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중독2022-05-05 14:12:11
마법 같은 순간을 포착한 3개의 이야기, <우연과 상상> 리뷰
(偶然と想像, Wheel of Fortune and Fantasy)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배우 후루카와 코토네, 현리, 나카지마 아유무, 모리 카츠키, 시부카와 키요히코, 카이 쇼우마, 우라베 후사코, 카와이 아오바
※개봉 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시사회 참석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개봉일 : 5월 4일
개인 평점 : ⭐️⭐️⭐️⭐️+0.5 (4.5/ 5)
우연과 상상 리뷰 3줄 요약
1. 3개의 단편 영화로 구성된 영화
2. 제목처럼 우연과 상상이 존재하는 순간들을 다룬 스토리
3. 우연과 상상이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연과 상상> 포스터 [출처: 씨네랩 제공]
-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핫한 감독
최근에 먼저 개봉했던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감독님으로 그보다 앞서 <우연과 상상>이 베를린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해피아워>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상영시간이 무려 317분이라 차마 보진 못했다.
<우연과 상상>이 <드라이브 마이카>보다 먼저 나온 영화지만 <드라이브 마이카>는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이랑 골든 글로브 비영어영화상까지 받아서 먼저 개봉하고 뒤이어 우연과 상상이 개봉하는 것 같다.
<우연과 상상> 스틸 컷 [출처: 씨네렙 제공]
- 우연과 상상에 대한 3개의 이야기
영화 속 등장하는 3개의 단편 모두 우연과 상상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다.
단편이라는 사전 정보 없이 보러 갔었기 때문에 첫 번째 이야기는 뒷이야기가 궁금했는데 홀연히 끝나버렸다.
그에 반해서 두 번째 이야기는 조금 더 닫힌 결말에 가까웠는데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렀던 것 같다. 두 번째 이야기가 가장 기승전결이 다이나믹 했는데, 중간에 극장 내 웃음소리가 들릴만큼 피식하는 장면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는 스토리는 아니었다.
마지막 이야기쯤 되니까 이번 스토리에서는 어디에 ‘우연’과 ‘상상’이 있을지 예상하면서 영화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우연’도 ‘상상’도 예기치 못한 부분이었고 3개의 스토리 중 가장 훈훈했던 내용 같아서 여운이 있던 마무리였다.
가장 재밌게 보았던 건 첫 번째 이야기로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꽤나 복잡한 심리묘사가 보는 재미를 더해서 좋았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첫 번째 이야기에는 미모의 한국계 배우분께서 출연하셨다.
- 우연과 상상 30초 예고편
*단편으로 구성된 영화이기 때문에 예고편도 스포일러가 꽤 크다고 생각해서 30초 버전으로 가져왔다. 딱히 반전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예고편도 보지 않고 보러가는 것을 추천하는 편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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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다이애나 스펜서의 슬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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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 아이가 사람들의 손을 타면 안 좋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누구나 너무 예뻐하고, 예쁘다고 쓰다듬고 한 번 볼 걸 두 번 보게 되는 아이는 명이 짧다나. 그리고 그들은 익명의 죽은 아이들이 얼마나 예뻤으며 주변에서 얼마나 예쁘다고 난리였는지 회상했다.
이제는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어떻게 무너지는가. 우리는 그런 케이스들을 자주 확인했다. 영화를 보면서 몇몇 사람들을 떠올렸다. 관심이라는 포장을 씌우면 비수도 무디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영국에서는 당연하고,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평범한(사실 귀족 출신이지만) 유치원 교사 여자가 왕자님과 결혼하는, 말 그대로 신데렐라와 같은 러브스토리로 비추어졌다. 레이디 다이애나의 결혼식부터해서 패션까지 유행했고 그 스타일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한편으로는 모나코 공국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와도 비교할 수 있겠다. 그들은 다 떠났는데 디올의 레이디백, 에르메스의 켈리백은 아직까지 사랑받는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사흘간의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이다. 다이애나는 기사도 없이 별장으로 향한다. 지도를 보아도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내비게이션은 정말 대단한 발명품이다). 한참을 헤매다 보니 어릴 적 살던 동네이다. 아버지의 외투로 만든 허수아비를 발견하고서야 깨닫는다. 그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여왕보다 늦게 별장에 도착한 다이애나는 별장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삐걱거린다. 크리스마스를 즐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별장에 들어왔을 때의 몸무게와 나갈 때 몸무게를 재는 것.
이 관습은 단지 '재미'로 시작되었다. 몸무게를 다는 것이 재미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몸무게의 족쇄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뿐이다. 대상화되지 않는 쪽, 관찰자인 쪽이다. 관찰자는 누구인가. 권력을 쥐고 있는 쪽이다. 영국의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판옵티콘처럼, 보는 자는 권력을 쥔 자이다.
웨일즈의 공주, 왕세자비, 신데렐라인 레이디 다이애나는 안타깝게도 언제나 대상화되었다. 궁 안에서는 궁의 예절와 법도를 어기지 않는지 감시받아야 했고, 궁 밖에서는 파파라치들의 카메라에 비친 관찰자였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이 따라붙는 삶, 매일 얼굴이 신문 1면에 대문짝하게 나오는 삶, 뭘 입고 뭘 했는지 모두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자신은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삶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그때 한 명이라도 자기의 편이 있다면, 아주 작은 진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거기에 기대어 살겠다. 다이애나에게 남편 찰스 왕세자가 그 역할을 해주었어야 했으나 찰스는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는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만나왔고, 결혼 후에도 정리하지 못한 여자가 있었으니, 아내는 그저 왕실에 맞는 허울을 뒤집어 쓴 껍데기에 불과했다. 심지어 내연녀와 똑같은 진주목걸이를 선물받았다는 걸 아는데도 그 목걸이를 크리스마스 내내 걸어야 하니, 지옥이 달리 지옥이 아니다.
다이애나도 그렇지만, 왕실 역시 다이애나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인들의 모든 관심은 다이애나에게 쏠려 있었다. 왕자인 찰스가 가장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찰스 왕자의 비(妃) 다이애나'가 아닌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남편 찰스가 되어버린 꼴. 게다가 딱딱하고 절제되어 있던 왕실의 분위기와 다이애나의 다정한 이미지 사이의 괴리 때문에 영국 사람들은 다이애나에게 더욱 열광했다.
