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평 :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뒤흔든 순간, 리 밀러는 더 이상 뮤즈가 아닌 증언자가 되었다.
▷평점 : ★★★
▷영화 :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LEE), 2025.9월
※ 본 글은 씨네랩(http://cinelab.co.kr) 초청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진은 빛과 시간을 기록한다. 조리개를 열어 공간을 재단하고, 셔터 스피드를 설정하여 시간을 채집한다.
그렇게 탄생한 사진은 공간에 시간을 더한 4차원적 결과물을 2차원 평면으로 단순화하고 응축시킨다.
그리고 어떤 시공간 속 사진가의 경험과 감정을 담아낸다.
따라서 사진은 ‘의도된 기록’이다. 우리가 어떤 사진 앞에서 강렬한 울림을 느낀다면, 이미 그 의도에 설득당한 것이다.
여기 두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어떤 의도가 보이는가?

사진 <히틀러 욕조 안의 리 밀러> / Lee Miller(왼쪽)와 David Scherman(오른쪽) 독일 뮌헨의 아돌프 히틀러 집 욕조안에서 (1945년 4월 30일)
1945년 4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리 밀러(케이트 윈슬렛)와 그의 동료 데이비드 셔먼(앤디 샘버그)은
다하우(Dachau) 강제 수용소의 해방 현장을 취재한 직후 히틀러의 아파트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밀러는 진흙투성이의 군화를 매트위에 벗어놓고 나체 조각상과 히틀러 초상화 아래에서 ‘더러움을 씻어내는’ 의식을 사진 속에 담아낸다.
히틀러의 은밀한 사생활의 공간이었던 욕조 안에서 ‘총통의 세상은 이제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사진의 의도는 ‘굴욕감’이다. 이 도발적인 사진은 나치의 몰락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하는 이미지로 역사에 기록된다.
“나는 히틀러의 집에서 사진을 찍었고, 히틀러의 침대에서 잠을 푹 잤습니다.
심지어 다하우의 흙을 히틀러의 욕조에서 씻어내기도 했습니다.” / 리 밀러
이 한 장의 사진은 그녀의 삶 전체를 설명한다.
모델과 뮤즈로서 살아왔던 리 밀러가 어떻게 대담한 2차 세계대전의 사진작가가 되었을까?
모델, 뮤즈, 배우, 아티스트에서 종군기자로, ‘찍히는 삶’에서 ‘기록하는 삶’으로
리 밀러(1907~1977)는 1907년 미국에서 태어나, 1927년 보그(Vogue)의 커버 모델로 데뷔해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다.
초현실주의 아티스트 만 레이, 피카소의 뮤즈로 활동하며 예술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리 밀러(Lee Miller)의 모델로서 활동시절의 사진들

(좌) 리 밀러의 ‘피크닉’(1937년) 사진 / (우) 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스틸컷
“난 사진 찍는 게 더 좋아요. 찍히는 것보다.”
그녀는 모델이 아닌 사진가로서, 타인의 시선에 포획된 삶이 아니라 스스로 기록하는 삶을 선택했다. 보그 소속 종군기자로서 카메라를 들고 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는 바로 이 전환점을 따라가며, 그녀의 시선이 포착한 전쟁의 참상과 상흔을 담담히 그려낸다.


(위) 리 밀러의 종군기자 시절 사진 / (아래) 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스틸컷
전쟁을 기록한 리 밀러의 카메라, 역사의 증언이 되다
밀러는 처음에는 간호사, 여성 군인, 폐허가 된 건물을 담으며 전쟁의 흔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곧 “왜 여성은 최전방에 갈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결국 1944년 총탄이 오가는 최전선에 뛰어들어 여성이라는 한계와 사회적 규범을 뛰어넘는 여성 특유의 시선으로 역사를 기록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시작한 그녀의 사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역사의 증언이 된다.
네이팜탄 첫 투하, 노르망디 상륙작전, 파리 해방, 알자스 전투, 그리고 1944년 독일 부켄발트와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참혹한 장면까지.
그녀는 과거 초현실주의 아티스트의 경험을 살려 파괴와 죽음의 이미지와 동시에 그 속에서 스치듯 드러나는 삶과 아름다움을 함께 포착해냈다.
생 말로에서 찍은 <부츠와 탄약>(1944년)은 육체가 사라진 자리에 뼈처럼 놓여 있는 탄약의 모습은 전쟁의 잔혹함을,
종전 후 다하우에서 찍은<운하에 떠오른 죽은 SS경비병>(1945년)은 학살의 공포와 그 주변의 평화로운 풍경이 강렬하게 대비를 이룬다.

리 밀러의 대표 사진들 : <부츠와 탄약>(1944년), <운하에 떠오른 죽은 SS경비병>(1945년), <방화 마스크를 쓴 여인들>(1941년), <전쟁 복장>(1942년),
<보조 영토 서비스 탐조등 조작원>(1943년), <텐트 수술실>(1944년), <재판 받는 독일 부역자>(1944년),, <라이프치히 시장의 딸의 자살>(1945년),
<폐허가 된 빈 오페라 하우스에서 ‘나비 부인’을 부르는 오페라 가수>(1945년)
그녀와 셔먼이 함께 촬영한 다하우 해방 직후의 사진들은 1945년 <보그> 6월호에 'Believe it(믿어라)’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밀러는 런던에 있는 편집자 오드리(안드레아 라이즈보로)에게 사진을 보내면서도 게재될 확신이 없었기에
이것이 사실임을 믿어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I IMPLORE YOU TO BELIEVE THIS IS TRUE!)라는 메모를 함께 남겼다.


1945년 <보그> 6월호 ‘Believe It’과 다하우 수용소 사진들 / 출처 : VOGUEARCHIVE https://archive.vogue.com/article/1945/6/believe-it
남겨진 상처, 그리나 드러난 값진 유산
그러나 리 밀러는 생전에 자신의 사진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1977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앤소니가 다락방에서 6만 장에 달하는 사진과 필름을 발견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의 작품을 정리해 아카이브를 만들고, 책으로 출간하며 그 유산을 세상과 나눴다.
영화는 아들 앤소니(조시 오코너)가 리 밀러와 인터뷰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앤소니는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어머니가 겪었던 전쟁의 참상과 상흔을 마주한다.
폐허가 된 건물 속에서 굶주림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한 소녀의 눈빛이 전하던 ‘생명에의 갈구’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전쟁의 잔상이다.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고 대담해 보였던 그녀는, 이제까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알코올 중독에 시달려왔다.
이제서야 앤소니는 어머니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동시에 한 여성이 발휘한 예술가적 용기는 어느 누구도 쉽게 남길 수 없는 위대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것도 알게 되었다.
리 밀러의 카메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증언한 위대한 유산이었다
[참고자료]
1. The National WWII Museum https://www.nationalww2museum.org/war/articles/lee-miller-witness-concentration-camps-and-fall-third-reich
2. ARTBOOK https://www.artbook.com/blog-featured-image-lee-miller-hitlers-bathtub.html
3. VOGUEARCHIVE https://archive.vogue.com/article/1945/6/believe-it
4. LEE MILLER ARCHIVES https://www.leemiller.co.uk
5. 히틀러의 욕조에서https://www.vintag.es/2020/10/lee-miller-david-scherman.html
6. Lee Miller의 사진집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gallery/2023/sep/12/surrealism-and-war-the-life-of-lee-miller-in-pictures
영화 <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포스터
2025.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