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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2021-03-05 00:00:00

그래도 해야지 어떡해 - <야구소녀> 리뷰

<야구소녀>, 최윤태 감독

*스포일러 포함

 

살다 보면 세상일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 많다. 노력이 전부 결과를 이어지는 건 아니며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게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막막한 괴로움에 포기를 해야 하는 건지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건지 매 순간 갈팡질팡 하게 된다. 하지만 그저 모든 생각을 다 지우고 앞으로 묵묵히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때가 온다는 전제로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보다 그저 한 걸음 내디뎌 보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때도 있다.

<야구소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가 그것을 극복하는 서사도 아니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불타는 열정으로 모두를 감동시키는 스토리도 아니다. 주수인은 구속 150킬로가 넘는 '남자를 뛰어넘는' 천재도 아니다. 여자 선수를 부원으로 받아 학교의 이름을 알리려 한 고교 야구단이나 그녀를 프런트에 영입해 야구단 이미지 마케팅을 하려 했던 구단들은 그녀의 재능이나 열정에 크게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주인공은 여자 선수로서 던질 수 있는 만큼의 구속으로 공을 던졌고 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라서 할 수 있는' 것에 치중했다. 그리고 학교와 프로 야구단은 그녀를 과대평가 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고 딱 실제로 지닌 실력만큼 평가하고, 여자 선수라는 상징성을 자신들이 이용하는 대가로 적절한 연봉을 제시한다. 이 영화의 기승전결은 주수인도, 그녀의 부모님도, 영화를 보는 관객도 모두가 만족하는 레벨에서 딱 끝난다.

그러니까 사실, 복권에 당첨되고 싶거나 불로소득을 벌고 싶다는 한탄들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바라는 것은 적정 수준의 합리성이다.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고, 기대한 만큼 결과를 내는 것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합리성이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며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길들도 내 길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즉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딛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성장이라 부르는 그것은 복권 당첨보다도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다. 세상은 최소한의 합리성도 우리에게 보장해 주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아직 오늘의 몫으로 이뤄내야 할 성장이 숙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수인이 '여자 중에 제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여자 구단으로 가기 싫었던 이유는 뭘까?

여성으로 태어난(그게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냥 가장 보편적으로)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해할 것이다. '여자 치고 털털하다' '여자 치고 잘한다' 같은 말은 몇 백번을 들을수록 기분만 나쁘다. 여자라는 집단을 통째로 비하하면서 그 집단에 속한 너는 집단의 부정적 속성에 물들지 않은, 긍정적으로 구분되는 개체라는 말인데 이게 어떻게 칭찬인가? 

하지만 영화 속에서 수인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항변도 설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공을 던진다. 왜냐면 그러고 싶으니까. 자신이 남자라면 듣지 않았을 말들에 속이 상하고 '현실'과 '경제적' 문제를 보라고 윽박지르는 세상이 짜증 나지만, 어쨌든 거기에 순응해서 살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계속 공을 던진다. 그리고 그것이 수인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라고 생각하던 영화의 관객은 트라이아웃에서 정제이미를 만나는 순간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수인과, 나와, 다르겠지만 비슷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구나, 같은 안도감이다. 꼭 서로 팔짱을 끼고 같은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그 안도감에 너도 이 자리 오기까지 참 뭣 같은 일 많이 겪었겠구나, 라는 약간의 공감과 연민이 섞인 감정도 연대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구속을 더 이상 올릴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인정하게 된 시점에서 수인은 진태의 도움을 받아 너클볼을 연습하기 시작했고, 아빠는 더 이상의 시험 응시를 포기하고 엄마는 수인을 응원하고 지원해 주기로 했고, 수인이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여자 선수들의 지원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흔히들 문이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고 한다. 글쎄, 실제의 삶은 그것보다는, 문이 다 닫히면 닫힌 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에 가깝다. 나의 존재가 아직 존재하는 한 정말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뭘 어떡해, 그래도 해야지.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없다고 해도 지금 내가 알 수 없는 부분 때문에 모든 걸 미리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세상일을 하나씩 지워나가다 보면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지만 오늘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불확실하고 불안하고, 그래도 어떡해? 그냥 해야지.

작성자 . 김수지

출처 . https://brunch.co.kr/@andgoodluck/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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