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2-07-11 07:51:37
여성들의 '계보 (없음)'에 관하여
영화 〈로스트 도터〉 리뷰
〈로스트 도터〉는 많은 여성에게 당연한 역할로 기대되는 동시에 너무도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감히 다른 결의 이야기를 보태기가 어려운 모성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영화다. 나아가 모성이 여성을 괴롭히거나 두렵게 하는 무언가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매개로 여성 간 연대의 불/가능성 역시 논한다. 영화를 감독한 매기 질렌할은 〈로스트 도터〉가 ‘여성의 정신이 깃든 영화’*라 말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이 표현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레다는 혼자서 그리스의 한 해변으로 휴가를 온다. 한적한 해변에서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던 레다. 그런데 한 대가족이 레다가 있는 해변에 오면서 변화가 생긴다. 그들은 해변이 자신들의 것인 양 행동하고 이에 불편함을 느끼는 레다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레다는 그중 어린 딸아이를 둔 니나에게만은 호감을 느낀다. 아이를 잃어버린 줄 아는 가족에게 외딴곳에서 혼자 놀던 니나의 딸을 데려다주고 나서는 니나와 부쩍 가까워지기도 한다.
레다가 니나에게 느끼는 호감은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딸이 니나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귀찮게 구는 모습을 보며 레다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행동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애정을 갈구했던 딸과의 과거가 니나의 모습에 겹쳐진 것이다. 레다는 딸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온갖 어려움을 홀로 떠맡아야 했다. 레다가 ‘여자’이자 ‘엄마’였기 때문이다. 이는 레다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와는 큰 관계가 없다. 설령 그가 ‘좋은 남자’일지라도 젠더에 따라 다른 노동이 기대되는 사회에서 레다의 짐이 줄진 않았을 것이기에.
그래서 결국 레다는 3년간 남편과 두 딸을 떠나 혼자 지냈다. 그녀에게는 자기 일을 중시하는 남편만큼이나 학자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이를 키우며 잊고 있었던 내면의 존재를 다시금 자각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며 다시 돌아오라고 무릎 꿇고 간청하는 남편의 절망적인 눈빛 앞에서 레다가 지어 보이는 단호하고도 평온한 표정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질식시키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갈 수 없었던 레다가 온전한 삶을 향한 과감한 도피를 감행하고자 결심한 그 슬픔이 깃든 자유로운 표정을 말이다.
그 후 한참의 세월이 흘렀다. 레다는 교수가 되었고 자녀들과도 다시 가까이 지내지만 과거 자신의 행동이 아이와 가족에게 상처를 남겼음 역시 잘 알고 있다. 젊고 매력적인 여성인 니나가 자신이 젊었을 때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데서 레다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레다가 니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바라보는 표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대로라면 그 시선은 분명 안타까움이 깃든 연대의 시선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니나를 바라보는 레다의 시선은 오히려 관음에 가깝다. 나는 레나의 젊은 시절 영상이 나오고 영화의 주제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이 영화가 레즈비언 로맨스 영화인 줄 알았다. 아마도 성애적 욕망만큼이나 강력한 연대의 의지를 표명하기 위한 연출이었을 것이다.
레다와 니나의 연결은 쉽지만은 않았다. 레다는 니나의 가족들에게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그들은 니나가 ‘불온한 여자’임을 본능적으로 감각한다. 그래서 니나가 레다와 함께 있는 걸 못마땅해하고 레다를 이상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만든다. 영화관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남자들에게 레다가 항의하자, 관리인이 올 때만 다시 조용히 있으면서 레다를 골탕 먹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니나 역시 레다에게 점점 마음을 열고 결혼과 육아에 지친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레다가 딸과는 만들어내지 못했던 여성 간 연대가 같은 경험을 한 낯선 여성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질 참이다. 하지만 레다가 관계 초반에 충동적으로 한 행동으로 인해 어렵게 만들어진 연대의 가능성은 또 한 번 좌절된다. 니나가 마냥 행복한 줄로만 알았던 레다가 분노, 질투, 과거에 대한 회한 등이 뒤얽힌 충동적 감정으로 저지른 일이 모든 걸 망쳐버린 것이다.
이처럼 〈로스트 도터〉는 모성, 양육이 여성에게 끔찍한 굴레일 수 있음을 굉장히 섬세한 연출로 보여줌과 동시에 엄마와 딸 혹은 같은 경험을 가진 여성들의 연대가 왜 이리 어려운지를 고민하게끔 한다. 나아가 영화는 모성‧양육에 짓눌린 그들의 경험이 왜 아직도 주변부 담론으로만 취급되는지를 성찰하도록 요청한다. 왜 많은 사람이 같은 경험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도, 주류 담론은 그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자기 경험과 어긋나는 주류 담론에 질식하기 직전인 여성의 삶에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걸까? 레다는 끝내 딸과 니나 모두와 연결되지 못하고 혼자인 채 방치되어야 할까? 〈로스트 도터〉는 여성 경험의 ‘계보 (없음)’에 관한 슬픈 질문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를 양육해본 적이 있거나 아이를 출산할 계획이 있는 여성의 정신이 깃든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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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남 (2022)
* <수리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수리남 (2022)
연출: 윤종빈
출연: 하정우, 황정민, 박해수, 조우진, 유연석, 장첸
장르: 범죄, 액션, 느와르
공개 회차: 6부작
공개일: 2022.09.09
속여야만 살 수 있는 목숨 건 게임
자신의 부모처럼 아이에게 가난을 되물림해 주고 싶지 않았던 '강인구(하정우)'는 친구 '응수(현봉식)'과 함께 큰 돈을 벌어보고자 수리남으로 향한다. 하지만 홍어 사업을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절친을 잃는다. 꼼짝없이 누명을 쓰고 범죄자가 되려던 찰나 국정원 미주지부 팀장 '최창호(박해수)'가 면회를 찾아오고, 수리남에서 자신을 도와주려 했던 목사 '전요환(황정민)'의 정체가 마약왕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강인구'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이자 사업 실패, 친구의 죽음까지 불러온 '전요환'에게 큰 앙심을 품는다. 그는 마약왕을 잡기 위한 국정원의 작전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목숨을 건 연기를 시작한다.
