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1-12-07 13:52:28
공포와 클리셰가 합쳐진 변신
영화 <변신> 리뷰
공포영화는 사실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는 것을 무서워 하는 편이어서 영화관에 잘 안가는 편인데, 의도치 않게 영화관에서 보게 된 영화 <변신>. 기대를 했던 작품이었으나 생각과는 다르게 클리셰 덩어리어서 실망감이 컸던 작품이었다.
영화 <변신> 시놉시스
“어제 밤에는 아빠가 두 명이었어요”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악마가 우리 가족 안에 숨어들면서 기이하고 섬뜩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서로 의심하고 증오하고 분노하는 가운데 구마 사제인 삼촌 '중수'가 예고없이 찾아온다. 절대 믿지도 듣지도 마라.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변신>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무섭긴 했던 영화 <변신>
무서운 걸 좋아하지만 무서운 걸 잘 못보는 사람으로서,,, 옷으로 다 가리면서도 영화 <변신>을 꾸역꾸역 봤다. 청각적인 요소도 정말 잘 이용했고, 갑자기 악령에 빙의된 사람이 등장을 한다던지 아니면 피가 막 천장에서 비처럼 쏟아진다던지 그로테스크한 지점도 꽤나 있어서 무서움이 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았던 장면
그 무서움 속에서도 영화를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지점이 한 군데가 있었다. 바로 강구의 집 맞은 편에 살고 있는 이상한 남자의 죽음이다. 십자가가 거꾸로 메달려 있고, 염소의 사체와 각종 동물들이 사체가 집안에 널부러져 있는 아주 기괴한 집의 주인이었다.
그 이상한 남자는 중수가 방문을 했을 때 이미 죽어 구더기들의 밥이 되고 있었다. 그 순간 플래시백이 되면서 그 남자를 아내가 죽인 것처럼 보여주다가 다시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이웃집 남자가 나온다. 본인이 본인을 죽인 것인지,, 아니면 살해를 당한 것인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가족들의 내면 심리를 집중적으로 다뤘다면 명작이 되지 않았을까?
사실 영화 <변신>은 가족 내면의 심리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서운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말하지 못한 것을 변신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풀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지점을 조금 더 심도 있게 그려냈더라면 가족 스릴러로 굉장히 밀도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이러한 가족 간에도 말하지 못하는 생각들을 그저 소재로만 이용을 하고 악령에 빙의되어서 그 악령만 없앤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 버린다는 방책은 굉장히 아쉬웠다. 그리고 그 해결에 있어서 삼촌이자 구마사제인 중수가 십자가에 찔리면서 굉장히,,, 틀에 바긴 클리셰로 끝이 나는데 이 장면 역시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막판의 클리셰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내면 심리를 제대로 표현했더라면 한국 공포영화의 걸작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몰랐던 영화 <변신>.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지만 공포영화의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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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이 없는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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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앞두고 해적 도깨비 깃발이 개봉했습니다.
2014년에 개봉했던 1편에 이은 속편이죠.
속편이지만 영화 속 시기와 캐릭터는 모두 바뀌었어요.
이번엔 의적과 해적이 만나게 됩니다.
거의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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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페르소나는 이경미, 임필성, 전고운, 김종관 4명의 감독이 가수 아이유이자 배우 이지은을 각기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 후 만들어낸 각기 다른 단편 영화들의 모음집이다. 그 중에서 나는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게 오래"의 해석의 키가 될 노래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글은 페르소나 전체에 대한 리뷰라고 볼 수는 없다.
이 단편을 본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보고 난 후에 느낀 점이 있었다면, 이 단편들을 나름대로 해석한 글을 자신있게 발행하기에는 내가 느낀 느낌들이 너무 모호해서 내 해석을 독자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싶었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난해하기도 했고, 나조차도 이 영화를 이해했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리뷰를 쓸 생각이 없었던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을 해석할 때 도움이 될 만한 포인트를 뒤늦게 찾아내어 주연배우의 앨범이 영감이 되어 하나의 영화가 된 것이 신기해 뒷북이지만 글을 쓰고 있다. 아마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출처 아이유팬카페 러브유
나는 배우 이지은보다는 가수 이지은의 팬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수로서의 그녀가 발매한 수록곡들을 많이 찾아듣는다. 그 중에서 많이 듣는 앨범은 Palette 앨범인데, 그 앨범 속에 Jam Jam이라는 노래를 다시 듣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최소 수십번은 들었던 노래인데, 가사가 갑자기 꽂히면서 이 가사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데자뷰를 느꼈다. 그 전에는 사실 이 노래를 들었던 이유는 가수의 음색이 도드라지는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왜 이 가사가 섬뜩할까 싶었다. 기억을 되돌려보니, 난 이 가사를 영상화했던 한 단편을 본 적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이 단편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알 만한 사람끼리 이 정도 거짓말엔
속아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
될래 그깟 멍청이 뭐든 해봐요 우리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마요 (JAM)
설탕이 필요해
난 몸에 나쁜 게 좀 필요해
뜨뜻미지근한 건 그만해
막 솔직하겠다고? 그게 뭐라고
I need some sugar
I need something fake
진심이란 게 뭐야? 난 상관 안 해
둘 다 알잖아 Limit 곧 끝날 텐데
식기 전에 날 부디 한껏 녹여줘 Babe
Jam, 설탕 탕 탕 사랑 랑 랑
Jam, 설탕 탕 탕 사랑 랑 랑
사랑한다고 해, 입에 발린 말을 해 예쁘게
끈적끈적 절여서 보관할게
썩지 않게 아주 오래
I need some sugar
I need something fake
천연 그런 거 몰라 자극적이게
굳이 알려고 하지 말자, 의미 그놈의 의미
어서 다 녹여줘 Babe
내가 가사만 보고, 해석한 바로는, 의미없는 인간 관계에 대해 비웃는 사람의 시니컬한 모습을 상상했었다. 현대인들의 인간 관계 속에서 진심이란 생각보다 찾기 힘들고,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웃어야 하는 일도 다반사이고, 진심을 주었다고 생각한 관계 속에서 미묘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이 노래에 등장하는 설탕은 인간 관계에 고통받던 내가 진심인 척 다른 이들 앞에서 페이크를 연기한 나는 지금 너무 지쳤으니까 내 몸에도 페이크 같지만 확실한 자극을 주는 매개체를 선물하고, 너무 남에게 보였던 위선에 대해 곱씹지 말고, 의미 같은 건 찾지도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곡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이 나에게 보인 fake, 내가 남에게 보인 fake 모두 다 의미없는 것들이니까. 그런데 이 단편을 보고 나서 가사를 다시 읽어보니, 여자주인공을 사랑을 게임처럼 하는 팜므파탈로 설정한 이 해석이 더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사랑과 여자의 위대함을 운운하며, 남자는 여자의 사랑 없이는 의미없는 존재라는 둥 특유의 개소리를 시전하는 남자, 자신은 다른 남자와는 차원이 다른, 여자를 존중하고, 아끼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남자라는 자부심이 있는 이 남자도 결국은 보통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하찮음을 꿰뚫어본 여자는 진정한 사랑은 구속일 뿐이고, 의미있는 관계 따위는 없다고 비웃으면서 자신이 현재 처한 미적지근한 애정관계에 돌파구를 찾고 싶다면 네 마음, 네 심장을 내보여 증명이라도 하라고 요구하며 오히려 적반하장의 역설을 보여준다. 그런 적반하장을 시전하는 여인의 마음으로 이 가사를 읽어보면, 이 여자의 팜므파탈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영화를 보면, 가사에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끊어진 연결고리를 다시금 이을 수 있게 된다.
영화 속 여자는 남자를 가지고 고단수로 밀당을 시전한다. 남자는 자신에게 관심없는 여자에게 자신이 뭘 포기했는지 구구절절 읊어가면서 자신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지만 여자는 그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한다. 여자가 자신을 떠나갈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남자의 고군분투가 애잔해 보일 때가 있다.
