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Choice Movie2022-02-07 23:22:51
2월 2주 최신 개봉영화!
2월 2주 최신 개봉영화!
2022년 2월 2주 개봉영화!
나일강의 죽음 DEATH ON THE NILE , 2020
추리 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가 가장 사랑한 베스트셀러
영화 "나일 강의 죽음"은 신혼부부를 태운 이집트 나일 강의 초호화 여객선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탐정 ‘에르큘 포와로’가 조사에 착수하지만 연이은 살인 사건으로 탑승객 모두가 충격과 혼란에 휩싸이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전 세계를 매료시킨 추리 소설계의 전설이자 상징인 ‘애거서 크리스티’가 생전 가장 사랑한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제 경험담을 모티브로 하여 다채로운 인물 간의 사랑, 증오, 질투 등 감정에서 빚어지는 비극적 살인 사건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 특별함을 더합니다.
또한
'원더 우먼' 시리즈의 갤 가돗,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로 존재감을 드러낸 에마 매키, '블랙 팬서' 레티티아 라이트, '캡틴 마블' 아네트 베닝 까지
초호화 캐스트가 선사하는 환상적인 연기 앙상블을 기대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전설 ‘애거서 크리스티’가 탄생시킨 위대한 탐정 ‘에르큘 포와로’의 추리 세계!
첫번째 추천영화 "나일강의 죽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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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촛불 Candlelight Revolution , 2019
대한민국 최초! 2016년 촛불광장의 비화를 다룬 기록 다큐멘터리 탄생!
2016년 10월부터 2017년 4월까지 총 23차례에 걸쳐 이어진 비폭력 평화혁명인 촛불집회를 대한민국 최초로 기록한 웰메이드 다큐멘터리 "나의 촛불"이 개봉을 합니다.
광장에 모인 촛불 시민들부터 당시 정치권의 주역이었던 진보와 보수의 인터뷰이들이 총출동하며 놀라움을 더하는 가운데,
그 어떤 곳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촛불집회에 대한 비화를 전할 것을 예고하며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2016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일어난 정유라 특혜 사건을 시작으로 JTBC의 최순실 태블릿 보도,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까지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 전하는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으며
우리가 지나쳐온 발자취를 담아냈습니다.
김의성, 주진우가 고영태, 김성태, 박영석, 손석희, 심상정, 유시민, 윤석열, 추미애
역대급 인터뷰이들의 등장으로 그날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영화
두번째 추천영화 "나의 촛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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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The 355 , 2022
2022년 첫 초대형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 "355"는 인류를 위협하는 글로벌 범죄조직에 맞서기 위해 전 세계에서 뭉친 최정예 블랙 에이전트 TEAM ‘355’의 비공식 합동작전을 그린 초대형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 입니다.
제목 ‘355’는 조지 워싱턴 시대에 최초의 여성 스파이를 지칭하던 코드네임에서 영감을 받은 타이틀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선 최정예 블랙 에이전트 TEAM ‘355’에 내포된 흥미로운 의미를 엿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파리, 런던, 모로코, 베를린, 상하이 등 전 세계를 누비는 글로벌한 액션 스케일과 다채로운 볼거리를 자랑하며,
화끈한 오락 액션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인터스텔라', '마션'을 통해 대체불가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제시카 차스테인, '밤쉘', '언노운'의 다이앤 크루거,
'페인 앤 글로리', '오리엔트 특급 살인' 페넬로페 크루즈, '블랙 팬서' 루피타 뇽오, '엑스맨' 판빙빙까지 총 출동해
초특급 배우들의 최고의 앙상블에 대한 극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압도적 스케일과 짜릿한 액션!
세번째 추천영화 "355"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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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게 있어 月老 , Till We Meet Again , 2021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감독의 컴백!
그리고 한국 공동 제작 영화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게 있어"는 감독이 직접 쓴 베스트셀러 소설 ‘월노’를 영화한 작품으로
대만에서 보기 드문 SF 요소가 담긴 판타지 로맨스 작품입니다.
한국영화 '신과 함께'를 보고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를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여기에 오랜 경험의 해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 ‘영화사벌집(대표 김동현)’이 구파도 감독에 대한 신뢰와 기대로 제작에 공동으로 참여하며 힘을 보탰습니다.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게 있어"는 붉은 실로 인연을 맺어주는 ‘월하노인’이 된 샤오룬이 현생에서의 연인이었던 샤오미에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는 임무를 맡으며 벌어지는 시공간 초월 판타지 로맨스 영화입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로 단숨에 스타 자리에 오른 배우 가진동을 비롯해,
'나의 소녀시대'로코퀸 송운화, 그리고 '반교: 디텐션'으로 각종 영화제 신인상을 휩쓴 대만의 라이징 스타 왕정이 뭉쳐
역대급 판타지 로맨스를 만들어 냈습니다.
대만 넘어 홍콩까지 관객수 1위, 아시아 흥행 폭발!
네번째 추천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게 있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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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떨리는 건 너 때문 胸が鳴るのは君のせい , 2021
250만 대히트 베스트셀러 실사화!
일본의 순정 만화 잡지 ‘베코츠미’에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인기리에 연재된 동명의 만화책으로
누적 판매부수 250만부를 돌파한 "가슴 떨리는건 너 때문"이 개봉을 합니다.
대히트 베스트셀러의 실사화 발표와 함께 일본의 비주얼 보이그룹 미 소년/쟈니스 Jr.의 우키쇼 히다카와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는 배우 시라이시 세이의 캐스팅 소식도 알려져 팬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모은 바 있죠
'가슴이 떨리는 건 너 때문'은 단짝 친구 ‘아리마 하야토’를 좋아하게 된 짝사랑 전문 ‘시노하라 츠카사’가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 속에서 풋풋한 사랑을 쌓아 나가는 달콤쌉쌀 로맨스를 그린 작품인데요.
특히 이번 작품은 순정 만화 팬들 사이에서 짝사랑 로맨스 명작으로 손꼽히는 오리지널 스토리의 실사화로 화제를 모은 만큼
고등학교 3학년 시점을 중심으로 새롭게 이야기를 구성했다고 합니다.
순정 만화계 짝사랑 로맨스를 대표하는 명작을 스크린으로 만나볼 수 있는
다섯번째 추천영화 "가슴이 떨리는 건 너 때문" 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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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샹치'의 흥행이 이터널스에 미치는 영향
마블의 첫 아시안 히어로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북미 개봉주 주말 3일 동안 7,140만 달러 (한화 약 830억)를 벌어들이며 고전 중이던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특히, 9월 첫째 주 월요일 노동절 연휴까지 끼어있어 ‘샹치’의 인기는 고공행진을 기록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러한 흥행은 여태까지 헐리웃 내에서 ‘아시안’ 영화에 대한 장벽을 무너뜨린 흥행이라는 점에서 매우 뜻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개봉주 주말 3일간의 성적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 하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인데요. 1위 <블랙 위도우>의 8,030만 달러를 뛰어넘진 못하였지만, 흥행 시리즈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F9)의 7,000만 달러는 뛰어넘으며 새 기록을 쓸 수 있었습니다.
