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8-11 15:17:46
남겨진 이와 떠난 이, 누구도 떠나지 못한 그 곳.
영화 <트랜짓> 리뷰
혼란스러운 영화 속 발견할 수 있는 어떤 만남은 모두가 떠나는 이 공간에서 벌어진다. 만남이라는 표현은 분명 반가운 것임에도 이들에게 있어서 이 만남은 사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신분이 있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시대에서 만난 어떤 이들의 만남은 필연적이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들에게 허용된 평화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남겨진 자와 떠난 자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장식될 것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나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어 여러 사람들이 섞여 들어오고 나치의 점령이 점점 가까워지는 탓에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절망감이 프랑스 전역에서 동시에 피어오르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로 인해 경비는 삼엄해진다. 그렇게 경비가 삼엄한 이곳에서 그림자처럼 몸을 숨기고 있던 게오로그가 부탁받은 편지를 전달하려 하지만 그는 이 곳에 없었다. 정착을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곳, 마르세유에서 만난 어떤 여인은 스쳐 가듯 계속 마주친다. 시야만큼 가까워지는 마음의 거리는 그와의 만남을 바라며 제 것이 아닌 것에 점점 욕심이 나기 시작한다. 교차하듯 우연한 만남의 연속으로 필연을 증명하듯 남겨진 이와 떠난 이가 선명해진다. 누군가를 구분하지 않고 펼쳐지는 어떤 비극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를 희망이 피어오르기에 더욱 무섭게 느껴지고 영화에 스치듯 지나갔던 “불행한 사람에게 타인의 행복은 달갑지 않았다.”라는 말로 공감되지 않았던 수많은 순간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작가 바이델의 가방에 들어있는 두 통의 편지와 게오로그가 전달하지 못한 두 통의 편지는 전혀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편지가 전달되었다면?‘ 하는 생각은 이따금 찾아오는 혼란과 흘러가는 시간의 찰나 속에서 펼쳐지는 슬픔 섞인 희망이 동시에 찾아온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사라졌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를 찾아오며 어떤 질문을 불러온다.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떠난 사람일까요 남겨진 사람일까요”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며 왠지 모를 무기력함을 넘어서 놓치고 있었던 어떤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남겨진 사람은 상대를 못 잊는다”라는 말을 남긴 채 남겨진 이와 떠난 이만이 남아있었다. 남겨진 사람은 떠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떠난 사람은 남겨진 사람이 되기도 하는 이런 모순 속에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을 잊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 당시 유럽의 차별적인 모습이 현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영화 속은 현대적인 배경이지만 이야기는 나치 집권 당시의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이질적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모습이다. 과거의 모습이 현대의 배경에서 펼쳐지고 연극 같은 설정이 관객과 영화의 거리를 멀게 하면서 영화의 깊이는 한없이 깊어진다. 어디서 어떤 이야기가 튀어나올지 모를 긴장감 때문에 영화가 끝나도 끝난 것 같지 않다. 환상 같은 이 이야기는 영화에 표현되었던 감정이 혹여 거짓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듦과 동시에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교차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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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애의 범위를 넓히다
인간의 선택: 박해와 공존
로봇이 인간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보폭을 맞춰 걸어간다. 다른 로봇은 우는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달랜다. 승려복을 입은 로봇들은 반격 의사도 없이 미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크리에이터>는 AI 로봇의 존재가 일상화되기를 넘어 정치적, 군사적 문제가 된 미래 사회를 그린다. LA에서 핵폭발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은 이를 인간을 향한 AI 로봇의 공격으로 간주한다. 미국은 AI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거대한 미사일 함선을 지구 상공에 띄운 ‘노마드’라는 무기로 공격한다. 반면 뉴아시아는 AI와의 공존을 선택한다. 태국, 네팔과 같은 나라를 바탕으로 설정된 뉴아시아는 불교적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불교적인 형태의 석상을 돌리자 AI로봇 연구소의 입구가 드러난다. AI로봇들은 뉴아시아의 전통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 로봇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뉴아시아는 오히려 인간들이 로봇의 보호 아래 살아가고 있다.
미군 장교는 말한다. 사피엔스보다 독한 종이 나타나면 인간도 네안데르탈인처럼 멸종할 것이라고. 미국은 사피엔스의 멸종을 걱정한다. 다르게 보자면 이는 AI로봇을 사피엔스와 대응되는 하나의 종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인간에게는 선택지가 있다. 지구의 다른 모든 종이 악이 아니듯 AI로봇이 절대적 악은 아니다.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미국에게 있어 인간의 범위는 미국인에 한정되어 있다. 미국의 전쟁은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AI가 공존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싸움이다. 공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택의 의지다.
구원자의 등장
AI 로봇은 미국인들의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원한다. 이들은 도구나 가축과 같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해방을 원한다. 혁명을 모의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설파하는 로봇과 승려 로봇의 존재는 이들이 이미 만들어진 목적에 앞서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주체로 우뚝 섰다는 의미다. AI 로봇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알파-오’는 만들어졌다. 자유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비폭력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세상에 왔다. 이름 그대로 로봇들의 구원자다. 아이의 외형을 가진 로봇 ‘알파-오’는 모든 기계들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다. 기계를 끄고 킬 수 있는 힘은 로봇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고 기계문명에 바탕을 둔 미래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니르마타의 소재에 접근했던 전직 군인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AI로봇의 창조자인 니르마타와 무기 알파-오를 제거하라는 명령에 따라 뉴아시아로 향한다. 하지만 조슈아는 AI 로봇과 미국의 전쟁보다 이전 작전에서 잃었던 아내 마야(젬마 찬)의 행방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AI연구소에서 발견한 알파-오는 마야의 행방을 알고 있었고, 조슈아는 알피라 부르며 마야의 흔적을 따라간다. 알피는 니르마타인 마야에 의해 만들어진 ‘노마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무기로 창조된 로봇이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감독은 인간과 AI의 공존을 이어주는 매개로 로봇의 창조자인 니르마타와 인간 배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중간자 알피를 내세운다. 니르마타가 인간으로서 로봇에 대한 사랑을 가진 존재라면 알피는 AI 로봇으로서 인간과 로봇에 대한 사랑이 입력된 존재다.
