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2-24 08:22:07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 설계도
영화 〈브루탈리스트〉

전쟁 중인 유럽을 탈출해 미국에 도착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가 한 성매매 업소에서 남성 성노동자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난 그런 쪽 아니야’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장면은 그가 훗날 마주할 해리슨의 끔찍한 성폭력을 예감하는 것이 아닐까. ‘이쪽’과 ‘저쪽’의 구획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선언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해리슨에게 강제로 자리를 부여받는 라즐로가 느낄 비감이 도입부의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느꼈다.
재능 있는 유대인 건축가가 이주 후 미국 하층부를 전전하다 한 거부의 눈에 들어 대형 프로젝트를 맡은 후 종내에는 영광을 얻는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우리가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본 이방인의 성공 스토리와는 결이 다르다. 노인이 되어 휠체어에 탄 채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전시에 참석한 그의 얼굴은 피로해 보인다. 라즐로 부부를 떠나 이스라엘로 향한 조카 조미아가 정작 라즐로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삼촌의 업적을 설명하는 대목은 그의 피로감에 공허함을 더한다.
‘성공한 유대인’이 있는 것은 맞다. 그들의 성취는 종종 아메리칸드림의 증거로 전시된다. 그러나 그 성공은 아름답지 않았다. 지적 허영과 과시욕, 속물적 근성의 화신, 즉 가장 미국적인 인물인 해리슨은 라즐로를 자신의 자랑스러운 수집품 정도로 대우하고, 라즐로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술 취한 그를 강간한다. 그는 라즐로에게 “넌 그저 밤거리 매춘부야”라고 말한다. ‘선’을 넘지 말라는 선언이다. 라즐로 프로젝트의 철학과 예산이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자 미국 사회의 주인은 돈이며, 그 돈을 가진 사람은 나라는 점, 즉 자신은 성 구매자이며 너는 성 판매자라는 점을 라즐로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방법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라즐로는 그 충격에 휩싸여 더욱 자신의 예술적 목표(혹은 해리슨의 야망)인 건축물에만 집착하고 자신이 쌓아 올린 건축물에 유폐된 듯 영혼을 강탈당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라즐로는 걸작을 창안했으나 영혼을 상실했고, 미국식 속물주의를 대변하는 해리슨은 사건이 폭로된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며, 늙고 지친 라즐로를 기념하는 행사에서는 과거 그를 떠난 조카가 확신에 찬 얼굴로 숙부의 업적을 칭송한다.
이 영화가 아메리칸드림의 오욕에 관한 문제 제기라는 인상을 받은 건 그래서다. 이 세 사람이 이루는 구도에서는 누구도 온전한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일 수 없다.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으로 예술에 대한 심미안 없이 뭐든 돈으로만 하려는 해리슨도, ‘걸작’을 만들었으나 생기를 잃어버린 라즐로도, 홀연히 등장해 숙부의 성취‘만’ 이야기하며 뒤늦게 자신이 라즐로의 혈육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조미아도.
영화가 한창 건축이 진행 중일 때 고통받던 라즐로를 비추다가 갑자기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노쇠한 라즐로의 얼굴로 점프하는 것은 아메리칸드림에 영광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설계의 일환일 것이다. 사람들은 완성된 건축물만 본다. 그 이면의 설계도를 상상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로 ‘라즐로의 아메리칸드림’에서 완성물이라 할 그의 건축물과 그로부터 피어나는 영광의 순간들을 뺀 채 그 영광의 설계도만 보여준다. 누군가의 장식품으로서만 예술가일 수 있었던 이방인, 그런 이방인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구축되지 않았을 미국이라는 허상, 설계 과정의 문제는 덮고 결과물만 바라보며 찬사를 보내는 사회가 이방인의 아메리칸드림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brutal) 설계도 말이다. 라즐로가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추구하는 브루탈리스트였다는 점은 이 설계도가 품은 역설을 더한층 도드라지게 한다. ‘사람은 죽어도 예술은 남는다’는 통념 혹은 진실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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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1986)> 리뷰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2023)>가 개봉했다. 개봉일에 곧바로 달려가진 못했으나 개봉 첫 주 안에 달려가 영화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쩐지 이전 작품을 보고 싶어졌다. 여전히 지브리의 작품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번 작품 역시 만족스러웠는데 말이다. 아마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2023)>내에 지브리의 타 작품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많아 내 안의 어떠한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리라. 그중에서 이번 11월, 내가 돌아간 작품은 <천공의 성 라퓨타(1986)>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정말이지 멋쩍을 만큼 없다. 그저 내가 주기적으로 열어볼 만도 한데, 자주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틀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바라보는 '비행'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지만 하늘을 난다는 건 오랜 역사 내내 인류의 꿈이었고 낭만이었다. 마치 그곳엔 지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꿈이라도 있을 것만 같다는 환상을 품으며 천사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상상 속 신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렇기에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푸른 하늘을 떠도는 천공의 섬이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건 퍽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극장에 걸리는 그들의 만화는 그야말로 가공된 상상 그 자체이지 않은가. 그런데 떠올려보면, 이 애니메이션, 굉장히 이상하다. 하늘을 떠도는 섬을 제목으로 삼았음에도 이 애니메이션은 끝없는 상승을 거부한다. 대뜸 주인공의 추락으로 이야기를 열더니만, '비행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돌은 소녀와 소년을 안전히 착륙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대지의 가장 깊숙한 구석에서 수런대는 돌을 가공한 결과물이라는 게 밝혀진다. 심지어 천공의 성 라퓨타의 부활을 열망하는 이는 빌런으로 설정된 무스카밖에 없다.
