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4-29 00:41:01
오늘만큼은 맘껏 웃고 싶을 때, <패딩턴>
영화 <패딩턴> 리뷰
오늘의 영화는 바로,
맘껏 웃고 싶을 때 보는 영화 <패딩턴>입니다.
ⓒ 네이버 영화
정보
개요 코미디 | 영국 | 95분
감독 폴 킹
출연 벤 위쇼, 니콜 키드먼, 휴 보네빌 등
등급 전체 관람가
줄거리
폭풍우에 가족을 잃은 꼬마곰 ‘패딩턴’은 페루에서 영국까지 ‘나홀로’ 여행을 떠난다.
런던에 도착한 ‘패딩턴’은 우연히 브라운 가족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가족을 찾아 나선다!
한편, 말하는 곰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악당 박제사 ‘밀리센트’는 호시탐탐 ‘패딩턴’을 노리는데…
<패딩턴>의 T.M.I
ⓒ 네이버 영화
<패딩턴> 원작은?
1958년, 영국의 문학작가 마이클 본드의 '내 이름은 패딩턴'이 영국에서 첫 출간되면서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 패딩턴 베어 시리즈는 3,500만부 이상 판매, 40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패딩턴 속편
2015년에 패딩턴이 개봉한 후, 2017년에 패딩턴 2가 개봉했고,
현재 패딩턴 3 제작 중에 있습니다.
"맘껏 웃게 만들다!"
ⓒ 네이버 영화
<패딩턴>은 페루에 살던 꼬마곰이 런던에 오면서 벌어지게 되는 일을 담았습니다.
꼬마곰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이 상황 자체도 너무 재밌긴 하지만,
꼬마곰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런던의 모습 또한 유쾌하게 담아냈습니다.
칫솔이 어떤 용도를 쓰이는 물건인지 모르고 귀를 닦기도 하고,
안내 문구를 잘못 이해하고 하는 행동, 패딩턴의 행동 하나하나가 웃음을 띄우게 만들었습니다.
"화려한 출연진"
ⓒ 네이버 영화
벤 위쇼, 니콜 키드먼, 휴 보네빌, 샐리 호킨스, 다들 한 번씩은 들어본 이름들이죠?
세계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여배우 중 한 사람으로 떠오르는 니콜 키드먼은
자신의 딸을 위해 출연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냉정하고 집착이 강한 박제사 역을 너무나도 잘 소화해냈습니다. 주인공 '패딩턴' 목소리는 가디언의 Hot List 2007에 주목해야 할 배우로 선정된 벤 위쇼가 맡았습니다. 밝고 천진난만한 패딩턴 그 자체를 보여줘 극의 재미를 더해줬습니다.
"이런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영화를 보고싶다?
-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찾고 있다?
- 코미디 영화를 좋아한다?
귀여운 캐릭터와 유쾌함이 더해져 큰 재미를 선사하는
지금까지 영화 <패딩턴>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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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 에디터 ria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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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추천 TOP 5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추천 TOP 5
요즘 교양 유튜브나 다큐멘터리에 푹 빠져있답니다. 원래는 집에서 영화 볼 시간이 부족해서였는데 어느 순간 푹 빠졌답니다. 보통 한 시간에서 90분 정도로 영화보다 짧아서 봤는데 제가 얼마나 부족한 지를 또 한 번 체감합니다. 그 반성의 의미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추천 TOP 5>을 올립니다. 그리고 BGM은 2020년 베스트 펑크 록 음악인 <Grounds>을 올립니다.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 (13th·2016)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다큐멘터리상
<셀마>를 만들었던 여성 감독 에바 두버데이가 수정헌법 13조 통과에 따른 소수 인종의 대량 투옥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다른 소수 인종의 광범위한 투옥을 초래한 것은 단지 뿌리 깊은 문화적 인종주의만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훌륭한 비즈니스 모델이기 때문이다. BLM 운동의 배경은 이토록 자본주의라니 대단히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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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 (The Last Dance 2020)
10부작 다큐멘터리 <라스트 댄스>에 푹 빠져들기 위해 굳이 농구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기기 위해 일생을 바친 한 남자의 매혹적인 연대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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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팩토리 (American Factory 2019)
-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노조 설립과 최저임금 상승을 정책적으로 밀어붙였던 버락과 미셸 오바마가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중국 후야오 공업에 인수된 오하이오 주 데이튼 시의 GM 공장을 관찰한다. 숙련된 미국 노동자들이 중국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민주당 텃밭인 러스트 벨트가 트럼프를 지지한 이유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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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민주주의 - 룰라에서 탄핵까지(The Edge Of Democracy·2019)
권력을 장악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사법·언론·군부·재계 등 기득권에게서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의 특권이 지나치게 커지는 순간 국가는 쇠락한다. 이것이 국가가 멸망하는 가장 큰 원인이자 개혁이 실패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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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 (Crip Camp·2020)
미셸과 버락 오바마가 두 번째로 제작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는 오스카상을 수상한 <아메리칸 팩토리>보다 어떤 면에서 더 우월할지 모른다. 우리는 장애우를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지켜볼 것이 아니라 ‘장애를 극복할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자'라고 독립과 연대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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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든 피겨스 (2017)
“여성들을 주로 지지자로 삼는 데만 익숙해 있는 일군의 성직자들 사이에서 한 명의 여성, 그것도 나이든 여성인 내가 지도부에 낄 자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종속적인 위치에 존재하는 여성들
흑인 여성이자, 흑인 인권 운동가였던 엘라 베이커가 당시 사회를 비판한 말을 인용하며 영화 <히든 피겨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6.25전쟁, 그리고 경제 대공황을 겪은 후의 미국.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에는 남성들이 사라진 자리에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언제나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들에게는 언제나 반복적이고 단순한 사무직의 자리를 비롯한 종속적인 사회적 위치가 허용되었고, 보수는 남성들의 1/3에 불과했으며, 여성들은 유권자의 50%를 차지하지만, 입법부에서 여성의 비율은 4%밖에 되지 않았다. 우선 여기까지는 ‘여성’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 불평등이다. 그리고 여기에 흑인이 겪어야 했던 차별을 계속해서 적어보자.