프로그래밍된 태도에 사랑이나 구원 같은 말을 붙여도 될까? 알피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거나 손바닥을 갖다 대면 모든 로봇과 기계는 그의 통제 아래에 놓이는 기적이 행해진다. 인간의 증오와 그로 인한 공격은 기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모든 공격을 멈추는 것이 니르마타의 뜻이라면 알피는 그 뜻을 행하는 자다. 알피의 의지는 인간이자 니르마타인 마야에 의해 계승되었다. 알피는 인간에 대한 증오가 아닌 사랑을 품고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알피는 로봇과 인간 모두에 대한 사랑을 지닌 구원자다. 알피의 사랑은 로봇과 인간을 아울러 가장 넓은 범위를 감싸 안을 수 있다.
왜 아이일까?
마야와 조슈아 사이에서 잉태된 태아의 배아 스캔을 통해 창조된 것이 알피다. 인간과 로봇의 중간자인 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로봇을 완전하지 않은 아이의 형태로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기술과 힘이 완전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면 적절한 도구나 무기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아이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다. 알피의 힘은 어마어마한 성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성장은 불확실하다. 로봇은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알피는 어디에 쓰일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평화와 자유라는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조슈아의 도움으로 노마드를 격퇴했지만 전쟁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는 일이다.
AI 로봇의 학습은 성장과 차이가 있다. 성장은 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시기를 지나야 한다. 알피의 성장은 원격 제어 영향력과 힘을 키우는 것뿐만이 아니다. 알피는 이미 미국의 자본과 기술의 집약체인 무기를 격파했다. 알피는 무기가 아닌 인격체로서 성장해야 한다. 인간과 로봇을 두루 경험하며 내면의 사랑을 키워야 한다. 절대적 힘을 가진 완전한 강자는 공동체를 규합하기 위해 힘을 내세우기 쉽다. 무력한 아이만이 오히려 공동체의 사랑과 보호의 필요성을 역설할 수 있다. 로봇의 보호 아래 유년시절을 보낸 마야는 알피 역시 이를 느끼기 바라지 않았을까. 알피가 어떻게 성장할지 확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정보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기에 그 미래는 믿어볼 만하다. 바로 인간과 로봇에 대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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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탈리스트>, 몇몇 장면들과 질문들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2024, 브래디 코베)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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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미하며 터널을 빠져나가는
<브루탈리스트>는 취조실에 갇혀 패닉한 조피아의 정면 얼굴로 시작해, 라즐로 토스 회고전에서 자신 있는 연설로 숙부와 숙모의 유산을 기리는 나이든 조피아의 정면 얼굴과 오프닝 오버랩으로 끝난다. 일종의 느슨한 액자로 다가오는 이 구성은 영화를 조피아가 쓴 라즐로의 전기처럼 바라보게도 한다. 조피아는 라즐로(와 에르제벳)에게서 얻은 가르침을 설명하며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목표가 중요하다“라는 문장을 강조한다. 바로 그 ‘과정’, 즉 라즐로가 헝가리 출신 유대인 이민자로서 아메리칸 드림에 배반당하면서도 ‘고작 몇 미터의 높이를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목격하고 나서 듣게 되는 대사다. 텍스트만으로는 위험하게 들리는 이 문장 자체가 가치관이라기보단- 가치관이나 태도를 지키기 위한 주문일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과정’의 서술 방식은 집요하게 상세하되 목적지를 분명히 두고 있어 고통의 전시나 낭만화로 읽힐 위험을 피한다. 고난과 완성된 작품을 잇는 어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는 ‘그러한 맥락으로’에 가깝다.
액자 안의 두 번째 오프닝은 미국에 닿은 라즐로의 모습에 에르제벳의 편지가 보이스오버되는 시퀀스다. 비좁은 공간에서 막 잠에 깨어 부랴부랴 인파를 헤치고 나가는 라즐로를 따라가는 롱테이크는 매초가 갑갑하고 초조하다. 편지가 화면을 빠져나가는 와중 라즐로는 그곳에서 빠져나가려 애쓴다. 부드럽게 흐르는 내레이션-편지와 더디게 나아가는 인물, 그 ‘방향’은 서로 어긋나는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실제로는 아직 닿지 못한 에르제벳의 음성이 라즐로를 이끌며 함께 암흑을 벗어나는 듯한 연출이다. 라즐로는 마침내 야외로 나가 탁하고 환한 공허를 만난다. 무언가를 보고 환호하는 그는 화면 맨 하단에 몰려 있다. 이내 카메라는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찍는다. 자유의 여신상, 다만 거꾸로 뒤집혀 있거나 횡으로 돌아가 있다. 노골적인 만큼 효과적인 은유다.
이어 라즐로가 탄 차가 도로를 달리는 모습에 타이틀과 크레딧이 겹치는데, 도로/차를 가로지르는 수평 방향으로 진행된다.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지럽다. 그 멀미의 감각으로 라즐로의 언어를 감히/조금이나마 알아들어 보기를 제안하는 것일까. 이를 비롯해 영화에는 자동차의 시점으로 도로를 달리거나 터널을 지나는 숏이 몇 삽입되어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 ‘가로막히며 더디게 나아가는’ 감각이 있었다면 이 숏들에는 ‘안전장치 없이 위태롭게 달리는’ 감각이 있다. 특히 에르제벳과 말다툼하며 어두운 도로를 운전하는 씬은 상징적이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며 심리적 거리는 멀어지는 듯도 보였던 부부는 나란히 어둠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라즐로는 단 하나 헤로인에는 굴복했으나 자신을 유혹하고 내리누르는 나머지 것들은 거슬렀다. 그가 멀미하고 구역질하며 캄캄한 터널을 견디고 환한 빛에 다다를 수 있게 도운 것은 그 자신과 에르제벳 외 누구도 아니었다.
