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4-12-06 09:29:35
각자가 원하는 걸 얻었다
- <히든 페이스>(2024)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기 위해 어디까지,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 자신의 노력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 과정은 무척 어렵다.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어려운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가장 쉽게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높은 지위나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의 도움이 있다면 그 과정이 훨씬 수월해진다.
영화 <히든 페이스>는 세 인물이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진 자원을 바탕으로 기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군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군가는 상대방의 감정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상대를 이용한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각자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을 때 그 얼굴에 나타나는 진실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닐까.
[첫번째 감정] 성진의 욕심

주인공 성진(송승헌)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자라난 인물이다. 그는 고생 끝에 지휘자의 직업을 얻었지만, 더 큰 성공을 향한 욕구가 여전히 강하다. 성진은 차분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딱딱하고 차가운 면이 있다. 아내인 수연(조여정)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감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두드러진다. 아내의 살가운 접근에도 성진의 반응은 냉담하며, 그 미소조차도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성진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아내 수연의 집안이 가진 힘을 은근히 이용하려 한다. 이런 모습은 영화 전반에 걸쳐 은밀하게 드러나지만, 성진의 얄팍한 속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아내 수연이 사라지고 나서 곧바로 낯선 여자 미주(박지현)에게 빠져들 때이다. 수연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얇고 가벼운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성진의 마음은 미주와의 관계를 통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성진의 얄팍한 욕망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그는 현재의 위치에 안주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지만, 사실 수연의 집안의 지원이 없이는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의 무기력함은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더 짙어진다.
[두번째 감정] 미주의 사랑

미주는 어린 시절 수연을 만나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같은 성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그 사랑을 공개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오랜 세월 수연을 위해 헌신해왔다. 약한 노예와 주인의 관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 중반 이후 미주의 행동들은 그녀의 사랑이 인정받지 못했을 때의 폭발적인 반응처럼 보인다. 마치 그 인정받지 못한 감정을 성진에게 풀어놓는 듯한 그녀의 행동은 버림받은 사람의 일탈처럼 느껴진다.
영화 초반의 미주는 비밀을 품고 있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의 비밀은 대부분 수연이 가진 비밀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관객에게 놀라움을 준다. 이후 미주는 수연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성진을 이용한다. 성진이 아내 수연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용하듯, 미주 역시 수연을 상처 주기 위한 도구로 성진을 활용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미주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살짝씩 보여주면서 이 인물이 가진 의도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영화는 미주가 가진 진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그 내면을 알기 어려운 인물이다. 미주라는 인물의 서사와 미스터리함은 결국 그녀가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 깊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관객은 그녀를 쉽게 판단할 수 없고, 그 점이 이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세번째 감정] 수연의 자신감

수연은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수연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수연은 하나도 잃은 것이 없다. 중반부에서 그녀가 모든 것을 잃을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연이 그렇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인물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그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진과 미주는 수연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으며, 완전히 그녀를 밀어낼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은 수연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각자가 원하는 것을 취하며 살아간다. 수연은 자신의 의도를 철저히 감추고 성진과 미주를 이용하면서 모든 것을 조종한다. 마치 악마처럼 보이는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며,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취하며 살아간다.
고급스러운 치정극
영화 <히든 페이스>는 고급스러운 치정극이다. 아름다운 화면과 잘 짜인 집의 구조는 이 영화의 중요한 매력 요소 중 하나다. 집의 독특한 구조는 숨겨진 방과 한쪽만 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 흥미롭게 보여진다. 어쩌면 그 특이한 집의 구조는 각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인물관계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쪽에게만 그 관계의 진실이 보이는 관계, 그러니까 숨겨진 얼굴을 힘을 가진 한 쪽만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 중 관객이 응원하고 싶은 인물은 없다. 모두가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눈이 먼 인물들이고, 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조종하는 사람은 수연이다. 그래서 세 인물은 서로의 나쁜 의도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살아간다. 결국에는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그들의 이야기는 비극인지 희극인지조차 모호해진다.
특히 미주 역을 맡은 박지현 배우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인다.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을 잘 표현하고 있고, 어떤 일이든 다 꾸며낼 수 있을 것 같은 알 수없는 느낌을 잘 살렸다.
범죄와 치정극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히든 페이스>는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이다. 각자의 욕망 속에서 벌어지는 심리전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는 관객을 몰입하게 만들며, 그들 사이의 긴장감이 영화 내내 유지된다. 당신도 이들의 숨겨진 얼굴을 확인해보고 싶은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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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긴 예고편 속 고가의 장난감들, <해피엔드>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피엔드 Happy End, 2017 | 프랑스 외 | 드라마 | 107분
감독: 미카엘 하네케
아주 긴 예고편 속 고가의 장난감들, <해피엔드>
아주 긴 예고편
난 엄마한테 완전 질렸어. 징징거리면서 모든 사람을 열 받게 해.
아빠는 벌써 몇 년 전에 떠났어. 그는 그걸 견디기 힘들었나 봐.
