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를 단지 '사랑 이야기'라고 말한다면 그게 어떤 것으로 다가오는지. 영화 <반쪽의 이야기>(2020)는 대만계 미국인 감독 앨리스 우(Alice Wu)의 작품이다. 동양인 여성 감독인 그는 커밍아웃을 한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영화 감독으로서는 조금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도 한데 그는 MIT와 스탠포드에서 컴퓨터 공학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고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잠시 소프트웨어 디자인을 했었다고 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알려진 <세이빙 페이스>(2004)가 토론토국제영화제와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받으면서 감독으로 전업하나 싶었는데, 지금 소개할 <반쪽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16년이나 걸렸다. 그동안 앨리스 우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감독의 트위터에는 어느 여섯 살짜리 아이가 말했다는 “Drawing is my favorite enemy.”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의 친애하는 적. 감독은 이 말이 영화 만드는 일에 관해 자신이 느끼는 바와 비슷하다고 인용하고 있다. 그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은,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스스로와의 싸움이며 동시에 즐겁지 않은 일,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을 동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할 수밖에 없는 일. 첫 번째 영화와 두 번째 영화 사이의 16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것들로 채워지기도 했겠지.
<반쪽의 이야기>는 고등학생인 ‘엘리’(리아 루이스)가 같은 학교 남학생 ‘폴’(대니얼 디머)로부터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위 ‘하이틴 로맨스’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감독의 전기적 특수성 때문만이 아니라 이 영화가 만들어진 방식과 전하고 있는 메시지 자체가 이런 종류의 10대들 사랑 이야기에서 나오기 쉽지 않은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배경에 대해 하나씩 풀어보겠다.
‘폴’이 부탁한 연애편지라는 건, ‘폴’이 좋아하는 동급 여학생 ‘애스터’(알렉시스 러미어)에게 쓰는 것이다. ‘엘리’는 평소에도 약간의 돈을 받고 학우들의 과제를 대신 써주고는 했다. 대필 이야기를 듣자마자 ‘엘리’는 “세 페이지 이하는 10달러, 열 페이지까지는 20달러, 그 이상은 안 해.”라고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견적을 말한다.
‘엘리’는 저 말을 다른 학우들이 숱하게 부탁했을 과제 이야기겠거니 하고 꺼낸 건데 ‘폴’이 원하는 게 학교 과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편지라는 걸 알게 되자 그걸 단호하게 거절한다. 누군가의 진심은 대신 써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편지의 명목상의 발신인과 그 수신인을 아주 잘 안다고 해도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을 꾸며낸다는 건 아주 천재적인 작가에게 조차 쉽지 않을 것 같다. 영화 <그녀>(2013)에서 ‘테오도르’(와킨 피닉스)가 쓰는 종류의 조금 간단한 대필 편지 정도면 모르겠지만. ‘엘리’가 편지 대필을 해주기로 하는 계기는 따로 있었다. 당장 50달러가 필요한 일이 있었는데 ‘폴’이 그 돈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신이 직접 써도 그게 전해질까 말까 할 텐데 다른 사람이 대신 써주는 편지. 마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폴’이 자기가 일단 써봤다며 내민 편지를 읽더니 ‘엘리’는 거의 다 고쳐야겠다고 말한다. 이제 이 영화의 키워드는 흔하디 흔하지만 ‘진심’이 되었다. 사랑 이야기에 진심이라니. 우여곡절이 있지만 한 사람의 간절하고 지순한 마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해지고 둘의 관계가 ‘결실’을 맺는 정도의 구조일까.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 원하는 걸 얻는 이야기도 아니다.” 영화 서두에서 ‘엘리’의 내레이션은 이미 <반쪽의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가 아님을 전제한다. 장르의 흔한 공식을 따르기를 애초부터 거부하는 이 영화의 실질적으로 중요한 발단은 따로 있다. ‘폴’의 편지를 대필해주던 ‘엘리’는 한 번이라고 생각했으나 ‘애스터’로부터 답장이 오면서 계속 이어지는 편지 속 이야기의 과정을 통해 ‘애스터’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기왕 쓰는 것 잘 쓰기 위해서 ‘폴’과 계속해서 ‘애스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애스터’의 일상을 몰래 관찰한다.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묘사하지는 않지만 ‘엘리’가 ‘애스터’를 좋아하게 된다는 정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한 가지 더 언급해야겠지만, 이건 '흔한' 퀴어 영화도 아니라고 여겨진다. 사랑 영화도 아니고 퀴어 영화도 아닌데 하이틴 로맨스 영화이고 흔한 이야기는 아니라니. 정말 제목처럼 이야기의 반만 꺼낸 셈인데, 글 제목의 뜻에 대해서도 아직 말하지 않았으니,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낸 것 같다. <반쪽의 이야기>는 사랑이 그렇게 숭고하고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영화다. 실은 아주 엉망이고 제멋대로인 게 사랑이라면서.
