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롬2023-09-17 11:26:21
[SICFF 데일리] 눈보라를 이긴 따스한 사랑의 교감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2022)
감독: 박재범
배역: 이윤지, 김서영, 강길우, 김예은, 이관목, 송철호, 이용녀 外
러닝타임: 69분
“북극성을 따라서 붉은 곰을 찾아가렴” 툰드라의 그리샤, 엄마를 살리려면 숲의 주인을 만나야 한다.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fname=http://t1.daumcdn.net/brunch/service/user/arl1/image/y5NXsDYjwaqyEfy_AQHYDE_xIEE.jpg)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툰드라 배경에 스톱모션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3년 3개월이란 제작 기간인 만큼 스톱모션의 섬세함을 보인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평원 속 순록의 피를 마시는 장면과 오로라가 비추는 하늘을 구현한 장면은 툰드라 지역의 현실성을 보인다. 순록의 피를 마시는 장면이 자칫 아이들에게 잔인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툰드라 민족에게는 일상이고, 어린이들의 새로운 지식과 시야를 넓히게 만들 수 있다. 예이츠의 딸이자 장녀인 그리샤는 엄마가 갑작스레 원인 모를 병에 걸리고 무당으로부터 숲의 주인을 찾으라는 조언을 듣는다. 아버지는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도시로 나가 현대의 약을 구하러 간다. 문명에 타협한 태도를 보이는 아버지와 달리 그리샤와 남동생 꼴랴는 숲의 주인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한편, 숲의 주인을 없애기 위해 떠나는 러시아 연방군 블라디미르도 숲의 주인은 찾기 시작한다. 마침내 만난 숲의 주인은 천년을 산 거대한 붉은 곰이었고, 천 년을 살아갈 수 있었던 비밀은 신비스러운 장소 바위 아래 조그맣게 자라는 월귤나무 열매의 힘 덕분이었다. 블라디미르로 인해 다친 숲의 주인을 그리샤가 도와주며 열매를 얻는다. ‘숲의 주인’이라는 점과 치유의 힘과 같은 민담이나 소설의 구상을 영화화로 만들어 신비로움을 선사한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좁게는 그리샤와 엄마와의 관계를 보이고, 넓게는 생물을 포용하는 자연을 엄마라고 빗대어 표현해 자연의 위대함을 선보인다. 어머니의 헌신과 어머니를 향한 따스한 사랑이 차가운 눈보라를 이겨낸다.
상영일정: 9/15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9/13~9/20
Relative contents
-
- 1월 3주 최신 개봉영화!
2022년 1월 3주 개봉영화!
레지던트이블 : 라쿤시티 Resident Evil: Welcome to Raccoon City , 2021
좀비 액션 호러 레전드!
영화 "레지던트 이블: 라쿤시티"는 엄브렐러의 철수 후 좀비 바이러스에 의해 지옥으로 돌변한 라쿤시티,
그 곳을 탈출하기 위한 클레어와 생존자들의 사투를 그린 서바이벌 액션 호러영화 입니다.
게임 ‘바이오하자드’를 원작으로 한 '레지던트 이블'은 2002년 처음 등장해 좀비 호러 액션의 레전드로 불리며,
역대 게임을 원작으로 한 프랜차이즈 영화 중 가장 성공적인 흥행을 이루어낸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죠
이번 영화에서는 오리지널 스토리였던 이전 시리즈와는 다르게 원작게임 ‘바이오하자드’ 1, 2편을 최초 실사화 했습니다.
클레어, 크리스, 질, 웨스커, 레온 등 게임의 캐릭터 뿐만 아니라 1편의 배경인 스펜서 저택과 2편의 주요 스토리가 벌어지는 라쿤시티 경찰서,
그리고 게임에서 벌어지는 주요 사건을 그대로 가져온 스토리로 관객들의 흥미를 올리고 있습니다.
‘바이오하자드’의 팬과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팬의 만족도를 한꺼번에 충족시킬
첫번째 추천영화 "레지던트이블: 라쿤시티" 입니다.
예고편 보러가기▼
도쿄 리벤저스 東京リベンジャーズ , Tokyo Revengers , 2020
2021년 일본 실사영화 흥행 1위 화제작
2017년 부터 '주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 중인 와쿠이 켄의 원작 만화 '도쿄 리벤저스'는
운명을 바꾸기 위한 타임리프라는 독특한 설정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2021년 10월 10일 기준 누적 판매부수 4000만부를 돌파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원작 만화의 인기에 힘입어 제작된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일본 현지는 물론 아시아를 넘어 북미에서도 방영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과 OTT 등을 통해 서비스 되며 팬층이 두터워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원작의 매력을 극대화하한 실사 영화 "도쿄 리벤저스"가 개봉을 하는데요
2021년 7월 9일 현지에서 개봉한 "도쿄 리벤저스"는 개봉 이후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른 것은 물론
11월 25일 기준 334만 관객을 동원하고 흥행수입 44억 6천만엔을 기록하며 2021년 실사 영화 흥행 1위에 오르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본 대세스타 10인이 총 출동한 초호화 캐스팅!