이젠 내가 그걸 감당해야 해.에브는 엄마의 우울증약을 먹은 햄스터가 죽어가는 모습을 sns에 올리며 말한다. 아주 시니컬하게 자신에게 닥친 현 상황을 제시한다. 소파에 누워 발작을 일으키는 엄마를 휴대폰에 담으면서 "구급차 불러야겠다."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계획적으로 엄마를 잃을 예정인 아이가 내보인 이 태연한 행위는 <해피엔드>가 앞으로 써 내려갈 충격적인 이야기의 예고편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브는 드디어 엄마에게서 벗어나 아빠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 대저택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건 모두 누리며 살 수 있는 로랑 가문에 드디어 입성한 것이다. 부가 아닌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해 아빠를 따라갔지만, 에브는 그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아빠와의 공간은 허울만 좋은 곳이었고 아이는 여전히 '혼자'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로랑 가문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 에브. 치매 환자 할아버지(조르주), 교양만 떠는 고모(앤), 실속 없는 반항아 사촌(피에르), 거짓말쟁이 아빠(토마스), 멍청한 새엄마(아나이스)에게 에브는 잠시 있다 갈 손님에 불과했다. 엄마의 죽음으로 로랑 가문에 정식 일원으로 들어왔음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출처: 영화 <해피엔드> 스틸컷
그래서 에브는 핸드폰을 들고 로랑 가문의 몰래카메라를 자처한다.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아이는 직접 로랑 가문의 감춰진 사실을 들춰내며 자신의 삶에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깨닫는다. 할아버지는 기회만 되면 자살을 계획하고, 고모는 오로지 '나'의 세계를 완벽히 구축하기 위해 가족은 안중에도 없다. 고모의 아들은 매번 말썽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아빠는 끊임없이 다른 사랑에 빠져버리고, 새엄마는 부르주아 가문의 며느리에 만족하며 더 이상의 삶의 고민을 끝낸다.
그토록 원했던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은 에브의 손에 의해 진실이 폭로되며 산산조각 난다. 안타깝게도 아이가 본 로랑 가문의 민낯은 너무나 익숙한 그림이었다. 징징거리던 엄마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고, 죽은 햄스터를 손으로 찔려보던 자신과 소름 돋게 똑같았다. 그들과 다른 선상에 있는 줄만 알았던 에브는 사실 로랑 가문의 3세대 공주였다. 이런 잔인한 깨달음에도 영화는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어주지 않는다. 쉽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끝이 없는 미로에 갇힌 건 관객이 아니라 로랑 가문이다. <해피엔드>의 출구 찾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사건이 아닌 인물들의 삶만 들여다봐도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 들 것이다. <해피엔드>는 뚜렷한 해결책도 없는 예고편을 아주 길게 만들고도, 어둠에 가려진 진실과 비밀을 냉철하게 제시한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극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현실이 궁금하다면, 추천한다.
출처: 영화 <해피엔드> 스틸컷
비싼 장난감의 탈출
로랑 가문에서 인간적인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덜 비정상적인 인물을 찾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가족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지 파헤치는 에브도 사실 그들과 같은 범주에 있는 인물이니까. <해피엔드> 속 로랑 가문은 모두 고가의 장난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 더 많은 이의 눈에 모범이 되어야 하고, 기품 있게 전시되어야 하며, 가족의 비극은 또 하나의 우아한 에피소드가 돼야 한다. 강박적인 그들의 가치는 아무리 땅바닥에 내리 꽂혀도 살아남는다.
그것이 비싼 장난감을 자처하는 그들의 무시할 수 없는 가치이자 힘이다.
할아버지는 제대로 큰 자식 하나 없는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치매란 강력한 질병을 갖고 있음에도 그는 가족이란 '거대한 전시장'에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이라곤 아무짝이 쓸모없는 돈뿐이다.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고 자식들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과거 병상에 누워있던 아내를 직접 하늘나라에 보낸 그 강력하고도 유일했던 힘은 홀로 로랑 가문의 마스코트로 남게 되면서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는 저녁 식사 때마다 싸우는 딸과 손자는 물론이고, 머저리인 아들의 바람기와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두려움에 떠는 손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며느리를 보며 죽음을 갈망한다. 할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려 드는 손자의 손가락을 부러트리는 것도 온몸이 묶인 채 제일 앞 좌석, 1열에서 감상해야 했다.
출처: 영화 <해피엔드> 스틸컷
에브는 엄마가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아빠가 결국 자신을 버릴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비싼 몸값으로 책정된 아이는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 할아버지가 매번 실패했던 것처럼 에브 역시 자유로운 삶을 가질 수 없다.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버려진다 하더라고 도망갈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의 삶은 자신의 암묵적인 미래로 점쳐진다.
"모두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란 아빠의 말에 이미 신뢰를 잃은 에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비극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할아버지를 보면서 어떻게 자신의 다음 스텝을 구상할까. 에브는 적어도 그보다 더 많은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다. 어릴 뿐더러, 몰래 카메라 경험으로 보고 배운 것이 넘쳐 난다. 폭력적이기만 했던 학습 효과가 얼마나 클까. 사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분명한 건 바다로 휠체어를 밀며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보고 난 후에 벌어지는 에브의 행동이 <해피엔드>의 진정한 끝맺음이 될 거란 점이다. 그러나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대저택이 있는 한 로랑 가문에선 쓸모없는 장난감은 있을 수 없다. 가진 만큼 더 필요한 게 그들이니까.