사라진 해리슨
오프닝 크레딧처럼, <브루탈리스트>에서는 솟아오르거나 나아가는 라즐로와 그를 방해하는 ‘미국적인 것’이 대립한다. 이미지와 언어/소리가 서로 불일치함으로써 본질을 암시하기도 한다. 해리슨 밴 뷰런이 라즐로를 연회에 초대해 설득하며 아름다운 일화와 명분을 늘어놓을 때, 화면에는 내기 포커를 치며 값비싼 술을 홀짝이는 파티 참가자-부자-들의 몽타주가 흐른다. 꼭 중세 유럽 귀족들마냥 예술가를 ‘후원’하며 제 소유물로 두려는 듯한 해리슨은 그들 중 하나이면서 홀로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위선자, 겸손함과 우아함을 연기하다 실패하는 나르시시스트다. 화를 펄펄 내며 강렬하게 등장한 그의 퇴장은 모호하다. 실질적으로 ‘없다시피 한’ 그 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다.
<브루탈리스트>는 관람이 끝나자 마자 페이버릿 씬이 자동으로 생기는 종류의 영화였다. 거기엔 의외로 라즐로가 없었다.(애드리언 브로디가 담배를 무는 모든 씬은 논외로 한다.) 남편의 성폭력 피해를 알게 된 에르제벳은 보조기구를 짚고 천천히 해리슨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간다. 식탁에 둘러앉은 해리슨, 아들 해리, 딸 매기 등등. 에르제벳은 입구에 몰려 우뚝 선 채 해리슨을 폭로한다.(휠체어 이용/걷기를 에이블리즘에 오염된 의도로 구분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작가가 상징을 드리우려 했다’기 보다는 ‘에르제벳에게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라즐로 역시 엔딩에서는 휠체어에 타 있기도 하고. 영양실조로 하반신이 마비된 적이 있는 에르제벳은 휠체어에 앉아야 이동이 더 자유롭다. 그럼에도 서서 걸어 들어가기를 택한 까닭은, ‘내가 불편해지고 심지어는 위험해지더라도 저들을 내려다보거나 적어도 물리적으로 동등한 눈높이에 있기 위함’이었던 것이 아닐까.) 해리슨은 뒤늦게 부인하고 제발 저리듯 라즐로를 해고하겠다고 선언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대응으로 일관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해리는 과하게 분노하며 에르제벳을 질질 끌고 나가 내동댕이친다. 매기는 해리를 비난하지만, 그의 ‘순수한’(기계적인) 선의는 이 영화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숏은 끊어지지 않고, 카메라는 되돌아가 아버지를 찾는 해리를 따라 긴긴 계단을 오른다.(이 부분에서 조 알윈이 놀라웠다.) 해리는 좀 이상하다. 흥분해 있고, 화나 있고, 방금 한 행동에 대해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고 있는 듯도 하고… 헌데 복합적인 격앙에 담긴 것은 그게 다가 아니다. 그의 일부는 어쩐지 당황해 있고, 무언갈 감추고자 하지만 실패하는 것도 같다. 그는 해리슨의 혐의가 사실임을 내심 짐작하거나 그 자신이 한 일을 돌이키고 있을 수도 있다.(조 알윈도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DAZED]) 여기서 시간/편집 순으로 한참 전의 시퀀스를 떠올리는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만취한 해리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라즐로를 협박하며 조피아를 언급한다. 얼마 후 호숫가에 있는 조피아에게 산책을 청한다. 두 사람을 그대로 고립시킨 채 영화는 호숫가의 다른 쪽으로 주의를 돌린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해리슨, 매기, 에르제벳 등등.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에르제벳은 최선을 다해 웃고 적절히 반응한다. 어느 시점에 배경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숲에서 걸어오는 해리와 조피아가 포착되는데, 클로즈업이 아닌 평이한 숏이다. 늘 그렇듯 말없는 조피아와 답지않게 조용한 해리에게서 읽히는 신호는 많지 않다. 해리는 술이 좀 깬 것 같다. 아까는 수영복 차림이던 조피아가 평상복을 입고 있고, 걸어오며 가디건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이 찰나를 우리는 계단을 오르는 해리에게서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위계는 은근하고 명확한 것은 없다.
해리슨은 저택에 없다. 해리와 매기는 사람을 모으고 개를 풀어 주변을 수색한다. 컴컴한 화면에 횃불만이 밝혀진 가운데 개들과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상황은 어쩐지 초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곧 라즐로가 설계한 커뮤니티 센터에 다다른다. 영화는 빈 건물의 곳곳을 조명한다. 말소리들은 높은 천정과 차가운 벽 사이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카메라는 라즐로가 설계한 ‘빛의 십자가’에 머문다. 그리고 몇 십 년을 건너뛰어 라즐로 토스 회고전을 촬영한다. 밴 뷰런 일가는 재등장하지 않는다. 해리슨은 영화에서 증발했다. 이민자 예술가 라즐로의 경험과 유산, 일관된 태도, 그의 고난을 고스란히 견뎌내고 체화한 ‘브루탈리즘’ 건축 예술은 역사에 남았고 기려진다. 그러나 그의 착취자, 미국인 억만장자 해리슨은 악인으로조차 기억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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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소되었거나 되지 않은 질문들
- 관람 전 질문: AI 사용이 필요했는가? 연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 두 배우의 헝가리어는 훌륭했으나, 워낙 어려운 언어라 세밀한 리얼리티를 위해 녹음된 대사를 다듬는 데에 사용했다고 하던데… 두 인물이 ‘헝가리어를 꽤 능숙하게 구사하는 비헝가리인’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정도로 중요했다면 ‘양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헝가리어는 주로 편지 내레이팅에서 쓰였고, (내 생각이지만)헝가리인을 포함한 관객들이 그 완벽함에 감명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허나 워낙 민감한 이슈고… 이렇게 바운더리가 모호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수정’하기 시작하다 점점 배우 각자의 고유성을 침범하면 어쩌나,라는 걱정을 하며 판단을 유보중이다. 다만 제작진의 AI 사용 결정 ‘탓에’ 오스카가 다른 배우에게 돌아간다면 애드리언 브로디는 속이 좀 쓰릴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는 이미 연기상을 여럿 수상했고 BAFTA 수상 소감에선 사려깊게도 동료 후보들을 모두 호명했다.)
