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티2022-03-17 23:15:19
한낮 여독처럼 슬쩍 사라질 고독이었다면, 영원한 그 이름 속에서 머물렀겠지.
영화 <스펜서> 시사회 리뷰
2022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화제작 <스펜서>를 지난 주 씨네랩 초청 사전 시사회를 통해 만나고 왔다.
어느덧 개봉일이 다가왔다는 사실! 더 많은 분들이 좋은 영화를 봤으면 하는 마음에 널리널리 홍보중이다. 올해 놓치면 후회할 작품 중 하나.
2013년에 비슷하게 ‘다이애나 스펜서’를 다룬 작품이 있다.
나오미 왓츠 주연의 <다이애나>라는 작품인데, 똑같은 인물의 일대기를 그렸지만 초점은 완전히 다르다. <다이애나>는 궁정에서 별거생활을 하던 시점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 <스펜서>는 완전히 별거생활을 하기 전, 3일 간 궁정에서의 성탄절 연휴를 보내며 자신의 진짜 모습과 마주하는 인물의 모습을 그렸다.
기대를 어느 정도 하고 갔지만, 훨씬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영화의 화면 비율부터 자글자글한 필름의 포근한 감성까지 살리며 1980년대 영국의 모습을 아름답게 재현했다. 광활한 자연 경관과 올곧게 펼쳐진 왕실 건물들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영화에 매료되었다. 이 모든 것을 담은, 잔잔하지만 묵직한 에너지가 살아있었던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고두고 생각난다. 한 번 더 관람하고 싶을 정도.
사실, 영화의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혼자 이끌어 간다. 그만큼 엄청난 에너지와 흡입력을 2시간 동안 관객들에게 다채롭게 표현해야 했고, 관람 전 제일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대중적인 <트와일라잇>의 벨라, <카페 소사이어티>의 보니 등 이전 작품에서 보여진 이미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그 틀을 이번 작품에서 완전히 벗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그 의문들은 영화를 보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영국 억양은 물론, 고개를 기우는 각도부터 걸음걸이, 사소한 제스쳐 등 인물에 대한 연구와 고민을 치열하게 한 흔적이고스란히 관객들에게 느껴질 정도로 듬뿍 담겨 있었다. 결국, 실사 인물을 연기한다고 함은 관객들을 설득하는 것과 같다. 이미 대중들에게 각인된 그 인물의 선명한 이미지의틀을 오롯이 본인의 역량으로 깨야 하고, 그 자체가 영화의 의미가 된다. 인물의 서사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낸 명분은 또다른 해석으로 변화를 줘야하고 동시에 감동을 줘야 한다. 그리고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그 무른 과정들을 섬세하게, 성공적으로 해냈다.
비로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그녀의 몸부림, 그것이 고독이든 여독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의 부재는 영원한 이름으로 남았을 테니. 자신의 수많은 감정들과 부딪히고, 단단했던 신념의 조각들이 처참히 부서지며 모든 것이 멈췄지만,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스펜서.’
*본 영화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한 영화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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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 설계도
8★/10★
전쟁 중인 유럽을 탈출해 미국에 도착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가 한 성매매 업소에서 남성 성노동자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난 그런 쪽 아니야’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장면은 그가 훗날 마주할 해리슨의 끔찍한 성폭력을 예감하는 것이 아닐까. ‘이쪽’과 ‘저쪽’의 구획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선언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해리슨에게 강제로 자리를 부여받는 라즐로가 느낄 비감이 도입부의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느꼈다.
재능 있는 유대인 건축가가 이주 후 미국 하층부를 전전하다 한 거부의 눈에 들어 대형 프로젝트를 맡은 후 종내에는 영광을 얻는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우리가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본 이방인의 성공 스토리와는 결이 다르다. 노인이 되어 휠체어에 탄 채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전시에 참석한 그의 얼굴은 피로해 보인다. 라즐로 부부를 떠나 이스라엘로 향한 조카 조미아가 정작 라즐로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삼촌의 업적을 설명하는 대목은 그의 피로감에 공허함을 더한다.
‘성공한 유대인’이 있는 것은 맞다. 그들의 성취는 종종 아메리칸드림의 증거로 전시된다. 그러나 그 성공은 아름답지 않았다. 지적 허영과 과시욕, 속물적 근성의 화신, 즉 가장 미국적인 인물인 해리슨은 라즐로를 자신의 자랑스러운 수집품 정도로 대우하고, 라즐로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술 취한 그를 강간한다. 그는 라즐로에게 “넌 그저 밤거리 매춘부야”라고 말한다. ‘선’을 넘지 말라는 선언이다. 라즐로 프로젝트의 철학과 예산이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자 미국 사회의 주인은 돈이며, 그 돈을 가진 사람은 나라는 점, 즉 자신은 성 구매자이며 너는 성 판매자라는 점을 라즐로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방법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라즐로는 그 충격에 휩싸여 더욱 자신의 예술적 목표(혹은 해리슨의 야망)인 건축물에만 집착하고 자신이 쌓아 올린 건축물에 유폐된 듯 영혼을 강탈당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라즐로는 걸작을 창안했으나 영혼을 상실했고, 미국식 속물주의를 대변하는 해리슨은 사건이 폭로된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며, 늙고 지친 라즐로를 기념하는 행사에서는 과거 그를 떠난 조카가 확신에 찬 얼굴로 숙부의 업적을 칭송한다.
이 영화가 아메리칸드림의 오욕에 관한 문제 제기라는 인상을 받은 건 그래서다. 이 세 사람이 이루는 구도에서는 누구도 온전한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일 수 없다.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으로 예술에 대한 심미안 없이 뭐든 돈으로만 하려는 해리슨도, ‘걸작’을 만들었으나 생기를 잃어버린 라즐로도, 홀연히 등장해 숙부의 성취‘만’ 이야기하며 뒤늦게 자신이 라즐로의 혈육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조미아도.