등장인물들이 이미 오래전 멸망하여 전설에 가까워진 왕국으로 향하기야 한다만 관심사는 각자 다르다. 주인공인 파즈가 라퓨타에 관심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는 불명예스러웠던 아버지의 최후 때문이니 그가 실질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버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해적 도라 역시 라퓨타에 관심을 갖고 있으나 그는 '해적'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라퓨타에 숨겨져 있을 고대의 보석에 관심이 있는 것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라퓨타를 인도할 수 있는, 적법한 후계자인 주인공 시타는 어떤가? 그는 이름과 비행석, 약간의 마법을 알고 있으나 그게 전부이다. 아이는 희미해진 고대의 지식에 목매지 않으며, 조상이 가졌을 절대권력에도 무관심하다. 허황된 상상을 할 법도 한데 시타는 자연에 가까운 소박한 삶을 추구할 뿐이다. 그가 라퓨타를 향한 여정에 동참하게 된 건 순전히 무스카가 그를 납치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고작 그 정도 이유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라퓨타가 하나의 맥거핀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등장인물들이 끝없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 역시 사실이다. 비행선을 타야 하기에, 추락했기에 자신의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서, 감방을 탈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라퓨타를 찾아야 하기에. 실로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이유들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브리 스튜디오가 정말 전하고 싶어 하는 건 땅 -평범함의 가치-이다. 라퓨타의 공주인 시타는 자신의 마을 곤도아를, 야크를 키우며 보냈던 평범한 나날을 그리워하며 무스카에게 땅을 떠나 살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광부 마을 출신 소년 파즈는 시타를 순수한 마음으로 돕는 주요 조력자이며, 그가 살던 곳의 마을 사람들은 쫓기는 둘을 군말 없이 도우며 끈끈한 애정과 선의를 과시한다. 더군다나 라퓨타 성이 지나갈 때면, 지하의 비행석은 감응하며 수군댔다. 도라 해적단은 '해적'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따뜻했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시타와 파즈에겐 그들과의 모험조차 순간의 접점일 뿐이다.
어쩌면 간단히 이런 도식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비행과 하늘이 꿈이라면 땅은 현실이라고. 그렇기에 애니메이션 속 소녀는 떨어지고 땅에 도착한 후, 파즈와 관객을 자신의 불안정한 세상으로 초대하며, 우리를 몰입하게 만들고, 라퓨타에서 미련 없이 대지를 위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지브리의 다른 애니메이션처럼 라퓨타가 전하는 다정은 이런 곳에 있는 듯하다; 영영 인간이 찾을 수 없도록 라퓨타를 행성 밖으로 보내며 자유를 선사하고선 소녀와 소년을 땅으로 돌아오게끔 안전히 바래다주는 것. 심장 뛰는 거대한 모험 한 두 개가 아니라 자그마한 일상의 연속만으로 너, 나, 우리는 충분하다는 메시지. 배제 없이 따뜻해지는 순간과, 그리고 라퓨타를 띄운 게 비행석이었던 것처럼 꿈의 뿌리는 언제나 지하에 닿는다는 사실.
80년대 작품이라 한들, 꿈을 선물하는 애니메이션의 다정함과 순수함은 유통기간이 없는 게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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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씨왕후 | 특별하고 각별하고 유별난 사극의 등장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나라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고구려의 위신을 높인 '고국천왕'(지창욱). 하지만 전투 중 부상을 입은 그는 궁에 돌아와 치료를 받던 중 갑작스레 사망한다. 왕의 독살을 의심한 '우씨왕후'(전종서)는 국상 '을파소'(김무열)와의 상의 끝에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기로 결정하고, 궁 밖으로 나선다. 왕의 동생과 혼인하여 왕을 독살한 이들로부터 자기 자신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왕의 넷째 동생 '고연우'(강영석)의 영지로 향하는 그녀의 여정은 순탄치 않다. 왕좌와 왕비족의 지위를 노리는 다섯 부족의 귀족 가문은 물론, 그녀의 언니이자 태시녀인 '우순'(정유미)마저 그녀를 노리기 때문. 이에 더해 왕의 셋째 동생 '고발기'(이수혁)마저 형의 자리를 탐내며 우씨왕후를 위협해 온다.