긴 예고편인 <해피엔드>가 결코 해피엔딩을 그릴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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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욱이 사랑한 말러의 음악
영화감독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라고 하면 여러분은 누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구스타프 말러'를 뽑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이름은 생소할지 몰라도 그의 음악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특히 국내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 말러의 음악이 중요한 장치로 등장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는 감정적 깊이와 철학적 주제를 담은 교향곡으로 유명한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입니다. 그는 '교향곡 제5번' 등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성악을 결합한 작품으로 독창성을 드러냈습니다. 생전에는 지휘자로 주목받았지만, 그의 음악은 후대에 재평가되어 현대 클래식 음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박찬욱을 포함해 마틴 스콜세지, 짐 자무쉬, 알폰소 쿠아론 등 영화 감독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럼, 말러의 음악이 흐르는 영화를 관람하러 떠나볼까요?
**말러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가 10월 24일 (목)에 씨네픽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될 예정이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헤어질 결심>, 박찬욱
줄거리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
담당 형사 '해준'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와 마주하게 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남편의 죽음 앞에서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 '서래'. 경찰은 보통의 유가족과는 다른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린다. '해준'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 탐문과 신문, 잠복수사를 통해 '서래'를 알아가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낀다. 한편, 좀처럼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서래'는 상대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준'을 대하는데….
진심을 숨기는 용의자 용의자에게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는 형사 그들의 <헤어질 결심>
<셔터 아일랜드>, 마틴 스콜세지
줄거리
보스턴 셔터아일랜드의 정신병원에서 환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방보안관 테디 다니엘스는 수사를 위해 동료 척과 함께 셔터아일랜드로 향한다. 셔터 아일랜드에 위치한 이 병원은 중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를 격리하는 병동으로 탈출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식 셋을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여인이 이상한 쪽지만을 남긴 채 감쪽같이 사라지고, 테디는 수사를 위해 의사, 간호사, 병원관계자 등을 심문하지만 모두 입이라도 맞춘 듯 꾸며낸 듯한 말들만 하고, 수사는 전혀 진척되지 않는다. 설상가상 폭풍이 불어 닥쳐 테디와 척은 섬에 고립되게 되고, 그들에게 점점 괴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브래들리 쿠퍼
줄거리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레너드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 콘 번스타인의 평생에 걸친 인연과 사랑을 그린 이야기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
줄거리
세계 각지에서는 폭동과 테러가 비일비재해 지고, 대부분의 국가가 무정부 상태로 무너져 내린 가운데, 유일하게 군대가 살아남은 국가 영국에는 불법이민자들이 넘쳐 난다.
한편, 아들이 죽은 후,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 따위는 모두 잃어버린 남자 ‘테오’ 그의 앞에 20년 만에 나타난 전 부인 ‘줄리안’은 기적적으로 임신한 흑인 소녀 ‘키’를 그에게 부탁한다.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눈 앞에서 마주한 ‘테오’. 그는 ‘키’가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인간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만 하는데…
인류 종말의 끝, 기적이 다시 시작된다!
<커피와 담배>, 짐 자무쉬
줄거리
시끄럽고 허름한 카페, 로베르토와 스티븐은 커피에 중독되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도 연신 진한 커피를 들이켜댄다. 커피와 담배에 대한 예찬으로 일관된 선문답은 희한하게도 계속 이어지고 로베르토는 어이없게도 스티븐의 치과 약속을 대신 가주려고 하는데….
<타르>, 토드 필드
줄거리
무대를 장악하는 마에스트로, 욕망을 불태우는 괴물,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 리디아 타르. 이 이야기는 그녀의 정점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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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명적 세계에서 몸부림치는 실존, <파닥파닥> 1편
세상에 내던져진 삶, 그 숙명적 힘
나는 나를 선택한 적이 없다. 무릇 생명체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말 그대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부모도, 형제자매도, 사회 계급도, 종적 위치마저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채 태어난다. 하물며 태어나느냐 마느냐 라는 중대한 문제조차 어느 것 하나 우리 손으로 고른 적 없는 세상. 그 속에서 우리를 영문도 모른 채 덜컥 주어진 삶을 사수하도록 몸부림치게 만드는 것은 본능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무책임한 세상이다. 우리의 삶에서 중대한 요소를 바꿀 수도 없이 못 박은 채 어떻게든 살아가라고 떠밀고 있으니. 인간은 생선이 될 수 없고, 생선도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 마땅한 이치. 생명체는 모두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뒤집을 수 없는 거대한 서열의 흐름 속에 몸을 내맡긴 존재다. 애초부터 공평하지 않은 세상이란 말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죽음이란 또 하나의 필수적인 귀결이다. 삶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죽음. 역설적이게도, 때때로 우리는 갑작스레 맞닥뜨린 죽음 앞에서 비로소 삶의 가치를 상기한다. 끈덕지게 달라붙어 피할 수 없는 숙명. 우리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적 힘 아래에 놓여 있다. 여기, 파닥거리는 조그마한 삶이 하나 있다. 땅 위에서 기껏해야 몇 센티 튀어 오르는 것이 전부인, 아주 미미하고도 거대한 움직임이. ‘파닥파닥’은 하찮고 작은 생명체가 삶을 향해 외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모든 공간에 도사리는 불평등성
자유롭게 광활한 바다를 헤엄치던 고등어. 그가 붙잡혀 들어온 수조 트럭은 우겨넣은 생선 더미로 숨쉬기조차 어려울 만큼 답답하다. 고등어가 마침내 당도한 곳은 난생 듣도 보도 못한 직육면체의 세상. 수직으로 정렬된 유리창은 더할 나위 없는 감옥 그 자체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닿을 수 없는 잔인한 희망고문에 불과하다. 바다와 수조 안. ‘파닥파닥’ 속에서 공간의 대치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장면 1> <장면 2>
횟집이야말로 ‘종’적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공간이다. <장면 1>은 사람의 시점에서 바라본 평범한 횟집의 풍경이다. 가볍게 들러 신선한 메뉴를 고르고, 순식간에 손질되어 식탁 앞에 놓인 음식을 집어먹는 사람들. 그들에게 횟집은 소주 한 잔도 곁들이고, 왁자지껄 떠들 수 있는 즐거운 식사의 장소다. 반면 수조 안에 갇힌 생선들의 시선으로 본 횟집은 <장면 2>, 참혹한 폭력으로 얼룩진 생지옥이다. OST ‘악몽’과 함께 추상적인 2D 그림체로 펼쳐지는 뮤지컬 시퀀스는 고등어가 느낀 절망적 정서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손짓 한 번에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망에 붙잡히면 저항할 새도 없이 물 밖으로 들리는 생선. 다른 이의 핏물이 채 가시지도 않은 도마 위에 오르면, 순식간에 머리를 쑤시고 배를 갈라오는 칼. 그리고 이 순간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하는 수조 속 생선들.