“
“Love is messy and horrible and selfish …and bold.”
그러니까, ‘엘리’는 사랑이 상대방에 대해 낱낱이 아는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 같다. ‘폴’이 편지 대필을 부탁했을 때 처음 써준 편지에 의도치 않게 ‘애스터’의 답장이 오고 나서, ‘폴’과 ‘엘리’는 이제 정말 작정을 해야만 했다. ‘폴’은 이제 데이트 신청을 하자고 했지만 ‘엘리’는 “다른 남자애들과 똑같아지고 싶냐”라며 편지로 대화를 이어가기로 한다.
‘엘리’에게는 단서가 있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애스터’와 마주친 일이 있었는데 ‘애스터’는 ‘엘리’가 들고 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있는 나날』을 보고 자기도 그 책을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엘리’는 ‘폴’을 대신해서 그의 이야길 하고 있었다. 사랑이 뭔지 모른다는 핑계로 빔 벤더스 영화 속 대사 언급을 했더니 ‘애스터’가 자신 역시 빔 벤더스를 좋아한다고 답장을 한다든가... 이제 ‘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을 좋아하고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편지를 대신 써줄 것을 부탁한 이상 그건 자연스럽게 떠안아야만 했을 문제일지 모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엘리’와 ‘폴’은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애스터’의 일상을 관찰하기 시작하는데, 일단 데이트 약속을 잡았으나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애는 구상화보다 추상화를 더 좋아해. ‘남아있는 나날’ 얘길 꺼내면 영화가 나치 얘기를 줄이면서 얼마나 많은 걸 잃었는지를 말해.” ‘엘리’가 ‘폴’에게 해주는 조언은 대략 이런 것이었는데, 이런 건 ‘애스터’의 취향에 대해 ‘폴’이 학습하도록 하는 정보들이었다.
당연히 첫 데이트는 ‘엘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데, 그럼에도 ‘폴’은 두 번째 데이트 약속을 잡아낸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며 밀크셰이크에 든 빨대를 쪽쪽거리는 ‘폴’이 ‘애스터’에게는 나름대로 귀여워 보였던 모양. 실제로 ‘애스터’는 “넌 좀 이상하지만 그래서 귀여워”라고 언급한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은 이런 것에 있다. 이 일련의 데이트는 ‘폴’의 짐작대로도 되지 않고 ‘엘리’의 짐작대로도 되지 않는다. 가령 ‘엘리’는 ‘폴’ 대신 직접 ‘애스터’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이런저런 조력을 하지만 이건 마치 ‘글로만 배운 연애’ 같아서 가끔은 그것보다 투박하지만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폴’의 것이 통하기도 한다.
일단 제목의 의미 하나가 여기 있다.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그리고 많이 영향 줄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그 영향들이 쌓이고 쌓이는 방식으로 완성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니, 영화 속 ‘반쪽’이라는 건 ‘폴’과 ‘애스터’의 관계를 말하기도 하고 ‘애스터’와 ‘엘리’의 관계를 말하기도 하며, 나아가 ‘폴’과 ‘엘리’ 아빠 ‘에드윈’(예성)의 관계도, ‘엘리’와 ‘에드윈’의 관계도 모두 포함한다. 반쪽의 이야기라는 것은 반쪽과 다른 반쪽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는 것.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이것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앞에서 ‘사랑이 아주 엉망이고 제멋대로인 것’이라는 인용을 했는데 ‘엘리’의 말이다. 관찰하고 계산한 대로, 정해진 공식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라 불확실함과 의외성이 통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서로가 만나 각자의 고유함을 바탕으로 조금씩 관계를 다져가고 완성해 나간다는 것. <반쪽의 이야기>는 특정한 가치관에 따라 흘러가지도 않고 누군가의 가치관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입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아주 똑똑한 영화다.
‘애스터’는 원래 미대에 진학하고 싶어했는데 어떤 사정으로 포기한 인물이다. 그래서 ‘폴’의 이름으로 ‘엘리’는 ‘애스터’와 그림 이야길 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대화 내용에는 어쩌면 <반쪽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게 된다. ‘애스터’는 미술 시간에 들었던 그림에 관한 이야길 꺼내고 그림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선을 그려 넣는 일에 관한 대화가 이어진다.