<우씨왕후>가 만족스러운 이유
TVING 오리지널 드라마 <우씨왕후>를 향한 기대는 컸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배경이 신선했다. 한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시대는 단연코 여말선초다. 그 외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숙종부터 정조까지의 시기 정도가 자주 등장한다.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가운데, 고구려 초기의 사건을 다룬 드라마라 하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도 눈길을 끌었다. 왕후 우씨는 한국사에 흔적을 남긴 몇 안 되는 여성 중에서도 독특한 인물이다. 어찌 보면 성골이라서 왕이 된 선덕여왕, 진덕여왕보다도 주체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남편인 고국천왕이 죽자, 자기 의지대로 상산왕과 혼인해 그를 왕좌에 올려 왕후 자리를 유지했다. 반란과 내전도 이겨냈고, 상산왕의 후계를 결정하는 데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했다. 이제야 영상화된 게 의아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공개된 결과물은 위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삼은 사극으로서는 각별하고,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사극으로서는 특별하며, 더 나아가 한 편의 사극으로서도 유별나기 때문. 특히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험과 도전을 꺼리던 한국 사극에 여러 충격파를 던져주기에 <우씨왕후>는 더욱 만족스럽다.
사극 속 고구려
한국 사극 속 고구려 묘사는 언제나 비슷했다. 고구려라는 나라가 지닌 대중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과 나라의 명운을 두고 펼친 수 차례의 전면전도 거뜬히 이겨낸 한민족의 강국. 일제강점기, 분단, 전쟁을 겪으며 생겨난 민족적 콤플렉스를 치유하는 수단으로써, 민족주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써 고구려만 한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구려 사극이 인기를 끌었던 시기도 2000년대 중후반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태왕사신기>, <바람의 나라> 같은 작품이 우후죽순 제작됐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만 다를 뿐, 중국이라는 거대 제국에 맞서 민족의 기상을 드높이는 천편일률적 전개가 되풀이는 됐다. 10여 년 후에 개봉한 영화 <안시성>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이어졌다.
고구려의 실체에 근접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씨왕후>는 특별하다. 민족주의 관점이 없지는 않다. 고국천왕이 한나라와 펼치는 전쟁 시퀀스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한나라와 손 잡은 셋째 왕자 고발기에 맞서는 우씨왕후와 을파소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전개도 두드러진다. 그러나 드라마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내부의 정쟁이다. 대중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고구려 초기의 역사를 구체화하려는 노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우씨왕후>는 사료 너머에 숨은 실체적 진실을 불러내려 애쓴 티가 역력하다. 각본 곳곳에서 여러 가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본래 해씨와 고씨가 왕위를 나눠 가졌으나 태조왕부터 고씨가 왕좌를 차지했다는 내용의 '해씨 고구려 설'을 차용해 건국 초기 고구려 내부 사정을 현실감 있게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왕께서 하늘로 돌아가셨다"와 같은 대사를 통해 고구려만의 세계관과 종교관을 생생히 보여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우 씨, 어 씨, 좌 씨, 명림 씨 등 고구려의 여러 귀족 가문의 세력 구도를 그려냈다. 을파소처럼 생애의 일부만 알려진 인물의 과거사를 당대 시대상에 맞게 채워 넣은 상상력도 인상적이다. 다만 과욕이 넘친 대목도 여럿 있다. 고국천왕의 형제가 5명이 아닌 4명이라는 통설을 부정하거나, 고국천왕 시절에도 졸본이 독자 세력으로 남아 고구려의 멸망을 기도한다는 설정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대중적으로 인식된 이미지를 깨고, 고구려가 부족연합체에서 고대 왕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의미가 크다. 그 자체로 한국 사극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확장하는 도전이기 때문이다. 설령 실제 역사와는 상이한 모습일지 몰라도, 상상력을 살려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려고 한 <우씨왕후>의 결과물에 박수가 필요한 이유다.
