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1-12-11 23:41:48
미싱타는 여자들 영화 시사회 후기 - 여성 노동자들이 겪은 삶의 이면을 보여주다.
과거 대한민국은 급격한 산업화로 발전을 했지만 지금에 비해 노동자들의 인권과 대우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미싱타는 여자들이라는 영화는 공장에서 노동을 하던 어린 학생들이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 생겼던 트라우마와 그날의 기억들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이다. 이들은 평화시장이란 곳에서 시다 일을 했다.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서 노동교실이란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에 노동자의 환경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불편하게 일을 했는데 정해진 근무시간이 없고 일을 쉬지 않고 했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일찍 일을 해야 했던 그들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겨야만 했을까? 마침내 불편함을 참아낸 그 시대의 여성노동자들이 겪었던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털어놓는다.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대에서
열심히 살아간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트라우마도 생기기 시작했다.
하니엘의 영화 미리 소개
산전수전 다 겪어본 여성 노동자들이 과거의 기억을 마주하면서 그동안 겪었던 고통을 털어낸다.
대한민국의 과거는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일찍 철이 든 여성 노동자들은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걸 알기에 노동교실을 만들어서 그나마 학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의 대우는 여전히 좋지 못했다. 노동자라는 이유로 버스 요금도 할인받을 수 없었고 그때 당시에 사회가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못했다.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삶을 살았던 그녀들의 절박함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삶을 잘 버텨온 게 아닌가 싶다. 그 삶의 이면에는 많은 고생과 아픔의 눈물이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의 부모님 세대에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계셨기에 더 나은 근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편리함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런 절차 없이 거쳐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화 과정을 겪은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그 누구보다 다음 세대에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었을까?
내가 누리는 편리함의 이면에는
과거 누군가의 불편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평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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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의 '존'이 다른 '직쏘' 보다 더 마음에 들어
생명 연장의 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직쏘’ 존 크레이머(토빈 벨)이다. 1편에서의 살인극이 있고 시간이 좀 지났다. 존에게 문제가 생겼다. 바로 몸 상태다. 사실 존은 며칠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흔들리는 존. 병세를 치료할 길이 없다는 생각에 좌절한다. 좌절은 곧 분노로 바뀐다. 항암 치료를 받던 도중 환자들의 물건을 훔치는 간호사를 목격한 존. 이 간호사를 납치해 살인 게임에 초대할까 싶었지만 간호사가 물건을 다시 돌려놓자 ‘하지 말아야지’ 싶었다. 이런 존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든다. 바로 존의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페데르손 프로젝트’? 홀린 듯 프로젝트로 향하는 존. 실제로 암을 치유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믿었다. 돈을 보내는 존. 입금은 곧 초대장을 부른다. 항암치료에 나선 존. 하지만 이 치료는 뭔가 이상하다. 이내 존의 분노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최소화
이 영화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중 첫 번째는 불필요한 것들은 최소화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이 영화의 플롯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쏘우’ 시리즈는 오랫동안 혹평을 들어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내적인 것을 신경 쓰는 게 아닌 잔혹한 살인 쇼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팬이 아닌 관객들은 영화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래도 잔혹한 모습을 즐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쏘우 X>는 시리즈가 가진 전형성을 탈피하기 위해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는 다 쳐냈다. 대신 직쏘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행동하게끔 서사를 간편하게 재구성했다. 이 덕분에 명분 없는 살인 게임을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 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직쏘의 상대역은 시리즈가 변화구를 던질 수 있는 토대를 맞이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억지로 직쏘의 인간관계를 서서히 넓히는 것에서 시리즈의 한계를 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쏘우’ 시리즈의 전통을 잃은 것은 아니다. 본작에서도 역시 눈 똑바로 뜨고 보기엔 어려운 장면들이 몇 있다. 이런 고어 묘사를 보기 어려워하는 분들은 눈 꽉 감고 극장에 가시길 바란다. 이렇게 <쏘우 X>는 전작들의 핵심은 바꿨지만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남겼다.
공간 활용
이 영화의 강점으로 뽑을 수 있는 부분은 공간이다. 대표적으로 2부에서의 공간 구성이 흥미롭다. 원래 호러라는 장르 자체가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이행한 것이 <쏘우> 1편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이끌고, 그 사이에 누워있는 인물 셋의 모습이 영화를 상징하는 구도 중 하나다. <쏘우 X> 본 작은 이를 성실하게 구현한다. 어떤 점에서? 바로 인물의 리액션에 집중한 것이 큰 효과가 있었다. 서로의 상황을 각자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활용해서 장르적인 쾌감을 높였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온갖 지형지물들을 활용한 흔적도 보인다. 이게 시리즈가 10편씩이나 나왔기 때문에 이제 살인 트랩이 진부해질 때도 됐다. 영화는 이것을 의식한 듯 인물의 밀도로 호러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는 올해 9월 개봉했던 <잠>과는 대조되는 측면이 있다. <잠>은 집이라는 공간 특성을 활용했다. 윗집과 아랫집의 대비, 이 방과 저 방에 살고 있는 캐릭터들을 영화 안으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쏘우 X>는 이런 ‘여러 군데 공간 활용하기’라는 방식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딱 한 곳만 메인 무대로 삼았다. 발상의 전환으로 다른 호러 영화와의 차이점을 둔 것이다.
호불호가 갈릴 듯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은 요소는 주인공 직쏘의 설정이다. 원래 직쏘는 궤변을 늘어놓는 캐릭터였다. 왜? 직쏘는 시리즈 내내 ‘너희들은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며 사람들을 처형한다. 문제는 이 세계관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람도 직쏘에게 살인 게임을 시킨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직쏘가 이상한 논리로 민간인을 죽였던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7편에서 이에 대해 비판하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영화가 ‘게임과 별 상관없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기본 룰을 어긴 것이다. 이 이유로 직쏘라는 인물의 감정선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단점은 치명적이다. ‘쏘우’ 시리즈가 무엇인가. 바로 직쏘가 벌이는 살인 게임이 핵심인 시리즈 아니었나? 관객이 직쏘에게 감정이입을 못하게 되면 영화 자체에 흥미가 떨어진다. 지금 스크린 앞에서 보이는 신체절단 대환장 살인파티가 아무 의미 없다면 이 끔찍한 광경을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단의 혹평이 당연한 것이다.