영화에서 찰스의 역할은 미미하다. 찰스뿐만 아니라 왕실의 누구도 돋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역도 없고 다이애나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방조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을 쳐다보지만, 왕실에서 다이애나는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크리스마스 이브 밤, 아이들과 함께하는 놀이에서 '엄마는 왜 슬픈지' 묻는 큰아들 윌리엄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먹은 것을 다 게워내는 다이애나에게, 남편 찰스는 위로는 커녕 요리사들을 생각해서 토하지 말라는 말을 할 뿐이다. 그나마 다이애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시종 매기까지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자 다이애나의 불안은 극에 달한다. 사방에 믿을 사람 하나 없는 다이애나는 앤 불린의 책을 읽으며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이다. 숱한 여자들과 바람을 피운 헨리 8세는 오히려 앤 불린에게 외도의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앤 불린은 참수형으로 죽는다.
다이애나는 아마도 앤 불린에게 자신을 투영한 것 같다. 정작 바람은 본인이 피우고 있으면서도 다이애나를 단속시키는 찰스의 모습은 헨리 8세를 떠올리게 하기 충분하다. 그러지 않아도 다이애나는 임신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몇 번의 자해가 있었고, 거식증과 폭식증도 있었다. 그럴 때 누구라도 다이애나의 곁에 있어주었더라면 사정이 좀 나아졌을까.
먹지도 못하고, 행사에 참여도 하지 못하던 다이애나는 자꾸만 어릴 때 살던 집으로 가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저지당한다. 기어코 폐허가 된 옛날집에 들어갔을 때, 다이애나의 눈앞에 유년시절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웨일즈의 공주, 왕세자비, 레이디 다이애나가 아닌 '다이애나 스펜서'로서의 삶.
크리스마스 연휴 마지막날에는 꿩 사냥이 관습인가 보다. 꿩은 아름다운 깃털을 가졌지만 사냥용으로 길러질 뿐이다. 죽임을 당하기 위해 사는 존재. 작은아들 해리는 아직 꿩 사냥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왕실의 법도에 의해 꿩사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애나는 꿩 사냥터에 나타난다. 그리고 아들들을 데리고 별장을 떠난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최고급 셰프가 만든 복숭아 수플레가 아닌 KFC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KFC 점원이 주문자의 이름을 묻자 다이애나는 말한다. '스펜서'
*
<스펜서>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삶을 새롭게 써보고자 했다. 다이애나에 관한 영화는 이미 몇 편 나와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다이애나의 사랑, 안타까운 이별 등이 아니라 왕실의 일원으로서 다이애나의 슬픔과 불안, 우울 등의 감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비운의 왕세자비' 같은 타이틀 말고, 인간 다이애나 스펜서에 관하여.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이혼 후 활발하게 사회운동을 해나간다. 아프리카 빈민구조, 지뢰제거, 적십자 활동 등을 해나가며 '대상'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이혼 후에도 파파라치의 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파파라치를 피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모자라, 즉사가 아니었음에도 파파라치 때문에 골든타임을 놓쳐 죽고 말았다. 영국 국민들은 슬픔에 잠겼으나 왕실은 끝까지 냉정했다. 그러다 블레어 총리까지 추모를 할 것을 촉구하여, 왕실장으로 장례식을 치른다. 그때 윌리엄, 찰스 왕자는 고작 10대 초중반이었다. 엄마가 죽었는데도 왕실의 법도를 따르며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그 심정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비극은 어쩌면 현대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뻣뻣한 왕실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해리 왕자와 결혼한 매컨 마클은 신문사의 횡포에 참지 않고 사생활침해 소송을 꾸준히 하고 있다. 물론 왕실의 인종차별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모두의 관심 속에 사는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한두 사람의 사랑이 지지대가 되어 줄 것이다. 우리는 관심이라는 무기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보냈다.
관람 포인트
* 다이애나 역을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목소리와 발성이 거의 다이애나 그 자체였다. 영화 상영 전에 잠시 크리스틴의 인터뷰를 보여주는데, 다이애나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목소리도, 제스추어나 표정도 옛날 다이애나비의 영상 속의 그 모습 같다. 영화를 보기 전후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영상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찍은 클레르 마통이 촬영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보여주었지만 그가 보여주는 미술적 감각은 정말 아름답다. <스펜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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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의 변화는 실패했다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는 보수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부모는 자녀가 안전하고 좋은 길로만 가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라면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게 되는 그 이후에도 완벽하게 안전한 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입장에서 가장 최선은 그 많은 길 중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다. 이미 자신이 걸어왔던 길, 그게 아니라면 주변에서 누군가가 이미 지나갔던 안전한 길로 자녀가 가길 원한다.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게 좀 더 편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자녀의 입장에서 그 길은 이미 남들이 가봤던 길이다. 전혀 새롭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자녀들이 새로운 길을 궁금해한다. 그저 호기심에서 머물 수도 있지만 일부는 그 호기심의 벽을 뚫고 새로운 경험을 하러 뛰쳐나간다. 부모의 생각대로 거기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최대한 조심하면서 나아가는 자녀는 그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롭고 창의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그건 부모가 생각하지 못했던 발전이자 진보다.
보수적인 부모와 진보적인 자녀의 갈등을 다룬 영화
영화 <인어공주>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자녀와 부모의 대립이 전면에서 다뤄진다. 물론 이 영화의 이야기 중심 주제는 젊은 두 남녀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 사랑을 위해서 넘어야 할 관문은 남녀 모두에게 부모다. 부모는 이 둘의 관계를 반대하며 더 나아가 각자가 살고 있는 새로운 사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를 위험한 존재로 보며 교류를 차단하려 애쓴다. 그런 상황에 놓은 두 남녀에게는 더 상대방에게 다가가려는 힘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 힘은 일종의 반항심으로 부모에게 반기를 들게 한다.