“
“어쩌면 중요한 건 그거야. 그림을 망가뜨리더라도
그 괜찮은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만 해.
하지만 대담한 선을 그려 넣지 않는다면…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는 영영 모르겠지.”
사랑으로 한정해 볼까.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은 본래 서로가 만나기 전부터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것이다. 굳이 서로가 관계를 맺지 않고 지나가도 괜찮을 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을 일. 그러나 한 사람은 용기를 낸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한 사람이 거기 어떤 식으로든 반응한다. 이것이 어떤 흐름을 낳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 그건 훗날 서로가 서로가 아니면 안 되었으리라 믿을 만큼 삶 전체를 바꿔버리는 운명적 관계가 되기도 한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는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준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말하자면 ‘훌륭한 그림’을 만드는 건 ‘괜찮은 그림’에 대담하게도 굳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어떤 선 하나를 그려 넣는 행위일 거다. 뚜렷한 정답이 없는. ‘엘리’는 ‘폴’과 ‘애스터’가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애스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졸린 눈을 비벼가며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을 억지로 읽고 그러면서도 자기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 ‘폴’의 방식이 통하기도 하는 것처럼.
영화 <반쪽의 이야기>는 사랑이 누가 정해놓거나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마치 대단히 중요한 내용처럼 플라톤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랑이란 완전함에 대한 추구와 갈망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같은 이야기. 보통 영화에서 검은 화면에 자막으로 이런 식으로 뭔가가 적혀 있으면 그건 거의 반드시 중요하거나 상징적인 이야기인데 이 영화에선 별로 그렇지 않다. 전형적인 구성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 안에서 영리하게 그걸 비트는 영화라고 해야할지.
가톨릭을 독실하게 믿는 조용한 동네의 고등학교에서 뻔한 하이틴 로맨스처럼 인물 관계를 구성해놓고 <반쪽의 이야기>는 ‘애스터’를 중심으로 ‘엘리’와 ‘폴’ 각자의 내면을 꽤 세밀하게 펼쳐놓는다. 게다가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10대니까, 이들은 얼마든지 삶의 가치관이 바뀔 수 있고 그래도 되는 존재들이다. ‘엘리’는 ‘폴’이 불쑥 내뱉는 “그게 사랑 아냐? 상대를 사랑하는 데 노력을 쏟는 거.” 같은 말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기도 한다. 사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삶이란 그런 것인지도. ‘나를 뺀 세상의 전부’가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걸 예상치 못한 채 쉽사리 뒤흔들어 놓기도 하는 일 말이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10대 중반쯤 되면 보통 사랑에 관해 나름의 기준 내지는 목표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거나 조금씩 갖기 시작하는 것 같다. 가령 ‘폴’에게 사랑은 “치즈프라이를 하나 더 시키는 것”이다. ‘애스터’와 무슨 대화를 할지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편지부터 쓰는 것이고, 편지에 대뜸 “맛있는 곳 아는 데 같이 먹으러 가자”거나 “나 트럭도 있고 풋볼 선수야” 같은 이야기나 꺼내보는 것이다. 졸음을 참아가며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을 읽는 것도 물론이고.
50달러를 받기 위해 편지를 정성들여 써주긴 했지만 ‘엘리’는 ‘폴’과 ‘애스터’가 서로 전혀 공통점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엘리’는 두 사람의 첫 데이트가 완전히 실패했다고까지 생각하지만 ‘엘리’의 생각과 달리 ‘폴’과 ‘애스터’의 두 번째 데이트가 성사되고 둘은 키스까지 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듯 보인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둘이 하나여서 머리도 몸통도 둘 팔 다리도 넷이었는데 신이 하나된 둘의 완전함을 시기하여 둘을 갈라놓았고 평생 동안 서로를 계속해서 찾아다니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영화 제목도 사실 거기서 따온 것인데, 아주 진지한 이야기인 양 플라톤도 인용되고 사르트르도 인용되는데, 아무리 이 영화의 ‘엘리’라는 캐릭터가 다른 학우들의 과제를 대필할 만큼 언어 능력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반쪽의 이야기>는 주인공을 사랑에 관한 각종 문학적 인용에 통달한 지혜로운 인물로 그리거나 그가 깨달음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이야기로 서사를 맺을 생각이 없다.
