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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2-03-25 20:13:08

<킹 리차드>가 흑인을 위한 정치일까?

영화 〈킹 리차드〉 리뷰

 

 

  ‘철저하게 계획하고, 노력하여, 꿈을 현실로 만들라’는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기분이 드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거부감이 먼저 든다. 세상이 계획한 대로, 노력한 대로, 꿈꾸는 대로 굴러가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부유한 백인과 가난한 흑인은 같은 계획을 품고, 같은 노력을 기울여, 같은 꿈을 항해 나아가도 다른 결과를 마주할 확률이 크다. 아무리 치열해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사회‧문화‧경제적 부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오력’을 향한 조롱, ‘능력주의’에 대한 회의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킹 리차드〉는 다른 길을 간다. 현실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대신 더 철저하게 계획하고, 노력하며, 꿈꾼다. 주인공은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 비너스 윌리엄스와 세레나 윌리엄스의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다. 리차드는 두 자매가 태어나기 전부터 테니스 선수로 키울 것을 ‘계획’했다. 그것만이 딸들이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나 불우하게 자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족의 미래를 보장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리차드는 이웃 주민에게 아동학대 신고를 받을 만큼 열정적으로 두 자매를 훈련시킨다. 딸들이 혹독한 경쟁 시스템에서 소모되다 버려질 것을 우려하여 유명 코치와 스폰서, 에이전트의 제안을 모두 물리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꿈꾸던 것을 이뤄낸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리차드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

 

 

 

 

 

 

  리차드와 비너스, 세레나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복합적이다. 인종 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분명 흑인의 꿈을 증폭시켰다. 세 부녀가 ‘백인 스포츠’인 테니스에 낸 균열은 그들을 보고 테니스 선수를 꿈꾸기 시작한 흑인들로 인해 더 커질 수 있다. 그럼으로써 흑인이라는 이유로 과잉진압을 당하거나 총에 맞지 않는, 마약과 폭력에 빠지는 않는 삶의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흑인에게 다른 미래가 있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 부녀의 기적적인 성공이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만을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강한 의지와 용기, 노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건 소수에게만 허락된 ‘기적’이다. ‘하면 된다’의 주술은 모두에게 빛나는 미래를 허락하지 않는다. 언제나 소수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이 소수의 존재가 기적을 꿈꾸며 계획‧노력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할 사람들의 공허한 기다림을 양산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이다.

 

 

 

  지금껏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대체로 두 가지 길을 걸어왔다. 첫 번째는 〈킹 리차드〉처럼 흑인 개인의 성취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두 번째는 집단으로서의 흑인의 문제와 그들을 위한 정의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흑인이 차별을 받는다는 건 영화가 그리는 공통적인 현실이지만,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영화가 서로 다른 답을 내놓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이 둘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성공한 흑인도 언제나 피부색으로 환원되어 독해될 가능성이 있고, 흑인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는 운동도 뛰어난 개인의 역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흑인 영화의 범주적 구분이 아닌 해석이다. 영화가 흑인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집중하기보다는 사회적 수용의 측면에 집중함으로써 영화 스타일에 한정되지 않는 다채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윌리엄스 가족의 노력과 이 이야기를 재생산하여 전파하는 일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계획, 노력, 꿈은 소중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성취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이 ‘덜’ 계획하고 노력하며 꿈꾼 자들을 향한 비난의 근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다른 계획‧노력‧꿈에 대한 폄하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결국 〈킹 리차드〉가 할리우드의 문법과 방식으로 풀어낸 세 부녀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우리 사회의 몫이다. 왜 이들이 재능과 꿈을 가졌음에도 남들보다 더 철저하게 계획하고 노력해야만 했는지에 주목하여 계획‧노력‧꿈을 평등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할지, ‘결국 하면 된다’는 부조리한 명제의 반복에 그칠지는 영화를 소비하는 사회의 역량에 달렸다. 이는 영화 제목의 ‘King’을 리차드의 헌신에 대한 존중을 담은 표현으로 이해할지, 성공하지 ‘못한’ 절대다수를 발아래 두는 왕의 의미로 해석할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인종적 정의의 방법론에 관한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길 바란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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