이 영화는 시리즈물의 공식화를 피하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직쏘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한 것이다. 시놉시스에서도 읽을 수 있는 부분인데, 직쏘가 무려 사기를 당했다. 영화는 이에 따라 직쏘 입장에서 여러 감정선을 추가했다. 이 감정선에 쉽게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살인 게임에 당위성이 생긴다. 영화가 친절하게 이야기에 몰입까지 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 후반부에서도 빛을 발한다. 원래 이 ‘쏘우’ 시리즈 공통점 중 하나는 강박적인 반전이었다. ‘알고 보니 누가 누구 제자였대!’식의 플롯 전복하기가 ‘쏘우’ 시리즈에서 전통처럼 이어진 것이다. 본작 <쏘우 X>에서는 다행히 ‘누가 누구 제자였대’ 식의 전개가 나오지 않는다. 전작들에 비해 전적으로 현실적인 전개가 이어지는데, 인물에게 깊은 감정선을 넣은 선택이 이야기에 개성을 부여한 좋은 선택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이 승부수 때문에 주인공 직쏘의 캐릭터에 대해 아쉽다고 느낄 관객 분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쏘우 X>은 시리즈물이다. 전작의 전통을 승계하지 않으면 사실 시리즈의 팬 입장에서 차기작을 기다린 보람이 없다. 직쏘가 정의의 사도인 척을 하는 거지 실제로 그런 인물은 아니기 때문에 거리감을 느낄 관객도 있을 법하다. 어떤 관객들은 이를 단점으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사람 죽이는 것 말고 이야기 내적인 것 집중한 탓에 우리가 아는 ‘쏘우’ 시리즈의 쾌감과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이질감도 느껴진다. 이 부분은 직쏘의 조수 캐릭터에게 특히 더 강하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두 인물을 이렇게 설정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두 인물에게 이런 면모가 없었더라면 진부한 살인 게임을 또 보는 꼴이기 때문이다.
여전한 것들
시리즈에서 승부수를 둔 영화다 하더라도 분명히 단점은 있다. 우선 후반부 전개다. 사실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이 후반부를 위해 종속됐다고 해도 봐도 무방하다. 대표적으로 직쏘가 초반부에 만나는 사람들은 후반부를 대놓고 암시한다. 직쏘의 관점에서 이 인물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더 설득시켰다면, 감정선이 깊었더라면 후반부의 전개가 더 입체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또 이 인물의 서사를 아주 조금만 더 줘도 큰 문제가 없었다. 서사가 부족하니까 이 사람의 존재가 이야기 내내 에 전제조건처럼 깔리는 것이 체감이 잘 된다. ‘이렇게 쉽게?’ 싶은 것이다. 또 후반부로 넘어가서 이 인물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간단하다. 소위 말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측면이 어느 정도는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앞에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몇 장면이 있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듯싶다. 애매하게 ‘예상 못한 반전’을 추구하는 것보다 빌런의 악함을 강조해서 두 인물의 대결구도를 강조했어도 재밌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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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진 도형을 넘어 선
DIRECTOR. 소마이 신지
CAST. 타바타 토모코, 사쿠라다 준코, 나카이 키이치 외
SYNOPSIS.
화목한 가정을 자부하던 6학년 소녀 렌
어느 날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이혼을 선언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싸워도 참았어 근데 왜 엄마 아빠는 못 참는 거야?”
엄마가 만든 ‘둘을 위한 계약서’도 싫고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아챌까 두렵다
“엄마, 부탁이 있어 이번 주 토요일 비와 호수에 가자”
몰래 꾸민 세 가족 여행 엄마 아빠와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POINT.
✔️ <태풍클럽>으로 뒤늦게 국내 시네필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작품. 아마 이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고른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 공간이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그려진 영화
✔️ 1993년 당시 46회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으로 선정되었고,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복원영화로 상을 받았습니다.
✔️ 주인공 렌의 똑똑하고 주체적인 모습이 눈에 띕니다. 개인적으로는 <비밀의 언덕> 명은이와 소개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둘 다 보통 어린이가 아니니 언니동생으로 잘 지내보거라...
✔️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영화의 주요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 글입니다.
도형을 이루는 최소 선의 개수는?
정답은 세 개다. 점 또한 자체의 도형이기는 하지만, 선을 여러 개 연결해 닫힌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이 최소 세 개가 필요하다. 이 중 선이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더 이상 도형이 아니다. 남은 두 선은 그저 어떤 지점에서 만난 두 개의 선이 된다. 마치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나름대로 애쓴다고 작성한 '둘을 위한 계약서'가 도무지 가족적이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렌의 상황처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고군분투하는 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지만 이등변삼각형의 두 면은 서로 대화도 하지 않고 소스 병에 손 닿는 것조차 꺼린다. 두 사람의 꼭짓점은 날카로운 예각을 그리고, 그 맞은편 선에서 대화를 이어가려 애쓰는 렌의 말들은 도무지 그 예각에 닿을 수가 없다.