2022 한국 넷플릭스의 한 줄기 빛
<수리남>은 실제로 해당 국가에서 마약 조직 '칼리 카르텔'과 손을 잡고 마약왕으로 군림했던 마약사범 '조봉행'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장르 특성상 넷플릭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르코스> 시리즈를 연상시키며 늘 사회의 어두운 면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해 온 '윤종빈' 감독의 색깔이 뚜렷하다. 본래 영화로 제작되려 했으나 6부작 시리즈로 완성된 <수리남>은 실화에 기반한 사건들을 안정적으로 가져가며 아낌 없이 총탄을 날리는 큰 규모의 액션, 해외 로케이션이 이뤄낸 이국적이고 개성적인 미술 연출, 탄탄한 각본을 토대로 결말까지 흡입력을 놓치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과 <지금 우리 학교는> 이후 올해 많은 한국 넷플릭스 작품들이 공개되었지만, 대부분 허우대만 그럴 듯 했을 뿐 혹평이 자자했다. 해외에서의 성공은 커녕 국내 시청자들마저 등을 돌렸으나 <수리남>만큼은 흥행과 비평의 연속된 실패 속에서 건진 준수한 완성도의 작품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탄탄한 개연성과 캐릭터의 충분한 빌드업
<수리남>의 가장 큰 장점은 개연성이다. 주연 캐릭터들은 모두 목적과 가치관이 뚜렷하고, 감독은 이에 대한 서사를 1화부터 충분히 쌓으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인물의 행동에 대한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우선 폼 나게 살아보기 위해 수리남으로 향한 '인구'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이는 민간인에 불과했던 '인구'가 국정원도 마다하는 위험한 작전에 계속 뛰어들고, 돌발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는 같은 가치를 신봉하는 '요환'과 같은 편인 것처럼 구는데 요긴한 장치로 쓰이기도 한다. '요환'은 수리남에서 코카인 거래를 독점하고 큰 돈을 손에 쥐기 위해 종교를 악용하는 인물이다. 왜 하필 종교일까. 이는 '요환'의 과거 서사 장면들을 통해 충분히 설명된다. 그가 왜 50만 인구의 수리남으로 향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수십 명의 신도들을 마약 사업에 이용하게 된 것인지 서사에 필요한 내용은 단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충분한 설명을 통해 친절한 전개를 펼친다는 것이 마냥 장점으로만 볼 수 있는 속성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이러한 범죄 액션 스릴러물에서는 안정적인 전개 방식이 작품에 중요한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수리남> 역시 두 주인공의 과거사를 중심으로 설명이 다소 과할 정도로 많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작품의 흥미까지 저하시킬 정도는 아니다. 두 캐릭터에 대한 충분한 빌드업은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며 극중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얽히고 설킨 여러 인물들의 양면적 속성이 부각되기 때문에 서스펜스는 충분히 갖추고 있다. 특히 누가 누구의 편인지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스토리로 몰입을 끌어올리며 마치 '마피아게임'을 보는 듯한 흥미진진한 전개를 펼치기까지 한다. 아마 영화로 제작되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캐릭터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6부작 시리즈물로 기획됨으로써 자연스레 인물들의 서사에 살을 붙이고, 대사를 통해 풀어도 될 장면들을 좀 더 흥미롭게 생생한 연출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독사 같은 조우진, 아쉬운 유연석
실화 바탕의 각본은 개연성과 함께 짜임새 있는 스토리로 결말까지 흐트러짐이 없다. 다만, 배우들이 치는 대사나 캐릭터 표현은 어딘가 모르게 전형적이다. '구상만'으로 위장해 '김프로 어떻게 식사는 잡쉈나?'를 외치는 '최창호(박해수)'의 대사들은 캐릭터의 대담한 성격과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어울리지 않게 촌스러우며 주인공 '강인구'를 연기한 '하정우'는 딱 예상 가능했던 연기를 보여준다. '하정우'의 복귀작이라고 홍보가 되기에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연기로서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연 캐릭터들 중 유일하게 순둥이를 자처한 '유연석'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듯 혼자만 연기가 붕 떠 있다. 배역 특성상 영어를 많이 섞어 쓰고 능글거리는 성격이지만 극중 보여진 장면들은 하나같이 부담스럽고 어색했다.
작품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는 조선족 '변기태'로 분한 '조우진'이다. 작중 가장 큰 반전을 선보인 캐릭터기도 한데, 독사 같은 날카로운 모습과 현실에 찌든 인간적인 모습을 넘나드는 1인 2역 같은 연기를 소름돋을 정도로 잘해낸다. 특히 목숨을 걸고 수십 명의 중국인 갱과 혈투를 벌이는 장면에서의 잔혹한 카리스마는 아주 강렬했다. 식상한 얼굴이라고만 생각했던 '황정민'도 위선과 광기가 공존하는 빌런으로서의 위압감이 상당했으며 극악무도한 갱스터로 등장한 '장첸'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재미만큼은 확실한 '수리남' 월드
아는 맛이다. 하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이다. '윤종빈' 감독은 본인이 특화된 장르로 돌아왔고, 배우들은 제몫을 해낸다. 장르를 '수리남'이라는 이색적인 공간으로 옮겼을 뿐 소재나 줄거리는 비슷한 류의 다른 한국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크게 새롭지는 않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 결말 역시 처음부터 쉽게 예상이 가능하고, 감독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범죄 액션물이 가져다줄 수 있는 '재미'라는 본질적 요소에 집중하며 신파적인 이야기나 인물들의 불필요한 감정선을 첨가하지 않고, 결말까지 흡입력 있는 전개로 깔끔한 마무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내용 측면에서의 긴장감은 부족할지라도, 인물들 간의 교묘한 심리전으로 흥미를 충분히 이끌어낸다. 정해진 결말을 두고 쉼없이 달리는 속력과 서로를 난타하는 인물들의 피 튀기는 혈전, 샛길로 빠지지 않게 탄탄한 설정을 갖춘 캐릭터성을 토대로 속이지 않으면 죽게 되는 밀림과도 같은 '수리남'의 세계관을 완성시켰다.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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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가 생동감을 살리지만.. 밋밋한 이야기
일상을 살면서 ‘국가’의 힘을 느끼기는 어렵다. 학교를 가고, 회사에 가고, 주변의 장소에 가도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주변의 사람들과 환경이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조직이나 환경들은 국가의 노력이 없었다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국가는 개인의 능력을 이용해 그런 환경을 만들어 나가고 더 많은 개인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환경을 같이 누린다. 하지만 그런 상호작용을 우리는 평상시에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서 국가는 우리의 일상에 늘 있지만 직접적으로 바로 느끼기는 어렵다.
어떤 순간에는 국가의 절대적인 힘이 필요할 수 있다. 특히나 국민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국내외에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납치당하는 경우, 기본적으로 공권력이 그 일을 해결하는데 투입된다. 국내에는 경찰이 그 역할을 하지만 해외에서는 한국의 경찰이 개입하기 어렵다. 대신 현지에 있는 대사관과 외교부가 국민이 필요한 일을 대신해준다. 큰 사건사고들이 많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해외에 있는 국민들은 의지할 수 있는 국가의 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국민을 구하려는 국가의 절실한 노력을 담아낸 영화 <교섭>
영화 <교섭>은 국민을 보호하려는 국가의 절실한 노력이 담겨있는 영화다. 과거 샘물교회 피랍 사건을 기본 줄기로 삼고 구체적인 내용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영화는 외교관 재호(황정민)와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이 피랍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영화 속 두 사람은 국가의 힘을 대신하여 교섭을 진행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처음에 다른 접근 방식으로 피랍된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지만 그 차이는 조금씩 줄어든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테러 조직에게 납치된 사람들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탈레반은 인질 석방의 조건으로 감옥의 탈레반 몇 명을 풀어달라는 요청을 하고 현지 주둔 중인 한국군이 철수하는 것을 원한다. 한국의 외교부는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고 아프가니스탄의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다. 온전히 한국이라는 국가의 능력으로만 진행해야 하는 교섭은 무척 어려워 보인다. 여기에 돌파구를 만들어가는 건, 현지에 파견된 외교관들이다.
영화 속 재호는 꽤 유능한 외교관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처음 사건 관련 뉴스를 접하고 나서 그는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바로 동료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지시하고 자신도 가장 시급한 일을 해 나아간다. 무엇보다 그는 영화 끝까지 인질이 석방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외교부 안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다. 교섭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당연하게도 다른 대안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마련이다.
외교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외교부 수장과 몇몇 인원들은 군사적인 해결책을 고려하고 실제로 시행하려 한다. 영화가 던지는 흥미로운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군사적인 해결책을 생각한 외교관과 끝까지 교섭을 해야 한다는 외교관 재호의 의견 중 누가 더 옳은 의견일까.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 때는 무엇이든 선택하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이라고 말하기 무척 어렵다. 영화에서는 재호의 선택 과정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힘을 실어준다. 결과적으로 그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충분히 다른 우울한 결말로 이어질 수 있는 선택이었다.