영화가 한창 건축이 진행 중일 때 고통받던 라즐로를 비추다가 갑자기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노쇠한 라즐로의 얼굴로 점프하는 것은 아메리칸드림에 영광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설계의 일환일 것이다. 사람들은 완성된 건축물만 본다. 그 이면의 설계도를 상상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로 ‘라즐로의 아메리칸드림’에서 완성물이라 할 그의 건축물과 그로부터 피어나는 영광의 순간들을 뺀 채 그 영광의 설계도만 보여준다. 누군가의 장식품으로서만 예술가일 수 있었던 이방인, 그런 이방인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구축되지 않았을 미국이라는 허상, 설계 과정의 문제는 덮고 결과물만 바라보며 찬사를 보내는 사회가 이방인의 아메리칸드림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brutal) 설계도 말이다. 라즐로가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추구하는 브루탈리스트였다는 점은 이 설계도가 품은 역설을 더한층 도드라지게 한다. ‘사람은 죽어도 예술은 남는다’는 통념 혹은 진실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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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트 2020, SNS은 왜 혐오로 오염되었나?
[줄거리]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의문의 지역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사냥 당하고 있는 ‘크리스털’(베티 길핀)이 자신들을 사냥하는 주체를 밝히고, 그들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1. 인간 사냥은 왜 벌어졌는가?
<헌트>는 모바일 메신저로 첫 장면이 시작된다. 관객들은 사냥을 하기 위해 저택에 모이는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시지는 영화의 사건보다 1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진다. 아테나와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기업의 고위 직책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지가 유출되고 ‘매너 게이트(Manorgate)’라는 음모론화된다. 이로 인해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직장에서 해고된다. 물론 아테네는 사내 감찰한 결과에서 여러 번 외도한 사실이 드러났고, 성기 사진을 담당의에게 보내고, 대통령을 비방하는 도덕적 해이를 저질렀다.
백수가 된 그들은 화가 나서 그들의 농담을 현실화시키기로 결정한다. 아테나와 그녀의 친구들은 그들의 핸드폰이 해킹하고 메시지를 유포시킨 음모론자들을 추적한다. 그들은 군사고문을 초빙해 몇 달 동안 군사훈련을 마치고 ‘가짜 뉴스 유포자’들을 크로아티아로 데려온다. 그리고 사냥을 개시한다. 이것은 해고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이자 가짜 뉴스를 퍼뜨린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2.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
양쪽 진영 모두 자신의 정치 성향과 지지하는 정당의 정책을 끊임없이 옹호하며 상대 진영을 비난한다. 사냥감이 된 도망자들은 총기 소유를 찬성하고 이민자와 난민 수용을 반대한다. 사냥감들은 미시시피, 와이오밍, 플로리다 출신이다. 바로 트럼프가 승리한 공화당의 텃밭이다. 작년 대선에서 스윙 보트 스테이트였던 플로리다에서 트럼프가 이겼다. 반대로 사냥꾼 자본가들은 바이든의 파리협약 재가입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상징한다. 기후 변화는 진짜라며 사냥감들에 일갈하고 아이티를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야 하거나 인종차별을 반대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묘하게 모순된다. 우파 사냥감은 할머니 점원이 지적한 정당방위에 대한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유와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주의자임에도 기차에서 만난 이민자와 난민에 대해 무턱대고 적대감을 드러낸다.
반대로 좌파 사냥꾼들도 입으로는 환경보호를 외치면서 최상급 오세트라 캐비아를 먹는다. 또, 인종차별에 반대하지만, 구체적인 구제책을 논의하기보다는 ‘아프리칸 미국인’이냐 ‘흑인’으로 불러야 하냐고 명칭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심지어 리더인 아테나는 평등과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진보주의자 답지 않게 정치적 올바름을 무시한다. 그녀는 가짜 뉴스 유포자들은 ‘빌어먹을 레드넥’이 아니라 ‘개탄스러운 것들’이라며 싸잡아 비난한다.
3. 주인공은 진짜 크리스탈 메이였을까?
아테나는 ‘모두에게 정의를’라는 SNS 아이디를 사용하는 가짜 뉴스 유포자 크리스탈 메이를 쫓고 있었다. 여주인공은 자신은 동일한 지역에 살고 있는 동명이인이라고 항변한다. 증거로 우편물이 잘못 배송된다고 설명한다. 크리스탈과 아테나가 나눈 마지막 대화를 살펴보자. 숨을 몰아쉬던 아테나는 ‘모두에게 정의를’이 맞느냐고 묻는다. 크리스탈은 그것을 부인하지만 아테나는 그녀를 믿지 않는다.
크리스탈의 정체는 열려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주제를 고려해 볼 때 크리스탈은 진실을 말하고 있고, 그녀는 ‘모두에게 정의를’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헌트>는 가짜 뉴스와 같은 소셜 미디어의 부작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냥감이 된 11명은 유출된 문자 내용과 아테나가 외딴곳에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외 어떠한 증거도 없이 매너게이트 음모론을 SNS에 올렸다. 반대로 아테나와 사냥꾼 무리도 가짜 뉴스 유포자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사냥꾼 무리는 대강의 정보로 무턱대로 사람들을 납치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참전용사 동명이인을 잘못 잡아왔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이 몰살되는 계기가 됐다.
4. 동물농장과 스노볼이 의미하는 바는?
사냥꾼들은 크리스탈을 ‘스노볼’로 부른다. 크리스탈은 아테나가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아테나는 크리스탈에게 조지 오웰의 소설<동물 농장>에 비유했다고 설명해 준다. 쉽게 말해 아테나는 크리스탈을 ‘돼지’취급했다. 하지만 크리스탈은 동물농장을 읽었을 뿐 아니라 아테나가 자신보다 스노볼과 더 비슷하다고 알려줌으로써 아테나를 놀라게 한다.