원작 팬과 영화 관객 모두 만족시킨
두번째 추천영화 "도쿄 리벤저스" 입니다.
예고편 보러가기▼
어나더 라운드 Druk , Another Round , 2020
술과 삶에 대한 유쾌한 인생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무료한 일상에 사라진 열정을 되찾기 위해 알코올과 관련된
흥미로운 실험에 나선 4명의 친구들이 만들어가는 유쾌한 찐 어른들의 술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22년 맹활약을 예고하는 명배우 매즈 미켈슨과 토마스 보 라센, 라르스 란데, 마그누스 밀랑까지
베테랑 배우들이 최고의 앙상블을 펼치며 실제를 방불케 하는 현실적이고 공감 가는 이야기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데요
미국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과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외국어영화상을 비롯해 세계 영화상을 휩쓸었고
미국의 비평 사이트 로튼 토마토 전문가 평점인 신선도 92%, 관객 점수인 팝콘 지수 90%를 기록하는 등
완성도는 물론 대중적인 재미까지 인정 받았습니다.
음주가 인생에 가져오는 모든 어른들의 이야기!
세번째 추천영화 "어나더 라운드" 입니다.
예고편 보러가기▼
아이스틸 빌리브 I Still Believe , 2020
감동실화 러브스토리
영화 "아이 스틸 빌리브"는 20대 초반 가수를 꿈꾸는 제레미 캠프가 운명의 연인 멜리사를 만난 후,
그녀가 암에 걸리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적으로 노래한 감동실화 러브스토리입니다.
"제레미 캠프"는 미국 CCM 계의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으로 인정받는 가스펠음악협의회 '도브 어워즈' 5회 수상을 비롯해
'ASCAP 뮤직 어워즈' 작곡가상, '리더스 초이스 뮤직 어워즈' 최우수 남성 아티스트를 수상했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그래미 어워즈' 노미네이트됐고 'AC 라디오' 10주 연속 1위를 포함한 6개 곡의 연속 1위,
기독 음악 부분 1위 등 수많은 기록을 차지했습니다.
모두가 사랑한 그의 대표곡이자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 'I Still Believe'의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네번째 추천영화 "아이스틸 빌리브" 입니다.
예고편 보러가기▼
미싱타는 여자들 Sewing Sisters , 2020
1970년대 평화시장 소녀 미싱사들의 어제와 오늘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은 여자라서 혹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공부 대신 미싱을 탈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편견 속에 감춰진 그 시절 소녀들의 청춘과 성장을 다시 그리는 휴먼 다큐멘터리입니다.
개봉 전부터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을 포함한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12회 광주여성영화제, 제22회 제주여성영화제 등 유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관객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여자라서 혹은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로 인생의 선택지를 빼앗겼던 1970년대 여성들의 애환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마치 나의 엄마를 보는 것만 같은 애틋함의 눈물로,
또 어떤 이에게는 다른 시대를 살았던 또래 친구들이 전해주는 용기로 다가갑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고 섬세한 이야기
다섯번째 추천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입니다.
예고편 보러가기▼
-
- 1월 첫째 주 OTT 추천신작 <마더/안드로이드>, <황무지의 괴물>, <네 명의 저녁 식사>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
2022년 새해 첫 인사드립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매 주 월요일,
한 주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다양한 OTT 플랫폼의 신작 소개를 하는 시간!
2022년의 새해를 여는 신작은 무엇이 있을지 다함께 알아보겠습니다!
1. 네 명의 저녁식사(4 meta), 넷플릭스
로맨틱 코미디 | 이탈리아 | 90분
감독 : 알레시오 마리아 페데리치 | 출연 : 일레니아 파스토렐리, 마틸데 졸리, 주세페 마조, 마테오 마르타리
넷플릭스 공개일 : 2022년 1월 5일 (수요일)
"소울 메이트가 부질없다는 로맨틱 코미디가 왔다. 가상의 현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네 친구들의 색다른 커플 이야기.
다양한 커플 조합을 들여다보면 진짜 사랑의 모습이 보인다!"
*관전 포인트* : 로맨틱 코미디의 주요 소비층은 항상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배경으로 만약에 '나에게 사랑이 온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벌어지는 커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요.
소재가 비교적 독특하며 남녀배우들의 다채로운 커플 연기와 매력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녀 커플의 조합으로 진지하면서도 엉뚱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사랑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가 될 것 같습니다.