위기를 풀어나가는 그 상황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고민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단축하고 무언가 결정하여 행동해야 한다. 돌아가는 상황의 급박함과 순간적으로 변화되는 상황은 결정을 망설이게 한다. 하지만 결국 선택을 해야 한다. 모든 순간에서 가장 나쁜 건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 속 재호는 대식과 함께 중요한 결정을 빠르게 해 간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잘못된 결과는 영화적으로 활용되어 작은 반전을 만들어낸다. 중요한 건 그 두 사람을 비롯한 외교부가, 국가가 그 위험한 줄타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는 2004년 실제로 있었던 샘물교회 피랍사건의 교섭과정을 모티브 삼아 중간의 작은 사건들을 채우면서 변주해 간다. 피랍된 인원들이 풀려나는 과정은 다소 축소되었지만 실제 사건의 분위기나 과정을 그래도 사실적으로 담으려 노력했다. 무엇보다 외교관들의 노력과 긴장감을 담아내려 했던 것 같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외교부와 외교관들의 대화를 담는다는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외교관들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탈레반들은 현지 배우들을 캐스팅하면서 무척 실감 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여기에 황정민과 현빈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배우들의 생동감 있는 연기가 살리지 못하는 밋밋한 이야기
전반적으로 이야기자체가 조금은 싱겁게 느껴질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자극적이거나 신파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강한 맛은 덜하다. 그렇다고 이주 묵직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될 만큼 강력한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심심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 약간의 유머가 포함되어 있지만 전반적인 극의 상황과 잘 맞지 않는다.
이 영화를 연출한 임순례 감독은 이 영화를 보다 사실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실제 아프가니스탄과 그와 비슷한 곳에서 촬영을 진행했고 현지 배우들을 캐스팅해 사실적인 장면을 이끌어냈다. 또한 영화의 음향과 음악 같은 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무난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이야기 안에서 활약하는 외교관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넓게 보면 국가를 대표하는 그들이 위기에 처한 국민을 어떤 방식으로 구하려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명절에 가족들과 함께 보기에는 좋은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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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피커] 촬영팀 세컨드 / 촬영팀, 그리고 나
씨네피커는 7월 한달 간, 현재 방영중인 tvN 드라마 <감사합니다>에서 촬영팀 세컨드로 참여하고 있는 형정훈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있어요. 오늘은 그 세번째 시간입니다. 아버지와 영화를 보던 청소년에서, 영화과에 진학하고 이제는 촬영현장에서 일한 지 5년차가 되었는데요. 실제 현장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Q. 어떤 일을 하든 3년차가 지나면, 슬럼프가 찾아오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이제 5년차가 되었어요. 혹시 촬영팀을 하면서 그만두고싶었던 적이 있나요?
A. 저는 오히려 드라마 첫 작품 시작할 때 그 생각을 좀 많이 했어요. 저는 학교에서도 선배들이 ‘열심히 하는 친구다’ ‘잘하는 친구다’라는 소리를 들었고 동기들 사이에서도 ‘촬영을 잘하는 친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래 나는 잘하는 친구야, 열심히 하는친구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근데 드라마 현장을 갔는데 너무 부족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위에 있던 형님에게 ‘이렇게 하면 안된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 라는 꾸중을 많이 들었거든요. 저는 정말 이 촬영 일을 하면서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힘들어도 뿌듯함이나 행복함을 느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처음으로 그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아, 내가 정말 행복하고 좋아하던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더 자괴감이 드는 느낌이었죠. 주변 친구들한테도‘너무 힘들다’ ‘그만둬야하나?’ 하고 상담도 많이했구요. 그러다가 깨달은 순간이 한 번 있어요. 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저 사람이나를 미워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의 어떤 행동이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 즈음에 다른 분들이 ‘정훈이 고생한다’ ‘제일 막내 고생하네’라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그게 정말 위안이 되었어요. 그 작품이 끝나고 지금 촬영팀으로 이직을 했는데 이직을 하고 나서 꾸중했던 그 형님에게 전화가 왔어요. “다음 작품같이 해줄 생각 없냐” 라고. 그때 그렇게 나한테 부족하다고 하면서도 연락을 준 건 ‘내가 잘 못했던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이 팀에서 막내로 있고 성장을 하고 싶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는데. 그 때가 좀 다시 회복을 한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잘했구나, 잘했었구나.’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때가 저 스스로 이겨낸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Q 처음이라, 그 상황이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A. 힘들다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당시엔 힘들었겠지만, 이게 내 직업이나 장래를 흔들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리고 어느 정도 전우애라고 해야 하나? 옆에 사람도 버티고, 나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나 나보다 체격이 작은 누나나 이렇게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연한 느낌같은 것도 있었어요. 처음 1년은 적응하는 게 힘들었는데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서 계속하다 보니까 이제는 적응이 된 것 같아요. 잠을 못자고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적응이 되었고요.
Q 가끔 메이킹 영상을 보면, 촬영팀은 거의 대부분 남자 같았는데, 촬영팀에도 여자스태프들이 많이 있는지 궁금해요.
A. 제가 지금까지 했던 촬영팀은 다 여자 스태프들이 있었고 지금도 같이 하고 있는 누나도 있고, 생각보다 여자 촬영팀이 많이 있어요.
Q 촬영 감독을 꿈꾸는 여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여자 촬영팀이라고 생각하면 ‘힘이 안되는데, 체격이 작은데? 체력이 못 버틸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더라구요. 그런데제 전 작품을 같이 했던 세컨드 누나의 키가 152cm? 153cm? 굉장히 작고 여리여리한 몸이었는데도 카메라를 잘 들었어요. 저는 그런 장비를 드는 건 노하우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오히려 제가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저보다 같이 했던 누나가 장비를 번쩍 잘 들었던 기억이 나요. 신체적인 부분은 노하우를 통해서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촬영팀을 하는 건 어렵겠죠. 어느 정도 본인의 노력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 누나도 체력 기르기 위해 유도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본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을 하신 것 같고요. 또 여자 촬영팀의 장점은 (물론 남자분들의 개인차도 있겠지만) 세심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장비를 체크한다거나 아니면 정리를 한다거나 이런 부분에서 강점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인의 단점은 보완을 하고, 장점을 부각시키면 좋은 자리를 오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조건 신체적인 부분이 부족하다고 해서 이 자리에 들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은 안했으면 좋겠고,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만큼 인정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기때문에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Q. 촬영팀에 일하고 싶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에게 구직 꿀팁을 알려주실수 있나요?
A. 솔직히 지인이나 학교나 이런 인맥이 대표적인 것 같아요. 왜냐면 직접 면접이나 이력서를 올리는 시스템이 잘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학교나 지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좋은 건 우선 학교에 진학을 해서 선배들의 인연을 가지는게 좋긴한 것같아요. <필름메이커스>에서 올라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보는데 메이저 급의 드라마나 영화팀은 아마 필름메이커스에서 구하지 않는 편이어서 어쨋든 차근 차근 인맥을 쌓아서 메이저 팀으로 옮기는 방법도 있구요. 처음에는 촬영과 관련된 네이버 밴드나오픈 채팅방같은 것을 찾아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Q. 혹시 나중에 촬영 메인 감독이 된다면 하고 싶은 장르가 있나요?
