 없지만, 제임스 완의 컨저링 유니버스만큼 좋아하는 나홍진 감독의 프로덕션이자, 슬프고 잔혹한 태국 영화 '셔터'를 만든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연출한 영화 '랑종'이 개봉 초읽기에 들어간 연휴. 원래는 친구와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책을 할 계획이었으나, 포스터를 보자 말할 수 없는 이끌림에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다급히 양해를 구해본다.
'나 오늘 정말 보고싶은 영화가 있는데, 같이 봐줄래? 근데 공포 영화야...'
장르는 공포 영화가 맞다. 공포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관에서 같이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서 거의 혼자 보는 편인데, 사실 이 영화는 혼자 보기에는 좀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기대도 커서였을까. '곡성'을 영화관에서 세 번이나 본, 감독의 미끼를 제대로 물어버린 유약한 나로선 글쎄. 그냥 거부할 수가 없었다. '랑종'은 랑송~이라는 발음이 더 가까운 태국어로, '무당'을 말한다. 영어 제목은 'the medium',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고 악령이 씌인 것을 해결해 주는 '영매'의 직역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포스터를 보니 'every faith will be challenged'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역시, 영화의 스포성이 느껴지는 강렬한 글귀다.
그렇다면, 곡성 2탄 격인 '랑종'은 어떤 영화일까? 우선,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나홍진 감독의 연출과 반종 감독의 촬영은 참 스마트하다. 무대가 태국의 이산이라는 곳으로 옮겨졌지만, 동남 아시아 특유의 스산하고 어두운 느낌과 함께, 한국이 무대였던 '곡성'과 별반 다르지 않을 인간의 욕망들, 가족간의 비밀, 그리고 삐뚤어지리만치 간절한 모성애를 그리고 있다. 영화의 구성은 '블레어 위치'와 '파라노말 액티비티', 그리고 일본 영화 '온다'를 적절히 섞은 것 같은 포맷이지만 - 이 영화의 구성 운운하는 것 자체가 스포일 수 있다!- 그것들을 불식 시키는 "힘"은 내림 무당을 하는 Nim의 싸와니 우툼바라는 배우와, 그녀의 조카 역인 Ming의 나릴야 쿤몽콘켓이라는 배우 (심지어 첫 스크린 데뷔작이라고 한다)의 열연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왕 이렇게 밝힌 거 시원하게 써 보자. 자려고 누웠다가 다시 뭐에 이끌리듯 일어나서 이렇게 기억을 몇 자 남기는 이유는 영화가 강렬해서였다. 곡성이 그랬듯 랑종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소름이 돋는다. 이미 내 머릿 속에는 한 번 더 영화를 보러 가야지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나는 어쨌든 감독의 미끼를 제대로 물었다. 영화는 페이크 다큐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것이 영화 - 허구의 이야기- 라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의 반전인 듯 하다. 그만큼 모든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러웠고, 정말로 동남아 발리 깊은 산중, 혹은 태국의 사원 같은 곳에서 본 듯한 사람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리라. 동남아는 일본만큼이나 많은 사물에 깃든 신을 모시는 듯 하다.
발리가 신들의 섬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그만큼 많은 신들이 있고, 발에 채일 만큼 많은 신밥 - 제물- 과 꽃이 길마다 널브러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는 아름다웠지만, 숲이 우거진 곳들은 한 낮에도 스산했고 밤의 리조트는 더할나위 없이 괴괴했으니. 랑종의 무대가 된 태국의 북동부라는 '이산'도 아마, 그러한 분위기의 동네가 아니었을까. 그런 스산함이 마치 스크린으로 나와 번지는 듯 했다. 영화관 안에서는 그런 풍경에서 번진 잉크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Nim은 원래 언니 Noi가 받으려고 했던 신을 대신 받는 운명에 놓였었다. 그녀가 모시는 신인 바얀은 여성만 허락하여 몸을 싣는 신이며 사람들을 굽어살펴 준다고 나온다. 바얀의 실체는 오로지 세습무인 Nim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는 무당들을 위시한 의식을 통하여 세상에 그 영향력을 미친다. '믿는 자에게 보이고 느껴지는 신'. 감독은 이렇게 첫번째 물음을 던진다.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믿음이 견고한지에 대해.