영화의 중심인물은 에리얼(할리 베일리)이다. 인어인 그녀는 인간 사회와 인간이 쓰는 물건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아버지 트리톤 왕(하비에르 바르뎀)의 눈을 피해 인간이 쓰는 물건을 모으고 배 위 인간들의 모습을 훔쳐본다. 인간에 의해 아내를 잃은 트리톤 왕의 입장에서 인간들은 위험한 종족이고 교류가 불가능한 종족이다. 그래서 그는 막내딸은 에리얼이 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에리얼의 자유를 속박하면서 그녀를 보호하려 하는 것이다. 이 속박은 에리얼의 반항심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크게 만든다.
에리얼이 사랑에 빠지는 에릭 왕자(조너 하우어 킹) 역시 보수적인 어머니 밑에서 생활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입양된 그는, 안전한 길로 가길 원하는 어머니의 말을 답답해한다. 어느 날 배가 폭풍우에 침몰하게 되고, 에리얼이 그를 구하면서 그는 바다에서 자신을 구해준 존재를 찾아다닌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이용해 은인을 구해 다니는 그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실사영화
1989년에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실사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영화 <인어공주>는 보수적인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 독립적인 선택을 하는 에리얼과 에릭 왕자의 사랑이야기를 원작과 거의 동일하게 담았다. 과거 우리가 알고 있는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으면서 몇 가지 변주를 줬다. 에리얼을 백인에서 흑인으로 바꾼 것이 가장 큰 변화이고, 음악의 색깔도 좀 더 R&B 의 느낌을 넣어 변주했다. 이야기 자체를 변주하진 않았기 때문에 큰 줄기는 익숙한 느낌을 주고, 작은 변주로 새로운 느낌을 주려 노력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이 변주가 그렇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주인공 에리얼을 흑인으로 변경한 것은 큰 변화다. 최근 디즈니 작품들의 방향은 좀 더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주의(PC주의:Political Correctness)를 여러 작품에 적용하면서 마블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유색인종으로 바꾸고,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작품들에도 인물들의 인종과 역할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이런 디즈니의 행보는 변화가 적용된 영화들이 훌륭하고 재미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마블에서 최근 개봉했던 영화들 중 <샹치>, <블랜팬서: 와칸다 포에버>,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는 모두 주인공이 유색인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흥행성적이나 관객들의 평가가 과거의 마블 시리즈들에 비해서 그렇게 좋지 않다. 무엇보다 바뀐 캐릭터에 대한 호감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꽤 크게 다가온다. 팬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디즈니의 대표 작품인 <인어공주>를 실사화하는 프로젝트는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한 변화
<인어공주>의 주인공 에리얼을 흑인으로 바꾼 선택은 제작 단계부터 무수한 논쟁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에 기억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속 에리얼의 이미지와 다르다는 것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 디즈니는 마치 에리얼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것처럼 자신의 뜻을 그대로 밀어붙여 작품을 완성했다. 뮤지컬 장르의 영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롭 마샬 감독을 고용해 완성도를 높이려 애썼다.
에리얼 역을 맡은 할리 베일리는 가수 출신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노래들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 하지만 문제는 에리얼이라는 배역과 할리 베일리의 이미지가 좀처럼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흑인이라는 인종의 문제를 떠나서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진 원작의 에리얼에 비해 할리 베일리가 맡은 에리얼의 이미지는 좀 더 강인하다. 할리 베일리의 머리스타일인 드레드록스(레게 머리)도 기존의 인어공주 이미지와 상반되는 인상을 준다. 이런 요소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몰입을 적지 않게 방해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에릭 왕자와의 감정 교류와 갈등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만든다.
대표적인 영화의 사운드트랙 중 '언더더씨'가 흥겹게 흘러나오고 다른 노래들도 들려오지만 캐릭터들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한 탓에 보는 관객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이건 각본의 탓도 크다. 과거 애니메이션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끌고 왔지만, 그 당시에는 진보적으로 보였던 캐릭터들이 지금은 너무 익숙하고 진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기존의 틀을 벗어나 반항하는 이야기는 지금 시대에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너무 충실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안정을 추구했지만, 그래서 이 영화가 새롭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한다.
이 영화의 다른 단점으로는 어두운 화면을 들 수 있다. 물속에서의 모습도 마찬가지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장면들도 너무 어둡게 느껴진다. 좀 더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어색한 CG와 어두운 화면이 섞이면서 영화의 질감을 떨어뜨린다. 무엇보다 이런 어두운 화면은 밝은 영화의 분위기를 낮춰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영화 말미 인어족들이 에리얼의 뒤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장면은 분장한 사람이 등장한다는 생각이 들어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는 에리얼의 고모인 울슐라(멜리사 맥카시)다. 원작과 비슷한 이미지로 등장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를 훌륭한 가창력을 뽐낸다. 비록 악역이지만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캐릭터다.