A. 제가 지금까지 한 작품들이 거의 장르성이 부각되는 작품들이거든요. <다크홀>은 좀비물이었고, <더 글로리> <마당이 있는 집>도 <유괴의 날>도 다 장르물이었어요. 미스터리, 스릴러, 아니면 범죄 이런 장르물을 많이 했는데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로맨스 코미디나 화사한 분위기의 작품도 해보고 싶어요. 설레는 장면들을 직접 보고 싶고, 그런 분위기도 안해 봤으니 궁금해서 그런작품을 하고 싶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약 메인이 된다면 장르물을 찍고싶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로맨스 코미디물은생각보다 카메라로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 장르물과 달라서 내가 잘 찍을 수 있는 게 뭘까 생각을 하면 장르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Q. 요즘은 정말 콘텐츠가 많잖아요. 형정훈님이 생각하는 좋은 콘텐츠란 무엇인가요?
요즘 나오는 콘텐츠들이 유튜브나 아니면 쇼츠에 대중들이 익숙해져서 짧은 시간 안에 강한 재미 혹은 강한 임팩트를 원하는 영상들이 많아지는 것 같은데 그런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저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또 어떤 드라마를 보고 생각을 가질 수 있는시간을 준다면 저는 그게 좋은 콘텐츠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사운드와 스크린을 보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작품 내용 보다는 기술 적인 것을 많이 봤었는데, 영화 <괴물>을 보고 나서 ‘아 정말 좋은 영화 봤다’ ‘나를 흔드는 영화를 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재밌고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도 좋지만 다시 한번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본인에 대해서 생각하는 영화가 저는 좋은 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Q 촬영팀 형정훈님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목표는 저는 항상 모두에게 다 이야기를 하는데 제 친구들 혹은 지인들이 TV나 영화를 보는데 ‘저거 내 친구가 한 거야’가 제 목표예요. 그래서 모두가 알 만한 작품을 제가 직접 카메라 잡고 찍는 게 제 목표입니다.
넘쳐나는 콘텐츠 속에서 생각의 여지를 주는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사람. 자신이 촬영한 콘텐츠가 사람들에게 자랑이 될 수 있는 콘텐츠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인터뷰내내 형정훈님은 작품을 사랑하고, 작품에 진심을 다하는 바른 사람이라는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형정훈님이 앞으로 더 성장해 촬영감독 형정훈으로써 참여할 작품이 더 기대가 됩니다. 첫번째 씨네피커 형정훈님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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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 '편지' 이야기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편지 쓰는 걸 좋아하시나요?
디지털 기기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은 많지 않지만,
화면 너머의 정갈한 글씨보다 손으로 쓴 삐뚤빼뚤한 글씨에서 더 진심이 느껴질 때가 있죠.
그래서일까요? 여전히 많은 영화에서 '편지'는 매우 중요한 소재로 쓰이곤 한답니다.
오늘은 가슴 절절한 연애편지부터 인생의 지혜를 전해주는 따뜻한 편지까지!
다양한 편지가 등장하는 아름다운 영화 5편을 소개해 드릴게요.
시월애(2000)
A Love Story
ⓒ 익스트림무비
우편물을 부탁하는 편지로부터 시간을 거스르는 사랑까지
감독: 이현승
출연: 이정재, 전지현 등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 판타지
러닝타임: 94분
단역 전문 성우 은주(전지현)는 1년간 살던 바닷가의 집 '일마레'를 떠나며 우편함 안에 다음 주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긴다. 그러나 그 편지는 시간을 거슬러 은주보다 먼저 '일마레'에 살았던 건축가 성현(이정재)에게 전달되고,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사이가 된 두 사람. 급기야 성현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은주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미래의 은주는 헤어진 애인을 잊지 못하고 과거의 성현에게 자신과 그가 헤어지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은주를 사랑하게 된 성현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러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하게 되고, 성현이 자신의 부탁 때문에 사고를 당함을 알게 된 은주는 사고를 막기 위해 성현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가 늦지 않게 그 편지를 받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영화의 제목 '시월애'는 한자로 썼을 때 '時越愛'로, 직역하면 '시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름다운 비주얼로 호평을 받은 동시에 영화제, DVD 등을 통해 해외로 수출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2000년대 초에 한국영화 팬덤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손꼽히며, 2006년 할리우드에서 <레이크 하우스>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
성현에게 보내는 은주의 편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사람들이 가까워지면
점점 더 기대를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들 너무 멀리 있어요.
2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요?
그냥 약속을 잊으신 거면 좋겠어요.84번가의 연인(1987)
84 Charing Cross Road
ⓒ MUBI
도서주문 편지에서 시작된 20년의 우정
감독: 데이비드 휴 존스
출연: 앤 밴크로프트, 안소니 홉킨스, 주디 덴치 등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00분
가난한 작가인 헬레인 헨프는 대단한 독서광으로 읽고 싶은 고전들을 싸게 사 보기 위해 영국 런던 84번지에 있는 중고책방에 편지로 책을 주문한다. 이를 계기로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과 평생을 정신적 교류를 나누는 정신적 연인이 되어 편지로만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 때론 귀한 책 한 권에 함께 감동하고 때론 분노하면서 사소한 주변 얘기도 곁들며 가며 인생을 논할 수 있었던 건 프랭크, 헬레인 두 사람 다 따뜻한 인간애와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정신, 여유롭고 유머가 풍부한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프랭크가 죽기까지 영국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헬레인은 프랭크가 죽고 난 후 어느 날 문득 그녀가 그토록 동경했던 그 서점에 가서 감상에 젖는다.
뉴욕의 무명작가와 런던의 고서점 관리인이 실제로 1949년부터 무려 20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책 <채링크로스 84번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영화의 대부분이 두 사람 간에 오간 편지글로 채워져 있으며, 긴 세월 동안의 이야기를 담은 만큼 영화 속 사건들에 당대의 역사 또한 고스란히 녹아 있어 더욱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프랭크에게 보내는 헬레인의 편지
전 고전 작품을 즐겨 읽는 가난한 작가인데
이곳엔 제가 원하는 책이 없어요.
있어도 가격이 비싸죠.
찾고 있는 책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목록 중 5달러 이하의 책이 있다면
이 편지를 주문서로 여기시고
그 책들을 제게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헬레인 헨프 드림.윤희에게(2019)
Moonlit Winter
ⓒ 네이버 영화
오랫동안 하지 못한 말, 나도 네 꿈을 꿔.
감독: 임대형
출연: 김희애, 김소혜, 나카무라 유코 등
장르: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105분
"윤희에게, 잘 지내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 앞으로 도착한 한 통의 편지. 편지를 몰래 읽어본 딸 새봄은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발신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제안하고, 윤희는 비밀스러웠던 첫사랑의 기억으로 가슴이 뛴다. 새봄과 함께 여행을 떠난 윤희는 끝없이 눈이 내리는 그곳에서 첫사랑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데…
여러 단편영화들을 통해 국내외 다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임대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두 번째 장편영화.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굵직한 내공을 보이고 있는 김희애와 나카무라 유코가 주연으로 함께했으며, 개봉 이래로 팬덤 '만월단'까지 만들어내며 호평일색을 받았다. 국내의 여러 퀴어 영화들 중에서도 젊은 세대가 아닌 부모 세대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장점이다.
