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2-04-19 09:59:07
다시 살아갈 기회와 용기를 주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 리뷰
아이맥스 예매를 실패하고 4DX로 보고왔던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 전작들을 보지 않았음에도 눈물 가득했고, 재밌었던 작품이었다. 그만큼 새로운 팬과 기존 팬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 시놉시스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세상에 정체가 탄로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하루 아침에 평범한 일상을 잃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뜻하지 않게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각기 다른 차원의 불청객들이 나타난다. 닥터 옥토퍼스를 비롯해 스파이더맨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숙적들의 강력한 공격에 피터 파커는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에는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스파이더맨의 모든 전작을 보지 않았기에 홈 시리즈의 스파이더맨이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을 듣고 고딩이 영웅라니..! 하며 당황했었다.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가 말끝마다 “아,, 내가 까먹었다. 너 애지..?”라고 말하며 Kid를 강조하면서 미성년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아직은 어른의 책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어린 피터 파커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믿어주는 존재들이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자꾸 안 좋은 일이 일어나다보니 악당으로, 사고뭉치로 프레임이 지어지는 상황 속에서 아직 어린 피터 파커가 세상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진실되게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피터 파커가 지켜내야할 것들이 오히려 피터 파커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하면서도 자신을 가장 생각해주는 사람들은 자신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자꾸 주문을 수정하려는 시도를 보면서 아이같은 모습을 볼 수 있으면서도 아직 사람들에게 기대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는 모습을 잘 보여준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것, 책임을 진다는 것
하지만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다른 세계관에 있던 악당들이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존재했던 악당들이) 홈 시리즈의 스파이더맨이 있는 세계관으로 흘러들어온다. 이들을 처단하는 과정에 있어서 고딩 피터 파커는 점차 성장을 거듭한다. 능력면이라기보다는 내면적으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지 많은 고민과 고뇌를 하는 듯 보였다. 영웅으로서의 삶과 자신의 일상으로서의 삶. 이렇게 2가지가 대립되고 그 2가지를 모두 쟁취하고 싶다는 어린 욕심과 달리 현실에서는 그 모든 것을 이루기에는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잊게 해 달라는 주문을 닥터 스트레인지에 부탁하면서 그 동안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들의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립하고 독립하여 기억에서 잊혀진 영웅으로 세상에 남기를 선택한다. 솔직히 이 과정이 영웅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 역시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독립과 자립을 할 때가 되어 온다. 물론 스파이더맨처럼 고립되어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무조건적인 응원과 지지를 받으며 어린 아이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점차 성장하면서 사회에서 지녀야할 책임이 많아지고, 언제나 무조건적인 응원과 지지는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후회를 바로 잡을 기회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양한 것들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선택을 후회하며 지난 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은 1대, 2대 스파이더맨이 멀티유니버스를 통해서 다른 세계관의 스파이더맨을 찾아온다. 다른 세계관에서 온 빌런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그토록 자신을 아껴주던 이모의 죽음이었다. 그 속에서 좌절감을 느낀 어린 스파이더맨을 향해 다른 세계관 속의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후회를 털어놓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아마 이 영화는 전작 스파이더맨들이 가지고 있었던 후회와 슬픔에 대해 이 응어리를 풀고 다시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러한 후회를 딛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은 작품 자체가 가진 교훈과 그 퀄리티가 모두 높았던 수작이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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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1979년 12월엔 '서울의 봄'이 오지 못했나
12.12 쿠데타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79년 10월 이후의 대한민국이다. 18년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죽었다. 어수선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죽었기 때문에 관련부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특히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 중앙정보부다. 정보의 홍수가 멈출 곳을 찾지 못해 배회한다. 이 흐름을 독식한 건 전두광이다.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광.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본부장이 되어 중앙정보부의 이권이라는 건 혼자 다 빼먹고 있었다. 전두광의 폭주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던 건 아니다. 정상호 육군참모총장은 전두광을 시골로 좌천시킴과 동시에 수도경비사령관에 이태신을 추천하려고 노력한다. 전두광이 다급해진다. 이러다가 군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친구 노태건과 함께 중상모략을 꾸미는 전두광. 전두광의 발상은 위험했다. 그의 위험한 계획은 청와대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재밌는 영화라서 좋아
이 영화의 장점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중 최고는 스릴러로서 탁월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 관객들은 이 영화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영화의 갈등구도는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하지만 이 안에서 역사적 고증은 살리되 가지치기에 성공한 플롯이 돋보인다. 대표적으로 영화 초반부에 등장해 쿠데타의 핵심이 되는 정부 부처 캐릭터가 있다. 이 인물의 행방을 쫓는데도 이미 스릴러 한 편 뚝딱이다. 장소를 활용한 방식도 돋보인다. 전두광이 차 안에서 부하 군인들과 함께 있는 장면을 보면 이 영화가 공간도 잘 활용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상화 캐릭터 서사도 단편영화 한 편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클래식한 서스펜스 요소만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구도 던진다. 이태신과 전두광의 대립구도도 흥미롭다. 이 둘은 군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방식이 합리적이게끔 느껴지도록 대립한다. 액션 신도 서스펜스를 만드는 좋은 방법이지만 이렇게 지략싸움으로도 관객들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문무겸비형 스릴러다.
어려운 말을 쉽게 전달하는 단계
또 영화는 이 전달력이 좋은 편이다. 이 전달력이라 함은 영화가 연출 방식 중 하나로 어떤 요소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게 무엇인지는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이 연출 방법 때문에 이야기 흐름을 못 따라가는 관객은 아마 드물 것이다. 친절하게 다 설명해 준다. 그런데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설명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명확한 사실이라고 해서 이야기 만드는 것이 쉬운 게 아니다. 오히려 제약이 더 달려있어서 극화가 어렵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장르적인 재미까지 챙겼으니 ‘어려운 말을 쉽게 전달하는’ 고수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봐도 무방하다.
올해 한국영화 중 최고인 듯
그리고 영화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데 있어 배우들의 연기력 대결이 대단했다. 특히 전두광 역을 맡은 황정민 배우는 실존인물을 따라 하기보다는 본인만의 정공법으로 이 영화를 소화한다. 가령 전두광이 혼자 있는 장면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밑줄 쳐져있다. 사실상 영화가 초반부부터 ‘전두광이 어떤 인물인가’를 규정짓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미 실존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관객들이 다 알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정민 배우는 자기가 생각하는 악이 무엇인지를 가감 없이 표현한다. 황정민 배우가 긴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글쓴이는 이 전두광이 그의 최고작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태신 역을 맡은 정우성 배우도 감탄하는 장면이 몇 있었다. 이태신 캐릭터는 극화가 몇 번 됐던 인물이다. 그중 대표선수 격인 작품은 <제5 공화국>이다. 이 드라마에서 ‘장포스’ 김기현 배우는 후대에 밈으로 길이 남는 명대사(“너 이 XX 그대로 있어!”)를 남긴다. 이 장면이 워낙 임팩트가 크기 때문에 이 캐릭터 하면 폭발하는 분노가 연상된다. 정우성 배우는 이와 반대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천천히 관객을 설득하는데 집중한다. 이는 영화의 플롯을 생각해 본다면 정우성 배우가 작품을 잘 이해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두 주인공이 아닌 조연 캐릭터에서도 물 샐 틈 없이 깔끔한 연기를 보여줬다. 정상화 역을 맡은 이성민, 김오랑 역을 맡은 정해인, 노태건 역할을 맡은 박해준 등 조연/특별출연 캐릭터들도 영화를 빛내는데 기여한다.