보통 생선을 손질하는 모습은 횟집에서나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흥미롭게 구경하거나, 또는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이 광경은 당사자인 생선의 시선으로 전환하자마자 연쇄살인범의 끔찍한 살해 장면을 보는 것만큼 충격적인 사태로 다가온다. 생선을 손질하는 현실적인 장면이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빌려 포착되면서, 카메라는 이 행위에 담긴 폭력성을 뚜렷하게 조명한다. 카메라는 마치 우리더러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손질이 아니다. 끔찍한 살해다.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것은 음식이 아니다, 찢어진 살점이다, 라고. <장면 1>과 <장면 2>로 드러나는 ‘횟집’을 둘러싼 대조적인 입장 차이를 통해, 영화 ‘파닥파닥’은 익숙하고 평범한 공간이 내가 속한 종적 위치와 서열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지점을 상기시킨다.
<장면 3> <장면 4>
아이의 짓궂은 장난으로 작은 관상어가 있는 어항에 빠지는 고등어. 관상어들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침입자를 향해 겁 없이 대들다가 잡아먹히고 만다(<장면 3>). 힘과 크기의 차이가 압도적인 상대를 두고 그들이 기고만장했던 이유는 바로 인간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횟집과 수조, 그리고 바다를 아울러 정점에 서 있는 최상위 포식자는 인간이다. 이들에 의해 어항 속 물고기와 수조 속 생선의 서열은 기존의 생태계와는 다른 구조로 재정립된다. 보기에 예쁘다, 맛이 좋다 등등 그들만의 잣대로 종류를 구분하고 생사의 서열을 부여하는 최상위 포식자의 막강한 권력. 물때가 낀 삭막한 수조와는 대조적으로 수초와 장식품으로 꾸민 어항은 그 공간 자체로 불평등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똑같이 갇혀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신세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수조 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장면 4> 속, 점호하듯 정렬해 서 있는 생선들, 프레임 아래쪽에 위치해 위를 올려다보는 그들의 모습은 이미 그들이 권력 관계에서 어느 쪽에 위치해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통제하고 수수께끼로 상벌을 내리는 올드넙치는 수조 안의 또 다른 상위 포식자다.
“어떻게 우리랑 올드넙치 님이랑 같다고 생각할 수 있어. 애초에 노는 물이 다른데.”
그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연산 출신’이라는 거짓말이다. 태어나길 인간의 양식장 속에서 나고 자라 수조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양식장 출신 생선들. 그들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바다를 동경하며 자연산 출신 생선을 우러러본다. 이후 올드넙치의 거짓말이 폭로되고 고등어가 진짜 자연산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 그가 가진 권력과 발언권은 고등어에게로 기운다.
결국 바다와 횟집, 어항과 수조, 그리고 그 좁디좁은 수조 안마저 끊임없는 서열 가르기와 차별이 당연한 세상이다. 영화 ‘파닥파닥’ 속 모든 공간에는 해소될 수 없는 불평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누구도 자신의 서열을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나고 보니 양식장이었을 뿐인 양식장 출신 생선들. 마찬가지로 우연히 바다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전부인 자연산 고등어. 마음대로 바꿀 수도, 뒤집을 수도 없는 서열이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좌우한다. 정해진 태생의 한계가 우리의 권력구조를 정립해버리는 것이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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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밤의 이별
재밌는 영화와 이야깃거리가 많은 영화는 엄연히 다르다. <미드소마>는 100퍼센트 후자인 영화로, 재밌는 영화는 사람들이 어떤 영화냐고 물을 때 “직접 보길 추천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영화들은 선뜻 아무에게나 보라고 추천하기도 어렵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관에서 굉장히 몰입해서 이 영화를 봤는데 그럼 재밌었던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보다는 흥미로웠고, 신기함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정리하기 위해 적어 본다.(내용 감상에 중요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제가 헤어짐을 겪은 뒤 이 내용을 구상했는데, 그 헤어짐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었다기보다는 그때 겪었던 감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죠.” - 아리 애스터
가장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이별의 전조는, 많은 경우 자신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보인다. 영화 초반 전화 속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대니의 친구는 크리스티안이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고 같이 나눠질 수 있는 사람인지 되풀이 해 묻지만 대니는 회피성 대답만 반복한다. 사실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가 겪고있는 정신적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또 하나의 상실을 겪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집요하게 영화는 크리스티안이, 정서가 불안한 대니가 절대 의지할 수 없는 못 미더운 사람이란 표식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난 크리스티안이 ‘나쁜 애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 기준에서 크리스티안 정도면 그냥 보통 인간이다. 그의 언행 중 무엇도 진심이 아니지만 그럴싸한 연애의 껍데기를 흉내내며, 공허한 관계를 몇 년 간 이어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대니의 고통은 비슷한 종류의 사건을 겪어보지 않은 인간들이 헤아리고 공감하기 힘든 종류다. 하긴, 어떤 종류의 고통인들 안 그렇겠는가만은. 대니와 크리스티안이 헤어지게 된 건 누군가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다. 대니가 가족을 잃었을 때 그들은 이미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돼 버린 것이다. 종종 크리스티안을 빤히 바라보는 대니의 눈빛이 이야기 한다. 그들의 관계는 이미 종료 돼 있다고.
