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4-11-14 15:38:30
내 이름은 리들리 스콧. 거장이죠
영화 [글래디에이터 2] 리뷰
이 글은 영화 [글래디에이터 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결혼이나 승진 같은 이벤트일 수도 있고, 인생의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얻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순간이 만약 배우에게 다가온다면. 당연히 자신의 존재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역할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러셀 크로우라는 배우에게는 극 중에서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원수인 황제 앞에서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내뱉는 순간이 바로 그렇게도 기다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검투사들 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모습은, 화면상에서 봤을 때 상대 배우들에 비해 비교적 작은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압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의 극 중 이름에도. 그리고 배우로서의 이름에도 남다른 무게감이 생긴 뒤에 느낄 수 있는 후광효과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후광 효과를 만들어 낸 위대한 감독 리들리 스콧에게도 [글래디에이터]는 매우 특별한 영화다. 24년이 지난 지금에도 막시무스의 이름을 들으면 전율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속편을 선보이며 자신의 이름값뿐만 아니라 영화의 이름값도. 게다가 불세출의 영웅 막시무스에게도 톡톡이 값을 치러줘야 하기 때문이다.
감독님 개연성 어디 갔어요
사진출처:다음 영화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말 잘 만든 영화라고 해도 겨우 본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그 우려(?)는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현실이 되어버렸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1편에서 따왔지만 안타깝게도 개연성과 임팩트는 24년 전 영화에서 신나게 써 버려 이미 멸종한 것처럼 느껴진다.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루시우스(폴 메스칼)의 눈에 분노가 있다고 말한다. 전쟁 중 자신의 아내를 비롯한 시민들을 잃었으니 분노의 계기는 명확하다. 그러나 분노의 방향과 깊이는 애처로울 정도로 얕아서 영화 상에서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힘들다. 그나마 쌓아 올린 나노단위의 분노조차도 결국 마르쿠스(페드로 파스칼)를 경기장에서 만나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덕분에 영화의 초반부에는 이렇게 말 잘 듣는 전쟁노예가 있었던가.라는 어이없는 생각마저 하게 한다.
초반부에서 자신의 뿌리를 다시 한번 알게 된 각성한 주인공이 후반부에는 독자적으로 "로마황제 프로듀스 101"을 찍고 있는 마크리누스에게로 칼끝을 겨누는 과정도 그다지 인상적이라거나 매끄럽지 않다.
그 연결고리로 선택한 것은 쌍둥이 황제의 존재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 해봐야 화장을 무당처럼 하는 바람에 밤에 마주치면 무섭게 보이겠다 정도일 뿐. 인간성의 잔인함을 강조하는 것 외에 주인공과 크게 관련된 이벤트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 황제의 존재 이유는 마크리누스의 귀걸이보다도 작고 하찮게 보이고, 그로 인해 과연 그만큼의 품을 들여서 이들을 없앨 이유가 있었던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진출처:다음 영화
또한 2편이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주인공의 태생적인 한계에서부터 온다.
주인공에게 고유함과 더불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막시무스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루시우스는 자신의 이름보다는 아버지의 이름 덕에 조금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등장하는 극초반부의 장면은 정말 많은 정보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것도 전장을 둘러보는 막시무스를 향해 인사하는 동료 병사들의 표정으로. 그를 향한 믿음과 존경. 전우애와 의지를 꽉꽉 채운 눈빛으로 말이다.
막시무스는 촉망받는 장군이었으며 분노를 장착한 정치게임의 패배자였고. 죽음이 그를 덮친다 해도 무릎 꿇기는커녕 어서 나를 갈기갈기 찢어보라며 포효할 인물이었다. 잔인한 전투 장면이 없이도 그의 걸음걸음마다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루시우스에게 주어진 서사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너무도 옅은 데다 유약했고. 그 덕분에 루시우스는 아버지에게 그저 만담실력을 물려받은 호탕한 사람 정도로만 느껴진다.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힘이 실리지 않는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그는 로마 제국의 단 하나 남은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핏줄을 아무리 영화라지만 살해할 리는 없다.
우리는 막시무스가 그토록 살아남기를 원했고. 화면 속에서 시간이 흐를 때마다 죽어가는 그를 보며 눈물과 안타까움을 삼켰지만. 아들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온 세상 인물이 다 죽는다 해도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테니. 믿는 구석이 애초에 있는 사람의 전투가 간절해 보일 리가 없다.
거장의 장기자랑 타임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이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십분 살려내 화면과 남은 시간 가득 채워내는 것.
혼란스럽고 실망스러운 초반부가 지나고 나면 후반부에는 우리가 감독에게 기대했던 모든 장면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관객의 눈에 안긴다. 소위 "큰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가진 요소들인 거대한 스케일과 장엄한 장면에서 갖추어야 할 카타르시스들을 모조리 느낄 수 있다. 기존의 검투 장면들 역시도 작정한 듯 화려하게 준비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거의 장면들은 아름답다 못해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하다.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독은 지구상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 밖에 없을 것이며. 그의 존재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후반부 덕에 앞부분의 불쾌함이 조금은 날아간다.