드디어 일보전진한 여성 서사
여성 서사로서도 <우씨왕후>의 성과는 남다르다. 솔직히 말하자. 한국 사극의 여성 활용법은 <선덕여왕>(2009) 이후로 크게 달라진 바 없다. 여성 주인공의 주체성을 억지로 강조하려는 시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하 사극을 표방한 <고려거란전쟁>만 해도 왕후들을 그저 질투에 눈이 먼 일차원적 캐릭터나 판에 박힌 교과서적 캐릭터로 묘사하면서 '고려궐안전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 속 여성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도 많지 않았다. 일례로 <육룡이 나르샤>의 경우 이방원의 아내로서 남편을 왕위에 올리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원경왕후를 단순한 조연으로 삼았다. 대신 가상 인물인 '분이'에게 활약상을 몰아줬다가 역사 왜곡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씨왕후>는 분명 진일보한 작품이다.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여성 정치인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특히 Part 2의 전개가 인상적이다. Part 1까지만 해도 가문의 생존을 위해 아버지와 을파소에게 떠밀리는 듯 보였던 우씨왕후가 알고 보니 본인 의지대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 <선덕여왕>의 미실과 덕만 이후로 보기 드물었던 묘사이기에 더욱 가치가 크다.
다만 <우씨왕후>의 여성 서사에서는 약간의 불협화음이 들린다. 극 중 우씨왕후는 정치인이다. 그녀에게 여성이라는 사실은 취수혼처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활용하할 수 있는 무기 중 하나다. 평범한 여인으로서 그저 고국천왕을 사모한 우순과의 갈등을 보면 그녀의 정치적인 면모가 더욱 부각된다. 그런데 드라마 말미에 우씨왕후는 돌연 여성으로서의 한을 토로하며 자기 욕망을 드러낸다. 그 결과 결말은 이전까지의 분위기와도 조화를 못 이루고,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느껴지면서 위화감을 자아낸다.
사극의 다양성과 잠재력
마지막으로 <우씨왕후>는 사극으로서도 색다른 작품이다. 일단 장르적으로 신선한 시도가 돋보인다. 24시간이라는 한계를 두면서 추격전의 박진감과 긴장감을 극대화한 선택은 영리했다. 또 추격전을 가급적 다양한 그림으로 구성하려는 아이디어도 돋보인다. 숲과 평야를 오가는 추격전, 산속에서의 전투, 산사태를 이용하는 지략과 강변에서의 전투 등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우씨왕후의 여정을 다채롭게 꾸며냈다.
전쟁 시퀀스도 인상적이다. 한국 사극에게 전쟁 시퀀스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영화와 달리 드라마 속 전투 장면은 실망의 연속이었으니까. <고려거란전쟁>처럼 아예 전쟁이 배경인데도 그럴싸한 전투 시퀀스를 보여주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우씨왕후>는 다르다. 고국천왕의 전쟁 시퀀스, 우씨왕후와 고발기의 군대가 대치하는 장면의 스케일, 묘사의 완성도, CG의 완성도를 보면 본격적인 내전을 다룰 시즌 2를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플랫폼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한 지점도 인상적이다. OTT에서 19세 관람가로 제작, 공개한 사극이다 보니 기존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사의 사극보다도 더 자극적인 묘사가 가능했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잔혹한 묘사로써 전쟁이나 액션을 더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었고, 우씨왕후가 넷째 왕자를 고연우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에도 설득력을 더할 수 있었기 때문.
물론 전개와 무관하게 선정적인 장면으로 인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국천왕의 부상을 치료하는 장면은 아무런 맥락이 없어서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 외의 장면은 비판보다는 호불호의 영역처럼 보인다. 우순과 고발기의 동기와 욕망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 분명한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우씨왕후>는 애초에 <스파르타쿠스>, <왕좌의 게임> 같은 해외 드라마처럼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창작물이기도 하다.
사실 <우씨왕후>는 몇몇 기술적인 문제를 노출한다. 야간 장면이 많다 보니 잘 보이지 않는 구간도 있고, 배경 음악의 활용이 적절한지도 의문이며, 주연을 비롯한 몇몇 배우의 경우 사극 연기나 발성이 익숙하지 않은 티를 숨기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점은 눈감아 줄 만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우씨왕후>의 결과물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시대상과 인물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애쓴 노력이 가득 느껴지기 때문. 공개 전까지는 의상 및 소품과 관련해, 공개 후에는 선정성과 관련해 논란이 있었던 것도 달리 말하면 그만큼 새로운 시도였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우씨왕후>는 8부작이라서 아쉽고, <우씨왕후>의 다음 시즌을 기대할 이유도 충분해 보인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찰이나 소재의 다양성처럼 '사극'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 작품이 늘어나는 가운데, <우씨왕후>는 한국 사극계에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작품 같기 때문이다.
Acceptable 무난함
디테일의 문제는 눈감아줄 수 있을 정도로 별난 사극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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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GA 선정 21세기 최고의 각본
Writers Guild of America (미국작가조합)에서는 1949년부터 우수한 영화나 텔레비전, 라디오 등의
각본가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는데요.
