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1-12-19 23:55:48
겨울만 되면 생각날, 이터널 션샤인.
아무리 기억을 지워도 사랑과 추억을 지울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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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 달링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어떻게든 지우려고 했던 기억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사랑으로 그들을 더 꽁꽁 묶어 놓는다.
괴로웠든 행복했든 그것마저 사랑이 였음을 시간이 지날수록 서글픔이 밀려옵니다.
그런 행동을 지켜본 조엘은 지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부족이죠.
클레멘타인도 조엘처럼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지도를 벗어나려 했을까요?
클레멘타인이 머리색을 여러번 바꾸고 마침내 파란머리로 물들었을때조차 사랑에 다시 빠지게 된 건 여전히 그들이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뜨악스러웠던 장면은 기억을 지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타나는 비윤리적인 행태 였습니다.
의뢰인의 속옷을 훔치고 그 물건으로 그와 가까워져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행동들은 '세상에 믿을사람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는데요. 과연 온전한 기억삭제는 가능한걸까 하는 의문이 남더라고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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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스토커
나이트 스토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1984년 4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첫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1985년까지 짧은 시간에 무려 열세 명을 살해했으며, 수십 건의 폭행, 강도, 강간 범죄를 저지른 범죄가 발생했다. LA경찰은 처음 살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몇 건의 살인사건이 더 발생할 때까지 이들 살인 범죄가 연쇄살인이라고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완 형사 프랭크와 신참 형사 길버트가 이 사건을 맡아 수사를 시작했다. 범인이 미쳐 날뛸 때는 열흘 사이에 다섯 건의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범인은 매우 주도면밀해서 지문을 포함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지만, 발자국은 어쩔 수 없었다.
생존자가 증언한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몽타쥬를 그리고, 범행 장소에서 발견한 여러 개의 족적을 확인하면서 범인이 신은 신발이 매우 특이한 신발이라는 걸 밝혀냈다. 그 신발은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유명 메이커는 아니었고,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회사에서 만든 제품으로, 모두 여섯 켤레가 대만에서 미국으로 들어왔고, 다섯 켤레는 다른 지역으로, 오직 한 켤레만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따라서 그 신발은 신은 사람이 범인인 것은 확실했다.
범인은 키가 약 180센티미터, 백인 또는 밝은색 피부의 남미 계열 사람이며, 신발 크기는 295밀리미터였다. 경찰은 비밀수사에서 공개수사로 전술을 바꾸고, 범인에 관한 정보를 미디어를 통해 공개했다. 한번은 가장 핵심 증거인 신발에 관한 내용은 빼고 언론에 알렸으며, 두번째는 LA시장이 직접 범인의 정보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형사들이 알고 있던 모든 정보를 공개했다.
수사를 하고 있던 형사들은 시장이 언론을 통해 말한 정보로 인해 범인이 자취를 감출 것이고, 수사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경찰에게 퍽 운이 좋았던 상황이었다. LA시장이 생방송으로 범인의 정보를 언론 앞에서 알리고 있을 때, 범인은 LA를 떠나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형을 만나러 갔고, 그 다음 날,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다시 LA로 돌아온다.
단 하루 사이였지만, 모든 신문, 방송에서 범인의 얼굴 사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고, 거리에서, 버스에서 시민들은 범인 리처드 라미레스를 알아보고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결국 범인은 도주에 실패하고,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린치를 당해 쓰러지고, 나중에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잡혀 경찰서로 이송된다.
범인 리처드 라미레스는 1985년에 체포되지만, 정식 재판은 1989년에 하게 되고, 그에게 적용된 43건의 사건이 모두 유죄로 선고되면서 리처드 라미레스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2013년 병원에서 암으로 자연사하는데, 그가 저지른 범죄에 비하면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리처드 라미네스는 1960년 생으로 멕시코인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우하고 불행한 환경에 둘러싸여 자랐다. 그를 둘러싼 부모, 친척들 모두 폭력적이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었으며, 마약,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봤다고 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체포되고, 경찰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드러내지 않았다. 즉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의아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가 체포되어 대중과 언론 앞에 나서는 장면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의식하고,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장면을 제외하고, 리처드 라미네스가 재판을 받는 장면을 보면,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수치심이 사라진 인간으로, 싸이코패스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인간의 외피를 한 '다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표현이 비과학적이라는 건 알지만,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과학적 입장으로 보자면, 리처드 라미레스 같은 인간이 나오는 것 역시 사회가 한 '개인'에게 그런 영향을 끼친 것이고, 인간은 주위 환경의 영향을 직접 받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개인'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살았느냐가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2009년, 미국의 '라이프'는 '세계의 살인마 31인'을 발표했다. 이 목록에 당연히 '나이트 스토커'인 리처드 마리레스도 있다. 이 목록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마들의 범죄를 보면, 오히려 리처드 라미레스의 악행은 밑바닥에 있을 정도로 끔찍한 살인귀들이 많다.