소설에서 스노볼은 유능한 리더이지만, 돼지가 다른 어떤 동물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믿고 있다. 그는 이상에 함몰되어 현실 정치와 멀어졌고, 결국 권력투쟁에서 패배한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정보가 포화상태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과다한 정보량에 의해 옥석을 구별하기 힘들어졌다. 그렇기에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함부로 판단한다. 이것이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증오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혐오한다고 <헌트>는 일갈한다.
5.<헌트>의 주제는 무엇인가?
피비린내 나는 풍자적인 방법으로 <헌트>는 오늘날에 존재하는 혐오와 가짜 뉴스의 위험을 담고 있다. 왜곡과 추정의 극단적인 위험들 말이다. 인터넷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소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그에 따른 엄청난 혜택이 있지만, 가짜 뉴스를 인해 얻는 정치적 이익, 부실한 이론적 근거, 불분명한 출처, 불순한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어졌다. 주관적인 편협한 의견이 곧 객관적 가짜 뉴스로 둔갑하기 때문에 결국 사용자의 해석에 좌우하는 만큼 왜곡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영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헌트>는 ‘정치적 올바름(PC)‘을 지나치게 받아들였을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한 것이다. PC 문화에서는 사람들의 주장과 동기에 큰 의미를 둔다. 소셜 미디어 덕분에 그 주장과 동기가 가져올 부작용과 악영향을 간과하기 쉽다. 이것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헌트>에서 묘사된 대로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
6. 맨 마지막 장면의 ‘토끼’
주인공 어머니가 재해석한 <토끼와 거북이>를 기억하는가? 거북이처럼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절대로 지지 않는 토끼가 되어야 할까?라고 영화는 묻는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하나만 묻겠다. 여주인공의 첫 등장을 기억하는가? 그녀는 침착하게 바늘과 나뭇잎으로 나침반을 만들어 방향부터 확인한다. 그녀는 극중 유일하게 상대 진영을 비방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선동당하지 않고, 홀로 큰 그림을 그려 사냥꾼 무리를 척살한다. 아테나처럼 소위 ’깨어있는 엘리트‘도 그 함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토끼가 의미하는 바는 대략 이렇다. 현대사회는 정보량이 과다하고 현대인들은 이를 분별할 여력과 시간이 부족하다. 감독은 크리스탈을 통해 ‘자세히 관찰하기’, ‘심사숙고’, ‘비판적 읽기’, ‘출처 확인’ 등 비판적인 미디어 활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주방위군 출신 군사고문이 아프가니스탄 파병 용사 출신인 주인공에게 패배하는 장면은 이에 대한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말라는 직설적인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다르게 보면, 여론에 휩싸이지 말라는 뜻이다. <헌트>에서 보수와 진보가 대립한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양 진영에 속하지 않는 '중립자' 크리스탈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수와 진보는 왜 우익과 좌익이라 불릴까? 날깨는 양쪽 다 있어야 날 수 있다. 그렇듯이 정치도 보수와 진보 모두 필요하다.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지 우리가 오해하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진보적 가치를 배제한 보수나 보수적 가치를 무시하는 진보는 편향적인 이념일 뿐이다. 보수든 진보든 개혁과 혁신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공존하면서 경쟁해왔다. 남북전쟁 당시 흑인 해방을 주도한 공화당이 현재는 반이민 정책을 펼치는 변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치란 생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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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목적인 믿음에 던지는 물음표 - 누구를 향한 믿음인가?
영화 <계시록>
실종 사건의 범인을 단죄하는 것이 신의 계시라 믿는 목사와,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는 실종 사건 담당 형사가 각자의 믿음을 쫓으며 벌어지는 이야기
1. 종교와 욕망, 누구를 위한 믿음인가?
눈에 보이는 것, 즉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들은 '증명'이 가능하다. 무엇을 샀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에 대한 증명. 그러나 '믿음'은, '종교적 믿음'은 증명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내 눈 앞에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고, 신자들은 그를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절대자인 신이 신자에게 내리는 '계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종교를 다루는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종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신은 존재하는가?'로 모인다. <계시록>의 민찬 또한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고, 신과 신자들을 위해 찬송가를 부르고, '계시'를 받기를 기다린다. 신을 믿는 자들이 바라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다. 제가 잘 되게 해 주세요, 제 아들이 취업을 잘하게 해 주세요, 저 사람보다 제가 성공하게 해 주세요. 결국 간절히 바라는 기도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성취와 욕망 충족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계시록>은 이 지점에서 엿볼 수 있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지방의 작은 교회 목사를 맡고 있는 민찬은 동네에 대형 교회가 들어선단 사실을 알게 되고, 그 교회 목사가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를 기도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한다는 것은, 그리고 어떤 대상에게 기대어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는 신이라는 존재가 위안이 된다면, 그리고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다면 설령 신이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의 대상으로써 기능을 다한 것이므로.
그러나 <계시록>의 민찬은 자신의 욕망을, 그리고 충동을 '신의 계시'라고 스스로 세뇌하고 위안하는 인물이다. 이는 교회에 찾아왔던 낯선 남자, 양래가 성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자신의 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부터 얽히는 사건들 사이에서 드러난다. 하원하는 딸을 데리고 오는 걸 깜빡한 사이, 웬 낯선 남자가 딸을 데리고 갔다는 소식을 들은 민찬은 자연스레 양래를 의심하고 만다. 양래가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양래에게 '신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건넨 것과는 달리, 일이 일어나자마자 자연스레 '그럴 것 같은' 인물로 양래를 떠올린 것이다.