존재와 부재
그러나 이 조연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은 국방부 장관(국방장관)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어떤 것’의 존재와 부재라고 생각한다. 이를 여러 인물을 대비시켜서 보여준다. 이 캐릭터 역시 이 대비를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다. 그냥 평범하게 연기하면 이야기의 핵심이 밋밋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배우는 유달리 압도적인 존재감을 표출하며 스크린을 장악한다. 국방부 장관의 어떤 부분이 결여됐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배우가 이런 역할 권위자(?)다. 매번 다른 연기를 보여주시는 게 신기하다. 내년 국내 영화제 조연상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내내 뜨거워
이 영화의 아쉬운 점은 톤이 조금 차가웠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점이다. 중반부까지 이야기 잘 끌고 간다. 하지만 후반부가 되니 살짝 늘어진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과 이어지게 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갑자기 엔딩에서 직접적으로 감정을 유발하는 장면이 들어간다. 그래서 이야기 방점을 엔딩에 찍고 싶어 했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다. 엔딩 직전 후반부가 묻힐 수도 있다는 느낌? 사실 글쓴이는 영화 후반부에 이태신의 대사에서 드러나는 ‘감독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그리고 이는 설득력도 있었다. 플롯에서 내내 공들여서 왜 이런 인물인지를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그런데 그럴 보람도 없이 엔딩에선 다른 이야기를 하니 아쉽다. 이마저도 사실이라 이런 엔딩도 충분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역사를 다 알고 이 영화를 보고 있다. 뒷맛의 씁쓸함과 실존 인물에 대한 분노는 우리 스스로 체화해야 할 일이지, 누가 떠먹여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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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식, 혐오의 자기합리화
일반적으로 꿈이란, 인간의 무의식을 기반으로 하거나 이러한 무의식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억압된 욕망이 투영되어 만들어진다. 즐겁고 행복한 꿈보다 어딘가 어긋나 있고 이상한, 불쾌하거나 불안한 꿈을 더 많이 꾼다. 불쾌한 꿈은 깨어난 이후 행복한 꿈보다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된다. 이런 명제를 두고 보면 무의식은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의식이 있을 때 역시 우리는 행복한 기억들보다 불쾌하고 불안한 기억들이 더 자주 상기되고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꿈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법한 일들을 경험하게 한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폴이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 등장해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꿈의 주인을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초반, 폴은 자신의 딸을 시작으로 주변인들의 꿈에, 더 나아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꿈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으로 반복해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무의식 속 폴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일까? 사실 우리는 이 꿈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폴’이라는 인물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나’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폴이 사람들의 꿈속에 처음처럼 그냥 가만히 서 있는 사람으로 등장했다면 호기심에서 그쳤을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으로 처음 마주한 폴에 대한 두려움이 형성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이 사람이 평소에 어떤 행실을 가지고 살았던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강렬한 꿈은 좀처럼 잊을 수 없기에 불쾌함은 오랫동안 지속되고, 꿈에서 나를 죽인 사람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불쾌함이 자연스레 표출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잘 아는 사람을 좀처럼 증오하지 못한다.’는 윌리엄 해즐릿의 신조는 다르게 말하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증오하기 수월하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더욱 쉽다. 그렇다면 현실이 아닌 꿈에 나타나 나를 비현실적으로 죽이는 사람을 현실 속에서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즉, 인간의 무의식을 통해 나타난 꿈이 현실 속 혐오라는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과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겠다. <드림 시나리오>(2024)는 이렇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무의식)를 빌미로 꿈을 이용해 비현실적인 혐오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도 나왔듯 원래 모든 밈은 꿈이 된다는 말이 있고, 인터넷에 도배가 된 폴의 꿈을 꾸는 건 쉬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폴에 대한 꿈을 꾸는데, 어떻게 자신만 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면 과연 정말 전 세계 사람들이 폴에 대한 꿈을 꾸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의 욕망과 심리라는 것은 자신은 특별하게 보이고 싶고 유행에 뒤처지는 것을 기피한다. ‘사람들은 꿈의 내용을 의미 있는 어떤 내용으로 대체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고 이야기한 프로이트의 말처럼 자신의 꿈이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며 공감받기를 원하고, 유행하는 것들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 일명 도파민이라는 핑계로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세상에 더욱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자극적인 꿈의 내용에 폴을 집어넣어 실제 자신이 꾼 꿈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꿈의 유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트렌드에 합류하여 주목받기를 바라는 욕심에 눈이 멀어 폭력에 가담한 것이 아니겠는가. 허구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몰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수단이다.
폴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등장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몰리의 꿈에 그녀의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던 성적 욕망을 드러내 보이는 역할로 나타난다. 이는 폴이 타인의 꿈속에서 처음으로 ‘행동’하는 순간이다. 이를 시작으로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폴이 점차 학생들의 꿈을 시작으로 이외 사람들의 꿈에 꿈의 주인을 죽이거나 몰리의 꿈과 비슷하게 성적인 욕망의 사람이 된다. 트라우마가 트렌드라는 폴의 말에 수긍하는 듯 트라우마라는 원인을 내세워 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 된 셈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짓도,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짓도 하지 않은 폴은 꿈으로 인해 가해자가 되어있다. 현실에서는 그를 죽이기 위한 조증 환자가 집에 침입하여 피해자가 된 폴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서는 꿈의 주인을 죽이는 가해자가 된다는 말인가. 이는 다수의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 더욱 쉽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말이 같다면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 악몽의 시작인 동시에 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리화하는 것의 시작일 것이다. 입소문은 빠르고 꿈만큼이나 왜곡되기 쉽다. 꿈을 검열하고 왜곡하도록 강요하는 심리 상태 역시 무의식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매주 수업에서 보는 교수가 꿈속에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든다면? 꿈의 주인은 불안하고 실제로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이러한 꿈을 꾼 학생이 친구에게 꿈 이야기를 전파했다면 ‘혹시나’하는 불안으로 인해 다른 학생들에게는 자신을 죽이는 꿈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점차 다수의 사람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도 폴은 위험한 존재가 된다.