디즈니+와 극장 동시 공개를 택한<블랙 위도우>와 달리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현재 극장에서만 상영되고 있는데요. ‘샹치’의 흥행이 디즈니가 코로나19의 영향 아래에 있는 디즈니-마블 영화의 개봉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디즈니는 현재 <프리 가이>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그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개봉 방식’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요. 가장 근래에 개봉할 영화 <이터널스>가 과연, <블랙 위도우>의 선례를 따를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선례를 따를지 또한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샹치는 북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흥행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한국 시장에서의 흥행이 특히 돋보입니다. 중국 개봉이 불발된 ‘샹치’의 동아시아 성적이 매우 중요한 가운데, ‘샹치’는 한국에서 9월 1일 개봉 이후 주말 3일 동안 관객 수 53만 명을 모으며, 55억에 달하는 매출액을 달성하였는데요.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로 가득 찬 국내 극장가에서 ‘마블’의 저력을 볼 수 있는 주말이었습니다. '샹치'의 이러한 흥행이 추석까지 이어질 지 또한 주목되는 가운데,
과연, 디즈니가 ‘샹치’의 흥행에 어떠한 결정을 내릴지
<이터널스>를 극장에서 먼저 볼 수 있을지
그리고 <이터널스>가 코로나 시대의 새 역사를 쓸 수 있을지 같이 지켜봐주시길 바라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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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터널스> 인간을 사랑한 신들이 그려내는 마블의 미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주의 창조자인 셀레스티얼 아리솀의 명령을 받아 지구로 향하는 열 명의 이터널스. 그들은 팀의 리더인 '에이잭(셀마 헤이액)'의 지시에 따라 인류 역사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되, 지구를 위협하는 외계의 존재 데비안츠를 무찌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인간에게 신으로까지 여겨지지만 마지막 데비안츠를 제거한 각자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터널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에서 '스프라이트(리아 맥휴)'와 함께 지내던 '세르시(젬마 찬)'는 남자친구 '데인(키트 해링턴)'과의 데이트 중 수백 년 만에 나타난 데비안츠를 만난다. 때마침 나타난 '이카리스(리차드 매든)'와 함께 간신히 데비안츠를 따돌린 세르시는 에이잭을 시작으로 세계 각지에 흩어진 옛 동료 '킨고(쿠마일 난지아니)', '길가메시(마동석)', '테나(안젤리나 졸리)', '드루이그(배리 케오간)', '파스토스(브라이언 타이리 헨리)', '마카리(로런 리들로프)'를 찾아 나서고, 예상치 못한 진실과 음모를 마주한다.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석권한 클로이 자오 감독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만남으로 큰 화제를 모은 <이터널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유머의 소재로도 사용되었고 캐릭터의 이름과 능력에서부터 드러난 그리스 신화와의 유사성이었다. 예를 들어 테나와 세르시는 각각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와 오디세우스의 부하를 돼지로 만든 마녀 키르케를 연상시킨다. 이카리스는 태양 가까이 날다가 떨어진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의, 파스토스는 대장장이와 기술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마카리는 전령과 도둑의 신인 헤르메스의 로마식 이름인 머큐리의 변형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 신의 이름과 능력으로 대표되는 외적 유사성이 <이터널스>에서 신화가 느껴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신화 속 신과 인간의 관계가 작중 이터널스의 서사 중심에 위치한 듯 보이는 게 더 큰 이유다. 그리고 이는 <이터널스>의 마블스럽지만 또 마블답지 않은 장단점을 낳은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그들의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존재이고, 신은 불멸의 존재다. 또한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다가 늙어 죽지만, 신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다. 즉, 인간에게는 시간이라는 제약이 있고 신에게는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유한한 시간 때문에 인간의 삶에는 신이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죽지 않는 신들의 삶에는 간절한 소망과 기대, 패배와 몰락, 위대한 승리와 성취와 같은 가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반면에 항상 시간이 부족한 인간은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마지막처럼 살아야 하기에 이들의 삶은 빛난다.
동시에 인간은 신들조차 깨지 못하는 굴레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바로 자유의지다. 신화 속 신은 운명에 메여 있다. 제우스마저도 더 강한 신이 등장해 자신을 왕좌에서 끌어내릴 것이라는 예언에 전전긍긍하고, 죽어야만 하는 운명인 아킬레우스를 살려달라는 테티스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운명의 결과를 바꾸지는 못해도, 최소한 그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에 남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자의로 트로이 전쟁에 나선다. 스스로를 테배에서 추방한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아폴론이었소, 아폴론이오, 친구여. 나의 불행을, 불행을, 나의 고통을 완성한 것은. 하지만 눈을 직접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련한 나 자신이었소.”라고 외친다. 오디세우스도 칼립소와 신으로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집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다.
그래서 신화 속 신은 자신들에게 없는 소질을 지닌 인간을 부러워한다. 영화 <트로이> 속 아킬레우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하기에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그런 이유로 인간은 신보다 아름다우며,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멸의 신들은 인간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함과 그 유한함 덕분에 가능한 인간의 자유 및 진보와 발전을 향한 열망을 사랑하며, 더 나아가 그런 인간들을 보호해주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더 높은 신에게 영원히 고통받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고 아테나가 포기를 모르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보호했듯이. 이처럼 인간이 신을 우러러본다는 통념과 다른 신과 인간의 관계성이야말로 <이터널스>가 보여주려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터널스가 셀레스티얼의 명령을 받고 지구에 와서 데비안츠로부터 인류 문명을 지켜낸 것까지 보여준 후, 영화의 시선은 이터널스의 분열과 갈등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신에게 주어진 한계로 인한 이터널스 개개인의 고통이 위치한다. 몇몇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해야 하는 무한함의 무게에 짓눌린다. 예를 들어 동료들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홀로 지키던 이카리스는 점점 내적으로 곪아가고, 자신의 선택이 초래한 결과에 좌절한다. 테나 역시 오랜 시간 쌓아왔던 수많은 기억과 감정의 급류에 쓸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한다. 또 몇몇은 신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절망한다. 드루이그는 철저히 셀레스티얼에게 종속해야 하는 상황이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보다 못하다고 자조하며 이터널스로서의 삶에 의문을 품는다. 영원히 아이의 모습으로 지내야 하는 스프라이트는 성인으로서 사랑을 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한다.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이터널스는 인간에 대한 부러움과 희망을 발견한다. 특히 한계를 뛰어넘는 힘에 주목한다. 길가메시는 무한한 삶에 지쳐가는 동료들에게 인간이 자신들의 유한함을 뛰어넘는 기억, 곧 신화와 영화 같은 기록이라는 기억을 만들었듯이 결코 스스로의 정체성과 기억을 잊지 말라고 충고한다.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를 보며 인간에게 질려버렸던 파스토스는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아픔을 치유하고 사랑의 힘에 다시 한번 희망을 걸어보기로 마음먹는다. 에이잭 역시 타노스로 인해 파괴된 우주, 그 가혹한 운명마저도 되돌려 놓는 인간들의 자유의지에 희망을 걸어보자며 다른 이터널스를 설득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인류에게서 보았고, 그 소질을 부러워하고, 또 원하면서 인간을 믿는다. 이렇게 층층이 쌓인 감정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한다. 세르시와 데인 사이의 에로스적 사랑부터 더 나아가 훨씬 넓은 범주인 인류애까지 확장되는 사랑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터널스가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와 명령까지 거슬러가며 진정으로 인간과 지구의 보호자가 되는 계기이자 힘이 되며, 관객의 입장에서는 초월적 존재에게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가 된다. 이처럼 신과 인간의 관계성, 초월적 존재가 지극히 인간적 존재에 가까워지는 과정과 선택,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이터널스>는 마블 영화로서는 낯설 정도로 서정적이고 신화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터널스 개개인의 이야기가 어디까지나 마블 세계관의 부속품을 지향하는 <이터널스> 전체 콘셉트와 충돌하면서 괴리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이터널스>에서 마블스러운 대목이라면 지구보다 큰 셀레스티얼이 직접 등장하거나 우주와 이터널스의 기원에 대한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는 것, 더 나아가 블랙 나이트라는 새로운 영웅과 지구 외의 행성에서 활동하는 이터널스의 존재를 암시하는 장면 등을 꼽을 수 있다. 즉, <이터널스>는 <샹치>에서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페이즈 4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마블 세계관의 기원을 밝히며, 새로운 캐릭터들을 소개하면서 배경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한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이터널스>가 내포한 불협화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중심 플롯은 우주적 존재인 이터널스를 지상의 존재인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이야기인데, 정작 그 배경은 어떤 마블 영화보다도 깊고 넓은 차원으로 뻗어나가면서 서로 충돌한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들의 서사에 집중하면 세계관을 확장하는 여러 작업 때문에 인물들의 내밀하고 짙은 감정선이 느껴지려는 찰나에 영화가 끊기는 듯 느껴지고,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마블의 큰 그림 중 일부로 이 작품을 접하면 작중 발생하는 사건의 스케일에 어울리지 않게 이터널스의 이야기가 소소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이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연출력마저 애매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물론 각 장면의 연출은 기대했던 대로다. 자연의 풍광을 담거나 거대한 스케일의 우주를 보여주는 장면의 임팩트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영상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외로움 혹은 절망과 맞서야 하는 이터널스 멤버들의 감정선까지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기에 더욱 그렇다. 호주의 광활한 광야를 배경으로 세르시나 테나를 카메라에 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다만 앞서 지적한 문제로 인해 떼어놓고 보면 좋은 각각의 장면이 막상 하나로 조화되지는 못하다 보니 그 감흥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사실 MCU라는 거대한 서사시 안에서 각각의 작품이 독립된 영화보다는 하나의 부품처럼 느껴지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터널스>에서는 그 둘 간의 갈등과 긴장이 유달리 강하게 느껴진다.