이미 식어버린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주어진 똑같은 상황 속에서 남자의 경우, 남자는 위선이 가미된 충성심을 요구하고, 여자는 관계의 일시성을 강조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사랑했던 표식, 심장을 요구한다. 심장은 한 인간의 혼, 정신, 마음을 상징하는 기관이다. 사랑이 끝난 여자에게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낸 남자의 표정은 세상을 잃은 듯했다. 마치 혼을 잃은 것처럼. 이미 사랑이 식은 여자에게 그 남자의 혼을 상징하는 심장은 그저, 한 때, 사랑을 했던 자신과 연인을 기억하기 위한 일종의 전리품이어서였을까,
그리고 노래가사와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예의". 남자는 자신의 약혼자까지 버려가면서 어린 여자를 선택했는데, 사회적으로 매장되지 않으려면 이 어린 여자와 계속 사랑을 지속시켜 나가야할 사회적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남자에게 예의란 자신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충성심을 내보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오히려 남자에 대한 사랑이 식었음에도 가식으로라도 사랑한다고 일종의 거짓말하고 있는 자신이 더 예의있지 않냐고 맞받아친다. 그리곤 사랑이 식어버린 이 상황을 외면하려는 남자에게 굳이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야 겠다면, 너의 심장이라도 나한테 보여준다면, 유효기간을 늘려주겠다고 딜을 한다.
개인적으로 두 남녀의 각기 다른 비틀린 욕망을 예의라는 단어로 단정지으려고 하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 영화의 여자를 단순히 팜므파탈이라고만 하기에는 여자의 역할이 너무 가벼운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해 진지한 척만 했을 뿐 사실은 그저 젊고 예쁜 여자의 미모에 취한 한낱 위선적인 남자를 치명적인 매력과 적당한 무례함으로 참교육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하면 어떨까.
*본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시청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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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 '레이'님의 콘텐츠입니다. 출처는 하단의 주소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일반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범주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추는 카메라는 현실과 극의 경계에 머물며 관객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도달한다. <언노운 걸>, <소년 아메드>와 같은 영화들은 다르덴 형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극중의 배경에 대해 몰라도 이해하는 데 거의 지장이 없다. 대단히 일반적인 관객을 상정하는 이들 카메라는 그러면서도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선에 머문다. <토리와 로키타> 속 토리(파블로 실스 분)와 로키타(졸리 음분두 분)에게 벌어지는 폭력은 유혈사태와는 거리가 멀고 로키타를 클로즈업하여 폭력을 가리거나 로키타에게서 거리를 둠으로써 폭력을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로키타를 향한 폭력은 토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거나 폭력의 사후에 발견된다. 폭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피해자의 감정적인 모습을 포착하지 않으면서 관객에게 폭력의 심각성을 알리는 고단수의 관찰은 한편으로는 폭력으로부터 관객을 무감각하게 유리시키기도 한다.
성폭력을 위시한 폭력을 묘사할 때 묘사자는 2차 가해와 폭력 포르노로부터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해야 한다. 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내지만 때로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되기도 하고 모방범죄를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폭력을 묘사하기 위해 진행된 촬영 과정에서 재연 배우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서 카메라는 결코 포르노의 선을 넘지 않지만 관객의 다소 냉담한 반응을 감수해야 하기도 한다. 영화상 로키타가 겪는 첫 성폭행은 대단히 간접적으로 묘사되기에 일부 관객은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다. 흥미롭게도 로키타가 겪는 성폭행에 대한 묘사는 서사가 진행되며 직접적인 묘사로 나아가는데(그러면서도 카메라는 로키타에 대한 섹슈얼한 시선과는 거리가 멀다), 관객의 시선과 토리의 시선이 일치해간다. 일부 둔한 관객은 알아차리기조차 쉽지 않은 첫 성폭행 장면에서 토리는 아예 배제되어 있다.
토리와 로키타의 현 상황에 대해서만 묘사하던 카메라는 영화 초중반이 되어서야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드러낸다. 토리에게는 발급된 체류증이 로키타에게는 발급되지 않았고, 따라서 토리와 로키타는 헤어질 위기에 처한다. 로키타가 체류증을 정말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인지, 이 둘이 친남매가 맞기는 한지, 로키타가 돈을 부친다는 부모는 친부모인 것인지 카메라는 현실적인 영역에는 결코 들어서지 않는다. 카메라의 관심은 오직 합법적으로 벨기에에 머물 수 없는 로키타와, 로키타와 헤어져야 하는 토리가 겪는 폭력적인 상황 뿐이다. 즉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정치적인 영역으로 전력을 다해 발을 내딛지 않는다. 체류증이 발급되지 않은 로키타와 헤어져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토리의 질문은 로키타를 향한 온정적인 시선을 요청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로키타의 상황은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토리의 질문은 로키타에 대한 그리움으로써 묘사될 뿐 로키타의 체류증에 대한 당위성으로 이용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체류증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온정적인 시선인가, 이들을 둘러싼 역사적인 혹은 현실적인 문제들인가. 카메라는 이들 중 어디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오직 약자를 이용하려는 가해자의 뒷모습만을 끊임없이 쫓아 들어간다. 토리와 로키타는 합법적인
앵벌이노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너무나도 쉽게 불법적인 아르바이트에 동원된다. 이들이 발을 들인 공간은 애초에 불법이므로 그보다 더한 폭력이 발생하더라도 공권력의 개입은 도리어 위협이 된다. 이는 공권력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토리와 로키타가 경찰을 보자 오히려 피하려고 하는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폭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카메라는 사실은 폭력의 막다른 골목을 향하고 있는 셈이다.카메라가 관객의 온정적인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일반인의 온정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토리와 로키타의 상황이 개선되기 때문이다. 언뜻 정치적인 선으로 넘어가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시선은 사실은 가장 정치적인 상황을 상정한다. 토리가 질문을 퍼붓는 면접관조차도 이들을 돕고 싶어하지만 규정이 변경되지 않는 이상 로키타는 체류증을 발급받을 수 없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 특히 <언노운 걸>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의사 제니(아델 에넬 분)가 진료 시간이 끝나 더 이상 진료하지 않아 발생한 의료사고는 제니의 잘못으로 치부될 수 없다. 언뜻 개인의 잘못들로 점철된 것만 같은 사회는 사실은 집단적인 오류에 기반하고 있으며,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역설적으로 가장 개인적인 곳으로 렌즈를 들이대어 이를 폭로한다.
한쪽 다리를 다쳐 토리와 함께 모래 언덕을 하강하는 로키타의 모습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신체의 일부만을 다쳤을 뿐이지만 이동 자체가 불가능해진 로키타에게 남은 선택지는 토리만을 보내거나 토리와 함께 급속도로 하강하는 것이다. 로키타와 하강하기를 선택한 토리에게는 아직 두 다리라는, 즉 체류증이라는 선택지가 있다. 하지만 스스로 도망칠 수 없는, 즉 체류증이 없는 로키타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이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관객의 시선을 대변할 뿐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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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영화는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나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어느 날 문득,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마음이 불쑥 찾아 올 때가 있다.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어 질 때. 나는 영화를 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한가지가 아닌 복잡한 자기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 그 고민은 때로 세상을 멸망시키거나 구해야 하는 상상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고, 점심메뉴로 다투고 난 뒤, 남자친구와 헤어질까 생각하게 되는 일상적인 것도 있다. 누군가에겐 ‘이게 무슨 고민이라고.’ 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일상을 회복하기 힘들 만큼 어려울 수도 있는 일.
일, 사랑, 가족, 친구…
인생에서 걱정과 고민은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여러 괴로움이 어깨동무를 하고 덮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때 영화 속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로 부터, 혹은 별을 지나 우주 저 어딘가의 누군가로부터 뜻밖의 위로를 받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별것 없는 상황 평범한 대사 하나가 마음을 울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새로운 도전할 용기를 내기도 했다. 영화가 가진 힘은 그런 것이었다.
2011년, 나 이 일을 계속해도 되는 걸까? 10년 동안 방송 일을 하며 체력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많이 소모되었던 때였다. 회사에서 긴 휴가를 낼 수 없다면 퇴사를 하고 자발적으로 휴가를 가자 ! 하고 생각 했던 때.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를 보았다.