영화 내내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플로렌스 퓨의 울음을 참는 혹은 울기 직전의 표정.
영화 속에서 거행되는 호르가 마을의 신성한 의식은 그 자체로 이별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정리하는 과정이다. 관계의 상실을 대면하기 직전, 오래된 연인들은 징조를 무시하고, 서로의 존재가 가진 관성 때문에 망설이고, 혼자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그러다 차츰 시간이 흘러 깨어진 관계의 모습이, 더 이상 못 본 척 할 수 없을 정도로 한여름의 햇빛처럼 너무 선명해지면, 모든 것을 끝내고 감정을 정화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거다. 물론 그 사람을 태운다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오랜 연인들의 평범한 이별 이야기다. 아름답고 찬란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하나하나 돌아보면 때로는 엽기적이기도 했던 관계에 종말을 고하는 그 순간을 포착한, 평범한 이별. ‘태어나기 위해서 죽는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관계에 종말을 고하는 그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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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친 관음증에 가려버린 야심 찬 재해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노마 진(릴리 피셔)'은 정신병에 시달리던 엄마에게 학대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후 그녀는 아버지가 할리우드에서 일했다는 말 한마디를 간직한 채 보육원에서 지내게 되고, 노마는 배우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꿈을 키워 나간다. 이후 염색한 금발 머리와 섹슈얼리티가 두드러지는 외모를 무기 삼아 '마릴린 먼로(아나 데 아르마스)'로 거듭난 그녀는 스타덤에 오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공허함 때문에 먼로는 남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아울러 스타로서 화제의 중심에 서야 하는 독특한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그녀는 마릴린과 노마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앤드류 도미닉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아나 데 아르마스가 마릴린 먼로를 연기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블론드>는 개봉 전부터 숱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제7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이라는 점과 아나 데 아르마스의 높은 싱크로율은 기대를 키우기에 충분했다. 반면 원작인 조이스 캐럴 오츠의 동명 소설이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라는 점을 두고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미국의 영화 평론가 그레이스 랜돌프가 이 작품을 "전기 영화인 척하는 강간 판타지"라며 평론을 거부했다. 마침내 공개된 <블론드>는 이처럼 상반된 기대와 우려가 모두 옳았음을 보여준 영화였다. 시대의 상징을 재해석하려는 감독의 야심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지만, 야심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아쉬움을 넘어 불쾌한 대목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론드>는 자칫 단순히 금발의 섹스 심벌이라는 이미지에 갇힐 수 있는 마릴린 먼로를 더욱 입체적인 인간상으로 그려내려 한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과 루머가 너무나도 유명한 만큼 과감한 접근법을 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빛나는 할리우드 스타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며 먼로를 치열한 정체성 싸움을 펼치는 역동적인 캐릭터로 재해석하려 했던 야심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마릴린 먼로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뿌리 없이 자란 꽃과도 같은 그녀의 괴로움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정신병에 걸린 엄마와 함께 지난 유년 시절을 보여주면서 배우 이전에 자연인 '노마 진'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자세히 묘사한다. 할리우드에서 일한다는 아버지는 사진만으로도 엄마의 폭행과 학대에 시달리는 어린 노마에게 큰 위안이 된다. 더 나아가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그녀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안정되고 따뜻한 가정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동시에 영화는 마릴린 먼로라는 스타와 노마 진이라는 자연인의 간극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 무섭게 열광하는 레드카펫의 군중들과 카메라를 비추는 모습. 그 유명한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는 먼로를 찍는 사진기들까지. 마릴린 먼로에 가까워질수록 노마 진이 사라지는 삶, 유명세를 감당하고 시대의 심벌로 거듭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커리어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 LA를 떠나 뉴욕으로 향하는 그녀처럼 노마 진의 흔적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여성을 역으로 포착할 수도 있다. 이처럼 <블론드>는 어릴 적 트라우마, 스타로서 소비되는 이미지, 이중적 생활로 인한 불안 심리 상태에 초점을 맞춰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새로이 구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녀의 염문과 가십은 단순한 스캔들의 영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노마 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강조한다. 그녀가 여러 남편을 '아빠 Daddy'라고 호칭하는 것이 단적이 예시다. 노마 진은 거듭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쫓고, 그 아버지와 행복할 가정을 이룰 아이에게 집착하며 공허한 자신의 뿌리를 채워 넣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마릴린 먼로의 가십을 항상 날아갈 듯한 희망과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의 이미지로 대비시켜 보여준다. 스타가 아닌 한 개인의 시점에서 제시하기에 그 명암은 더 짙다.