이에 더해 작품 자체의 완성도나 구조에서도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일단 마블 작품의 고질병인 빌런의 문제가 다시 도진 듯 보인다. 지금껏 마블 영화는 가시적으로 드러난 악역과 흑막에 숨은 악역이라는 이중 장치를 자주 활용해 왔다. 그런데 이 경우 전작인 <샹치>에서 볼 수 있듯이 흑막 속 빌런이 드러남과 동시에 먼저 등장한 빌런의 위치나 존재감이 애매해지는 단점이 발생할 수 있다. <이터널스>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빌런인 데비안츠의 존재감과 위치는 흑막이 밝혀지는 순간 급격히 흔들리고, 그들은 그저 반전을 위한 도구로서 소비되는 데 그치고 만다. 이터널스와 데비안츠의 마지막 승부에서 별다른 긴장감이나 비장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덤이다.
현재와 고대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조도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수천 년의 시간을 오가는 대담한 작법은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나 이슈타르 문, 테노치티틀란의 피라미드라는 스펙터클을 보여주기는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전반적인 서사가 지나치게 얇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낸다. 각각의 인물이 경험하는 내적인 고민과 갈등이 중심이 되어야 할 영화에서 필요한 에피소드만 단편적으로 취사선택한 나머지 인물들의 동기나 이유에 공감하기 어렵고, 작위적인 느낌만 남는 것이다. 또한 세르시와 이카리스, 혹은 테나와 길가메시처럼 짝을 이루는 캐릭터 간의 케미스트리를 부각하려는 영화의 잦은 시도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결과도 낳는다. 애초에 다소 복잡한 영화의 구성 자체가 자오 감독의 장점과 어긋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자오 감독의 장점은 간결한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감정선을 화면에 담긴 공간과 풍광에 담아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각 캐릭터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기 어려운 데는 영화가 마지막 순간까지 다양성이라는 콘셉트를 유지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보인다. 이 시도는 10명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상황에서도 각각의 캐릭터를 명확히 제시하고, 그 안에서 동성애, 장애, 인종과 같은 정지척 올바름의 요소가 캐릭터의 정체성으로 비교적 자연스럽게 녹여낼 충분한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미 영화가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오가는 상황에서 전체적인 구심점 역할을 할 만한 인물까지 제시되지 않은 결과 전체적으로 산만한 인상을 피할 길은 없다.
<이터널스>가 매력이 없는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혹평을 받아야 할 작품 같지도 않다. 자오 감독의 영상미가 주는 웅장함은 살아있으며, 마블 팬의 입장에서는 두 개의 쿠키영상을 포함해 더 많은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고 기대감을 끌어올릴 구석이 많은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한쪽에서 멀티버스의 이야기가 펼쳐질 때, 다른 한쪽에서는 더 깊고 넓은 우주를 탐험할 것이라는 기대를 키울 수 있는 것이다. 또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이터널스가 합을 맞춰 만드는 액션의 앙상블도 눈을 즐겁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종합되었을 때 스튜디오의 의도와 감독의 장점이 조화되지 않은 채 상이한 지향점이 충돌하면서 만들어 낸 애매모호함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실 하나하나는 아름답지만 정작 그 실이 종횡으로 모두 흩어져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알기 어려운 태피스트리와 다를 게 없다. 그 결과 <이터널스>는 어떤 이유든 간에 마블답지 않으면서도 마블스러운 혼란한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다. 결국 <이터널스>는 마동석의 출연 등으로 큰 관심을 모은 것에 비해 비교적 조용히 다음 주자인 스파이더맨에게 바통을 넘기는 데 그치고 만다.
P(Poor, 형편없는)
감독, 기획, 콘셉트, 플롯과 연출까지 잘못된 만남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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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 속에서도 계속된다
올해 <타이타닉>이 25주년인가를 기념해 재개봉했다. 친구가 같이 보러 가자 했을 때 “잘됐다. 나 <타이타닉> 아직 못 봤어!”라고 대답했더니 친구는 무척 놀랐다. <타이타닉>을 안 봤다고? 물론 누구에게나 ‘아니 그걸 안 봤다고?’의 리스트가 있다. 영화인들조차 (너도나도 모두 다 본 영화로만 구성된) 매우 의외의 리스트를 갖고 있을 것이며, “왜?”라고 묻는다면 거의 별 이유 없을 것이다. 그냥 어쩌다 보니. 내게 <타이타닉>도 그렇다. 스토리가 워낙 알려져 있다 보니 어영부영 스토리를 파악하는 바람에, 다른 거 먼저 보다가… 어쩌다 보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에 몰려드는 물을 바라보면서, 등줄기에 불안한 땀이 흘렀다. 잊고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에는 스토리를 대충 알아서 볼 마음이 크게 안 났던 것 맞는데, 어느 순간 이유가 바뀌었지. 배가 가라앉는 영화를 볼 자신이 없었어. 배가 기울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한 이야기를, 우리는 현실에서 보고 말았잖아. 그것도 실시간으로. 며칠씩. 잠을 자고 일어나서 보고, 밥을 먹고 돌아와서 보고. 너무 잔인하고 슬픈 형태로 목격했잖아.
그때 생각했다. 아마 이제 <타이타닉>은 영영 보지 못할 거라고. 어느덧 시간이 오래 지났고, 나는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잊고, <타이타닉>도 조금 땀 흘리면서 괴로워하면서도 보기는 볼 수 있게 되었구나.
내 주변에 세월호의 사고와 직접 관계된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는 세월호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월호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생채기를 남겼다. 평이한 일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작은 균열이 생길 때 깨닫게 된다. 살다가 문득 생명에 위협감을 느꼈을 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단어가 부스스 일어났다. 슬프지만 그건 세월호 이후로 많이 회자된, 각자도생이라는 단어였다. 이 위기에서 나를 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는 감각이, 생존 본능 바로 위에 덧입혀져 있었구나.
어떤 일들은 우리를 영원히 바꾼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그 차이는 마스크처럼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닌, 더 깊고 근본적인 데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부스스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월호 이전의 세상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죽음, 이유 모를 사고에 우리의 일부분이 매이고 말았다. 이제니의 시구처럼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4월이 되면 이런 시구를 이불처럼 끌어와 덮었다. 언제부터인가 4월이 슬펐다. 꽃이 피고 햇살이 화사해서 더 슬펐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시로 끌어 덮으며 4월을 보내는 습관이 생겼다.