주인공 두얼은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오랜 바람이었던 누구나 꿈꿀 법한 따스한 카페를 오픈했다. 전직장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며 오픈식도 거창하게 하는데, 열정이 넘치지만 손님들의 발길은 뜸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카페를 운영하던 여동생 창얼은 개업 선물로 친구들에게 받은 잡동사니들의 물물교환을 제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매의 카페는 타이페이의 명소로 자리잡게 된다. 사실 두얼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이 카페의 분위기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35개의 비누에 담긴 35개의 도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남자와 마음을 주고 받게 되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물건을 바꾸는 것에 대해 지금 까지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나아가 공간을 주고 받는 카우치서핑에 대해 알게 되고, 먼 곳에서 온 손님을 카페에 카우치서핑으로 받으며,마침내 자신도 36번째 이야기를 찾기 위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두얼은 미술이 좋아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이모가 상하이로 떠난 다는 소식에 기회를 잡아, ‘진짜 꿈’이라는 자신만의 카페를 시작한다. 영화 시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아한 카페를 하고 싶었던 꿈과 다르게 우아한 카페는 아니네요. 최근에 바뀐 두얼의 가치관을 들어볼까요?” 하고.
두얼이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원했던 카페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 일은 두얼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 “나에게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심리가치다.” 라고 말하는 이 오프닝이 영화에서 내가 좋았던 모든 깨달음을 함축하고 있었다. 삶을 살아나는 것에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정하는 가치와 기준이 아닐까?
인생의 고민이 하나가 아니듯, 꿈도 하나가 아니다. 내가 알던 세상에서 꾸던 꿈이 하나였다면, 꿈을 이룬 세상에서는 새로운 상황과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로 인해 또 새로운 생각과 꿈이 생겨난다. 경험이 다양해질 수록 나의 세계는 확장되고 그렇게 나는 더 커간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을 10년전에는 알지 못했다. 회사 안에서, 지금 하는 일이 최고 인줄 아는 작은 아이였다.
영화 속에서, 차분히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실행해 가는 두얼이 좋았다. 친해지고 싶었다. 세계일주를 떠난 그 어딘가에서 배낭을 메고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타이페이를 다녀오고, 실제 영화 배경이 된 카페도 다녀오고, 당시에는 구할 수 없었던 OST도 구입해왔다. 그리고 2년 뒤, 마침내 세계일주를 떠나 두얼처럼 카우치서핑도 했다. 카우치서핑이라는 것이 마치 돈을 아끼기 위해 남의 집에 자는 것 처럼 보이지만 , 사실 그 집에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마음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그리고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세계일주는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덕분에 불편하고 어려워도 여행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쌓여, 두얼처럼 나의 가치관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십년이 지난 요즘도 넷플릭스에서 자주 이 영화를 본다. 두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꿈과 현실 사이를 오르내리며 앞으로 뚜벅 뚜벅 나아가고 있을 그녀를 생각한다. 덕분에 나도 이렇게 달라졌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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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의 씁쓸한 뒷면
이 글은 영화 [판의 미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기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혼자서 책조차 읽을 수 없었습니다. 받아쓰기는 늘 30~40점을 오갔죠. 엄마는 속이 터져 한글 개인 과외라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속 편한 아빠는 그런 거 다 때 되면 한다며 저를 품에 안고 파란 물고기가 바다로 간 이야기를 서른마흔다섯 번째로 읽어주셨죠.
딸이 드디어 한글을 깨우친 그날. 아빠는 신이 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제게 동화책 다섯 권을 선물해 주셨고 그 책은 부부 싸움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그림보다 글자가 많은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동화의 실제 모습. 그러니까 팥쥐와 팥쥐 어머니의 알고 싶지 않은 결말이 담겨있는 '잔혹동화'였기 때문입니다. (참고 1)
덕분에 저는 생애 최초로 받은 조기 교육의 결과 동화가 얼마나 잔혹한지 알게 되었고 산타 따윈 없다는 것을 너무도 일찍 알게 된 시니컬한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사준 동화책에서 아는 글자가 나왔다며 환호성을 치는 저를 보며 쟤를 어쩌누.라는 말을 늘 하셨었는데. 결국 이렇게 커 버리고 말았죠.
영화 [판의 미로]는 스페인 전쟁(내전) 상황에서 오필리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제 겨우 한글을 깨친 제가 읽은 진짜 동화처럼 잔혹하고 또 잔인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기이함과 신비함이 섞여 정말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죠.
영화 전체가 암울하고 어둡지만 오필리아의 환상과 현실의 대비로 인해 더더욱 아름답고 슬픈 영화입니다.
이게 어찌 15세란 말이요
나도 무섭다고요.
사진출처:구글 YTN Science/익숙하지 않거나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개봉 당시,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였습니다. 포스터만 봐도 동화 같은 분위기의 판타지 영화라고 생각했기에 많은 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을 방문했죠. 그 결과 개봉관마다 학생이고 보호자고 할 것 없이 울어 젖혔다는 전설의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동화의 기본 공식을 익히 알고 있죠.
착하고 순진한 주인공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만나며 시련을 겪지만 결국 극복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로 끝나야 디폴트죠.(인어공주 제외)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큰 줄기 자체가 스페인의 내전 이야기를 하고 있죠. 한국 영화 [밀정]을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내부의 스파이가 있고 그를 통해 정보를 얻어 혁명을 일으키려 하는 이야기가 주가 되죠. 그 혼란 속에서 어린 오필리아는 임신한 엄마와 낯선 환경 속에 있게 되고. 그 안에서 만난 요정들과 작고 큰 모험을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동화에 나오는 "의붓"이라는 단어가 붙은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대위는 그 수위를 이미 진작에 넘어버린, 너무도 잔인한 사람입니다. 의심 하나만으로 멀쩡한 사람을 활자 그대로 때려죽이는.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뱃속의 아들만을 사랑하는 남자입니다. 고지식하고 자신의 명예를 누구보다 생각하는 그런 자존심 밖에 남지 않은 사람 말입니다. 그가 벌이는 살인 혹은 살육의 행각은 지금의 제가 보아도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오필리아의 모험 속에 나오는 괴물들 마저 기괴하기 짝이 없죠. 콩쥐팥쥐에서 나왔던 두꺼비는 귀여울 정도로 험악하게 생긴 두꺼비와 오물은 물론. 모든 아이들을 울리기 충분했던 그 "손바닥 괴물"까지 나옵니다. 요정이 잡아먹히는 건 뭐 말할 것도 없죠. 저는 정말 이걸 다 오필리아가 겪었다면 다시 기억을 찾아 공주가 된다 해도 PTSD에 걸릴 것이라는 걱정이 더 앞섰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제가 어릴 적 접했던 동화의 진짜 모습, 혹은 숨겨진 동화의 잔혹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진 달의 앞면이 아닌 숨겨졌던 달의 못생긴 뒷모습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우리가 몰랐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 영화는 그런 동화나 판타지가 가진 아름다움을 걷어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동화를 잃어버린지 오래인 어른들 틈바구니의 오필리아를 통해서 말이죠.
물론 배급사는 진짜 반성(?) 해야 합니다. 15세라뇨.
제가 보면서 먹던 딸기가 목에 걸렸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기예르모 델 토로, 세계관 최강자
역시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사진 출처:구글 etoland/이걸 디즈니가 받아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제겐 팀 버튼 감독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입니다. 음울하고 어둡죠.
제가 색깔과 냄새로 이 두 감독을 구분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팀 버튼 감독은 총천연색에 가깝고, 녹기 시작한 눅진한 사탕에 가깝습니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텁텁함이 있죠.
그에 반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달빛에 비치는 물체의 그림자 같은, 무언가 생명력이 빠져 가는 죽음과 삶 그 경계에 가깝습니다. 대충 꿈도 희망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덕후들에겐 늘 시련이 존재합니다. 이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잘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고 우리에게 그들의 유니버스로 올 수 있는 초대장을 꾸준히 날렸죠. 기괴하지만 각인되기 쉬운 그들의 예술세계는 이제 그들의 이름을 딴 장르로 기억이 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원더랜드가 되었습니다.