물론 영화가 주는 장대함과 압도당하는 힘이 스토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장면 자체가 주는 웅장 함이라는 것은 아쉽지만.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보상은 완벽히 가능하고. 정해진 결말로 가는 그 길마저도 조금은 기대로 채울 수 있다.
마치면서
내가 존 스노우 시절(대충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뜻) 두려움이 너를 구할 것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꽤 오랫동안 내겐 미스터리와도 같았다.
한낱 평범한 사람인 나 조차도 두려움을 이토록 피하고 싶은데.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버린 작품의 감독에게 이번 영화는 얼마나 피하고 싶은 과제였을까.
두려움에서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거장은 스스로가 가진 모든 "치트키"를 활용했다. 주어진 두려움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한 덕에. 이 두려움의 바다에 빠졌을(?) 거장은 뭍까지는 떠밀려 올 수 있었다.
머금은 모래를 내뱉고 따끔거리는 바닷물이 코에서 흐르는 걸 느끼며 진절머리를 쳤겠지만. 비로소 폐 한가득 신선한 공기를 마실 때는 안심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결과 또한 아마도 조금은 매콤하지만 다행인 평이될 것이다.
또한 다음번에 두려움의 바다에 빠졌을 때 무사할 행운이 다를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의 TMI]
1. 베이글 그만 먹고 싶은데 그게 안 됨
2. 아침 운동 너무 힘들다.
3. 너무 추워서 난로를 사고 싶은데 전기세가 걱정된다.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munalogi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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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풋함과 맞바꾼 애틋함
* <동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동감 (2022)
감독: 서은영
출연: 여진구, 조이현, 김혜윤, 나인우, 배인혁
장르: 로맨스, 판타지
상영시간: 114분
개봉일: 2022.11.16
1999년의 대학생 ‘김용(여진구)’과 2022년의 ‘김무늬(조이현)’. 두 사람은 우연히 HAM 무전기를 사용하다가 23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거짓말 같은 통신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각자 95학번과 21학번이라고 주장하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그저 누군가의 심술 궂은 장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차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며 얼굴도 모르고, 실제로 만날 수도 없는 교신기 너머의 상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두 남녀는 가까워진다.
‘김용’은 기계공학과 신입 여학생 ‘한솔(김혜윤)’에게 첫눈에 반한다. 여학생이 귀한 학과에 당돌한 성격에 예쁘기까지 한 학생이 들어왔으니 학교 생활에 따분함을 느끼던 ‘용’에게 활력을 가져다 주기 충분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성격까지 좋은 ‘용’은 나름 학교의 인싸지만 연애 앞에서는 숙맥이나 다름 없었고 20년이나 앞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무늬’는 무전을 통해 여심 저격 방법을 코칭해 준다. 조언은 성공적이었고, ‘김용’은 ‘한솔’과 꿈에 그리던 연애를 시작한다.
자신의 감정에 직진할 줄 아는 ‘김용’과 달리 ‘무늬’는 2022년 현재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고민을 안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가면 인생이 잘 풀릴 줄 알았지만 대학에 가는 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진로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은 물론 오랜 남사친 ‘영지(나인우)’를 두고는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무전을 통해 고민을 토로하며 답답함을 털어내고, ‘김용’ 역시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 결정하지 못했다는 비슷한 고민을 듣고는 동질감을 느낀다. 쉽게 상념을 풀어 놓을 데가 없던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더 많은 시간을 무전으로 함께한다.
그러나 23년이라는 시간 차를 둔 소통은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무전 통신을 두고 대화만이 오갔을 뿐이지만 각자가 존재하는 시대상의 흔적들도 교신기를 따라 함께 이동했다. 처음에는 1999년도에 사는 ‘김용’이 이해할 수 없는 유행어 정도만이 이동할 뿐이었다. ‘김용’은 자신이 40대가 되어서야 뒤늦게 알 수 있을 법한 신조어를 이해하며 박장대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래에 벌어지게 될 일들을 선택적으로 들을 수 없던 ‘용’은 절대 미리 알아서는 안 될 사건까지 알게 된다. 과거 ‘김용’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쓰던 ‘무늬’는 ‘용’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고, 연애를 시작한 이후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그의 인생은 완벽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동감>은 2000년 개봉한 ‘유지태’, ‘김하늘’, ‘하지원’ 주연의 <동감>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남녀가 교신한다는 핵심적인 설정만 그대로 유지한 채 작중 배경만 ‘1979년-2000년’에서 ‘1999년-2022년’으로 바꾸었다. 또한 원작에서는 여주인공을 맡은 ‘김하늘’이 과거를 살아가고, 남주인공을 맡은 ‘유지태’가 현재를 살고 있던 반면 리메이크 작에서는 남주인공인 ‘여진구’가 1999년 과거를, 여주인공 ‘조이현’이 2022년 현재를 맡았다.