딸을 찾기 위해 양래의 집 앞으로 간 민찬은 우연히 양래의 수상쩍은 행동을 보게 되고, 양래를 쫓아 산 중턱까지 갔다 양래와 몸싸움을 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밀려 굴러 떨어진 양래는 정신을 잃고 만다. 돌에 머리를 부딪힌 채 쓰러져 있는 양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민찬에게 걸려오는 전화. 딸을 찾았다는 전화다. 양래는 딸의 실종과는 관련이 없었고, 이미 양래는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이제, 민찬은 어떻게 해야 할까.
2. 구도의 전복과 새로운 역할 부여, '신의 대리인'과 '범죄자' 사이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 민찬만이 엇나간 욕망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래는 민찬의 딸을 유괴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날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했고, 민찬이 있는 교회에 다니던 여자아이, 아영을 유괴했다. 이 때문에 민찬이 범죄를 저지른 대상은 '완전무결한' 자도, '과거를 청산하고 지금은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도 아닌 채 서 있다. 경찰들은 양래에게 범죄를 저지른 대상을 쫓는 게 아닌,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한 양래를 쫓는다.
아영을 찾기 위해서는 양래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민찬은 경찰들이 양래를 찾도록 가만히 둘 수 없다. 양래를 찾게 되는 순간, 양래의 범죄와 함께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될 자신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순간 민찬의 내면에서 민찬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신의 계시를 받고 '범죄자를 단죄하는' 일을 하게 된, 신의 대리인이 된다. 그 순간부터 일을 수습하기 위해 민찬이 벌이는 일들은 꽤나 흥미롭다. 민찬이 불안함을 애써 지우기 위해 택한 방식은 '계시'다. 자신이 이런 일을 벌이게 된 것도, 다시 살아난 양래를 발견하게 되어 2차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도, 모든 것들이 신이 계시를 준 것이라는 뜻이다. 경찰 대신, 그리고 피해자 대신 신의 계시를 받은 자신이 양래를 단죄할 것이며, 그 단죄의 방식으로 양래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
범죄를 숨기느라 바쁜 민찬에게, SKY평안교회 담임목사인 국환은 동네에 들어설 교회의 목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한다. 원래 내정자였던 국환의 아들이 신자와 연애를 했다는 사실이 공론화가 되면서, 새로운 담당 목사가 필요해진 것. 신을 향해 욕망을 내비치고,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어온 민찬에게 이는 확신을 주는 소식이 된다. 자신이 옳게 행동하고 있다는, 신이 자신에게 계시를 준 것이 맞다는 확신.
다시 발견한 양래가 '아영이 아직 살아 있다'며 자신을 죽이면 아영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한 순간부터 민찬의 욕망은 확실히 엇나간 모습을 보인다. 되레 양래가 '경찰을 부르라'고 말하며 민찬을 '미쳤다'고 비난하고, 민찬은 양래를 납치한 채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의 순간에 서 있다. 민찬과 양래의 피해자-범죄자 구도는 이때 완전히 전복된다. 사실상 민찬은 양래에 의해 피해를 본 게 없음에도(딸이 유괴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었으므로), 민찬의 오해에 의해 시작된, 뒤바뀐 범죄자-피해자 구도가 이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모두가 양래를 범죄자라고 가리키며 쫓고 있을 때, 민찬은 그 범죄자의 숨을 끊기 위해 쫓는다.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서. 피해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면서, '신의 계시'라는, 범죄자를 단죄하는 것이라는 자기위안을 품은 채로.
3.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 우연성 짙은 사건의 마무리
계시록은 그 욕망 아래 벌어지는 사건들, 그리고 범죄자-피해자 구도의 전복을 눈여겨 보았을 때 흥미로운 작품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여성 인물들의 활용은 아쉽게 느껴진다. 민찬의 아내는 오직 '신을 믿지만 바람을 피운', 그래서 민찬이 속죄하도록 만드는 인물로만 소비된다. 연희는 과거 같은 성범죄자에게 피해를 입은 여동생의 환영을 보는 경찰로 등장하는데, 과거 얽혀 있는 서사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침착하며, 경력이나 활동 비중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우연히' 발견하는 것들이 많다.
민찬의 수상쩍은 낌새를 파악하는 것도 우연히 민찬의 흙 묻은 신발을 봐서, 양래를 찾게 되는 것도 혹시나 싶어 찾아간 교회 앞에서 우연히 민찬의 타이어에 묻은 오디를 발견해서 이루어진다. 우연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민찬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방식은 '계시'를 받은 것이 민찬이 아니라 연희라는 느낌이 들게 할 정도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경찰이 된 인물이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같은 입장에 놓여 있는 어린 피해자를 구하게 되는 구도까지도 그 느낌이 해소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인물 각자가 가진 욕망의 정도로만 비교했을 때 엇나간 욕망을 더욱 드러낼 수 있는 건 민찬이 아니라 연희다. 새 교회의 목사가 되고 싶다는,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찬의 욕망에 비해 연희의 욕망은 긴 시간 끌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한 여동생의 환영을 보며 계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리던 연희가, 양래가 잡힌 뒤 여동생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양래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지를 알아보는 모습은 침착하다 못해 건조하게까지 느껴진다. 여동생과 관련된 서사는 '피해자 간의 연대'를 위해서만 쓰이고, 이외의 모든 순간에서 연희는 우연히 단서를 발견하는 경찰 히어로에 가깝게 등장한다는 점은 아쉽다.
4.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
다만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에서 이렇게 신과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작품들은 그 작품들이 드러내는 인물들의 욕망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느끼도록 만든다. 민찬의 욕망을 쫓다 보면 민찬의 행동이 억지스럽다고 느낄 수 없고, 연희의 욕망을 쫓다 보면 연희가 과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이는 모두 그들 각자에게 부여된 서사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욕망 아래 발생한 사건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갈무리지을 것인지에 따라 그 욕망이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을지가 달라질 뿐이다.