2. 황무지의 괴물 (The Wasteland), 넷플릭스
공포, 드라마 | 스페인 | 92분
감독 : 다비드 카사데문튼 | 출연 : 인마 쿠에스타, 아시에르 플로레스
넷플릭스 공개일 : 2021년 1월 6일 (목요일)
"19세기 전쟁 중의 스페인. 외딴 황무지에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전쟁과 무관하게 평온하게 황폐한 오지에서. 괴물의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가족은 시험에 들게 된다.
가족의 어린 아들 '디에고'는 공포심을 먹고 사는 사악한 괴물로부터 자신과 어머니 '루시아'를 지켜낼 수 있을까?"
*관전 포인트* : 공포 드라마 장르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스페인 작품. 92분의 러닝타임으로 관객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집중력있게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예고편에서 나와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심을 먹고 사는 사악한 괴물의 존재가 어떻게 그려질 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인데요.
엄마와 그의 어린 아들이 사건을 헤쳐나가는 연기 호흡이 기대됩니다. 어린 아들의 디에고 역은 스페인 영화 <페이 앤 글로리>의 '아시에르 플로레스'가 맡았으며, 이 아역배우의 연기 또한 무척 기대됩니다.
3. 마더/안드로이드 (Mother / Android), 넷플릭스
SF, 드라마, 스릴러 | 미국 | 110분
감독 : 맷스 톰린 | 출연 : 클로이 모레츠, 알지 스미스
개봉 : 2021년 12월 17일(북미 외)
넷플릭스 공개일 : 2021년 1월 7일 (금요일)
"인간의 일상생활에 안드로이드가 필수가 된 미래의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조지아(클로이 모레츠)는 남자친구 샘(알지 스미스)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조지아는 엄마가 될 자신이 아직 없었고 결국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한 채 대학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조지아는 폭력적으로 변한 안드로이들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샘과 조지아는 숲으로 달아나게 된다. "
*관전 포인트* : <더 배트맨>의 각본을 쓴 시나리오 작가 '맷슨 톰린'의 감독 데뷔작입니다.
안드로이드들의 공격을 받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SF장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주연 배우인 '클로이 모레츠'의 임신을 한 모습은 물론 SF장르 안에서의 클로이 모레츠의 연기 또한 기대하게 됩니다.
감독은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을 경험했던 부모님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하니, 더욱 더 흥미가 가는 포인트인데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하고 바쁜 작가 중의 한 명인 '맷슨 톰린'의 감독 데뷔작을 기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
- 소수자 감정, 정말 이게 다인가요?
6★/10★
물, 불, 흙, 공기 4개 원소가 ‘함께’ 살아가는 엘리멘트 시티. 이곳에 불끼리 모여 살다가 재난이 발생해 삶의 터전을 잃은 앰버네 가족이 이주해온다. 가족은 불을 주 손님으로 하는 가게를 꾸려 생계를 이어왔고 앰버네 가족은 여기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앰버는 엘리멘트 시티 공무원으로 일하는 웨이드(물)을 만난다. 둘은 처음에는 '불법’ 증축된 앰버의 가게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지만 이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결국에는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물은 불을 꺼뜨리고, 불은 물을 증발시킨다. 둘은 이 난관을 넘을 수 있을까?
영화에서 각 원소가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물은 백인이고 흙과 공기는 물(백인)과 적당히 어울릴 수 있는 존재의 은유이며, 불은 물과는 만나서는 안 되는 유색인의 은유다. 영화는 서로 만났을 때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던 물과 불의 접촉에서 파생되는 긍정적인 변화를 강조하며 인종 간 화합을 요청한다. 이민자 가족의 설움과 분노를 중간중간 녹여내기도 한다.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적당한 완성도를 가진 영화다. 하지만 ‘인종 간 접촉(그리고 사랑)을 통한 변화’라는 메시지는 2023년에 말하기에는 다소 고루하다. 인종에 따라 서로 다른 위계화된 공간에 살아가고, 그 경계를 넘는 일이 금기였던 시대에나 적합한 메시지다.
영화에서 앰버는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영화는 ‘다혈질’인 앰버가 감성적이고 다정한 웨이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성격이 바뀌어가는 과정이 나온다. 그러나 유색인/소수자인 앰버의 화가 고작 편견 없는 백인 기득권과의 사랑으로 해소될 리가 없다. 앰버의 화에는 인종 정의의 복잡한 맥락이 담겨 있을 테니까.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 주목하면서도 이를 제대로 해소하지는 못한다. 2023년에 인종 간 공존과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메시지와 질문이 조금 더 치밀하게 고민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 비밀이 숨겨 있을 듯 암시되다가 어느새 ‘해소’되고야 마는 소수자 감정(분노)을 더 밀도 높게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싶다. 이민자 2세가 부모에게 느끼는 애정‧존경과 부담감의 공존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
- 지금이 가장 빛나는 시
영화 <패터슨>은 단조롭다면 단조롭고, 풍성하다면 풍성한 일주일을 담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버스를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그 날 분량의 창작 혼을 발휘해 무언가를 리폼하고 있고, 저녁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서 동네 바에 들러 맥주를 한 잔 들이켜는 삶. 본인의 이름과 같은 패터슨이라는 도시에서 그렇게 매일 비슷하지만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패터슨의 일주일이다.