냉전 시대의 개막과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
2차 세계대전 종전후 미국 사회에는 분명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다양한 변화의 바람이 있었지만, 영화와 관련되어 이야기할 변화의 바람은 냉전시대의 개막과 유색인종의 대거 유입이다. 냉전시대와 유색인종의 유입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전혀 연관성이 없어보이는 두 사안이 기묘하게 연결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인류 최초로 유인우주선을 보낸 고도로 발달된 문명 국가의 비이성적인 면모를 볼 수 있게 된다. 영화속에서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낸 캐서린에게 소련의 스파이냐고 취조하는 부분이 이에 대한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미국 지도부들은 자신들 내부의 유색 인종들이 공산 혁명과 결합될 수 있는 위험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위험을 잠재우고자 트루먼 대통령(1945~1953)은 인종차별에 대한 몇가지 법을 개정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인종분리는 불법이었으나 여전히 진행중인 문제였으며, 인종분리에 대한 법이 집행되지도 않았고, 고용과 임금에서도 유색인종들은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투쟁의 역사
이런 차별이 쌓여 1960년대에 이르게 되면 미국 전역에서 흑인들에 의한 각종 인권 투쟁 운동이 발생한다. 미국의 저명한 흑인 운동가들이 활동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남부에서 평화적인 인권 시위를 주장했던 마틴 루터 킹과 흑인이며 여성의 위치에서 인권운동을 했던 엘라 베이커, 북부에서 차별당하고 억압받는 수많은 흑인들의 기저에 깔려있는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며 과격한 시위를 이끌었던 말콤, 총기 무장을 주장한 로버트 윌이엄스 등을 중심으로 미국 내부에서 유색 인종들의 수많은 평화 시위와 봉기, 반란이라고 부를만한 소요가 일어난 것이 바로 1960년대의 미국이다.
거인의 그림자 뒤에서 써내려가는 고요한 투쟁의 역사
<히든 피겨스>는 바로 이 격동의 시대인 196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속 곳곳에서 보여지는 흑인과 여성에 대한 분리 정책과 시선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색인 여성에게는 교육의 권리마저도 배제하고, 전문직으로 진출할 기회마저도 막혀있으며, 버스나 화장실도 분리된 공간을 사용해야하는 차별적인 현실 그리고 실제로 발생했던 자유승차단원들이 린치를 당하는 장면 등은 이 영화가 당시의 부조리한 시대상을 담아내고 있는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서, NASA의 직원인 흑인 여성 세 명은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들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투쟁한다. 이들이 부조리한 사회에 반발하여 투쟁하는 방식은 내적 용기와 엘리트적인 위엄에 기대어 진행된다. 캐서린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재능을 살려 팀의 업무에 열중한다. 캐서린은 단기적인 소요와 폭력보다는 능력으로 인정받고, 미국 사회의 구시대적 편견과 차별에 맞선다. 도로시 본 또한 단기적인 소요나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위엄과 용기로 흑인 여성들에게 전문직을 개방하지 않는 NASA에 맞서고, 메리 잭슨은 현명하게 자신의 권리를 찾고 성장하기 위해서 분투한다.
이들은 고요하되 위엄을 갖춘 방식으로 투쟁하기를 선택한다. 반면, 영화속 흑인 남성들은 조금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매리 잭슨의 남편과 짐이 두 여성과 다른 의견을 내비추며 갈등을 빚는 장면을 통해, <히든 피겨스>의세 여성들이 차별적인 사회에 저항하고 사회를 바꿔가는 방식이 엘리트적이고 위엄있는 방식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는 행복한 결말을 통해서 마치 이들 세사람이 선택한 방식이 옳은 것처럼 그려내고 있다.
