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2-06-03 23:23:55
명확한 메시지가 담긴 쥬라기 세계관의 마침표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2022)
인간의 등장은 생태계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모든 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진행되다 보니 생태계에서 인간은 소중한 존재였고 무조건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대상이었지만 다른 생물들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서로 싸우고 죽이는 과정에서도 주변을 보호하면서 결국 그 수를 늘려갔다. 인간은 자신의 수를 늘려가면서 수많은 동식물을 대량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많은 약을 만들었고 편리함을 위해 수많은 플라스틱과 여러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꽤 많은 동식물들이 멸종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 주변의 자연환경을 소비하는데 익숙해져 있고 심지어 동물들을 잡아서 동물원 같은 시설을 만들기도 한다. 모든 것이 인간 중심적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벌어지는 상황이다.
어떤 생물이든 자신의 생존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생존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면 좀 더 재미있는 걸 찾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동식물을 모아놓고 구경하는 시설일 것이다. 특히 동물원에는 수십 가지의 동물들이 갇혀서 인간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인간은 재미를 느끼지만 정작 동물들은 본인들의 자유를 박탈당한다. 동물들에게도 자유에 대한 권리가 있는지 여러 의견이 있지만 자연 상태에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가장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인간 중심의 생태계가 지구 전체의 생태계에 미치는 여러 악영향은 결국 인간이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쥬라기 공원> 세계관의 마지막 이야기
영화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은 90년대부터 시작된 <쥬라기 공원> 세계관의 마지막 이야기다. 시리즈 전체에 걸쳐 공룡이라는 생명체의 신비로움과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과거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들어낸 <쥬라기 공원> 시리즈에는 공룡을 바라보는 경이로움이 잘 담겨있다. 이미 멸종한 생명체를 재탄생시켜 현실화하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주로 악당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통제 시스템의 오류로 발생한 공룡들의 탈출과 반란이 이 시리즈 전체에 반복해서 담긴다. 2015년부터 이어져온 <쥬라기 월드> 시리즈도 이런 패턴을 똑같이 반복한다.
특히나 전작인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공룡이라는 생명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담겨있다. 이 시리즈 안에서는 공룡이지만 살짝 생각을 바꾸면 이 관점은 다른 지구의 생명체 문제로 확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영화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클레어(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공룡이 통제 가능하다고 믿는 인물이었지만 그 시스템이 붕괴된 이후 그것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믿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의 말미에 갇혀있던 공룡을 세상에 풀어놓는다. 공룡을 강제로 죽여서 사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도 있다. 바로 이안 말콤 박사(제프 골드블럼)다. 그는 공룡과 인류가 공존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다시 멸망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방법은 공룡들의 구역을 정해놓고 자연스럽게 소멸되도록 하는 것이다.
<쥬라기 월드> 시리즈 내내 이 두 주장은 반복된다. 하지만 이번 마지막 편에서는 자연스럽게 공룡을 세상에 풀어놓고 그들이 적응해가던 소멸해가던 그것을 자연스럽게 놔둬야 한다는 쪽으로 무게추를 옮긴다. 그것은 인간과 공룡의 공존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한쪽의 멸망이 될 수도 있다. 그 결과가 어떨지에 대해선 영화가 결론을 짓고 있지는 않다. 대신에 영화는 다른 대립 축을 추가로 제시한다. 영화에는 악당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주인공들과 대립각을 세운다. 악덕 유전 공학자와 악덕 기업이 공룡을 이용해 돈벌이에 나서고 그것을 막기 위해 주인공인 오웬(크리스 프랫)과 클레어, 그리고 오리지널 멤버인 그랜트 박사(샘 닐), 엘리 박사(로라 던), 이안 박사가 그것을 막기 위한 방법을 총동원한다. 공룡을 이용하는 쪽과 공룡을 놔둬야 한다는 쪽의 대결이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이번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은 전체 쥬라기 시리즈를 통합하여 결론을 내린다. 이번에 등장하는 <쥬라기 공원> 시리즈의 오리지널 멤버들은 <쥬라기 월드> 시리즈의 멤버들과 함께 등장해 시리즈의 대단원을 책임진다. 이들은 영화의 처음부터 등장해 꽤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하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공룡과 다시 조우한다. 과거 시리즈의 팬들이라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오리지널 멤버들의 모습을 굉장히 반갑게 지켜볼 것이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건 바로 인간 개입을 최소화하라는 것이다. 지금 현재 주변에 있는 동물과 식물들에 인간들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생하고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돕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완성도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명확해진 메시지
공룡을 처음 등장시킨 <쥬라기 공원>이 보여준 경이로움은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그 강도가 많이 희석되었다. 그래서 <쥬라기 월드> 시리즈에서는 점점 많은 수의 공룡을 등장시켜 그것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이번 마지막 영화에서 그런 경이로움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속에는 티라노를 비롯한 육식 공룡들이 대결을 벌이고 익룡이나 랩터 같은 다양한 공룡이 등장하지만 모두 그저 액션을 위한 등장으로 짧게 소비되어버리고 만다. 사실상 공룡의 추격이나 싸움에 인간이 개입할 요소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긴장감이 계속 지속되지 못한다는 단점이 더 커졌다.