한국에서도 유영철, 이춘재 같은 연쇄살인범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가정환경이 매우 불행하고 불우했다는 것이다. 가정환경이 불우하다고 모두 연쇄살인범이나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니, 이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성장 환경과 과정이 개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린이 한 명을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함께 한다는 말은 과거의 공동체가 존재했을 때,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며 살았음을 의미하는 말인데, 오늘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개인'을 내세우며, 개인들의 연대와 협동을 구조적으로 파괴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주인인 자본가들이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범죄를 단지 개인의 성향, 일탈, 인성과 같은 비과학적 분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적 역학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사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고, 개인의 삶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여기에 '개인' 고유의 특성이 결합하게 되는 것이고, 극악한 범죄자들은 이런 '개인의 특성'이 그의 사회적 성장 배경과 결합해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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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차 -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버리고
*2017년도 영화 칼럼으로 발행한 글을 각색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원고를 쓰기 전, 생각의 끈을 잡고 놓지 않으려고 애써 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금세 주의가 분산된다. 나이가 들수록 한가지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지는 건, 그럴 여유가 사라짐과 동시에, 삶에 대한 책임이 막중해져서 그런 것인 듯 싶다. 누군가 나에게 싱가포르에 와서 직장 생활 하는 자신이 비자와 연계된 이유로 마치 ‘생계형 직장인’ 같다는 말을 했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이 안정될 수록 더 갈망하게 되는 것이 늘어난다. 영주권 발급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최초 5년짜리 영주권이 내 삶에 시사 하는 바도 이리 큰데 하면서, 나는 2012년도 영화 화차(火車)를 생각해 냈다. 최근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도 불륜이라는 스캔들 때문에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는, 영화 ‘아가씨’의 수려하고 여리여리하고 아름다운 이 배우가 임팩트 있는 배우로서 탈바꿈된 영화는 화차가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서 첫 남편과 식당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선영의 전 모습.
그녀에게는 아버지를 죽게 해 달라는 그래서 빚을 청산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과 신앙이 있었다.
화차라는 게 우리나라에서는 ‘수레 위에 총을 수십 개 장치하여 이동이 손쉽고, 한 번에 여러 개의 총을 쏠 수 있게 한 조선시대 무기’라고 검색이 되지만, 일본에서는 ‘영화의 제목인 '화차'는 불 화(火), 수레 차(車)로, '지옥으로 가는 불수레'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화차는 헤이안 시대 일본 전설 속의 수레라고 하며,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을 향해 달리는 불 수레이며 화차에 한번 올라탄 사람은 두 번 다시 내릴 수 없다고 한다. 이 무시무시한 제목 속 여주인 경선(김민희 분)은 왜 자신이 화차에 올라타 운명을 재촉해야 했는지 안타깝도록 절실하게 보여준다. 솔직히 말하면 5년 전에 본 영화라서 모든 스토리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경선이 자신의 빚과 과거를 모두 끊어내기 위해 선영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친구가 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새 삶을 살아내고자 한다. 수의사였던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서, 펜션에서 술을 마시고 친구의 목을 졸라 살해하며 울부짖는 경선. 이 영화에서 김민희의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슬프고, 그로테스크하고, 단죄해야 하지만 이해는 가는 그런 역할을 잘 소화했다.
그녀는 운다. 친구를 살해하고 새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기쁨에 또 웃는다.
영화의 도입부는 경선(선영의 삶을 빼앗은) 이 약혼자인 문호 (이선균 분)과 결혼 한 달을 앞두고 시부모님께 인사 가는 길에서 시작된다. 빗속에서 휴게소에 들렀으나 그녀는 돌연 사라져 버리고, 문호는 연유를 알 수 없이 그녀의 뒤를 쫓는다. 사촌 형인 형사에게 부탁해 찾아낸 그녀의 과거는 놀랍다. 원래 경선은 결혼한 적이 있었고, 남편은 건실하게 식당을 운영했고 그녀도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빚 때문에 사채업자가 들이닥쳐 생활이 망가져 버린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죽게 해 달라고, 빚을 탕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작은 빚에서 시작된 사채가 커진 것을 막지 못해, 그리고 또 이어진 빚을 막지 못해 괴로워하던 그녀는, 가족이 없는 선영이라는 수의사와 만난다. 그리고는 위의 전개이다. 피칠갑을 하고 속옷 차림으로 진짜 선영을 살해하고 선영으로 거듭난 경선. 그녀는 죄책감에 울부짖는 것인지 안도감에 미소 짓는 것인지 모를 새벽을 보내고, 시체를 유기한 다음 선영의 동물병원에서 일하다가 문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문호와 선영. 선영의 과거에 대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문호는 선영(경선)을 사랑했고,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너로 살라며 도망치라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된 기차역에서 선영은 읊조린다.