위대한 역사의 이면에 존재하는 숨겨진 인물들(hidden figures)들을 조명하지만, 보다많은 숨겨진 감정들(hidden tears)에는 깊이 있게 접근하지 못하는 <히든 피겨스>
하지만, 고요한 저항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히든 피겨스>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거나, 무작정 엘리트 흑인 여성들의 성공담을 만들기 위하여 그들과 반대쪽에 있는 인권 운동 노선(짐과 매리 잭슨의 남편)을 추락시키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대다수의 유색인종들은 <히든 피겨스>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위치가 아니었다. <히든 피겨스>의 세 주인공은 당시에도 흑인중 상위 10% 이내에 속하는 엘리트 계층이며, 단지 그들만의 고요한 투쟁으로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미국 각지에서 유색인종 수백만명이 시위와 반란에 동참하고, 당국은 공권력으로 유색인 민중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들끓었던 당시 사회의 시대적 분노가 담겨져 있지 않다. 또한,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크고 작은 전쟁들에서 언제나 종속적인 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던 흑인과 여성, 그리고 흑인 여성들의 터져나와야 할 분노와 들끓는 애환이 영화속에선 블랙 코미디의 장르로 유쾌하게 그려내기도 하지만, 그 깊은 분노위에 애국심을 대충 덧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충분히 유쾌하고, 편집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좋은 영화이지만, 실제의 세계와 영화의 세계에는 어느정도의 간극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히든 피겨스>가 유색인종 여성들의 고요한 투쟁을 다룬 영화라면, 그 방식은 누구의 노선을 따르는 것인가? 캐서린이 영화속에서 한 두번 보여주는 분노의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속에는 당시 대다수 흑인들(당시 흑인의 실업률은 12%, 빈곤한 생활을 하는 비율은 흑인 전체 인구의 절반이다)의 분노와 억압의 감정이 감지되지 않는다.
영화속에서도 자유승차단원들이 탑승한 버스가 공격받는 장면이 등장했듯이, 당시 유색인종들의 투쟁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거는 투쟁이었고, 그 때문에 유색 인종들의 투쟁에는 진중한 울분이 서려있거나, 폭발하는 분노가 느껴졌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히든 피겨스>에는 억눌린 민중의 차가운 분노도, 폭발하는 뜨거운 분노의 감정도 감지되지 않는다. 분명 <히든 피겨스>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유쾌하기에 매력적이지만, 그렇기에 그 시대의 수많은 ‘흑인’이자 ‘여성’이었던 사람들 대다수의 삶을 대표하지 못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이며, 영화속 주인공 세 명은 이미 충분히 교육을 받은 흑인 여성으로 나름 유색인종들 중에서는 엘리트에 속하기에, 빈곤한 삶을 영위했던 당시의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흑인들의 이야기를 대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마저 포용하는 방식의 각색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든 피겨스>는 무거운 사회적 문제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영화로 충분히 그만의 가치가 있는 영화이지만, 그 이유때문에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간 수많은 대다수의 민중을 대표하지는 못하는 영화로 각색의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 본문 속 자료들은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2 권>을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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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으로의 끝없는 도피
26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
* 본 게시글은 시사회를 통해 개봉 전 관람한 후 작성한 후기이며,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크리에이터로써 참여하였습니다. 줄거리의 일부가 기재되어 있으니,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감상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나는 도망친다. 광신도 엄마와의 주일 봉사에서 도망쳐 어린 딸을 보러 가지만, 때로는 짐짝처럼 느껴지는 딸로부터 도망치기도 하고, 고객의 불평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헤드셋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나는 미혼모가 된 이후에는 음악으로부터 도망쳤고, 위탁 가정에서 딸을 데리고 오기 위해 엄마로부터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대회에서 우승해 베를린으로 가고 싶은 열망 또한, 성취보다는 도피에 가까운 감정임을 이나는 알지 못한다.
이나에게 대화는 고통과 동의어로 작용한다.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억압하고, 때로는 벼랑 끝으로 내몬다. 갖은 불평을 토해내는 엄마와, 빨리 아이를 입양보내자는 위탁 아주머니의 말들은 언제나 너무 아프다. 서로가 피로해지는 대화는 단절되는 편이 낫다. 그래서 그는 전화를 피하고, 헤드셋을 쓴다. 콜센터의 한가운데에 앉아 파티션에 입이 가려진 동료들을 보며, 이나는 마치 그들도 자신과 함께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바닥이 울릴 만큼 선명한 음악만이 이나를 붙잡아세운다. 그러니 이나는 계속해서 외면하고, 도망친다.
그마저도 완전한 도피는 불가능하다. 엄마의 망치질 소리는 신경을 긁고, 음악으로 가득찬 공간에서 휴대전화 진동음은 맥락을 끊어 버린다. 이나를 음악으로 대표되는 인물로 상정했을 때, 엄마의 전화는 불편하고 이질적인 장애물로 작용한다. 어쨌거나 이나의 최종 도피처는 돌고 돌아 결국 음악이다. 음악은 존재 자체로 숨을 틔우고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는 듯 보인다. 그토록 바라던 음악으로 다시금 돌아왔건만, 그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음악이 즐겨지지 않는다"며 베를린으로 꼭 가야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이나는 이러한 괴리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음악이 즐겨지지 않는 이유는 이나가 음악을 '꿈'이 아닌, '도피처'로 택했기 때문이다.