앞서 이야기한 과연 정말 전 세계 사람들이 폴에 대한 악몽을 꾸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자신을 죽였다는 정확한 꿈의 내용이 주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그저 ‘죽이는 꿈’을 꾸었다는 허황된 말들뿐이다. 정확한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꿈에 근거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이 꾸었다고 하면 꾼 것인데. 누가 이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이로 인해 꿈으로 인한 선동은 다른 것들보다 선동되기 훨씬 수월하다. 개인의 말이 곧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질투는 타인의 성취나 유리한 입장에 배가 아프거나 괴로워하는 마음이다. 특별해 보일 것 없는 사람인, 존재감 없고 제대로 된 연구 논문 하나 내지 않은 채 여전히 명성 없는 대학교수인 폴이 갑자기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게 되고 인기를 얻게 되는 것은 몇몇 사람들 입장에서는 질투가 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고작 많은 사람들의 꿈에 나왔다고 해서 한순간에 인기를 얻은 폴이 어떻게 눈엣가시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룩말처럼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튀었기 때문에 타깃이 되기도 쉬웠다. 어째서 사람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꿈을 통한 개인의 상상과 생각을 가지고 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혐오에 휩싸이는가. 꿈이라는 가상을 현실까지 끌고 와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때 그로테스크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악몽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정서적 격발 기제를 푸는 심리 치료를 진행하지만, 트라우마를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트라우마가 더욱 악화한다. 꿈으로 인한 불쾌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도 지속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폴에게 자신들과 같은 불쾌감을 쥐여 주고 싶었다. 이후 폴의 차에 학생들은 낙서를 해 두고, 폴에게 욕설을 날리는 등 폴에게 실제로 위협을 가하며 이 상황을 핸드폰으로 찍거나 구경한다. 마치 이런 폴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을 향해 격분하는 모습이 폴의 실체임을 이미 알았다는 듯 비아냥거리기에 바쁘다. 인간은 악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나쁜 짓을 하며 이를 통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데,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방법은 혐오밖에 없다는 말일까. 어쩌면 학생들은 트라우마를 옳은 방법으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혐오가 그들이 원했던 치료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악몽으로 인해 폴은 교수로 있던 학교에서 정학을 당하고, 가족의 불화가 생기고, 학생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등 폴의 주변 사람들이, 심지어는 폴이 모르는 사람들 모두 폴에게 등을 돌린다. 더 이상 폴은 꿈과 상관없지 않다. 꿈속의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폴과 달리 사람들에게 꿈속의 ‘남자’는 ‘폴’이 되었다. 누가 폴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쉬우며 가해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 자신이 가해자의 입장에 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며, 심지어 자신이 실제로 타인에게 해를 가하고 있음에도 자기합리화를 하기에 바쁘기 때문에 진짜 피해자를 구별해 낼 인지가 부족하다. 이렇게 폴은 무의식으로 인한 의식의, 피해자의 의견은 묵살되는 사회의 완벽한 피해자가 되었다.
사람의 상상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는 것도 전부 사람의 상상이다. 타인을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은 끝이 없다. 심지어 다수의 사람이 한 사람을 향해 같은 비난을 쏟아내면 그것을 오롯이 받아내는 폴은 어떻게 될까. 폴은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악몽을 꾼다. 폴이 현실에서 손가락질받으며 가해자라는 인식이 지속되고, 결국 폴마저 이러한 인식 속에 잡아먹힌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자기 내면이, 그 내면의 어두운 부분이 있지 않을까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게 되고, 이는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던 불안이 폴의 꿈을 통해 나타난다. 결국 폴은 이런 사회적 혐오에 처참히 무너진다. 그리고 이는 겉잡을 수없이 번져 끝내 자기혐오로 다가온다. 자기혐오는 자신을 죽이는 일이고,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자기를 혐오하는 무리에 들어가기 위해 애쓴다. 상상이 상상에서 그치지 않고, 무의식이 무의식에서 그치지 않은 결과인 셈이다.
꿈속 누군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했던 폴은 결국 현실에서마저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된다. 단 한 번의 사고로 폴은 완벽한 피해자에서 예정되어 있던 완벽한 가해자로 변한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된 폴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사라져 버린다. 꿈에서 사라진 폴이 점차 잊힐 때쯤 그렇게 혐오했던 폴을 다시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는 ‘노리오’가 개발된다. 긍정적인 꿈을 꾸게 해 줄 수 있는 제품이고, 폴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꿈에 나타나는 힘을 사람들을 겁주는 데 사용해 안타깝다는 말을 통해 여전히 폴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폴이 타인의 꿈에 나타나 꿈의 주인을 죽인 것이 폴의 자의였다고 확정 짓는 대목이다. 사람들의 상상은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감정은 되살릴 수 없듯 인생 역시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이상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완벽한 혼자가 되어버린 폴은 무중력 상태가 되어 여전히 공중을 떠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드림 시나리오>는 이러한 무의식이 현대 사회 속 혐오와 폭력이 ‘자기합리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을 낸다. 하지만 사실, 무의식에 근거한 혐오와 폭력이 자신에게만 합리화될 뿐 모두에게 실제로 합리화되지 않는다. 무의식에서 폭력을 당하는 것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당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다. 폴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전부 무의식 속의 ‘누군가’가 아닌 의식이 명확히 존재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자기 행동에 동조하기 바쁘다. 세상은 변하지만,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근본이 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수 있지만 세상이 변함에 따라 혐오를 대하는 방법은 변해가는 세상에 맞게 달라져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혐오가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혐오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를 먼저 앞서서 혐오하기에 바쁘다. 누군가가 선동을 시작하면 개인 속에 잠재되어 있던 혐오가 기어 올라와 기어코 폭력을 휘두른다. 폭력을 휘둘러야 만족하고 만다.
꿈만큼 현혹되기 쉬운 것도 없다. 우리는 꿈을 꾸면 그 꿈에 대해서 의미를 해석하기에 바쁘고, 불쾌한 꿈을 꾼다면 그 무의식 속 불쾌함이 의식까지 영향을 미치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속된다. 하지만 이러한 ‘불쾌감’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 그 누구에게도 혐오 받을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혐오 받을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혐오할 권리는 존재하는가.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가. 생각이란 무엇이고, 또 이런 생각에 기초한 상상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생각과 상상을 끊임없이 타인을 포함한 자신의 혐오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을까. 생각이 혐오의 수단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은 사실 단순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혐오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을 힘이 충분히 존재한다.