“나?? 나 강선영 아니야..... 나 사람 아니야.. 쓰레기야... 내 곁엔 아무도 없었어...”
그리고 타인의 모든 것을 빼앗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자신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일본에서의 원작이 1992년에 써진 것을 감안하면 타인의 ‘명의 도용’이라는 범죄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가 쓴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면 일본 내의 사회적 이슈를 모티브로 인간의 삶을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이 영화를 한국의 영화관에서 혼자 봤던 (왜 '혼자였다는' 사실은 잊히지 않는지) 2012년 3월은 내 인생에서도 정말 추운 겨울이었다. 동트지 않은 새벽이 가장 춥다고 직장을 잠시 쉬던 그때 나는 참 많은 방황을 했더랬다. 건강 차 휴직한다고는 했으나 미래에 대한 걱정에 휴식이 온전히 휴식이 될 수 없었다. 영화 속 경선에 나를 이입한 건 아니었지만,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생기는 이러한 사회의 범죄가, 한국에서도 점점 늘어날 것 같다는 생각은 해 봤었다.
미야베 미유키 책 중에 재밌게 읽었던 낙원, 그리고 모방범. 사진은 네이버에서 찾았다.
그때 썸 타던 남자친구 집에 있던 책들을 빌려와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도 정말 밤새서 읽었다.
그 이후의 한국 사회는 (지금은 내가 오히려 가끔 가는 곳이 되어 버렸기에 변화를 더 빨리 감지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보다 더 급격히 일본화되어가고 있다. 1인 가구의 확산화, 전통적 가족 형태의 붕괴, 사회활동 이외 취미활동의 다변화, 반려동물과 식물 추구, 졸혼, 선택적 결혼, 묻지 마 범죄, 그리고 사회적 범죄, 성매매, 인신매매, 돈을 위해서 라면 희생되는 인권. 한국의 사회적 안전망이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악함과 잔학성을 막을 정도로 촘촘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점차 더 촘촘하게 변해가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학창 시절 일본의 문화를 동경해서 일본어를 배웠던 나는, 그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것들을 알 즈음 한국인의 정이나 따뜻함, 융통성 등을 더 높이 사게 되었다. 한국은 아직 꿈틀대는 날 것의 생동감이 있다. 위에서 아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생명의 샘이 솟아오른다. 민초의 힘은 여론을 형성하며 특권층을 제재하는 힘이 되어 왔다. 세계를 살펴봐도 이런 나라는 흔치 않다. 코로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회의 모럴(morale)적 제재가 되기를 바라본다. 작금의 나는 한국의 문화나 식품은 환영받지만,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사람들에게 배척 받는 외국인으로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 원고를 썼던 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떤 것이 달라졌을까.
온전히 나 자신으로 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고, 가족이라는 굴레 안에서 경제적으로 착취당했던 것도 어느 정도는 벗어났다. 돈이라는 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고 하는 건 가진 자들의 이야기일도 몰라. 잘 살다가도 한 순간 삐끗하면 절벽 낭떠러지로 내몰릴 만큼,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경선처럼 자신의 모든 걸 지우고서라도 빚에서 벗어나고 싶은 젊은이들이 많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 볼뿐. 힘들어도 범죄는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 볼뿐. 이런 선한 마음들이 모여 선한 영향력을 내기를 바라볼 뿐,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씁쓸한 밤이다.
하지만 일본 문학 공부하던 그 시절 내가 읽은 소설의 탑은 바로 이것, '살인의 문' 원판.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읽은 문고본. 한 번쯤 살면서 생각해 볼 화와 살인의 욕망에 대해 다뤘다. 너무 그럴싸해서 나의 욕망도 함께 얹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읽고 싶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아일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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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트 듀얼> 마지막 순간까지 신중히 찾아야 할 진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4세기 프랑스, 유서 깊은 카루주 가의 부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는 남편 ‘장(맷 데이먼)’이 집을 비우자 불시에 들이닥친 장의 친구 ‘자크(아담 드라이버)’에게 강간당한다. 자신의 범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자크는 그녀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감내해야 할 불명예를 각오하고 용기를 내어 그의 죄를 고발한다. 한때 자크와 친우이자 전우였지만 세금 징수, 영지 소유권, 호칭과 계급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던 장은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재판을 요구하며 그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관계가 된다. 그런데도 대영주 '피에르(벤 애플렉)'의 권력을 등에 업은 자크가 강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자 마르그리트의 재판은 장과 자크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결투 재판으로 결정되고, 마르그리트는 장이 패배할 경우 함께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에 놓인다.