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절대자인 신으로부터 온 답신, '계시'. 누구도 해석해줄 수 없고, 누구도 실체로써 존재하는 증거물을 내보일 수 없다. 그래서 이 계시와 답신은 더더욱 그 믿음과 해석에 의해 다르게 읽힌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는 신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우리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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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고 변화하는 게 삶이라면, 우리는
심리적 거리가 먼 것은 평소에 의식하기 어렵다. 당장 오늘 먹고 입고 일하고 잠드는 일에 기민하게 반응하느라 그러한 일상 속에 불쑥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단 걸 의식하긴 어렵다. 무디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가. 매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며 살아간다면, 불안과 동요로 마음이 날뛸 테다. 일상에 치여 산다고들 표현하는데 되려 그 덕에 삶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 ‘산드라‘는 두 갈래의 경계를 오간다. 동시 번역 일을 하고,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등 해야 할 일로 꽉 찬 하루. 여기에 죽음과 맞닿은 존재를 돌보는 일도 포함된다. ‘벤슨 증후군’. 명칭마저 생소한 이 질병을 앓고 있는 그의 아버지. 신경 이상으로 시각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감각을 서서히 잃어간다. 열쇠구멍을 찾아 한참 헤맬 정도로.
철학 교수로 오랫동안 재임한 아버지는 시각과 기억을 잃어가는 변화에 적응 중이다. 사실 발병은 5년 전이라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거 같지만, 서서히 사라지는 기억과 시력은 언제고 익숙함과 거리가 멀다.
산드라가 사별한 남편도 얼추 비슷한 햇수인데, 그는 어떨까.
홀로 여덟 살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도 충분히 바쁜 하루다. 친절하게 아버지를 찾아뵈며 도움을 건네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난 순간부터는 제게 걸려오는 전화를 애써 무시한다. 마치 일터에서 퇴근한 사람처럼. 하지만 으레 엄마 역할이 그러하듯 끝이 아니다. 아이를 돌보고, 먹이고, 그렇게 살아가고.
와중에 아버지가 더는 요양인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하자, 비용과 시설이 적절한 요양원 찾는 일도 생겼다. 할 일 투성이인 산드라에게 다른 주제로 떠들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니, 친구 클레망이었다.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 클레망. 그런 클레망과 산드라는 가까워지고, 그 거리는 어느새 입을 맞닿을 정도에 다다른다. 한 번은 손쉽게 두 번, 세 번, 새로운 일상이 된다. 딸은 기묘한 변화를 금세 눈치채고 이러한 변화에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는다. 놀러 올 때마다 자신과 다정히 놀아주는 존재가 달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산드라는 괜한 기대감을 주지 않으려 클레망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가장 설레고 기대하는 사람은 그다. 이 사랑이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클레망이 현재 가정을 정리한 후 자신에게로 완전히 정착할 것이라고. 이곳과 저곳을 오가던 클레망은 단언한다. 다 끝내고 돌아오겠다고.
그 말을 믿으며 기다리던 산드라. 기다리는 와중에 아버지의 집안에 가득한 책 일부를 제자들에게 보내고, 원하는 요양원에 자리가 날 때까지 매번 아버지는 머무르는 거처가 바뀐다. 여전히 클레망은 소식이 없다. 서서히 직감한다. 아, 그가 날 떠났다.
아버지는 가끔 기억을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무엇을 하러 온 건지. 그러다 산드라도 잊어간다. 이혼한 전처를 잊어버렸듯.
숱한 이동과 변화의 반복. 영화는 이 모든 일을 아주 잔잔하게 풀어낸다. 극적인 음향이나 이미지도 없다. 그저 붉고 푸른색을 선연히 드러내고, 클로즈업으로 세밀한 표정을 보여주고, 구체적인 서술 없이 내레이션이나 오가는 짤막한 대화에 맥락을 넣는다.
그래서였다. 산드라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딘가 모르게 일상적으로 느껴졌던 건. 죽음도, 기억도, 변화도, 새로움도, 기대감과 눈물도,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아 보이던 일상에서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살다 보면 별난 이벤트도 생긴다. 다 끝난 것 같던 관계, 그러니까 클레망이 정말로 산드라에게 돌아와 머무는 것처럼. 이 새로운 가족이 얼마나 단단하게 형태를 유지할지 가늠할 순 없다. 하루하루가 그러하듯. 익숙한 모습을 띤 채로 조금씩 계속 무언가가 변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임을 영화의 ost가 말한다. 포옹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손을 뻗어 완성하는 것처럼.
모든 망각과 변화와 새로움 앞에서도,
Love will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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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움을 아는 것의 괴로움
다시 보고자 결심했던 영화들이 너무 많았던 차에 잔잔한 감정으로 볼 수 있는 영화를 보고 싶어 동주를 보게 되었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윤동주 시인에 대한 영화이며, 그의 사촌인 송몽규 열사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를 다시 보고 정말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독립운동에 대한 영화도, 일제의 악함에 대한 영화도 아닌 인간 동주와 몽규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후 스포일러)
출처: 넷플릭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윤동주 시인의 열등감과 부끄러움, 괴로움에 대해 비추고 있다. 친형제처럼 자란 동주와 몽규 두 사람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잘 쓴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달랐다. 시대의 흐름을 견딜 수 없어 본인이 직접 몸 밖으로 부딪혀야만 살아갈 수 있는 몽규와 달리 동주는 그러한 시대 속에서 시를 쓰며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현실에 대한 분노, 하지만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끝없이 자기 내면 속 전쟁을 치르는 사람이었다. 영화 속 꾸준히 자신을 '시집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시인이 아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부끄러운 자신 스스로에 대한 괴로움의 표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위인으로 역사에 남은 두 분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갓난아기 때부터 친구로 지내온 동갑 사촌이 있는 입장에서 이 영화 속 감정선은 정말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출처: 넷플릭스
동주보다 먼저 신춘문예에 등단하게 되고 항상 한 발 앞서 행동하는 몽규는 사실 친구보다는 형에 가까운 존재였던 것 같다. 송몽규라는 진취적인 행동가가 바로 옆에 있었기에 윤동주 시인은 끝없이 자기반성에 기반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서 동주는 몽규에게 딱 한번 똑바로 화를 내는데, "시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시인은 시대를 직접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문학 속에 숨는 사람들이다"라는 말로 함께 만든 문예지에서 시를 빼려는 몽규에게 동주는 "문학에는 인간 본연의 힘이 담겨 있으며 이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이념을 쟁취하기 위해 문학을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관습을 따르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작중에서 나왔듯 문학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던 몽규와 세상보다 문학을 더 사랑했던 동주의 말은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둘 다 맞는 말이라고 느껴졌다.