렌은 계속해서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강조하고, 심지어 아빠의 이사 당일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도 소리치는데, 정작 아빠에게 하는 인사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코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다. 아빠에게도 재차 엄마가 보고 싶은지, 집에 가고 싶은지 묻는 렌의 말은 사실 '답정너'에 가까운 질문이다. 렌의 언어는 자신이 배워 온 (정상가족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소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을 때에는 렌의 선택권이 반영되지 않았는데, 이루어진 가족이 해체될 때조차 렌의 선택권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렌의 소망을 들어주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렌은 무능한 어른들을 대신해 달리고 또 달린다. 러닝타임의 상당분을 소요해, 영화는 달리는 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어쩐지 미덥다. 어른들은 그저 빈자리를 침묵으로 응시하고, 술잔으로 회피할 뿐이다. <태풍클럽>에서도 그랬듯,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서 어른들은 또다시, 보호자로 기능하지 못하고 부재중이다.
부재중인 어른들과 주체적인 아이들의 세계
아이들의 세계는 반대로 다채롭다. 비록 어른들에게 학습된 '정상가족'의 세계를 답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아이들에게 가득하지만, 그래서 이혼이나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는 가정과 어떻게든 선을 그으려고 하지만, 선을 그으려는 감각 자체가 이미 그들이 내심 알고 있다는 증거다. 어른들의 세계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상가족'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걸. 하다 못해 엄마 아빠의 싸움에 가슴 덜컥해 본 경험이라도 있을 테니까.
아이들의 생명력은 슬쩍 지나가는 교실 장면에서도 빛난다. 교사가 잠시 잠들어 있는, 그래서 또다시 어른이 '부재중'이고 아이들만이 주체적인 생명력으로 와글와글 움직이는 교실에서. 어떤 아이는 대범하게 교사 얼굴에 장난을 치고, 어떤 아이는 그 시끄러운 교실에서 꼿꼿하게 코로 오카리나를 분다.
교실에서 렌은 (코로 오카리나를 부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단독자다. 가족 이야기도 스스로의 힘으로 서술하고, "내가 뭐라고 하든 내 맘"이라고 한다. 스스로 렌의 편이라고 하는 미노루의 존재도 렌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에는 거울 속에 위치하고 있다. 마침내 렌이 단독자처럼 느껴지지 않는 장면은, 부모님의 불륜과 이혼을 거쳐 여기까지 전학 온 학생, 교실에서는 척을 졌던 다치바나와 장을 보고 자전거를 끄는 장면이다.
두 아이는 가족을 위해 장을 보고, 가족 걱정이 가득한 대화를 하며 자전거를 끌고 언덕길을 올라간다. 그 모습을 흔히 '가장의 무게' 혹은 '가족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표현되는, 부모 세대가 겪을 법한 감정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갑자기 내리는 폭우처럼, 현실은 아이들의 세계에 쏟아온다. 부모의 변화는 아이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있는 힘껏 생을 끌고 가려 애써도, 폭우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몸보다 마음이 웃자라 버린 아이들은 더딘 성장이 서럽다. 까치발도 모자라서 점프를 하면서 빨래를 널고, 엄마가 쓴 '둘을 위한 계약'을 찢어버리는 이상으로 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렌이 그동안 해왔던 말을 하나도 듣지 않은 듯한 부모는 뒤늦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며 나와서 이야기하라고 한다. 렌의 행동으로 부모의 침묵은 마침내 깨지고, 싸움이 시각화되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냐"는 렌의 외침은 또다시 응답받지 못한다.
이것은 삼각형이 아니다
삼각형 테이블부터 해서 렌의 집안 풍경은 가족들의 관계와 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어 여러 모로 대단히 흥미로운데, 이 '욕실 사건' 전후로 가족들이 집안에서 빙빙 원을 그리는 것 또한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다. 삼각형과 원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중심점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접점이 존재한다는 것, 어떤 지점을 짚으면 그 자리에서 도형으로 뻗어나가는 선의 길이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특징이 렌의 집안에서는 산산이 깨져 있는 것이 보인다. 더 이상 이 도형은 삼각형이 아니다.
한 번에 깨지는 것도 아니고 마치 깨진 유리를 자근자근 밟듯이, 계속해서 깨지고 또 깨진다. 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민 손길들이 모두 다 거절당했다는 의미다. 낡은 기린 인형도, 심지어 렌이 야심차게 준비한 호수 여행에서 엄마와 아빠가 하는 말들도.
결국 함께 하려던 여행은 각자 제각각의 여행이 된다. 렌은 여행 기간 동안 엄마와도 아빠와도 짧은 대화를 나누지만, 같은 높이에 서지도 못하는 (아빠와는 제방의 위아래에, 엄마와는 다리의 위아래에) 상황에서 나눈 대화는 그동안 이미 이 도형이 깨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대화로 끝날 뿐이다.
결국 렌은 꿈꿨던 것처럼 엄마아빠와 불꽃놀이를 보며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보내는 데에 실패한다. 대신 아들이 죽었다는 노인의 가족을 만나 하루를 함께 보내고, 그 끝에 늘 뛰어다니던 운동화 대신 낯선 게다를 꿰어 신고 뒤뚱뒤뚱 걸으며 혼자 밤을 보내게 된다. 다소 주술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렌의 그 밤은 어쩌면 일종의 성인식, 마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수준의 의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붙은 짚을 돌리느라 안전모를 쓰고 물을 끼얹어 가며 버티는 사람들을 거쳐, 혼자만의 호숫가이자 불가인 곳에 다다른다.
깨진 도형을 두고, 혼자만의 선으로
성장의 필수 조건은 상실이다. 성장의 교과서 같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만 봐도 라일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빙봉을 잊고, 유니콘 장난감에 대한 애정도 여러 감정 안에서 퇴색된다. 렌의 경우에는 라일리를 비롯해 '정상가족' 안에 있는 경우에 비해 더 큰 것을 잃었지만. 밟고 선 세계의 면이 깨지고 흩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 균열을 피하려 부지런히 달렸지만, 끝내 이미 깨진 도형의 면이 상실되었음만 깨닫고 만다.