영화 전체에 관통하는 메시지는 꽤 명확해졌지만 나머지 부분은 아쉬운 점이 많다. 액션의 강도가 높아졌지만 이미 과거 시리즈에서 봤거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들이 많아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또한 오리지널 멤버들의 등장을 위해 영화 초반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그들의 서사를 보여주게 되는데, 그래서 이야기가 조금 늘어진다는 느낌이 있다. 악덕 기업의 사장은 너무나 단편적이고 바보 같이 묘사되어 있고 아무 대책이나 계획이 없는 것처럼 보여 허무하게 활용되고 퇴장해 영화적 긴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번 영화는 90년대부터 사랑받았던 <쥬라기 공원>과 <쥬라기 월드> 시리즈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통합하고 또 닫는다. 이제는 여려 영상기술의 발달로 공룡을 포함한 다양한 것들을 그래픽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니까 공룡을 화면에서 보는 것이 더 이상 신기한 경험이 아니게 된 것이다. 공룡이 나오는 쥬라기 시리즈는 더 이어질 것 같지 않다. 이 시리즈가 줄곧 주장해왔던, 인위적인 인간의 개입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만든다는 메시지는 아주 명쾌하게 전달하고 있고 영화의 마지막에도 그 메시지는 반복적으로 전달된다. 결국 이 시리즈가 보여주고자 했던 그 결말, 바로 인간과 공룡의 공존이다. 영화적 완성도는 조금 아쉽게 느껴지지만 과거부터 이어져온 전체 쥬라기 시리즈를 끝맺음하기 위한 결말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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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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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 라이즈 블리딩> 이전에 <바운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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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라이즈 블리딩> 이전에 <바운드>가 있었다. <바운드>는 ‘퀴어 느와르’라는 장르를 개척한 영화다. 남성성의 극단을 보여주는 마피아 집단 속에서 피어나는 여성들의 사랑, 탈주, 해방까지를 보여주는 영화. 이 지점에서 <러브 라이즈 블리딩>과 <바운드>는 닮은 바가 많다.
<바운드>는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된다. 영화의 서사에 핵심적인 여러 대사들이 보이스 오버로 흘러나온 뒤 비춰지는 결박된 코키의 모습이 이 작품의 시작이다. 어쩌면 이 작품은 모든 패를 까발린 채 작품을 시작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품이 시작되며 이 작품은 ‘시선’과 ‘섹스’에 대한 작품이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암시된다. 한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함께 탑승하는 주인공 코키와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파트너로 보이는 남성과 함께 있음에도 그에겐 관심을 주지 않고 코키와 강렬한 눈맞춤을 나눈다. 그리고 코키의 시선은 바이올렛의 다리로 향한다. 특별한 대사 없이 그들이 첫눈에 반했음은 시선의 전개만으로 읽힌다.
이후 배관공으로서의 코키가 다루는 공구에 적힌 ‘삽입’에 대한 주의 문구, 코키의 집을 찾아온 바이올렛이 던지는 ‘손재주’에 관한 말들. 얼마 지나지 않아 귀걸이가 배수구에 빠졌다는 핑계로 코키를 자신의 집으로 부르는 바이올렛. 배수구를 공구로 다루는 손길,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물, 그 뒤로 비춰지는 바이올렛의 다리까지. 더이상 구체화시켜 말할 것이 있을까. 두 사람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 그러나 마피아의 정부로 사는 바이올렛과 그들에게 고용된 코키에게 사랑이란 가능할리 없는 법. 이들은 그들에게서 벗어나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운드>의 시작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사랑의 도피는 쉽지 않다. 남편인 시저를 속여 돈을 훔치려고 했던 두 사람의 계획은 탄로난다. 그렇게 오프닝 시퀀스의 이미지는 서사 속에서 실현된다. 코키는 바이올렛을 두고 돈을 들고 도망칠 수도 있지만, 이미 바이올렛을 사랑하게 된 코키는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코키는 바이올렛을 구하기 위해 시저의 집에 제발로 들어가 시저의 손에 결박당한다.
이제 바이올렛이 나설 차례다. 시저는 바이올렛을 이용하여 시저가 윗선에 넘길 돈을 잃었다는 것을 숨기려 하지만, 바이올렛은 그것을 역이용한다. 자신을 연약하게만 바라보는 마피아 집단을 이용하여 시저의 삶을 파국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이때 단순히 ‘강한 여성’인 코키에게 오직 의존만을 하는 것으로 비춰졌던 바이올렛은 코키를 구원해내며, ‘상호 구원’의 서사를 완성해낸다.