윤희에게 보내는 쥰의 편지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 봐.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 네이버 영화
미처 전하지 못한 진심
감독: 데이비드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등
장르: 판타지, 멜로/로맨스, 드라마
러닝타임: 166분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말 뉴올리언스, 80세의 외모를 가진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그의 이름은 벤자민 버튼. 부모에게 버려져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함께 지내던 그는 자신이 시간이 지날수록 젊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12살이 되어 60대의 외모를 가지게 된 그는 어느 날 6살 소녀 데이지를 만난 후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잊지 못하게 된다. 청년이 되어 세상으로 나간 벤자민은 숙녀가 된 데이지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비로소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벤자민은 날마다 젊어지고 데이지는 점점 늙어가는데…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가 집필한 단편 소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을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 <세븐>, <파이트 클럽> 등을 연출한 데이비드 핀처가 감독으로 참여했으며, 아름다운 영상미와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인생영화로 꼽는 작품이다.
딸에게 보내는 벤자민의 편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너무 늦은 건 없단다.
내 경우엔, 너무 이른 건 없다고 할 수 있겠지.
꿈을 이루는 데 시간제한은 없단다.
원한다면 언제든 새롭게 시작해도 돼.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혹시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 바라마.캐롤(2016)
Carol
ⓒ 네이버 영화
단 한번, 겨우 전한 진심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등
장르: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118분
1950년대 뉴욕, 맨해튼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하나뿐인 딸을 두고 이혼 소송 중인 캐롤과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확신이 없던 테레즈, 각자의 상황을 잊을 만큼 통제할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둘은 확신하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고 처음으로 찾아온 진짜 사랑임을…
<재능 있는 리플리>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범죄 소설의 대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인 <소금의 값>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며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영화의 계절적 배경인 겨울만 되면 재상영을 할 정도로 국내 팬층이 두텁기로 유명한 작품이다.
테레즈에게 보내는 캐롤의 편지
우연이란 건 세상에 없어요.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에요.
차라리 일찍 이렇게 된 걸 감사히 여겨요.
당신도 언젠가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그날이 오면, 그곳에서 당신을 반겨줄 나를 떠올려 줘요.
영원한 일출처럼 우리 앞에 펼쳐질 삶과 함께.
하지만 그때까지는 만나지 않기로 해요.
난 할 일이 많아요. 당신은 훨씬 많겠죠.
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네요.
당신을 놓아줄게요.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헤어져야만 했던 캐롤과 테레즈.
그런데 이런 영화의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편지지 세트가 있다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지금 바로 텀블벅에서 진행되고 있답니다.
바로 영화 취향 커머스 플랫폼 [클로저]에서 기획한 [클로저 투 캐롤] 프로젝트!
잠깐! [클로저]는 또 뭐고, [클로저 투 캐롤]은 또 뭐냐구요?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제가 바~로 설명해 드릴게요!
[클로저]는 영화를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를 만지고, 향을 맡고, 맛을 보기도 하며,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나누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더 가까이 더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영화로 발견하는 취향 커머스 플랫폼'이에요.
[클로저] 팀에게 <캐롤>은 선물 같은 작품이라고 해요.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들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 갖고 싶은 물건들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클로저 투 캐롤]은 클로저 팀의 이러한 마음을 듬뿍 담아서 구성품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특별하답니다. 영화 <캐롤>의 팬이라면 누구나 소장하고 싶을 상품들을 지금 바로 소개해 드릴게요.
https://tumblbug.com/closertocarol
오늘도 유용한 정보가 되었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따뜻하고 건강한 주말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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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틀 포레스트>
<리틀 포레스트>
" 심심한데 맛있는 영화 한 편 보고 싶을 때 "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 <리틀 포레스트>. 사실 일본에서 먼저 만들어진 영화를 봤지만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아 끝까지 보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리메이크된다고 했을 때 보러 가려고 표까지 끊어놨건만 밀려드는 일이 바빠 보지 못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차차 잊혀 간 작품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 이런저런 영화를 보다 보니 자극적인 맛에 질린 때가 오고야 말았다. 액션은 너무 정신없고, 드라마는 너무 마음 아프고, 로맨스는 너무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껴두었던 이 영화가 떠올랐다. 주저 없이 영화를 틀고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보았다. 103분이라는 적당한 러닝타임 동안 숨소리만 내고 영화를 즐겼다. 평화롭고 단조로운 아주 진한 여행을 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 이 영화를 특별하다고 정의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다만, 기존에 있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는 영화였다. 정말 <리틀 포레스트>만의 색깔을 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꽤 슬픈 일이다. 꿈을 위해 도시로 나선 사람들이 각박함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온다는 건 그리 현대사회가 가진 슬픈 이면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 속 미디어는 귀농에 대한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장면들로 가득 채워 도시와 대비되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마치 그곳을 현실처럼 꾸며놓는다. 하나, 20년간 시골에서 자란 내가 생각하기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꿈꾸는 시골에서의 삶이란 영화만큼 완벽할 수 없다. 그렇기에 <리틀 포레스트> 완벽한 대리만족의 영화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어보지 않았기에 공감할 수 없다는 점은 이럴 때 이점이 된다. 그저 낭만을 편집해 붙여놓은 장면들은 간접적으로 겪어 보기에는 행복한 꿈이지만, 현실은 이상적인 판타지가 아니다. 감독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조금 언질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하다.
그러니까, 현실성은 많이 떨어진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고 몇몇 관람객들도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틀 포레스트>가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아마 '힐링'이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따듯한 난로를 켜고, 좋아하는 음식을 직접 요리해먹고, 친구들을 만나 그저 수다나 떠들 수 있는 그런 환경은 현대인들이 가장 꿈꾸는 이상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도시로 모여든다. 도시에서의 삶은 다친 마음과 허무한 나날뿐이다. 도시를 떠나올 때 혜원(김태리 분)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아르바이트로 연명해가는 삶이란 결국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온 고향에서 누구에게도 재촉받지 않고 오로지 먹고살기 위한 것에만 집중한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괜찮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 이 단순한 문장으로 영화는 진짜 소중한 삶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작정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야' 맞는 말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음식으로 유명한 영화이다. 음식을 담아내는 컷들이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감독이 마치 어떻게 찍어야 예쁘게 나오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음식의 조리과정이나 맛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영화를 찾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음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정성을 다한다는 것, 온 마음을 전부 내비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포레스트> 속 음식에 관한 의미는 깊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길거리에 파는 컵밥 같은 게 아니라 직접 수확한 재료로 시간을 들여 음식을 해 먹는다는 것은 그동안 잃어버렸던 삶의 본질적인 의미에 관한 '채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무하고 공허하기만 한 도심 속 삶에서 내 손으로 만들어본 적 없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어보는 것. 음식은 사계절의 시간을 따라가며 마음속 엄마(문소리 분)를 불러일으키고, 때를 기다려 하루를 보내도록 유도한다. 영화 속 음식은 곧 혜원의 내적 감정을 좀 더 활성화하는 장치였을 것이다.