- 관람 후 질문: 영화는 은근히 시오니즘을 지향하고 있는가?
: 조피아는 ‘예루살렘 행’이 소명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듣고 “그럼 우린 유대인이 아닌 거니?”라고 혼란을 표했던 에르제벳은 후에 ‘여기선 살 수 없다’며 이스라엘로 가자고 말한다. 아마 브래디 코베도 영화에 대한 반응에 ‘시오니즘’이라는 화두가 등장할 것임을 예상했을 것 같다. 그가 NYFCC 작품상을 수상하며 (이스라엘의 웨스트뱅크 점령을 다룬 팔레스타인 다큐멘터리)<No Other Land>를 서포트하는 발언을 했다는 점을 간접적 근거로 들 수도 있으나, 당연히 이야기 내 맥락을 먼저 살펴봐야 할 테다. 조피아의 단정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야 할까? <브루탈리스트> 주인공들이 (아마도 1950년대에) 이스라엘 행을 결정하는 바탕에는 막연한 희망과 동경보단 구체적인 좌절이 있다. ‘그나마 가능한 살길’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감독은 “캐릭터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 주위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DAZED])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헝가리에서 각각 인정받는 프로 건축가/교수와 저명한 기자였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서로 이별했다. 아메리카에서 라즐로의 드리밍은 지속적으로 제지당한다. 역시 고초를 겪은 조피아는 두 사람의 관찰자이기도 했다. 헝가리와 미국에서 그들은 ‘살 수가 없’다. 물론 그 ‘살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온 터전을 침범한다. 허나 적어도 이들 가족의 경우는 이미 ‘건국’된 이스라엘로 향하는 것이지 그 반대의 순서는 아니다.(그래서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영화 전반부에는 트루먼의 ‘이스라엘 국가 선포’ 연설이 보이스오버 되는 씬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을 ‘거꾸로 자유의 여신상’으로 은유하며 허상과 위선 덩어리로 바라보는 <브루탈리스트>는, 미국 대통령의 ‘승인’ 또한 무책임한 제스처이며 허상이라고 암시하는 것일까? 과해석일 수도 있다. (미국은 하얗고 가자지구‘도’ 미국의 것이며 ‘신이 주신 두 개의 성별’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백악관에 들어앉은 지금, <브루탈리스트>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묻는가?)
기념비적 연기들
아직도 <피아니스트>만이 자주 화자되나, 애드리언 브로디는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곤 했다. 다만 때로 ‘도저히 모를’ 작품과 캐릭터를 택했기에 고유의 분위기와 퍼포먼스가 제대로 빛나지 못했을 뿐이다.(가끔은 그가 웨스 앤더슨 픽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시대 배경과 캐릭터 설정에서 어쩔 수 없이 <피아니스트>를 떠올리게 되었으나, <브루탈리스트> 작품 자체 만큼이나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는 ‘새로운 고전’이라고 일컬을 만했다. 라즐로는 큰소리를 낼 때 가장 취약해 보이고 가만히 미소 지을 때 가장 단단해 보인다. 압도하고 누르기보단 거센 바람에 바스러지며 꼿꼿이 상처받는 자. 연약하며 우아하고 엉망인 채로 고고한 존재감이라고 할까… 모조리 사랑하기는 힘든 인물이었으나 라즐로 토스는 <디태치먼트>의 헨리와 나란히, 내 ‘애드리언 브로디 최애 퍼포먼스’ 목록에 올랐다. 멋진 서재 리모델링을 보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드미트리마냥 열을 펄펄 내는 해리슨 앞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빼무는 라즐로-보십시오 이것이 애드리언 브로디 입니다. 그래, 늘 당신이 배우로서 좀 더 주목 받았으면 했었다.
펠리시티 존스의 연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굉장했다. 앉아있건 서있건 누워있건 화면 어디에 있건 중심이 되었다. 에르제벳이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라즐로를 위한’ 역할로 남아 아쉽기는 했으나, 그는 이끌리기보다는 이끄는, 무조건적인 응원이 아닌 이해를 선행한 지지를 보내는 동반자였다. 남편이 빠르게 미는 휠체어나 남편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탄 에르제벳은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지하고 질문하고 따지고 주장했다. 폐쇄적인 구석이 있는 라즐로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성공했으며, 이내 남편의 대변자 자리에 위치했다. 헤로인을 맞고 사랑을 나누며 라즐로가 입밖으로 내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성폭력 피해를 알게 되는 에르제벳은, 마치 남편의 내면을 읽는 것처럼 보였다. 토스 부부의 베드신들은 기묘하고 불편하고 애처로우며 아름다운데, 육체의 하나됨을 넘어선 생각과 정서의 하나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편집도 편집이었고, 펠리시티 존스의 액션을 애드리언 브로디의 리액션이 받쳐주며 마디마디 환상적으로 맞물리는 연기 합이 대단했다.
+ 가이 피어스도 물론 훌륭했고, 라피 캐시디는 관심 배우 목록에 올렸고, 스테이시 마틴은 ‘아무것도 안 하는’ 역할을 맡았고, 기대했던 이삭 드 번콜은 애드리언 브로디와 공사장 컨셉 화보를 찍은 후 퇴장했고, 조 알윈은 내내 효과적으로 신경을 거스르다 앞서 언급한 롱테이크에서 ‘뭔갈’ 해냈다.
* 참고 인터뷰
DAZED | Joe Alwyn and Brady Corbet on The Brutalist: ‘It’s very, very rad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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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무너진 균형에 매몰된 감동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학문의 자유를 갈망하며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 그는 자신의 신분과 사연을 숨긴 채 자사고의 경비원으로 조용히 살아간다. 그는 괜한 관심과 주목을 피하기 위해 무뚝뚝하고 차갑게 학생들을 대하며 기피 대상이 된다. 어느 날, 그는 잘못된 친구 관계 때문에 기숙사에서 쫓겨나 떠돌던 '한지우(김동휘)'를 만나고, 어려운 가정환경과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수포자가 되어 좌절 중이던 지우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던 중 학성은 우연히 지우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만다. 수학을 가르쳐 달라는 지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는 정답만을 찾는 세상에서 방황하던 지우에게 올바른 풀이 과정을 찾아나가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자신의 삶에서도 전환점을 맞이한다.