내내 도망치기만 하던 이나는 미친 것 처럼 보이던 엄마가 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사건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엄마에 대한 모난 감정들은 점차 깎여 나가고, 음악에 자전적인 요소들을 녹여냄으로써 둘의 갈등은 해결되는 듯 보인다.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나는 마지막에 걸려온 전화가 베를린 컴피티션의 합격 전화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나가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음악을 도피처로 여기지 않고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똑바로 마주보고자 다짐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나는 현재 아이와 엄마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기에 베를린은 더 이상 이나에게 해결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나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졌을까?
<둠둠>은 이나와 엄마의 갈등으로부터 점철된 한국 사회 내 미혼모의 위치에 관한 메세지를 계속해서 던진다. 나는 이나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나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찾았다고도 할 수 없다. 이나는 여전히 미혼모 가정 지원금을 받지 못할 것이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양육비를 대기 위해 더 힘겹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국적과 연령이 서로 다른 세 여성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엮인다. 이나가 베를린으로 갔다면, 태국인 여성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고, 이나가 나이가 든다면 엄마와 유사한 사회적 지위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나는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다. 엄마 또한 이나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나는 엄마의 애정을 거부하고, 어긋난 애정은 독이라 치부한다. 엄마는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며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나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며 지안이(이나의 딸)의 존재를 부정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기에 이나와 엄마는 끝없이 상처를 낸다.
<둠둠>에서는 플래시백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객은 현재의 사건들만 두고서 이나를 응원하거나 탓할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일들은 책임지기로 한 이의 잘못이 아니기에, 논외의 것으로 밀린다. 계속해서 문제상황이 제공되고, 건조하다못해 바스라지는 이나를 보며, 관객은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자꾸만 도망치는 그에게 자연스레 이입하게 된다. 무엇이 그를 도망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는지 사유하는 과정에서 <둠둠>이 단순히 꿈을 찾아 떠나는 유토피아적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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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스트 도터 The Lost Daughte, 2021
미국, 그리스, 드라마, 122분
감독: 매기 질렌할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로스트 도터>는 매기 질렌할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자 여성이 여성의 삶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지만, 여성이 숨기고 싶어 하면서도 분출하고 싶어 하는 감정'을 포착하고 이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상황과 당연하다 여겼던 지침서(가령 모성애라든지, 또 모성애라든지-)를 강제로 품어야 했던, 여성의 심리를 어떠한 생략과 축약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나 페란테 작가가 '잃어버린 사랑'(<로스트 도터>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조건으로 매기 질렌할 감독의 연출을 요구한 건, 이러한 원작의, 나아가 영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해 보여주는 것보다 여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할 필요 없이 쭉 늘여놓는 것이 감정적 동요와 이해를 더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주는 매력보다, 방법이 갖는 의미를 음미하는 게 <로스트 도터>를 보는 첫 번째 각도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고요한 해변에 돌연 보트가 침범한다. 이미 해변을 점령한 대가족의 막무가내식 태도도 눈감아줬는데, 자기 집 앞마당에 차를 끌고 들어오듯, 보트를 밀고 들어오다니. 모처럼 그리스로 휴가를 온 레다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평온한 하루를 모아서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를 풀고자 했는데, 쉽지 않다. 레다는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생각하며 차분히 휴가를 즐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꾸만 시선이 불청객들 사이로 향한다. 니나와 엘레나,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이 서로에게 꼭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레다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깊게 묻어놨던 기억이 불쑥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니나와 엘레나의 모습과 젊었던 레다와 어린 두 딸(비앙카, 마사)의 이야기는 시도 때도 없이 겹쳐진다. 엘레나가 니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떼를 쓸 때, 비앙카는 레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엄마의 머리를 때린다. 엘레나가 갑자기 해변에서 사라졌을 땐, 바다에서 마사를 안고 애타게 비앙카를 찾는 (패닉 상태에 빠진) 레다의 모습이 펼쳐진다. 레다는 자꾸만 젊었던 때로 돌아가 두 딸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고 지치게 했는지 떠올린다. 그럴수록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끝까지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고자 한다.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도, 또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던 레다는 고집스럽게 휴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니나와 엘레나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공중분해됐고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레다는 잠에 빠져있다가 침대를 점령한 매미에 화들짝 놀라고, 해변에서 자리를 바꿔 달라는 캘리(니나의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욕을 먹는다. 그날 저녁엔 누군가가 던진 솔방울에 등을 크게 다치기도 한다. 관리인의 추파를 불편해하면서도 여자로서의 욕망을 참지 못해 벙찐 유혹을 날리고 도망친다. 사라진 엘레나를 잘 찾아주고는 엘레나의 인형을 훔쳐와 아이를 돌보듯 인형을 품고 있기도 한다. 인형을 잃어버린 엘레나가 엄마(니나)와 가족들을 미치게 만드는 걸 보고도 레다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라 말하며 침묵한다. 대체 레다는 왜 이러는 것일까. 휴식을 즐긴다고 해놓고 왜 이리 예민하고 초조해하는 걸까. 나아가 왜 그렇게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못되게 구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로스트 도터>는 이를 숨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젊은 시절의 레다는 일곱 살 비앙카와 다섯 살 마사를 두고 집을 나갔다.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아봐 주고, 존재 이유를 본능적으로 일깨워 준 남자에게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불륜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고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즐기고 또 누렸다. 아이들과 통화를 하고 나면 매번 참았던 (속마음을 비집고 나오던) 말들을 쏟아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레다에게 자유로, 해방으로, 망가졌던 나를 다시 원상 복귀하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그녀에게 불륜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두 딸을 버린 일은 나를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랑을 위한 일이라 말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니나는 그때의 레다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영화의 두 번째 각도는 니나와 레다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지점에서 더 눈에 띄고 그리하여 관객이 모성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다.)