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온전한 홀로 됨을 축하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 엄마와 렌의 구도는 호수로 향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렌은 아주 다른 인물이 되어 있다. 렌은 더 이상 깨진 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도형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뻗어 나가는 선이다. 수많은 선들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수직의 각으로 만나기로 할 것이며, 어떤 선과는 평행을 감지하며 뻗어갈 선. 웃자라야만 했던 렌의 시간이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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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부한 듯 새롭게
진부한 듯 새롭게
디즈니가 서사를 변형시켜 가는 방식에 대하여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감을 받았을 뿐 디즈니의 전형적인 서사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그 탓에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게 된 픽사의 <소울>과도 비교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서사가 어떤 식으로 영화 안에서 작동하는지도 볼 수 있다. 서사는 비록 전형적이지만 서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의의는 조금 뻔하지만 짚고 넘어갈 만하다. 디즈니 최초로 동남아시아에서 영감을 받은 이야기라는 점 이외에도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 조력자가 전부 여성 캐릭터라는 점은 시사점이 있다. 서사 속 남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큰 역할을 하지 않거나 초반에 돌로 변해버린다. 그러면서도 여성 캐릭터에게 주어지는 전형적인 감정적인 모습도 크게 드러나지 않아, 라야(켈리 마리 트란 분)와 나마리(젬마 챈 분)의 멋진 격투신을 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장점이다. 디즈니의 전작에서는 서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도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가 모두 여성인 적은 없었다(
인어공주 얘기하지 말구요..). 다만 동남아를 배경으로 한다면서도 메인 성우 대부분이 한국계 혹은 중국계라는 점은 여전히 헐리웃이 아시아를 세밀하게 구분해서 보지 않고(전문 용어로 '퉁쳐서')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도 한다. 참고로 주연인 켈리 마리 트란은 베트남계지만 시수 역의 아콰피나는 한국과 중국 혼혈계이며 벤자 역의 대니얼 대 킴, 비라나 역의 산드라 오는 한국계이고 젬마 챈은 중국계다.전형적인 디즈니 공주님 서사를 따르고 있긴 하지만 디즈니가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신뢰에 관한 이야기다. 말 그대로 속고만 살아 세상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나로서는 으이그 저런 쯧쯧.. 싶은 장면이 많기는 했지만 기본 관객층이 어린 연령대를 향하는 만큼 세상을 향한 따스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디즈니의 진심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조력자로 나선 마지막 드래곤 시수는 속고 속아도 사람들의 진심을 믿는다. 디즈니 서사에서 순수한 캐릭터 하나쯤은 있어야 하기에 학습 효과라고는 전무해 보이는 시수가 필요했겠지만 그 캐릭터 대부분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알라딘>의 지니, <인어공주>의 세바스찬, <겨울왕국>의 올라프 등 타인을 속일 줄 모르고 순수 그 자체에 가까워 보이는 캐릭터들은 디즈니에서는 언제나 인간이 아니었다. 언젠가 동물 영혼은 너무 순수해서 인간으로 잘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다음 생에서는 다시 동물로 태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디즈니 애니메이터들도 이렇게 생각하는걸까?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을 깨우치는 건 언제나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바꿔 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노답(..)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현실 세계에는 시수도 올라프도 세바스찬도 없으니 디즈니랜드를 벗어나는 순간 악몽이 시작되는 건 당연해 보인다.
시수의 인간을 향한 믿음은 절대적으로 강력해서 자신의 남매들이 희생해서 만든 드래곤젬이 부숴지고 다섯 조각으로 나눠져 드룬을 도로 불러왔다는 말에도 굴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시수를 포함한 모든 드래곤들이 돌로 남아서 인간이 파멸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인데 시수는 자신을 찾아낸 라야와 라야를 쫓는 나마리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는다. 어쩌면 시수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는 데는 신뢰란 결국 불신을 타파하고 태어나는 것이라는 데 있을지 모른다. 분을 믿지 못하던 라야는 아기 사기단에게 속고 분과 사기단이 배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보고서야 경계심을 내려놓는다. 라야가 태어난 시대는 드룬이 언제든 출몰할 수 있는 시대였으며 모든 드래곤이 돌로 변하거나 잠든 시대였다. 드래곤젬이 있었는데도 돌로 변한 드래곤이 돌아오지 못한 데는 인간들의 불신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젬이 작동되는 방식은 영화의 시작과 후반부가 동일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은 작동시키는 주체다. 서사적으로 라야에게 모험을 제공하기 위해 제작진은 라야가 어느 정도 평화로운 과거를 기억하되 죄책감에 기반한 동기를 제공해야 했고, 이를 위해 '드래곤은 없지만 드룬도 없는' 세상에서 이야기가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드래곤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같은 드래곤젬을 작동시키는 주체를 변경하는 방식으로 서사구조가 완성된다.