우리는 혐오가 유행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혐오가 밈이 된다. 우리는 정말 살면서 한 번도 타인을 혐오한 적이 없을까. 내가 사용하는 밈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문장이지는 않을까.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이 명백한 혐오임에도 불구하고 혐오가 아니라고 자기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판이라는 명목하에 비난이나 혐오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을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혐오가 혐오라는 것을, 혐오를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소리 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용기를 내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군가를 혐오하기보다 우선 이러한 현상이 합리화되는 사회를 충분히 의심하고 경멸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더 이상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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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좌수사 이순신 그의 난중일기
책 한 권을 빌렸다. 바로 호란과 임진왜란에 대해 조사한 책이었다. 갑자기 자타공인 역덕이 되고 싶은 나. 냅다 깊게 파는 나의 역사덕후적 호기심이 빛을 발한다. 아니. 역사 이야기 능수능란하게 푸는 사람들 멋있지 않아? 어느 년에 뭐가 일어났고 어떤 것 때문에 발생했고 이런 거 줄줄줄 설명하면 왠지 모르게 멋지다. 역사가 약하다는 말은 사실 거의 모든 것이 약점이라는 말을 한 누군가의 명언이 생각난다. 그래. 맞는 말인 것 같아. 왠지 이 부분을 파면 다 잘 풀릴 것 같다.
풀릴지 안 풀릴지는 미래의 내가 아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싶다. 어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굴러다니는 짤들 보다 책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지 아닐까?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 지성에 그나마 다가가는 것이 민주사회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는다. 이 영화라는 문화예술도 사실 이 '지성'이라고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를 봐도 역사적 맥락과 관련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시대극 만들기 좋다. 위대하고 극적인 인물이 많이 나와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이 시대극 만들기 좋은 한국사를 소재로 했다. <외계+인> 1부에 이은 여름 대작 두 번째, <한산 : 용의 출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1달 후의 조선으로 가보자.
해저 괴물 복카이센
문제가 뭘까? 다 알 것도 같았다. 일본의 장수 와키자카는 해저 괴물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전쟁. 이웃나라 조선은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전쟁에 대한 대비가 단 조금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답답함이 아쉽다.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난 이순신이라는 존재에 머리가 아프다. 와키자카는 해저 괴물 복카이센이 전장을 휩쓸고 있다는 말에 여러 번 생각을 되뇌인다. 할 수 있어. 전염병 같은 두려움만 이긴다면.
‘해저 괴물 복카이센’을 이끌던 장수의 관점으로 돌아간다. 전쟁 중이었던 해전. 거북선이 일본의 배에 부딪혔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조선의 거북선. 일본의 배와 조선의 거북선이 붙은 상태에서 백병전이 열렸다. 거북선에서 배를 이끌던 장수 나대용은 방패 하나와 무기를 들고 들이받은 배의 일본 장수 둘을 제거하려 배의 위로 올라간다. 조총이 빗발치던 전장. 방패로는 한계가 있었다. 왼쪽 허벅지에 총알이 박힌 나대용. 위기의 순간, 일본 장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날아온 화살이 나대용을 구해줬다. 나대용을 구한 사람은 이순신이다. 처절한 전투 끝에 부하를 구한 이순신. 그렇게 임진왜란의 어느 전장을 보여주고 카메라는 1달 후를 비춘다. 이순신은 전투에서 생포한 포로들을 심문하다 왜나라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이순신은 열세의 전장을 뒤집어 조선을 구할 수 있을까?
자주 봤었지
사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다들 알고 있다. ‘우리에겐 12척의 배가 있소’부터 시작해서 우리 역사에 수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 우리나라의 위대한 전쟁영웅 하면 늘 들어가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라는 소재는 적지 않게 사용됐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들어갔던 것이 <명량>이다. 또 내 나이 또래라면 다들 기억하는 <불멸의 이순신>도 있다. 굳이 영상매체가 아니더라도 한능검이나 교과서에서도 임진왜란 이야기는 자주 본다.
전쟁영웅의 이야기라 봐도 봐도 좋은 이야기겠지만 이는 곧 창작의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떻게 관객에게 어필하지?를 생각해보자. 여러분과 내가 각본가라고 해보자. 이야기를 2시간가량으로 구성하고자 하면 뭔가 신선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1)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일으킴 2) 한산도, 노량, 명량 해전에서는 조선이 승리한다" 같이 두 결론을 내고 논리관계를 만든다는 것 자체도 충분히 어렵다. 근데 이에 틀어맞게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난이도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 이런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거 또 봤던 이야기 하는 거 아닌가? 또 전작 <명량>에서 흔히 말하는 ‘국뽕’ 마케팅은 이런 우려에 부채질을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런 단점들을 적당히 잘 보완했다.
좋은 기획
일단 영화는 조선의 관점에서 풀지 않는다. 전적으로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영화의 간단한 배경과 결말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바로 한산도 대첩은 조선의 압승으로 승리한다는 것이다. 보통 어떤 일의 긴장감은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느껴진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 버키와 캡틴이 맨몸액션을 벌인다. 둘 다 호각세의 능력자들이기 때문에 합을 주고받는 것이 어떤 결론으로 향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결과를 알 수 없음’의 서스펜스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 대신 후반부 하이라이트 신을 위해 최대한 반대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기획하고 싸운 전쟁영화임에도 주인공이 두 명이 되는 셈이다. 그것도 물리적인 분량은 와키자카 쪽이 더 많다.
이렇게 되면 갖는 이점이 생긴다. 앞에서 썼듯 왜 나라의 관점에서 이순신의 지략가적 면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 덕에 같은 소재의 전쟁영화가 있더라도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보다 신선하다고 느끼기 쉬울 것 같다. 구체적으로 써보자면, ‘반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일어나는 게 반전이다.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는 이 전쟁이 불가사의했다. 조선은 거의 준비가 안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는 대사도 나온다("전쟁은 금방 끝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전쟁 준비 잘해간다. 이를 일본 관점에서 풀어가니 그 준비성이 더 도드라진다. 그렇게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관점에서 철저한 전쟁 서사를 묘사하면 '와 이걸 어떻게 이기지?'싶은 의문점이 든다. 또 이순신에 대한 정보가 일본 내부에는 거의 없다 보니 와키자카에 몰입하게 된다. 마치 <어벤저스> 시리즈의 '타노스'같은 느낌? 영화 전체적으로 이순신을 깨러 가는 느낌이 강하다. 영화는 이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하는 의문과 이순신에 대한 미스테리를 후반부의 해전 신을 위해 쓰고 있다. 이야기 구성에 있어 보다 신선한 접근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초중반까지 일본 내부의 권력투쟁과 첩보 대결만 봐도 이야기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는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이 영화가 전작 <명량>과 다른 지점이 있어 비교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 이 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 '의'를 표현하기 쉬운 것도 이 영화의 형식의 강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일본 관점에서 전개해야 내적 논리의모순을 관객이 알 수 없다. 이를 통해 일본의 입장에서도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용이하다. 일단 영화 초반부에 왜 '의'가 중요한지 제시된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이 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다. 이 '의'라는 것이 어디 쪽에 있는 걸까? 쉽다. 이순신에겐 있고 일본의 장수들에게는 없는 것이 이 '의'일 것이다. 흰 종이에 붓 한번 살짝 찍어보자. 그럼 그 점이 선명하게 보인다. 의와는 거리가 먼 일본 내부의 상황을 조명하다가 조선을 쨘하고 보여주면 두 나라의 내부 상황이 대조적으로 보일 것이다. 일본 장수들이 하는 말을 잘 보면 거의 명분이 없다. 누가 싫거나.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아래 군사들 죽든지 말든지 알바 아니니까. 거의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의가 없는 왜의 명분과 이에 물든 일본 장수들의 냉정함이 더 도드라지는 것이다. 전작 <명량>이 민족주의(속칭 '국뽕')를 위해 영화 전반적인 장면을 희생한 것과는 다르게 뾰족한 기획을 통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특별한 무언가를 위한 발상이 아니라 '이런 영화를 만들 거야!'라는 아이디어에 기반한 좋은 선택이었다.