<로스트 도터>는 레다의 과거를 그녀가 스스로 자백하기 전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레다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숙소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등대의 불빛과 바닷바람과 함께 노출한다. 비앙카와 마사를 홀로 키워야 했던 레다가 점차 이성의 끈을 놓을 때마다 현재의 레다에겐 태풍이 불어닥친다. 과거의 정신적 고통이 현재의 신체적 고통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지쳐버린 니나의 눈에서 중년의 레다는 그때의 파편들이 비바람과 함께 몰려오는 걸 느낀다. 그녀는 니나를 이해하고 동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혐오한다. 현재의 니나와 과거의 자신을 잇는 걸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답답해하면서도, 그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 레다는 두 딸을 버렸던 자신의 선택을 바닷물에 쉽게 흘러보낼 수는 없었다. 이미 쓰인 이야기를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것처럼, 레다는 몸에 새긴 선택의 결과들을 지울 수 없었다. 솔방울에 맞은 상처를 굳이 치료하지 않은 점이 대표적이다. 레다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죄다 자신에게서 출발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모성애. <로스트 도터>에서 모성애는 감출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너무 많이, 또 빈번하게 여러 인물과 사건, 장치, 나아가 상징으로 쓰이는데, 전부 사실적이고 날카로워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뎌지기 힘든 화두이기도 하다. 어렵게 임신한 캘리에게 당신도 아이를 낳아보면 알 거라는 마치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는 레다부터 레다 자신과 현재 미치기 일보 직전인 니나, 레다가 엄마에게 받았던 인형(미나), 엘레나의 인형, 솔방울, 인형 속에 든 지렁이, 끊기지 않은 과일 껍질까지 영화에서 모성애는 다양한 형태로 속을 내보인다. 엘레나가 인형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자식을 향한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엄마의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비앙카가 레다에게 과일 껍질로 뱀을 만들어 달라 조르는 행위와도 일치한다.
작품 세계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이 '모성애'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성애를 인간의 본능이라 선뜻 말하기 어렵다.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인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영화가 품은 모성애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건, 현실 속 모성애도 같은 껍데기와 내용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이고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인간의 습성 중 모성애는 무엇일까. 차곡차곡 쌓여가는 감정이나 규칙들의 합인가? 처음부터 생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인가? 모성은 여성에게 어떤 자기 확신과 자기만족을 주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레다의 말처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알 수 없지만,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알아도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레다에게 모성은 자기 발목을 잡는 사랑이 되었을까.
모성과 '나'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레다가 끝내 어린 두 딸을 두고 집을 나간 건, '나는 늘 나인가'란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스트 도터>가 지속적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레다의 얼굴에 집중하는 것 또한 물음에 대한 일종의 해석본(세 번째 각도)이다. 복잡 미묘한 니나의 표정과 모성에 확신하는 캘리의 태도까지 여성에게 모성은 '나'를 만드는 하나의 요소다. 또한 모성은 일방적인 표현이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서로에게서 주고받는 표현으로 작동된다. 정석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란 건 분명하지만, <로스트 도터>는 모성이 여성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가를 조명한다. 모든 엄마가 모성을 똑같은 각도와 동일한 태도로 인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모성을 뒤틀거나 자신만의 모양을 찾는다. 그리하여 모성은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경험했다고 해도 오롯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채울 수 없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따라서 "절 나쁘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하면서 "지나가긴 해요?"라 묻는 니나의 말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 상반된 시각을 제시한다. 레다가 자신을 이기적인 엄마라고 소개하고, 니나에게 훔친 인형을 돌려주며 "난 비뚤어진 엄마니까요"라며 자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레다는 니나를 함부로 나쁘게 판단할 수 없다. 자기 자신조차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엄마라 말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식을 끔찍한 부담이라 말하던 레다는, 본인의 판단으로 선을 넘었고, 그 결과 허울뿐인 자유를 얻었다.