미국작가조합상의 영화 부문 각본상과 각색상은 아카데미상쪽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 아카데미상 수상 예측에 활용되기도 합니다.
WGA에서 선정한 최고의 각본101편중 top 25 영화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19편 봤네요. 여러분들은 몇편을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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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렇게 미쳤나요?
<해시태그 시그네>의 시그네를 지켜보는 것은 불편하다. 시그네의 행동이 때로는 혐오스럽고, 나 같아서 수치스럽다가도 ‘나는 저렇게까지는 안 하지’라며 안도한다. 그러다 때때로 일상의 어느 지점에서 난데없이 시그네를 떠올리곤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서, 인정받지 못해서, 나 빼고 다들 잘만 사는 것 같을 때 나는 스스로를 시그네와 동일시한다. 심지어 시그네의 기행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시그네를 설명하자면 어떤 자리에서든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함, 유머 감각은 형편없고, 예술가로 주목받는 남자친구를 질투하며, 남자친구에게 향하는 주목을 곧바로 자신에게 돌리고자 견과류 알레르기까지 지어내는 나르시시스트. 이쯤이면 귀엽게 봐줄 만도 하지만 시그네는 관심받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위험까지 무릅쓴다. 피부병을 일으키는 불법 약물을 오남용해 주위의 걱정과 관심을 사려는 계획이다. 붉은 발진으로 얼굴이 뒤덮이고 괴사가 진행됐지만 시그네는 만족스럽다. 붕대를 칭칭 감은 모습은 셀카를 찍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이제 시그네는 새로운 관객을 찾는다. SNS에 셀카를 올리고, 기자인 친구 마르떼에게 원인 불명의 병에 걸렸다는 거짓말로 인터뷰 기회를 얻어낸다. 시그네는 가짜 불행을 극복한 서사를 통해 인플루언서가 되는 꿈에 부풀었다. 동시에 시그네는 평소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사람들을 단죄하는 상상을 한다. 그 대상은 이혼 이후로 줄곧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와 병문안을 오지 않았던 친구, 그리고 토마스다. 시그네의 상상 속에서 그들은 유명해진 시그네에게 거절당하고, 애원하고, 사과한다. 나는 시그네의 진짜 욕망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면 주변 사람들도 날 좀 다르게 쳐다봐 줄까? 내 고통에 귀 기울여줄까? 내 가치를 인정해 줄까? 나는 환대받을 수 있을까?
한편 여성 청년의 고립과 그 사회적 맥락을 살핀 책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괜찮을까>의 저자는 기존의 ‘은둔’에만 한정되었던 고립 청년의 정의를 확장해 다양한 고립의 양상을 드러낸다. 현실의 고립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외출을 하더라도, 가족과 함께 살아도, 일을 하면서도 고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고립뿐만 아니라 배제와 차별, 소외의 경험 또한 일상에서 겪는 고립이다. 시그네의 기행이 그저 미친 짓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시그네의 삶에서 고립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지만 일터에서 열정을 느끼지도 유의미한 관계를 맺지도 못한다. 성장 과정 내내 아버지는 무관심했고, 어머니와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친구들에게는 공감을 받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토마스 또한 자기 커리어 띄우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토마스는 절도한 가구를 전시하는 행위 예술가로 주목받는데, 항상 시그네의 도움을 받아 절도를 했지만 영광은 혼자 차지하며 예술계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시그네를 여자 친구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토마스의 곁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인 시그네가 인정에 목마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어디서든 소외된 시그네가 관심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뿐이었다. 자기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 나쁜가, 타인을 도구처럼 이용하며 자신을 아티스트로 포장하는 토마스가 더 나쁜가. 물론 시그네 또한 거짓말을 반복하며 타인을 기만한다. 그러나 시그네의 주변인들 모두 정도만 다를 뿐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로 타인을 조금씩 이용하는 건 마찬가지다. 마르떼가 기자의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시그네를 인터뷰한 것은 화제성 있는 기사를 씀으로써 커리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또 다른 고립 청년인 스티안이 시그네에게 불법 약물을 구해다 준은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시그네와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다. 신체 다양성을 강조한 의류 브랜드는 시그네를 모델로 기용하는데, 이 역시 시그네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수준’의 질병과 외모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그들은 시그네가 가진 질병의 이미지만을 차용할 뿐이다.