2-3 년에 한 편씩 신작을 내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리들리 스콧 감독. 비주얼리스트로도 유명한 그는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시리즈, <마션> 같은 SF 작품부터 전쟁 영화인 <블랙 호크 다운>, 여성 영화인 <델마와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작을 만들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엑소더스> 등으로 대표되는 시대극이다. 리들리 스콧의 사극은 과거의 사건과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현재를 반추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왔기 때문이다. 그가 선보이는 화려한 볼거리에는 늘 자유의 평등의 가치, 종교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성찰처럼 도발적일 수도 있는 사유가 깃들어 있었다. 이는 에릭 재거의 원작을 영상화한 <라스트 듀얼>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결투 재판을 섬세하게 다루며 하나로 답을 단정할 수 없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라스트 듀얼>에서 가장 눈에 먼저 띄는 특징이라면 역시 그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장과 자크가 결투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내 시점을 과거로 되돌렸다가 후반부에 다시 결투 장면으로 돌아온다. 이때 과거 시점에서는 한때 절친이었던 두 남자가 왜 결투 재판까지 펼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이 총 세 명의 시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세 명의 주인공은 각자 경험한 진실을 말한다. 1장인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은 장의 입장에서 자크와의 불화가 어떻게 마르그리트의 강간으로 이어졌는지를, 2장인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은 강간을 저지른 것을 마음 한 켠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사랑의 표현이라고 합리화하는 자크의 입장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인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은 피해자인 마르그리트의 시점에서 일련의 사건을 복기한다.
이때 영화는 마르그리트의 시점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연출을 선보인다.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부제목이 나온 후 글자가 사라지는 가운데 화면에는 "진실"만이 잠시 남는다. 이는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중 마르그리트가 영주의 부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축을 돌보거나 세금을 징수하는 등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마르그리트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지 못하던 시대에 구조적 한계마저 극복하며 자신의 권리와 명예, 그 목소리까지도 마침내 되찾은 이상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경우 <라스트 듀얼>은 중세의 사건을 통해 근 몇 년간 주목받았고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 낸 미투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투가 끝난 직후 마르그리트의 표정을 보면 그녀가 이 작품 속 진정한 승리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맞이했데도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데다가 허무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째서일까? <라스트 듀얼>이 엄연히 사극이기 때문이다. <왕좌의 게임>에서 명예와 충성심을 고집하는 존 스노우의 언행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작중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그 언행이 세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될 수 있듯이,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인물들의 행동은 표면적인 의미와 다른 함의를 가질 수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부당해도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것이다. 따라서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역시 반드시 현실이 아닐 수 있고, 장과 자크처럼 자신이 경험한 진실로서 현실의 한 파편에 불과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그녀의 표정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가 강간을 당한 직후 장이 "마지막으로 정을 통한 남자가 외간 남자이게 둘 순 없지"라고 말하며 잠자리를 강요한 것이 단적인 예시다. 현재 관점에서 볼 때 장의 행동은 명백한 강간이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장의 행동은 오히려 마르그리트를 보호하는 것이다. 만약 그날 밤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는데 마르그리트가 임신한다면, 장은 그녀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기사인 그는 마르그리트의 아이가 자크의 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마르그리트와 잠자리를 가졌기에 그는 훗날 태어날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명예와 진실을 지킬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설령 그것이 보호할 의도였다고 해도, 본래 무뚝뚝한 성정인 것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던 장의 잠자리 요구는 엄연히 강간이다. 설령 보호라 해도 당사자인 마르그리트를 상처 입힌다는 점에서는 중세의 시대적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한 셈이다. 이에 더해 재판을 열기 위해 일부러 강간과 관련해 소문을 내는 것 역시 현시점에서 보면 명백한 2차 가해지만, 봉건제가 유지되던 중세 프랑스에서는 최선이자 동시에 필요악에 가까운 선택이나 다름없다. 이는 부부가 그날 밤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르그리트가 장의 영지를 돌보는 장면들도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이 반드시 현실과 등치 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일견 장의 어설픈 영지 경영을 현명하고 유능한 마르그리트가 잘 챙겨주는 장면 같다. 하지만 중세 시대임을 고려하면 이 역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르그리트는 씨암말의 씨를 가려 받으려는 장의 명을 어긴 하인에게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줘도 된다는, 남편의 말과 반대되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중세의 말이 품종, 용도에 따라 급격한 가격차이를 보이는 것을 고려하면, 정해진 용도에 따라 말을 키우려는 장의 선택을 무시한 마르그리트의 선택은 오히려 큰 손실을 초래할 위험한 행동이다. 전쟁에 나선 남편 대신 세금을 거두는 장면도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장은 몇 달간 전쟁에 나가 금화 300닢을 받아오는데, 이는 작중 마르그리트가 살림을 가꾸어 늘린 재정을 상회하는 수치다.