중반까지의 진행은 매우 자연스럽고 캠퍼스 로맨스 장르의 풋풋함이 뚝뚝 떨어진다. 신입 여학우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랑꾼으로 분한 ‘여진구’와 수줍음과 당찬 면모를 모두 갖춘 매력적인 ‘한솔’ 캐릭터를 소화하는 ‘김혜윤’의 연기력은 작중 오글거리는 대사마저 매끄럽게 소화할 정도로 뛰어나다. 두 사람이 학생회관 건물 앞에서 처음 만나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썸을 타는 과정은 여느 캠퍼스 배경의 멜로 드라마와 다를 것이 없지만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력이 익숙한 스토리라인 속에 재미를 불어넣는다. 특히 로맨스의 감정선을 단독으로 이끌어가는 ‘여진구’의 힘이 대단하다. (‘방가방가’ 같은 최악의 대사도 맛깔 나게 소화하는 치명적인 매력이란.)
문제는 <동감>이 단순 캠퍼스 로맨스 장르의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20년의 간극을 두고 있는 남녀가 짝사랑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동감’을 느끼고, 이 과정을 단 한 번의 대면 없이 오로지 무전 상의 목소리로만 교류한다는 점에서 애틋함을 자아내는 게 핵심 주제이자 중요한 감정선이다. 하지만 원작과 시간적인 배경만 다르게 설정했을 뿐인데 남녀 주인공의 소통은 그리 애틋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용’과 ‘한솔’의 로맨스는 풋풋하면서도 몰입감 있게 그려졌지만 ‘무늬’와 ‘용’의 소통은 전반적으로 어색하기만 하다. ‘베프’, ‘이불킥’ 같은 철 지난 유행어들로 세대 차이를 보여주려는 대사들은 억지스럽기까지 하며 ‘조이현’의 연기력이 ‘여진구’에 비해 부족한 탓에 집중을 흐린다. ‘김혜윤’과 ‘여진구’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감초 같은 매력을 더한 ‘배인혁’이 등장하는 과거 신은 캠퍼스물 특유의 유쾌함과 청춘의 건강한 에너지가 돋보이는 반면 ‘조이현’과 ‘나인우’가 합을 이루는 신은 완성도 낮은 웹드라마를 보듯 부자연스럽다. 후반부 ‘무늬’의 감정선이 매끄럽게 전달되지 않은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1999년의 남자와 2022년의 여자가 오래된 무전기를 통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퍽 판타지 같은 설정이다. 2000년에 개봉한 원작 역시 이러한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낭만적인 색채를 부각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2022년의 <동감>은 기술이 너무도 발전한 세상의 ‘무늬’가 ‘김용’의 흔적을 척척 찾아내고, 비현실적인 상황의 흐름을 두 사람이 쉽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판타지의 색깔이 옅다. 특히 ‘용’의 짝사랑 이야기와 달리 실제 있을 법한 Z세대 대학생의 고민을 다룬 ‘무늬’의 이야기는 낭만을 반감시키고 현실성을 덧입히는 요소다. ‘HAM 무전기’와 ‘공중전화’, 1990년대 음악 등 향수와 감성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품들만 들고 왔을 뿐 각 장치들은 애틋함이나 아련함을 연출하지 못한다. 특히 주인공이 소나기를 맞으며 이별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김광진’의 ‘편지’를 사운드트랙을 사용한 것은 촌스럽고 조악하기까지 하다.
원작에 비해 풋풋하고 밝은 색감을 더하는 데는 성공 했는지 몰라도 판타지 로맨스의 애틋함을 살리는 데는 실패했다. 원작의 장치들을 그대로 따라가느라 리메이크 작품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하는데 일부 한계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후반부에 갑작스레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것도 뜬금없다.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 첫사랑에 실패한 ‘용’의 이야기를 보여주고는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진심은 언제나’라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게 과연 맞는 것일까. ‘영지’를 향한 ‘무늬’의 진심이 통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작중 단 한 번도 아련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등장인물들만이 ‘동감’을 느끼고, 관객은 작품에 전혀 ‘동감’할 수 없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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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선지 위에 그려낸 실험정신
이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 및 관람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시험기간 도중에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시사회에 다녀왔다. 종강하고서야 쓰는 리뷰...!
<석양의 무법자>를 제외하면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맡은 영화를 많이 본 적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먼저 영화 시작하기 전에 영화사 진진 관계자분이 나오셔서 간략히 영화와 이벤트 설명해주시고 마지막으로 '오늘 밤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귓가에 엔니오의 음악이 맴돌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해주신 게 정말 좋았다. 멘트 하고 가신 건데 뭔가 더 세심한 기획 같은 느낌을 받았다ㅎㅎ
앞서 쓴 것처럼 본 영화가 거의 없었고, 스코어나 클래식에 관한 지식도 정말 부족한데다가 시험기간에 바닥난 체력 + 다큐멘터리라는 점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울까봐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실제보다 짧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먼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이 보더라도 영화음악가로서의 엔니오, 그리고 영화음악으로써 마에스트로가 된 그에 대해 많은 걸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갈수록 8-90년대의 스코어(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피아니스트의 전설>)들이 나오면서 엔니오의 음악이 할리우드 음악의 전형, 그리고 '영화를 보지 않아도 들어본 적은 있는' 아이코닉함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그가 '스타일'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넬이나 디올이 새로운 '핏'을 만든 것처럼, 예술가로서 굉장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영화상으로는 후반부이기도 하고 나에겐 귀에 익은 음악들(그리고 그 당시 영화에 많이 나오는 형식들)이어서 무감해질 수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엔니오가 커리어의 정점에 다다라서 끝내 스타일이란 것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워 보일수록 그 사람이 일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 그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예술, 정치적인 철학이나 특별한 대의보다는 자신의 원칙과 작업으로서 음악에 접근하고, 실험할 기회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협업하는 과정이 그가 이미 영화 음악의 거장이 되었을 시점까지도 계속해서 드러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연스레 다큐멘터리 또한 위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일하는 방식과 정체성에 대한 작품처럼 읽힌다. 엔니오가 가진 겸손함도 자연스레 영화에 묻어난다.