박종훈 감독의 첫 상업영화인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정직하다. 영화의 첫인상인 제목으로부터 보여주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은 크게 '수학자'와 '이상한 나라'로 이루어진다. 이때 '수학자'는 수학이라는 소재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미끼일 뿐, 영화가 진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그 수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또 이용하는 개개인들의 사연일 것임을 말해준다. 또 '이상한 나라'는 수학자들이 발 디디고 있는 공간이 품은 이야기에 따라 해당 사연들의 내용과 감흥이 달라질 것이라고 암시한다. 다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정직함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는 데 그친다. 수학자의 스토리는 감동적이고 그의 공간도 시각적으로 잘 구현되었지만, 이들의 만남은 하나의 짜임새 있는 플롯을 이루지는 못한다.
우선 '수학자'의 이야기를 보면, 이 영화에서 수학은 철저히 수단적인 도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수학의 이름을 빌려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성은 지우에게 특정 문제의 구체적인 풀이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수학에 접근하는 자세를 일러준다. 예를 들어 풀이를 단축시킬 공식을 알려 달라는 지우에게 학성은 칠판을 가득 채울 만큼 복잡한 계산을 모두 직접 하라고 말한다. 수학의 기술과 문제의 결과만을 쫓는 지우에게 수학의 진정한 묘미는 과정에 있음을 알려준다. 학성이 지우에게 내준 첫 문제가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라는 문제인 이유이기도 하다. 일부러 존재할 수 없는 삼각형을 보기로 주면서 기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공식을 통해 답을 구하는 것보다 수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때 작중 수학을 대하는 태도는 곧 인생을 대하는 태도로 연장되기에 흥미롭다. 영화는 “수학이 단순하단 말을 못 믿네? 곧 믿게 될 거다. 인생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면”이라는 대사를 통해 인생에는 하나만의 정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또 수학계의 난제인 '리만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내해 온 학성의 사연을 빌려 왜 수학의 공식을 증명하고자 하는지, 곧 무엇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정답에 맞춘 증명이라는 결과 그 자체보다 정답보다 중요한 올바른 풀이 과정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Q. E. D. (증명 완료)'라는 자막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고, 그 증명을 강요당한다고 볼 수도 있는 시대에 따뜻한 울림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또한 수학으로써 인생을 말하는 메시지의 울림은 수학이 아름답다는 학성의 찬양 덕분에 더욱 깊고 진하게 느껴진다. 수학의 아름다움은 삶의 미학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찬양의 수단이 수학과 뗄 수 없는 음악이기에 더욱 직관적이고 동시에 인상적이다. 음악은 소리를 소재로 삼을 뿐 그 구성요소인 박자나 선율, 화성 등은 모두 수학적 원리를 따르고 있다. 서로 다른 음을 내는 현 사이의 길이가 간단한 정수의 비로 표현될수록 어울리는 소리가 난다는 피타고라스의 발견처럼, 아름다운 음악에는 올바른 수학적 비율이 깃들어 있다. 그렇기에 학성과 함께 등장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삼인방이 함께 파이(π)의 값을 악보로 옮겨 연주하는 '파이송'은 예술과도 같은 수학의 아름다움과 수학에 대한 영화의 인문학적인 접근법을 부각한다.
이처럼 수학에서 인생의 올바른 가치와 길을 찾는 '수학자'의 관점은 '이상한 나라'의 의미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특히 같은 학교 안에서 극도로 대비되는 공간을 통해 '이상한' 대목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당장 지우가 다니는 자사고의 교실과 기숙사, 복도 공간은 무채색의 화이트 톤으로 명암 대비를 낮춰 평면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이는 ‘학성’과 ‘지우’의 집을 관통하는 콘셉트이기도 하다. 이 공간들은 모두 메말라 있고 비어 있는 황량한 느낌을 선사한다. 고액의 수학 과외가 이루어지는 학원 역시 같은 인상을 남긴다.
반면에 지우와 학성이 함께 수학을 공부하는 장소인 과학관 B103 아지트의 분위기는 정반대다. 명암 대비를 높여 보다 입체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밝고 따스한 호박색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어두우면서도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동시에 신비롭기까지 하다. “으스스하지만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 채워서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라는 느낌을 주는 미지의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박동훈 감독의 말대로 과학실을 가득 채운 잡동사니 덕분에 역으로 어떤 작은 변화도 이상하지 않을 아지트로 재탄생한다.이처럼 두 공간의 상반된 분위기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상한 나라'의 함의가 바뀌게 되는 힘이 되어준다. 초반부만 해도 지우의 수학 성적이 매우 낮고,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는 이유로 자사고에서 일반고로 전학 가기를 권유하는 학교의 태도는 냉혹하지만 현실적인 것처럼 묘사된다. 딱히 지우에게 인간적인 정을 주지 않는 주변 학생들의 모습도 이를 부추긴다.