작은 진폭으로 일상은 매일 다르게 변주된다. 어떤 날은 아내가 컵케이크를 굽고, 어떤 날은 기타를 사고 싶다고 한다. 어떤 날은 버스를 운전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남성들의 대화를 듣게 되고, 어떤 날은 이 마을에 유일한 아나키스트 십대 커플의 대화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내내 패터슨은 끊임없이, 부지런히, 쉬지 않고 시를 캐낸다. 버스를 출발하기 전에, 점심시간에, 작은 노트를 들고 앉아서 계속 쓴다. 직장 동료가 아침마다 "물어본 김에 말이야" 하면서 매일 다르게 변주되는 일상에서 자질구레한 불평을 셀 때, 패터슨은 매일 다르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적확한 단어로 붙잡아 엮으며 시를 쓴다.
가끔 나도 시를 쓴다. 휴대폰 메모장에 [작은 시]라는 폴더가 있다. 다듬다 만 시, 언젠가 빚어내고 싶은 시어, 만족스럽게 완성한 시, 다시 읽다가 반쯤 지운 시, 같은 것들이 섞여 있다. 그것들을 모아 언젠가 공모전에 시를 내보려고 한 적이 있다. 최소 편수에 맞추기 위해 그동안 썼던 모든 시를 다 끌어모으다가 도저히 부족해 중2병 시절 썼던 노트까지 뒤진 적이 있었다. 그 시를 모두 인쇄해 침대 위에 펼쳐놓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묶어 보면서 순서를 배열하는 내내 나라는 인간의 지난 십여 년 변천사를, 어쩌면 나의 내장 같은 것을 펼쳐놓고 있는 기분이었다. 십수 년의 장구한 시간이 불과 몇십 장 되지 않는 종이로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매일 다른 시구를 적는 패터슨이 굉장히 다작(多作)한다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패터슨 자신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다. 그는 공모전 같은 곳에 내기 위해 시를 정리하고 묶는 일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시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세상에 내놓자고 계속해서 그를 설득한다. 아내는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과 패턴을 과감하게 집안 곳곳에 드러내고, 자신 있게 컵케이크를 만들어 마켓에 내놓으면서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새로이 가슴 뛰는 일이 생기면 남편을 졸라 기타를 사고, 혼자 뚱겨 보면서 이미 포크 아티스트가 된 것처럼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남편의 시를 마음 다해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분명 아름답고 다정하다. 그리고 글은 분명 읽는 사람에게 닿아야 하니 사실 그의 말이 맞다. 패터슨이 그토록 좋아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또한 그의 시를 소리쳐 드러냈기에 지금 패터슨의 손에 시집이 놓여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런 마음은 글을 쓰고 싶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옛날과 달리 꼭 등단을 하거나 학력이 높거나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니어도 책을 낼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등단보다 셀럽이 되는 쪽이 책을 내기엔 훨씬 빠르고 쉬울지도 모른다. 우후죽순처럼 책이, 작가가 솟아나는 세상. 그곳에서 우직하게 얼굴을 붉히며, 아직은 드러내지 않을 시를 쓰는 사람은 확실히 섬 같은 구석이 있다.
시집 한 권 내지 않았어도, 늘 자신을 버스 운전기사라고 소개해도 패터슨에게는 그런 섬 같은 시인의 면모가 보인다. 먼 훗 날 패터슨 시의 누군가가 (예를 들면 엄마와 언니를 기다리며 시를 쓰던 여자아이 같은 누군가가) 패터슨의 초기 시집을 들고 걸어 다닐 것만 같은, 지금 이 모습은 그 시대의 프리퀄 같다는 예감에 휩싸인다. 좋은 시는, 시인은 시간을 초월하므로 과거는 먼 미래를 닮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못해서, 조바심이 난다. 더 좋은 문장을, 더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길을 잃는다. 글을 향한 짝사랑은 그렇게 갈지자걸음을 걷는다. 정말 좋은 문장으로, 좋은 이야기로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어 하다가도, 어떨 때는 그냥 내 이름자 박힌 책과 작가라는 타이틀과 거기서 나오는 지적 허영심만 쏙쏙 취하고 싶은 것 같다. 세상에 인정받는 글을 보며 부러워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 마음이 비단 시와 글에 대한 마음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정답을 모르고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의 태도로 사는 게 문제라는 걸. 고쳐야지 마음 먹지만 그것조차 하나의 과제로만 부여하곤 하는 스스로를 잘 안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일본인이 던진 말처럼, 때로는 여백이 상상의 여지를 주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패터슨이 일상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는 지금, 아직 등단 전이고 원고 청탁이나 강연 요청이 들어오지 않고 그에 대한 비평이 들려오지 않는 지금이 그에게 가장 빛나는 시를 쓸 수 있는 때인지 모른다. 정말 그의 정수가 흘러나오는 건 지금일 것이다. 누군가의 초기 작품이란 가장 거친 날것으로 그가 드러나는 방식이니까. 가장 그다운 것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니까.