때문에 서사는 진부한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배경과 주요 캐릭터들의 성별을 여성으로 설정하는 방식으로 신선함을 더한다. 그럼에도 디즈니가 골라잡은 주제가 '신뢰'라는 데는 박수를 보낼 만하다. 지금껏 디즈니가 다뤄온 주된 주제는 <겨울왕국> 정도를 제외하면 모험과 (주로 이성간의)사랑이었다. 픽사와 결합한 초기작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는 모녀지간의 사랑으로 살짝 변형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디즈니는 모험과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디즈니의 주인공이 대부분 공주(로 대변되는 여성)이기에 모험과 사랑을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이 나름의 의의는 있지만 성인 관객에게 소구하기에는 진부한 주제다. <겨울왕국>에서는 자매애로 살짝 변형시켰지만 안나의 연애 서사가 빠지지 않았기에 엘사로 대변되는 능력녀는 그에 걸맞는 상대를 부여받을 수 없는지, 아니면 여성에게 연애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기도 했다. 이에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모든 메인 캐릭터에서 연애 서사를 제거하고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를 모두 왕국의 후계자이자 성인과 청소년의 경계선으로 설정한다. 라야와 나마리는 왕국의 후계자이지만 후사를 걱정할 나이도 아니며 무너진 쿠만드라의 현실에 연애따위 걱정할 겨를이 없는 인물들이다(
그냥 라야랑 나마리가 사겨도 될듯하다..). 이렇게 연애 서사를 제거한 디즈니는 그 자리에 신뢰라는 새로운 주제를 위치시킬 수 있었다.라야의 출신지가 심장의 땅으로 설정된 데는 아마도 주제의식 강화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전신에 혈액을 공급하는 기관이자 감정을 느끼는 기관(실제로는 뇌지만)으로 상징되는 심장부는 쿠만드라의 재건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벤자에게 어울리는 출신지다. 그런 벤자를 닮은 라야는 처음 보는 나마리를 믿고 드래곤젬을 보여주지만 공격을 상징하는 송곳니의 땅 출신인 나마리는 보자마자 라야를 배신한다. 이 배신은 후에 시수를 통해 신뢰로 거듭나게 되는데 거시적으로 라야와 나마리의 불신과 신뢰 회복이라는 과정을 통해 드래곤젬이 작동된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마리가 라야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시수는 깨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라야가 죽을 때까지 쿠만드라는 분열된 채로 남았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쿠만드라의 재건은 나마리의 배신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어린 나이부터 배신이나 배운(..) 나마리에게 라야가 시수를 믿고 신뢰를 보여준다는 점은 드래곤이 실존한다는 것보다 더한 판타지에 가깝지만 디즈니 계열의 서사에서는 필수적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시수가 나마리를 믿었다 한들 라야는 나마리에게 결코 신뢰를 보내지 않았을 테지만 드룬이 쿠만드라를 잠식해 라야에게(나마리에게도) 선택지가 남지 않은 상황으로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라야는 나마리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나마리만이 남은 상황에서 나마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하지만 이를 신뢰로 포장하는 것 또한 디즈니의 능력이리라.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 디즈니가 아닌 <얼음과 불의 노래>의 저자인 마틴옹의 손에서 탄생했다면 쿠만드라는 결코 재건되지 못했을 것이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인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장르가 판타지임에도 인간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과 정치 풍자로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라야와 나마리가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있었기에 서로에 대한 신뢰라는 순수한 믿음이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엔 메인 캐릭터 중 하나인 대너리스는 설정상 소설 초반부 10대 초반의 소녀다. 디즈니의 순수한 서사는 현실에서 도피하기에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현실과의 괴리까지도 감싸안아야 한다. 디즈니의 서사는 현실로 나아가지 못하기에 진부하지만 그만큼 서사의 기본 구조에 충실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조금씩 다양성을 시도하는 디즈니가 언젠가 주어진 틀 안에서나마 새로움을 제시하길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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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결국 다시 혼자가 될 것이란걸 알기 때문에
업보. 불교에서 쓰는 말이다. 선악의 행업을 말미암아 삼은 과보를 뜻한다. 이 업보의 주체는 상황마다 다르다. 인간관계에 정답이란 없으니 당연하다. 내가 업보를 돌려받을 수도 있고 타인이 누군가에게 줬던 상처를 내가 입힐 수도 있다. 불교를 정의하는 또 다른 가치관이 있다. 윤회다. 생명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내가 지금 태어났다고 한 건 언제쯤 죽는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또 나는 다른 무언가로 태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좋은 일 나쁜 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금 하품을 크게 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업보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크게 준 상처의 대가를 돌려받고 있는 셈이다.
이 가정을 계속해서 곱씹다 보면 인생이 허무해진다. 공감을 못 받으면 어떡하지. 이겨내도 막상 같은 시련이 덮치면 어떡하지.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일인데. 이러다 내가 받은 상처가 세상의 기준에 끼지 못한 게 된다면 참 외롭지 않을까. 이 감정이 내가 단 1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런 거겠지.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상대를 모욕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고, 나 역시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주변인들에게 더 감사해야 한다는 걸. 갑자기 나더러 화려하다고 했던 내 스승 중 한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연락할 일은 없어 마음으로만 그분의 행복을 기원한다. 나는 내가 성공했던 일들보다 훨씬 더 초라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에 휘둘리는 인간이기도 하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아무것도 없는 영화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눠진다. 한국의 인기 여배우가 유명 영화감독과 불륜설이 난다. 국내 여론은 당연히 난리가 나고 베를린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아는 언니랑 대화를 나눈다. 1부 끝. 2부는 여배우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불륜이 났던 남자 감독과 만난다. 2부 끝. 이 영화는 줄거리만 단출한 게 아니다. 영화의 화법도 조용하다. 플롯이랄 게 없다. 조명도 제대로 안 된 것 같고. 인물 갑자기 튀어나오고. 대화도 사실 의미가 없다. 난 왕가위를 좋아한다. 왕가위 영화의 핵심은 때깔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왕가위의 감성과는 전혀 딴판이다. 왕가위는 스트릿룩으로 멋을 뽐낸 사람쯤 된다면 (이 영화에서의) 홍상수는 맨투맨에 슬랙스만 입었는데 신발이 짚신인 사람이다. 난 난해한 옷차림인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비춰서 과연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없다. 이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건 없다. 2021년 오늘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알았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딱히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혼자 밤 해변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공유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말이 아니라 상황을 보여주려고 했다. 감독은 어떤 감정을 생각하고 이 영화를 쓴 걸까? 난 외로움과 후회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영희가 유일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공간은 해변이다. 그녀는 애인을 좀 많이 신경 쓴다. 친한 언니에게도 애인 이야기를 한다. 지인들과 술 먹을 때도 애인 생각을 한다. 해변에서도 애인의 얼굴을 그린다. 그러다가 해변에서 잔다. 시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냥 그녀는 그러고 만다. 아무 일 없는 듯이. 