그러나 과학관 B103이라는 공간이 등장한 이후로는 비록 냉정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였던 학교의 분위기는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비상식적인 인상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문제의 조건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으니 복수정답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지우에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기술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것이 진짜 잘못된 것이라고 일갈하는 교사의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비판적 태도는 답안지 유출 사건을 비롯해 왜곡된 교육 시스템의 진상이 이미 잘 알려진 만큼 효과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수학을 매개로 삶의 감동과 사회 비판의 메시지를 잘 이끌어 가던 영화는 '이상한 나라'에 남북관계를 끌어오려는 과욕을 부리고 만다. 작중 학성과 지우의 관계는 마치 유사 부자 관계나 다름없다. 탈북한 후 남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아들을 잃은 학성이 아들의 모습을 지우와 겹쳐 보기 때문이다. 필생의 과업인 리만 가설을 증명하려던 노력 때문에 비극을 겪은 만큼 학성에게 유독 수학 때문에 괴로워하는 지우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선을 쌓아가면서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영화가 적절히 균형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우선 짐작 가능한 학성의 개인사를 굳이 숨기고 있다가 그의 사연을 나열하는 선택은 영화와 관객 간에 감정교류를 저해하고 학성의 감정선마저 작위적으로 느껴질 소지를 주고 만다. 또 탈북자인 학성과 국정원의 관계를 풀어나갈 때는 그 위기를 억지로 조성한다는 인상을 남기는데, 이는 딸기 우유로 대표되는 뻔한 클리셰와 결부되어 영화의 깊이감과 몰입감을 모두 방해하고 만다. 그 결과 '이상한 나라'에 담긴 사회적 의미와 현실의 무게감과 인물의 사연이 만들어 낸 일차원적이고 편의적인 감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적으로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문제가 요약되어 있다. 배우의 중량감이나 분량, 스토리의 깊이만 봐도 주인공은 이학성이 되어야 하지만, 미흡한 작법으로 인해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이학성이 아니라 한지우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정직한 제목에 어울릴만한 짜임새를 보여주지 못한 나머지 표류선 마냥 '이상한 나라'와 '수학자' 사이에서 무너지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변수 없는 단정한 수식처럼 작위적인 교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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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불한당>,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
*<불한당>과 <무뢰한>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고품격(?) 막장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두고 누군가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불륜이 선빵이면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농담조로 말하자 상대방은 부부, 아니 인간관계에서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냐고 진지한 답을 내어놓았다. 동감하며 답했다. 맞다. 그런 메세지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믿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 짓인지를. 안 믿고 있다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는 게, 믿었다가 못 믿을 놈이란 걸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데 말이다. 그런 인생의 교훈을 일찍 깨달아서 도움이 되었겠다는 말에 웃으며 답했다. 아뇨, 알면서도 당했다고. 이번은 다르겠지. 이 사람은 다르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결국 결과가 똑같았다고. 알면서 당하면 진짜 바보인데. 안 그런가?
현수 曰 "(어휴) 촌스러워요"
<불한당>은 촌스러운 듯하면서 까리하다.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빨간 스포츠카 같은 영화다. 맛깔나는 대사나 장면도 많다. 다년간의 드라마와 영화 학습으로 쌓인 우리의 기대와 예지력을 조금씩 벗어난다. 처음부터 생선 눈이 무서워서 회를 못 먹는다는 둥, 사람 눈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최후의 만찬처럼 회를 사주고 머리에 총알을 박질 않나, 사람 죽이는 건 안 무서운데 여전히 생선 눈은 무섭다고 깻잎을 덮질 않나. 그러다간 또 푼수 떼기처럼 허세를 부리다가 삼촌에게 얻어맞고 차에 가서 훌쩍거린다. 그 눈물이 어찌나 새롭게 느껴지던지. 덩치가 작은 현수가 덩치 큰 수감자와 뺨 때리기를 하면서 주먹을 쓰는 반칙을 하면서도 당당하고, 재호는 그걸 보며 '혁신적인 또라이'라며 마음에 들어하기도 한다. 그런 현수에게 열광하는 당신도 두말할 것 없이 압도적인 또라이 아니겠어.
숨겨둔 카드를 빨리 보여준다. 아니, 벌써? 살짝 당황스럽지만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재호는 현수가 위장 경찰인 걸 일찌감치 알고 있고, 현수는 심지어 순진무구한 얼굴로 "형, 나 경찰이야"라고 자백을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알아차리게 된다. 무간도 같은 언더커버 전개가 아닐 거라는 것. 실제로 영화는 나쁜 놈인 건 둘째치고 등장인물들이 어지간히 또라이들이다. 이상하게 순정파 같은 또라이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실 재밌어서 도와준 거 같기도 하고
재호와 현수의 영화이다. 좀 더 치자면 재호와 현수, 병갑과 천 팀장이 남는다. 현수의 행동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재호는 잘해야 미끼 혹은 돌다리다. 검거해야 할 타켓 중 일부에 불과했다. 어지간해선 칼을 가지고 재호를 얼마나 다치게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기를 쓰고 그렇게 말리고선 대신 다친다. 재호를 구하지 않았어도, 다치지 않았어도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있진 않았을까. 목숨은 어머니 말씀처럼 박애주의적인 입장에서 구할 수도 있다 쳐도 교도소에서 남은 기간 동안 모든 힘을 다시 찾을 수 있게까지 해준 게 제법 과하게 느껴졌다. 목적을 위해 마음을 얻는 일이 이렇게 정성이 가득한 일이었나 싶었다. 재호에게 든든한 믿음을 얻으려는 전략이었을까, 그 사이에 진심이 있었던 걸까.
