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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9-15 21:09:39

깨진 도형을 넘어 선

영화 <이사> 리뷰

DIRECTOR. 소마이 신지

CAST. 타바타 토모코, 사쿠라다 준코, 나카이 키이치 외

SYNOPSIS.

화목한 가정을 자부하던 6학년 소녀 렌

어느 날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이혼을 선언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싸워도 참았어 근데 왜 엄마 아빠는 못 참는 거야?”

엄마가 만든 ‘둘을 위한 계약서’도 싫고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아챌까 두렵다

“엄마, 부탁이 있어 이번 주 토요일 비와 호수에 가자”

몰래 꾸민 세 가족 여행 엄마 아빠와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POINT.

✔️ <태풍클럽>으로 뒤늦게 국내 시네필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작품. 아마 이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고른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 공간이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그려진 영화

✔️ 1993년 당시 46회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으로 선정되었고,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복원영화로 상을 받았습니다.

✔️ 주인공 렌의 똑똑하고 주체적인 모습이 눈에 띕니다. 개인적으로는 <비밀의 언덕> 명은이와 소개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둘 다 보통 어린이가 아니니 언니동생으로 잘 지내보거라...

✔️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영화의 주요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 글입니다.

 

 

도형을 이루는 최소 선의 개수는?

정답은 세 개다. 점 또한 자체의 도형이기는 하지만, 선을 여러 개 연결해 닫힌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이 최소 세 개가 필요하다. 이 중 선이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더 이상 도형이 아니다. 남은 두 선은 그저 어떤 지점에서 만난 두 개의 선이 된다. 마치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나름대로 애쓴다고 작성한 '둘을 위한 계약서'가 도무지 가족적이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렌의 상황처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고군분투하는 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지만 이등변삼각형의 두 면은 서로 대화도 하지 않고 소스 병에 손 닿는 것조차 꺼린다. 두 사람의 꼭짓점은 날카로운 예각을 그리고, 그 맞은편 선에서 대화를 이어가려 애쓰는 렌의 말들은 도무지 그 예각에 닿을 수가 없다.

 

렌은 계속해서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강조하고, 심지어 아빠의 이사 당일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도 소리치는데, 정작 아빠에게 하는 인사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코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다. 아빠에게도 재차 엄마가 보고 싶은지, 집에 가고 싶은지 묻는 렌의 말은 사실 '답정너'에 가까운 질문이다. 렌의 언어는 자신이 배워 온 (정상가족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소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을 때에는 렌의 선택권이 반영되지 않았는데, 이루어진 가족이 해체될 때조차 렌의 선택권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렌의 소망을 들어주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렌은 무능한 어른들을 대신해 달리고 또 달린다. 러닝타임의 상당분을 소요해, 영화는 달리는 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어쩐지 미덥다. 어른들은 그저 빈자리를 침묵으로 응시하고, 술잔으로 회피할 뿐이다. <태풍클럽>에서도 그랬듯,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서 어른들은 또다시, 보호자로 기능하지 못하고 부재중이다.

 

 

부재중인 어른들과 주체적인 아이들의 세계

아이들의 세계는 반대로 다채롭다. 비록 어른들에게 학습된 '정상가족'의 세계를 답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아이들에게 가득하지만, 그래서 이혼이나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는 가정과 어떻게든 선을 그으려고 하지만, 선을 그으려는 감각 자체가 이미 그들이 내심 알고 있다는 증거다. 어른들의 세계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상가족'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걸. 하다 못해 엄마 아빠의 싸움에 가슴 덜컥해 본 경험이라도 있을 테니까.

 

아이들의 생명력은 슬쩍 지나가는 교실 장면에서도 빛난다. 교사가 잠시 잠들어 있는, 그래서 또다시 어른이 '부재중'이고 아이들만이 주체적인 생명력으로 와글와글 움직이는 교실에서. 어떤 아이는 대범하게 교사 얼굴에 장난을 치고, 어떤 아이는 그 시끄러운 교실에서 꼿꼿하게 코로 오카리나를 분다.

 

교실에서 렌은 (코로 오카리나를 부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단독자다. 가족 이야기도 스스로의 힘으로 서술하고, "내가 뭐라고 하든 내 맘"이라고 한다. 스스로 렌의 편이라고 하는 미노루의 존재도 렌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에는 거울 속에 위치하고 있다. 마침내 렌이 단독자처럼 느껴지지 않는 장면은, 부모님의 불륜과 이혼을 거쳐 여기까지 전학 온 학생, 교실에서는 척을 졌던 다치바나와 장을 보고 자전거를 끄는 장면이다.