영화는 이처럼 마르그리트의 진실이 현실과 어긋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마르그리트는 중세의 재판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른 채 고발에 나섰다. 자신의 재판이 자신과 남편의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결투로 이루어지는 것 외의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이는 마르그리트가 분명 영리하고 지혜롭지만, 그녀의 현실 역시 그녀의 주관대로 구성되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마치 사건의 전말을 모두 담은 듯했던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조차도 온전한 진실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3장의 도입부 연출은 마르그리트의 진실과 별개인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실이 따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순간 그저 무기력할 뿐인 그녀의 표정은 그녀가 알고 있었던 진실과 알지 못했던 현실의 충돌로 인한 충격에 압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피해받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자, 더 나아가 현실과 진실 사이의 괴리를 시대적 관점에서 조명한 작품이다. 시대적, 사회적, 구조적 한계를 마주한 여성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모든 사람의 진실은 왜곡될 수 있기에 사건의 전모가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도 함께 전한다. 이는 세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작중 그 어떤 사건도 동일하게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결투 재판 시퀀스는 이처럼 보다 폭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라스트 듀얼>이 첫 번째 해석대로만 이루어지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이 마지막 결투를 스펙터클로써 보여주는 태도는 꽤나 어색해 보인다. 물론 프랑스 왕의 태도에서도 보이듯 결투 재판이 당시 시대에 유희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의 용기를 지지하는 것만이 영화의 주제였다면, 결투를 펼치는 두 남자의 시선에서 현장감을 살리며 박진감 있게 연출하는 대신, 마르그리트의 시점을 중심으로 결투를 건조하게 다루는 것이 더 주제에 부합하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투 장면은 마르그리트의 관점뿐만 아니라 그 결투에 임하는 두 남성의 시선, 그중에서도 특히 장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이는 결투 재판의 처절함과 승리에 대한 의지를 충실히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오락적으로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지막까지 누구의 시선과 진실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채 세 주인공의 시선을 공존시킨다는 측면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라스트 듀얼>의 함의는 제작 비하인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의 제작 및 각본에는 리들리 스콧 감독 외에도 맷 데이먼, 벤 에플랙, 그리고 여성 감독이자 각본가로도 활동 중인 니콜 홀로프세너가 참여했다. 맷 데이먼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데이먼과 애플렉이 남성의 시선을, 홀로프세너는 마르그리트의 시선을 담당해 각본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사건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시각과 관점, 심정과 그들의 변화를 다채롭게 녹여낼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직간접적으로 미투 운동과 성추문 관련 이슈를 경험했던 이들과의 협업이 큰 역할이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에 개봉했던 <라스트 듀얼>은 리들리 스콧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초라한 흥행을 기록했었다. 이 작품이 지닌 품격과 가치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극장에서의 흥행은 참패했지만, 다행히도 디즈니 플러스에서 공개되었으니 OTT를 통해서라도 노장의 시선과 사유가 담긴 <라스트 듀얼>이 온전히 공유되고 평가받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시대를 넘나드는 거장의 통찰력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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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장 속 물고기
줄거리
산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사체. 담당 형사인 해준은 사망자의 아내인 서래를 만나게 된다.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어색하다는 서래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좀처럼 눈물을 보이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마침내'라는 단어를 쓰며 피식 웃을 뿐.
어딘가 미심쩍인 남자의 죽음에 해준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잠복근무를 한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서서히 빠져들게 되는데…
감상포인트
감독이 원래 산과 바다라는 챕터로 영화를 나누려고 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초밥을 사준다는 건 분명 스윗한 행동이지만, 그 이후에 오는 상징들은 전혀 스윗하지 않다.