이를 위해서
이 신선한 방식의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역시 배우들이 영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일단 박해일-변요한-김성규-박지환 네 배우의 극 이해도가 굉장히 뛰어났다. 일단 박해일 배우는 한국영화의 지난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할 때 그 '기라성'을 담당하고 있는 박해일 배우. <살인의 추억>, <국화꽃 향기>, <연애의 목적>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 올해가 그의 경력 중 최고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전성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상대역의 변요한 배우가 섬뜩한 연기를 워낙 잘해서 좀 심심하다고 느끼는 분이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박해일 배우가 연기를 잘했다고 느낀 것이, 1) 가벼워 보이지도 않으면서 2) 뭔가 고뇌하고 있는 내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3) 조선 내부의 상황으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심리상태까지 극의 배경이 되는 좋은 연기를 수행했다. 비교적 와키자카에 비해 물리적 비중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존재감이 후반부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박해일 배우의 눈빛, 표정, 발성이 이 영화에 잘 어울리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과 <명량>까지 참 좋은 배우다.
다음은 변요한 배우다. 앞 문단에서도 썼듯 이 와키자카가 영화의 진주 인공이다. 물리적으로 분량이 아마 제일 많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박해일 배우는 잔잔한 파도처럼 극을 이끈다. 이와 대조적으로 변요한 배우는 감정적으로 화려한 연기를 보여주머 이야기를 전개한다. 일단 갖고 있던 감정선이 다양했다. 전쟁 준비는 또 착착 잘 되어가고 있다. 근데 반대쪽에서 승전보를 울렸던 이순신에게 묘한 열등감을 품고 있다. 또 이순신이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자신감까지 있다. 선조의 입장 변화를 위시한 조선의 내부 상황이 시끄럽기 때문이다. 또 일본 내부에서 권력 교통정리가 안 됐다. 이를 묘사하는 연기까지 해야 한다. 이렇게 전반부의 감정연기를 넘어가면 하이라이트가 있다. 중반부가 넘어가서 이순신과의 한바탕에서 이 사람의 처지는 여러 번 바뀌게 된다. 이때 분출했던 감정표현들이 선명해서 기억에 남는다. 자기가 주체로 이끄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한 인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변요한 배우는 정말 열 일했다. 아마 이 배우의 최고작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김성규-박지환 배우도 기억에 남는 연기를 했다. 두 배우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연이다. 이 역할을 살리는 좋은 연기였다. 일단 김성규 배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범죄도시> 시리즈였다. 그리고 <악인전>에서도 봤었다. 이 두 작품만으로도 연기 정말 잘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악인전>에서는 뭔가 난잡한 이야기 톤 사이에서도 빛났던 기억이 있다. 이때 단순히 연기만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건 똑똑한 배우라는 점이다. 이 준사라는 캐릭터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떤 점에서 이순신이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묘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리액션 연기가 좋아야 한다. 몸짓 하나, 눈빛 하나가 무언가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박지환 배우 역시 뛰어난 연기였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장이수 캐릭터로 유명한 이 박지환 배우. 솔직히 영화 보면서 '내 아임다' 생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영화는 전반적으로 이 캐릭터를 경제적으로 활용한다. 이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연기만 딱 잘라서 보여준 느낌? 이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았던 게 아닐까 싶었던 캐릭터 연출법이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아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에 시사회 평을 몇 개 봤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명량>의 단점을 극복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기대 좀 하고 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극복하긴 했다'다. 영화에는 엄청 큰 단점은 없다. 그 대신 아쉬운 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역시 극 중에서 옥택연-김향기 배우가 연기하는 임준영-보름 역의 서사 전부다. 난 이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일단 영화 안에서 스파이가 있어서 얻는 이점이 있다. 그런데 이 스파이가 단지 <명량>의 프리퀄이라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할당받는 게 그게 완성도에 도움이 되는가? 는 의문이다. 조선 측의 특정 인물과의 대비를 이루기 위해? 굳이? 일본의 스파이가 있는 것까지 대칭을 이룰 필요가 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중반부까지 이순신-와키자카의 전략적 선택이 재밌다가 임준영이 나오면 산만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는 배우의 퍼포먼스와도 연관이 있다. 음.. 잘 모르겠다. 이 배우를 캐스팅한 게 좋은 선택인지. <외계+인> 1부의 썬더가 생각나는 연기였다.
그리고 후반부 하이라이트 해전 신에서 CG 티가 난다. 아마 바다와 실제 배에서 찍으면 다칠 수도 있으니 그랬던 건 이해한다. 그런데 사람이 없는 신 정도는 실물로 찍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초중반부는 일본의 관점에서 전개하지만 중후반부는 조선의 학익진과 거북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그래서 전반부의 살짝 느리더라도 신선한 템포가 후반부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오잉? 호기심이 가는 이야기가 식상한 촬영기법으로 치환되니 뭔가 김샌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영화 전반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척임이 있다. 분명 전작에서의 '국뽕'요소를 많이 뺀 것도 안다. 불필요한 사족 많이 쳐냈다. 근데 살짝 유치하고 예전 느낌이 나는 연출법이 장면 장면마다 보인다. 완성도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은 아니나 확실히 아쉬운 지점이다.
그래도 좋았어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화 좋다. 잘 만들었다. 일단 두말할 필요 없는 후반부 해전 신은 쾌감이 대단하다. 부분 부분마다 꼼꼼하게 동선을 잘 짜 놔서 보는 맛이 있다. 이 액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운드와 표정이 될 것이다. 적의 변수에 당황하는 일본군, 급변하는 전쟁 상황, 포격 소리까지 CG를 많이 사용한 만큼 소리에 집중해야 현실감이 든다. 이 현실감은 유효하게 작용한다. 후반부 전투 신에서 우리나라 말도 자막처리를 할 정도로 집중했던 소리 연출은 러닝타임의 반을 할애한 만큼 제 몫을 다한다. 티켓 가격이 많이 오른 극장가 이 액션신만 봐도 가격 값을 한다.