영화 초반부부터 편집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편집상을 벌써 하나 받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잘 모르는 관객이 보더라도 영화음악가로서의 엔니오에 대해 많은 걸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영화로 거듭난 데에는 편집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이건 실제 엔니오의 인터뷰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인터뷰와 오케스트라 영상, 영화의 몽타주가 일정한 순서대로 배치되었고 엔니오가 인터뷰 도중에 흥얼거리면서 곡을 설명하는 장면을 영화 장면과 함께 사용하면서 그의 정체성(영화 음악가)을 강조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지알로부터 세르지오 레오네와의 작업, 8-90년대 할리우드 영화, 타란티노와의 협업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작업량을 매끄럽게 담아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덧붙여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이러한 성공적인 편집은 적절하게 배치된 인터뷰와 에피소드로 완성되었다. 예컨대 스탠리 큐브릭 특유의 '아니면 말고!' 하는 반응 대문에 엔니오와의 작업이 불발된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는 관객인 내가 더 아쉬워질 지경이었다.
다만 영화의 극후반에 다다라서는 조금 더 깔끔하게 마무리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평가를 나열하는 식으로 여러 영화 및 음악인들의 인터뷰를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막을 내린다. 물론 엔니오를 기리고 훌륭한 예술가에 대한 찬사를 보내려는 것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앞부분에서 관객 스스로가 그의 예술적 성과를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고도 친절한 편집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칭찬 세례를 마지막에 전부 배치한 것이 영화의 막바지를 약간 느릿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실제 영화 푸티지를 극장에서 함께 경험할 수 있다는 점, 개인적으로는 거장 예술가를 새로 알게 해준 친절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영화라는 점이 정말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다. 개봉하면 다시 극장을 찾아 관람하게 될 것 같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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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 영화와 함께 돌아온, 넷플릭스 7월 공개 예정작
안녕하세요! 씨네랩이 소개해드린 넷플릭스 6월 공개/종료 예정작, 잘 감상하셨나요?
6월에는 많은 명작들이 종료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겼죠.
이번 공개 예정작에는 여름인만큼, [공포/스릴러] 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요.
넷플릭스 공포 영화와 함께 올 여름 더위를 같이 날려버리시길 바랄게요!
그럼, 7월 공개 예정작! 함께 보시죠!
1. 제8일의 밤
미스터리, 스릴러 Ι 한국 Ι 115분
공개일 : 21.07.02
감독 : 김태형
출연 : 이성민, 박해준, 김유정
" 붉은 달이 뜨는 밤, 봉인에서 풀려난 ‘붉은 눈’이 7개의 징검다리를 밟고 자신의 반쪽, ‘검은 눈’을 찾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제8일의 밤, 그 둘이 만나 하나가 되면 고통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지옥의 세상이 될 것이다.
“때가 되었구나. 전해라… 놈이 왔다”
북산 암자의 ‘하정 스님’(이얼)은 2년째 묵언수행 중인 제자 ‘청석’(남다름)에게 ‘깨어나서는 안 될 것’의 봉인에 관한 전설을 들려주며, ‘선화’를 찾으라고 유언을 남긴다. ‘청석’은 주소지만 적힌 종이를 들고 길을 떠나던 중 사리함을 잃어버리고 그곳에서 정체모를 소녀 ‘애란’(김유정)을 만나게 된다. 한편, 괴이한 모습으로 죽은 시체들이 발견되고, 강력계 형사 ‘김호태’(박해준)와 후배 ‘박동진’(김동영)은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괴시체들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수사를 이어간다.
“놈이 필요로 하는 걸 없애는 거다”
세상을 등진 전직 승려 선화, ‘박진수’(이성민)는 귀신을 천도해야 한다는 숙명을 외면한 채로 살아간다. 돌연 그를 찾아온 ‘청석’으로 인해 애써 모른 척해온 과거와 마주하는 ‘진수’. 그러나, ‘깨어나서는 안 될 것’의 봉인이 풀리는 것을 막아야만 하는 ‘진수’는 ‘그것’이 눈을 뜨기 위해 밟아야 할 7개의 징검다리 중 존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징검다리를 찾아 길을 나서는데...