어장 속 물고기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감상평“축하해. 살인 사건이래.”생선의 배를 가르던 해준 대신 전화를 받은 아내 정안은 이야기한다. 그러자 해준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돈다. 우습게도 그의 눈은 죽은 시체와 참 비슷하다. 눈을 뜨고 죽은 시체들처럼 파리가 달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해준은 인공눈물을 넣는다. 겉으로는 살기 위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죽음을 갈구하는 자의 모습이다. 물고기 주제에 ‘인공’눈물을 넣어 삶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음이 낫기 때문에, 그는 자꾸만 죽음을 쫓는다.“한 칸, 한 칸, 마치 초밥을 집어먹는 것처럼 쉽습니다.”해준이 서래의 행적을 따라가며 계단을 오를 때, 그의 전 남편인 기도수가 했던 말이다. 이 말 때문에 해준의 위치는 명확해진다. 그는 바다 위로 올라온 물고기다. 그는 잘게 썰려진 채로 스스로 서래의 밥상 위에 오른다. 그래서 서래는 밥을 먹을 필요가 없다. 해준이 자진해서 밥상 위로 올라오기 때문이다.“그냥 초밥 같은 거 시켜 먹자니까.”정안은 남편이 밥상을 차려주자 이렇게 말한다. 해준은 아내에게 자신을 내어줄 마음이 없다. 그런 남편의 마음을 떠보듯이 정안은 생선 눈알을 콕콕 찔러본다. 그러곤 곧바로 물티슈를 꺼내 손을 삭삭 닦는다. 마치 못 만질 것을 만진 것처럼. 우습게도 해준이 손가락을 물린 대가로 받아온 자라는 바다에서 서식하지 않는다. 자라는 민물이나 늪에 사는 생물이다. 정작 정안이 관심 있었던 것은 바다 물고기가 아니라 민물 자라였다. 해준은 그 자라에게 대차게 물렸고.“난 당신의 미제 사건이 되고 싶어요.”서래의 ‘헤어질 결심’이란 영원히 해준의 사랑을 탐하는 일이다. 서래는 해준이 죽음을 쫓기 때문에 자신 주변을 서성인다는 것을 잘 안다.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곧 해준이 사랑하는 대상이 되는 일이다. 서래의 죽음은 엄마를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서래의 엄마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길 원해서 죽음을 택했지만, 서래는 해준이 자신에게 머무르길 원해서 죽었으니까.“깊숙한 바다에 던져버려요. 아무도 찾을 수 없게.”첫 번째 죽음은 산, 두 번째 죽음은 수영장, 세 번째 죽음은 마침내 바다. 마지막 장면에서 해준은 바닷가를 서성이며 애타게 서래를 찾는다. 해준이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서래는 영리하게도 그가 영원히 쫓아다닐 수 있게 바다로 도망간다. 해준이 바다로 걸어갈 때, 서래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었다. 어쩌면 해준은 영원히 서래의 어장 속에 갇혀버린 것이 아닐까.사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아주 찝찝했다.
나는 서래가 물에 잠기는 직접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기에 그녀가 구덩이에서 나와 도망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구덩이 자체가 함정이고 해준은 그 함정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해준은 그 함정을 즐기는 것 같다. 구덩이 속에 들어간 서래나, 녹음 파일을 듣고 바다를 헤매는 해준이나 내게는 다 변태스럽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누구나 ‘헤어질 결심’을 하고 살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헤어지지 않으려는 결심을 하기 때문에 삶은 고달프고 사랑은 아프다. 해준과 서래는 진실을 몽땅 바닷속에 던져버리고 다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아가기보다 도피와 외면을 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영화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쩌면 그런 부분이 나에게는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은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별점★★★(3.0 / 5.0)
섬세하게 만들어진 영화이긴 하나,
때론 그 섬세함이 독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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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2017/한국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애국의 길>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사극.
1636년 12월, 추운 겨울. 청나라 군대가 무거운 군장차림으로 조선에 쳐들어와 군신의 예를 요구한다. 힘없는 임금 인조와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갇힌 상태.
명을 등지고 청을 받들자니 대의가 발목을 잡고, 대의를 따라 명을 받들자니 눈앞의 청나라 군대가 두렵다.
신하들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려 임금에게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읍소한다. 첨예하게 둘로 나뉜 주장 사이에서 인조는 그저 갈팡질팡한다.
척화파는 예조판서 김상헌, 주화파는 이조판서 최명길로 대표되는데 이들 모두 진정 자신의 생각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유약한 인조는 김상헌과 최명길 양쪽에 번갈아 마음이 쏠린다. 그래서 전투를 해보기도 하고, 옥새를 찍은 격서를 비밀리에 도원수에게 보내 원군을 청하여 보기도 하지만 실패한다. 그 사이에 화친의 말을 잇고자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 청나라 장수의 마음을 달래려 하지만 청은 요구를 거두어들일 마음이 없다. 조선의 오락가락하는 행태가 결국 청의 황제까지 전장으로 끌어들이게 되자 임금과 신하들은 화친이 아니라 무조건 ‘복종’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이른다.
인조와 조정신하들은 굴욕적인 화친의 예를 행하고 비통에 젖어 환궁을 한다. 을씨년스러운 궁에 들어서며 하늘과 궁을 둘러보는 최명길의 얼굴엔 안도감이 배어있으나 밝지는 않다.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는 임금은 나의 임금이 아니라며 자결하고만 김상헌은 그 자리에 없다.