그건 슬픔도 아니었구나. <장기자랑>을 보면서, 솔직히 한번씩 숨이 턱 막혔다. 영화는 즐겁고 유쾌한 순간들을 많이 담았고 슬픔을 주목하지 않음에도. 그럼에도 짙은 슬픔이 읽힌다.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 볼 길 없는 나로서는, 영영 낫지 않을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건 저런 거구나 하고 그 슬픔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세월호가 나오지 않는, 슬픔의 장면들을 제외한 영화여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슬픔은 배경처럼 존재하고 그 위에서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
슬픔에 아둔한 나로서는 이제야 숨이 막혀오는 그 마음을, 어떤 이들은 일찍이 헤아리고 진작에 움직였다. 엄마들을 방 밖으로 끌어냈다. 어느 날 갑자기 유가족의 자리에 놓여 슬픔 외의 감정과 사건을 너무 많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일들을 폭우처럼 맞은 후에 앓기 시작할 때. 이들은 방 밖으로 나왔다. 커피를 배우고, 서로를 만나고. 그러던 중 연극을 해보겠냐는 말에,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였다가 연극이 시작된다.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듯, 진짜 “너무 하고 싶어! 꼭 하겠어!”보다는, 애써주는 사람에게 미안해서… 혹은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니까… 같은 이유로 연극은 아슬아슬 계속된다.
연극은 아이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한 여정으로 시작됐다. 여전히 “누구 엄마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라서 무대를 포기할 수가 없다. 무대에서는 밝고 사랑스러운 연기를 잘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잘) 해내는 엄마들이지만, 무대 뒤에서는 여전히 쉽지 않은 감정들이 몰려온다. 그래도 엄마들은 아이들을 기억하며 힘을 낸다.
영영 아픈 단어로 남아버린 ‘수학여행’이라는 단어를 무대에서 다시 꺼낸다. 아이들이 도달하지 못한 그 섬에 이르러, 어쩌면 가장 아팠을 말들을 입 밖에 낸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입던 옷을 입고, 아이들이 좋아했던 피규어와 봉제 인형을 어루만지며 그 옷도 입어 본다. 아이들의 자리에서, 아이들이 사랑하던 것들의 자리에도 서 본다. 그렇게 타인의 자리에 서 보면서, 같이 극을 만들어간다.
평범한 극 영화처럼, “예술이 주는 치유력”을 만끽하며 “손 맞잡고 해내는 경험으로 성장”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엄마들은 연극을 하면서 변해 간다. 아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사진과 이름만 어루만지던 엄마들은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자신의 마음도 함께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사람마다 그 농도는 달라서, “그냥 나는 멋지게 살고 싶을 때가 있어요.”라는 말도 함께 품고 무대에 오르는 엄마도 있다. 이미 배우의 마음으로 배역 욕심을 내고, 경쟁하고, 기대하고, 기뻐하고, 서운해하기도 한다. 그 모습이 상큼하고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제각기 다른 농도와 감정들을 다양하게 품고 무대에 오르지만, 이들을 근본적으로 묶었던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두 줄기 강처럼 두 마음이 흐른다. 하나는 빈 자리를 영영 되짚으며 살아가는 마음,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마음. 통상적인 극 영화였다면 아마 전자로 시작해 후자로 나아가며 끝났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씩씩한 걸음을 내일로 옮겨 가도, 어제의 슬픔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유가족’에게 기대하는 표정은 얼마나 일관적으로 납작한가. 사실 그 어떤 사고 이후라도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밝은 얼굴로 무대에 오르는 모습과 무대 뒤에서 긴장과 눈물을 삼키는 모습, 덤덤하게 누군가를 위로하고 돌아서서는 자기 불안을 발견하는 모습이 첩첩 공존하면서.
앞으로도 오래 아프고 계속 슬프겠지만, 이 연극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또 다음 작품은 어떤 결을 품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서로 끌어안고 손 맞잡고 인사하면서 무대는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봄이 돌아오고, 아이의 생일도 돌아온다. 여전히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고, 아이들이 좋아하던 과일을 기억해 본다. 슬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이 영화처럼 사랑스러운 모양새로. 다음에는 이 배우 분들의 밝은 얼굴을 실제 무대에서 보러 가야겠다. 그땐 나도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표정으로 객석을 채우고 싶다.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에서 감상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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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플래쉬>(데미언 셔젤, 2014)에 관한 길고 장황한 글.
<위플래쉬> (데미언 셔젤, 2014)
자기 증명을 향한 외력과 내력의 주도권 전쟁
<위플래쉬>는 2014년에 개봉한 데미언 셔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로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고, 단연 빛나는 두 배우 J.K. 시몬스와 마일스 텔러의 연기력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데미언 셔젤의 장기인 영화의 리듬에 재즈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에 있어서, 그리고 음악을 중심으로 인물의 성장과 그 과정에서의 서스펜스를 그야말로 박진감 넘치게 담았다는 점에서 필자도 현재까지 나온 데미언 셔젤의 최고작이자 한 해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화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필자는 이 작품의 스릴러적인 요소가 이 작품을 ‘아주 재밌는 영화’로 만드는데 크게 한몫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내게 이 영화가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앤드류’(마일즈 텔러 분)가 파멸로 향해 가는 반성장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하고 싶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위플래쉬>의 메인 서사를 따라가되, 마지막 장면을 포함해 짚고 넘어가 볼만한 장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볼 것이다. <위플래쉬>는 관객에게 크게 어렵게 다가오는 영화도 아니기에 구태여 주요 장면들에 달아보는 해설같다는 느낌이 들어 재미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영화를 ‘파멸로 향해 가는’이라고 한만큼 엔딩 이후의 ‘앤드류’도 한번 해볼 생각이다. 다만 그 뒷얘기는 꽤나 삐딱한 이야기일 것 같다. 마지막으로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 속 재즈 음악이나 무대 공연에 대해 나름의 조사를 하면서 작성했으나, 이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하기에 전문적인 지식을 알고 계신 분들의 수정과 첨언을 부탁드린다.
오프닝 장면부터 짚어봐야겠다. <위플래쉬>의 첫 번째 쇼트는 연습하는 앤드류를 복도에서 열려있는 연습실을 향해 롱 쇼트로 바라보다가 달리 인으로 점차 가까이 가서 컷으로 플레처 교수(J.K. 시몬스 분)가 등장할 때까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보다 더 이전에 이미 시작된다. 암전된 상태에서 점차 템포를 올려가는 드럼 소리를-그리고 엔딩에서 다시 듣게 될- 들려주며 제목 ‘위플래쉬’가 나오는 게 첫 번째 쇼트다. 이 오프닝이 사실상 영화 <위플래쉬>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려주는데, 템포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드럼 소리는 앤드류가 광기에 사로잡혀가는 과정,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리듬과 일치한다. 이를 인지하고 다시 이야기를 진행하자. 앤드류는 플레처 교수 앞에서 연주를 보여준 뒤 무시당하고,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간다. 앤드류의 아버지는 앤드류가 음악을 공부하는 것을 것을 아마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앤드류는 플레처 교수를 처음 만났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들어봤고, 그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선망을 품고 있다.
이후 단체로 연습이 진행 중이던 강의실에 플레처 교수가 난입한다. 플레처 교수는 두 번째 등장에서 그의 카리스마와 동시에 얼마나 청각이 예민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이때 앤드류는 본인이 연주를 잘했는지, 못 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뜬금없이 플레처에게 교내 최고인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듣는다. 앤드류는 아무튼 ‘그에게 간택을 받았다’라는 자신감으로 평소 마음에 두던 영화관 아르바이트생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앤드류의 파멸은 이제부터 진짜로 시작된다.