그 사실이 기묘하게 나에게 위안을 준다. 지금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시간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것들을 이루어가는 시간이라는 점이. 패터슨이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그냥 좋은 사람 소리 듣는 평범한 이웃처럼 웃으며, 그런 날들을 담담하게 사는 모습을 바라보면 지금이 그의 가장 빛나는 시라는 생각이 드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어느새 조바심을 내려놓고, 여백이 주는 여지를 즐길 수 있다.
패터슨이라는 캐릭터뿐 아니라 이 영화 자체가 나를 그렇게 가르친다. 개가 납치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협박처럼 들리는 젊은이들의 경고 이후에도 패터슨은 여전히 개를 바 밖에 묶어놓는다. 조금 머뭇거리다 개에게 "납치당하지 마."라고 말해두는 게 전부다. 당연히 납치 예방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부부가 개를 잃어버리게 될까 계속 불안했다.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쏴야 한다며? 어디서 체호프의 총 얘기는 주워듣는 바람에. 그러나 그건 나만의 불안이었다. 단편적인 지식은 나름의 쓸모가 있지만, '그래야 한다'라고 사람을 옭아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너무 많은 순간 누군가의 정의를 기다린다. 시란? 시는 이런 거야. 시는 어떤 순서로 묶어야 하지? 이런 규칙에 따라 묶어야 하는 거야.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바보짓을 자꾸만 반복한다. 이런 건 문예창작과에 갔으면 배웠으려나?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툭하면 전공을 돌아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해도 되나?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누군가 맞다고, 혹은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길 기다린다.
시는 그런 마음 바깥에 있다. 그리고 거기에 시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평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모른다. 다만 지금 쓰는 대로, 나의 시들은 내가 묶고 싶은 대로, 그 느낌과 그 속도가 맞다. 잘 되지 않으면 잘 되지 않는 대로 담담하게 흘려보내는 것이 맞다. 마음이 또 불안해지거든 눈을 들어 패터슨을 보자. 그리고 조용히 작은 노트를 펴자. 다시 지금의 빛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
- 훌륭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SF영화
많은 기억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장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기억들은 저장해 두고 시간이 될 때마다 그 기억을 꺼내 떠올린다. 마치 영상이 재생되듯이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에는 그때 느꼈던 감정, 촉감에 집중한다. 어떤 기억은 아주 행복하고 어떤 기억은 아주 고통스럽다. 이렇게 기억들은 상황에 따라 선별적으로 저장된다. 의식적으로 이 기억을 저장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 저장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들은 어느 순간 지나고 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기도 한다. 모든 경험 중 아주 특별한 기억들만 남아 오랜 시간 저장된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들은 모여서 기억 속 과거가 된다. 종종 과거를 떠올리고 그 순간을 다시 돌아본다. 과거를 돌아보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누구나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과거의 특정한 기억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기도 한다. 때론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좋은 길잡이가 되지만 현재의 삶을 방해하기도 한다. 특히나 과거의 행복한 순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순간부터 현재는 불행해지고 살아가야 할 동력이 줄어든다.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현재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며 현재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현재는 불행해지고, 과거에의 집착은 더욱 심해진다.
과거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 <레미니센스>
영화 <레미니센스>는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 속 레미니센스는 과거의 특정 기억을 떠올려 그때의 감정이나 촉감을 좀 더 디테일하게 느끼게 해주는 기계다. 일종의 과거로의 여행을 하게 도와주는 기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과거로의 여행을 돕는 인물은 닉(휴 잭맨)이다. 닉은 이 기계에 들어간 의뢰자들을 음성으로 안내하여 안전하게 과거를 느낄 수 있게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닉은 동료인 와츠(탠디 뉴튼)와 함께 그 가게를 운영하면서 생계를 해결하고 있다. 그가 가게를 운영하며 만나는 고객들은 대부분 과거의 행복한 기억에 반복해서 머무르려 한다. 꽤 다양한 사람들이 그 과거에 접속하는 모습은 꽤 흥미롭게 느껴진다.