시저가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바이올렛은 시저에게 총을 겨눈다. 그러자 시저는 바이올렛이 자신을 죽일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러자 바이올렛은 “시저, 당신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라며 시저를 가장 잔혹하게 죽인다. ‘살인’을 성취한 뒤에도 이어지는 총격은 그녀의 분노를 보여준다. 그 순간 쓰러지며 극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벗겨진 머리는 그의 권위를 더욱 더 실추시킨다.
그렇게 바이올렛은 마피아 집단을 벗어난다. 코키와 몰래 챙긴 돈은 비밀로 한 채,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윗선에 마지막 키스를 건네는 바이올렛은 더없이 이 서사에 필요한 존재다. 코키가 없었다면 시작될 수 없었을 이들의 계략은 바이올렛이 없었다면 깔끔히 종결될 수 없는 것이다. 무의미한 키스를 끝낸 뒤, 뒤돌아 입꼬리를 한쪽만 올린 미소는 승리를 뜻한다. 두 사람은 이렇게 남자들을 속이고, 걸림돌을 제거한 채 자신들의 사랑을 성취한다.
이 영화의 제목인 바운드는 ‘묶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이미지적으로 끈을 활용해 결박되는 사람은 코키와 바이올렛, 즉 여성들이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에서 ‘묶인’ 존재는 누구인가. ‘남성성’의 굴레에 속박되어 ‘여성’을 연약한 존재라 단정짓고, 죽임을 당하고 놀아나는 이들이야 말로 ‘남성성’에 ‘묶인’ 존재가 아닐까. 작품의 끝에 이르러서야 작품의 제목의 의미를 되새기며 작품의 완성도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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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만이 마에스트로를 할 수 있다?
- 6★/10★
1976년 프랑스가 발칵 뒤집혔다. 자국 와인에 큰 자부심을 가진 프랑스인들은 줄곧 미국 와인을 두고 ‘콜라 맛이 난다’며 혹평했다. 한 영국인이 재미난 이벤트를 기획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각각 10종을 두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한 것이다. 테스트 결과 두 와인 모두 미국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심사 위원 10명 중 8명이 프랑스인이었는데도 그랬다. 일명 ‘파리의 심판’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심사에 참석한 콧대 높은 전문가들이 한동안 인터뷰를 피해 칩거해야 할 정도로 후폭풍이 거셌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테스트 결과를 폄하하는 시도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와인의 숙성 기간이 짧았다는 등의 주장이 근거였다. 그들은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보다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프랑스 와인이 언제나 최고라는 것만이 ‘사실’이고 ‘진실’이다.
비단 와인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클래식은 상류층의 음악으로 여겨진다. 존경받는 지휘자인 마에스트로는 백인 남자만이 할 수 있다고 으레 생각된다. 이민자 여성 청소년이 마에스트로를 꿈꾼다면? 불가능한 꿈을 단념하라는 조언이 쏟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실’, ‘현실’이 구축되는 방식이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몰아낸, 아니면 처음부터 자격 조건을 암묵적으로 합의한 결과물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제시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착시 효과는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누군가가 도전했을 때 균열을 맞는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도전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거짓 사실, 거짓 진실은 힘이 세기 때문이다. 반례가 존재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프랑스 와인만이 최고라고, 클래식은 백인 부르주아만이 진입할 자격을 가진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자연스러운 권위를 누려온 거짓 사실과 거짓 진실을 깨는 방법 중 하나는 집요하고 끈질긴 도전이다. 〈디베르티멘토〉는 이러한 도전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다. 전 세계 여성 지휘자의 비율은 6퍼센트라고 한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4퍼센트다. 알제리 출신의 서민층 이민자 가정의 자히아가 여기에 들 확률은? 지극히 낮다. 개인 연주자로 성취를 내기는 조금 더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리더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듯, 단원들이 자히아를 지휘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능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반면 자히아의 경쟁자인 백인 남성 랑베르는 다르다. 그가 단상에 오르기만 해도 단원의 표정에는 진지한 긴장감이 돈다. 어딘지도 모르는 ‘변방’에서 음악을 배운 자히아가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는 단원들의 표정을 마주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자히아는 결국 꿈을 이뤘다. 자히아가 조직한 디베르티멘토는 실존하는 오케스트라로, 매년 2만 명 이상의 전 세계 청년을 대상으로 음악을 전파하고 수많은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디베르티멘토는 18세기에 유행한 다양한 악장과 편성의 악기를 사용하는 모음곡을 일컫는다. 자히아가 어렵게 꾸린 오케스트라의 여정, 그리고 다운 증후군을 가진 어린이나 도시 외곽에 사는 아이들에게 클래식을 가르치는 자히아가 추구하는 가치가 담긴 이름이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는 자히아는 자신의 음악으로 변화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중이다. 귀가 즐거운 음악과 내내 함께하는 자히아의 여정은 잔잔한 울림과 기분 좋은 설렘을 남긴다.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마에스트로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자히아를 인정한 것이 자히아가 꿈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르주는 남자만이 마에스트로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인데, 자히아의 지휘를 보고는 단번에 마음을 바꾼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화음이 좋았기 때문이다. 즉 세르주는 자히아의 피부색과 성별이 아닌 능력에 주목했다. 이후에는 그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엄격한 훈련과 진정성 있는 조언을 줄곧 제공한다.