끝을 알 수 없는 밤의 세상이 열린다! "
2. 피어 스트리트 파트 1 :1994
호러, 스릴러 Ι 미국 Ι 107분
공개일 : 21.07.02
감독 : 리 자니악
출연 : 키아나 머디라, 올리비아 스콧 웰치, 벤저민 플로레스 주니어
" 연이어 잔혹한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작은 마을. 공포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마녀의 복수라는 설이 나돈다.
악의 실체를 캐내려는 10대들. 수 세기에 걸친 어둠의 심연을 감당할 수 있을까. "
3. 트롤헌터 : 라이즈 오브 타이탄
애니메이션, 액션, 어드벤쳐 Ι 미국,멕시코 Ι 106분
공개일 : 21.07.21
감독 : 조핸 매트, 프란시스코 루이즈 벨라스코, 앤드류 L. 슈미트
출연 : 스티븐 연, 닉 오퍼맨, 에밀 허쉬, 디에고 루나
" 어둠의 세력이 다가오고 있다. 지구를 파괴하고 세상을 손에 넣으려 한다.
그에 맞서 일어선 <트롤헌터> <3언더> <위저드>의 영웅들.
굳게 손 잡은 그들을 맞이하라. 운명을 걸고 싸워라 "
4. 블러드 레드 스카이
액션, 공포, 스릴러 Ι 독일 Ι 121분
공개일 : 21.07.23
감독 : 피터 쏘워스
출연 : 페리 바우마이스터, 알렉산더 셰어, 카이스 세티
" 의문의 병을 앓는 여자. 치료를 위해 어린 아들과 밤 비행기에 오른다.
이륙 후, 비행기가 테러리 스트들에게 점령당하자 여인은 생존 싸움을 시작한다.
그간 힘겹게 숨겨온 어둠의 힘을 뿜으며 "
5. 클래식 호러 스토리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 Ι 이탈리아 Ι 95분
공개일 : 21.07.14
감독 : 로베르토 데 페오, 파올로 스트리폴리
출연 : 마틸다 안나 잉그리드 러츠, 프란체스코 루소, 펩피노 마조타, 윌 메릭, 율리아 소볼
" 공유 차를 타고 가던 다섯 명의 동승객.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발생해 모두 정신을 잃는다.
눈을 떠보니 어딘지 모를 숲속. 대체 어떻게 여기 오게 됐을까. 우선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 한다 "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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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력 미친 사극 영화 추천 '사도' 후기
사도
15.09.16 개봉
드라마, 12세 관람가
한국 ,125분
감독: 이준익
출연: 유아인, 송강호 등
실화, 심지어 역사를 다룬 일인 만큼 리뷰를 쓰는 것도 쉽지 않네요
부끄럽지만 저는 역사에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거든요
연모, 백일의 낭군님을 제외하고는
사극 드라마 영화를 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저를 사극의 세계로 이끈 '사도'!
도전했다 하차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었는데
참고 보길 잘한 것 같아요
역사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한 계기를 만들어 준 영화입니다
영화 '사도'는 '임오화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임오화변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서인(평민)으로 폐위시킨 뒤
뒤주에 8일간 가두고 굶겨 죽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파국을 맞이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왕위를 대한 영조와 사도세자의 태도 차이 때문입니다
영조는 당쟁 속에서 간신히 왕이 되었기 때문에
세력의 균형을 맞추는 데 집중하던 반면
세자는 눈앞의 개혁해야할 문제들을 따지기 바빴습니다
세력 갈등은 겪어 본 적도 관심도 없는 사도세자였기에
둘의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 갈등이 더욱 깊어졌겠죠
게다가 세자는 공부보다 그림, 소설, 무예를 더 즐겼습니다
어릴 때부터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누구보다 세자에게 힘을 기울였던 아빠 영조로서는
이를 납득하기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나를 자식으로 생각했소!"라는 말이 나온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걸 요즘 말로 하면 극성부모라고 하려나요
실제 영조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웃으며 대화하다가도 세자에게 돌연 화를 내는 일이 잦았고
이로 인해 세자가 20대가 된 후에는
옷 입기를 꺼리거나 특정 옷감을 거부하는 의대증이 생겼다고 해요
의복을 갖춰 입으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죠
영화는 병렬적 구조,
즉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8일간의 시간과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를
두 개의 에피소드를 교차하며 보여 줍니다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 있지만
대중문화인 영화이기에 관객을 끌어모으는 것도 물론 중요하잖아요?
그런 면에 있어서 구성을 잘 선택했다고 봅니다
세자가 태어났을 때부터 죽는 날까지
직렬적 구조로 진행했다면 사실 지루했을지도 몰라요
근데 처음부터 뒤주에 갇히는 사도세자를 보여 주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궁금하게 만든 후
엔딩 부분에선 눈물이 나오게 만들거든요
사실 눈물이 나오게 만든 건
유아인 님의 열연 덕이 아닐까 싶지만요
이렇게까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지 정말 몰랐습니다...