게임 끝나버렸는데요
재호가 왜 현수를 아까워하고 아꼈는지는 분명하다. 고아원부터 함께한 병갑과는 다르다. 병갑은 무조건적으로 재호를 좋아하고 무해하다. 하지만 그라고 뒤통수를 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호는 늘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뒤를 돌아보며 살라 하지 않았나. 병갑이 현수를 꼬마 새끼, 짭새 새끼라며 부르며 질투하고, 회장 자리에 앉아보면서 히히덕거리는 순진한 힘에 대한 로망은 빤히 보이니까 괜찮다. 병갑이 정말 재호를 아끼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삼촌이 재호를 죽이려고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놀라지 않았을 때였다. 별스럽지 않게 면회를 와선 뒤늦게 삼촌이 널 죽이려고 했다며 재호의 뒤통수에 대고 말하는 장면. 아, 이래서 병갑이와는 안 되겠구나 했다. 만약 재호가 잘못됐어도 지금처럼 침착할 수 있었을까. 훌쩍거리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현수가 재호의 뒤통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병갑은 늘 한 박자 늦고 어딘가 빈틈이 있다. 재호는 병갑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야속하게도 마음이 수평을 이루는 사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병갑의 마음이 재호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나 상황이냐, 앞통수냐 뒤통수냐
<불한당>은 내게 믿음에 관한 영화다. 그 안에 사랑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무뢰한> 이후에 믿음의 씁쓸한 얼굴이 떠오르는 영화다.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누구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은 역으로 현재 세상의 기본값이 거짓말과 뒤통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뢰한>은 <불한당>과 비교하면 그나마 해피엔딩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재곤과 해경은 살아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믿진 못했다. 재곤은 해경을 속일 힘과 집요함이 있었고 혜경은 속일 수는 있지만 끝까지 모질지 못했다. 그에게 칼을 꽂아도 치명상에 이르지 못한다. 재곤은 혜경을 찾아가 변명도 하고 믿음을 저버린 걸 나름의 방식대로 속죄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해경의 복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에게 칼을 꽂는 것이고, 재곤의 속죄는 그 칼을 그대로 맞고서도 그녀의 새해 복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나 <불한당>은 다르다. 현수와 재호는 둘 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 인정사정없이 칼을 꽂고 목을 조르고, 얼굴을 뭉개고 총을 쏜다. 재호의 배신은 순순히 넘어가기 힘들다. 다른 건 몰라도 부모님은 건드리는 게 아니지 않나. 재호가 현수를 감는 방법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아끼는 현수를 알고도 완전히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려면 어머니의 죽음쯤은 감수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열하는 현수를 보던 재호의 얼떨떨한 표정이 인상 깊다. 마치 "그렇게까지 괴롭고 슬퍼할 일인가" 싶으면서 약간은 잘못했나 싶은 표정.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현수가 심지어 신분을 드러내는, 평생 재호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믿음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비밀과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게, 가족을 그렇게 아낄 수 있다는 게 재호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재호의 마음도, 어깨도 무거워진다. 우리만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그 생각.
이렇게 어려운 건 현수 네가 처음이야
재호는 착실히 판을 짜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서 원하는 것들을 이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왔다 가면서 세워놓은 방법이었다. 이제 현수도 곁에 있고 고병철 회장도 사라졌다. 살기 위한 일이었을 뿐 지겹고 피로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현수에게는 마지막까지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다른 게 분명한데도, 주변의 공기도 날씨도 다른데도 함정에 걸어 들어갔다. 병갑을 직접 명패로 때려죽이면서도 현수가 복수를 하고 있구나, 내 손으로 복수를 하게 하는구나 했을 것이다.
묘하게 밉고 묘하게 미워할 수 없다
재호의 병 주고 약 주고(어머니는 돌아가시게 하곤 장례식 비용과 마무리는 도와주는) 식의 행동을 알게 된 후, 현수는 재호를 이상하게도 많이 배려해 준다. 일찌감치 어머니를 죽인 사실을 얘기해서 자신을 죽일 기회도 주고, 경찰들로부터 피할 수 있게 작전을 모조리 바꿔버린다. 재호 역시 자기 한 몸 지키기 바쁜 와중에도 현수가 곤경에 처하자 다가와서 도와주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재호를 천 팀장이 차로 받아버릴 때는 순간 이 영화의 악역이 천 팀장이었나 싶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 팀장이 제일 못된 사람은 아니지만 제일 야멸찬 사람이긴 하다. 모든 걸 알고도 원하는 걸 위해서만 움직이는 사람. 죄책감 같은 건 스스로 괴롭기만 하고 당하는 놈이 바보라고 하더니 그럼 이제 누가 바보인가. 얼마나 악역인지는 재호의 웃음소리 뒤에 현수가 천 팀장에게 박아 넣은 총알 소리를 세어보자.
현수가 될 수도 있었지
재호와 현수를 보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안타까워진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아니 현수가 원하는 대로 감방으로 입학하지 않고 취직을 했다면, 재호가 오세안 무역 사람이 아니고 현수가 경찰이 아니었다면, 재호가 가족애라는 걸 공감하거나 현수가 좀 더 솔직하지 않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현수가 바라던 대로 취직을 했다면 회를 먹으면서 영화 시작과 동시에 머리에 총알이 박혔을 것이고 오열하면서 홀로 남은 쪽은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알뜰히 챙겨줬다면 어머니를 핑계로 현수를 움직이게 했던 천 팀장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뭔가 달라졌다고 해도 결과가 과연 안타깝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처음에는 현수 입장에서 재호를 원망했다. 하고많은 방법 중에 꼭 어머니를 죽이는 방법이었어야 했을까. 좀 더 솔직할 순 없었을까.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으면 너를 죽였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 번도 누굴 믿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를 믿는다고 말할 때마다 괴로웠다고도. 천 팀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이야기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을 입도 이해는 간다. 경찰인 걸 속이는 것과 어머니를 죽였다는 점을 속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말했다 하더라도 현수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재호가 밝히는 순간 현수는 세상에 홀로 버려지게 된다. 차라리 끝까지 몰랐으면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보고 나선, 현수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과연 현수가 재호의 숨을 끊었을까 싶었다. 총도 맞고 차에도 치어 치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재호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는 끈질기니까 살아남을 순 있겠지만 어차피 이젠 함께할 수가 없다. 현수와 재호는 정말 모든 걸 그만두고 버리고 떠날 용기는 없었다. 재호가 다시 감방에 잡아넣는다고 치면 지난날처럼 감방을 주무르며 지낼 수 있을까. 또 나온다 한들 다시 이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현수는 이 일을 계기로 경찰을 그만둘 수 있을까. 현수는 모든 것을 재호에게로 돌린다. 이 모든 상황도, 사람들도, 시간도. 사람들도 역시 상황을 믿을 테니까. 재호의 손에 쥐여준 그 총을 믿을 테니까.
마지막 장면의 현수의 표정은 춥다. 늦은 후회와 밀려오는 공포와 두려움에 허여멀건 하게 질려있다. 굳이 손으로 재호의 숨통을 막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태까지 잠입을 위해 때리고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재호는 다르다. 의미가 생기고 믿어버리게 됐다. 차라리 그가 알아서 고통받도록 그대로 두었다면 적어도 죽음은 현수의 탓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믿음을 저버린 복수는 현수를 스스로 세상에 홀로 버려진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현수가 재호를 덮었던 손을 늦지 않게 놓아버리고 뒤도 돌아버리지 않고 걸어갔으면 어땠을까. 그 빨간 스포츠카가 비어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들이마시는 재호의 숨은 인셉션의 팽이처럼 마지막 숨인지 계속되는 숨인지 알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영화는 불한당이고, 나쁜 놈들의 세상이다. 현수는 재호를 죽게 함으로써 불한당이 되고, 재호의 마음을 이해한 채로 살아가게 됐다.