작중 처음으로 마음의 안식처로 생각했던 '찰스 채플린 주니어(제이비어 새뮤얼)'와의 관계는 사랑하던 아이를 포기해 두고두고 그녀의 원죄가 되어 버리는 낙태로 귀결된다. 그녀가 가장 화려한 스타로 발돋움하는 찰나에, 또 아버지를 만날 거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순간 마주해야 했던 '조 디마지오(바비 카나베일)'의 프러포즈는 노마를 학대받던 어린 시절로 되돌려 보낸다. 극작가인 '아서 밀러(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정작 아서가 그녀의 사연을 영화 시나리오의 한 조각으로 활용하는 사실을 알게 되자 깊이 좌절한다. '존 F. 케네디(카스파르 필립손)'와의 루머를 풀어내는 대목은 마릴린과 노마 사이에서 결국 체념해버린 그녀의 모습을 암시하듯 고통스럽고 기괴하다.
그렇기에 원작 제목 <블론드 Blonde>를 고수한 것 역시 도미닉 감독의 야심이 집약된 선택으로 보인다. 마릴린 먼로가 금발로 염색해서 이미지를 확립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는 통념과 달리 마릴린 먼로로 변모하는 과정 이면에 숨어 있던 심상을 금발에 투영한다. 섹슈얼리티한 이미지의 구축보다는 노마 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노마 진으로 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필사적인 노력을 제목에 담는다.같은 맥락에서 흑백과 컬러를 오가고, 현재 영화 제작 시 사용되는 대부분의 화면 비율을 한 번 이상 활용하며, 심리 변화에 따라 화면이 늘어지거나 휘어지는 연출도 눈에 띈다.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노마 진과 마릴린 먼로의 내면을 영상으로 풀어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감독의 야심이 시청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느냐다. 여기서 <블론드>는 패착을 두었다. 다만 영화 속 마릴린 먼로와 실제 먼로의 삶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원작자인 조이스 캐롤 오츠부터 자신의 책이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라고 공언한 만큼, <블론드>의 내용이 실제 사건과 다르다고 비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수 있다.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창립 스토리를 다룬 <소셜 네트워크>가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는데도 실제 사건과 여러 차이점이 있다는 것, 그런데도 봉준호나 타란티노와 같은 감독들이 이 작품을 201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작품 속 묘사가 실제 사건과 다를 경우 그 이유는 제시되어야 한다. <소셜 네트워크>가 실제와 다르게 표현한 대목은 마크 저커버그라는 캐릭터가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지 않으면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고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 덕분에 세상 모든 사람들을 연결해줄 페이스북이라는 거대한 SNS를 탄생시킨 주인공의 주변에 정작 친구도, 연인도, 동료도 남아있지 않는 아이러니한 엔딩의 비극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소셜 네트워크'라는 제목의 이중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데 톡톡히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블론드>는 실제와 달라야 하는 그 이유를 보여주지 못했다. 영화는 아버지와 가정의 부재가 남성들과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라는 캐릭터의 고통을 더 과장하고 그녀의 내적 혼란을 부추겼다. 실제로는 없었던 사건인 먼로의 낙태가 스토리 라인에 삽입되고, 연인 관계가 아니었던 남성들과의 관계나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적잖은 분량을 부여받은 것은 극적 전개를 위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을 보여주는 방식은 영리하지 않다. 2시간 30분이 넘는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각 에피소드 사이에서 널뛰는 먼로의 감정선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의 부재와 불우한 어린 시절이라는 한 원인에서 모든 이야기가 비롯되었다는 단순한 불행 포르노를 답습하는 데 그친다. 그 결과 왜 먼로가 몇십 년 동안 그토록 불안정한 상태여야 했는지를 전혀 납득시키지 못한다.
더 나아가 마릴린 먼로를 소비해 왔던 기존의 시각을 비판하면서, 정작 감독 본인도 같은 행태를 반복하는 내로남불에 빠지고 만다. 영화는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카메라의 압박, 그녀를 착취하는 영화 업계 사람들의 무자비한 태도, 그녀를 성적으로 소비하고 활용하는 언론과 대중들을 마치 굶주린 괴물처럼 묘사한다. 결국 먼로의 내밀한 이야기를 드러내어 결과적으로 그녀를 자극적으로 탐닉한 이들이 한 여성을 비극으로 몰고 간 과오를 비판하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영화는 먼로가 캐릭터를 재해석해서 원작자인 아서 밀러조차 깨닫지 못했던 캐릭터의 이야기를 보충하는 장면처럼 숱한 스캔들의 주인공이기 이전에 연기에 진심이었던 여배우의 모습도 단편적으로나마 제시한다.
문제는 <블론드>의 시점도 먼로에 대해 마찬가지로 선정적이고, 소비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관음증적인 앵글과 시선을 통해 집중적으로 포착된 마릴린 먼로의 사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그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물로 그려낸다는 인상을 준다. 또 그녀가 단지 성적인 존재로만 남겨졌다는 식의 묘사 역시 불쾌함을 남긴다. 그래서 이러한 연출에 대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해명과 반론은 케네디와 먼로의 만남 장면처럼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불필요한 대목에 힘을 준 순간 의미를 잃어버린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그저 불편하고 찝찝할 뿐, 재해석의 의도나 야심은 작품을 곰곰이 따져보지 않는 한 와닿지 않는다. 그렇게 넷플릭스 <블론드>는 그 모든 고통을 표현해 낸 아나 데 아르마스의 열연만 남긴 채 막을 내린다.