세르주의 태도는 사려 깊고 인상적이지만 ‘공정’하지는 않다. 능력주의는 자히아가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한 경쟁자보다 더 치열하게 고투했다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차분한 감동을 전하는 이 영화는 동시에 거짓 사실과 진실을 돌파하는 또 다른 방법을 고민하도록 촉구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여성 지휘자가 주인공이라는 점만 같을 뿐 장르와 질감이 전혀 다른 영화 〈TAR 타르〉와 함께 봐도 흥미로울 것이다. 겉으로는 능력주의를 표방하나 실제로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부정한 일을 일삼는 최고의 여성 지휘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담은 〈TAR 타르〉는 〈디베르티멘토〉처럼 클래식의 ‘상식’에 비추어봤을 때 ‘모순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여성 지휘자가 마주한 여러 딜레마를 두루 살피고 고민하는 데 밑절미가 되어준다. 능력주의와 보여주기식 할당, 전통과 도전, 실력 있는 개인과 무능한 기득권 등의 다층적 구도에서 여성들은 오늘도 거짓 사실, 거짓 진실을 거스르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두 영화가 대변하듯, 이 모순적인 질곡을 돌파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다채로운 긴장감을 품고 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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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사고로 감추기엔 매혹적인 '악마와의 토크쇼'
악마와의 토크쇼
이 영화의 주인공은 1970년대 미국 토크쇼를 진행하던 아나운서 잭 델로이(데이빗 다스트말치안)다. 유명인사인 잭 델로이. 젠틀한 목소리 톤과 말끔한 매너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쇼는 1971년이었다. 꿈을 이룬 잭 델로이. 코미디부터 가족드라마, 연극까지 다양한 소재를 포용하는 토크쇼를 진행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1970년대의 미국인들은 그의 토크쇼에 큰 위안을 받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잭 델로이. 당시 최고의 토크쇼였던 조니 카슨 쇼와 맞대결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그래미 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밝은 빛과 어둠은 함께 따라온다고 했던가. 높은 인기 덕인지 톱스타 여배우 매들린(조지나 헤이그)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잭이 사이비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서서히 치닫았던 위기는 잭의 인생의 큰 장애물이 된다. 비흡현자였던 매들린. 폐암에 걸렸다. 그리고 잭의 곁을 떠났다. 슬픔 속에 잠긴 잭. 하지만 잭에게 쉬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 서서히 낮아지는 시청률. 그리고 더 침몰하는 잭. 다양한 논란에 그의 전성기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묘수가 필요하다. 색다른 토크쇼 콘텐츠를 기획하는 잭 델로이. 그가 꺼낸 아이디어는 악마와의 토크쇼다. “잭. 걱정하지 말아요. 이 토크쇼는 분명 유명해질 테니.”
이런 장르물 기다려왔어
이 <악마와의 토크쇼>는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왜 훌륭해? 아주 재미있기 때문에. 왜 재미있을까? 그러니까 글쓴이가 이 영화에 애착이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면 굳이 생각을 두, 세 번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더 큰) 영화 노동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나는 감상에 있어 이런저런 사소한 부분까지 캐치해야 한다. 작은 부분까지 눈에 담아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마와의 토크쇼>는 이 과제들을 염두할 틈도 주지 않고 내내 강력하게 몰아친다. 영화가 몰입감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사소한 부분을 챙겨가며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왜? 영화가 에너지의 근거를 친절하게 다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영화의 톤 측면에서 기괴한 톤을 유지한다. 그 근원지가 어디일까? 바로 우리가 아는 공포영화의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들을 비틀어서 기괴함을 증폭시킨다. 글쓴이는 크리스투(파이살 바지)의 역할이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이 캐릭터는 메시지의 측면이나 이야기의 측면이나 영화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인데 <악마와의 토크쇼>를 안 본 분들도 이 캐릭터에 매혹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장르영화의 팬이라면 살짝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영화가 강력한 미스터리로 똘똘 뭉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그 미스터리 영화 안의 기괴한 톤과 시너지가 있기 때문에 미스터리물로서의 쾌감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그 내실을 따져보면 영화 안의 형식만 신선하고 원래 기획의도였을 것 같은 호러영화로서의 톤은 부실하다. 왜? ‘어떻게’는 충분히 신선하지만 ‘무엇’의 결과물이 이에 호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전> 같은 장르물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수도 있다. 특히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핵심을 보여주고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에 호러영화로서의 장르적인 특성은 포기한 흔적이 보인다.
있는 그대로를 믿을 것?