출처: 넷플릭스
영화의 중간중간 강하늘 배우의 육성으로 윤동주 시인의 시가 낭독되는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영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도 별로 없고 문학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윤동주 시인의 대표 정서는 부끄러움이라고 외우고만 있던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뜻의 해석으로만 시를 대해봤던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시의 한 문장 문장 속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내 감정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어 신기했다. 비록 영화 속에서 느낀 감정이지만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출처: 넷플릭스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 벅차올랐던 장면은 몽규와 동주가 심문을 받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영화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같은 상대 배우와 찍은 두 사람의 컷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고 있다. 몽규는 자신이 진정으로 일본에 대항해 이루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서명을 하게 되고, 동주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부끄러운 것이 너무 많아 서명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서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종의 저항으로 보았을 때, 저항시인으로서의 윤동주 시인의 가치관 자체를 보여주는 장면임과 동시에 영화를 통해 그의 삶을 약간 훔쳐본 관객들에게는 오만 감정이 다 들게 하는 최고의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출처: 넷플릭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존재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은 부끄럽게 살 수밖에 없다. 작중 정지용 시인의 말처럼 부끄러운 것을 안다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정말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영화의 내용을 내 작은 삶으로 끌어내려 생각해보면 나는 내 가치관을 관철한다는 핑계로 자기 합리화를 하고 회피하며 살아온 것일까, 아니면 현실을 보았음에도 나만의 삶을 살 각오를 다져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혹은 그 중간 어딘가에 떠서 이도 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어디인지, 시대의 흐름은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내가 부끄러운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중심에 세웠던 두 분의 이야기를 영화로 보며 부끄럽지 않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러운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낀다.
출처: 넷플릭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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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황스럽지만 결국 빨려들게 되는 그들의 우주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Doctor Strange in the Multiverse of Madness , 2022)
“당황스럽지만 결국 빨려들게 되는 그들의 우주”
등급 : 12세 관람가
장르 : 액션, 판타지, 모험
러닝타임 : 126분
감독 : 샘 레이미
출연 : 베네딕트 컴버배치, 엘리자베스 올슨, 베네딕트 웡, 레이첼 맥아담스, 치웨텔 에지오프, 소치틀 고메즈
개인적인 평점 : 3.5/5
쿠키 영상 : 2개 (엔딩 크레딧 중간에 1개, 엔딩크레딧 후 1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줄거리
끝없이 균열되는 차원과 뒤엉킨 시공간의 멀티버스가 열리며 오랜 동료들, 그리고 차원을 넘어 들어온 새로운 존재들을 맞닥뜨리게 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 속, 그는 예상치 못한 극한의 적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데….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타임라인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뉴욕에 남아있던 스티븐(닥터 스트레인지)은 전 연인 크리스틴의 결혼식에 참여하게 된다. 스티븐은 아직 크리스틴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남아있지만 크리스틴의 “행복하지?”라는 질문에 애써 괜찮은척, 행복한 척을 해 보인다. 그가 아주 지독한 후회를 느끼고 있는 찰나, 포탈이 열리며 괴물과 함께 멀티버스의 키를 쥐고 있는 소녀, ‘아메리카 차베즈’가 등장한다. 차베즈와 대화를 나눠본 결과, 여러 우주가 위험에 빠져있다는 걸 알게 된 닥터 스트레인지는 어벤져스 중 가장 유능한 마법사였던 완다에게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구하기 위해 여러 우주를 떠돌게 된다.
작년 12월 멀티버스의 시작을 알렸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개봉 이후 5달 만에 <닥터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개봉했다. 제목부터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멀티버스를 팔 거야!”라고 선언한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혼란스러운 멀티버스 이야기였다. 영화를 보며 이 캐릭터들을 더 사랑하게 됐고, 2시간 동안 아주 즐겁게 즐겼다. 영화 안에 이것저것 차려진 메뉴가 참 많아 음미하기에 바빴다. 근데 정리가 덜된 밥상을 마음껏 즐기려다 보니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닥터 스트레인지다운 눈호강
2016년 <닥터 스트레인지>가 개봉했을 때, 새로운 유형의 히어로 닥터 스트레인지에 크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지금껏 보지 못한 신선한 스티븐의 능력과 서사, 베네딕트 컴버배치 배우가 뿜어내는 매력.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영화가 보여준 웅장한 시각적 효과, 흔히 말하는 눈뽕! 그 눈뽕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개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실 ‘멀티버스’라는 키워드보다는 스티븐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 이번엔 어떤 공간들을 보여줄지가 가장 기대됐다. <노 웨이 홈>에서도 스티븐이 만들어낸 공간을 볼 수 있었지만 다소 어색한 CG에 실망했던지라.. 그래도, 이번엔 닥터 스트레인지의 2번째 솔로 영화인데! 괜찮겠지!! 하며 희망 회로를 불타게 돌렸다. 그리고 희망 회로를 불태운 만큼 이 영화는 내가 만족할만한 퀄리티의 시각효과를 보여주었다. 첫 관람은 꼭 왕왕 큰 용아맥에서!!를 외친 보람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캐릭터의 색을 잘 살린 디자인과 다양한 우주의 모습, 반사의 활용, 영화의 메인 컬러 빨간색을 잘 활용해 시각적인 공포를 높인 부분, 역동적임과 동시에 긴장감을 높여주는 화면 연출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지금껏 본적 없는 어둡고 잔인한 마블 영화
마블 영화라고 하면 보통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이 봐도 괜찮은 영화, 슈퍼히어로 영화. 많은 관객들이 생각하는 마블의 이미지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좀 다르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배우들이 ‘새로운 마블 영화’,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라고 여러 번 언급하기도 했고, 예고편을 봐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 있듯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매우 어두운 톤을 갖고 있는 영화다.