먹는 것으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을 낸다면, 먹방과 다를 것 없는 한 편의 영상으로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본질은 이야기에 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영화의 수준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포레스트>는 스토리면에서도 타 영화들과 비교되지 않는 탄탄한 구성을 선보인다. 서울살이에 지쳐버린 딸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오래전에 떠난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감독은 영화 초반에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그랬다' 식으로 이야기를 군데군데 던져두고 사건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도 하지 않는다. 관객은 백 스토리를 통해 '그랬겠구나'하고 암묵적인 내용만을 파악할 뿐이다. 하나, 놀랍게도 이러한 전개가 큰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읊조리는 주인공을 따라 천천히 가다 보면 어느새 결말에 당도해있다. 삶 속 여유에 대한 메시지를 이야기해주기 위해 비교적 느리게 스토리를 전개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마치 지루한 전개에 답답해하는 관객들에게도 여유를 가져라 하고 말하듯이 말이다. 유년시절의 주인공과 현재의 주인공, 시간의 순서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 이유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여백이 많은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극의 호흡을 느리게 다듬어 관객에게 쉴 시간을 주는 그 순간은 극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이러한 여백을 만드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당연하게도 여유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아름다워야 하며, 셋째는 흐름을 끊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나가야 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이러한 여백의 공간을 천천히 메워나간다. 계절이 되었다가, 재료가 되었다가, 마음이 되었다가 말이다. 겨울을 시작으로 이어가는 계절 컷은 시간의 진도를 맞출뿐더러 각 계절이 가진 색과 향을 그대로 담아냈다.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과 초록색으로 도배된 봄, 찐한 햇빛을 머금은 여름과 갈색빛의 가을까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이해시키는 여백들은 영상미와 더불어 영화의 품질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주위 인물인 재하(류준열 분)나 은숙(진기주 분)의 모습을 보면 혜원을 만날 수 있다. 재하는 자존감을 갉아먹는 회사에서 뛰쳐나와 농사라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고, 서울의 삶을 꿈꾸는 은숙은 현실과 타협하고 고향에서 살아간다.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현실의 모든 삶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돌아와 그럭저럭 살아라가 아닐 것이다. 혜원이 선택해야 할 삶의 방향을 친구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적당히 괜찮게 타협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벗어나고 진짜 자신의 삶 근본으로 돌아올 것인지 말이다. 혼란스러운 혜원의 마음이 남 일 같지 않은 건, 20대라는 배경과 인물 설정이 현대 사회 취업준비생인 20대들과 지나치게 닮아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그냥 휘둘리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혜원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고한다. 때문에, 감독은 재하의 입을 통해 이야기한다. 혜원은 지금 아주심기를 준비중일 거라고. 아주 쓸쓸한 겨울 될 테지만 좀 더 단단해지고 견고해지는 시기가 오게 될 거라고 말이다. 당신도 아주심기를 준비해보는 건 어떨까.
앞서 말했듯 영화가 단순히 귀농의 판타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닐 것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다소 머니까 말이다. 임순례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만의 공간에서 당신만의 휴식'이 아닐까. 어린시절에 살았던 고향이 혜원에게 하나의 '공간'이 되었듯이 당신 또한 그러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집이 될수도 있고, 카페가 될수도 있고, 취미가 될 수도 있다. 오로지 당신의 공간에서 당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통해 성장하고 바뀌어나가는 것. 이러한 성장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근본을 찾아낼 것을 강조한다. 또한 감독은 20대 혜원의 모습을 통해 당신의 휴식을 권고한다. 바쁜 도시생활에서 벗어난 혜원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삶은 늘 뜻대로 되지 않고 버겁기만 하다. 주위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서서 똑같은 위치에 맴돌고 있다면 그것만큼 비극적인 청춘이 없을 것이다. 영화는 말한다. 사회적 성공이나 명예에 집착하기보다, 혜원의 '배가 고프다'는 말처럼 인간의 기본 욕구에 좀 더 충실하라고.
무작정 좋은 영화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고, 너무 영상미에만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 사회 영화는 너무 맵고 짠맛에 길들여져 있다. 이것이 꼭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자극적인 것들로는 마음을 채우기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흥미롭지 않으면 관객들이 봐주지 않으니까, 소비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의 <리틀 포레스트> 열풍은 반가우면서도 낯설었다. 맵고 짠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순한 맛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컷들의 연속, 영상미가 돋보이고, 카메라를 통해 완성되는 요리와 맛까지 ... 현대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영화처럼 부작으로 나누어 상영했다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동시에 한 편으로 끝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만한 여지를 주었구나 라는 만족감이 든다.
출처 : <리틀 포레스트>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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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너스> 속 뱀파이어화, 그리고 뱀파이어
<씨너스(Sinners)>(2025, 라이언 쿠글러)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씨너스>의 두 번째 오프닝은 위장이다. 먼저 영화는 (아마도 애니의) 스토리텔링으로 열린다.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 혼을 소환할 능력이 있는, 또한 악마도 불러들이는/매혹하는attracts 목소리에 관한 이야기. 이어 1932년 미국 남부라는 배경을 알리는 간결한 문구가 화면에 뜨고, 앞뒤 설명 없는 상황이 뒤따른다. 지옥을 뚫고 달려온 듯한 몰골의 소년이 손잡이만 남은 기타를 들고 교회로 들어선다. 목사는 그를 알아본다. 대립하듯 마주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조명하는 숏들 사이에 이질적인 상이 끼어든다. 관람을 마친 후의 관객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되지만, 이 시점에서는 판별할 수 없다. 영화가 그 미지의 존재를 소년과 포개고 있다고 추측하게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성직자가 십자가를 들고 기도문을 외우면 괴로워하는 악마의 상을 수없이 봐 왔다. 첫 시퀀스에서 ‘그 목소리The voice를 지닌 자가 악마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으므로, 관객은 기타를 쥔 소년이 위험한 존재라고 짐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후 전개를 따라가며 전자의 일부가 다시 이해되고, 후자는 완전히 뒤집힌다. 영화 후반부에 이 교회 씬이 재등장하면 관객은 아주 다른 것을 읽어내게 된다.
사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세계를 대강이라도 안다면, 악마에 씌인 블루스 뮤지션이 십자가에 의해 구원받는 서사를 연상하도록 관객을 유도하는 제스처에 다른 속셈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했을 수도 있겠다. 이 위장은 거기 속아넘어갔건 그 이면을 예상했건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미리 적으면, 악마에 맞서는 힘은 부두교와 블루스- 블랙 헤리티지에서 나온다. 러닝타임을 한참 건너뛰어 새미가 뱀파이어 수장 레믹에게 붙들리는 클라이맥스 씬을 보자. 프리쳐 보이인 새미가 기도문을 외우자, 레믹이 웃으며 그것을 따라 외기 시작하더니 뱀파이어들 모두가 합창한다. 이는 영화가 위장의 해체를 완료하는 장면이다.
환상을 퍼트리는 뱀파이어와 감염의 매개 - 메리와 그레이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 목사가 소년에게 ‘기타를 내려놓고 악을 버리라’고 강력히 애원하는 와중 영화는 하루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이 다음부터 묘사되는 것은 스모크와 스택이 새미를 데리고 주점 오픈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초점은 준비 단계 자체보다는 인물 소개에 있다. 오가는 대화와 행위로 과거사와 관계성이 드러난다. 보, 그레이스, 슬림, 메리, 콘브레드, 애니가 등장한 후,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신호처럼 뱀파이어 악마 레믹은 충격음과 함께 화면에 뚝 떨어진다. 그가 퍼트리는 뱀파이어화는 좀비화를 수반한다. 물린 자들은 피를 필요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을 감염시키기를 갈망하게 되며, 자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적으로 사고하고 움직이게 된다. 뱀파이어화와 함께 퍼지는 것은 “서로에게 무조건 친절한”, 피부색을 ‘인식하지 않는’ 거대한 연합체에 대한 환상이다. 이는 현재에도 All Lives Matter나 Equalism 같은 이름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뭉뚱그리고 차별을 덮는 ‘휴머니즘’적 태도들을 조롱하는 은유가 아닐까.