기예르모 감독의 취향(?)은 괴수물이었습니다.
물론 장르의 특성상 취향을 심하게 타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재능이 점점 영화 안에서 발휘되는 것을 보는 맛이 있는 감독이었죠. 다른 세계, 혹은 차원에서 불러들인 것 같은 생명체가 튀어나올 때마다 저는 환호성을 지른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감독 특유의 감성을 제가 좋아하나 봅니다.
이 영화의 판(Pan)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염소(혹은 양)가 악마 혹은 나쁜 기운을 불러오는 장난의 정령 같은 느낌의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로테스크 한 (혹은 쏘우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해 낸 감독을 보며 저는 또 한 번 내적 댄스를 춰야 했죠.
그의 또 다른 영화인 shape of water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와 합쳐졌기 때문에 더더욱. 저는 이 불행한 결말과 크리처를 사랑하는 감독에게 홀라당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저랑 똑같이(?) 음울한 동화를 보고 자랐지만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고. 저는 그냥 덕후가 되었네요.
이게 나라냐.그래서 결말은 해피엔딩인가요?
꼭 해피엔딩 이어야 하나요.
사진 출처:구글 뉴스 포인트/오필리아 너무 사랑스러움. 드레스 입었을 때 너무 깜찍했다.
오필리아는 마지막에 죽습니다. 의붓아버지가 될 뻔했던 대위가 쏜 총에 맞아서.
그리고 그녀의 피가 지하세계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 닿아 그녀는 지하 세계 공주로 있었던 기억을 되찾고 백성들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이 영화의 끝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녀는 죽은 상태죠.
결말의 해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오필리아가 실제 지하 왕국의 공주였다는 사람들과 전쟁 때문에 힘들었던 아이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만든 판타지일 뿐이라는 부류로 말입니다.
저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오필리아는 아직 아이입니다. 엄마의 죽음을 비롯한 자신 주변에서 생긴 많은 변화들이 아이에겐 방어 체계를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것이 극대화된 것이 자신이 만든 판타지 속의 세계인 것이죠.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고 목소리를 냈다 해도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이 조그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들은 정보를 통합해 그 세계 안으로 자신이 숨어버린 것이죠.
그렇기에 결말은 더더욱 안타깝고 아픕니다.
오필리어는 고통만 가득한 기억을 안고 죽어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은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죠. 이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작은 아이는 살아있는 동안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관을 찾았던 아이들이 울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공주님이 죽어버렸으니. 자신들에겐 익숙한 결말이 아니었던 것이죠. 해피엔딩이 디폴트가 아닌 동화는 그들에겐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테니까요.
슬프고 아름답고. 그럼에도 이해가 간다.
동화가 당신을 부를 때.
한글을 제대로 쓰지도, 읽지도 못하던 아이는. 잔혹 동화를 읽고 나서 더 잔혹한 세상을 조금은 더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도피하는 방법을 배워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오필리아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지금도 악착같이 동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제가 처한 현실이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아이의 모습으로 본 전쟁의 힘듦과 무서움을 잘 그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씁쓸함과 행복함이 공존하는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 더욱 그러하죠. 이젠 오필리아도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판타지가 아닌 현실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말입니다.
참고 1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말 글이 그림보다 많은 책이었고 나는 내용보다는 내가 아는 글자를 찾아 읽기 바빴음. 근데 엄마의 입장에서는 다섯 살짜리 애가 "엄마 이거 젓갈!! 엄마 팥쥐가 젓갈!! 젓갈 되었대!!! 맞지!!"라고 하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그 말에 엄마는 아빠를 베란다로 쫓아냈다고 함.
참고 2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화 중 크림슨 피크, shape of water, 판의 미로 이 세 편을 가장 좋아함. 감독은 멕시코 사람이었나 그런데 우리나라 전래동화처럼 거기 민화? 도 장난 없다고 한다.
[이 글의 TMI]
1. 정형외과 갔다 옴. 의사 선생님이 운동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안 할 거면 병원도 오지 말라고 함.
2. 집 꾸미는 재미에 폭 빠짐. 아 물론 며칠 안 가겠지.
3. 패딩 찾아야 하는데. 까먹었다.
4. 택배가 하도 와서 이젠 나도 움찔움찔 놀랄 지경.
5. 오늘은 빨리 자야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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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 그냥 판타지만은 아니다
<모털 엔진>은 원작이 있는 영화다. '견인 도시 연대기'라는 소설이고 총 4부작으로 책이 나눠져 있다. 그중 네 권의 책 중 첫 번째 책의 제목이 '모털 엔진'이다. 각색하기는 했지만 1권의 책의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의 스토리가 너무 방대해서 네 권의 책의 중요 부분들을 추출해서 만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책을 빨리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영화를 보고 속편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서 압축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모털 엔진>의 모털, 혹은 모탈(mortal)은 '영원히 살 수 없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 제목은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아우른다. 60분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전쟁으로 인해(아마 핵전쟁일 것으로 보인다) 지구가 멸망한 후, 커다란 엔진으로 움직이는 견인 도시들이 서로 약탈을 일삼고, 땅에 고정해서 살기를 원하는 '반 견인 도시 주의자'들과 다시 전쟁하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반지의 제왕>과 <호빗>의 감독인 '피터 잭슨'이 제작을 맡아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다. 나 역시 공개된 예고편이 눈길을 사로잡아 많은 기대를 하면서 영화를 보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영화의 영상미(CG)는 좋았으나 기대를 너무 한 것인지 스토리 면에서는 실망감이 컸다. 아마 방대한 스토리를 128분 안에 녹여내려다 보니 개연성도 떨어지고, 공감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사건도 급하고, 러브라인도 급하고, 해결도 급했다. 이런 방식을 삼류라고 볼 수는 없지만 '아, 이렇게 되겠구나'라고 예상하면 그렇게 이뤄졌다. 역시 '왜'가 결여된 이야기는 공감을 얻기 힘든 것 같다. 아마 두 편 정도로 나눠서 제작했다면 더 탄탄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전반적인 세계관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60분 전쟁 이후 1천 년이 지난 시점에서의 현재는 과거 혹은 고대가 된다. 견인 도시 '런던'의 박물관에 미니언즈 대형 피규어가 '미국의 동상'이 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정도의 미래에서 지금을 바라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사실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탈핵과 방사능이다. 대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우리가 방사능 폐기물을 어디에 묻는다고 기록으로 남겼을 때 미래의 후손들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고대의 언어를 해석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미니언즈뿐만 아니라 토스터가 귀중한 유물인 세상에 현재 쓰는 언어가 그대로 남아있을 가능성은 낮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는 교수님의 저 말씀이다.
우리는 지금 과거의 언어를 모두 해석하지 못한다. 그래서 학자들이 '추정'한다. <모털 엔진>에서도 그렇다. 그렇게 과학이 발전했지만 TV 영상 같은 화면을 만들어내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가 되어 있음에도 그 안에는 여전히 60분 전쟁의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부품을 구하러 다니는 존재들도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고대의 무기로 불리는 메두사를 다시 사용하는데 정말 마구 쏘아댄다. 만약에 빔을 맞은 땅이나 건물, 그 안에 핵폐기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영어로, 한글로, 다른 언어로 어디에 묻었다고 아무리 기록을 남긴다고 해도 짧으면 천년, 길면 몇만 년 뒤에나 반감기가 지나서 안정화가 되는 핵폐기물의 존재를 미래의 인간들이 알 수 있을까? 특히 걱정되는 것은 어디에 남겼다는 것은 해석했는데, 위험한 물질이라는 것을 해석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다. 만약에 핵폐기물이 보관된 위치의 표시를 보물이나 메두사 같은 무기의 위치라고 생각하고 파헤치면 그 피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도 벽화 등의 기록을 남길 때 그 기록이 후손들에게 남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남겼을 텐데 우리는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상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핵으로 만든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쓰고 말면 그만이다. 하지만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의 폐기물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막무가내 조상들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움직이는 견인 도시와 반대로 과거처럼 땅에 정착해서 살아야 한다는 반 견인 도시 주의자들은 어느 산맥에 자리를 잡고 '샨 구오'라는 방벽 뒤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장벽이라고 불리는 것은 댐과 닮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지각의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예전 지구의 4개의 대륙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름도 그렇고 그 방벽은 '산샤댐'이 아닌가 싶었다. 거대한 세력을 피해서 숨은 곳이 댐 뒤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그만큼 물을 가두기 위해 인간이 얼마나 큰 힘을 쏟았는지 볼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을까?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전 지구적으로, 역사적으로 전쟁은 '땅'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것은 우리가 땅을 소유의 개념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고, 반 견인 도시 주의자들이 지향하는 것처럼 다시 한번 토지를 소유한다면 인간은 또다시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견인 도시가 있음에도 욕심을 내는 사람은 욕심을 내고 있지만 말이다. 과연 땅에 정착해서 사는 것이 정답일지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다.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하는 영상은 늘 고민을 던져준다. 정말 먼 미래일지, 아니면 이제 곧 다가올 미래일지, 아니면 그 미래조차 없는 것은 아닐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다.