분위기가 전보다 진중해지기도 했고, 어둡고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꽤 많다. B급 공포 영화의 명인으로 불리는 ‘샘 레이미’ 감독 특유의 역동적인 화면과 ‘마블 영화’라는 틀을 깨며 가감 없이 집어넣은 점프 스퀘어, 다소 잔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상처와 액션 신들, 좀비물처럼 느껴지는 요소들도 꽤 많기에 ‘아이들과 함께 보는 마블 영화’라는 이미지는 잠깐 접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마블 영화’라는 거대한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색을 지켜낸 샘 레이미 감독의 능력에 감탄했다. 모 영화 같은 경우엔 마블 영화지만 너무 자신의 색을 지키는 바람에 말아먹은 경우도 있었는데…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정체성을 어느 정도 지키며 감독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닥터 스트레인지, 마블 영화로 이런 걸 한다고?
영화 개봉 전 공개된 홍보 영상 속, 샘 레이미 감독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이 영화 정말 멋있다!’고 느꼈으면 한다”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아 이 영화 정말 멋있다!’ 150번도 더 말해 드릴 수 있다.
영화의 개봉일이 어린이날 전날이어서 그런지 ‘어린이날을 노리고 개봉한 마블 영화’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예고편을 안 보고 그 어린이날 연휴 개봉이 주는 느낌에 속은(?) 관객들이 꽤 많은 듯 보인다. 추가로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를 생각하고 간다면 꽤 놀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블이라고 이런 걸 안 하고 못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건 언제나 환영이다.
인간적인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이전에 개봉했던 <블랙 위도우>와 <노 웨이 홈>처럼 꽤나 인간적인 영화였다. 개인적으론 <엔드게임> 이후로 마블이 1대 히어로들의 상처를 하나둘 내놓고, 그것을 회복시키며 이들의 은퇴 수순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블랙 위도우>, <노 웨이 홈>, <호크아이>, 그리고 최근 예고편을 공개한 <토르: 러브 앤 썬더>와 이 영화까지. 커다란 전투를 마친 히어로들의 내면에 남은 아픔과 미련을 툭 까놓으며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안정감을 쥐어주고 있는 느낌이다.
아무리 강인한 히어로여도 이들도 사람이기에 상처를 받고, 사랑을 하고, 아파하기도 한다. 스티븐의 경우는 능력을 얻고 칼자루를 쥐게 된 이후 연인 크리스틴과 헤어지게 됐고, 완다는 원치 않는 능력을 얻은 후 전투를 치르다 오빠 퀵실버와 연인 비전을 잃는다. 어디에도 풀어놓을 수 없었던 이들의 슬픔과 분노는 멀티버스의 문을 열게 되고, 스티븐과 완다는 멀티버스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깨우침을 얻는다.
사랑하는 모든 걸 잃은 완다, 어벤져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을 때 언제나 이성적으로 결정을 해야 했던 스티븐. 큰 힘을 가졌기에 많은걸 희생한, 아픈 손가락이었던 두 사람이 한 영화에 나와 세상과 자신을 구해가는 과정이 개인적으론 다소 안쓰럽고 슬프기도 했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멀티버스를 꿰뚫는 단 하나의 키워드 ‘사랑’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스티븐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이별했고, 완다는 사랑을 지키지 못해 결국 악에 현혹된다. 얻지 못한 사랑을 마무리 짓기 위해 시작된 멀티버스 이야기는 돌고 돌다 결국 제자리를 찾는다. 스티븐은 깨진 시계의 알판을 고치며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던 완다는 아이들을 통해 자신의 죄를 알게 되고 또 다른 완다를 통해 위로를 받고 스스로를 희생하며 상황을 정리한다.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도 하고, 아프게도 하고, 지켜주기도 하고, 위로해주기도 한다. 각자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인물들은 조금씩 다른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들을 한 번에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랑’이다. <노 웨이 홈>에서 앤드류의 피터 파커가 그러했듯 스티븐 또한 또 다른 우주를 통해 사랑으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위로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닥터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아쉬웠던 점
영화 자체는 정말 재밌었고, 타고난 과몰입러로서 온갖 감정을 다 동원하며 감상했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았다. 개인적으론 완다를 100%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있었고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 차베즈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며 다른 우주에 깜짝 등장한 캐릭터들이 그저 ‘작은 보너스’ 같은 느낌으로 반짝 빛났다 사라지는 것이 정말 아쉬웠다.