초반에 보이는 닉은 꽤 이성적이지만 공감능력이 있는 인물이다. 고객들이 과거에 너무 빠지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주거나 우려점을 충분히 전달해주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객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금전적인 할인도 해준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하는 메이(레베카 퍼거슨)를 만난 이후 그는 새롭게 만난 메이와 많은 공감과 감정을 공유한다. 과거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는 듯 보였던 닉은 메이를 만난 이후 그만의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간다. 그가 그렇게 현재의 좋은 기억들을 과거로 쌓아둘 수 있었던 것은 과거보다는 현재에 좀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현재 눈앞에 있는 메이라는 여인에게 집중하고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는 과거에 함몰된 영화 초반의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메이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중반 이후 닉도 점점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메이와의 순간들을 다시 느끼기 위해 기계에 스스로 접속하고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자신의 연인이 떠나간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그래서 아주 이성적으로 보였던 닉은 점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현재보다는 과거에 머무르며 그 행복한 순간들을 다시 경험한다. 다만 사라진 연인이 왜 말도 없이 떠났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를 찾는 것이 주요 목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있긴 하다.
이성적인 닉이 과거에 집착하게 되기까지
옆에서 그를 돕는 와츠 역시 과거에 접속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아예 자신의 과거를 차단하고 있는 인물이다.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와츠는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단절시킴으로써 현재를 억지로 살아가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가 살아가는 현재는 꽤 공허해 보이고, 그가 들이키는 술은 그 공허함을 달래는 도구로 보인다. 그는 과거의 미스터리를 푸는 닉을 돕지만 그가 다시 현재를 살아가길 설득한다. 하지만 과거를 단절한 본인의 현재가 공허함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설득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 영화가 풀어가는 메이의 미스터리는 꽤 흥미롭다. 닉과 같은 시선으로 메이를 바라봤던 관객들은 그가 왜 사라졌는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를 동일한 감정으로 따라가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발생하는 미스터리는 영화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영화는 메이에 대한 약간의 반전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어서 다소 맥이 풀리게 한다. 또한 영화의 말미에 닉이 선택하는 어떤 모습은 그가 현재를 살아가지 않고 과거에 머무르는 것인데, 이런 닉의 선택 또한 초반에 그가 보여준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이어서 영화가 가진 전체적인 주제와도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전반적으로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며 걸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마지막 닉의 모습은 과거에만 함몰된 것처럼 보여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온전히 현재를 살아갈 기회를 얻은 인물은 와츠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패한 경찰이나 재벌, 심지어 주인공 닉까지 모두 현재를 살아갈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스스로 포기한다. 하지만 와츠는 단절했던 과거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스스로 만들었고, 그가 스스로 만든 현재에도 동료인 닉을 끝까지 보살핀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영화의 주제를 대변하는 인물은 닉 보다는 와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설정에 몇 가지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미래의 플로리다다. 도시의 일부가 바닷속에 잠기면서 도심지의 건물들의 저층은 대부분 물속에 잠겨있고, 일부 잠기지 않은 길은 차가 다니지만 대부분은 작은 보트로 이동을 한다. 또한 해가 진 이후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낮과 밤이 바뀐 도시처럼 보인다. 도시 건물의 저층 대부분이 물에 잠겨있는 모습은 이전에 보아왔던 완전히 물에 잠긴 도시의 모습과는 차별화되고 그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며 시선을 끈다. 과거를 시각적으로 영상화하여 제삼자가 볼 수 있다는 점도 새로운 설정이다. 과거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기억을 화면으로 터치하여 보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레미니센스>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 과거의 모습이 3차원으로 구현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억을 하고 있는 본인이다. 즉,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레미니센스라는 기계 안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영상으로 구현과 저장이 가능하다.
신선한 세계관 속에 영화의 주제의식과 모순되는 캐릭터의 선택
영화 <레미니센스>는 꽤 신선한 설정과 세계 관위에 구축된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미 많이 보아온 SF의 세계관을 살짝 비틀어 조금 색다른 배경을 보여주고 있고, 영화 안에서 보여주는 과거 구현 기술도 좀 더 디테일하게 파고들어 그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담고 있다. 그러니까 SF 영화답게 미스터리와 액션, 시각적 화면 그리고 철학적인 주제가 복합적으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담고 있는 마이애미의 모습은 꽤 아름답고 닉과 메이, 와츠 같은 주요 등장인물들도 꽤 매력적이다. 또한 영화의 주제를 담아낼 수 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 적절하게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보인다.