영화가 쌓아두었던 각 인물의 특징은 감염의 상대적 취약성, 그리고 누가 어떻게 감염되고 감염시키는가와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동료에게 행사된 혐오성 법폭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슬림은 스스로를 희생해 타인을 지킨다. 뱀파이어에 관한 지식과 영적 능력이 있어 전략적 구심점이 되는 부두교 주술사 애니는 감염되면 자신을 죽여달라고 스모크에게 당부한다. 뛰어난 블루스 싱어/댄서인 펄린은 마늘을 먹기는 싫어했으나 결정적인 순간 새미를 구한다. 더 취약하다/덜 취약하다는 당연히 악에 가깝다/선에 가깝다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상대적이고 어느 정도 우연한 것이며, 경우에 따라 인물이 실제로 그러한가보다 영화가 인물에게 부여한 상징성과 더 관련이 깊어지기도 한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매개 역할로 배정된 메리와 그레이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뱀파이어인 상태로 처음 건물 안에 들어오는 자가 백인의 얼굴을 한 메리라는 점, 뱀파이어들을 건물 안으로 들이는 대사를 뱉는 자가 인종분리정책의 직접적 대상은 아닌 그레이스라는 점은 의도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기차역 대화의 말미에 메리는 ‘지옥에나 가라’고 저주했고, 스택은 멀어져가는 메리를 향해 ‘네 자리도 마련해 둘게’라고 받아친 후 ‘내 바로 옆에’라고 속삭이듯 덧붙였다. 상대방에게 일부러 닿지 않도록 전달된 이 대사는 스택의 진심을 드러내는 와중 일종의 느슨한 복선 역할 또한 한다. 서로 사랑하는 매리와 스택의 관계는 복잡하다. 메리의 조상 중에는 흑인이 있으므로 당시의 원-드롭 룰에 따르면 그는 백인이 아니다. 그러나 인종은 (레이시스트들이 주장하듯)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계획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후에 우리는 메리가 부유한 백인 남성과 결혼하도록 스택이 주선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엔 (특히 부유한 백인)여성이 남성의 울타리 안에 포함되는 역학과 흑인이 여전히 명백히 차별받는 노예‘해방’ 이후의 역학이 있다. 후자를 피부에 샅샅이 감각하는 스택은 메리를 인격체로 존중함에도 전자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전자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메리의 지속적인 주장은 후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이 관계는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이 아닌 193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다. (가부장제는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아니니)이들의 사랑은 인종을 뛰어넘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관계를 맺을 때는 인종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메리는 스택으로부터 주점이 적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되고자 레믹 일행과 교류를 시도한 결과 감염된다. 영화는 메리를 영리하고 민첩하게 묘사함으로써 그의 행동이 부주의했다고 평가할 여지를 차단한다. 메리가 매개로 선택된 것은 그가 지닐 수밖에 없는 특권 때문이다. 백인의 얼굴로 흑인들의 공간에 드나들며 “가족”으로 환영받는 메리는 분리정책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허나 한편으로 양쪽을 오가는 것은 그가 백인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세 백인의 선의를 믿고 밖으로 나간 메리는 ‘모두의 화합’이라는 사상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스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길 바라는, 백인이 아닌 인류human being로 인식되길 바라는 메리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영화는 메리의 감염을 통해, 그 바람이 시대 맥락과 사회적 상황을 무시하고 차별을 무화하는 막연한 관념, 심지어는 종교로 변질되는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뱀파이어화된 메리는 별안간 그 복잡한 과거사가 녹아내리기라도 한 듯 스택을 유혹한다. 스택은 메리를 거부한 상태에서 거기 넘어간다. 스택과 뱀파이어-메리의 베드신은 애니와 스모크, 새미와 펄린의 것과 달리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침을 줄줄 흘리는 메리를 보고, 스택은 ‘그거 침이냐’고 묻는다. 메리는 ‘좀 줄까?’라고 묻고, 스택은 달라고 한다. 이후 메리는 스택의 입 안에 침을 뱉는다. 이는 단지 페티시가 아니다. 이미 메리가 아닌 메리의/백인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것을 스택이 아래에서 받아먹는 일련의 행위에, 위계와 취약성에 대한 은유가 있지는 않은가? 이들의 사랑에 애초에 위계와 동경이 내포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감염되었고 감염시키는 백인과 감염되는 흑인 사이의 역학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가 1992년에 (레믹과의 끈은 끊어지고 뱀파이어화된 개별 신체만 남은, 햇빛은 보지 못해도 함께 펍에 입장할 수 있게 된 연인으로)스택과 메리를 재등장시킨 까닭은 어쩌면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오염시킨 것에 대한 사과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레이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영화가 드리운 상징성 때문에 매개로 선택된다. 길을 사이에 두고 흑인 전용과 백인 전용 마켓을 운영하는 보와 그레이스 차우 부부 역시 양쪽을 오갈 수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자녀인 리사가 그레이스를 부르기 위해 흑인 전용 마켓에서 백인 전용 마켓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하나의 숏으로 연결해 촬영하며 이 점을 강조한다. 동시에 메리와 그들은 분명히 다르다. 아시안인 그들은 백인들의 공간에서 이를테면 ‘안 보이는’ 존재가 된다. 스모크가 총을 쏜 직후 백인 전용 마켓의 손님들은 카운터에 있는 그레이스를 ‘보지 않은’ 채 “유색인종”을 폄하하는 발언을 주고받는다. 반면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이 부부는 메리처럼 손님으로서의 가족보단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의 가족으로 간주된다. 새미의 노래로 과거와 미래의 예술혼들이 소환되는 ‘I Lied to You’ 씬에서 영화는 중국 전통 극예술 재현을 잊지 않는다.
한편으로 영화는 보와 그레이스의 캐릭터에 미묘한 차이를 심는다. 첫 등장에서 보는 흑인 전용 마켓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레이스는 백인 전용 마켓에서 흰 앞치마를 입고 일하고 있었다. 새미의 아버지를 비롯해 교회에서 예배를 보던 이들이 전부 눈이 시릴 정도로 흰 복장을 하고 있었음을 떠올려보자, <씨너스>에서 새하얀 옷은 단지 옷이 아니다. 스모크를 허물없이 반기는 보와 달리 그레이스는 총격 사건을 먼저 언급한다. 주크 조인트에서 스택이 메리에게 물렸을 때도, 보는 도우려 하고 그레이스는 선을 긋는다. 결정적으로, 그레이스는 건물의 봉인을 해제해 뱀파이어들을 안으로 들인다. 사실 부부의 반응이 다른 까닭은 성격의 차이나 자녀를 주로 누가 보살펴왔는가의 문제로 짐작된다. 뱀파이어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면 마을로 향했을 수도 있으므로 그레이스의 걱정은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허나 슬림이나 메리, 애니에 비해 얕게 다루어지는 그레이스가 ‘실제로 어떠한가’는 내 생각에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보에 비해 그레이스를 조금 더 ‘백인적인 것’에 가까운 인물로 ‘정했기 때문에’, 그의 대사가 뱀파이어들을 안으로 들이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정말로 백인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징성을 걸치고 있다는 뜻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감염을 품고 들어오는 메리의 경우 인물의 특권적 특성이 감염이라는 은유로 발현된다면, 제 의지로 뱀파이어들을 들이는 그레이스의 경우 영화가 부여한 상징성이 실제로는 그것과 상관없는 인물의 행동과 큰 그림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메리와 스택에게 불멸의 로맨스가 선사되었다면 그레이스에게는 이른 죽음이 배정된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화염병을 던지고, 한 뱀파이어의 심장에 말뚝을 찔러넣은 채 함께 활활 타오른다. (그 죽음은 자의로 보이기도 한다.) 그레이스를 뱀파이어화하지 않는 것은 관객의 미움을 받을 것이 분명한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을 수 있다.