혹 아직 '사도'를 보지 않으신 분들이 있다면
정말 꼭 보시길 강추합니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사도'는 픽션이 거의 없이 역사를 많이 반영한
최고의 영화라고 극찬한 바 있다네요~
*스토리: 5/5점
*연출: 5/5점
*영상미: 5/5점
*OST: 1/5점
*연기: 5/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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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HD의 미학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이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포함한다는 것을, 친구들끼리 단편영화를 찍으면서야 실감했다. 한 장소, 한 가지의 소품, 한 명의 배우를 화면에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주말에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평일에 회사에 가서 하는 일들, 그러니까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 받고 회의를 하고 영수증을 모으는 일을 수십 번이고 반복해야 한다. 이렇게 준비한 현장에서는 온갖 장비를 이고 지고 촬영 내용을 기록한다. 필요하다면 이것도 수십 번 반복한다. 그러면 비로소 어떠한 자국도 없이 매끈한 작품이 완성되는 멋진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스타 배우들과 일하면서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영화를 작업해온 미셸 공드리가 팬데믹 이후 영화에 대한 영화를 내놓았다.<공드리의 솔루션북>은 영화 감독인 주인공 ‘마크’가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직접 적어 내려가는, 말 그대로 해결책 목록이다. 그는 이제 막 촬영을 마친 영화의 제작을 거절당했다. 자신과 일하던 파트너마저 회사의 편을 들자 그는 제작과 편집 담당인 동료 둘과 필름을 전부 챙겨 시골의 고모 집으로 도망친다. 의욕을 잃은 그는 복용하던 약을 단숨에 끊는다. 그러자 그가 유년기를 보낸 동네에서 아이디어가 끝없이 튀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던 도중 빈 공책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솔루션들을 적기 시작한다.
마크는 관객조차 진력나게 할 정도로 제멋대로이다. 자신을 배신한 동료에게는 분노하고, 회사에서 가장 귀여운 여자 직원과는 어떻게든 잘 되고 싶어 하며, 영화 음악을 작업하면서 동시에 다음 작품도 찍고 싶어 한다. 완성 전에는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키면서도 편집에 관여해야 하는 고집도 부린다. 이 와중에 동네 대표도 하고 싶고, 고모의 질병을 돌보고 생일 파티도 열고 싶어 한다. 생각과 계획은 너무 많고 그것을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공드리는 마치 ADHD를 앓는 사람들의 행동처럼 연출했다. 예컨대 마크는 옛날 물건들 중 솔루션 북을 발견하고, 거기에 쓸 테이프를 찾으러 다른 방에 들어 갔다가 솔루션 북은 까맣게 잊고는 종이를 오려 스톱 모션 장면을 찍기 시작한다. ‘증상’에 가까운 이 행동은 미셸 공드리 특유의 꿈 같은 연출, 즉 개연성이 없어 보여도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그의 특기와 잘 맞아떨어진다. 특유의 연출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또 다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하는 이 영화는 ADHD 증상을 미학으로 바꾸어 놓는, 베테랑 감독의 영화 언어를 보여 준다.
정신 없는 편집 과정에서 마크는 자신을 지지하는 동료들과 함께 차근차근 할 수도 있는 것을, 괜히 일을 키우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아이디어를 들이미는 마크와 당장은 안 된다는 동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충동을 참지 못해 물건을 내던지거나 소리치고는 뒤늦게 사과를 하느라 바쁘기도 하다. 그럼에도 모두들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한다. 외딴 시골 동네에서 음악 스튜디오를 찾아 내고 오케스트라를 구하고, 심지어 영사를 척척 준비해 마을에서 상영회를 여는 것은 마크 옆에 있는 샤를로트와 실비아다. 그들은 버겁지만 이 모든 노동과 황당한 아이디어를 감당한다. 이 일을 대하는 태도는 각자 다소 달라 보이지만 이들 모두의 목표는 단 하나, 영화를 끝까지 마치는 것이다.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영화 <무드 인디고>를 제작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 감독으로서의 자전적인 영화이자 자아성찰이 담긴 코미디이다. 주인공 마크가 제멋대로 굴고 끝내는 옆에 머물던 사람들마저 떠나가게 할 정도로 대책 없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솔직하고 자조적인 유머를 구사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사랑을 발산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한계는 바로 선의와 신뢰에 의한 관계들이 없다면 마크는 예술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냉혹한 사실이다. 상품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예술로서 영화를 보아주는 동료들과 자신의 엉뚱한 면을 이해해주는 고모 드니즈가 없다면 그는 수많은 아이디어에 짓눌리다가 영영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들은 작은 마을이 계속 굴러가듯이, 여러 사람의 노동이 모여 완성되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멋진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런 조건 없이 마크를 사랑해 주는 여자들, 특히 조용히 아파트에 들어와 엉망이 된 집을 손수 치워 주고 끝내는 가정이라는 새로운 ‘모험’으로 마크를 끌고 가는 가브리엘은 공드리가 연출하는 초현실적인 비주얼 만큼이나 꿈 같은 캐릭터이다. 마법 같이 이루어진 조건 없는 사랑, 아이를 낳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실은 권력이라는 점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다소 씁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쇼트에서 알 수 있는 점은 <공드리의 솔루션북>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걸음 다가가는 시도라는 것이다. 수없이 집적된 아이디어가 성가시게 느껴지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필요하기 마련이고, 거기서 반짝이는 혁신이 일어나기도 한다. 공드리가 자신의 경험을 녹여 만든 이 작품은 사랑과 관계를 가꾸는 것에 관한 작품이며, 동시에 영화를 제작하는 일이 어지럽고 추상적인 계획과 수백 번의 노동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또한 관객 앞에 선을 보이는 순간 영화는 만든 이들의 손을 떠나게 되고 감상과 해석과 왜곡은 전부 관객의 몫이 된다고 말하면서 관객에게 말을 건다. 심지어 마침내 관객의 반응을 조우하는 마크의 기분을 보여 주는 듯한 마지막 장면이 수줍음인지 수치인지 판단하는 것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다. 이렇게 <공드리의 솔루션북>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 영화에 대한 질문을 하고 결국 관객 가까이까지 다가오는 영화로 마무리된다. <무드 인디고>를 보고 마음껏 슬퍼해도 되듯이,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비극인지 희극인지 논하지 않아도 됨을 깨달았듯이 이번에도 우리는 영화 만들기를 말하는 공드리의 언어를 재미있게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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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어떤 '룸'에 갇혀 있나요?