 

 

두 아이는 가족을 위해 장을 보고, 가족 걱정이 가득한 대화를 하며 자전거를 끌고 언덕길을 올라간다. 그 모습을 흔히 '가장의 무게' 혹은 '가족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표현되는, 부모 세대가 겪을 법한 감정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갑자기 내리는 폭우처럼, 현실은 아이들의 세계에 쏟아온다. 부모의 변화는 아이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있는 힘껏 생을 끌고 가려 애써도, 폭우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몸보다 마음이 웃자라 버린 아이들은 더딘 성장이 서럽다. 까치발도 모자라서 점프를 하면서 빨래를 널고, 엄마가 쓴 '둘을 위한 계약'을 찢어버리는 이상으로 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렌이 그동안 해왔던 말을 하나도 듣지 않은 듯한 부모는 뒤늦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며 나와서 이야기하라고 한다. 렌의 행동으로 부모의 침묵은 마침내 깨지고, 싸움이 시각화되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냐"는 렌의 외침은 또다시 응답받지 못한다.

 

 

이것은 삼각형이 아니다

삼각형 테이블부터 해서 렌의 집안 풍경은 가족들의 관계와 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어 여러 모로 대단히 흥미로운데, 이 '욕실 사건' 전후로 가족들이 집안에서 빙빙 원을 그리는 것 또한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다. 삼각형과 원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중심점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접점이 존재한다는 것, 어떤 지점을 짚으면 그 자리에서 도형으로 뻗어나가는 선의 길이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특징이 렌의 집안에서는 산산이 깨져 있는 것이 보인다. 더 이상 이 도형은 삼각형이 아니다.

 

한 번에 깨지는 것도 아니고 마치 깨진 유리를 자근자근 밟듯이, 계속해서 깨지고 또 깨진다. 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민 손길들이 모두 다 거절당했다는 의미다. 낡은 기린 인형도, 심지어 렌이 야심차게 준비한 호수 여행에서 엄마와 아빠가 하는 말들도.

 

 

결국 함께 하려던 여행은 각자 제각각의 여행이 된다. 렌은 여행 기간 동안 엄마와도 아빠와도 짧은 대화를 나누지만, 같은 높이에 서지도 못하는 (아빠와는 제방의 위아래에, 엄마와는 다리의 위아래에) 상황에서 나눈 대화는 그동안 이미 이 도형이 깨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대화로 끝날 뿐이다.

 

결국 렌은 꿈꿨던 것처럼 엄마아빠와 불꽃놀이를 보며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보내는 데에 실패한다. 대신 아들이 죽었다는 노인의 가족을 만나 하루를 함께 보내고, 그 끝에 늘 뛰어다니던 운동화 대신 낯선 게다를 꿰어 신고 뒤뚱뒤뚱 걸으며 혼자 밤을 보내게 된다. 다소 주술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렌의 그 밤은 어쩌면 일종의 성인식, 마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수준의 의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붙은 짚을 돌리느라 안전모를 쓰고 물을 끼얹어 가며 버티는 사람들을 거쳐, 혼자만의 호숫가이자 불가인 곳에 다다른다.

 

 

깨진 도형을 두고, 혼자만의 선으로

성장의 필수 조건은 상실이다. 성장의 교과서 같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만 봐도 라일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빙봉을 잊고, 유니콘 장난감에 대한 애정도 여러 감정 안에서 퇴색된다. 렌의 경우에는 라일리를 비롯해 '정상가족' 안에 있는 경우에 비해 더 큰 것을 잃었지만. 밟고 선 세계의 면이 깨지고 흩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 균열을 피하려 부지런히 달렸지만, 끝내 이미 깨진 도형의 면이 상실되었음만 깨닫고 만다.

 

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온전한 홀로 됨을 축하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 엄마와 렌의 구도는 호수로 향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렌은 아주 다른 인물이 되어 있다. 렌은 더 이상 깨진 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도형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뻗어 나가는 선이다. 수많은 선들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수직의 각으로 만나기로 할 것이며, 어떤 선과는 평행을 감지하며 뻗어갈 선. 웃자라야만 했던 렌의 시간이 비로소, 시작된다.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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