우리는 천년이 지나고 썩지 않는 과자를 먹으며 살고 있다. 우리의 현재의 삶의 행동들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자기 전에 한 번씩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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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의 욕망과 불화하는 가부장제
8★/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이더르의 형수는 아들을 낳기 위해 네 번의 임신을 했으나 막 태어난 넷째 역시 딸이다. 아버지는 하이더르가 남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염소 도축을 지시하지만 하이더르는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메이크업 일을 하는 아내 뭄타즈와 달리 하이더르는 몇 년째 백수 상태여서 아버지와 형은 그를 은근히 무시한다. 가부장제가 살아 숨쉬는 그의 가족에서 가사노동을 돕고 조카들을 돌보는 하이더르는 번듯하지 못한 존재다.
그런 그에게 친구가 취업 자리를 제안한다. MTF 트랜스젠더 댄서 비바의 백댄서 일이다. 안 그래도 남성성을 의심받고 조롱당하는 하이더르는 춤을, 심지어 트랜스젠더 뒤에서 출 수는 없다고 거절하지만 그러기에는 보수가 너무 크다. 가족 내 낮은 지위를 단번에 보상해줄 만큼 큰돈 앞에서 하이더르는 결국 댄서 일을 수락한다. 하이더르가 일자리를 얻자마자 아버지와 형은 뭄타즈의 경제 활동을 금지한다. 얼마 후 뭄타즈는 남자아이를 임신한다. 남자는 밖에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낳고 가사노동을 하는 가부장제의 질서가 복원된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할 것으로 기대되는 가부장제가 재확립되었음에도 아무도 행복하지 못한 역설이 생긴다. 하이더르는 열정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댄서 비바에게 매혹되고, 그가 댄서로서 큰 인기를 얻는 데 공헌하자 비바 역시 하이더르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집에만 머물며 답답함을 느끼는 뭄타즈 역시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뜬다. 밤마다 길거리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며 자위하는 남자를 몰래 훔쳐보며, 그 역시 자위를 시작한다. 하이더르와 비바의 일상과 친밀성은 아버지와 형이 구획한 질서와 조화하지 못하고 은밀한 곳에서 조금씩 그 궤적을 넓혀나간다.
그렇다면 집안에서 가부장적 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아버지는 행복할까? 아버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배우자가 죽은 옆집 여자와 서로에게 이끌린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고, 심지어 같이 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옆집 여자의 아들은 그런 짓은 집안의 수치라며 극렬히 반대하고,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피던 아버지도 자못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옆집 여자에게 더는 자신을 방문하지 말라고 선언한다. 당연히 진심이 아니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진심보다 체면과 규범이 더 중요할 뿐이다.
도대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가부장제의 덕을 보는 자는 누구일까? 하이더르의 형 정도인 듯 보인다. 직장이 있고, 자식이 있으며, 육체적 힘도 아직 상실하지 않은 나이의 장남. 그렇다고 그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는 딸만 넷이기에, 하이더르와 뭄타즈 부부가 아들을 낳는다면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대의를 상실할 것이다. 즉, 가부장제가 공고한 이 가족에서는 아직 천진한 아이들을 빼고는 그 누구도 완전히 행복할 수 없다.
하이더르와 뭄타즈는 끝내 자살한다.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늘 행복할 자격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가부장제를 더 이상 온존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뭄타즈는 아들을 품은 채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는다. 억지로 직장을 그만두고, 집 안에서도 감시당하는 자신에게 미래는 없음을 감각한 뒤의 선택이다. 하이더르도 마찬가지다. 비바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것이 실은 남몰래 숨겨둔 자신의 게이 욕망의 어긋난 발현이었음을, 즉 비수술 트랜스젠더인 비바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자기 욕망을 표출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하이더르에게도 미래는 없다. 가부장제하에서 퀴어 정체성이 불우하게 교차하는 장면이다. 더불어, 서로를 아꼈던 하이더르와 뭄타즈가 결혼 전 나눴던 짤막한 대화, 즉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집안 어른들끼리 결정한 결혼을 두고 두 사람이 가족 몰래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는 대화가 끝내 두 사람의 자살로 귀결된다는 것은 가부장제가 조그마한 숨구멍을 뚫어놓는 정도로는 견디기 어려운 체제임을 폭로하기도 한다. 누구도 온전히 행복할 수 없지만 누구나 그 권위를 인정하는 가부장제의 동시대적 곤경과 그로 인한 파국이 밀도 높은 드라마로 형상화된 〈조이랜드〉를 향한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유수 영화제의 호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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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이게...CG였어?? 영화만큼 재미있는 비하인드 영상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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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이 없는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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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적 도깨비 깃발, 명절용 오락 영화 그이상, 그이하도 아닌 속편!
설 연휴를 앞두고 해적 도깨비 깃발이 개봉했습니다.
2014년에 개봉했던 1편에 이은 속편이죠.
속편이지만 영화 속 시기와 캐릭터는 모두 바뀌었어요.
이번엔 의적과 해적이 만나게 됩니다.
거의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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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정말 먼 곳>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은 진우,
그에게 뜻하지 않은 방문자가 도착하며
조용했던 날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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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정글 크루즈> 티저 예고편
재치 있는 선장 ‘프랭크’(드웨인 존슨)와 용감하고 자유분방한 식물 연구가 ‘릴리’(에밀리 블런트)가
신비로운 힘으로 둘러싸인 아마존에서 고대 치유의 나무를 찾기 위해 벌이는 스릴 넘치는 모험을 그린 액션 어드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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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유의 팔레트는 누군가의 페르소나가 되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페르소나는 이경미, 임필성, 전고운, 김종관 4명의 감독이 가수 아이유이자 배우 이지은을 각기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 후 만들어낸 각기 다른 단편 영화들의 모음집이다. 그 중에서 나는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게 오래"의 해석의 키가 될 노래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글은 페르소나 전체에 대한 리뷰라고 볼 수는 없다.