2008년 요제프 프리츨 사건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소설 『룸』을 영화화 한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의 《룸》(2015)
올드 닉은 17살 조이를 납치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감금한 뒤 지속적으로 강간한다. 조이는 납치범의 아이인 잭을 낳게 된다. 7년 후 잭은 5살이 된다. 조이와 잭은 '룸'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다.
영화는 자극적인 사건(실제 사건보다는 아니지만)을 다루고 있지만 폭력적인 장면들은 절제되어 있다. 폭력적이거나 잔인하거나 고통스러운 장면을 못 보는 사람이라도 무리 없이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극을 이끌어 나간다. 스릴러지만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호불호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작품이다.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살기 위해서는 '연결'이 필요하다
인간이 극한의 상황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올드 닉에게 7년 동안 지속적인 강간과 폭력을 당한 조이는 아들 잭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모성으로 극복한 시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조이가 살기 위해서는 잭이 필요했고, 잭은 엄마가 필요했다. 그들은 '룸'에 홀로 남겨지지 않기 위한 서로의 버팀목이자 숨구멍이었다.
영화는 잭의 시선을 따라간다. 올드 닉이 오면 잭은 옷장 안에 들어가 숨죽이고 있는다. 우리는 같이 숨죽여 조이의 고통을 가늠할 뿐이다. '룸'에서 태어나 5살이 될 때까지 나가본 적 없는 잭에게 이 작은 방은 세상의 전부다. 조이는 잭을 위해 세상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지만 마침내 탈출을 결심하고 잭에게 현실을 말해준다. '룸' 이외의 세상을 모르는 잭은 진짜 세상을 부정하고 탈출 작전을 미루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번뿐인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조이는 계획을 실행한다. 마침내 잭은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진짜 나무, 진짜 고양이, 진짜 개, 엄마가 아닌 진짜 사람. 작고 더러운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진짜 하늘.조이는 잭을 위해 세상으로 아이를 내보낸다. 조이는 그런 잭이 있었기에 닉에게 벗어날 수 있었다.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을 버틸 수 있게 만들었고, 세상을 만나게 해 주었다.
처음 세상을 만난 잭
세상을 만난 아이와 사회에 내던져진 엄마
조이와 잭의 탈출 작전은 영화의 약 절반 지점에서 성공한다. 감금과 폭력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뿐 아니라 이후의 상황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우리는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들이 견뎌내야 하는 모진 사람들과 사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행복하게 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조이는 7년이라는 세월을 잃었다. 17살이었던 그는 성인이 되었고, 엄마가 되었다.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한 선행의 대가는 컸다.
'착한 아이'에서 '엄마'가 된 조이는 7년 전에 멈춰버린 자신의 방과 추억을 복잡한 감정으로 마주한다. 극적인 사건에 이끌리듯 구름 떼 같이 모여든 대중들과 언론은 이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터뷰어는 조이가 자살을 시도했는지, 잭에게 미안하지 않은지, 닉을 아빠로 인정할 것인지를 질문하며 조이를 배려하지 않는다. 조이를 힘들게 한 건 닉뿐만이 아니다. 쏟아지는 질문과 시선, 그리고 응원조차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룸'에서는 살아남아 탈출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벗어났음에도 조이는 행복하지 않다.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조이는 주변의 도움을 거절하고 홀로 견딘다. 결국 조이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다. 조이가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죽음밖에 없었다. 그리고 잭은 다시 한번 조이의 죽음을 막아주게 된다.
"누구나 서로에게 힘을 주는 거야. 혼자서 강한 사람은 없단다."