Noi라는 여성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세습무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삶을 강렬히 원했기에, 정해진 운명을 거슬러 결혼을 했고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아들에 뒤를 이어 남편도 사망하고, 그의 장례식장에서 여러 불가사의한 일들의 시초가 발견된다. Nim과 Noi의 위로는 Manit이라고 하는 오빠가 있으며 그에게는 또한 갓 태어난 아들 Pong이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Ming은 바로 그 Noi의 남겨진 외동딸이며, Nim과 Manit의 조카인 셈이 된다. 장례식장에서 술을 마시고 도박(화투와 같은)을 하는 것을 보니,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실소가 드는 것도 잠시, Ming이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언행을 높인다. 삼촌에게 성적으로 나를 원하는 거 아니냐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러나 그날 밤, Nim이 본 것은, 망자를 응시하는 자다 깬 조카의 모습이었다.
다큐 형식을 빌린 인터뷰가 계속 될 수록, 무당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 Nim과, 거부하여 카톨릭으로 살아가는 Noi/ Ming의 모습이 대조된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씩 삐뚤어져 가는 Ming, 화를 참지 못하고,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며 웃고, 멍하니 있다가 다시금 괜찮아지는 일도 잠시, 회사에 출근한 그녀의 하혈이 시작된다. Noi는 그런 모습이 반복되는 딸을 보고, 자신이 신을 받으려다 거부했던 때를 생각하며, 그녀의 상황이 악화되기 전 신내림을 받자고 한다. 물론 엄마가 생각했던 신은 좋은 신, 동생의 몸에 깃들어 있던, 바얀이라는 신이었다. 하지만 한 순간이라도, 조금만이라도, Nim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을 했더라면, 딸은 먼 길을 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녀의 모성애는 견고하다 못해, 딸의 모든 상황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 참을 수 없이 답답함이 느껴졌다. 왜 하혈일까? 왜 성적인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Ming 에게서 보여줄까 ? 여성의 자궁은 아이를 생산하는 곳이다. 그곳을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상처받게 하는 건, 대를 끊어 가족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보이지 않는 '것'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빙의되기 전 Ming의 꿈 이야기는 무서웠다. 빨간 옷을 입고 피칠갑을 한 사내가 든 칼, 그 아래로 나뒹구는 사람의 머리들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인터뷰는 복선에 불과했다. '무당이 되는 것에 관심 없다'며 철없는 또래의 모습을 부각시킨 초반의 대사도 뒤에 가서는 복선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것'은 도래하고야 말았다. 권선징악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너무나도 잔혹한 방식으로.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악령에게 잠식당한 Ming의 영혼은 Mac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열연은 아름다운 여배우로서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이 그로테스크했다.
... 약 한 시간 정도의 시각, 청각적 혼란이 지나가고 난 후...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질문을 한다. '믿음은 정말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내가 믿고 있는 어떤 절대자의 힘에 대해, 운명에 대해, 믿는 만큼 사람은 강해지는 것 같다. 믿는 만큼 사람은 때로, 우매해지는 것 같다.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는 피비린내 나는 모성애, 그리고 신가물, 나만은 피해가고 싶은 영매라는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들.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인해 빠져든 카톨릭 교회의 형광색 십자가가 어지러워 보였다.
인간의 믿음 뒤에 숨겨진 추악한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가끔 그것들을 보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려 한다. 직면해 보면 별 거 아닌 거일 수도 있는데. 나에게는 이 영화가 공포라기 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가족 사이의 타부에 대하여,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슬프게 가라앉는 물안개마냥 돌 날아오듯이 질문이 던져지니까. 시각적으로 신선하게 놀라우니까. 촬영 감독들은 리얼리티를 위해 시나리오가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사실감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며칠 내로 한 번 더 보러 가야지. 그럼 또 다른 것들이 보이고 이 글도 조금 더 다듬을 수 있겠지. 백중이 있는 음력 칠월 첫날에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길거리에서 갈곳 없는 영혼들을 달래주려 종이 돈을 태우고 향을 피우는 사람들이 조금 남달라 보였던 동남아에서의 오늘.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친구와 손 꼭 붙잡고 볼 수 있어서 행복했던 날. 첨부할 사진은 많은데 일단 먼저 글부터 올려보는 치기.
- 1
- 200
- 13.1K
- 123
- 1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