앤드류는 잘못 알려준 시간 때문에 지나치게 일찍 도착한 뒤 9시 약 5분 전에 단체로 몰려오는 밴드 팀원들을 보게 된다. 모든 것이 초짜인 앤드류의 시선에서 이들은 교내 최고의 밴드의 일원인 만큼 제각각은 분주하지만 꽤 프로페셔널해 보인다. 이를 빠르고 리드미컬한 편집으로 보여주면서, 9시가 다가오고 있다는 시계의 쇼트는 이 분주한 와중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9시가 된 순간 플레처 교수는 이 장면의 리듬을 완전히 박살 내면서 등장하여, 모든 것은 플레처 교수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군생활 중 생활관에 등장한 대대장을 방불케 하는 이 장면은, 뒷 이야기를 위해 한 번 이렇게 설명해보겠다. 플레처 교수는 자신이 위치한 공간의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신의 ‘템포’에 맞춘다. 오로지 그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이 밴드는 플레처의 등장 이후 분주함은 사라지고 조화를 이룬다.
플레처가 밴드를 장악하는 방식, 사람을 다루는 방식, 모든 것을 자신의 템포에 맞추도록 자극하는 방식은 대체로 정서적 학대다. 필자는 이 글의 부제를 ‘자기 증명을 향한 외력과 내력의 주도권 전쟁’이라고 했다. 여기서 외력이란 플레처 교수의 자극이고 내력은 앤드류의 욕망과 감정이다. 플레처 교수는 사람을 자극하는 면에서, 사람을 자신의 템포에 맞추도록 다루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꽤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음악을 하는 순간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까지 불사하는 분노의 화신으로 변한다.
이 대목에서 짚고 가야 할 대사는 “찰리 파커가 위대한 뮤지션이 된 건, 조 존스가 그의 머리에 심벌즈를 던졌기 때문이야”라는 대사다. 그리고 꼭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인 듯, 앤드류의 머리를 향해 의자를-심벌즈와 꼭 닮은- 집어던진다. 앤드류는 이 자극에 엉망으로 무너졌다가, 그의 템포에 맞추기 위해 말 그대로 피나는 연습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앤드류의 감정이라는 내력이 끌려 나오기 시작하는데, 피를 흘리면서 연습하는 장면의 무시무시함은 거의 호러 영화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앤드류는 태너의 악보를 잃어버리는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밴드의 메인 드러머 자리를 꿰차게 된다(이 대목은 이 영화의 몇 안 되는 미스테리로, 영화가 정확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필자는 앤드류가 악보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그럭저럭 괜찮은 미래가 기대되는 와중에, 영화 초반에 암시되었던 새로운 외력이 등장한다. 앤드류의 가족 중엔 예술을 하는 사람이 없고, 신입생치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앤드류의 행보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앤드류의 친아버지조차도. 이 무렵부터 자기 증명을 향한 앤드류의 내력은 점차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지게 되는데, 이를 보여주는 것은 세 가지다. 즐겁다기보단 어딘가 살짝 나사가 빠진 듯한 눈으로 연주하는 앤드류를 담은 로우 앵글, 그리고 코넬리가 자기 자리를 뺏었다는 생각에 보이는 격렬한 감정적 반응, 여자친구와의 결별 선언이다. 이쯤부터 앤드류는 자기 증명 말고는 그 어떤 가치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드럼을 부수고 욕설을 내뱉으며 연주를 해나가는데, 이때 주의 깊게 봐야 할 반복되는 쇼트가 있다. 처음으로 피 흘리며 연습하는 장면에서 외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심벌즈에 밀려있던 앤드류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나와 있다. 지금의 앤드류를 움직이는 동력은 분노라는 내력이다.
첫번째 피나는 연습 장면.
두번째 피나는 연습 장면
영화 중반부까지를 외력과 내력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보겠다.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는 자극하면서 자신의 템포에 맞추도록 외력을 가하며, 자극받은 앤드류는 그 템포에 맞출 수 있도록 내력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템포의 기준은 점점 높아지면서 자극의 강도 또한 강해지고-플레처 외의 요인과 함께- 앤드류의 내력은 성취욕이라기보단 분노에 훨씬 가까운 부정적인 감정으로 변하면서 더 강력해진다. 그러니까 <위플래쉬>는 오프닝에서 점점 빨라졌던 템포처럼, 앤드류의 외력과 내력이 엔딩을 향해 달리는 지옥의 밸런스 게임이다.
다음으로 나오는 플레처와 앤드류(외 2명)의 광기 어린 연습 장면은 이 지옥의 밸런스 게임을 한 장면으로 압축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분에 330 더블 타임 스윙’ 템포의 기준을 제시한 뒤, 내력과 외력의 밸런스가 맞을 때까지 플레처는 계속 외력을 가한다. “빠르게! 더 빠르게! 멈추지 마!”
플레처의 템포에 맞춘 앤드류에게 벌어진 아주 뜻밖의 사건. 영화 <위플래쉬>의 전체의 리듬은 이 우연한 사건들을 통해 변주된다. 첫 번째는 물론 악보를 잃어버리는 사건이었고, 이 사건은 앤드류가 자신을 증명할 기회가 되었다. 두 번째 사건, 타이어 펑크로 경연에 늦는 불상사는 첫 번째처럼 플레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건으로 본인이 간신히 얻은 기회에서 추락하는 계기가 된다. 간신히 내력을 끌어올려 맞춘 ‘더블 타임 스윙’을 보일 기회가 사라지려 하자, 앤드류는 피투성이로 무대에 오르는 기괴한 선택을 한다. 이 대목은 한 사람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며, “넌 끝이다”고 선언하는 플레처에게 앤드류는 분노를 표출한다. 왜? 한계치까지 오른 앤드류의 내력, 분노가 마땅히 분출되어야 할 지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적당한 앤드류가 마주한 뜻밖의 진실(사건이 아니다). 플레처 교수가 눈물까지 보이며 들려줬던 음악의 주인공 ‘션 케이시’는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을 선택한 것이고 그 원인은 플레처 교수의 지도를 받던 시절부터 나타난 불안과 강박 증세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확정되는 사실은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에게만 이런 외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심벌즈나 의자를 던졌다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앤드류 이전의 앤드류’가 있었으며, 그는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앤드류의 반응이 묘하다. 앤드류는 자신이 당한 가혹 행위에 관해 ‘그는 잘못이 없다’며 그를 감싼다. 왜? 그를 폭행할 정도로 분노를 표출해 제적을 당했으면서?
플레처 교수는 앤드류에게 외력으로 다가왔으나, 앤드류가 음대에 입학하면서 필요로 한 것은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정신적 지지였다. 그러나 앤드류의 친아버지는 앤드류의 진로를 지지해주는 것이 아니라 늘 탐탁지 않아 했고, 아들이 다른 사촌들처럼 예술 외의 진로를-그가 진정 ‘재능’으로 생각하는- 택하길 바랐다. 앤드류는 친척뿐 아니라 자기 직계가족인 아버지로부터 그의 행보에 대한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지옥 같은 자극을 줄지언정 그의 재능을 발굴하고 ‘Whiplash’, 채찍질해주는, 가끔은 격려를 통해 따뜻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플레처 교수를 자신의 아버지로 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그를 감싸주는 행위를 하지만 자신을 아끼는 친아버지를 보고 끝내 앤드류는 그를 고발하는 데 동참한다. 여기서 이 장면을 플레처를 고발하는 앤드류, 어린 시절 영상을 보는 앤드류, 개인 연습실을 정리하는 앤드류로 교차편집했다. 나눠서 보여줘도 이상한 것이 없는 이 장면을 교차편집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무엇일까?