영화 <인어공주>는 아이들이 보기에 다소 긴 러닝타임(135분)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어두운 화면과 조금 무섭게 등장하는 울슐라 캐릭터 덕분에 아이와 부모가 함께 보기에도 적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야기와 캐릭터, 러닝타임 등 영화가 가진 장점에 비해 단점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영화 <인어공주>는 여러모로 아쉽게 느껴지는 실사영화다. 이 영화의 흥행 성적에 따라 향후 디즈니가 실사화하는 여러 영화들에 변화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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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에게 물어본 <인어공주(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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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니, 태어난 이상 너희들은 다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이다. 한 여자가 벼랑 끝에 서 있다. 아니 배 위에 있다. 삶의 희망을 잃은 여자. 그 배 아래로 뛰어내린다. 여자를 다시 살린 건 독거노인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다. 얼굴이 기괴한 과학자 갓윈. 외모를 보고 성격을 판단하면 안 된다. 하지만 갓윈 박사는 어림없다. 성격마저 괴팍한 갓윈. 그에게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그건 진실이다. 다시 태어난 여자 벨라 벡스터는 뭔가 특별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벨라. 벨라는 마치 남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건 죽어가는 여자의 뇌에 그녀가 임신 중이었던 아이의 뇌를 이식해서 살려냈기 때문이다. 벨라는 아이의 뇌로 다시 태어났다. 이 말은 즉슨 벨라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의미와 통한다. 이런 벨라에게 남자 한 명이 접근한다. 남자는 갓윈의 제자 맥스(레미 유세프)다. 벨라를 짝사랑하는 남자 맥스. 소심하게 고백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소심하게 청혼을 건넸던 벨라와 바람둥이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이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 맥스. 카메라는 벨라와 함께 리스본 찍고 여기저기 모험담을 펼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기괴함이라는 정서에 있어 도가 튼 아티스트다. 스타일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란티모스'하면 떠오르는 장면부터 이야기해 보자. 굳이 마이너 한 예술영화의 세계까지 파지 않더라도 <킬링 디어>에서 배리 키오건이 파스타를 먹는 장면 정도는 오며 가며 사람들이 봤을 클립이다. 키오건이 훌륭한 연기자라는 사실에는 여지가 없다. 연기를 잘하니까 임팩트를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할리우드를 주의 깊게 본 영화팬들이라면 '란티모스에게 이 장면만 있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괴함의 정점은 란티모스가 국제적으로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영화 <송곳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곳니>를 보면 신체 노출부터 시작해서 폭력묘사까지 이 세상 기괴함은 다 가져다 놨다. 갑자기 이 감독에서 봤던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더 떠오른다. <더 랍스터>에서 갑자기 총을 쏴서 직원을 죽이는 장면, <킬링 디어>에서 초반 심장 수술 장면, 니콜 키드먼이 맡은 안나가 길쭉하게 뻗어있는 모습이 그렇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임팩트를 주는 방법을 아는 감독이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파스타를 징그럽게 먹는 것이나 <송곳니>에서의 가족에 대한 비유 같은 것들은 일상적인 것에서 조금 비틀어서 '인위적인 것'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쉽게 다들 알고 있는 '불쾌한 골짜기'를 영화의 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볼 수 있는 <킬링 디어>와 <더 랍스터>에서 영화 이야기의 형식과도 이어진다. <킬링 디어>에서 영화는 어떤 대상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하다. 그냥 알고도 당하라는, 전지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물들과 관객들을 괴롭힌다. 실제로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를 위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부감 숏(천장에서 바닥으로) 찍는 것 같고 사운드는 관객을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그냥 일반적인 카메라와 사운드로도 이 영화가 가진 인간의 굴레를 묘사할 수 있는데 내내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비튼다. <더 랍스터>도 사랑에 실패하면 동물이 된다는 설정은 곧 '사랑이 억지로 되는 일인가'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이것 역시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영화가 인간이 어떻게 사랑에 빠질까?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억지로' '근거를 들어서'사랑에 빠지지 않는 인간의 단면을 잘라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해 보면 그는 인위적이라는 속성을 시각적으로, 또 플롯의 핵심으로, 장면 연출로 소화하는 아티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 <가여운 것들>은 그 모든 것들이 고농도로 함유되어 있는 영화다.
가령 이 영화의 미술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이 영화의 세트장과 조명, 의상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란티모스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영화는 란티모스가 구축한 거푸집 아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응당 당연하게 골라야만 했던 선택지다. 그럼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무엇일까 따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핵심을 '시스템'이라고 본다. 영화는 벨라와 그녀를 둘러싼 세상을 다룬 것이다. 기득권이 지배하는 세상을 다루고 싶어 하는 영화가 그 안의 세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나사가 빠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반대측면에서 질서를 깨는 인물들의 모습을 스크린 안으로 갖고 오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이 인위성에 대한 부분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방식과도 이어진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면서 후반부를 제외하고 다들 인형의 집처럼 뚝딱거린다고 느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도가 있다.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을 비판하는데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문법으로 연기한다면 그 고지식함과 완고함이 체감이 안 될 수도 있다. 세계에 대한 인물의 대응을 자연스러움으로 표현해서 이질감을 키우는 선택지를 둔 것이다. 공간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가 기괴한 동화로 연출한 이유가 분명하다. 왜 이 영화는 일종의 성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을까? 영화가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기의 톤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걸 보여준 것처럼 공간과 미술로도 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자의 속성이 전적으로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뇌'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섹스신이 적나라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두 소재라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핵심에 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뇌와 섹스라는 소재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큰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 아니다. 왜? '뇌'를 이식한 인간의 실험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체다. 매춘 그러니까 성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역시 생명체다. 마찬가지로 갓윈 박사의 실험체는 그 나름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내가 어떤 세상에 태어날지 고를 수 없다는 점에서 시스템에 일조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두 소재가 이야기의 맥락에서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벨라는 두 인위적인 행위를 직접 겪는 개체이기도 하다. 영화도 이 구분선을 일부러 흐린 것이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시스템에 대해 표현한 부분이 보인다. 이 영화의 사운드 중 몇 음악은 거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시그니처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광각렌즈를 활용한 촬영방식도 이 영화의 기괴하고 독특한 에너지만을 강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시스템에 대항하는 영화가 기존의 영화 만들기 관습에 편승해서 제작된다면 뭔가 모순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촬영이나 사운드보다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하게 시스템을 강조하는 것은 편집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섹스신이 들어가는 방식은 뭔가 이상하다. 구체적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갈 때 맥스가 "나는 벨라가 무사하길 바란다"라고 말하는 장면 바로 다음으로 덩컨과 벨라의 성관계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나름대로 블랙코미디를 구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장면들과 비교했을 때 위 두 가지 사운드와 촬영을 활용한 것과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전형적인 연출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전개에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섹스신을 느닷없이 보여주거나, "뜨거운 뜀박질"이 대사에 전면으로 나오더라도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나는 장면이 벨라가 어디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 후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벨라가 덩컨에게 "우리 뜨거운 뜀박질을 해요!"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여운 것들>이 이전에 수도 없는 섹스신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영화는 벨라가 신체를 노출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이 부분을 생략해 버린다(편집에 대한 부분은 아니지만 이후 벨라가 매춘을 하는 장면에서도 벨라가 노숙자에게 "갑자기 들어가면 안 된다"식의 대사를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것은 영화가 이야기의 리듬을 섹스신을 활용해 변화를 준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기존 영화들이 유지해 온 흐름을 사운드와 편집, 촬영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거부하는 형태는 곧 영화의 플롯과도 이어진다. 영화는 일부러 두 명의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왜? 이야기에서 벨라의 내적 성장을 이끄는 인물들이기도 하지만 이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보도 영화에서 어떤 것들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흑인 남자는 옆에 앉아있는 백인 아줌마에게 "섹스를 안 한 지 20년 됐다니 딱하네요"라고 대놓고 면박을 준다. 글쓴이는 이 대사가 가스라이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후 이 흑인 남성 캐릭터가 하는 대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코멘트를 보고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틀이 넓다는 걸 느꼈다. 영화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다루며 정체성에 대해 다루지만 사실 이 틀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보여주는 건지를 암시하는 설정이라고 봤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인물과 인물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건 '니체'에 대한 짧은 지식이었다. 니체가 인간의 몸을 조명했고 영화가 섹스를 다룸에도 이유가 있다. 하지만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벨라 / 세상을 구분 짓는 구분선이 니체의 개체론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건 그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내가 알고 있는 니체의 개체론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이 여기서 근거하지 않나?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 <가여운 것들>이 다루는 흑인 남성 캐릭터는 사실상 벨라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면서 '섹스 20년 동안 못한 여성을 비웃는'것이 인간이고 이 세상인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 캐릭터도 이 니체의 사상 하에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흑인 여성 캐릭터는 벨라에게 공감한다. 바로 정서적인 유대를 나누는 듯하다. 하지만 이 인물 역시 벨라에게 성적 행동을 한다. 단순히 이 흑인 여성 캐릭터가 무슨 목적으로 벨라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덩컨이나 매춘 노숙자들도 벨라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흑인 여성과 노숙자는 동격에 놓이는 듯하고, 이 흑인 여성 캐릭터 역시 이 영화의 세상을 이룬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흑인 남성 캐릭터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거시적인 개념을 건드렸다면 반대로 여성 캐릭터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유대감과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다룬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개체를 가지고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루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줬다.