이 인간과 미디어의 관계에 카메라를 비추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 핵심을 위해 영화가 설정한 것 중 가장 강력한 부분은 주인공 잭 델로이다. 잭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100% 적합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왜? 이 왜 적합한지에 대한 부분이 영화 초반부에 나온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잭의 태도가 진지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잭의 여러 히스토리들이 영화의 배경처럼 제시된다. 이 장면들은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가 초반부부터 메시지의 측면에서 근거를 깔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통해 인물이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영화가 코멘트한다는 점을 주의 깊게 염두하고 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어떤 매개체가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지가 이 작품의 진주인공을 보여주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극 중 토크쇼를 관객이 초대받은 것 같은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이면을 탐구해야 한다. 누굴 위한 토크쇼일까? 사실상 이 영화 안의 토크쇼는 단 한 사람의 리액션을 위해 설계되어 있는데 그게 누구이며 또 그 과정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택이 제시되는데 이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또 주인공 외의 인물 관계도 이야기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가령 주인공의 보조 mc 거스(리스 오테리)의 모습이 영화에 전면에 등장한다. 이 거스를 대하는 인물들은 무대 안에서나 밖에서나 일관성을 가진다. 이 일관성을 흐리는 선택이 아주 흥미로운데 이 둘의 공통점을 묘사하는 연출에 어떤 것이 들어갔는지 염두하고 보면 재미있으실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어떤 존재에 의해 영향받는지도 이야기 안에서 굉장히 진하게 밑줄이 그어져 있다. 이 존재를 오고 가는 연출이 사실상 영화를 이끄는 플롯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현실과 그 나머지의 세상을 잇는 감독의 박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러닝타임이 다 끝나있다. 이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은 거스가 아닌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이 인물들은 어떤 존재 때문에 특정한 사건을 겪는다. 영매사 크리스투, 초능력자 사냥꾼, 모녀관계라고 볼 수 있는 릴리(잉그리트 토렐리)와 준(로라 고든)의 관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인공 잭까지. 인물들은 미디어라는 틀을 넘어 현실의 우리에게 침입한다. 가령 릴리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은 기괴해서 장르적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핵심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순한 이야기에서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인 비유를 새겨놓은 각본가와 감독의 능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미디어 = ?
영화 안에서 흥미로웠던 세 번째 지점은 핵심과 장르를 겹치게 연출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야? 이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토크쇼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거대한’이다. 이 영화의 틀을 이루고 있는 미디어, 그러니까 토크쇼라는 존재는 관객에게 초자연적인 일을 묘사하는 원동력임과 동시에 이야기의 형식이다. 무슨 말이냐? 초반부에 1970년대 미국의 정치사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실적인 맥락을 넣은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무리를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틀을 부순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로 담는다. 이 모든게 토크쇼인 것이다. 이 두 요소로 인해 영화의 톤이 상충하는 듯 하지만 이야기에는 걸림돌이 없다. 왜? 카메라의 존재 때문이다. 카메라의 의미가 영화의 플롯을 이끄는 것과 동시에 초자연적인 행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카메라의 존재는 영화가 왜 영화인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2024년의 관객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한다.
또 <악마와의 토크쇼> 안의 토크쇼 관객과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관계가 흥미롭다. 이 둘은 사실상 동일시되기도 하고, 전후관계에 있어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무슨 말이냐? 각각의 관객(토크쇼/영화)의 성격을 미디어의 성격을 통해 분류한 것이다. 토크쇼의 관객은 쇼를 만드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제작자들의 이해관계가 관련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영화의 관객들은 카메라가 이끌리는 대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를 엇갈리는 연출이 흥미로웠다. 이 엇갈리는 연출이 무엇인지 딱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장면이 무엇인지를 애둘러 써보자면, 이야기의 폭력적인 것을 지양한답시고 그 전부를 담는 뉴스를 여러분도 본 적 있지 않나? 이 영화의 카메라는 그런 느낌이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서 이야기의 외면을 비추다가 어느 지점을 벗어나 시점을 급격하게 바꿔버린다. 이건 중요하다. 관객들의 관계를 영화가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급격하게 바꾸는 시점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대단한데, 토크쇼가 존재했기 때문에 1977년부터 2023/2024년에 이르는 영화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는 것이고 ‘악마와의 토크쇼’가 가능했으며 관객을 향한 무언가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이 장면이 중요하다는 것은 여러분 모두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분들은 영화의 엔딩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의 이런 마무리야 말로 꼭 필요했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언론홍보학과 출신 글쓴이가 전공 공부를 하며 배운 것이 있다.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이것이야 말로 미디어가 관객에게 끼치는 영향 그 전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이 서브리미널 효과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리가 봤던 미디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삶에 틈입하고 있지 않은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영화인 셈이다. 어쩌면 이런 미디어의 속성이야 말로 진짜 공포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범죄도시 4>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극장 나들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강력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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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그 문을 열지 마시오
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제목 : <오픈 더 도어>
감독 : 장항준
출연 : 서영주, 이순원
프로그램 노트
: <오픈 더 도어>는 어느 밤 술에 취한 두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미국 뉴저지, 치훈(서영주)은 매형인 문석(이순원)과 함께 술을 마신다. 과거를 추억하던 두 사람은 애써 외면했던 불행까지도 길어 내게 되고, 감정이 격해진 문석에 의해 숨겨져 있던 비밀이 밝혀진다. 장항준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오픈 더 도어>는 과거를 되짚어가며 숨겨진 사연을 조금씩 풀어놓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한다. 숨겨진 그날의 진실보다 중요한 건 그에 이르는 과정이다. 4개의 챕터로 이뤄진 영화는 인물들이 불안과 의심으로 무너져 가는 모습을 조금씩 증폭시켜 나간다. 한정된 공간과 제한된 인물, 긴 호흡의 카메라를 활용해 밀도 높은 긴장감을 쌓아나가는 솜씨가 놀랍다. (송경원)
다섯 개의 섹션
영화는 총 다섯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진다. 그마저도 시간의 흐름이 아닌, 섹션이 뒤로 갈수록 과거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특이점은 영화의 제목부터 말해주듯 섹션의 시작마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사실 이와 같은 사실을 자각하기까지는 네번째 섹션이 되서야 깨달았다. 문을 여는 행동은 '어떠한 선택'을 의미한다.