영화 <위플래쉬>, 그리고 앤드류를 중심으로 한 내력과 외력의 주도권 경쟁엔 ‘부자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교차편집 장면을 부자 관계를 통한 설명으로 바꿔보자. 끝없이 채찍질 받으며 자신도 성장했던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를 고발하는 앤드류,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한때 자신을 지지했던 친아버지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앤드류,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를 배신하고 원래의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앤드류. 한 장면에서 현재, 과거, 미래의 부자 관계를 충돌시키면서 앤드류가 느끼는 공허감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음악을 관둔 앤드류가 위치한 환경은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차 있고 화려했던 학교와 무대와 다르게 조용하고 공허하다. 공간과 청각 감각의 대비. 목표나 자기 증명을 향해 자신을 자극하던 외력도 없고 자신을 이끌었던 내력도 사라진 상태의 앤드류. 사실상 앤드류는 자신의 성취를 향한 갈망을 거세당한다. 물론 이쯤에서 영화가 끝날 리가 없다. 여기서 영화가 끝났다면 관객들은 스크린에 팝콘 통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마지막 뜻밖의 사건. 세 번째 사건이 다시 이 영화의 리듬을 바꾼다.
앤드류는 길을 걷다가 아주 우연히 작은 재즈 바의 공연에서 플레처 교수를 다시 만난다. 애증의 대상이었던 플레처가 직접 보여주는 연주. 강압적인 선생이-혹은 아버지가- 아닌 재즈를 사랑하는 뮤지션의 면모. 앤드류는 자신이 배신한 과거의 아버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플레처는 바를 나서려는 앤드류를 붙잡고 자리를 마련한다.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자신이 강단에서 물러났음을 말하며 자신이 학교에서 했던 역할은 학생들이 ‘한계를 뛰어넘도록 몰아붙이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사가 퍽 인상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은 ‘그 정도면 잘했어’(Good Job.)야.” “제2의 찰리 파커라면 좌절하지 않지.” 플레처는 재즈가 죽어가는 이유가 사람들이 쉬운 것만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고, ‘버드’ 찰리 파커와 같은 스타 탄생엔 조 존스의 심벌즈처럼 한계를 뛰어넘도록 몰아붙이는 자극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마음이 매우 복잡해지는 앤드류에게 재즈 페스티벌의 공연 자리를 제안하며, 코넬리는 앤드류를 자극하려고 데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네가 제2의 찰리 파커이길 기대하고 있다’와 같은 발언. 플레처는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는 도가 튼 인간이다.
다시금 가슴이 불타오르는 듯한 앤드류. 앤드류는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게 된 그날처럼 니콜에게 전화를 건다. 카메라는 방문 프레임 안에 앤드류를 두고 바라보다가 니콜이 새로운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자 클로즈업으로 전환된다. 전화가 끊어지고도 계속 앤드류를 바라보고 있는 롱테이크. 관객들은 앤드류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앤드류는 한 번 선택한 일은 되돌릴 수 없다고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꿈을 선택하면서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버리겠다고 선언한 순간,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과 꿈을 두고 양자택일하는 주제는 데미언 셔젤의 이후 영화들에서 계속 반복된다)
JVC 무대는 누군가의 커리어 혹은 인생을 아주 긍정적으로나 아주 부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큰 무대다. <위플래쉬>에서 첫 번째 사건은 기회였고, 두 번째 사건은 몰락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사건은? 세 번째 사건은 둘 다다. 앤드류에겐 기회지만 플레처에겐 앤드류의 몰락이다. 자신을 고발한 사람이 앤드류인 것을 눈치챈 플레처는 이 업계에서 앤드류를 완전히 끝장내려고 부른 것이다. 플레처가 이제 바라는 것은 앤드류의 성장이 아니라 파멸이다. 이 동기라기보다 악의에 가까운 행동은, 앤드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그리고 가장 강력한 외력이 될 것이다. 물론 앤드류는 플레처가 지휘하는 ‘Upswingin’’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연주를 망친다. 그리고 플레처의 한 마디 “아무리 생각해도 넌 아니야.” 플레처가 기다리던 제2의 찰리 파커가 아니라는 말이자, 너는 더 이상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배신에 가까운 아버지의 선언. 앤드류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말이 있을까? 공포에 가까운 관객의 시선을 뒤로한 채 앤드류는 무대를 나서고 친아버지는 앤드류를 안아주며 “집으로 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앤드류는 이 말을 듣고 눈빛이 바뀌어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 지나치게 자기 계발 격언으로 사용되곤 하는 니체의 말,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플레처의 악의 가득한 외력은 앤드류를 끝장내지 못한 것일까? 혹시 앤드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죽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 소리도 화려함도 없는 공허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플레처가 가하는 그 가혹한 외력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여튼 앤드류는 자신을 배신한 애증의 아버지에게 플레처에게 복수해야 한다. 앤드류의 내력은 이제 분노라기보단 집념에 가까워 보인다. 앤드류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복수는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명은 플레처의 인정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백미이자 마지막 장면의 진행은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따라가야 한다.
앤드류는 플레처의 지휘 사인 없이 혼자서 연주를 시작하고 옆에 있는 콘트라베이스부터 자신의 신호에 따르게 한다. 앤드류는 플레처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든 것이 그에게 맞춰진, 플레처의 템포, 플레처의 자장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강의실이라면 뭐라도 던졌겠지만, 공식적인 무대이므로 플레처는 이미 시작된 연주에 따르면서 ‘팔이나 휘두르며 박자를 맞추는’ 지휘자가 된다. 우리는 앤드류가 그리도 지독하게 연습한 더블 타임 스윙, Caravan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과연 프로 밴드답게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연주가 만족스러운 플레처는 이 무대에 합세하기로 한다. 이때 앤드류와 플레처, 다른 말로 앤드류의 내력과 외력이 얼마나 조화로운지는 데미언 셔젤 감독의 시그니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화면이 주고받는 패닝 쇼트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앤드류와 플레처 둘 다 굉장히 즐거워 보인다. 플레처는 연주를 마친다는 사인을 보내는데 앤드류는 멈추지 않고 독주를 이어 나간다. 왜? 앤드류에게 아직 할 일이 더 있는 것일까?
앤드류는 이 밴드의 주도권을 플레처로부터 빼앗아 오긴 했지만, 아직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라고 증명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어지는 앤드류의 드럼 솔로 독주는 자신이 제2의 찰리 파커라고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에게 일갈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앤드류의 행동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것인지 뜯어보는 일도 꽤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앤드류의 독주는 플레처, 밴드 단원들, 공연 스태프들, 모두를 당황시킨다. 첫 번째로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개인 지도를 한 적도 없으며, 독주 버전의 ‘Caravan’을 지도한 적 역시 없다. 앤드류는 자신의 방에 걸려 있던 버디 리치가 실제로 드럼 솔로가 부각되게 편곡한 버전처럼 독주를 시작한다. 두 번째, 플레처는 곡 소개를 하면서 ‘Upswingin’’이 ‘익숙한 명곡이 아닌 새로운 레퍼토리’라고 하였다. 앤드류가 자신의 주도로 Caravan을 시작하는데, 앤드류와 달리 ‘프로’인 연주자들은 악보 없이도 최상의 연주를 들려준다. 다들 손에 익을 정도로 연습이 된 곡이라는 소리이자 뒤집어 말하면 누구나 아는 명곡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명곡 뒤에 누구와의 합의도 없이 '독주'를 시작한다. 세 번째로 무대의 조명은 플레처의 지휘 사인과 함께 꺼졌다가 앤드류의 독주 시작과 함께 다시 켜진다. 지금은 페스티벌의 오프닝이고 그들은 한 팀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 밴드는 플레처가 지휘하는 밴드지, 앤드류의 밴드가 아니다. 앤드류는 이 밴드의 메인은커녕, 마지막에 들어온 일원일 뿐이다. 지금 앤드류가 하는 행동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행동이다. 앤드류는 무대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 무대 자체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무대로, 모든 템포를 자신에게 맞추도록 바꾼다. 이것이 앤드류가 플레처에게 ‘내가 제2의 찰리 파커가 맞다’고 복수하는 방법이자 증명하는 방법이다.