또 영화에서 묘사하는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극에서 나오는 군사집단은 이순신의 수군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중반부를 넘어가면 특별한 존재들이 조선의 땅을 지키며 왜적과 항전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주인공이 이순신 장군인 것도 맞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도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전개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제목이 한산이다. 이 한산도대첩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싸워온 만큼 이들을 조명하는 것도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좋은 방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볍지 않은 톤으로 배우들의 연기까지 깔끔하니 임진왜란의 무게감에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극장가, 두 번째 여름 대작으로 부모님과 함께 가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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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나의 인생 캐릭터, 크루엘라
광고를 할 때부터 엄청 기대를 했던 영화 크루엘라. 정말 오래간만에 지인들에게 엄청난 추천을 하며 반드시 보라고 외쳤던 작품이었다.
영화 크루엘라 시놉시스
처음부터 난 알았어. 내가 특별하단 걸 그게 불편한 인간들도 있겠지만 모두의 비위를 맞출 수는 없잖아? 그러다 보니 결국, 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지. 우여곡절 런던에 오게 된 나, 에스텔라는 재스퍼와 호레이스를 운명처럼 만났고, 나의 뛰어난 패션 감각을 이용해 완벽한 변장과 빠른 손놀림으로 런던 거리를 싹쓸이 했어.
도둑질이 지겹게 느껴질 때쯤, 꿈에 그리던 리버티 백화점에 낙하산(?)으로 들어가게 됐어. 거리를 떠돌았지만 패션을 향한 나의 열정만큼은 언제나 진심이었거든. 근데 이게 뭐야, 옷에는 손도 못 대보고 하루 종일 바닥 청소라니.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런던 패션계를 꽉 쥐고 있는 남작 부인이 나타났어.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난 남작 부인의 브랜드 디자이너로 들어가게 되었지.
꿈을 이룰 것 같았던 순간도 잠시, 세상에 남작 부인이 ‘그런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난 내가 누군지 보여주기로 했어. 잘가, 에스텔라. 난 이제 크루엘라야!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크루엘라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이 미친 연기력은 뭐지?
사실 라라랜드의 엠마스톤인지 못알아봤다. 정말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았고 어디서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데려 왔을까 신기해하면서 영화를 봤는데 집에 가며 찾아보니 엠마 스톤이었던 것,,! 엠메들은 연기를 잘하나보다,,ㅎㅎ
특히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자신의 엄마를 죽인 사람이 남작 부인인인 것을 알았을 때 슬픔의 단계에는 5가지가 있다며 10초도 안되는 컷에서 그 5가지 표정이 찰나에 지나간다. 그걸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안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거기에 6번째 감정을 넣겠다면서 복수를 추가한다. 그러면서 씨익-하고 웃는데 소름이 돋는 연기였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매운맛?
영화 크루엘라는 패션업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과 캐릭터가 약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크루엘라는 실제 디자이너의 세계를 악프는 실제 패션 잡지사의 세계를 다루면서 신입과 사수 간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수가 점차 마음을 여는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시니컬하고 자신의 커리어에만 집중하는 그런 캐릭터가 비슷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약간 신입으로서 에스텔라는 바로네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게끔 행동하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물론 이게 다 꿍꿍이가 있는 거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악프의 앤디와 비슷해 보였다.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는 이 두사람이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의 매운맛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크루엘라는 서로를 증오한다. 심지어 이 두 사람이 친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임이 드러나도 엄마인 바로네스는 자신의 커리어에 도전하는 딸 에스텔라/크루엘라를 죽이려고 하고, 그런 엄마를 향해 크루엘라 역시 친엄마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점이 다르게 나타난 것 같다.
빌런이지만 선을 잘 지켜서 응원하게 됐던 빌런 크루엘라
그래도 좋았다. 착한 에스텔라, 독특한 돌아이 크루엘라는 모두 사람은 죽이지 않았다. 사람은 죽이는 건 바로네스였다. 에스텔라이건 크루엘라이건 그녀는 어찌됐던 살인과 같은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자신의 경쟁자와 복수할 대상을 향해 칼을 휘두루지 않는다.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상대방이 하려는 행동에 방해를 하고, 그 과정에 있어서 자신에게 이득이 돌아가게끔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마음에 든 빌런이었다.
사회를 비판하고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끝없이 침전하며 자신을 갉아먹는 빌런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뽐내면서 너가 나한테 이랬어? 그럼 너도 한 번 당해봐라!! 하면서 맞불을 놓을 수 있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확히 복수의 대상 한 명만을 향해 그 칼날이 향하고 그 사람만 망하게 만든다는 점! 그리고 작전에 성공한 크루엘라는 화려하게 대저택에 입성한다는 점!! 너무나도 매력적인 캐릭터다.
디즈니 작품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연기, 연출, 스토리 모두 좋았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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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은 약사에게, 멀티버스는 '스파이디'에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파이더 우먼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면서 가족도, 친구도 잃은 '그웬 스테이시'(헤일리 스타인펠드). 그녀는 다른 평행세계의 스파이더맨이자 유일한 친구인 ‘마일스 모랄레스’(셔메이크 무어)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빌런과 싸우던 그웬. 그녀는 또 다른 스파이더맨 '미겔'(오스카 아이작)과 '제시카(이사 레이)'를 만나고, 그들에게 합류해 우주를 넘나드는 빌런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마찬가지로 그웬을 그리워하며 하루를 보내던 마일스. 그의 앞에는 자기도 의도치 않게 만들어 낸 빌런 '스팟'(제이슨 슈워츠먼)이 등장한다. 스팟 덕분에 마일스는 그웬과도 재회한다. 그웬 역시 스팟을 감시하러 왔기 때문.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그들은 스팟을 쫓아 다른 우주로 이동하고, 수많은 스파이더맨을 만나면서 예상치 못한 우주의 균열을 마주한다.
스파이더맨의 멀티버스는 다르다
또 한 번 멀티버스다. DCEU의 마지막 작품인 <플래시>가 개봉한 지 일주일 만에 멀티버스 히어로가 또 등장했다. 2018년에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속편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스파이더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플래시>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멀티버스는 이미 관심을 끌기 어려운 소재가 됐다. 평행 우주든, 다중 우주든, 평행 다중 우주든 상관없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과거나 현재를 바꾸려다가 다른 우주의 '나'를 만난다. 그 만남을 통해 현실의 '나'는 현재의 중요성을 배우고, 한층 성장한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기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파이더맨'이니까. 수많은 우주의 스파이더맨이 한 데 만나는 사건인 '스파이더버스(Spider-verse)'는 멀티버스의 상징과도 같으니까. 전편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와 실사 영화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멀티버스를 능숙하게 다룬 전력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스파이더맨>은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북미에서 개봉 9일 만에 2억 달러를 돌파하는 흥행을 기록한 이유를 제대로 보여준다. 멀티버스를 소재로 삼은 최근 히어로 영화 중 가장 뻔뻔하고, 감각적이며, 통쾌한 데다가 감동적이다. 마치 멀티버스를 다룰 줄 아는 셰프는 '스파이디' 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멀티버스라는 공식을 깨부수다
멀티버스 영화는 대체로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 MCU의 피터 파커도, 닥터 스트레인지도, 완다 막시모프도, 가장 최근에 공개된 플래시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주인공은 과거나 현재의 특정 사건을 바꾸려는 욕망이 가득하다. 하지만 멀티버스를 경험하면서 한 가지 가르침을 깨닫는다. 인생에는 필연적인 지점이 있으며, 그 사건이 현재의 나와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 운명에 순응하고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것.