여성에게 모성이 들어오는 순간, 엄마란 존재가 불쑥 튀어나와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도, 좋지 않은 징조도 아닌 자식을 낳은 여성이라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미 엄마의 자식이었을 내가 느끼는 불변의 것이다. 레다는 엄마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했다. 그녀에게 엄마는 엄마의 의무를 저버린 여성이었다. 따라서 두 딸에게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겠다 다짐했고, 잠시 동안 그녀는 '나'를 제외하고 '엄마'가 됐다. 엄마가 '나'를 이루는 수많은 자아 중 하나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현실에 치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검열했고, 그 힘마저 빠져나가자 질식할 것 같다며, 엄마이길 포기했다. 엄마로 일할 능력이 되지 않아 그만두겠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엄마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인 듯이.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애는 다양하다. 레다는 모성을 한때 악으로 설정했다. 다른 것은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모성은 그럴 수 없는 범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니나는 레다의 모성을 모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범죄이자 태만이었다. 딸의 인형을 일부러 훔쳤다는 레다를 보며, 순간 니나는 그녀에게 이해받기를 거부한다. 왜? 니나의 모성은 다른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니나의 모성은 켈리가 가진 모성과 같은가. 아니다. 그들의 모성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없다. 각자의 모성이 남기는 진득한 진액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각도를 세우고 끝을 달리던 영화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모성으로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다. 하지만, 여성만큼 모성을 이해할 존재는 없다.
(남성들의 역할이 크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가 풍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여성에게 놓인 현실과 그들의 입장, 그리고 그들이 분출하는 감정에 주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짓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임을 지고 나서는 또 어떤가. 잊을 수 있는가? 잊을 수 있었다면, 레다는 해변에서 니나와 엘레나를 보고도 인자한 미소를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니나가 들고 있던 긴 핀에 찔릴 일도 없었겠지. 그리스를 떠나지 못하고 해변 자갈밭에 쓰러지는 레다의 뒷모습. 관객은 레다가 흘리는 피를 보며 그녀가 선택한 모성애의 결말을 봤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다는 그런 상흔을 갖고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두 딸의 엄마로 살았고, 앞으로도 살 예정이다.
레다는 스스로 긴 형벌을 준 셈이다.
마치 끊어지지 않게 깎은 과일 껍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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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위의 거북이와 바다 위의 용
영화 한산은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속 명량을 이은 두 번째 작품이며, 작중 시기 상으로 보았을 때는 한산도 대첩 이전부터 당일까지를 그리는 명량의 프리퀄 작품이다. 영화를 직접 보기 전 여러 평가들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공통된 의견은 전작인 명량의 단점을 개선한 영화라는 것이었다. 직접 영화를 보게 된 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명량이라는 영화의 단점을 고친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들이 꽤 존재하는 영화라고 느껴졌다. (이후 스포일러)
영화가 개봉한 지 한 달이 다 된 시점에 관람하게 되었는데,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VOD 포함 4번이나 봤던 시기이다 보니 박해일 배우님을 너무 자주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영화가 시작된 후 초반부에 들었던 생각은 '이 영화...캐스팅이 대단하다!'였다. 우선 실제 역사 속에서도 조선 수군의 암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원균 역을 손현주 배우님이 맡았다는 사실 자체가 신선하게 느껴졌고, 향도 역으로 나오는 안성기 배우님이 등장하셨을 때도 놀랐다. 이외에도 왜군 역으로 등장하는 변요한 배우님, 김성균 배우님 등등 반갑게? 느껴지는 배우님들이 많았던 것 같다.
다만 연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 작중 등장하는 왜군들의 일본어는 거의 '한본어'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나 와키자카 역의 변요한 배우님이 휘하 장수 이름을 부를 때는 한국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일본인이 아니다 보니 그런 부분이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느껴지지는 않았고, 카리스마 있는 표정 연기나 몸을 쓰는 방식 등은 자연스럽고 멋지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순신 장군 역을 맡은 박해일 배우님의 연기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 사실 헤어질 결심 속 연기에 너무 압도되어 많은 기대를 한 것도 있지만, 정말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산 속 박해일 배우님의 연기는 이순신 장군을 많은 고뇌를 가진 인물로 묘사하지만 고뇌의 내용에 대해 관객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름대로 그 이유를 생각해봤을 때, 우선 이순신 장군님 본인께서 과묵한 인물이었던 것에 대한 고증이 있을 것이고 다음으로 그의 침착하고 치밀한 지략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영화를 후반까지 보게 되면 부관들의 실수나 재촉에도 불구하고 99%가 아닌 100% 확률의 승리를 위해 인내하고 인내해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적을 끌어내리는 이순신 장군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략가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뇌와 고통을 겪어야 했을 텐데, 문제는 이 영화 속에서 관객이 그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장치가 박해일 배우의 표정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임진왜란 시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이 어차피 아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영화적인 재해석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부관들의 질문이나 요청 중 50%는 대꾸조차 하지 않는 장군의 모습을 보면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따라서 감정을 절제하는 장군으로서의 면모는 탁월하게 묘사되었으나 영화 속 주인공으로만 생각하고 연기를 보았을 때는 아쉽지 않았나 싶다.