이 단편을 본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보고 난 후에 느낀 점이 있었다면, 이 단편들을 나름대로 해석한 글을 자신있게 발행하기에는 내가 느낀 느낌들이 너무 모호해서 내 해석을 독자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싶었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난해하기도 했고, 나조차도 이 영화를 이해했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리뷰를 쓸 생각이 없었던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을 해석할 때 도움이 될 만한 포인트를 뒤늦게 찾아내어 주연배우의 앨범이 영감이 되어 하나의 영화가 된 것이 신기해 뒷북이지만 글을 쓰고 있다. 아마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출처 아이유팬카페 러브유
나는 배우 이지은보다는 가수 이지은의 팬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수로서의 그녀가 발매한 수록곡들을 많이 찾아듣는다. 그 중에서 많이 듣는 앨범은 Palette 앨범인데, 그 앨범 속에 Jam Jam이라는 노래를 다시 듣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최소 수십번은 들었던 노래인데, 가사가 갑자기 꽂히면서 이 가사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데자뷰를 느꼈다. 그 전에는 사실 이 노래를 들었던 이유는 가수의 음색이 도드라지는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왜 이 가사가 섬뜩할까 싶었다. 기억을 되돌려보니, 난 이 가사를 영상화했던 한 단편을 본 적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이 단편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알 만한 사람끼리 이 정도 거짓말엔
속아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
될래 그깟 멍청이 뭐든 해봐요 우리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마요 (JAM)
설탕이 필요해
난 몸에 나쁜 게 좀 필요해
뜨뜻미지근한 건 그만해
막 솔직하겠다고? 그게 뭐라고
I need some sugar
I need something fake
진심이란 게 뭐야? 난 상관 안 해
둘 다 알잖아 Limit 곧 끝날 텐데
식기 전에 날 부디 한껏 녹여줘 Babe
Jam, 설탕 탕 탕 사랑 랑 랑
Jam, 설탕 탕 탕 사랑 랑 랑
사랑한다고 해, 입에 발린 말을 해 예쁘게
끈적끈적 절여서 보관할게
썩지 않게 아주 오래
I need some sugar
I need something fake
천연 그런 거 몰라 자극적이게
굳이 알려고 하지 말자, 의미 그놈의 의미
어서 다 녹여줘 Babe
내가 가사만 보고, 해석한 바로는, 의미없는 인간 관계에 대해 비웃는 사람의 시니컬한 모습을 상상했었다. 현대인들의 인간 관계 속에서 진심이란 생각보다 찾기 힘들고,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웃어야 하는 일도 다반사이고, 진심을 주었다고 생각한 관계 속에서 미묘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이 노래에 등장하는 설탕은 인간 관계에 고통받던 내가 진심인 척 다른 이들 앞에서 페이크를 연기한 나는 지금 너무 지쳤으니까 내 몸에도 페이크 같지만 확실한 자극을 주는 매개체를 선물하고, 너무 남에게 보였던 위선에 대해 곱씹지 말고, 의미 같은 건 찾지도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곡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이 나에게 보인 fake, 내가 남에게 보인 fake 모두 다 의미없는 것들이니까. 그런데 이 단편을 보고 나서 가사를 다시 읽어보니, 여자주인공을 사랑을 게임처럼 하는 팜므파탈로 설정한 이 해석이 더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사랑과 여자의 위대함을 운운하며, 남자는 여자의 사랑 없이는 의미없는 존재라는 둥 특유의 개소리를 시전하는 남자, 자신은 다른 남자와는 차원이 다른, 여자를 존중하고, 아끼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남자라는 자부심이 있는 이 남자도 결국은 보통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하찮음을 꿰뚫어본 여자는 진정한 사랑은 구속일 뿐이고, 의미있는 관계 따위는 없다고 비웃으면서 자신이 현재 처한 미적지근한 애정관계에 돌파구를 찾고 싶다면 네 마음, 네 심장을 내보여 증명이라도 하라고 요구하며 오히려 적반하장의 역설을 보여준다. 그런 적반하장을 시전하는 여인의 마음으로 이 가사를 읽어보면, 이 여자의 팜므파탈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영화를 보면, 가사에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끊어진 연결고리를 다시금 이을 수 있게 된다.
영화 속 여자는 남자를 가지고 고단수로 밀당을 시전한다. 남자는 자신에게 관심없는 여자에게 자신이 뭘 포기했는지 구구절절 읊어가면서 자신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지만 여자는 그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한다. 여자가 자신을 떠나갈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남자의 고군분투가 애잔해 보일 때가 있다.
이미 식어버린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주어진 똑같은 상황 속에서 남자의 경우, 남자는 위선이 가미된 충성심을 요구하고, 여자는 관계의 일시성을 강조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사랑했던 표식, 심장을 요구한다. 심장은 한 인간의 혼, 정신, 마음을 상징하는 기관이다. 사랑이 끝난 여자에게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낸 남자의 표정은 세상을 잃은 듯했다. 마치 혼을 잃은 것처럼. 이미 사랑이 식은 여자에게 그 남자의 혼을 상징하는 심장은 그저, 한 때, 사랑을 했던 자신과 연인을 기억하기 위한 일종의 전리품이어서였을까,
그리고 노래가사와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예의". 남자는 자신의 약혼자까지 버려가면서 어린 여자를 선택했는데, 사회적으로 매장되지 않으려면 이 어린 여자와 계속 사랑을 지속시켜 나가야할 사회적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남자에게 예의란 자신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충성심을 내보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오히려 남자에 대한 사랑이 식었음에도 가식으로라도 사랑한다고 일종의 거짓말하고 있는 자신이 더 예의있지 않냐고 맞받아친다. 그리곤 사랑이 식어버린 이 상황을 외면하려는 남자에게 굳이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야 겠다면, 너의 심장이라도 나한테 보여준다면, 유효기간을 늘려주겠다고 딜을 한다.
개인적으로 두 남녀의 각기 다른 비틀린 욕망을 예의라는 단어로 단정지으려고 하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 영화의 여자를 단순히 팜므파탈이라고만 하기에는 여자의 역할이 너무 가벼운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해 진지한 척만 했을 뿐 사실은 그저 젊고 예쁜 여자의 미모에 취한 한낱 위선적인 남자를 치명적인 매력과 적당한 무례함으로 참교육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하면 어떨까.
*본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시청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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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 '레이'님의 콘텐츠입니다. 출처는 하단의 주소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일반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범주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추는 카메라는 현실과 극의 경계에 머물며 관객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도달한다. <언노운 걸>, <소년 아메드>와 같은 영화들은 다르덴 형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극중의 배경에 대해 몰라도 이해하는 데 거의 지장이 없다. 대단히 일반적인 관객을 상정하는 이들 카메라는 그러면서도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선에 머문다. <토리와 로키타> 속 토리(파블로 실스 분)와 로키타(졸리 음분두 분)에게 벌어지는 폭력은 유혈사태와는 거리가 멀고 로키타를 클로즈업하여 폭력을 가리거나 로키타에게서 거리를 둠으로써 폭력을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로키타를 향한 폭력은 토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거나 폭력의 사후에 발견된다. 폭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피해자의 감정적인 모습을 포착하지 않으면서 관객에게 폭력의 심각성을 알리는 고단수의 관찰은 한편으로는 폭력으로부터 관객을 무감각하게 유리시키기도 한다.
성폭력을 위시한 폭력을 묘사할 때 묘사자는 2차 가해와 폭력 포르노로부터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해야 한다. 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내지만 때로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되기도 하고 모방범죄를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폭력을 묘사하기 위해 진행된 촬영 과정에서 재연 배우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서 카메라는 결코 포르노의 선을 넘지 않지만 관객의 다소 냉담한 반응을 감수해야 하기도 한다. 영화상 로키타가 겪는 첫 성폭행은 대단히 간접적으로 묘사되기에 일부 관객은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다. 흥미롭게도 로키타가 겪는 성폭행에 대한 묘사는 서사가 진행되며 직접적인 묘사로 나아가는데(그러면서도 카메라는 로키타에 대한 섹슈얼한 시선과는 거리가 멀다), 관객의 시선과 토리의 시선이 일치해간다. 일부 둔한 관객은 알아차리기조차 쉽지 않은 첫 성폭행 장면에서 토리는 아예 배제되어 있다.