얼핏 보면 <스파이더맨>도 다르지 않다.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인 미겔 오하라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그는 '스파이더맨 소사이어티'라는 팀을 결성해 차원을 넘나드는 빌런을 체포한다. 그들이 우주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전에. 특히 그는 '공식설정 사건(Canon event)'을 수호하려 애쓴다. 모든 스파이더맨은 삼촌처럼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가족, 그리고 가장 가까운 경찰서장을 잃어야만 한다.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미겔 본인이 공식설정 사건을 바꾸려다가 가족을 모두 잃는 가슴 아픈 경험을 했으므로.
그래서 그는 마일스를 질책하고, 통제하려 든다. 전편에서 마일스가 차원 이동기를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차원을 넘나들며 우주의 균형을 위협하는 빌런 스팟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마일스가 '스파이더 인디아'(카린 소니)의 우주에서 싱 경감을 구한 것도 문제다. 스파이더맨과 가장 친한 경찰서장이 죽어야 하는 공식설정이 깨졌으므로.
공식대로라면 마일스는 이쯤에서 변해야 한다. 자기 행동이 미성숙하다고 반성해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를 살릴 수 없더라도 우주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가슴이 아프더라도 정해진 운명을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 <스파이더맨>은 공식을 거부하고, 과감하게 반기를 든다. 마일스는 미겔에게 말한다.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고, 무슨 일이든 처음은 있다고.
무슨 일이든 처음 있다
<스파이더맨>은 마일스의 선택에 힘을 싣는 반전도 선사한다. 미겔은 고집불통인 마일스에게 숨기고 있던 진실을 알려준다. 전편에서 방사능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맨이 된 마일스. 알고 보니 그 거미는 지구-42라는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것으로 밝혀진다. 즉, 본래 마일스는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는 존재부터가 우주를 파괴할 수도 있는 원인인 셈이다.
이에 마일스는 미겔과는 반대로 행동한다.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자기가 스파이더맨이 됐다면, 공식설정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면서. 그래서 그는 이틀 뒤면 경찰서장으로 진급해 죽을 운명인 아버지를 구하러 간다.
"내 이야기는 내가 쓸 거야!"라는 마일스의 결심은 <스파이더맨>을 독보적인 영화로 거듭나게 하는 1등 공신이다. 앞서 봤듯이 멀티버스 영화에는 어느 정도 고정된 틀과 스토리가 있다. 그런데 이를 전면에서 부정한 결과 강렬하면서도 색다른 쾌감에 빠져들 수 있다. 모두가 운명 앞에서 겸손해지고 무거워지는 가운데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영화니까.
마일스의 결단은 멀티버스를 통해 더욱 확장된다. 그웬은 공식설정을 따르지 않을 이유를 찾아낸다. 경찰서장인 아버지가 경찰을 그만뒀는데도 공식설정이 어긋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웬. 그녀는 전편에서 한 팀이었던 스파이더맨들을 모아 마일즈를 돕기로 결심한다. 새롭게 등장한 스파이더펑크, '호비'(대니얼 칼루야)도 인상적이다. 그는 마일스와 그웬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며 펑크록에 심취한 아나키스트 스파이더맨다운 활약상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마일스의 정체를 한 번 더 비틀어서 충격을 선사하는 결말도 인상적이다. <스파이더맨>은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을 연상시키는 클리프 행어로 마무리된다. 그 덕분에 3편인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에 대한 기대치는 한껏 커진다. 결말만 놓고 보면 2023년 영화 중 최고나 다름없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스파이더 그웬
숙명을 거부한 마일스의 선택은 그웬의 이야기를 만나 더 풍부해진다. 그들은 고집 센 부모님과 부딪힌다. 스파이더맨이 청소년 히어로의 대표주자라는 걸 고려하면 일종의 세대 갈등처럼 보인다. 마일스의 부모님은 그가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란다. 경찰서장인 조지 스테이시는 스파이더 우먼이 딸의 절친을 죽였다고 믿는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딸의 말은 무시한다. 그웬의 정체를 알게 되자 딸을 체포하려 들 정도다.
하지만 마일스와 그웬은 요즘 애들답다. 자신감과 쿨함으로 무장해 자기 꿈을 실현한다. 기존의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벗어나 역동적인 삶을 그려 나간다. 차원 이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 마일스. 자기 밴드를 만들고 싶어 하는 드러머 그웬. 그들은 스파이더맨답게 꿈을 이룬다. 마일스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스파이더 인디아를 돕는다. 그웬도 마일스를 비롯한 다른 차원의 옛 동료들과 재회해 자기만의 밴드를 꾸린다.
두 거미 인간의 패기는 감동도 안겨준다. 그들이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때,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이 가득 느껴진다. 끝까지 자기 정체를 숨기던 마일스.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언제나 아들 편이라고 말해준다. 더 넓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한다. 조지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집에 온 그웬과 화해한다. 아빠는 경찰을 그만뒀고, 딸의 선택을 전적으로 믿는다고.
이처럼 다른 듯 보이지만 맥락과 함의는 같은 그웬의 이야기 덕분에 마일스의 이야기는 더욱 진해진다. 그들의 유대감이 로맨스 코드로 자연히 이어지는 재미도 있다. 또 투톱 주인공 수준으로 늘어난 그웬의 분량이나 비중도 자연히 납득된다.