<완다 비전>을 본 관객이라면 완다가 왜 다크홀드에 손을 댔는지, 왜 드림 워킹을 하게됐는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겠지만, <완다 비전>을 보지 않고 영화 속 완다의 설명만 들은 관객이라면 그가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급발진을 한 빌런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완다의 마지막이 상당히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멀티버스 속 완다와 협력을 하는 스토리가 나오지 않는 이상, 사실상 완다는 은퇴 수순을 밟게 될 텐데 이 캐릭터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한 게 못내 아쉬웠다. 매번 아픈 모습만 보였던 캐릭터인데 해방의 절차도 이렇게 어렵고 가슴 아프게 만들어버리다니… 속상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멀티버스의 문을 여는 새로운 능력자 차베즈는 배우의 매력, 서사와는 별개로 별다른 반짝임이 느껴지지 않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이제 첫 등장이기도 하고, 멀티버스가 확장되며 차후에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갈수도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깜짝 등장한 캐릭터들은, 긴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영화에 프로페서가?!’하고 놀랐지만 별다른 의미 없이 지나쳐갔을 뿐… 아, ‘너를 믿는다’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하나 남기긴 했다…
최근 마블 영화를 보며 느낀 아쉬움들
마블이라는 프랜차이즈는 가히 독보적이고 거대하다. 마블 이전에도 마블 이후에도 여러 히어로 영화들이 제작되었지만 마블의 히어로들과 이들의 세계관을 이길 프랜차이즈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나 DC 히어로 같은 크고 훌륭한 다른 히어로 프랜차이즈도 존재하지만 대중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히어로 영화’를 만들어온 곳은 마블이 아닌가. 마블은 마블만의 영화를 만들어냈고 그로 인해 관객들의 취향, 극장가의 풍경이 함께 바뀌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런 히어로 영화를 유치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이들의 거대한 자본력과 제작 형태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마블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하거나 무조건적인 흥행 공식을 따르고 있는 건 팩트니까). 전세계적인 팬덤을 이끌고 있는 프랜차이즈인 만큼 마블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말 다양하다. 실제로 2019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마블은 시네마가 아닌 테마파크에 가깝다.”는 한 마디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국내 팬들이 바라보는 마블의 이미지 또한 가지각색이다.
이번에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고 퇴장로에서 들은 이야기와 개봉 전, 후 SNS의 반응을 보면… 최근 마블의 이미지가 꽤 하락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장 눈에 띄는 불만들은 크게 <엔드게임> 이후 은퇴한 캐릭터들에 대한 아쉬움 / 예, 복습에 대한 부담 / 개연성의 실종, 캐릭터들의 매력 부재 등이 있다. <엔드게임> 이후 1세대 히어로들의 은퇴는 당연한 수순이었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치고 다른 아쉬움들을 짧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마블이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프랜차이즈이다 보니 새로운 히어로가 등장한다 해도 이전의 캐릭터나 세계관을 알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는 상태에서 디즈니 플러스가 런칭되었고, 그 부담은 배로 늘어났다. 이번 영화만 해도 꼭 <완다 비전>을 봐야한다, <로키>, <왓이프>도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디즈니 플러스 역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기 전, 디즈니 플러스에서 <완다 비전>을 만나보라며 광고를 하기도 했다.
다른 시리즈를 모르면 새로운 영화도 온전히 즐길 수 없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를 공부하고 가야 하다니. 상당히 부담스럽고 피곤한 상황이다. 물론 실제로 ‘이걸 안 보면 이해 못 함!’ 정도의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어느 정도 설명을 해주긴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다음에도 디즈니 플러스 예, 복습에 신경 써야 할지… 걱정되기도 한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재밌게 즐길 순 있지만 ‘알고 가야 더 보이는 영화’라고 한다면, 결국 이전 것들을 보지 않으면 100% 즐길 수 없다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러다 정말 ‘고인물들만 볼 수 있는 영화’가 되는 건 아닐까?
오래된 프랜차이즈 영화를 보며 느낄 수 있는 그만의 특별한 감동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커다란 세계관 안에서 뛰노는 것도 정말 즐거운 일이란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 사이의 구분은 지어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계속 이렇게 장벽을 높여간다면 자칭 덕후가 아닌 사람은 더 이상의 접근을 피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그리고 최근 들어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은 개연성의 실종이다. 활활 타오르는 덕심을 잠깐 내려놓고 말하자면, 영화는 분명 재미는 있는데… 가끔 개연성을 잃는다. 지금은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왜 이건 이유를 말 안 해주지?”라는 질문이 떠올라도 배우들을 보며 어느 정도 흐린 눈을 하고 있지만 이 흐린 눈 필터를 언제까지 장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쉬워도 다시 티켓을 끊게 되는 테마파크
전체적으로 아쉬운 부분들도 있고, 어떤 영화는 나를 크게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분간 이 환상적인 테마파크 안에 머물 것 같다. 적어도 오래 함께해온 1세대 히어로들이 남아있는 한은 말이다. 이만큼 나를 즐겁고 슬프고 설레게 하는 프랜차이즈가, 이렇게 성공한 테마 파크가 또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 아쉽고 저래서 아쉽다고 말하면서도 토르가 개봉하면 당장 달려갈 내 모습이 벌써 눈에 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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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느리게 봐야만 보이는 것들
#산돌구름 #엔드게임 #이스터에그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영상 타임라인*
00:00 인트로
00:50 누구보다 빠른 앤트맨
01:20 마지막으로 머리를!!
01:40 묠니르 잡는 캡틴, 방패 잡는 캡틴
02:40 전투 속 디테일들
03:23 똑똑하지 못했던 헐크, 똑똑해진 헐크
04:16 토르 눈은 인공 눈, 감마선이 70년대?
04:55 아웃트로2020. 11. 11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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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히든페이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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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부산행》 연상호 기획/각본 피할 수 없는 악연 피를 부르는 욕망 모든 진실이 가리키는 곳 《선산》 1월 19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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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월 8월 6일, 넷플릭스 공개]
난 가야 한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노래해야 한다.
음악을 사랑하는 킨카주.
비보는 아바나에서 마이애미까지 일생일대의 모험을 떠난다.
오랜 친구가 남긴 사랑의 노래를 전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