영하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그 근거 중 하나는 저 인용들의 대상이 후반에 가면 ‘엘리 추’ 자신이 된다는 점이다. ‘엘리’에게 어떤 좌절의 상황이 찾아오자 영화가 띄우는 인용은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이며, 속으로만 담아두고 있던 ‘엘리’의 어떤 진심이 발언되는 장면 직후에는 앞에서 소개한 “사랑은 엉망진창에 끔찍하고 이기적이고 대담한 거예요.”가 자막으로 등장한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계속해서 고쳐 써 내려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게 <반쪽의 이야기>가 지향하는 바이며, 그 점은 효과적으로 성취된다.
<반쪽의 이야기>는 흔한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그 모두를 응원하는 방식으로 뭉클하고도 아름답게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갈등이나 오해는 대체로 해소되지만 그것이 사랑의 실현으로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엘리’는 물론이고 ‘폴’에게도 ‘애스터’에게도, 수많은 실패와 좌절, 상처들이 분명 찾아오고 어떤 것은 아주 오래 갈 것이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앞에서 제목에 관하여 ‘반쪽과 다른 반쪽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라고 언급했는데, 그 연장선에서 <반쪽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빈번하게 내레이션까지 하며 ‘폴’의 행동을 이끌고 자신도 움직이지만 전지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전기 요금을 3개월 체납한 것에 대해 ‘엘리’는 아빠에게 전력 회사에 전화해봤는지 묻고 아빠는 동양인인 자기 억양을 못 알아들을 거라며 (통화) 안 해봤다고 한다. 이에 ‘엘리’는 시도는 해보았는지 되묻지만 다음날 자기가 직접 전화를 할 뿐 아빠를 나무라지 않는다.
‘폴’의 이름으로 쓰는 편지를 통해 ‘엘리’는 ‘애스터’와 꽤 여러 주제에 걸쳐 폭넓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내용을 보면 취향을 강요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서로의 것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무엇보다 ‘애스터’에게는 사실 이미 공인된 (약혼 직전의) 남자친구쯤 되는 ‘트리그’(볼프강 노보그라츠)가 있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그는 당연히 주인공과 갈등을 빚는 캐릭터로 쓰였겠지만 여기선 전혀 그렇지 않다. 갈등을 빚지 않는 정도를 넘어 아예 ‘애스터’와 ‘폴/엘리’의 관계를 모르기까지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갈등 요소로 쓰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 더 짚자면 영화 속 스쿼하미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톨릭을 믿는 보수적인 동네지만 여성이 여성을 좋아한다는 것 역시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얼굴을 붉히거나 뺨을 때리는 등의 일이 살짝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건 당사자만의 문제일 뿐 공동체의 것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 스틸컷
이 모든 건 놀랍게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지적인 동양인 여성 캐릭터, 투박하지만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백인 남성 캐릭터, 무엇인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인기 많고 예쁘기까지 한 또 다른 여성 캐릭터라는 아주 전형적인 인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좋은 영화는 전에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의 틀을 가지고도 선례를 답습하지 않고 활용과 변주, 시도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영화라고 <반쪽의 이야기>를 보는 순간 생각하게 된다.
“난 늘 사랑은 한 가지 방식뿐이라 생각했어. 올바른 방식 하나. 하지만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라는 ‘폴’의 말처럼 <반쪽의 이야기>는 사랑은 특정한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모든 종류의 사랑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평등하고도 특별하게 보여준다.
괜찮기만 한 그림과 훌륭한 그림 사이에는 아름다운 실패가 있다. 어떤 그림은 잊히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한 번 그린 그림의 순간을 기억하고 다음 그림을 또 그릴 수 있기도 하다. 이 영화를 두 번 더 되풀이해서 보는 며칠 동안 사랑에 관한 시나 산문을 여럿 읽었다. 확신하지 않은 채로, 그리지 않아도 되었을 선을 그려 넣는 일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끌어안으면서, 낙관하지 않되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이 영화를 보고 여러 문장들 중에서도 떠오른 대목이 있어 여기에 덧붙일까 한다.
“두근거리다가 터지는 풍선이 되어 내가 먼저 고백하려고 해요. 바람 앞에서 살랑거림을 주체 못하고 펄럭이는 내 쪽에서 먼저 고백하기로 해요. 달은 밤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밤에 뜨는 건 아닐 테니까요. 해도 마찬가지로 아침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아침마다 뜨는 건 아닐 테니까요.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뒤늦게 뜨는 날이 더 많았을 테니까요. 늦어도 좋으니 일단 뜨기만 하면 세상이 밝아지는 일이니까요.”
(이원하,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에서)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김동진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