영화가 몇 소재를 인위성이라는 모티브와 함께 다뤘다는 것은 영화의 맥락과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인위적으로 벨라의 분신을 만들어 여성 서사로서의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벨라의 분신들이 여럿 등장한다. 동물과 동물을 이어 붙인 형태에 대한 부분이다. 개랑 닭을 이어 붙인 모습이나, 학과 얼룩말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여러 장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벨라부터가 여성의 몸에 남자의 뇌를 결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런 분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건 펠리시티(마가렛 퀄리)다. 이 펠리시티가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이 펠리시티는 영화의 핵심인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해 중요하게 작동한다. 우선 돌연변이 동물들이나 펠리시티나 누가 만들었을까? 의 측면에서 그 근원을 따져야 한다. 이들을 만든 인물은 아마 갓윈으로 보인다. 갓윈은 영화 안에서 대놓고 '창조주'라 불리며 이 시스템을 만든 인물로 묘사된다. 남성 캐릭터가 세계관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었는데 그 생명체가 주인공이다라는 점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벨라는 세상이 규정한 여성의 정의를 온몸으로 부수며 질주하는 캐릭터라는 점은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여운 것들>이 인위성을 여성 영화로서의 맥락을 갖추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생명체를 만든 인물은 갓윈이고 남성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벨라는'상위 계층이 지켜야 할 윤리'에 전면으로 부딪히는 인물이다. 그럼 여성 해방 서사로 읽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성매매업자와 펠리시티, 그 옆의 하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매매업자는 여성이다. 이 캐릭터는 벨라에게 "누구와 성매매를 할지 넌 고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펠리시티와 하녀는 벨라에게 "몸 파는 여자"라며 극언을 입 밖에 낸다. 심지어 하녀는 벨라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성 안의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 둘은 여성의 주체성을 방해하는 인물인 것이다. 여성의 자유를 방해하는 3의 시선을 공고히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이다. 여성을 둘러싼 고압적인 시스템을 묘사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런 요소들을 영화에 넣지 않을 것 같다.
이 페미니즘 영화의 틀을 반쯤 탈피한 것은 엔딩에서 더 크게 강조된다. 엔딩을 보면 블레싱턴 장군의 몸에 동물의 뇌가 이식된다. 뭐 여성에게 고압적이었던 인물이 응당 맞이해야 할 벌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글쓴이는 살짝 다르게 봤다. 사실상 블레싱턴 장군과 벨라는 동격이 된 것이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의 이야기를 영화가 보여주지 않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벨라가 훨-씬 아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 자체만을 보면 '다른 개체의 뇌'가 이식됐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벨라가 유사 아버지였던 갓윈의 직업을 물려받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벨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갓윈처럼 세계의 기득권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버전의 <가여운 것들>이 블레싱턴을 주인공 삼아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단순히 1차원적인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영화가 남근주의적인 시대상만 조롱하는 것이 아닌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기득권에 서는 것'이 얼마나 따분한 짓인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남/녀)의 구분선을 흐린 선택은 벨라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따져봐도 다시 읽을 수 있는 맥락이다. 벨라는 자신의 몸을 팔았던 것, 그러니까 욕망에 직설적이었던 사실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인물에서 더 나아가 영화도 이런 벨라를 부정하지 않는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 어떤 인물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연출부터 빅토리아보다 벨라의 편을 든 것이다. 이 연출에는 여성의 몸에 남성의 뇌가 이식된다 한들 이 사회를 이루는 시스템은 여전할 거라는 조소가 담겨있는 듯하다. 이는 가족이라는 소재로 당시 그리스의 기득권을 비판한 <송곳니>에서도 느껴졌던 서늘한 조롱이었고, '란티모스의 영화다!'라고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에 단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본인이 쓴 모든 글의 내용에 대해 '영화는 그런 게 아냐!'라고 비판하는 평자가 있다면 그 나름대로 맞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고?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 <가여운 것들>과 저 멀리 반대편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자연스러운 것'을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죄다 인위적인 것투성이다. 그리고 영화가 전면에 성적인 소재를 등장시키고 있어서 어떤 관점에 있어서는 '여성해방이 곧 모험이고 섹스냐'라는 비판도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작을 안 읽어서 이 문장에 확신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후반부의 각색에 대해서는 원작 팬들이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이 광범위한 이야기를 펼친 것에 비해 후반부 문제를 해결하는 규모가 좀 작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재밌었다. 이렇게 다층적이면서 선명하게 주제를 강조한 란티모스의 역량은 현재 최고의 폼을 구가하는 예술가 다웠다. 휘황찬란한 미장센에 눈이 즐겁고 기괴한 사운드에 청각적인 쾌감까지 느끼는데 이야기가 깊기까지 하니 보는 동안 '이 아침에 극장에 오길 잘했다' 싶었다. <추락의 해부>가 청각과 시각이라는 인지체계를 활용한 각본으로 우리에게 재미를 주고 <오펜하이머>에서 핵폭탄을 플롯처럼 만든 것 그리고 <바튼 아카데미>가 이야기를 고전적으로 만든 것처럼 연출과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지는 섹시한 영화가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색상은 <오펜하이머> 여우주연은 <플라워 킬링 문>의 릴리 글래드스턴, 작품상은 <오펜하이머>가 받을 것 같다. 아마 상 받아도 미술상이나 의상상이 가능성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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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거북
붉은 거북
미카엘 두독 두빗 감독 장편 애니메이션. 두빗 감독은 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전에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청소부 톰', '수도승과 물고기', '아버지와 딸', '차의 향기'가 그것인데, 이 작품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두빗 감독의 공통점은 모든 작품에 대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대사'는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사가 필요한 작품이 있고, 대사 없이 인물의 행동과 반응만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과거 무성 영화에서 소리 없이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대사보다는 인물의 행동과 반응이 더 직관적이거나 상징적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사 없는 영화는 상징과 은유가 강하다. 대사로 전달할 수 없는 서사와 감정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압축하고 인물과 자연의 변화를 동기화한다. 단편 '아버지와 딸'은 이 영화 '붉은 거북'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두 작품은 단편과 장편의 길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주제를 담고 있으며, 매우 깊은 상징과 은유를 내재하고 있다.