다음으로 이 영화에서 아쉬웠던 점은 초반부 1시간가량의 전개가 지루하다고 느껴졌고 각 장면 속 사건들이 따로 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주변인들과 대화를 해 봐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많아서 정말 나의 주관적인 감상인 것 같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조선군과 왜군 두 진영에서 의견 차이나 새로운 작전 등이 계속 벌어지지만 모든 이야기가 유려하게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서 몰입 없이 전반부를 지루하게 감상했다. 또한 전작인 명량보다는 훨씬 덜할지 몰라도, 여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차가운 사극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대용이 거북선의 개량 버전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을 울며 설득하는 장면이나 의병장 황박이 준사에게 하는 대사 등은 '냉철한 지략가인 이순신 장군'이라는 영화의 중심축과 어울리지 않는 장면들이 아니었나 싶다. 다만 작중 이순신 장군의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는 정말 울림이 있는 대사와 이어지는 장면이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완전히 불필요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박해일 배우님이 인조로 출연한 '남한산성'같은 영화가 더 재밌다고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들만 너무 길게 쓴 것 같긴 한데,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 역시 확실했다고 생각한다. 우선 전작인 명량에서 개선되었다고 느낀 점은 악역(?)인 와키자카에 대한 묘사이다. 전작의 왜군 장수에 비해 훨씬 지력과 통찰력이 있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이는 결말을 한국인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영화를 더욱 긴장감 넘치게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실제 역사 속 와키자카의 모습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거북선에 대해 파악하는 것, 해상에서 매복하여 작전을 펼치는 것, 조선 수군에게 절대 먼저 접근하지 않으려 하는 점 등은 '한산도 대첩'이라는 영화의 배경을 뻔하지 않고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 영화의 제일 훌륭한 점은 역시 해전에 있다고 생각한다. 육지전을 묘사한 국내 영화 중에 '고지전'이라는 훌륭한 영화가 있다면, 해전에 있어서는 명량과 한산이 압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안갯속에서 적은 수의 배로 상대를 유인하는 조선 수군의 모습, 우리의 바다는 우리가 제일 잘 안다는 사실에 기반해 적군을 농락하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학익진으로 바다 위의 성을 만들어 적을 궤멸시키는 모습은 지루했던 전반부를 잊게 만들 정도로 큰 쾌감을 선사했다. 거북선에 대한 압도적인 묘사도 훌륭했다는 생각이 든다. 작중 왜군은 거북선을 보고 '복카이센'이라는 표현을 쓰며 두려워하는데, 영화 속 거북선의 모습을 보니 정말 그 시절에 해전 중 저런 적선을 맞닥뜨리게 될 경우 누구나 다리가 풀리지 않을까 싶었다. 적들 속에 홀로 들어가 무쌍을 찍는 개량된 거북선의 성능을 보고 있자니 앞서 언급했던 나대용의 눈물까지 설명되는 듯한....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영화는 후반부를 위해 기어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반부의 해전만으로도 티켓 값은 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남에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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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회퍼, 선한 능력으로 암흑속에 불을 밝히다
▷한줄평 : 빛을 기다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평점 : ★★★▷영화 :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Bonhoeffer: Pastor.Spy.Assassin), 2025.4월
2022년 12월 31일,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해를 맞이해야 할 시간.
그러나 창궐한 코로나19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운, 마치 지옥에 갇힌 듯한 나날을 이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 앞에서 ‘새로운 한 해’란 말조차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때 우연히 발견한 노래,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 wunderbar geborgen)’는 마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나는 그 노래를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다. 어느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밀려오는 듯했다.
♬ 선한 능력으로 작사 : Dietrich Bonhoeffer / 작곡 : Siegfried Fietz
1.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2.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3.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4.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후렴)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① 독일 NGO 한국선교사 독일어/영어/한국어버전 : GINA (홍혜진, 2020년)
https://www.youtube.com/watch?v=xwlUtvHLF8U
② 독일 작곡가 버전 : Siegfried Fietz (2012년)
https://www.youtube.com/watch?v=aN7dGz6NH5M&t=111s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그 선한 힘이 영혼을 짓누르는 고통의 순간에도 우릴 지켜 주실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날은 다시 주어질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며 절망과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그분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이 노래의 작사가는 바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2.4~1945.4.9) 목사.
그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 그리고 반(反) 나치 저항 운동가였다.
이 노래는 1944년, 그가 히틀러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힌 중, 약혼자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롯되었다.
내 사랑 마리아
1944. 12. 19. Prinz-Albrecht Straße
성탄절에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고, 이 편지를 통해 부모님과 형제자매,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쁘군요.
이 곳 새로운 형무소에서는 아주 적막한 날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는 순간이 될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느끼곤 했습니다.
마치 우리 영혼이 일상생활에서는 알지 못하던 신경체계를 고독 속에서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그래서 나는 단 한순간도 내가 혼자라거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당신과 부모님, 친구들, 전선에 나가 있는 제자들 모두 항상 나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요.
모두의 기도와 사랑의 마음, 내게 보내 준 성경 말씀, 그리고 지난날에 나누었던 대화, 음악, 책 등은 내 옆에서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확신하며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더 넓은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둘은 나를 덮어 주고, 둘은 나를 깨워주며”라는 옛 동요에 나오는 천사에 관한 노래처럼,보이지 않는 주님의 선하신 권능의 손이 아침에나 저녁에나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 어른들은 옛날의 그 아이들 이상으로 선하신 권능의 보호하심을 필요로 하니까요.