피를 봐야만 가능한 수준의 연주, 앤드류는 정말 광인처럼 드럼을 두들긴다. 여기서 앤드류의 친아버지의 시점 쇼트와 클로즈업이 등장하는데, 아버지의 표정이 무척 복잡하다. 필자는 이 클로즈업이 ‘아들을 지지해주지 못한 죄책감’이라기보단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표정 같다. 끝내 앤드류를 집에 데려오지 못한, 플레처라는 악마에게 아들을 빼앗기고 만 아버지의 괴로움. 앤드류와 친아버지는 그 시점 쇼트의 거리감만큼이나 멀어진 것 같다. 시점 쇼트 직전에 잠시 사운드가 사라지고 프레임 속에 앤드류의 상체만 잡았다가 다시 사운드를 키우는 장면은 충분히 과잉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 번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필자는 이 부분이 자신을 욕망을 거세하려 하는 애증의 아버지와 친아버지 둘 앞에서 자신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절정에 이르는 장면같다고 느낀다. 아까 2번째 사건에서 앤드류의 내력이 ‘분출’할 곳을 잃었다고 했듯이, 지금 이 장면은 앤드류 내력의 거대한 분출 장면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오프닝에서 끝까지 듣지 못했던 부분은 이 하이라이트에서 마저 듣게 된다.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속주 다음, 이 격렬한 영화의 마지막 분출 이후 프레임이 입까지 잡고 있지 않기에 정확하지 않지만,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뭔가를 말한다. 이 영화의 맥락상 그 발언은 높은 확률로 "Good job"이다-“네가 제2의 찰리 파커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맥락상 Good job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앤드류는 이 처절한 자기 증명에 성공한 듯하다. 영화 <위플래쉬>는 딱 이 부분에서 끝난다. 하지만 이런 영화라면 영화가 끝난 다음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위플래쉬>를 파멸로 향해가는 반성장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생각한다고 했다. 앤드류가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를 논하는 것은 개인적 가치관의 문제다. 그런 얘기는 영화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앤드류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보다는 <위플래쉬> 이후의 앤드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앤드류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다. 영화는 이미 끝났고 카메라로 찍히진 않았으니 사실상 추측에 불과하지만, 영화의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필자가 작성한 속편이라고 생각하면 감사하겠다.
앤드류는 JVC에서 무지막지한 연주를 보여줬고, 그는 친아버지가 조롱하던 링컨 센터에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가 앤드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까닭은 더 이상 앤드류에게 외력이 없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이제 늘 자기 자신과 사투해야만 한다. 애증의 아버지 플레처에게 인정받았으니 앞으로도 관계가 지속되지 않을까? 라고 질문할 수 있겠으나, 플레처는 공교롭게도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말’을 해버렸다. 그는 이제 긍정적인 의미에서 앤드류에게, 제2의 찰리 파커에게 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플레처는 앤드류가 선택한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오로지 제2의 찰리 파커를 위해 자극시키는 법만 아는 인간이다. 플레처는 아버지나 선생의 위치에서 자식이나 제자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그러므로 아주 부정적인 의미에서 앤드류는 아버지로부터 곧바로 독립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과연 ‘스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있다. 플레처는 바에서 만난 앤드류를 다시 자극시키면서 퍽 인상적인 대사를 몇 마디 내뱉는다. ‘요즘 세상은 뭐든 쉬운 걸 원해. 그러니 재즈가 죽어가지. (…) 그런 제자를 키워보려고 누구보다 노력했어. 그래서 내 노력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어.’ 플레처는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노력을 계속해나간다면 언젠가 제2의 찰리 파커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 영화 속에서-아마 현실 또한 마찬가지로- 재즈는 죽어간다. 그러니까 재즈라는 장르가 아예 종말을 맞이한 것은 아니지만 재즈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필자의 생각엔 재즈의 시대를 풍미할 스타는 그때 이미 탄생했고 지금은 탄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들 수도 없다. 그런데 플레처는 이 불가능한 일을 한계 이상의 외력을 통해, 정서적 학대를 통해 해내겠다고 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이런 끔찍한 인간이 있을까? 영화의 내용이 꼭 도덕이나 윤리에 부합할 필요는 없고, 가치판단에 그다지 중요한 요소도 아니다. 하지만 <위플래쉬>는 확실하게 끔찍한 이야기다. 필자는 이 영화가 훌륭한 영화라고는 생각하지만, 개봉 당시에 <위플래쉬>를 보고 자극받았다는 몇몇 네티즌들의 평가에는 다소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앤드류의 내력이 점점 더 높아져 가면서 소위 말하는 ‘인간미’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므로 앤드류는 성공 가도를 걷든, 걷지 못하든 그는 스스로 파멸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것은 앤드류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성공에 대한 갈망이 있긴 했지만, 과연 플레처를 만나기 전에도 ‘이름만 남길 수 있다면 약물중독으로 단명하는 삶’을 바라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플레처를 만나기 전의 앤드류는 성공했을지 못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위플래쉬>는 앤드류가 플레처를 만나면서 시작하고, (아마도) 함께하는 마지막 무대에서 끝난다. <위플래쉬> 이후의 앤드류는 확실히 파멸할 것으로 보인다. Whiplash… 채찍질이란 뜻의 영어단어다. 플레처는 채찍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영화가 시작될 무렵의 장면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다. 암전이 끝난 이후 앤드류가 연습을 시작하자 천천히 달리 인으로 앤드류에게 다가가는 카메라. 앤드류가 누군가 왔다는 것을 인지하자 플레처 교수로 컷이 되지만, 앤드류로 향해 가는 카메라는 플레처의 시점 쇼트가 아니다. 명백하게 앤드류가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가 일치하지도 않고 플레처의 눈높이와 카메라의 아이 레벨이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카메라 이동은 뭘까? 내 생각엔 앤드류에게 ‘플레처라는 채찍’으로 ‘불행’이 서서히 다가가는 장면처럼 보인다. 앤드류와 플레처의 더블 타임 스윙 연습 부분에서 주목해 볼만한 것은, 플레처가 외력을 가하는 대상이 앤드류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태너와 코넬리, 그 외의 밴드의 구성원들 또한 플레처의 자장 안에 있는 동안은 이 외력의 객체가 아니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위플래쉬> 속 세상에서 꽤 시간이 지난 다음, 플레처 교수는 뭘 하고 있을까? 그는 아마도 제3의 찰리 파커를 위해, 아니 어쩌면 너무 빨리 떠난 제2의 파커를 다시 찾기 위해서 의자를 집어던지고 있을 것이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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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유망한 그녀의 복수극 <프라미싱 영 우먼>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포스터
프라미싱 영 우먼 (Promising Young Woman, 2020)
장르 : 미국, 범죄·스릴러 │ 감독 : 에머랄드 펜넬 │ 각본 : 에머랄드 펜넬
출연 : 캐리 멀리건(캐시), 보 번햄(라이언), 레버른 콕스(게일) 외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4분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컷
그녀는 왜 복수의 화신이 되었나
‘캐시’는 한 때 의대를 다니던 촉망받는 여성이었으나, 현재는 부모님의 집에 얹혀살며 친구의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딸이 대학을 중퇴하고 서른이 넘어가도록 방황만 하니, 부모는 늘 혀를 차기 바쁘다. 하지만 캐시가 성공가도가 보장될 대학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눈치나 받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조용히 치러야만 하는 자신만의 과업이 있기 때문. 그건, 남자들에 대한 응징이다. 정확히는 술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여성을 강간하려는 남자들을 향한 응징.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컷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캐시는 매일 밤 클럽에 나가 술에 떡이 된 연기를 펼치며, 불특정 다수의 남성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백이면 백, 남성들은 캐시를 데려다주겠다며 나서고 결국엔 “우리 집 가서 술 한 잔 더 할래?”를 핑계로 손쉬운 성관계를 꿈꾼다. 여자는 취했겠다, 자신의 집에 자발적으로 따라왔겠다, 남성들은 온갖 아부를 떨어가며 캐시를 침대에 눕히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성관계를 시도하려는 순간, 캐시는 벌떡 일어나 술기운 하나 없는 얼굴로 묻는다.