시간이 지나 그녀의 그리움이 어떻게 됐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2부를 보자. 바다에서 지인들끼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다. 근데 이건 꿈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2부가 끝났다. 영화 안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던 건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다. 모든 게 꿈이었다. 결국 그녀는 혼자서 길을 걷는다. 영화의 시작은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었는데 끝은 혼자다. 갈등의 해결? 그런 것 없다. 주인공의 해피엔딩? 없다. 새드엔딩? 당연히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 상황은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외로움이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그런 막연함이 외로움이라 생각한다. 영희는 혼자서 소리친다.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냐고 주변인들에게 묻는다. 근데 이게 꿈이다. 내가 진짜 나쁜 년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 마저도 혼자만의 착각으로 끝났다. 그뿐일까? 영희의 애인인 감독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본인만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다. 결과적으로 비행기 타고 13시간이나 걸리는 베를린에서 남자를 생각했던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버렸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그리움은 꿈으로 매몰됐다. 남는 게 없는 셈이다. 이게 홍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감정이다. 외로움이다. 우리는 초입 10분 만에 이 영화가 이러다가 끝날 거란 걸 알고 있다. 감독이 홍상수니까. 근데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밤 해변을 보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다. 어차피 세상에 나를 공감할 수 없는 건 나밖에 없단 걸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엔 이유가 없다. 그냥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가장 외로워진다. 그리고 그게 내가 만든 이유 때문이란 걸 알면 걷잡을 수 없이 후회가 커진다. 바닷가에 홀로 누워서 잠을 자고 싶다. 그냥 멍하니 시간만 지나면 좋을 테니까. 좌절과 외로움을 겪는 사람들, 그러니까 나 포함한 모든 이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다. 아무것도 없을 땐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마지막 엔딩신 바로 전까지를 보니 아마 홍상수 감독도 그런 것 같다. 외로우니까. 이 모든 게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나 보다.
근데 마지막 엔딩신을 보자. 영희는 일어나서 똑바로 걷는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단 걸, 다 의미가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단 걸 아는데도 앞을 보며 걸어간다. 외롭다는 뜻이다. 근데 1부에서 남자 등에 업혀 가던 모습이 아니었다. 2부는 혼자서 걷는다. 이제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난 이 영화의 그녀 모습에게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외롭지 않은가 보다. 아무도 찾지 않아도 될 정도로 씩씩해졌나 보다. 영희는 후회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후회는 어차피 우리의 곁에서 영원히 떠나가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진다.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용서를 해주지 않을 때가 많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영희는 이 모든 게 허상임을 알고도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앞으로만 걷는다. 난 이런 그녀의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후회가 작동한 후의 방식과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나라는 인간이 비호감 덩어리라 멀어질 수밖에 없던 모순적인 순간들. 뭐 그런 순간이 우리의 일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걸 벗어나지 못하면 후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또 막상 그걸 세상이 이해해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냥 방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우리는 걸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세상에게 상처를 주고도 앞으로 걷는다는 건 받은 이들의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 셈일 테니까. 현실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홍상수는 부인에게 큰 상처를 줬다. 사실 어찌 보면 질이 안 좋은 사람이다. 그는 이런 자기의 모습을 영희에 투영해 우리의 한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 알아.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단 걸. 그리고 내 애인도 이해할 수 없겠지. 내가 누리던 인기 영희의 주변인처럼 다 꿈처럼 사라지겠지. 사랑도 언젠가 실패할 테고. 그럼에도 영희는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걸었다. 외로움과 후회를 보여줘도 사실 자기는 선택지가 없단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홍상수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하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내가 잘못한 일에 내가 외로움을 느끼던 타인이 나에게 가한 이기심이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게 인생사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모순이고 후회 속에 갇혀 나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변명한 셈이다. 나도 외롭고 후회한다고. 이게 내가 느낀 감정들이라는 걸 보여줬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는 바도 없이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을 완벽하게 비유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끊임없는 루틴의 반복 속에 산다. 반복되는 일상 속 비호감 덩어리인 나.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때의 나만 있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게 꿈같아서 즐거웠던 시간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그러면 어때. 이 세상은 모순덩어리다. 내가 보이는 것들이 타인은 눈치 못 채는 순간의 연속이다. 타인과 교감하는 순간까지 심지어 꿈같이 사라질 때가 부지기수다. 이건 결국 후회나 외로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영희처럼 앞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시간 속에 우리의 삶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다. 회의감이 가득한 게 우리의 삶이라고 한들 홍상수는 이 감정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닌 감독이다. 홍상수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지만 나도 그에게 설득당해버렸다. 처음엔 양홍원의 <오보에>를 리뷰하려고 시작했던 글이 점점 길어졌다. 굉장히 중요한 기획서를 써서 모 교수님에게 내야 하는데 한 3시간 동안 이 글만 썼다. 이제는 해변에서 혼자 배회하지 않아야 할 텐데. 공부도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7월 말의 밤이 조용히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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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폭력의 낭만화, 낭만의 폭력화, 예쁜 영화는 아니야
예쁜 영화는 아니야 (Not a Pretty Picture,1976)
이 작품은 마샤 쿨리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간 기록이자 ‘강간’이라는 폭력이 어째서 문화가 되었는지에 공론을 시도한 작품이다. 2022년 복원되어, 2024년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마샤 쿨리지 감독은 미국에서 영상 창작과 관련하여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는 창작자이다. 72년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감독 조합에서 최초의 여성 조합장을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미국에서 ‘여성 창자가’로서의 위치를 계속 지킨 선배인 것이다.