토리와 로키타의 현 상황에 대해서만 묘사하던 카메라는 영화 초중반이 되어서야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드러낸다. 토리에게는 발급된 체류증이 로키타에게는 발급되지 않았고, 따라서 토리와 로키타는 헤어질 위기에 처한다. 로키타가 체류증을 정말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인지, 이 둘이 친남매가 맞기는 한지, 로키타가 돈을 부친다는 부모는 친부모인 것인지 카메라는 현실적인 영역에는 결코 들어서지 않는다. 카메라의 관심은 오직 합법적으로 벨기에에 머물 수 없는 로키타와, 로키타와 헤어져야 하는 토리가 겪는 폭력적인 상황 뿐이다. 즉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정치적인 영역으로 전력을 다해 발을 내딛지 않는다. 체류증이 발급되지 않은 로키타와 헤어져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토리의 질문은 로키타를 향한 온정적인 시선을 요청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로키타의 상황은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토리의 질문은 로키타에 대한 그리움으로써 묘사될 뿐 로키타의 체류증에 대한 당위성으로 이용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체류증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온정적인 시선인가, 이들을 둘러싼 역사적인 혹은 현실적인 문제들인가. 카메라는 이들 중 어디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오직 약자를 이용하려는 가해자의 뒷모습만을 끊임없이 쫓아 들어간다. 토리와 로키타는 합법적인
앵벌이노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너무나도 쉽게 불법적인 아르바이트에 동원된다. 이들이 발을 들인 공간은 애초에 불법이므로 그보다 더한 폭력이 발생하더라도 공권력의 개입은 도리어 위협이 된다. 이는 공권력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토리와 로키타가 경찰을 보자 오히려 피하려고 하는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폭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카메라는 사실은 폭력의 막다른 골목을 향하고 있는 셈이다.카메라가 관객의 온정적인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일반인의 온정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토리와 로키타의 상황이 개선되기 때문이다. 언뜻 정치적인 선으로 넘어가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시선은 사실은 가장 정치적인 상황을 상정한다. 토리가 질문을 퍼붓는 면접관조차도 이들을 돕고 싶어하지만 규정이 변경되지 않는 이상 로키타는 체류증을 발급받을 수 없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 특히 <언노운 걸>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의사 제니(아델 에넬 분)가 진료 시간이 끝나 더 이상 진료하지 않아 발생한 의료사고는 제니의 잘못으로 치부될 수 없다. 언뜻 개인의 잘못들로 점철된 것만 같은 사회는 사실은 집단적인 오류에 기반하고 있으며,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역설적으로 가장 개인적인 곳으로 렌즈를 들이대어 이를 폭로한다.
한쪽 다리를 다쳐 토리와 함께 모래 언덕을 하강하는 로키타의 모습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신체의 일부만을 다쳤을 뿐이지만 이동 자체가 불가능해진 로키타에게 남은 선택지는 토리만을 보내거나 토리와 함께 급속도로 하강하는 것이다. 로키타와 하강하기를 선택한 토리에게는 아직 두 다리라는, 즉 체류증이라는 선택지가 있다. 하지만 스스로 도망칠 수 없는, 즉 체류증이 없는 로키타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이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관객의 시선을 대변할 뿐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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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영화는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나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어느 날 문득,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마음이 불쑥 찾아 올 때가 있다.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어 질 때. 나는 영화를 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한가지가 아닌 복잡한 자기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 그 고민은 때로 세상을 멸망시키거나 구해야 하는 상상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고, 점심메뉴로 다투고 난 뒤, 남자친구와 헤어질까 생각하게 되는 일상적인 것도 있다. 누군가에겐 ‘이게 무슨 고민이라고.’ 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일상을 회복하기 힘들 만큼 어려울 수도 있는 일.
일, 사랑, 가족, 친구…
인생에서 걱정과 고민은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여러 괴로움이 어깨동무를 하고 덮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때 영화 속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로 부터, 혹은 별을 지나 우주 저 어딘가의 누군가로부터 뜻밖의 위로를 받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별것 없는 상황 평범한 대사 하나가 마음을 울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새로운 도전할 용기를 내기도 했다. 영화가 가진 힘은 그런 것이었다.
2011년, 나 이 일을 계속해도 되는 걸까? 10년 동안 방송 일을 하며 체력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많이 소모되었던 때였다. 회사에서 긴 휴가를 낼 수 없다면 퇴사를 하고 자발적으로 휴가를 가자 ! 하고 생각 했던 때.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를 보았다.
주인공 두얼은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오랜 바람이었던 누구나 꿈꿀 법한 따스한 카페를 오픈했다. 전직장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며 오픈식도 거창하게 하는데, 열정이 넘치지만 손님들의 발길은 뜸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카페를 운영하던 여동생 창얼은 개업 선물로 친구들에게 받은 잡동사니들의 물물교환을 제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매의 카페는 타이페이의 명소로 자리잡게 된다. 사실 두얼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이 카페의 분위기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35개의 비누에 담긴 35개의 도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남자와 마음을 주고 받게 되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물건을 바꾸는 것에 대해 지금 까지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나아가 공간을 주고 받는 카우치서핑에 대해 알게 되고, 먼 곳에서 온 손님을 카페에 카우치서핑으로 받으며,마침내 자신도 36번째 이야기를 찾기 위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두얼은 미술이 좋아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이모가 상하이로 떠난 다는 소식에 기회를 잡아, ‘진짜 꿈’이라는 자신만의 카페를 시작한다. 영화 시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아한 카페를 하고 싶었던 꿈과 다르게 우아한 카페는 아니네요. 최근에 바뀐 두얼의 가치관을 들어볼까요?” 하고.
두얼이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원했던 카페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 일은 두얼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 “나에게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심리가치다.” 라고 말하는 이 오프닝이 영화에서 내가 좋았던 모든 깨달음을 함축하고 있었다. 삶을 살아나는 것에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정하는 가치와 기준이 아닐까?
인생의 고민이 하나가 아니듯, 꿈도 하나가 아니다. 내가 알던 세상에서 꾸던 꿈이 하나였다면, 꿈을 이룬 세상에서는 새로운 상황과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로 인해 또 새로운 생각과 꿈이 생겨난다. 경험이 다양해질 수록 나의 세계는 확장되고 그렇게 나는 더 커간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을 10년전에는 알지 못했다. 회사 안에서, 지금 하는 일이 최고 인줄 아는 작은 아이였다.
영화 속에서, 차분히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실행해 가는 두얼이 좋았다. 친해지고 싶었다. 세계일주를 떠난 그 어딘가에서 배낭을 메고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타이페이를 다녀오고, 실제 영화 배경이 된 카페도 다녀오고, 당시에는 구할 수 없었던 OST도 구입해왔다. 그리고 2년 뒤, 마침내 세계일주를 떠나 두얼처럼 카우치서핑도 했다. 카우치서핑이라는 것이 마치 돈을 아끼기 위해 남의 집에 자는 것 처럼 보이지만 , 사실 그 집에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마음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그리고 마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세계일주는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덕분에 불편하고 어려워도 여행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쌓여, 두얼처럼 나의 가치관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십년이 지난 요즘도 넷플릭스에서 자주 이 영화를 본다. 두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꿈과 현실 사이를 오르내리며 앞으로 뚜벅 뚜벅 나아가고 있을 그녀를 생각한다. 덕분에 나도 이렇게 달라졌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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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의 씁쓸한 뒷면
이 글은 영화 [판의 미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기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혼자서 책조차 읽을 수 없었습니다. 받아쓰기는 늘 30~40점을 오갔죠. 엄마는 속이 터져 한글 개인 과외라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속 편한 아빠는 그런 거 다 때 되면 한다며 저를 품에 안고 파란 물고기가 바다로 간 이야기를 서른마흔다섯 번째로 읽어주셨죠.
딸이 드디어 한글을 깨우친 그날. 아빠는 신이 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제게 동화책 다섯 권을 선물해 주셨고 그 책은 부부 싸움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그림보다 글자가 많은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동화의 실제 모습. 그러니까 팥쥐와 팥쥐 어머니의 알고 싶지 않은 결말이 담겨있는 '잔혹동화'였기 때문입니다. (참고 1)
덕분에 저는 생애 최초로 받은 조기 교육의 결과 동화가 얼마나 잔혹한지 알게 되었고 산타 따윈 없다는 것을 너무도 일찍 알게 된 시니컬한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사준 동화책에서 아는 글자가 나왔다며 환호성을 치는 저를 보며 쟤를 어쩌누.라는 말을 늘 하셨었는데. 결국 이렇게 커 버리고 말았죠.
영화 [판의 미로]는 스페인 전쟁(내전) 상황에서 오필리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제 겨우 한글을 깨친 제가 읽은 진짜 동화처럼 잔혹하고 또 잔인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기이함과 신비함이 섞여 정말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죠.
