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신고

댓글 신고

수건2023-02-02 13:09:32

부끄러움을 아는 것의 괴로움

[영화] 동주 스포일러 리뷰

다시 보고자 결심했던 영화들이 너무 많았던 차에 잔잔한 감정으로 볼 수 있는 영화를 보고 싶어 동주를 보게 되었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윤동주 시인에 대한 영화이며, 그의 사촌인 송몽규 열사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를 다시 보고 정말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독립운동에 대한 영화도, 일제의 악함에 대한 영화도 아닌 인간 동주와 몽규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후 스포일러)

 

출처: 넷플릭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윤동주 시인의 열등감과 부끄러움, 괴로움에 대해 비추고 있다. 친형제처럼 자란 동주와 몽규 두 사람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잘 쓴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달랐다. 시대의 흐름을 견딜 수 없어 본인이 직접 몸 밖으로 부딪혀야만 살아갈 수 있는 몽규와 달리 동주는 그러한 시대 속에서 시를 쓰며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현실에 대한 분노, 하지만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끝없이 자기 내면 속 전쟁을 치르는 사람이었다. 영화 속 꾸준히 자신을 '시집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시인이 아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부끄러운 자신 스스로에 대한 괴로움의 표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위인으로 역사에 남은 두 분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갓난아기 때부터 친구로 지내온 동갑 사촌이 있는 입장에서 이 영화 속 감정선은 정말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출처: 넷플릭스

 

동주보다 먼저 신춘문예에 등단하게 되고 항상 한 발 앞서 행동하는 몽규는 사실 친구보다는 형에 가까운 존재였던 것 같다. 송몽규라는 진취적인 행동가가 바로 옆에 있었기에 윤동주 시인은 끝없이 자기반성에 기반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서 동주는 몽규에게 딱 한번 똑바로 화를 내는데, "시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시인은 시대를 직접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문학 속에 숨는 사람들이다"라는 말로 함께 만든 문예지에서 시를 빼려는 몽규에게 동주는 "문학에는 인간 본연의 힘이 담겨 있으며 이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이념을 쟁취하기 위해 문학을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관습을 따르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작중에서 나왔듯 문학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던 몽규와 세상보다 문학을 더 사랑했던 동주의 말은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둘 다 맞는 말이라고 느껴졌다.

 

출처: 넷플릭스

 

영화의 중간중간 강하늘 배우의 육성으로 윤동주 시인의 시가 낭독되는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영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를 제대로 읽어본 적도 별로 없고 문학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윤동주 시인의 대표 정서는 부끄러움이라고 외우고만 있던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뜻의 해석으로만 시를 대해봤던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시의 한 문장 문장 속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내 감정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어 신기했다. 비록 영화 속에서 느낀 감정이지만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출처: 넷플릭스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 벅차올랐던 장면은 몽규와 동주가 심문을 받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영화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같은 상대 배우와 찍은 두 사람의 컷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고 있다. 몽규는 자신이 진정으로 일본에 대항해 이루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서명을 하게 되고, 동주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부끄러운 것이 너무 많아 서명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서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종의 저항으로 보았을 때, 저항시인으로서의 윤동주 시인의 가치관 자체를 보여주는 장면임과 동시에 영화를 통해 그의 삶을 약간 훔쳐본 관객들에게는 오만 감정이 다 들게 하는 최고의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출처: 넷플릭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존재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은 부끄럽게 살 수밖에 없다. 작중 정지용 시인의 말처럼 부끄러운 것을 안다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정말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영화의 내용을 내 작은 삶으로 끌어내려 생각해보면 나는 내 가치관을 관철한다는 핑계로 자기 합리화를 하고 회피하며 살아온 것일까, 아니면 현실을 보았음에도 나만의 삶을 살 각오를 다져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혹은 그 중간 어딘가에 떠서 이도 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어디인지, 시대의 흐름은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내가 부끄러운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중심에 세웠던 두 분의 이야기를 영화로 보며 부끄럽지 않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러운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낀다.

 

출처: 넷플릭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작성자 . 수건

출처 .

  • 1
  • 200
  • 13.1K
  • 123
  • 10M
Comments

Relative contents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