“너 뭐 하는 거야?”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컷
쉽게 용서받은 너희들을 위해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궁금해질 때 즈음, 캐시의 사연이 밝혀진다. 의대를 다니던 시절, 캐시에게는 ‘니나’라는 둘도 없는 절친이 있었다. 니나는 대학 파티가 있던 날, 만취상태가 되어 남학생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는데 심지어는 그 영상이 찍혀 돌아다니자 결국 자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곳은 무려 의대가 아닌가. 대학 당국은 훗날 사회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될 안타까운 청년들의 삶을 지켜주고자 사건을 덮어버렸고, 결국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사회의 재목이 되었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컷
사회가 못하면 내가 너희를 벌하겠어
캐시에게는 이런 니나의 죽음이 트라우마이자 커다란 죄의식이었다. 때문에 대학도, 자신의 전도유망한 미래도 포기한 채, ‘술 취한 여성은 강간해도 된다’는 은근한 합의 속에 살아가는 남성들을 직접 벌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자신에게 투명한 진심을 보이는 남자 ‘라이언’을 만나 잠시 주춤하기도 하지만, 나쁜 놈들과는 다르다고 여겼던 라이언 조차도 실은 니나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캐시는 그 일을 계기로 더욱 열이 올라, 니나 사건의 결정적 가해자를 찾아 처단하기로 결심하는데. 의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앞날이 창창하다는 이유로 사회의 용서를 받았던 가해자 ‘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는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로 누군가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살고 있었다. 심지어는 모델 출신 여자 친구와 결혼까지 앞둔 상태였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진 캐시는 알의 결혼전야 총각파티에 스트리퍼로 잠입한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컷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했지?
그러나 그 개자식을 제대로 밟아주길 바랐던 관객의 기대와는 달리, 힘에서 밀린 캐시는 역으로 알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만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었던 과업을 미처 끝내지 못한 채로. 캐시의 복수에서 간신히 살아 나왔지만 살인자가 되고 만 알은 결국 캐시의 시신을 유기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결혼식을 치른다. 자신의 숭고한 모델 여자 친구 ‘아나스탸사’와 함께. 그러나 결혼식이 끝날 무렵 경찰차가 결혼식장을 향해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온다. 자신이 죽게 될 상황까지 고려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캐시의 복수극이 끝내, 빛을 발한 것이다. 니나를 강간했으며 죽음으로 몰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창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용서받은 강간범 알은 그렇게 7년이 지나서야 죗값을 치르게 된다. 살인 혐의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컷
이 제목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영화의 제목은 <프라미싱 영 우먼>, ‘전도가 유망한 젊은 여성’이라는 뜻이다. 이는 2016년에 있었던 스탠퍼드 대학의 유명한 성추문 사건에서 기인한 제목이다. 사건의 내용인즉슨, 스탠퍼드에 재학 중이던 ‘브록 터너’라는 남학생이 술에 취한 여학생을 쓰레기통 뒤로 끌고 가 세 번에 걸쳐 성폭행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는 “초범인 데다 전도가 유망한 젊은 청년”이라는 말로 브록 터너를 두둔했다고 한다. 명문대를 졸업해 사회의 빛이 될 청년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거였다. 이 사건은 여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이런 망언을 남긴 판사는 결국 주민투표로 해임되었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컷
갈 길은 멀고, 본질은 간단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미투 운동을 거쳐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목소리가 존중받는 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피해 여성이 ‘만취 상태’였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네가 취하질 말았어야지. 네 발로 따라갔으니 너도 반은 책임이 있지.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그런 모순을 찌르는 영화다. 강간범이 제 아무리 의대를 나왔든 장학생이든 그것은 면죄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여성을 강간해도 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설파한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이자 당시 미국의 상원의장이었던 ‘조 바이든’은 스탠퍼드 성추문 사건을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동의 없는 섹스는 강간이다”라고. 그의 말처럼 문제의 본질은 사실 간단하고 명료한 것 아닐까. 뭐가 어떻든 간에 강간범은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잘못을 했으니까.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컷
언제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길 바라
몸을 가누지 못하는 캐시를 슬슬 구슬려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성관계를 시도하려던 수많은 남성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캐시가 겁박하자 이렇게 말한다. “나 좋은 사람이야” 그러나 상대가 취약하지 않을 때만 골라서 좋은 사람이면 뭐할까.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니나는 강간해도 되는 여자고, 결혼상대인 아나스타샤는 존중해야 하는 여자일까. 그래도 되는 여성과 그러면 안 되는 여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모든 남성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언제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기를 바란다. 자신의 전도유망한 미래가 안전하길 바라는 만큼.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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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리 vs 역대 빌런 모음 <범죄도시4>
마블리 변천사 VS 역대 빌런
여러분들의 '빌런' PICK은? 댓글로 적어주세요
<범죄도시4>
신종 마약 사건 3년 뒤,
괴물형사 ‘마석도’와 서울 광수대는 배달앱을 이용한
마약 판매 사건을 수사하던 중수배 중인 앱 개발자가
필리핀에서 사망한 사건이 대규모 온라인 불법 도박
조직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낸다.
필리핀에 거점을 두고 납치, 감금, 폭행, 살인 등으로
대한민국 온라인 불법 도박 시장을 장악한 특수부대
용병 출신의 빌런 ‘백창기’와 한국에서 더 큰 판을 짜고
있는 IT업계 천재 CEO ‘장동철’.
‘마석도’는 더 커진 판을 잡기 위해 ‘장이수’에게 뜻밖의
협력을 제안하고 광역수사대는 물론, 사이버수사대까지
합류해 범죄를 소탕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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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어 ; 바다를 부른 여인 - 욕망과 갈등에 휩쓸리는 네 남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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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인어; 바다를 부른 여인]은 연극의 영화화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전에도 많은 공연들의 영상화하는 작업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공연 풀샷 혹은 일부의 클로즈업으로 촬영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작품은 연극의 영화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각 장을 원테이크로 찍으면서 연극적 요소를 살린 촬영을 했고 헨드헬드 기법으로 인물들을 따라가며 촬영을 하여 몰입도를 높였습니다. 연극 무대와 같은 무대미술을 활용하면서도 배우들의 연기
는 영화의 톤에 맞게 진행되었습니다. 말그대로 ‘연극’의 ‘영화화’라는 작품의 목적에 충실했습니다. 이렇게 영화 [인어; 바다를 부른 여인]은 연극계는 물론 영화계에서 시도된 적이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된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
을 주는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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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왓 이프...? 시즌 2> 티저 예고편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겠지만... 단지 시작에 불과했지" 또 한 번 뒤바뀔 마블의 운명! 디즈니+ 마블 오리지널 시리즈 [왓 이프...? 시즌2] 12월 22일부터 매일 한 편씩, 디즈니+ 단독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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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수리남> 티저 예고편
"누가 진짜인가" 여기, 믿을 수 있는 자는 없다. 목숨을 건 생사의 비즈니스가 시작되는 곳. 《수리남》 9월 9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공작》 《범죄와의 전쟁》 윤종빈 감독 하정우X황정민X박해수X조우진X유연석X특별출연 장첸 그리고 당신이 믿지 못할 '실제로 있었던 거짓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