영화 전체가 암울하고 어둡지만 오필리아의 환상과 현실의 대비로 인해 더더욱 아름답고 슬픈 영화입니다.
이게 어찌 15세란 말이요
나도 무섭다고요.
사진출처:구글 YTN Science/익숙하지 않거나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개봉 당시,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였습니다. 포스터만 봐도 동화 같은 분위기의 판타지 영화라고 생각했기에 많은 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을 방문했죠. 그 결과 개봉관마다 학생이고 보호자고 할 것 없이 울어 젖혔다는 전설의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동화의 기본 공식을 익히 알고 있죠.
착하고 순진한 주인공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만나며 시련을 겪지만 결국 극복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로 끝나야 디폴트죠.(인어공주 제외)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큰 줄기 자체가 스페인의 내전 이야기를 하고 있죠. 한국 영화 [밀정]을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내부의 스파이가 있고 그를 통해 정보를 얻어 혁명을 일으키려 하는 이야기가 주가 되죠. 그 혼란 속에서 어린 오필리아는 임신한 엄마와 낯선 환경 속에 있게 되고. 그 안에서 만난 요정들과 작고 큰 모험을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동화에 나오는 "의붓"이라는 단어가 붙은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대위는 그 수위를 이미 진작에 넘어버린, 너무도 잔인한 사람입니다. 의심 하나만으로 멀쩡한 사람을 활자 그대로 때려죽이는.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뱃속의 아들만을 사랑하는 남자입니다. 고지식하고 자신의 명예를 누구보다 생각하는 그런 자존심 밖에 남지 않은 사람 말입니다. 그가 벌이는 살인 혹은 살육의 행각은 지금의 제가 보아도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오필리아의 모험 속에 나오는 괴물들 마저 기괴하기 짝이 없죠. 콩쥐팥쥐에서 나왔던 두꺼비는 귀여울 정도로 험악하게 생긴 두꺼비와 오물은 물론. 모든 아이들을 울리기 충분했던 그 "손바닥 괴물"까지 나옵니다. 요정이 잡아먹히는 건 뭐 말할 것도 없죠. 저는 정말 이걸 다 오필리아가 겪었다면 다시 기억을 찾아 공주가 된다 해도 PTSD에 걸릴 것이라는 걱정이 더 앞섰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제가 어릴 적 접했던 동화의 진짜 모습, 혹은 숨겨진 동화의 잔혹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진 달의 앞면이 아닌 숨겨졌던 달의 못생긴 뒷모습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우리가 몰랐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 영화는 그런 동화나 판타지가 가진 아름다움을 걷어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동화를 잃어버린지 오래인 어른들 틈바구니의 오필리아를 통해서 말이죠.
물론 배급사는 진짜 반성(?) 해야 합니다. 15세라뇨.
제가 보면서 먹던 딸기가 목에 걸렸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기예르모 델 토로, 세계관 최강자
역시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사진 출처:구글 etoland/이걸 디즈니가 받아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제겐 팀 버튼 감독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입니다. 음울하고 어둡죠.
제가 색깔과 냄새로 이 두 감독을 구분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팀 버튼 감독은 총천연색에 가깝고, 녹기 시작한 눅진한 사탕에 가깝습니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텁텁함이 있죠.
그에 반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달빛에 비치는 물체의 그림자 같은, 무언가 생명력이 빠져 가는 죽음과 삶 그 경계에 가깝습니다. 대충 꿈도 희망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덕후들에겐 늘 시련이 존재합니다. 이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잘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고 우리에게 그들의 유니버스로 올 수 있는 초대장을 꾸준히 날렸죠. 기괴하지만 각인되기 쉬운 그들의 예술세계는 이제 그들의 이름을 딴 장르로 기억이 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원더랜드가 되었습니다.
기예르모 감독의 취향(?)은 괴수물이었습니다.
물론 장르의 특성상 취향을 심하게 타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재능이 점점 영화 안에서 발휘되는 것을 보는 맛이 있는 감독이었죠. 다른 세계, 혹은 차원에서 불러들인 것 같은 생명체가 튀어나올 때마다 저는 환호성을 지른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감독 특유의 감성을 제가 좋아하나 봅니다.
이 영화의 판(Pan)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염소(혹은 양)가 악마 혹은 나쁜 기운을 불러오는 장난의 정령 같은 느낌의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로테스크 한 (혹은 쏘우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해 낸 감독을 보며 저는 또 한 번 내적 댄스를 춰야 했죠.
그의 또 다른 영화인 shape of water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와 합쳐졌기 때문에 더더욱. 저는 이 불행한 결말과 크리처를 사랑하는 감독에게 홀라당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저랑 똑같이(?) 음울한 동화를 보고 자랐지만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고. 저는 그냥 덕후가 되었네요.
이게 나라냐.그래서 결말은 해피엔딩인가요?
꼭 해피엔딩 이어야 하나요.
사진 출처:구글 뉴스 포인트/오필리아 너무 사랑스러움. 드레스 입었을 때 너무 깜찍했다.
오필리아는 마지막에 죽습니다. 의붓아버지가 될 뻔했던 대위가 쏜 총에 맞아서.
그리고 그녀의 피가 지하세계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 닿아 그녀는 지하 세계 공주로 있었던 기억을 되찾고 백성들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이 영화의 끝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녀는 죽은 상태죠.
결말의 해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오필리아가 실제 지하 왕국의 공주였다는 사람들과 전쟁 때문에 힘들었던 아이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만든 판타지일 뿐이라는 부류로 말입니다.
저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오필리아는 아직 아이입니다. 엄마의 죽음을 비롯한 자신 주변에서 생긴 많은 변화들이 아이에겐 방어 체계를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것이 극대화된 것이 자신이 만든 판타지 속의 세계인 것이죠.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고 목소리를 냈다 해도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이 조그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들은 정보를 통합해 그 세계 안으로 자신이 숨어버린 것이죠.
그렇기에 결말은 더더욱 안타깝고 아픕니다.
오필리어는 고통만 가득한 기억을 안고 죽어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은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죠. 이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작은 아이는 살아있는 동안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관을 찾았던 아이들이 울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공주님이 죽어버렸으니. 자신들에겐 익숙한 결말이 아니었던 것이죠. 해피엔딩이 디폴트가 아닌 동화는 그들에겐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테니까요.
슬프고 아름답고. 그럼에도 이해가 간다.
동화가 당신을 부를 때.
한글을 제대로 쓰지도, 읽지도 못하던 아이는. 잔혹 동화를 읽고 나서 더 잔혹한 세상을 조금은 더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도피하는 방법을 배워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오필리아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지금도 악착같이 동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제가 처한 현실이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아이의 모습으로 본 전쟁의 힘듦과 무서움을 잘 그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씁쓸함과 행복함이 공존하는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 더욱 그러하죠. 이젠 오필리아도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판타지가 아닌 현실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말입니다.
참고 1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말 글이 그림보다 많은 책이었고 나는 내용보다는 내가 아는 글자를 찾아 읽기 바빴음. 근데 엄마의 입장에서는 다섯 살짜리 애가 "엄마 이거 젓갈!! 엄마 팥쥐가 젓갈!! 젓갈 되었대!!! 맞지!!"라고 하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그 말에 엄마는 아빠를 베란다로 쫓아냈다고 함.
참고 2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화 중 크림슨 피크, shape of water, 판의 미로 이 세 편을 가장 좋아함. 감독은 멕시코 사람이었나 그런데 우리나라 전래동화처럼 거기 민화? 도 장난 없다고 한다.
[이 글의 TMI]
1. 정형외과 갔다 옴. 의사 선생님이 운동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안 할 거면 병원도 오지 말라고 함.
2. 집 꾸미는 재미에 폭 빠짐. 아 물론 며칠 안 가겠지.
3. 패딩 찾아야 하는데. 까먹었다.
4. 택배가 하도 와서 이젠 나도 움찔움찔 놀랄 지경.
5. 오늘은 빨리 자야지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