시그네가 그렇게 미쳤나? 내가 나를 해하지 않은 것은 시그네보다 삶의 안전망을 아주 조금 더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을 보살펴주는 가족이나, 열정을 쏟을 만한 일, 건강한 식단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될 수도 있다. 토마스의 경우처럼 (포장된 것일지라도) 우연히 가진 재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지탱해 주는 안전망은 누구에게나 가변적이다. 누구든 시그네보다 덜 미쳤다면 단지 시그네보다 운이 조금 더 좋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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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범도 화들짝 놀라는 전쟁 같은 사랑
"나는 상상했었지 나의 곁에 있는 널~" 나는 아이패드로 유튜브 영상 하나를 보고 있다. 그 전설적인 듀엣 송 <사랑보다 깊은 상처>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엄청 어렸을 때다. 2010년대쯤 자료화면으로 풋풋했던 박정현과 임재범이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때는 가사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내가 변했다고 백날 웅변해도 그 사람이 뇌가 있는 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노래를 비롯한 많은 대중가요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사랑은 참 여러모로 사람들을 얄궂게 만든다. 사랑이 없었으면 이 많은 사람들이 아플 일도 없고 꿈꿀 일도 없을 것이다.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일도 아닌데 사람을 행복하게도 우울하게도 만든다. 거의 자연재해와 걸맞은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속성을 깨달아 글로 쓴다고 쳐도 그게 나와 뭔 상관이 있는가? 싶다. 사랑과 연애라는 키워드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결국 '과연 나는 대체 뭘 하고 살았는가'라는 질문으로 결론을 낼 수 있다. 말 그대로, 과연 나는 뭘 하고 살았을까? 자기 계발이랍시고 동분서주했던 건 기억에 남는데 누구를 사랑해보거나 받았던 적은 없다. 170 좀 안 되는 작은 키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남들 바지통 줄이거나 화장 처음 시도해볼 때 나는 방구석에 누워서 정말 아무것도 안 했으니 그때 치러야 했던 대가를 26살의 내가 치르고 있는 것이다. 영화와 책으로 채울 수 있는 인생의 유효한 경험들이 쌓이고 쌓인 건 맞는데 정작 실전에는 약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위로를 하면 행복해지는 나. 사랑에 치인 지인들에겐 대체 뭐라고 말하지? 지인들에게 알맹이 없는 공수표로 보이지는 않을까? 언젠가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날이 올 텐데. 내가 주변 지인들에게 하는 말처럼 익숙한 것에 섬세한 걸 놓치고 살면 안 될 텐데. 막상 내가 그런 입장이 되면 나 역시 그럴 것 같아서 가끔 두렵기도 하다. 근데 뭐 어떤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되는 게 사람 심리겠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가 있다. 등장인물을 실제로 만나면 단 1마디도 섞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안녕, 이방인? 주인공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방인(Starnger)이 Closer가 되다
부고 전문 기자 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길을 걷고 있다. 사람 바글바글한 미국. 남자는 왠지 반대편에 머리가 붉은 여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서로의 눈을 마주치게 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눈빛을 마주칠 때, 앨리스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는 이 계기로 서로 대화하게 된다. 무슨 일 해요? 남자는 부고 란 담당 기자라고 한다. 빨간 머리의 여자는 낯을 그렇게 가리는 타입이 아닌 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사고 난 곳 근처를 산책하는 두 사람. 댄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한다. 어느새 직업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는 두 사람. 남자는 '내가 글재주가 없어 부고란의 기자가 되었다'란 말을 한다. 그렇게 하나, 둘 대화를 나누며 친구가 된 주인공. 잠깐 만난 사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시간이 지나 댄은 앨리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소설에 들어갈 이미지를 찍기 위해 아나의 스튜디오를 찾은 댄. 댄은 아나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나를 꼬시려고 노력하는 댄. 어찌어찌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댄은 아나에게 앨리스가 온다고 말한다. 아. 이 댄이라는 놈은 애초부터 아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댄과 앨리스는 연인관계였다. 여자 친구가 있는데도 아나에게 꼬리를 친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시작부터 15분까지의 이야기다. 15분만 봐도 정신 나갈 것 같은 전개다. 글로 풀어써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주드 로가 맡은 댄이 정말 신기할 정도로 뻔뻔하다. 영화는 댄만큼이나 뻔뻔하다. K-아침 드라마에 나올법한 이야기를 시종일관 밑어붙힌다. 눈치가 없는 게 너무 당연해서 이게 맞나? 싶을 정도다. 아마 사랑의 극단적인 예를 모아놨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세상 찌질이 같은 (우리) 이야기
이름은 그 사람을 규정하는 정체성의 의미와도 닮아있다. 만약 누군가의 이름을 속여서 타인의 마음을 얻는다고 하면 그건 '자기 정체성을 숨긴다'라는 뜻과도 닮아있다. 자기 정체성을 숨겨서 얻고 싶은 게 뭘까? 사랑은 타인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애초부터 애정이나 관심이 없으면 남이 있건 말건 신경 쓸 일이 없다.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은 이유는 그 사람을 괴롭혀서라도 찌질한 내면을 해소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영화는 사랑의 극단적인 상황을 맞물려놓고, 어떤 행동의 원인을 '이름을 속여서 사람을 꼬시는'정도의 덜떨어짐으로 귀결짓는다. 그렇게 해서 상대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다. 이 '남을 흔들어 내가 통제할 수 있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행위는 극 내내 제시된다. 극단적인 상황의 연속이라 '난 적어도 저러지 않지'라고 생각하기 쉽다.(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행동의 한 방향만 틀면 우리 모습이라 딱히 반박하기 어렵다. 극본은 인물 간의 갈등과 사랑의 속성을 비틀며 '네 사랑 이야기도 이의 일부다'라고 지적한다.
