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신고

댓글 신고

ritto2023-07-12 18:26:12

비엔나와 대화의 마법

<비포 선라이즈>속 대화에 대하여

 

 

 

기차에서 난데없이 부부싸움이 벌어진다. 책을 읽다 봉변을 당한 한 승객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자리를 옮겨 앉는다. 옆 줄에 앉은 다른 승객과 공감의 눈빛을 잠시 주고 받는다. 하지만 남자 쪽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무슨 책 읽어요?’라고 묻는다. 폭풍 같은 부부싸움이 객차에서 빠져나가고 나서도 두 주인공,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의 대화는 계속된다. 그들은 식당 칸으로 옮겨 대화를 시작하고, 대화를 멈추지 못해 식사까지 함께 한다. 그러면서 또 다시 우연히도 서로와 놀랍도록 말이 잘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제시는 셀린에게 비엔나에 함께 내려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공항으로 출발하자는 제안을 한다. 망설이던 셀린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는 이 우연한 에피소드로 문을 연다.

 

셀린은 처음 만난 남자를 따라 기차에서 내리고, 영화는 계획도 없이 여정을 시작한 두 사람의 끊임없는 산책과 대화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렇게 시작한 영화는 이내 할리우드식 로맨스 공식을 완전히 비껴 가면서 자기만의 낭만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비포 선라이즈>는 리얼리즘 영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판타지 같은 로맨스다. 존재 자체로 90년대의 청춘 영화이자,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지 모른다는 몽상을 가능케 하는 영화다. 나의 어머니의 가장 큰 낭만이었고, 21세기를 사는 나의 근원 없는 향수다.

 

 

플롯은 아주 간단하다. 두 남녀가 만나서 계획 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둘은 밤새도록 비엔나 거리를 소요하며 대화를 나누고, 잠시 연인이 된다. 날이 밝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이 하룻밤을 링클레이터 감독은 수많은 대화로 채워 넣는다. <비포 선라이즈>의 모든 시퀀스는 두 사람의 끊임없는 말소리로 구성되면서 찬찬히 길어져 3분이 넘도록 이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 중반에 두 사람이 대성당을 발견하는 시퀀스가 있다. 두 사람은 성당 맨 앞자리에 앉아 성당에 엮인 추억과 신에 대한 믿음, 공간으로서의 성당, 심지어는 퀘이커교 식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 대화는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공간에 있을 거야’ 라는, 둘만의 명쾌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다음은 강변이다. 두 사람은 시인을 만나고, 짤막한 즉흥 시를 듣고, 걷고 또 걷고, 말하고 또 말한다. <비포 선라이즈>는 이렇게 제시와 셀린이 나누는 대화로 채워 넣은 시퀀스가 비엔나의 골목길처럼 연결되어 일출에 다다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로맨틱하고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링클레이터의 이 길고 긴 대화 장면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아무런 내용이 없다’고, ‘지루하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특히 흥미로운 캐릭터와 세계관을 던져 주고 영화의 성적에 따라 다음 시리즈에서 그 인물의 과거와 세계관을 확장을 맛볼 수 있는 대형 프로덕션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에게는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티켓 값을 하는’ 스펙터클을 제공해 주는 작품을 원하는 관객, 그리고 미래의 관객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단박에 가늠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포 트릴로지’가 낭만적인 영화로 회자되고 시청되는 이유는 셀린과 제시의 관계가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여타 할리우드 로맨스가 완전한 환상으로 관객을 미혹하는 방식과는 다른 특별함을 말해 준다. 바로 어떤 관객은 ‘지루함’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그 지점이 비포 트릴로지를 독보적으로 만든다.

 

<비포 선라이즈>는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지닌’관계를 두 배우의 대화를 통해 쌓아 간다. 두 사람은 같은 의견을 지닐 때도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어긋난다. 예를 들어 손금을 보겠냐는 한 집시의 물음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셀린에게 자신은 그런 미신은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그렇다. 두 사람은 너무 잘 맞아서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철학을 지녔고,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줄 알기 때문에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차이점은 논쟁이 되지 않고 되려 하룻밤 여행을 이어 나가는 동력이 된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끌리고, 관객은 제시와 셀린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 나간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가 계속될 것인지 아닐지에 대한 걱정은 무의미하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대화를 전면에 내세워 셀린과 제시를 그린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겨난다. 영상 언어를 구사하면서 말없이 주제의식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영화의 가장 주된 임무를 <비포 선라이즈>는 수행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이 질문에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시나리오에서 꺼내 입은 제시와 셀린이 답해 준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말하지만, 잔뜩 감상에 젖어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 기억하는 것은 결국 쇠라의 그림이 프린트된 팜플렛을 훑는 셀린의 손가락, 전차 맨 뒷자리에 앉은 두 사람, 작은 절도를 저지르고 내달리는 순간의 짜릿함, 그리고 음악 감상실 안에서 서로를 힐끔 쳐다보는 눈길이다. <비포 선라이즈>는 대화에서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셀린과 제시인 두 배우, 비엔나를 걷고 또 걸음으로써 만남을 관계로, 대화를 캐릭터로, 비엔나를 낭만으로 변환한다. 그것이 링클레이터가 각본과 대화로 부린 마법이다.

 

 

비포 트릴로지는 선라이즈에서 끝나지 않고, <비포 선셋>을 거쳐 <비포 미드나잇>에 이른다뒤의 두 영화는 <비포 선라이즈>에서 생겨난 마음과 관계를 다른 도시에서 이리저리 움직임으로써 자꾸만 타임머신을 타게 한다. <비포 선라이즈>가 관객을 미혹하게 한 이유그리고 트릴로지로 발전하게 된 이유는 영화에서 다루기 어려운 길고 긴 대화를 매력적으로 촬영해낸 솜씨와 두 배우의 완벽한 연기에 있다두 사람 실제 시간과 함께하면서 자연스레 나이 든 배우들과 자연스레 변화하는 두 캐릭터의 관계를 담은 시리즈라는 매력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작성자 . ritto

출처 .

  • 1
  • 200
  • 13.1K
  • 123
  • 10M
Comments

Relative contents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