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ofilm2022-03-13 00:11:47
스펜서 (2021)
3일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되는 그녀의 고통
** 본 리뷰는 <스펜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스펜서 (2021)
감독: 파블로 라라인
출연: 크리스틴 스튜어트, 샐리 호킨스 등
장르: 드라마
개봉일: 2022.03.16
러닝타임: 111분
다이애나 스펜서의 지옥 같은 성탄절
영국 왕실의 크리스마스 기간을 함께하기 위해 '다이애나 스펜서(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홀로 차를 몰고 왕실 소유의 저택, 샌드링엄 하우스로 향한다. 이곳은 '스펜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녀의 고향이기도 하다. 영국 왕가가 한자리에 모인 그곳엔 화려한 드레스, 방을 가득 채운 크리스마스 선물들, 그리고 수석 셰프 '대런(션 해리스)'가 고급 식재료들로 완성한 만찬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고향임에도 길을 잃고 지각을 한 다이애나에겐 불안과 스트레스가 가득하다. 저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왕실을 모시는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은 왕실의 전통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몸무게를 재고, 3일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입어야 할 드레스가 정해져 있어 그녀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미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는 중인 남편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왕실의 모든 수하인들은 허울 뿐인 왕실에 충성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옥죈다. 결국 다이애나의 울분은 인내심의 끝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그녀는 마침내 해방을 좇아 한없이 질주한다.
창살 없는 감옥, 자유를 향한 갈망
<스펜서>는 '다이애나 스펜서'의 비극적인 삶을 모티브로 상상을 가미하여 쓴 허구의 이야기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삶이라면 '이 정도의 사건쯤은 벌어질 수 있었겠지'라는 생각으로부터 발현된 스토리가 아닐까 싶다. 보통 영국 왕실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스펜서>는 오로지 왕실의 크리스마스 파티 기간인 단 3일의 시간만을 다룬다. 따라서 사건의 발생이나 줄거리의 기승전결보다는 오로지 '다이애나'의 심리적 상태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따라서 그 복합적인 심리를 선명하게 표현해야 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도입부에서 영국 왕실을 위한 식재료를 배달하는 차들이 지나가는 길 위에 죽은 꿩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 이는 마치 자유를 좇아 영국 왕실을 벗어나는데 성공했지만, 끝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다이애나'를 상징한다. 시작부터 미장센을 통해 극에서 다이애나의 불행과 슬픔이 그려질 것을 예고하며 극의 분위기를 미리 예측할 수 있게끔 만든다. 극중 꿩들은 왕실 사람들의 사냥 연습을 위해 길러지는데, 마치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왕세자비의 역할에만 충실할 것을 요구받는 '다이애나'의 삶과 닮아있다.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에게 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으며 그녀는 사냥용 꿩들처럼 꼼짝없이 갇힌 채 자신의 역할과 자유를 향한 갈망 사이에서 끝없는 감정의 충동을 겪는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인생연기
<스펜서>는 오로지 '크리스틴 스튜어트'에 의한,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위한 작품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그의 뛰어난 연기력이 빛을 발한 영화다. 실제로 외모적인 싱크로율이 높기도 하지만, 극 중반부터는 배우가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실제 인물에 빙의했다고 보일 정도로 역할에 혼연일체 되어 소름돋는 연기를 펼친다. 불안과 스트레스로 인해 온갖 신경이 곤두선 예민한 상태,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두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울과 압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왕실 사람들에 대한 분노 등 복잡한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특히나 주변의 모든 것이 다이애나를 옥죄어 올 때의 폭발하는 처절한 괴로움과 심리적인 압박은 관객에게 감정을 전이시킬 정도다.
특정 사건 전개가 아닌 다이애나의 감정선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영화이기에 배우의 연기가 가진 파괴력이 핵심이 되는 작품인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대치를 넘어 몇 배로 훌륭한 연기를 펼친다. 과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 인생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다.
스펜서의 불행을 극대화한 연출
<스펜서>는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작품 중 하나인 <재키>와 많은 면이 닮아 있다. 대칭 구도의 촬영 기법, 뿌연 화면의 질감과 부드러운 색감의 활용, 과거의 시대를 그대로 가져온 듯한 그레인 필름, 그리고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상류층 여성의 삶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오래된 동화 같은 영상미와 다이애나의 파스텔톤 의상이 가진 러블리한 색감, 왕실의 온갖 화려한 장식들과 음식들은 다이애나의 시커먼 불행과 대비되어 그녀의 외로움과 답답한 심정을 극대화한다.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의 모습은 누구보다 아름다웠기에 드레스를 입은 채 자해를 시도하고, 화장실 변기를 붙잡으며 구토를 해야만 했던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그토록 괴로움을 터뜨리는 그녀 곁에는 지원군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단순히 다이애나와 그의 가족들의 크리스마스 파티 3일의 시간을 그렸을 뿐이다. 하지만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마치 30년의 긴 세월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지옥 같은 하루하루는 끔찍하게 길었다. 공포스러운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현악기의 연주, 진주목걸이의 찰랑거리는 소리 등의 청각적 요소가 다이애나의 불안과 공포를 선명하게 대변한다. 매일 같이 이러한 상태를 겪었다고 가정하면, 이혼을 바라고 왕실을 뛰쳐나오는 게 당연한 결과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가 진정으로 바랐던 건
물론 픽션이겠지만, 결말부에 다이애나는 두 아들을 사냥장에서 구출해 차를 타고 맘껏 도로를 달리며 자유를 만끽한다. 수석 셰프가 만든 최고급 음식을 모두 토해낸 그녀가 찾아간 곳은 패스트푸드점 KFC였고, 드라이브 스루 주문을 하며 마침내 자신의 이름 '스펜서'를 당당히 외친다. 극 초반부터 고향집을 향해 마구 달려가고, 허수아비에 걸린 아버지의 낡은 자켓을 가져와 소중히 걸어두는 것을 보면 그는 영국 왕실이 다 앗아갈지도 모르는 자신의 뿌리이자 자신의 자아 그 자체를 지키려 했던 것 같다. 왕실은 자신에게 두 가지 역할을 요구했지만, 결국 그 중 하나인 '다이애나 스펜서'로서의 모습은 사라져만 갔고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불행의 늪에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국 왕실의 모두가 그녀의 품행을 비판했을지는 몰라도, 허울 뿐인 전통 속에 사로잡힌 왕가의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 그곳에서 자신을 해방시킨 스펜서의 삶이 가장 고귀하고,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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