'아버지와 딸'에서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난다. 그가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은 무수한 신화의 변주다.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노래도 있는데, 이때 요단강은 죽음의 강을 뜻하고, 요단강을 건넌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몹시 안타깝지만,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딸은 너무 어렸고, 자신을 두고 떠난 아버지가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날마다 강가로 나온다.
딸은 자라고, 친구들을 사귀고, 연인을 만나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함께 아버지가 떠난 강가를 찾는다. 더 시간이 흘러 남편도 죽고, 아이들은 모두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고, 딸은 다시 혼자 아버지가 떠난 자리를 찾아온다.
노인이 되어 허리가 굽은 딸은 아버지가 떠난 강이 이제는 물이 말라 모래톱이 드러난 곳을 걸어들어간다. 한참을 걸어간 딸이 발견한 건 아버지가 타고 떠났던 작은 배였다. 딸은 모래에 반쯤 잠긴 작은 배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걸을 때마다 조금씩 젊어지면서 평생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작품에서 보이는대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지만, 작품 전체가 하나의 메타포이며, 신화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어린 딸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 아마도 어머니는 더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 혼자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아버지는 '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은 서양 종교에서 남성으로 현현한다. 또한 많은 경우 '아버지'로 불리며, '아버지'와 '신'은 동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린 딸은 어리석은 인간이다. 아버지 즉 신의 보살핌 없는 인간은 세상에서 늘 힘들고 괴롭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신)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이 아버지(신)를 만날 수 있는 건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요단강을 건널 때, 즉 아버지가 계신 저 강(바다) 너머로 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딸이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멀리 떠난 줄 알았던 아버지(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붉은 거북'의 해석도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 작품은 장편이지만 서사는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서사를 이해하고 풀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상징과 은유의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자는 바다에서 표류하다 작은 무인도에 닿는다. 남자는 곧 '인간' 또는 '인류'다. 바다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신화와 은유의 세계다. 또는 원초의 세계, 원시의 상징이다. 바다에서 무인도에 도착한 남자는,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남자는 '신'의 자식이지만 '신'은 아니며,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남자는 원초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세상에 발을 딛지만, 현실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괴롭다. 남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사방은 망망한 바다만 놓여 있을 뿐이다.
남자는 무인도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를 모아 뗏목을 만든다. 그는 저 무한의 바다를 건너 자신이 처음 있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향'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바다에 뗏목을 띄우고 나아가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뗏목은 부서진다.
다시, 조금 더 큰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는 남자. 두번째도 뗏목이 부서진다. 저절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물밑에서 무언가 의도적으로 뗏목을 부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남자는, 아주 큰 뗏목을 만든다. 크고 튼튼한 뗏목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여기서 '뗏목'은 이동수단이지만, 남자가 그리는 '이상향'으로 가는 사상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 뗏목이 부서지는 건, 남자의 신념, 사상, 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다. 뗏목은 폭풍을 만나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체가 뗏목을 일부러 부수기 때문인 걸 알 수 있는데, 부서진 뗏목 주변에서 만난 동물이 '붉은 거북'이다.
붉은 거북은 무얼까. 남자가 다시 무인도로 돌아와 외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 바다 - 로 나가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뒤로 분노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바다에서 섬으로 올라오는 붉은 거북.
많은 거북 종류는 해변의 모래밭에 알을 낳아 묻는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은 모래를 헤집고 올라와 바다를 향해 기어간다. 이 붉은 거북도 해변에 알을 낳기 위해 올라온 것은 아닐까. 이 현실적 해석은 이어지는 상징과 은유와 섞이면서 환상으로 환유한다.
남자는 해변으로 올라온 붉은 거북을 보고 분노가 폭발한다. 그 붉은 거북이 자기가 만든 뗏목을 부순 바로 '그' 붉은 거북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붉은 거북이 남자의 뗏목을 부순 거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남자는 거북의 머리를 대나무로 내려치고, 거북을 뒤집어 놓는다. 복수한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남자는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한다. 붉은 거북을 살리려 바닷물을 떠 끼얹기도 하지만, 붉은 거북이 회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붉은 거북이 죽었다고 여긴 남자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데, 갈라진 거북의 껍질 안에 젊은 여성이 누워 있었다. 남자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지만, 붉은 머리의 여성은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실제의 존재였다. 남자는 여자를 살리려고 그늘을 만들어주고, 숲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물을 떠와 여자에게 물을 먹여주고 지극하게 보살핀다. 비가 내리는 날, 여자는 긴 잠에서 깨어난다.