내가 불행할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행복과 불행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환경에 좌우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과 가족, 친구들이 모두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매일매일 기쁘고 행복합니다. (중략)사랑하는 마리아, 우리가 서로를 기다려 온 시간이 벌써 2년이 되었군요.용기를 잃지 말아요! 당신이 부모님 곁에 있어서 기쁩니다.
장모님과 온 가족에게 사랑의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지난밤에 떠오른 생각을 옮겨 보았습니다.
이 시는 당신과 부모님, 형제자매들에게 보내는 나의 성탄 인사입니다.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싸여(Von guten Mächten)
신실하신 주님의 팔에 고요히 둘러싸인
보호와 위로 놀라워라
오늘도 나는 억새처럼 함께 살며
활짝 열린 가슴으로 새로운 해 맞으렵니다.
지나간 날들 우리 마음 괴롭히며
악한 날들 무거운 짐 되어 누를지라도
주여, 간절하게 구하는 영혼에
이미 예비하신 구원을 주소서
쓰디쓴 무거운 고난의 잔
넘치도록 채워서 주실지라도
당신의 선하신 사랑의 손에서
두려움 없이 감사하며 그 잔 받으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기쁨, 눈부신 햇살 바라보는 기쁨
다시 한번 주어진다면
지나간 날들 기억하며
나의 삶 당신께 온전히 드리렵니다.
어둠 속에서 가져오신 당신의 촛불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하시며
생명의 빛 칠흑 같은 밤에도 빛을 발하니
우리로 다시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깊은 고요가 임하며
보이지 않는 주님 나라 확장되어 갈 때
모든 주님의 자녀들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그 우렁찬 소리 듣게 하소서
주님의 강한 팔에 안겨 있는 놀라운 평화여!
낮이나 밤이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다가올 모든 날에도 변함없으시니
무슨 일 닥쳐올지라도 확신 있게 맞으렵니다.
출처 : 『옥중연서』-디트리히 본회퍼와 약혼녀 마리아의 편지, 정현숙 옮김, pp. 344-347
2025년 4월, 시간이 흘러 나치와 히틀러와 같은 독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곳에,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는 그를 단순한 신앙인이 아닌 ‘저항자’로 소환해낸다.
영화는 그가 어떻게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하기까지 되었는지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단지 이념이나 영웅주의로 포장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의 고뇌와 결단의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스틸컷 / 히틀러 암살 모의 가담으로 체포되는 본회퍼(요나스 다슬러)
행동하는 신앙인 본회퍼
본회퍼는 베를린대학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유니언 신학교 유학 시절,
흑인 교회와 인권운동을 경험하며 정의와 평화, 신앙의 본질에 대해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후 히틀러 치하의 독일로 자발적으로 돌아가, 폭력과 불의 앞에 침묵하는 독일 교회에 맞서며 외친다.
당시 독일교회는 나치 독일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히틀러를 메시아로 숭배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악을 대면하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Silence in the face of evil is itself evil: God will not hold us guiltless.
Not to speak is to speak. Not to act is to act.영화 속, 나치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회퍼가 히틀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설교도중 장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그의 가족들은 예배가 끝난 후 조용히 격려의 말을 전한다.
“용기를 내, 디트리히.”, "우리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그의 신앙인으로서의 고뇌와 두려움을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스틸컷 / 교회 강단 설교에서 나치와 히틀러를 비판하는 본회퍼이후 그는 짓밟힌 독일 교회를 다시 세우고 무고한 유대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히틀러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정치적 용기는 신앙의 행위이며, 악에 직면하여 침묵하는 것은 결국 악을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미치광이 운전수가 차를 몰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계속 치게 두고 죽은 사람들만 잘 장사 지내줄 것이 아니라
그 운전대를 빼앗아야 한다’
본회퍼는 결국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대량학살에서 구하기 위해 나치 정보국에서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며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고
종전을 겨우 한 달 앞둔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서른아홉의 나이로 처형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마지막 유언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스틸컷
오늘, 우리는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현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상황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더 이상 ‘빛과 소금’이 아닌, 세상의 불의에 침묵하고 사회적 약자에 무관심한 종교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주기도문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문장은 추상적 선언에 그칠 뿐이다.
기독교 신앙이 살아서는 복을 받고, 죽어서는 천당에 가는 개인의 구원과 축복에 초점이 맞춰진지 오래다.
더 이상 교회 강단에서도 세상을 향한 정의와 평화가 선포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이에 불의한 거짓 선지자의 선동과 영향력만 커져 버렸다.
본회퍼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세상 속에서 잃어버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시 회복할지 도전한다.
예수께서 그 옛날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여기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무너진 정의와 평화는 회복되어야 한다.
본회퍼는 우리에게 묻는다.
“예수께서 오늘 이 자리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의 삶은 말한다. 신앙은 행동이어야 하며,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결국 악에 가담하는 것임을. 정치적 용기도, 결국 신앙의 표현임을.
그리고 그 선한 능력은 여전히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어둠이 깊어질수록 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오늘 밤, 나는 다시 그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 신앙인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 실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2.4~1945.4.9)의 모습
(우하 사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조각된 20세기의 순교자들, 맨 오른쪽이 디트리히 본회퍼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포스터
202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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