첫 시퀀스는 미국 뉴저지, 치훈이 매형인 문석의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며 시작된다. 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술에 취하니 그들이 꺼내서는 안될 이야기를 꺼낸다. 바로 '치훈'의 엄마이자 문석의 장모님의 살인 사건. 대화로 짐작해보면 그녀는 세탁소를 운영 중, 강도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은 격해지고. 결국 문석이 숨겨진 비밀을 뱉어낸다. (첫번째 시퀀스 끝.)
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긴 카메라 호흡 그리고 사운드의 매력
사실 공포 영화, 스릴러 영화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1위가 스토리 그리고 그 다음이 사운드라고 생각한다. 공포 영화 혹은 스릴러 영화는 귀를 막고보면 하나도 안 무섭다는 말이 딱 그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오픈 더 도어>는 고전적일 수도 있는 사운드로 그 긴장감을 살린다. 실제로 옆자리 관객분은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귀를 막고 있었다. 나름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긴 카메라 호흡의 지루함을 사운드로 채워준 듯 했다.
영화 <오픈 더 도어>는 긴 카메라 호흡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첫 시퀀스부터 컷 전환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호흡이 길다. 스릴러 영화에서는 관객들의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컷 전환하기 바쁜데 이 영화는 다르다. 치훈과 문석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컷 전환이 거의 없었다.
영화를 관람할 당시에는 왜 호흡이 길지?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렇기에 궁금증을 유발하였고 결과적으론 난 그 둘의 대화에 깊게 집중했다.
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길어진 호흡에는 연기력이 필요하다
상기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영화 자체의 호흡이 길다. 그 말은 배우들의 엄청난 연기력이 필요하다. 영화에는 불안 그리고 의심, 균열,그리고 배신 등의 감정이 담겨있다. 조금이라도 비어보이면 무너져버리는 스토리. 그럼에도 <오픈 더 도어> 배우들은 깊은 연기력으로 그 틈을 꽉 채워주었다. 장르가 '스릴러'인데 배우들 모두 연기가 '스릴러'스럽다. 사실 영화를 선택한 이유에는 장항준 감독만을 보고 선택하는 바람에 배우들은 사전에 찾아보지 않았는데 기존에 조연으로 많이 보았던 배우들이기에 연기력이 보장된 것 같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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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열 화백의 삶 속에 떠있는 물방울 그림들
감독:김오안,브리지트 부이오
출연진:김창열 화백
시놉시스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을 다양하게 표현한 그림들로 유명하다. 50년간 물방울만 그려왔으며 달마대사와 노자의 도덕경을 자신의 신조로 삼아온 예술가이기도 하다. 1929년 맹산의 강가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6.25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고 큰 트라우마가 생겼다. 전쟁에서 나뒹구는 시체들은 탱크로 짓밟히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았기에 김창열 화백은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물방울들을 그리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사실 그도 고향을 떠나 고독함 속에 예술을 해온지라 자신만의 확고한 그림 철학이 있는 것이다. 물방울을 다양한 관점에서 표현한 김창열 화백의 작품들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제주도의 미술 전시관에 자신이 그린 200점의 작품들을 기부하는데...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는 사람의 요구를 달마대사는 거절하자 그 사람은 자신의 한쪽 팔을 자르면서까지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달마대사의 철학이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에 녹아들었다
김창열 화백은 달마대사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것을 깨우치고 자연스레 자신의 물방울 그림에 스며들게 했다. 비록 고단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물방울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작품들이었고 삶의 전부였다. 비록 전쟁을 몸소 겪었고 고향도 떠났지만 철학적인 물방울 그림을 탄생 시키는데 좋은 원료가 된 만큼 그 자체가 예술이다. 또한 자신이 힘든 삶을 살아오며 지금의 화백이 된 것처럼 만약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맹산의 강가에서 살았을 것이고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프랑스로 예술을 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김창열 화백은 지금의 거장이 되기까지 많은 시련을 겪었고 끔찍한 기억들도 있었지만 그런 경험들이 자신을 위해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게 된 게 아니었을까?