나는 상상했었지 너의 곁에 있는 날
이 지구 상에 있는 수많은 사랑 노래들은 헤어진 전 연인과의 재회를 바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옛사랑과의 재회는 기적 같은 일이 맞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행복한 시간이 다시 오길 바라는 것이다. 아프기도 아프지만 행복했던 시간도 있으니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더 나았을 거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근데 가끔 우리는 솔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 다시 만나고 싶은 걸까? 그 사람에게 오롯이 나라는 존재가 유일무이하다는 짜릿함때문은 아닐까? 그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채워진다는 착각은 참 사람을 비참하게도 만든다. 사실 애초부터 그런 건 없는데 말이다. 원래 우리 다 외로운 존재라서 사랑을 찾고 있는다. 이미 다 알면서 사랑에 빠지는 게 우리 인간이라는 걸 모두 다 알면서도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는 이 사랑의 단맛과 짠맛을 같이 느끼게 해 준다. 그 사람 잘 알거라 생각했다. 이름을 집요하게 묻고. 그 사람의 행동의 원인을 다 알 거라고 믿고. 행복 회로가 돌아가서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내가 딱 아는 사람이 있다는 그 오해가 우리를 기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사실 어떤 것의 진위여부도 확신할 수 없는 게 결국 우리가 아는 사랑의 속성이었다.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이 착각에 대해 집요하게 판다. 이 사람이 나쁜 놈인걸 아는데 '차 좀 타 줘 자기야'라고 말하는 이중성이 모든 인물에게 다 나타난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끔. 그래서 영화는 '결별-재회'의 모티브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로맨스 영화계의 불닭볶음면
난 기본적으로 매운 걸 못 먹는다. 설사가 심해서도 있고 땀이 많이 나서도 이유가 된다. 근데 그렇게 매운 걸 알면서도 가끔 당길 때가 있다. 이 영화는 불닭볶음면 같은 영화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두 번 물어도 사랑에 빠질 수 없었던 나'의 이야기나 <라라 랜드>의 꿈과 사랑의 역설에 대한 이야기는 로맨스 영화계의 정석 같은 느낌이다. 미워도 꼭 잘됐으면 하는 마음. 그래도 그 사람 덕에 행복했다는 고마움을 일깨워는 육개장 같은 영화인 셈이다. 이 영화는 어디에도 없는 매움으로 가끔 생각나게 만든다. 그리고 또 이런 영화도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그렇게 나에게 상처 준 이가 미워서 거리를 둔다 치자.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필요하다. 뭐 다른 즐거운 기억 그딴 거 필요 없다. 영화는 이 사랑에 의한 마음의 흉터를 색다르게 묘사한다. 그러려면 또 잘 안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 오해하고, 또 싸우고, 찌질해지고, 타인을 안다고 믿었지만 결국 아니었고. 그렇게 지루한 과정의 연속인 게 인생의 과정 아니겠어? 지나간 인연에게 바치는 감사함은 분명히 아니지만 영화는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시야를 넓게 도와준다.
무려 18년 전 영화
이 영화를 다시 보며 느낀 게 있다. 나탈리 포트만이 정말 미인이라는 것이다. 머리색을 빨간색부터 분홍색까지 가지각색으로 헤도 소화하는 소화력이 대단하다. 주드 로도 새삼 미남이란 것을 또 느꼈다. 이 두 배우의 젊은 시절 비주얼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가치는 충분할 듯. 또 18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캐릭터 설정을 창의적으로 잘했다. 어떤 이들에게 대입해도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정도다.
사랑에 실패할 예정인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세상을 떠날 거라는 건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한다 쳐도 그게 성공이 아닐 수도 있다. 영원한 건 없으니까. 그래도 항상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바보 같은(나 포함) 것이 우리 모습 아닌가. 이런 우리에게 상처의 치유와 화풀이에 대해 세 번 네 번 생각하게 만든 로맨스 영화다. 본 적이 없는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드린다.