영화의 계기는 시작과 동시에 바로 밝혀진다. 쿨리지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여, 이를 통해 당시의 감정과 이유를 찾아보고, 이 경험을 나눔으로써 ‘강간 문화’를 공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강간’에 관한 ‘피해자-가해자’의 구조를 분해하고, 피해자의 수치심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오류를 짚어내며 (당시) 현대의 뒤틀어진 성문화에 관하여 자연스럽게 고발하는 모습을 띄기도 한다. 이는 기존에 갖고 있던 사고의 흐름과 다른 방식의 해석을 제시한다. 더불어 만티 배우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쿨리지 감독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된다. 나는 이 프로젝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여 객관성을 찾고, 내가 갖고 있던 주관적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시도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한계가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 트라우마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힘이 어느 정도 부축될 수 있어야 실현 가능한 급진적인 치료법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실제로 재현(연극)을 통하여 나를 분석하는 시간을 갖기 전에 다른 사례를 보면서 미리 괴로움의 타격감을 낮춰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재현의 방식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므로, 우리는 이런 방안의 존재를 인식하고, 다른 시선의 해석을 고려해 볼 수 있게 된다.
영화의 구조가 독특한데, 쿨리지 감독의 실제 있었던 강간의 경험과 미셸 만티 배우의 경험도 포함하여 이루어진 ‘믹스-다큐멘터리’이다. 픽션이기도 하면서 논픽션이며, 다큐멘터리이면서도 극이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다큐멘터리에서 ‘극(재현)’과 ‘내레이션’이 같이 등장하는 경우, ‘극’에 해당되는 장면은 예시로서 등장하고, 이후 내레이션이 설명과 전개를 담당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극’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재현’을 극의 밖으로 꺼내온다. 허구성을 최대한 덜어내고, 객관성을 살리고자 하는 방식이지 않았나 싶다. 제4의 벽이 눈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우리가 극에 관한 이입에 방지턱을 넣어주는 역할이 되어준다.
‘강간’이라는 주제는 아직도 우리에게 낯설고, 피해자에게 부당한 감정을 당연시되는 고질적인 폭력 중 하나다. 그래서 그런 만큼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의해서 쉽게 가해자를 동조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구조에 응할 수 있다. 가해자의 폭력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피해자의 수치심은 반비례하게 된다. 여전히 사건의 연장선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인 부당한 폭력인 ‘강간’에 관하여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재현하는 과정에서 ‘브레이크’라는 장치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쿨리지 감독은 극과 다큐멘터리의 틀을 깨트리고, 간섭하고, 혼합하여 새로운 구조를 만든 것이다. 어찌 보면 통일되지 않는 비 완성성이 안정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그래서 내게 구조적으로도 참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다루기 어려운 주제일수록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여 순응 대신 어떻게든 반기를 들겠다는 강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이런 강렬한 도전은 파격적인 형태로 비칠 수 있지만, 그만큼 더 강력히 파고들어가 인식해 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영화를 관람하게 된 계기는 요 근래 내가 ‘섹스-강간’에 관한 주제에 관심 많았고, 이에 걸맞은 영화라 안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낭만, 설렘이라는 낭만, 성(SEX)라는 낭만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낭만이 폭력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폭력’이라 인지하기가 어렵다. 언뜻 ‘낭만’이란 포장지가 폭력을 정당화하고, 가해자에게는 면죄부를 피해자에게는 아예 사건을 파악할 수 없도록 교란시킨다. 우리가 사랑하던 낭만이 어째서 폭력이 되는 걸까. 이는 ‘성(SEX)’의 문화가 치밀하게 권력구조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극중 강간의 장면을 재현하면서 가해자를 맡은 배우와 피해자를 맡은 배우 그리고 그 사건의 당사자인 쿨리지 감독은 중간중간 서로의 견해를 밝히고, 각자의 의견에 반응을 숨김없이 표현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남성에게는 ‘강간’이란 심각하게 다가와서는 안 되는 성취이자 달성 목표이고, 여성에게 ‘강간’이란 남성의 성취욕을 방해한 치욕의 대가로 작용한다. 오래전부터 이어온 악습인데, 여성과 남성이란 성별 이분법의 권력구조가 ‘강간 문화’를 용인해 줬다. 이 문화를 통해 사건의 제공자는 분명하게 남성이지만, 여성이 자초한 일로 해프닝으로 정리되고, 걸맞지 않은 고통을 부여받는다. 이는 피해자인 여성에게 수치심이라는 잘못된 감정을 심어주고, 불쾌감이라는 권리를 놓쳐 버리게 된다. 이렇게 낙인은 계속 유지되고, ‘강간 문화’는 더욱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비키지 않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여기에 쿨리지 감독은 ‘직시하기’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의 오류를 파악하고, 놓쳐버린 권리를 깨닫는다. 우리가 폭력을 저지르지 않을 권리, 우리가 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낭만을 즐길 권리를. 남성은 가해자지만 동시에 그들도 받은 피해가 있다. 그들은 사회가 부여한 가부장에 ‘폭력’이란 잘못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해, 이내 저지르게 한다. 폭력을 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늘 ‘성범죄’와 관련하여 끝마무리를 할 땐, ‘성교육’을 빼놓기가 어렵다. 만약에 남성들이 성교육을 받았더라면 폭력을 인지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여성들은 폭력 이후의 거듭되는 폭력에 벗어날 수 있었을까.
여전히 사회는 피해자에게 범죄를 조심하라고 한다. 그리고 예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전에 가해자가 가해를 저지르지 않게 알리는 것이 피해를 줄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낭만이란 허울에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폭력의 재생산을 방지한다. 폭력이란 피해를 대처하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가 예방하는 것도 힘들다. 그러니, 부디 폭력의 발생부터 짚어지길 바란다.