임금이 명을 사대하든, 청을 사대하든 관심 없고 하루하루 편히 먹고 살기만을 바라던 백성들은 병자년의 모진 겨울을 견뎌낸 후 민들레 돋아나는 봄을 맞이하여 목숨과 생기를 이어간다.
영화는 마치 책처럼 10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시퀀스마다 부제가 붙어있다. 자칫 지루하고 산만해질 수 있는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관람객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장치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두 시간을 넘기는 상영시간 내내 몰입할 수 있었다.
첫 장면부터 민들레꽃 이전까지는 스크린이 청색에 푹 젖어 있다. 보통 청색을 포함한 찬색은 좌절과 패배, 수동성 등을 묘사할 때 쓰인다. 청색의 화면에서 적군의 무기에 다친 조선 백성의 붉은 피, 비밀 격서를 싼 붉은색 비단 봉투는 단말마의 고통처럼 처연하고 선명하여 섬뜩하다. 한편 임금과 신하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너무 깊어서 이미 헤어 나올 수 없는 어둠이 그들을 잡아먹어 버린 것처럼 묘사된다. 조선이 청에게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암시 같다.
인물과 진영의 위치는 역학관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대장장이 서날쇠가 임금의 격서를 전달하였으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싫었던 도원수와 그의 참모들이 격서를 받은 증거를 없애려고 서날쇠를 추격할 때, 낫으로 얼음 절벽에 매달린 날쇠를 사이에 두고 청군을 높은 절벽의 위에, 조선군은 그 절벽의 아래에 배치한 것은 그런 의도로 읽혀진다. 청의 황제를 올려다보는 카메라의 위치, 청의 황제가 남한산성에서 명에게 예를 올리는 조선의 대신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등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일반적인 영상언어의 문법을 충실히 지킨 화면의 구도와 색감은 사극에 정통성을 부여한다. 아울러 이야기는 정직성과 안정성을 풍긴다.
배경음악도 훌륭했다. 음악이 적절하여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현실감이 두드러졌다. 대사를 강조할 때에는 음악 없이, 전투의 처절함을 묘사할 때에는 빠르고 날카로운 음악을 사용하여 극의 긴장을 내내 유지했다.
개인이든 국가든 그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는 위기를 맞았을 때이다.
인조가 다스리던 조선의 실력은 허약했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렇지만 절망보다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 같은 희망이 전해져 오기도 한다. 작은 나라였지만 조선의 사대부 김상헌은 대의명분을 고민할 줄 알았고, 또 최명길은 나라와 백성의 오랜 생명을 위해 역적의 오명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의명분을 접을 줄도 알았으니 말이다. 더욱이 둘은 각자의 애국심과 충정을 잘 알기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고 위했다. 감독은 냉정할 정도로 균형 잡힌 연출로 어느 한 편에 치우침이 없이 이 두 사람의 충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양반들을 불신했던 날쇠는 보상이 없을 것이 뻔한데도 김상헌의 부탁을 받자 목숨을 걸고 임금의 비밀 서찰을 들고 추운 겨울에 길을 떠났고, 휘하의 군병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무장 이시백은 영의정 김류의 명에 맞섰다.
청의 침략이라는 큰 위기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던 조선의 허약한 모습이지만 그나마 각자의 위치에서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과 명예를 걸었던 과거의 인물들을 그려냄으로써 감독은 현재의 우리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그보다는 주의와 경고가 먼저였겠지만 말이다.
<남한산성>은 탄탄한 이야기와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 균형 잡혀 안정적이고 빈틈이 없는 감독의 연출 등이 조화를 이루어 흠잡을 데가 보이지 않는 명작이다. 그리고 ‘애국’이란 무엇인가를 정말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화이기도 하다(©2017.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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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에 가려진 어떤 것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조희영 | 2024 | Fiction | Color | DCP | 146min (E)
SYNOPSIS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뒤로하고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 버린 정호와 그의 주변에서 각기 다른 인연으로 얽히게 되는 수진과 인주, 유정, 세 명의 여자가 있다. 정호의 애인 수진은 정호 모르게 훈성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정호를 몰래 짝사랑하고 있는 인주는 시한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정호에게 품은 마음을 고백하기로 한다. 유정은 옛 애인 정호의 자살 시도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지금의 애인인 우석과의 관계에서도 떳떳하지 못한 채로 위태롭기만 하다. (시놉시스 출처: 서울독립영화제)
1. 우리가 보는 것과 본다고 믿는 것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본다. 더 정확히 말해서는 본다고 믿는다. 우리를 지나치는 수많은 풍경들과 사람들, 경험들은 때때로 우리 자신을 정의하고, 우리 주변 사람들과 우리의 삶 자체를 규정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절대적인가? 우리의 눈에는 저마다의 프리즘이 있고, 우리가 관찰한 모든 것은 그러한 프리즘에 투영된 결과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본다고 해서 그것이 동일한 경험과 기억으로 남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 기인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독창적인 세계를 설계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고, 때때로 사실과 현실을 왜곡하는 눈가리개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은 결코 본다고 생각하는 것과 일치할 수 없다.