#왓챠영화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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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미한 존재감의 선을 느끼는 방법
성선설과 성악설은 인간의 심성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관한 대표적인 두 가지 학설입니다. 여러분은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것을 더 지지하시나요?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건한 성악설 지지자였습니다. 인간은 악하고 이기적으로 태어나지만, 사회화를 거쳐 선함을 익힌다고 믿었어요. 그러나 최근에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선은 만들어질 수 없지만, 악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간의 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도, 이 주장들 속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에게는 선함과 악함이 모두 있다는 거죠. 어느 것이 먼저였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악만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악에 비해 선은 너무나 사소하고 희미한 존재감을 가졌기 때문이겠지요.
바로 이럴 때, 선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리하고 뾰족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 안에는 그들이 포착한 제각각의 선이 담겨 있거든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4년 12월 11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
Summary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 '빌 펄롱'은 석탄을 팔며 아내, 다섯 딸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지역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빌 펄롱'은 숨겨져 있던 어떤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팀 밀란츠
출연: 킬리언 머피, 아일린 윌시 외
선, 사소하지만 묵직한 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수녀원에 석탄을 납품하러 간 '빌'이 그곳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진실을 마주한 빌이 '방관'과 '행동' 사이에서 고뇌하는 과정이 채우고 있는데요. 영화 내내 깊은 고통, 불안과 불편 속에 있던 '빌'은 끝끝내 악에 저항하는 작은 행동 하나를 실천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바로 수녀원에 버려져 학대받던 소녀 '사라'를 구하는 일입니다.
'빌'이 '사라'를 데리고 나오는 과정에는 아무런 스펙터클이 없습니다. '사라'가 갇힌 곳에 접근하기 위한 잠입도, 악의 축인 수녀원장과의 대립도 없어요. 오히려 수녀원장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그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유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행한 구원은 여느 때와 같이 수녀원의 석탄 창고 문을 열고, 그 안에 쪼그리고 있는 소녀를 부축해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러닝타임의 90% 이상을 할애한 고뇌에 비하면 무척이나 짧고 허무하지요.
하지만 영화의 길이가 길지 않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약한 것은 아니듯이,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구성이 관객에게 선의 형태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거든요. 기나긴 숙고 끝에 내린 사소한 결단 하나, 그것이 바로 선이지요. (마침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98분, 동명의 원작 소설은 쪽수가 132쪽으로 짧습니다. 이마저도 하나의 메시지처럼 느껴지네요.) 그가 한 행동은 그저 손을 내미는 것뿐이었지만, 우리는 그 안의 묵직한 힘을 느낍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선의를 과장하여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그 힘을 더 강하게 전달합니다.
'빌'의 선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의 삶에 켜켜이 쌓인 또 다른 선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구성을 통해 외로움과 결핍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빌'의 과거를 조금씩 보여주는데요. 그의 어린 시절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지만, 그 속에도 분명한 선들이 있었습니다. 상주 고용인의 자식을 받아주고, 가난한 엄마 대신 갖고 싶었던 직소 퍼즐을 선물했던 집주인이 대표적이죠. '빌'이 아무리 고되어도 손에 묻은 재를 깨끗하게 닦아내고 아이들이 있는 식탁에 앉는 것, 부하 직원에게 노동 그 이상의 값을 지불하는 것, 그리고 '사라'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된 것은 유산처럼 남은 선의 영향입니다.
⊙ ⊙ ⊙
고민에 빠진 '빌'이 아내 '아일린'에게 '사라'의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 아이들과 같은 아이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던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가 선을 베풀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대사에 담겨 있는 듯해요. 우리 인간은 모두 특별한 보편성을 가졌지요. 개개인은 모두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이나, 그 특별함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보편들도 있습니다. 같은 종으로서의 보편, 같은 정체성으로서의 보편, 같은 문화권에서 비롯되는 보편, 같은 이념과 가치관이 만드는 보편... 우리는 모두 다르면서도, 모두 같습니다. 그러니 선을 베풀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모두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희미하지만 강한 선의 마음이 이야기 밖에서도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One-Liner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용기 하나를 위한 9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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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th JIMFF 최자영 감독님 interview ?♀️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작 #나의여신 의 #최자영 배우님 본격 탐구! ?♀️
? JIMFF X HISTRANGER ?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HISTRANGER가 떴다!
JIMFF 공식 웹 데일리팀이 직접 취재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현장을
지금부터 살펴볼까요?
한국경쟁 상영작 [나의 여신]의 최자영 감독님을
하이스트레인저 웹 데일리 팀이 직접 만나보았습니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8월 25일 대개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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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 매주 목요일 밤 11시 59분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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