P(Poor, 형편없음)
야심 찬 재해석에 절제의 미덕만 갖추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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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시록 | 용두사미로 끝난 종교 미스터리 스릴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본질을 놓친 종교 미스터리 스릴러
관점에 따라 종교의 정의는 달라지지만, 크게 두 가지의 공통된 조건은 꼽을 수 있다. '초월적 존재'와 '직관'이다. 인간과는 다른 초월적 존재나 현재 살고 있는 세상과는 별개인 초월적 세상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에 대한 직관적 경험을 토대로 믿음을 갖는다는 것. 이때 주관적인 경험이 여러 차례 반복되거나, 여러 사람에 의해 객관적으로 진술 또는 관찰될 수 되는 경험이나 사건이 있다면 이를 종교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정의를 따르면 종교는 일반 사회, 세속과 긴장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종교적 경험이 본질적으로 초월적인 존재와 세상의 질서와 규칙에 근거하는 한, 일반 사회의 범과 규범에 어긋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속의 관점에서는 시민적 합의 대신 초월적 존재에 근거하는 종교적 규범이나 질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유럽이나 중동에서 이슬람 전통과 민주주의 체제가 쉽사리 융화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계시록>은 바로 이 간극과 긴장 상태에 주목했다. 사회의 규칙과 다른 차원의 질서 간에 존재하는 갈등을 한 성범죄자를 추적하는 목사와 형사의 스릴러 내에 녹여낸다. 문제는 종교적 소재를 다른 메시지를 꺼내기 위한 도구로만 소비하는 연상호 감독의 고질병이 도졌다는 것. 그로 인해 <계시록>은 종교적 통찰과 메시지도, 미스터리 스릴러다운 장르적 쾌감도 놓치고 말았다.
종교 vs 사회
<계시록>의 전반부는 예상외다. 그간 연상호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캐릭터 개개인의 서사를 다루는 데 미숙했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정이>, <선산>에서도 반복되는 문제였다. <계시록>은 다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제작자로 합류한 효과인지는 몰라도, '성민찬'(류준열)과 '이연희'(신현빈)의 내면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긴장감을 쌓아 올린다. 그 덕분에 두 주인공이 속한 전혀 다른 세계도 직관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민찬의 세계는 종교적이다. 계시를 따르면 현실 문제가 해결되는 경험이 반복된다. 딸이 실종됐다는 전화를 받은 민찬은 교회에 방문했던 성범죄자 '권양래'(신민재)를 범인으로 의심하며 그의 뒤를 밟는다. 미행을 들킨 민찬은 몸싸움 끝에 양래를 산비탈 아래로 밀어버린다. 그런데 민찬의 살인미수는 밝혀지지 않는다. 양래의 집 앞 CCTV가 고장 나고, 그와 몸싸움을 벌인 현장도 폭우 때문에 증거가 사라진 행운이 뒤따른 덕분이다.
이에 민찬은 양래를 밀어버린 뒤 목격한 예수의 얼굴이 계시라며 그를 단죄하는 게 신의 뜻이라고 믿는다. 그 이후로 민찬에게는 행운이 이어진다. 새로 생길 대형 교회 담임 목사직도 제안받고, 우연히 방문한 양로원에서 겨우 살아난 양래를 발견해 그를 완전히 단죄할 기회도 잡는다. 민찬이 차 안에서 아내에게 불륜 사실을 고백하라고 외치는 기괴한 장면은 그의 세상이 직접 경험한 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희의 세계는 정반대다. 그녀가 양래를 죽여야 할 동기는 누구보다도 명확하다. 복수다. 여동생 '연주'(한지현)가 그에게 강간당했고, 그가 정신병력을 이유로 감형받자 연주는 자살했으니까. 연희 본인도 여동생의 환시와 환청을 겪을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중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사회의 질서를 준수하고, 법의 처벌을 믿는다. 여동생 사건을 겪은 후로도 연희가 경찰복을 벗지 않은 것이 그 방증이다.
롱테이크 액션에 담긴 함의
민찬과 연희의 세계는 양래를 기점으로 충돌한다. 그들은 양래가 흉악범죄자이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크다. 민찬은 신의 뜻대로, 신의 정의대로, 신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규율에 따라서 양래를 죽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본 계시에 따르면 살인이 사회적으로 살인이 금지된 행위일지언정 신의 정의에는 부합한다.
연희는 민찬의 세계를 용납할 수 없다. 아무리 그 의도나 목적이 선하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는 사회적 합의이니까. 이렇게 보면 두 주인공의 충돌은 인간의 관점에서 만들어낸 세속의 질서, 윤리나 선악의 기준이 초월적인 존재의 규범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에 양래의 서사가 더해지면 <계시록>의 종교적, 윤리적 딜레마는 더욱 깊어진다.