주제에 충실한 볼거리와 스타일
전편보다 발전한 볼거리와 스타일도 <스파이더맨>만의 개성을 한 층 끌어올려 준다. 전편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기법이었다. 픽사와 디즈니 스타일의 3D 애니메이션 트렌드를 거부하고, CG와 2D 애니메이션을 합성한 기법을 선보였다. 그라피티 스타일의 그림을 조합하고 프레임도 낮게 잡으면서 스크린으로 만화책을 보는 듯한 착각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도 과감함은 이어진다. 스타일은 유지하되, 한 가지 변화를 꾀했다. 색채다. 역동적이고 화려한 그림체에 다양한 색감을 더해서 이야기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도 환기했다. 그웬과 아버지의 대화 장면이 대표적이다. 부녀 관계가 경색되어 있을 때는 화면이 전반적으로 푸른빛이다. 하지만 부녀가 포옹을 하거나, 둘의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 영화는 분홍이나 노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스크린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이에 더해 스파이더버스의 스케일을 키웠다. 덕분에 영화 곳곳에 팬서비스가 빼곡하다. 게임 시리즈 속 스파이더맨, 레고 스파이더맨 등 온갖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 스파이더맨 실사 영화 시리즈도 스파이더버스에 포함됐다. 일례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 중 몇몇 장면이 영화에 직접 등장한다. MCU와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도 합류한다. 미겔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속 사건을 언급하고, <베놈> 속 조연인 첸 부인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음악도 계승했다. 'Sunflower'나 'What's up danger' 같은 블랙 뮤직을 이번에도 적극 활용했다. 특히 메트로 부민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해서 OST 간의 통일성이 높아졌다. 대니얼 펨버턴이 1편에 이어 참여한 스코어도 인상적이다. 드럼이 인상적인 그웬의 테마를 적극 활용해 영화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한계
다만 애니메이션이라서 남는 아쉬움도 있다. 길다. 러닝타임이 140분이다. 전편에 비해 23분가량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특히 그웬과 마일스의 가족 이야기가 중심인 초중반부가 상대적으로 지루하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액션과 허를 찌르는 전개로 만회하려 하나, 길다는 인상 자체를 지울 수는 없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러닝타임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화려한 그림체도 종종 어지럽게 보인다. 특히 액션씬은 호불호가 갈릴 만한 여지가 있다. 프레임이 자주 끊기고 스파이더맨들의 그림체가 제각기 다르다 보니 정리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이에 더해 1편의 임팩트를 넘어서는 OST가 없어서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스파이더맨이 소모된다. 잠시 엑스트라로 스쳐 지나가다 보니 스파이더맨 하나하나의 임팩트는 크지 않다. 미겔과 제시카 드루 정도가 예외일 뿐이다. 모든 스파이더맨이 특유의 매력을 발산한 전편에 비하면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호불호와 취향의 영역이라서 영화의 완성도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독보적인 성취는 모든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는다. 과감한 스토리텔링, 신선한 스타일, 팬 서비스와 세계관 연계까지. 이보다 완벽한 중간 다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1편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놀라운 기록을 써 내려갔다. 2019년 골든글로브 최우수 애니메이션상,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석권했다. 평가에 비해 흥행이 조금 아쉬웠다. 국내에서는 관객 70만 명을 겨우 넘겼다. 그래도 북미 약 1억 9,000만 달러, 월드와이드 약 3억 8,4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흥행 성적은 이미 전편을 뛰어넘었다. 벌써 북미 2억 달러, 월드와이드 4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니 궁금하다. 과연 국내에서는 어디까지 질주할 수 있을지, 시상식 시즌에는 또 어떤 뉴스를 들려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Outstanding 출중함
정점에 다다른 스파이더버스의 황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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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사람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면 웃음이 나온다."
Cast
Walter ASMUS
Director
Declan CLARKE
시놉시스
20세기 연극의 지형을 뒤흔든 혁신가라는 평을 듣는 부조리극의 대표작가 사무엘 베케트와 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가장 잘 연출하는 연출가로 알려진 발터 아스무스와의 깊은 동료애와 우정을 보여준다.
들어가며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 웃음이 나올까? 말이 안되는 말이지만 어쩌면 누구나 경험해본 적이 있는 상황일 것이다. 기쁠 때 눈물이 나듯, 절망할 때 인생의 놀라움에(negative) 웃음이 터져본 사람만이 인생을 입체로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화는 ‘부조리’는 단순하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아니라 세상의 다채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설 수 있는 인간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현존하는 영화중 가장 ‘베케트적’ 영화
<내가 넘어져도 내버려둬>는 극적인 재미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습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그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진짜 초목표를 찾고 갈등을 해결하는 류의 드라마가 없다. 거기다 영화엔 그 흔한 음향효과도 없고 줌인이나 줌아웃도 없으며 대사도 없다. 설명은 최소한의 나레이션과 자막으로 대신하는 것으로 인위적 연출을 최소화했다. 오직 영화에 쓰인 모든 편지, 대본자료를 제공한 ‘발터 아스무스’를 제외하고는 움직이는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이걸 영화라고 부를 수 있나 의문이 들때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그렇다. 이 모든 반응은 내가 ‘부조리극’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느낌과 정확히 일치했다.
재미는 없어도 의미는 있을 수 있잖아?
부조리극은 극도의 미니멀리즘,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형식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연극의 사조다. 역사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이후 등장하여 우리가 상실한 인간성, 소통의 가능성, 세계와의 관계에 주목하며 실존주의와 함께 다뤄지곤 한다. 영화의 모든 관습을 거부하고 아카이브의 힘으로 재현된 데클란 클라크의 <내가 넘어져도 내버려둬>는 베케트와 아스무스의 오랜 우정을 다룰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우리가 익숙하게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부조리 사조의 특징을 계승하고 있었다.
영화가 이어붙이는 베케트와 아스무스의 편지와 사실에 근거한 자료들을 보고 있다보면 사실 편집과 연출을 거친 영화야 말로 인위적인 진실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자연이 그러하듯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이면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깨달음에 도착하게 된다. 화려한 편집과 각색 대신 고도로 절제된 효과, 침묵, 리듬, 존재의 본질을 살린 미니멀리즘으로 말이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안에 딱딱하게 자리잡고 있던 부조리극 사조의 정의 역시 바뀐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위한 마음먹기였다. 동시에 이 작품의 제목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오해도 풀린다.
“내가 넘어져도 내버려둬.”는 넘어져도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꼬장꼬장한 예술가의 아집이 아니다. 매번 넘어지지만 스스로 일어나는 힘이 사실 우리 인간이 가진 위대함이라는 묵묵한 응원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최악의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우리는 사실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
[Schedule in JIFF]
2025.05.01(목)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140]
2025.05.04(일) 10:30 메가박스 전주객사 4관 [상영코드 414] GV
2025.05.06.(화) 17: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656] GV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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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썰> 티저 예고편
“내 얘기 들어볼래?”
일주일에 무려 200만원, 핵이득 꿀알바 VVIP 돌봄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공시생 ‘정석’(강찬희)이 인적 드문 산골에 위치한 저택을 찾는다.
역대급 말빨을 장착한 선임 알바생 ‘이빨’(김강현)은 만나자마자 쉴 새 없이 썰을 늘어놓고,
그 와중에 일명 전설의 10초녀 ‘세나’(김소라)가 눈앞에 등장한다.
믿기 힘든 썰의 스케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는데…
단단히 도른자들의 B급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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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쿠라우> 티저 예고편
미지의 땅 ‘바쿠라우’.
마을 족장 카르멜리타의 장례식 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총격으로 구멍 뚫린 물 수송 차량,
하늘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비행 물체,
마을 곳곳에서 시신까지 발견되며
주민들은 혼란에 빠지는데…
이곳에 절대 발 들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