여자는 자기를 감싸고 있던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낸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만들고 있던 뗏목을 바다로 떠나 보낸다. 여자는 더 이상 바다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고, 남자는 그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더 이상 바다로 나가,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붉은 거북이자 붉은 머리의 여성은 남자의 또 다른 자아이면서 욕망의 현현이다. 남자(인류)는 진화를 통해 점차 문명을 갖게 되고,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적응해 살고 있는 존재다. 그는 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초의 고향 - 자연 - 으로 돌아가고픈 본능을 지니며 살아간다. 회귀 본능은 사라질 수 없으며 다만 현실의 욕망이 더 클 때, 본능을 누르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자라고, 세 사람의 삶은 변함 없이 평온하고 따뜻하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 아이가 바다에 빠졌지만, 본능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그리고 알 수 없는 문명의 물건이 해변에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는 소년.
아이는 자라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된다. 남자와 여자는 나이 들어가고, 아무 변화가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삶이 파괴되는 재해가 일어난다. 바다에서 해일이 몰려오고, 그들이 살던 숲이 거의 다 파괴되고 세 사람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성장한 아들은 좁고 답답한 섬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멈춰 선 파도에 올라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새로운 문명 사회를 발견한다. 아들은 부모를 설득해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노라고 말하고, 부모는 성장한 아들을 막지 못한다. 아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섬을 떠나고, 섬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는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고, 두 사람은 이제 백발 노인이 된다. 삶은 변함 없지만, 시간(역사)은 남자를 죽음으로 이끈다. 남자가 숨을 거두자 여자는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붉은 거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느리게 몸을 돌려 바다로 나간다.
붉은 거북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바다로 나갔다. 남자(인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또는 붙들린 삶을 살았고, 육체가 소멸하자 욕망은 다시 원초의 바다, 이상향으로 돌아간다.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살아움직이도록 추동하는 힘은 '욕망'이었다.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이면서도 그로 인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에서의 삶이 끝나면, 인간의 욕망도 자연스럽게 원초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불교적이다. 죽은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던 여자가 다시 붉은 거북으로 변해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주제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긴 시간이 조금도 아깝거나 지루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부드러운 선과 파스텔톤의 가라앉은 채색, 간결한 선과 최소한의 움직임, 작은 섬과 망망대해, 바람, 대나무 숲, 모래톱, 일렁이는 파도와 포말, 하늘을 나는 새, 붉게 물드는 노을,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세 사람의 삶은 인류의 초기, 원시적 삶을 살았던 힘들지만 순수했던 시기를 떠올린다.
좁게는 개인의 인생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넓게는 인류, 신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은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지만,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더 근본적인 질문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많은 사람이 보고 함께 이야기 하길 바라는 몇 안 되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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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영화추천*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Turtles Swim Faster Than Expected, 2005
감독: 미키 사토시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출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스틸컷
뭐든 하는 일마다 대단하고 특별해 보이는 친구, 쿠자쿠와 달리 우리의 주인공 ‘스즈메’는 자신이 늘 어중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애완용 거북이 밥을 하루도 빠짐없이 챙기면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투명 인간이 되는 게 아닐까 걱정한다. 평범하다는 이유로 존재감을 잃어가는 삶. 그렇다, 스즈메의 삶은 너무 평범하다. 단조롭고 반복적이기까지 한데, 쿠자쿠가 가진 센스마저 손톱만큼도 없다. 심지어 딱히 바쁘게 사는 것 같지도 않아, 언제든 무력함과 무료함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인생이다.
하지만, 인생은 한방이라고 했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스파이 모집 광고, 계단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과를 피하고자 바짝 엎드려 투명 인간인 척하며 찾아낸 일상의 탈출구! 스즈메는 스파이 부부에게 스파이로 채용되면서, 난생처음으로 재미없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출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스틸컷
스파이의 조건은 딱 하나다.
스즈메가 가장 잘하는 눈에 띄지 않는 것. 평범한 바보가 비범한 스파이가 되는 순간, 영화는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온다. 평범함이 가진 위대함이 아니라 평범하기 전부터 갖는 당연한 ‘존재감’을 중요한 화두로 던진다. 쉽게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사는 사람들 틈에서 똑같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사는 삶이라니, 우린 처음부터 강렬한 아우라를 풍기며 태어난 자들이다. 충분히 각자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자들. 이 작품을 보고 나면,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내일부터 스파이(?)가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맛있는 라멘을 만들 수 있지만 명확한 목적을 위해 그냥 그런 라멘을 만드는 사장처럼, 나 자신만큼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아는 ‘나’로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위로가 아니라 힘을 주는 영화다. 스즈메가, 우리가 바꾸고 싶은 건 어중간한 삶의 태도가 아니니까.
우리 모두 스즈메처럼 실실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쿠자쿠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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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첫사랑의 아련함
누구나 그리운 시기가 있다. 꼭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뿐만은 아니다 그때의 공기, 촉감 감정들이 순간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때가 있다.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일 수도 있고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일 수도 있다.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시절의 기억은 마음속에 남는다. 아픈 기억과 즐거웠던 기억이 교차로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그때의 분위기에 빠져보기도 한다. 그건 현재의 나를 만든 과거이자 지금의 감정을 만들어낸 작은 조각이다. 그 아련함은 젊음을 누리던 시기에 아직 미완의 상태였던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첫사랑이다.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최소한 한 사람 정도는 있을 첫사랑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빛나게 한다.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과거의 존재는 오랜 기간 동안 만나며 실제로 결실을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헤어지거나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첫사랑은 그리움과 아련함의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시기에 아무 조건 없이 상대방을 바라보고 그 사람의 사랑을 원했던 때이기 때문에 더욱더 기억에 많이 남아있기도 하다.
1999년의 감성을 그대로 담은 영화
넷플릭스에 업데이트된 영화 <20세기 소녀>는 1999년의 감성을 그대로 담은 영화다. 그때 사용했던 삐삐와 비디오테이프를 이용해 서투르지만 풋풋한 감정들을 그대로 화면에 옮겼다. 주인공 보라(김유정)는 수술 때문에 잠시 미국으로 떠나는 친구 연두(노윤서)를 대신해 연두가 짝사랑하는 현진(박정우)의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현진의 단짝 친구 운호(변우석)와 안면을 트게 되면서 자신만의 감정이 만들어진다. 영화는 보라의 감정선을 차근차근 따라가게 만든다.