이렇게 잘 구현된 세계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시종일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다른 방향으로 캐릭터가 소비되면서 그 주제의식이 희미해지고 말았다. 이 영화의 세계관을 구상한 리사 조이 감독은 유명한 SF 드라마 <웨스트 월드>의 세계관을 매력적으로 구성한 경험이 있다. 그는 <웨스트 월드>의 감독, 각본까지 담당하면서 꽤 훌륭한 주제의식과 세계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이번 첫 장편 연출작인 <레미니센스>에서도 그가 가진 뛰어난 구상 능력을 확인할 수 있지만, 영화 주제를 이야기하는 측면에서의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리사 조이 감독은 앞으로 다양한 스튜디오들과 함께 더 많은 SF영화나 드라마를 연출할 예정이어서 그가 만들어갈 세계관으로 어떤 이야기를 보여 줄지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해피엔딩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닉은 메이에게 행복한 이야기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해피엔딩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더 슬프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 이야기에 메이는 그럼 중간까지만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어쩌면 닉은 메이의 부탁과 마찬가지로 그 중간까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끊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가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지를 계속 이야기했다. 그 주제 의식 아래서는 닉의 마지막 모습은 배드 엔딩일 것이다. 하지만 닉과 메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그들에게는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
- 비선형적 세계로의 첫걸음
* 스포일러 주의
* 지극히 개인적인, 횡설수설한 감상
1. '사피어-워프 가설'https://pixabay.com/images/id-1418613/
'사피어-워프 가설'이란 사람은 그 언어를 바탕으로 사고한다는 가설이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눈(雪)'은 지구 어디에서나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출처: 표준국어대사전)'를 일컫는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것을 함박눈, 싸리눈, 진눈깨비 등으로 정의내릴 때, 에스키모인들은 수십가지의 다양한 단어로 표현한다. 비슷하게, 인간이 볼 수 있는 '색(色)'의 스펙트럼은 동일하지만, 영어에서 각각 green과 blue라고 칭하는 범주의 색들을 한국어에서는 이 범주의 색을 '푸른색' 하나로 통칭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신호등의 녹색불을 파란불이라고도 하고, 초록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언제나 green light지, blue light가 아니다. 즉, 사람이 사고하는 방식에 언어가 관장하는 것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이 아직까지 '가설'에 불과하기는 하지만(인간의 인지 능력을 직접적으로 측정할 길이 아직까지는 확고하게 개발되지 않았으므로),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언어 현상에서 이런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체험하곤 한다.
이 가설은 작중 인물인 루이스가 헵타포드들에게 접근하는 가장 근원적인 밑바탕이 된다.
2. 인간과 외계인의 소통 방식은?인간과 전혀 다른 삶과 사고 방식을 가졌을 외계인들과 어떻게 소통을 할까? 인간이 인간의 언어를 바탕으로 사고를 한다면, 외계인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루이스는 언어학자답게 가장 단순하지만 성실한 방법으로 그들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바로 우리의 언어를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 사피어-워프 가설에 기반하여 생각하자면, 이는 즉 인간의 사고방식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인간이 헵타포드'어'를 학습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인간의 언어가 선형적이라면 헵타포드어는 비선형적이다. 일련의 원으로 그려진 그들의 언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문장이다. 작중에서 이안은 이들 헵타포드들이 수초만에 이러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을 경이로워하는데, 이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모습을 드러나듯, 헵타포드들의 '비선형적인 시간'에 기인한다. 인간이 과거와 현재, 미래로 규정하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동시에 일어나는 어떤 현상이므로, 인간에게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장은 동시다발적이며 즉각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헵타포드 어는 또한 비음성적이다. 헵타포드들의 언어는 왜 음성(소리)과 유리되어 있는걸까? 그것은 아마 음성이라는 것은 선형적 시간의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는 언제나 처음과 끝이 있다. 그러나 문자는 동시적이다. 인간의 문자에는 한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헵타포드어는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를 한 눈에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들은 별다른 도구 없이도 그러한 문자를 자유롭게 쓰고 지울 수 있으니 음성은 그들에게 그다지 필요한 언어수단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헵타포드들은 대체 왜, 인류에게 왔는가.
3. 새로운 언어의 힘: 불안정함의 극복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 애봇과 코스텔로는 '인류에게 '무기'를 전해주러 왔노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무기란, 인간이 사로잡혀 있는 선형적 시간의 틀을 깬 새로운 언어를 전수하는 것.
언어를 전수받는 것이 왜 무기가 될 수 있나?
루이스는 헵타포드어를 익히면서 끊임없이 잔상을 본다. 영화 속에서는 마치 회상을 하는 것처럼 보여지던 장면들은 사실 루이스가 앞으로 겪을 일들이다. 즉, 헵타포드어를 학습함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어떤 초월적인 시간관념을 가지게 된 것. 코스텔로는 이러한 전수가 3000년 후의 미래에 인류가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렵다. 헵타포드어를 배운 것은 루이스 개인이 아닌가. 심지어 루이스는 본인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눈치다. 다수가 아닌 개인이 배운 언어가 과연 인류 전체라는 거대한 집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단편적 장면들을 살펴보면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yes가 될 것이다. 섕 장군과의 만남에서의 휘장, 헵타포드어 책을 낸 장면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리는 루이스가 결국 헵타포드어를 완전히 해독해내고, 이런 성과를 통해 헵타포드어를 인류에게 전수하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자, 다시 헵타포드어가 어떤 무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헵타포드어를 인류에게 전수한다는 건, 인류가 헵타포드어를 배운다는 것은 인류가 선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비선형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먼 미래에, 모든 인류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알고 파악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애봇과 코스텔로가 말하듯, 인류는 헵타포드들을 돕게 될 것이다.