양래는 이미 계부의 가정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한 차례 감형을 받은 바 있다. 출소한 후에도 연주에게 했듯이 '아영이'(김보민)에게 다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계부 핑계만 늘어놓는다. 속죄하지 않는 그를 보다 보면 '그에게 과연 법의 처벌만으로 충분히 정의를 세웠다고 할 수 있을까?' '민찬의 방식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그런데 민찬이 법의 잣대를 어긋나도 그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는 버려진 건물에서 펼쳐진 원테이크 액션 시퀀스가 <계시록>의 하이라이트인 이유다. 물론 액션 연출 자체도 박진감 넘치고, <그래비티>와 <로마>에서 인상적인 롱테이크 장면을 보여준 알폰소 쿠아론의 존재감도 인상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악인을 두고서 전혀 다른 정의와 질서, 우주와 세계가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상황을 고스란히 액션에 담아냈기에 이 시퀀스는 특히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계시라는 신기루
하지만 이 액션 시퀀스 이후로 <계시록>은 급작스레 길을 잃는 듯하다. 정신과 의사를 등장시키고, 그의 입을 빌려서 명확한 답을 알려주며 손쉽게 갈등을 매듭짓는다. 민찬의 계시가 서로 연관성이 없는 대상 사이에서 의미 있는 연결을 인식하는 심리적 경향인 '아포페니아(Apophenia)' 현상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가 믿는 존재와 그가 사는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두 우주, 질서의 충돌을 무마한다.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민찬을 양래와 같은 범주의 인물로 묶고, 그들과 연희의 차이점을 부각해 상술한 딜레마를 해결하려 한다. 이를 위해 <계시록>은 민찬이 본 계시를 일종의 신기루로 취급한다. 양래가 자신의 성범죄를 계부의 학대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고 변명하듯이, 민찬도 계시라는 합리화 기제를 통해서 살인미수를 신의 정의라고 변명한다는 것이다.
연희는 다르다. 자신의 행동을 신과 계부의 탓으로 돌린 두 사람과는 달리 자기 행동을 온전히 책임지려 한다. 복수심에 매몰되는 대신 자기 의지로써 동생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을 아영이의 안위를 우선순위에 두려고 애쓴다. 이들의 차이를 통해 <계시록>은 한 인간을 악과 선으로 가르는 건 자신의 생각이고 의지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계시록>이 포기한 것
위와 같은 <계시록>의 결론은 윤리적으로 깔끔하다. 일반적인 상식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메시지의 설득력, 당위성과는 별개로 <계시록>의 답변은 영화적으로 영리하지 않다. 중반부까지 <계시록>은 민찬이 본 환시가 그의 합리화일지 아니면 진짜 계시일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를 스토리텔링의 원동력으로 삼았는데, 이 장점과 특색을 스스로 포기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민찬과 연희의 추격전에는 이중의 긴장감이 감돈다. 연희가 스릴러의 서스펜스를 담당할 때, 민찬은 다른 결의 긴장감을 쌓는다. 신의 정의를 내세우는 민찬에게 맞받아치는 양래의 하소연에 철학적 논쟁이 담겨 있기 때문.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면, 어린 양래가 계부에게 학대당할 때 신이 무엇을 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또 신이 회개하는 죄인을 사랑한다면, 민찬이 신의 계시를 잘못 이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민찬의 계시를 허상이라고 결론짓는 순간, 그의 서사는 그저 비겁한 정신이상자의 틀 안에 갇힌다. 종교적 현상에 기대어 쌓아 올린 신비로운 분위기와 상이한 질서의 충돌이 빚어낸 긴장감도 한순간 허물어진다. 그렇다고 복수심을 극복하는 연희의 이야기만으로 그 공백을 채우지도 못했다. 인간의 의지가 선과 악을 가른다는 주제의식은 <다크 나이트> 같은 히어로 영화에서 자주 다뤄진 만큼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한 용두사미로 끝나다
더 나아가 연희가 극을 주도하는 후반부에서는 신비한 분위기와 미스터리에 가려졌던 부족한 완성도도 두드러진다. 사실 <계시록>은 첫 10분 정도만 보더라도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주인공들이 어떻게 얽히게 될지를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연희가 아영이를 구해내는 후반부 전개는 그 예측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히 <계시록>의 결말은 범죄 스릴러 작품에게 기대할 법한 장르적 쾌감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또 종교적 미스터리를 포기하고 범죄극을 취했지만, 정작 범죄 드라마로서의 특별함도 부족하다. 양래가 아영이를 숨긴 위치를 찾아내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가해자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상징과 범죄 장소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이는 <마인드헌터>나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과 같이 프로파일러가 등장하는 범죄 심리극의 패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전개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종교를 이용해 판을 깔지만, 정작 종교를 깊이 못 다루는 작법은 연상호 감독의 고질병처럼도 보인다. 전작 <선산>에서도 선산에 얽힌 오컬트처럼 분위기를 잡다가, 결국 가족 관계의 비밀을 풀어내기 바빴으니까. 즉, 좋게 말해 예상외의 전개가 주는 재미가 있고, 나쁘게 말해 소재의 잠재력을 밀어붙일 용기가 없는 스토리텔링이 연상호 감독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임을 <계시록>이 확언해 주는 듯하다.
Poor 형편없음
연상호의 트레이드마크는 용두사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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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감독 정이삭 / 역대급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 4DX관 연속 매진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트위스터스"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 전에 캐릭터들의 후기를 담은 쿠키영상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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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열아홉> 메인 예고편
그 여름, 비밀이 생겼다.
괴물 같았던 아빠는 집을 떠났고,
엄마마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 날
열아홉 ‘소정’은 피를 토한 채 죽어있는 엄마와 마주한다.
엄마의 시신을 욕조에 숨긴 ‘소정’은 음악으로 도피하며
위태로운 홀로서기를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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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울메이트> 메인 예고편
서로 달라 가까워지고 서로 달라 멀어지다 기억할게 모든 순간 '소울메이트' 메인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