우리가 누군가의 혼자됨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많은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약자들의 연대
올드 닉은 이런 말을 한다. '너희들이 먹고 잘 수 있는 건 다 내 덕분이니 감사하라. 직장을 잃어서 나도 힘들다'라고. 부부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지만 그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미친 소리가 없다. 영화 속 올드 닉은 잔인한 범죄자고 이들은 부부가 아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우리는 가족 같은 느낌을 받는다. 경제력으로 가족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행위를 한다면 올드 닉과 다를게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정폭력은 영화 속 올드 닉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탈출에 성공한 잭을 구조한 두 명의 경찰관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분명히 느껴진다. 여성인 파커 경관은 잭의 말을 기다려주고, 사건의 단서를 얻어 또 다른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남성 경관은 광신교의 짓으로 치부하고 미아보호소에 보내자고 한다. 남자 경관은 불안정하고 횡설수설하는 어린 잭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본다. 일상에서 위협적인 상황을 느끼는 경우가 적기 때문일까? 남자 경관은 잭을 보고도 범죄를 예상하지 못한다. 파커 경관과 남성의 차이는 여성이 모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강자가 아니기에 예민하고 직관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도 '룸'에 작별 인사해야지."
'룸'에서 잭은 자신의 완전한 세계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잭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다. 아침마다 방의 물건들에게 인사하고, 쥐와 친구가 되고, 무엇보다 엄마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잭은 '룸'을 벗어나서도 종종 그곳을 그리워한다. 마지막으로 조이와 잭은 룸을 다시 마주한다. 잭은 테이블, 세면대 그리고 옷장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룸'에게 하는 작별 인사는 다음 문장을 위한 마침표와 같다. 끝내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룸'은 더 이상 공포로 걸어 잠겨 있지 않다. 원한다면 벗어날 수 있다.
"문이 열려 있으면 '룸'이 아니거든"
문은 열렸고, 어디로 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갇혀 있는 그곳은 어디인가. 그 문은 누가 닫았는가. 문을 열자. 혼자서 버겁다면 누군가와 함께 어떻게든 그 문을 향해 나와 '룸'과 작별을 고하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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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딜리버리 - 아이빼고 다 가진 금수저 부부 VS 아이빼고 다 부족한 MZ커플의 위험한 거래
*해당 리뷰영상은 영화배급사 마노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유산 상속을 위해 아이가 필요한 금수저 부부 ‘귀남’(김영민)과 ‘우희’(권소현).
계획 없는 임신을 해서 난감해진 개털 백수 커플 ‘미자’(권소현)와 ‘달수’(강태우).
‘미자’와 ‘달수’는 생활고로 인해 안타까운 결심을 하고, 하필 ‘귀남’이 있는 산부인과를 찾게 된다!
그리고 ‘우희’의 아버지 ‘태식’(동방우)을 속이기 위해 금수저 부부는 임신 사기극을 계획하는데…
올 가을 가장 버라이어티한 공동 태교가 시작된다!
11월 20일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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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매리 연쇄살인사건 범인은?! - 라떼극장 EP.14
영화 흥신소 - 라떼극장 EP.14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차우"를 보며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려보자
범죄없는 마을로 공인(?)받은 곳 삼매리에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을 풀기위해 형사 경찰 포수 생태연구가 등 각계 전문가(?)들이 모이지만
문제 해결은 커녕 피해만 늘어난다.
삼매리는 다시 범죄없는 마을로 거듭날수 있을까?
괴수와의 사투를 벌이는 괴작 '차우(2009)'
신형사가 건강 챙긴다면 몰래챙긴 음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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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프리건> 공식 예고편
- 싸워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먼 옛날 지구에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다. 현대 인류를 아득히 앞서가는 지식과 과학력을 가졌던 초고대 문명. 그 문명이 남긴 유산은 현재도 세계 곳곳에 아무도 모르게 잠들어 있다. 고속 통신망이 전 세계를 뒤덮고 위성 렌즈가 모든 비밀을 마구 들추어내고 있는 지금, 신비한 '힘'을 가진 이 유산을 발굴하고 연구하기 위해 강대국들이 군대를 동원하고 쟁탈전을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 조직이 초고대 문명을 영원히 봉인하려는 하는데. 바로, 그 문명의 일원이 금속판에 새겨둔 '우리의 유산을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라'라는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기 위한 것. 그리고 이 조직의 특수공작원을 우리는 스프리건이라 부른다. 9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만화가 2D 작화와 3D CG를 통해 강렬한 영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부활. 화끈한 액션과 고대 문명에 대한 낭만이 가득한 정통 모험 활극을 지금 체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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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팜 스프링스> 메인 예고편
인생 최고의 날로 기억될 멋진 결혼식이 열리는 팜스프링스의 리조트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힌 남자 나일스에게 오늘은 100만 번째(?) 결혼식일 뿐이다.
하지만 우연한 사고로 세라가 나일스의 세상에 개입하면서
똑같았던 하루는 늘 특별한 오늘(!)이 되는데…
진짜 내일 없이 사는, 두 남녀의 썸머 코믹 로맨스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