왜? 지구 상에 떠있는 미확인 비행물체에 그토록 벌벌 떨며 저희들끼리 다투었던 인류가 과연? 이란 질문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크린 너머의 인류는 어떤 미지의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혼비백산하여 혼란에 빠진다.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왜냐고? 그들이 대체 뭐하는 존재들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12개의 서로 다른 국가들이 서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얼마간 통신이 두절되었을 때, 전세계는 혼돈에 빠지지 않았던가.
이렇듯 불확실성은 인류에게 공포와 절망, 그리고 혼란을 야기한다.
선형적인 삶에 놓여있다는 것은 미래에 어떠한 사건이 발생할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눈을 가리고 돌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은 일이다. 두려운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헵타포드어의 전수는 인류가 가진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이미 예정된 삶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절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루이스가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딸이 죽음을 맞이할 것, 남편은 끝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와는 결국 이혼할 것이라는 것 등의 사실을 미리 알아버리는 것처럼 미래는 때론 절망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루이스는 기어코 그녀의 삶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피하지 못해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래의 한켠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딸과 남편이 있고, 그녀는 그러한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이러한 운명에 대한 순응은 루이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토록 독불장군처럼 굴던 섕이 단 한 통의 전화로 마음을 바꾼 것이 그러하다. 선형적인 시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던 불안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작품이 보내는 메시지는 희망적이다. 인류는 헵타포드어를 익힐 것이고, 우리가 본디 가지고 있던 시간적 흐름에서 벗어난 다른 차원의 사고를 영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관용과 포용이라는 것 또한 싹트리라. 헵타포드가 3000년 후에 인류가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알지 못함에서 오는 고통에서 해방되어 평안을 찾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무척 불교적인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미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칼뱅의 예정설이 떠오르기도 한다. 현자의 돌을 접한 연금술사의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삶을 살았다던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이집트의 미라, 한국의 조상신 숭배 등)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산다는건 어떤 느낌일까?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선형적 세계를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거대한 불가사의 앞에서 인류는 한 없이 작고 초라하며, 나약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루이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헵타포드어를 해독해내고, 소통하고자 노력한다. 루이스가 지구 반대편의 중국까지 전화를 건 것, 이안이 루이스의 해독을 돕는 것, 루이스가 헵타포드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자 발벗고 나서는 것. 그러한 소통의 장면들이 그를 보여준다.
어쩌면 헵타포드들은 인류에게 있는 어떤 '씨앗'같은 걸 본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그들의 접촉은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화점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작중 나오는 '논제로섬 게임'이라는 개념은 루이스왈, 윈윈(win-win), 협력 등과 유의어인데, 이는 결국 이 작품이 소통에 대해 가지는 개념과 일치한다. 소통은 어떠한 이득을 갈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루이스와 애봇, 코스텔로가 서로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자 했던 태도와 그를 통해 서로의 사고를 이해하고 알아가게 된 일련의 과정들은 소통이란 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쯤에서 작품의 제목을 다시 돌아보자. 'Arrival'. 이는 도입, 또는 도착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다. 시작과 끝. 말하자면, 낯선 외계 생명의 방문은 ufo의 도착이자,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재미있는 제목이다.
-
-
-
- 영화 <피넛 버터 팔콘> 메인 예고편
레슬러가 되고 싶은 잭은 보호소를 탈출해 과거로부터 도망쳐 나온 어부 타일러의 배에 숨어 들게 된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지만 타일러는 레슬러 ‘피넛 버터 팔콘’이 되고 싶은 잭을 동생처럼 보살피며
레슬링 학교가 있는 ‘에이든’으로 향한다. 이 여정에 잭을 찾아나선 보호소 직원 엘리너가 합류하고
거리에서 잠을 자고 뗏목으로 강을 건너는 거친 여행이지만, 셋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희망을 피워간다.
하지만 타일러가 도망쳐온 과거는 다시 그들의 앞을 막아서고 마는데…
-
- 넷플릭스 <베를린> 공식 예고편
세상에는 거부할 수 없는 강도 범죄가 있다. 어떤 사랑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종이의 집》 세계관의 《베를린》, 넷플릭스에서 12월 29일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