김창열 화백의 작품들은 앞으로도
그의 삶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의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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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변화하는 고전의 목록이 던지는 질문
잔느 딜망/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
샹탈 아커만/벨기에, 프랑스/1975/202min/'25주년 특별전 RE:Discover' 세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주의 영화의 역작. 잔느는 사춘기 아들을 홀로 키우며 집에서 성매매를 한다. 평범한 일상이 되풀이되던 어느 날, 잔느는 한 손님의 방문을 계기로 폭발한다. 가정을 성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착취로 은폐하는 공간으로 폭로하는 동시에 주부의 시간성을 말 그대로 경험하게끔 하는 도발적인 영화. 왕립벨기에필름아카이브 시네마테크와 샹탈아커만재단에서 복원했다.(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년, 전 세계 씨네필이 들썩였다. 영국영화협회가 발간하는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의 역대 최고 영화 순위 1위에 〈잔느 딜망〉이 오른 것이다. 1952년부터 10년마다 전 세계 영화 전문가의 추천으로 역대 최고의 영화를 선정해온 이 잡지에서 2002년까지 부동의 1위를 차지해온 건 〈시민 케인〉(1941)이었다. 2012년, 이 자리를 히치콕의 〈현기증〉(1958)이 대체했다. 그리고 10년 후인 2022년, 여성 감독 샹탈 아커만이 연출한 여성 영화 〈잔느 딜망〉(1975)이 이 자리를 다시금 대체했다. 전 세계 전문가들이 꼽은 영화 순위를 그 자체로 존중할 이유는 없다. 이 순위만으로 영화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우습다. 하지만 〈잔느 딜망〉이 역대 최고의 영화로 꼽힌 데서 우리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다. 동시대 영화계의 거대한 변화와 거기에 투영된 욕망의 지형 말이다.
고전의 목록이 늘 남성 감독의 작품으로만 채워지고, 이렇게 확립된 고전이 다시금 남성 작가/남성 서사의 권위를 재확증해온 영화(그리고 예술)의 역사는 유구하다. 〈잔느 딜망〉은 바로 여기에 주목할 만한 균열을 낸다. 고전의 목록은 시대마다 다시 작성되어야 하고, 새로 작성된 고전의 목록은 변화한 시대의 가치관을 담지해야 한다. 우리는 〈잔느 딜망〉이 〈시민 케인〉과 〈히치콕〉을 뒤로 하고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로 꼽힌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무엇이 50여 년 전 영화를 우리 시대로 소환했는지를 살펴보자.
잔느에게는 정해진 일상의 규칙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비누로 손을 씻는다. 청소년 아들의 구두를 닦고 그의 아침 식사를 챙긴다. 설거지를 마친 후 아들의 침구를 정리하고, 오후에 올 성매매 남성 손님을 받기 위해 자신의 침구 역시 정돈한다. 오전 일과를 마무리하면 외출해서 장을 보고 은행, 옷 수선 등의 볼일을 본다. 카페에 가면 늘 마시던 커피가 나오지만 입을 데지 않고 금세 나온다. 집에 도착해서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성매매 남성을 맞는다. 손님이 나가면 씻은 후, 아들에게 그 흔적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욕실도 깔끔하게 정리한다. 곧 아들이 집에 돌아온다. 아들과 저녁을 먹은 후에는 뜨개질, 편지쓰기 등의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세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영화는 잔느의 3일을 천천히 좇는다. 3일 내내 잔느는 위의 루틴을 따라 움직인다. 잔느의 일상을 담는 정적인 카메라의 시선은 그녀 일상의 패턴과 리듬을 관객에게 새긴다. 그녀의 행동에는 군더더기와 낭비가 없다. 우리는 잔느가 이다음에 무엇을 할지 알 수 있고, 잔느가 그 일을 하며 짓는 표정을 보며 그녀의 감정과 기분 상태를 추측할 수 있다(어쩌면, 함께 느낄 수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첫째 날에는 모든 게 완벽했고, 둘째 날에는 살짝 헝클어지며, 셋째 날에는 어제보다 조금 더 어그러졌다. 그래서 셋째 날은, 잔느가 침대 위에 누운 성매매 남성을 찔러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무엇이 그토록 짜임새 있게 구성된 그녀의 일상을 흐트러뜨리고 끝내 그녀를 일상의 완전한 파괴로 내몰았을까? 몇몇 단서를 따라가 보자. 첫째 날, 아들이 잠들기 전 잔느에게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잔느의 남편은 2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해방군 신분으로 잔느를 만났다. 잔느는 그를 열렬히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에 결혼을 선택했다. 아들은 아빠가 죽은 지 한참 됐는데 재혼할 생각이 없느냐고 다시 묻는다. 잔느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다시 누군가에게 적응하며 살기는 싫다는 게 이유다. 아들이 학교 친구의 뻗치는 성적 욕망을 언급하며, 그는 자신이 여자라면 사랑 없이 섹스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을 잇는다. 이번에는 잔느가 네가 여자가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한다.