영화를 보면서 ‘피해자’의 생각뿐 아니라 ‘가해자’의 생각도 함께 듣게 됨으로 전체적인 틀을 바라보고, 더 큰 시야에서의 불합당함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공론을 시도한 쿨리지 감독의 용기와 도전에 인상이 참 크다. 미시적인 출발이 거대한 가시성을 이뤄냈다. 개인에서 사회 전체로까지 생각을 폭을 넓힐 수 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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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트 클럽 / Fight Club
< 줄거리 >
매일 똑같은 루틴의 생활과 목표의식 없는 삶에 지쳐있던 주인공.
주인공은 그런 삶에서 느끼는 공허와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질병소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과 똑같이 매일 모든 모임에 참석하는
수상한 여자 말라를 만난다.
그녀에게 더이상 마주치지 말자며 말하고 떠나는 주인공.
그리고 몇일 후 집에 돌아오는 비행기 옆자리에서
비누판매원 타일러를 만나게 된다.
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의 집이 불타는 것을 보고
한 번 보고 말 사이라고 생각했던 타일러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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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파이트 클럽 얼굴 담당. 이름도 엔젤 페이스임.
< 느낀점 >
삶의 공허함과 무너져 버린 자아의식을 회복하기위한
그들만의 다소 과격한 방법
YELM
현대사회에서 모든 인간들은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 공허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이 택했던
첫번째 방법은 가구 쇼핑
두번째 방법은 질병소모임
그리고 그가 택한 가장 좋은 방법인
세번째 방법은 파이트 클럽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폭력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것이
비단 남성들만의 일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입장을 대입해서 생각해봐도,
화가나거나 무언가에 억눌려 있을 때
배게를 세게 치던지, 허공에 소리를 지르던지,
아무도 없는 빈방에 홀로 서서 평소하지도 않던 욕을 마음껏 외쳤을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화' 가 풀리지 않았던가?
폭력이 아니더라도 진짜 억제된 본능에 충실했을때
그제서야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현세대의 고통을 진짜 '본능'에 의존하여
해소하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을 제시해 준 것 같다.
인간은 인간다울 때 비로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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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도 분명히 마음 속 깊숙이 어딘가에
타일러 더슨을 숨겨 놓고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엔딩씬은 뭔가 곱씹을수록 마음이 아려온다.
저 무너져 내려가는 건물들은 자신을 억눌러온 사회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지만,
타일러를 없애 버린 주인공의 행동은 결국 본능과 자유보다는
사회에 자신을 맞춰가겠다는 의미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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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엄청 기대했던 영화여서 그런지
보고나서 약간의 실망을 하긴 했지만,
영화를 다보고 리뷰글을 적다보니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이 영화는 2번이상 보았을 때 그 진가를 알아본다던데
그 말이 틀린말이 아닌 것 같다.
반전은 솔직히 쫌 흔한 클리셰여서 딱히 놀라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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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4」시리즈 속 모든 상징과 철학 뽀개기 #03 | 매트릭스 인문학적 리뷰 | 매트릭스 리저렉션 리뷰 | 매트릭스4 리뷰 | 매트릭스4 해석 | 매트릭스 리저렉션 해석 |
?《매트릭스4 리저렉션》(2021) 영화리뷰 / 매트릭스4 리저렉션 리뷰
《매트릭스 1~3》 인문학 결말포함 영화리뷰 #3
*후속영상
#1 [네오는 테스형♪] https://youtu.be/gckW2TYRFMc
#2 [현실은 진짜일까?] https://youtu.be/wfvqm5HBRb0
#4 [오라클은 악마다?] https://youtu.be/fLgWf7NWkn8
#5 [스미스는 왜 졌을까] https://youtu.be/Uas0KZDCQec
*추천영상
- 매트릭스1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댄 크라치올로, 캐롤 휴스, 리차드 미리쉬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외
제작사: 실버 픽처스,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아츠 엔터테인먼트, 그라우쵸 II 필름 파트너쉽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미국 1999년 3월 31일, 대한민국 1999년 5월 15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6300만 달러 ~ 6500만 달러
상영 시간: 136분
북미 박스오피스: $171,479,930 (1999년 9월 23일), 월드 박스오피스 $463,517,383 (2003년 3월 10일)
상영 등급: 12세 관람가
- 매트릭스2 리로디드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38분
북미 박스오피스: $281,576,461 (2003년 10월 30일)
월드 박스오피스: $742,128,461 (2011년 11월 25일)
- 매트릭스3 레볼루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29분
북미 박스오피스: $139,313,948 (2004년 2월 26일)
월드 박스오피스: $427,343,298 (2004년 3월 28일)
- 매트릭스4 리저렉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 라나 워쇼스키
각본: 라나 워쇼스키, 알렉산드르 하몬, 데이비드 미첼[1]
제작: 라나 워쇼스키
음악: 조니 클라이맥, 톰 티크베어
촬영: 존 톨
출연: 키아누 리브스, 캐리앤 모스 외
제작사/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미국 2021년 12월 22일, 한국 12월 22일
화면비: 2.39:1
상영 시간: 1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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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이 우릴 완벽하게 속인 순간들
#산돌구름 #마블반전 #랄프보너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2021. 03. 20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https://www.epidemicsound.com/*영상 타임라인*
00:00 이번에도 속았다..
00:44 오딘? NO I’M 로키
01:52 퀵실버? NO I’M 보너
02:38 만다린? NO I’M 트레버
03:44 닉퓨리’s EYES
04:49 구독자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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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이터>
낯선 곳에서 새 출발하게 된 진아는
우연히 복싱에 매료되고, 어쩌다 복서가 된다.
두 탕 알바에 고된 몸으로 오른 링 위에서 그녀가 마주한 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자기 자신이었다.
삶의 발버둥이 아닌 스텝을 가르쳐준 복싱.
진아는 살아가기 위한 진짜 파이팅을 준비하는데…
두 주먹 두 발로 세상에 맞서 파이팅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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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1차 예고편
전 세계가 기다려 온 미션 드디어 올타임 레전드 ‘그’가 돌아온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2025년 5월 극장 개봉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