신들린, 그리고 한이 서린 음악들 - 레믹과 새미(들)
<씨너스>는 델타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다른 공간을 번갈아 보여주는 한편 시간선은 분리하지 않는다. 인물의 과거 회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관객에게 공유하는 대신,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해 주위 인물들과 공유하게 한다. 스토리텔링이 영화 안 청자에게 들리고 울려퍼지는 것이 <씨너스>에선 중요하다. 스택, 새미와 차를 타고 가던 중 슬림은 아직도 노역을 살고 있는 동료를 마주친다. 그가 겪은 폭력에 관해 슬림이 털어놓는 동안 화면에는 청각적 재현이 배경 사운드로 깔린다. 슬림의 대사와 그가 떠올리는 과거의 소리가 겹치며 재생되는 것이다. 과거의 소리는 슬림과 관객에게만 들리는 것이겠으나, 슬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스택과 새미도 어쩌면 그것을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가지 사운드는 슬림의 신음으로 모이고, 그것은 싱잉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그것들은 블루스 ‘안에’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하려는 듯하다. 새미가 주크 조인트에서 아버지를 위해 쓴 곡을 부르는 것 또한 일종의 스토리텔링, 이 곡은 과거와 미래의 예술혼을 불러낼 뿐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모양대로 춤추게 한다. 뱀파이어를 매혹하는 블루스는 후에 그들에게 맞서는 무기가 된다.
블루스를 비롯한 블랙 헤리티지 뮤직들 말고도 영화에는 또다른 음악, 뱀파이어들이 합창하는 포크송이 등장한다. 이는 영화가 오프닝에 소개한 미디엄의 기원 중 하나이며 블루스와도 관련이 있는 아일랜드 포크다. 이와 더불어 영화가 숨겨둔 결이 드러난다. 레믹은 단지 미국의 백인이 아닌 상당히 나이든 아일랜드인 뱀파이어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기억하고 미국 내 차별을 겪었을, ‘터전을 빼앗긴’ 적이 있음을 언급하는 레믹은 1932년 델타에서 오히려 흑인들, 특히 자신과 같은 음악가인 새미에게 공감한다.(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레믹이 “그가 도달한 시점에 이 장소에 있던 인종적 정의가 존재하기 이전 시대를 살아온 자”라고 말한다.[Indiewire]) 그가 처음 등장해 조안과 버트에게 애원하는 씬으로 돌아가보자. 집 안쪽에 있는 KKK단 복장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잡히는 숏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레믹의 시점숏이다.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델타의 동료가 덮어쓴 누명과 유사한 인종차별적 망상 서사다. 다만 대상이 흑인에서 아메리카 선주민, 촉토 “인디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뒤이어 찾아온 선주민들은 정중하게 위험을 경고하지만, 문을 연 조안은 불안해하면서도 겨눈 총을 내리지 않는다. 레믹이 백인성을 꾸며내 KKK단 일원인 백인을 먼저 감염시키는 것은, 전략적 선택이면서 일종의 대리 복수 겸 조롱(제 ‘종’차별에 제가 넘어가도록 하는)이 아닐까.
주크 조인트 입구에서 가로막힌 레믹은 제 손등을 쓸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듯 “이거?”라고 뱉고 실소한다. 처음엔 이 반응의 원인을 그는 스스로의 피부색을 인식하지 않아도 되는 백인이기 때문으로 읽었다. 허나 레믹의 헤리티지를 알고 나니 그에게 있어 그 ‘분리’는 ‘정말로 이상한 것’인 동시에 이해가능한 것이리란 판단이 든다. 스모크와 스택이 알 카포네 밑에서 일했었다는 점, 아일랜드 맥주와 이탈리아 와인을 훔쳐 주점을 꾸리고는 양쪽이 싸우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그저 범법적 비즈니스 전략일까, 혹시 어떤 복수의 일환일까.) 이와 더불어 20세기 미국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비롯한 가난한 유럽인들은 한때 백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흑인을 노예화하는 시스템에 포섭되고 동참하며 ‘백인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소수적 인종/민족을 분리하거나 묶으며 착취 피라미드를 만드는 인종주의의 역학, ‘아닌 것을 골라냄으로써 제 1의 종을 형성하는’ 종차별. 레믹은 이 구조를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미 증오에 사로잡힌 그의 목적은 흑인들과 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내 고통을 다들 느끼라’,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라’고 강제한다. 회유를 위한 위장처럼 들렸지만 레믹은 원하는 바를 순순히 밝혔다. KKK단, 그리고 사실상 KKK단을 허용하는 지배세력의 말살. ‘우리를 핍박한 저들’을 전부 해하려 한다는 면에서, 레믹은 <블랙팬서>의 에릭 킬몽거와 닮은 데가 있다. 이들은 ‘적들’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수단화할 준비가 돼 있다. 레믹은 자신이 퍼트리는 ‘모두의 화합’ 사상을 스스로 믿지 않는다. 그가 상상하고 원하는 그림은 ‘I Lied to You’ 씬의 말미에 카메라를 등진 그가 바라보고 있는 상-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모든 것이 불타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다.
레믹이 새미를 붙들고 목을 대뜸 물어뜯는 대신 구구절절 과거사를 늘어놓는 까닭은, 새미야말로 그가 이해받고 싶었던 단 한 사람, 갈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을 지닌 이였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레믹은 새미의 음악적 상징-기타로 인해 치명상을 입고 스모크에게 심장을 뚫린다. 그가 증오에 사로잡힌 악마가 되면서도 지켜온 단 하나가 음악이었기에, 뱀파이어화된 채 오랫동안 살아온 그를 죽이는(해방시키는) 것 또한 음악이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새미는 레믹의 증오에도, ‘모두의 화합’ 사상과 닮은 종교에도 포섭되지 않고 기타 조각을 꼭 쥔 채 제 길을 떠난다. 60년 후 새미가 펄린의 이름을 걸고 공연하는 장면, 재회한 스택과 메리가 그의 음악에 감동받는 장면은 슬림, 펄린, 새미와 같은 이들이 전해 온 음악의 유산이 현재로 이어짐을 긍정한다. 분노에 매몰돼 너의 주변을 불태우지 말라, ‘모두의 화합’이라는 예쁘장한 환상에 빠져 인종주의의 역사와 현존하는 차별을 무화하지 말라, <씨너스>의 자발적 ‘죄인들’이 블루스로 전하는 말씀은 2025년에 너무나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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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자 하는 내용이 주로 흑인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것이어서 스모크와 애니의 이야기가 빠졌는데, 연결… 보단 비교해야 할 지점이 있어 엔딩만 언급한다: 스모크의 복수는 레믹의 파괴와는 다르다. 영화가 플래시백으로 강조하듯 그 스스로 한 말을 지키는 행위이며, 극단적인 저항이다. 영화는 픽션이라는 전제 하에 이 반격을 긍정한다. 죽어가는 스모크 앞에 나타난 애니는 “연기smoke가 아이에게 닿는 게 싫다”는 언어 유희로 “스모크”의 정체성을 내세에 가져오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도(그는 늘 스모크를 ‘일라이자’라는 본명으로 부른다), 그가 호그우드를 쏘는 행위는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하나 더, 크리스천이 아닌 애니가 입은 흰색은 교회 신도들이 걸쳤던 흰색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승에서 바라보고 상상하는 막연한 구원과 순수, 믿음의 (어쩌면 백인성 추구의) 상징이 아닌, 사후에 다다른 낙원에서 얻은 평화를 반영하는 흰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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