영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이러한 보이는 것과 믿는 것의 사이를 파고 들고, 믿음 너머에 가려진 무언가를 추적하게 한다. 선형적인 시간을 깨트리고, 파편화한다. 과거의 어느 부분을 들추었다가, 또 그보다 한참 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뒤죽박죽 뒤섞인 퍼즐처럼 어지럽다는 인상마저 든다. 영화가 진행되면 될 수록, 과거와 현재는 무너져 내린다. '이게 대체 뭔 내용이지?'하는 마음으로 정신 없이 주인공들의 파편화된 기억들을 하나둘 주워 담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놓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보인다고 믿는' 무언가들을 나는 보았다고 믿는다.
2. 믿음에 가리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
내가 이 영화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이 '본다고 믿는 것'에 대한 어떤 견고한 믿음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믿음이 견고할수록 관심 바깥에 있는 것들은 쉽게 가리워진다. 수진은 바람 상대인 훈성이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상대라고 믿는다. 인주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묘한 기대를 품고, 유정은 옛 연인인 정호가 자살 시도한 것이 자신의 영향이라 믿고 지난한 부채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쉽사리 배반 당한다. 낭만의 이면엔 값싼 유희가 도사리고, 끝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끝이 아니었으며, 그토록 확고하리라 믿었던 정호에 대한 추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하나의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 입으로 말미암아 저마다의 방식으로 왜곡되거나 변형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모르던 것도 안다고 생각하게 되거나, 이미 알던 것도 모르게 되기도 한다. 믿음은 이토록 얄팍하다. 그리고 이 얄팍한 믿음들 사이에는 어떤 공허가 있다. 사람이 믿는 바에 차마 담기지 못한 어떤 사람들의 본질들이.
영화 전반에 나오는 검은 개는 이러한 믿음 너머에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비유 같았다. 누군가는 그 개를 보고, 누군가는 보지 못한다. 누군가는 그 개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개는 위협적인 불청객이다. 사람들은 쉽게 검은 개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만, 누구도 그 개를 정말로 알지는 못한다. 수진, 인주, 유정을 하나로 묶는 정호라는 인물 역시 그렇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숱하게 보고 듣지만, 정작 그가 누구인지, 왜 사라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주인공들이 기억하는 그를 관찰할 뿐이다.
'너한테만 이야기하는 건데, 내 안에선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해.'
사람들의 쉽게 짐작하고 가정한다. 타인의 이야기는 쉬이 입에 담긴다. 누군가의 불행은 걱정으로 포장된 가십거리로 소비된다. 죽음처럼 무거운 것조차 그렇다. 그러한 얄팍한 믿음들 사이에서, 개인은 차마 밝히지 못할 고독에 잠겨들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삶은 인주의 파편화된 작품과도 같다. 인주는 파도를 그렸고, 그것이 깨지기 전이든, 깨진 후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르다고 믿을 뿐이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 너머를 바로 볼 수 있을까? 그게 가능은 할까? 글쎄, 시도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우리의 수많은 믿음 너머에, 그것을 있게 한 어떤 사실들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어쩌면 우리가 믿음에 눈 가리워 차마 보지 못한 것들을 엿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보인다고 믿는 것을 맹신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놓친 것들을 관찰하게 될 수도 있다. 너무 복잡하다고? 어쩌겠는가, 우리 삶이 이런 것을. 너무 복잡하다가도 단순하고, 짜다가도 싱겁고, 알다가도 모를 게 인생이라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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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마추어> 공식 예고편
테러에 의해 살해된 아내, 밝혀지는 진실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 제91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보헤미안 랩소디] 라미 말렉 주연 🎬[아마추어] 예고편 전격 공개 2025년 4월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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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모가디슈> 1차 예고편
내전으로 고립된 낯선 도시, 모가디슈
지금부터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생존이다!대한민국이 UN가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기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일촉즉발의 내전이 일어난다.
통신마저 끊긴 그 곳에 고립된 대한민국 대사관의 직원과 가족들은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북한 대사관의 일행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문을 두드리는데…
목표는 하나, 모가디슈에서 탈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