멀리 떨어진 친구 연두와 보라의 연락을 지속시켜주는 건 바로 이메일이다. 다음 한메일의 초창기 웹사이트 모습이 화면에 등장하고 하나둘씩 주고받으며 쌓여가는 메일의 모습이 무척 정겹게 느껴진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발달했기 때문에 굳이 이메일을 쓰지 않고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로 언제든 쉽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비싼 전화비를 대신할만한 서비스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메일은 인터넷만 연결되면 아주 저렴하게 멀리 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굉장히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이메일에 가입하고 아이디를 만들어 직접 사용하는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보라가 현진의 정보를 얻으려는 과정에서 현진과 운호와도 친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연락에 사용되는 건 삐삐와 공중전화다. 무선 호출기인 삐삐는 1999년 즈음에 한참 유행하기 시작해 핸드폰이 나오기 전까지 많이 썼던 통신기기다. 삐삐에 번호나 음성이 남겨지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전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삐삐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공중전화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음성을 듣는 일들이 꽤 자주 벌어졌다. 삐삐는 단순한 연락 수단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의 감정이 같이 담긴 연락 수단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메시지를 녹음하고 또 어떤 메시지가 담겼을지 궁금해하며 공중전화를 향했을 그때의 사람들의 기대감들이 삐삐라는 통신 수단에 담겨있었다. 이런 그 당시의 풍경들은 보라가 현진의 삐삐 번호를 얻으려는 과정에서 자주 모습을 비춘다.
이메일, 삐삐, 공중전화 그리고 비디오 대여점
영화에서 보라의 아버지는 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비디오 대여점은 그 당시 동네 골목 곳곳에 하나씩을 있었던 추억의 장소다. 그 비디오 대여점은 보라와 운호의 첫사랑을 이루어지게 한 장소이고 특히 영화 <정사>의 비디오테이프는 그 둘의 마음을 확인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야기 속에서 운호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고 영상으로 많은 것을 찍는다. 특히나 보라와 운호 모두 방송반에 속해있기 때문에 사진이나 영상 촬영장비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다. 여기에 비디오 대여점이라는 장소 자체가 주는 긍정적인 기대감과 감정이 두 사람 사이의 사랑과도 연결되어있다.
이메일, 삐삐, 공중전화 그리고 비디오 대여점은 1999년에 학장 시절을 보내고 대학생활을 보냈던 사람들이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영화는 영리하게 이런 도구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첫사랑의 아한 감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 안 그래도 최근에 극장에서 개봉하는 로맨스 장르가 사라져 가고 있는 시기인데, 그나마 OTT 플랫폼에서는 로맨스 장르가 공개될 수 있는 환경이어서 어쩌면 꽤 적합한 시점에 공개되는 영화인 것 같다.
영화에는 성인이 된 현재의 보라(한효주)가 등장한다. 과거의 첫사랑에 대한 물건을 우편으로 전달받고 과거를 떠올리며 그때의 감정을 느끼는 보라의 모습은 그 이야기를 보는 관객에게도 그 감정을 그대로 전달한다. 똑같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때 그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릴 수 있고 친구들과의 관계나 그때 즐겨 이용했던 것들을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1999년의 어떤 순간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첫사랑의 감성에 딱 맞는 배우 김유정
영화의 후반부는 로맨스 장르답게 조금은 신파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은 건 조금은 어리숙한 보라가 느끼는 사랑과 감정들을 초반부터 차근차근 쌓아 터뜨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설득력을 느끼게 된다. 후반부 보라와 운호의 마지막 대화하는 장면의 주변에 보이는 그때의 기차 모습,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보라가 보게 되는 비디오테이프 속의 영상은 마지막까지 관객들 1999년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첫사랑의 감성은 1999년의 복고적인 느낌과 함께 잘 어우러져 있다. 게다가 배우 김유정의 연기는 주인공 보라가 느끼는 희로애락을 아주 발랄하게 전달하고 있다. 다른 어떤 인물들보다 김유정이 연기하는 보라가 이 영화의 감정들을 무척 잘 살리고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방우리 감독은 영화의 각본을 쓸 때부터 보라 역할로 김유정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한다. 그만큼 김유정은 보라 역할에 딱 맞는 사랑스러운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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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는 장면이 너무 많은데 전부다 100% 리얼로 한 영화 ㅋㅋ
두번다시 안나올 레전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2004) 재밌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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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기는 티키타카! 류승룡이 다시 돌아왔다! 장르만 로맨스!
류승룡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 장르만 로맨스가 개봉했습니다.
배우인 조은지 감독의 상업장편 영화 데뷔작이죠.
주요 등장인물들의 티키타카가 매력적이고, 특히 류승룡 배우의 코믹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물론 진중한 연기도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흥미롭고 따뜻하게 볼 수 있어요.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니 주변 관계들을 생각하며 보시면 더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전체 영상을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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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르코 서브> 메인 예고편
마약단속국에서 인정받는 요원으로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스트라이커’.
여대생 납치 사건이 발생하고 비밀 작전에 투입된 그는
그동안 쫓아온 거대한 마약 카르텔과 이 사건이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라이커’의 딸과 아내가 사라지는데...
납치된 가족 구출 VS 마지막 임무 완수
지상 최악의 범죄 카르텔과 전쟁을 시작한 그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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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 날 <변호인> 예고편
1980년대 초 부산.
빽 없고, 돈 없고, 가방끈도 짧은 세무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부동산 등기부터 세금 자문까지 남들이 뭐라든 탁월한 사업수완으로 승승장구하며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고 돈 잘 버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린다.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으며 전국구 변호사 데뷔를 코 앞에 둔 송변. 하지만 우연히 7년 전 밥값 신세를 지며 정을 쌓은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가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국밥집 아줌마 순애(김영애)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구치소 면회만이라도 도와주겠다고 나선 송변.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진우의 믿지 못할 모습에 충격을 받은 송변은 모두가 회피하기 바빴던 사건의 변호를 맡기로 결심하는데...
“제가 하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