아들은 잔느의 성노동/성매매에 기생한다. 하지만 자기 존재를 가능케 하는 돌봄의 물질적 기반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악의 없이 엄마를 모욕한다. 성매매/성노동은 잔느에게 자립의 토대다. 이 덕에 재혼할 남편에게 자신을 맞출 필요 없이 일상을 조직할 수 있고 자신과 아들의 삶을 꾸릴 있다. 그러나 아들은 이 모든 것에 무지하다. 심지어 아들이 아직 아버지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중인 데도 그렇다. 아들은 남성 성기가 칼, 불과 같다는 누군가의 말에 엄마와 섹스한(즉, 엄마를 ‘칼로 찌른’) 아빠를 미워하고 악몽을 꾼 적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여자는 사랑 없이 섹스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세계를 배반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는 남자와의 섹스가 여자에게는 근본적으로 폭력이라는 아들의 말, 즉 자기 삶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조건을 부정하는 아들의 말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근본적인 폭력 상태에 머무름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간파가 역설적으로 잔느의 현실을 비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이를 원해 결혼하고,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성매매/성노동하는 잔느의 노동/행위는 그 근본적인 대상인 아들로부터 배반당한다.
잔느를 살인으로 이끄는 또 하나의 동기는 성매매 남성들이다. 잔느가 자립의 근거로 삼은 성매매/성노동은 그녀가 직접 선택한 일이지만 그녀의 통제하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성매매 남성이 잔느의 예상보다 집에 오래 머물 경우, 혹은 그녀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려 할 경우 잔느가 구축한 일상의 리듬과 패턴은 깨진다. 잔느는 성매매/성노동하는 동안 주방에서 감자를 삶는다. 그런데 남자가 예상보다 오래 머무르면 감자는 타 버린다(즉 일상이 어그러진다). 또한 성매매/성노동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구매자 남성의 욕망에 가중치를 두기에 잔느의 욕구와 일상은 줄곧 뒷전으로 밀린다. 즉 성매매/성노동의 구조는 잔느의 자립을 제한적으로 조건 짓는다. 때문에 잔느가 가위를 성매매 남성의 목에 찌르는 행위, 즉 여성에 대한 남성 폭력의 방향을 뒤바꿔 살인하는 행위는 자립하여 돌봄을 수행하고자 하는 여성의 의지가 불가능해진 데 대한 그녀의 자각이 발현된 사건이다.
잔느의 살인은 버거운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남성 폭력의 중단)의 표현인 동시에 자립의 목적인 일상을 깨버린 남성에 대한 분노 표현이기도 하다. 여성이 자신이 꾸려나가는 일상에 품는 양가적 욕망의 발현으로써 그녀의 살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살인 후 불이 꺼진 거실에서 가만히 앉은 잔느의 표정은 편안하다. 혹은 해탈한 듯하다. 여성의 자립과 일상의 자립 대한 모순적 감각이 이 영화를 5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우리 앞에 소환했다. 동시대 고전의 목록은 동시대인의 삶 감각을 담지한다. 또 다른 고전의 목록이 확립될 때까지, 〈잔느 딜망〉의 의미는 계속해서 탐구되어야만 한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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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 글래디에이터 2 / 넘기 힘든 막시무스의 카리스마 / 덴젤 워싱턴의 팔색조 연기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글래디에이터 2"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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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벨만스> 2차 예고편
아카데미 7개 부문 노미네이트 & 골든 글로브 작품상, 감독상 수상작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파벨만스] 2차 예고편 대공개❇︎ 자, 이제 우리의 모든 순간이 영화가 될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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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잘리카투> 30초 런칭 예고편
폭주하는 물소, 광기 어린 인간들, 진정 누가 짐승인가?
푸줏간(도축장)에서 도망친 물소가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 마을 남자들은 폭주하는 물소를 잡기 위해 나서고 이웃 마을 남자들까지 몰려들자 한바탕 대소동이 벌어진다. 평화롭던 마을은 물소를 제압하려는 남자들로 인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버리고,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 물소 사냥은 점차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광기로 변해간다.
※ 잘리카투(또는 살리카투) JALLIKATTU는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의 수확축제인 퐁갈에서 진행하는 전통있는 집단 경기다. 황소를 남자들 무리 속에 풀어놓으면 참가자들은 황소의 등에 올라타서 최대한 오래 버티거나 소를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는데, 이 과정에서 살벌한 장관이 펼쳐진다. 리조 조세 펠리세리 감독의 <잘리카투>는 잘리카투 경기를 묘사하는 영화는 아니다. 확실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