여담이지만 <무뢰한>에서 목적을 위해 믿음을 뒤로했던 형사 재곤은 <열혈 사제>에 가서는 신부가 되어 "너에게 말한다. 77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역대급으로 성장한 인내심과 믿음을 보여주었다. <불한당>의 피와 눈물, 배신감과 불안, 슬픔과 두려움에 젖은 경찰 현수는 재호와의 사이에서 용서가 물 건너가 버린 게 마음 아프기도 하다. 인생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용서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내 안에 살아있던 그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사라지게 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부정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것이다. 언제 봤다고 대뜸 자기라고 부를 때였는지, 처진 어깨로 등 뒤에 칼이 있는지도 모르고 감방 복도를 걸어갈 때였는지, 출세하기 한참 전에 낡아빠진 사무실에 데려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인지, 알면서도 자기가 불러들인 죽을 자리로 들어오는 초연함 때문인지, 혹은 언제든 총을 쏠 수 있던 사람이 자신 앞에서는 결국 총을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인지. 다만 현수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손을 떼지 못하는 그 순간에 여실히. 그 마음이 미안함 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어둠 속에서 느낀 모든 것들이 날이 밝아오면서 밀려올 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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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핍은 나의 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율리에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라서 끝까지 가 봐야만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성적에 맞춰 의대에 갔지만 자신은 정신적인 것에 더 흥미를 느낀다는 걸 깨닫고 심리학과에 진학하더니, 또다시 시각적인 것에 예민하다는 걸 깨닫고 포토그래퍼를 꿈꾸며 서점에서 임시로 일한다. 꿈이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마다 연애 대상도 계속해서 변한다. 율리에가 북유럽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인생 꼬이기 딱 좋은 성격이다. 나는 율리에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율리에처럼 침울해졌다가 율리에가 왜 자꾸 사진은 안 찍고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는 건지 갑갑해졌다.
그럼에도 율리에는 용감한 사람이다. 사람도 꿈도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떠나버린다. 어쩌면 그는 좋은 걸 못하게 되는 것보다 싫은 걸 견디는 게 더 힘든 사람인지도 모른다. 성공한 예술가 악셀은 율리에에게 롤 모델이고 대화가 잘 통하지만 그와 함께할 때 율리에는 들러리가 된 것 같다고 느낀다. 그 점 때문에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끌린다. 에이빈드는 율리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야망이 없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에이빈드에게는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뭐냐며 무시한다. '나는 더 많은 걸 원한다'라고 말하지만 율리에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 그 자신도 모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율리에는 누구와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누구와 있어도 대체로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걸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떠난다는 건 결핍이 많다는 뜻이다. 동시에 결핍은 동력이 된다. 그가 사랑에 열성적이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자기 자신을 가장 깊이 알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20대 내내 나도 뭔갈 원했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말하기 힘들었다. 늘 뜬구름 사이를 걸어 다니는 기분이었던 건 마음속의 결핍을 채울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몰입했다. 몰입과 결핍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매번 타인의 삶이라는 대조군을 통해서 욕망을 확인하고 점점 선명한 사람이 되어갔다. 어릴 때는 31가지 맛 아이스크림 중 뭘 맛볼까 고민했지만 이제 나는 쿼터 한 통을 한 가지 맛으로만 채우는 30대가 되었다. 율리에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기 위해 타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율리에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낳지 않았고,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나와 혼자가 되었다. 타인의 삶을 전전하던 율리에는 드디어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 최악의 나를 수없이 지나온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결핍은 나의 힘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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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첫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완연한 봄이 되어가고 있는 4월의 첫 개봉 소식입니다.
로맨틱 코미디의 대명사였던 휴 그랜트가 섬뜩한 악역으로 돌아온 A24표 호러영화 <헤레틱>부터
배우 하정우와 감독 하정우를 한번에 만날 수 있는 <로비>, 칸 영화제 수상 다큐멘터리 <올파의 딸들>,
프랑스 SF 애니메이션 <화성특급>까지!
금주에도 각양각색 영화들을 극장에서 만나보세요.
헤레틱
Heretic
개요: 스릴러 | 미국 | 111분
감독: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주연: 휴 그랜트, 소피 대처, 클로이 이스트
개봉: 2025.04.02.
배급: (주)이놀미디어
줄거리
외딴 집을 찾은 신앙심 깊은 두 소녀에게 집주인은 믿음을 뒤흔드는 이야기를 꺼낸다.
무언가 의심스럽다고 느끼는 순간, 두 소녀는 꼼짝없이 집안에 갇히게 된다.
친절했던 남자는 돌변하고, 그녀들은 살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하는데…
로비
LOBBY
개요: 드라마 | 대한민국 | 106분
감독: 하정우
주연: 하정우, 김의성, 강해림, 이동휘, 박병은, 강말금, 시원, 차주영, 박해수
개봉: 2025.04.02.
배급: ㈜쇼박스
줄거리
"더럽게 싸움을 걸면, 어떻게 더럽게 싸우죠?" 연구밖에 모르는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은
라이벌 회사 대표 광우(박병은)의 뒷거래 때문에 기회도, 기술도 번번히 빼앗긴다.
그의 회사의 유일한 탈출구는 4조 원에 달하는 국책사업을 따내어, 한방에 자본을 확보하는 것! 하
지만 로비에 있어선 한수 위인 광우는 조장관(강말금)을 일찌감치 포섭한 상황, 창욱은 눈을 돌려 조장관의 최측근이자
실무를 쥐고 있는 남편 최실장(김의성)에게 접근해 더러운 싸움에 참전하게 되는데...
마침내 뒷거래가 이뤄지는 골프장에 한날 한시 각자의 목적을 위해 모인 로비팀들, 이들의 진흙탕 로비가 펼쳐진다!
올파의 딸들
Four Daughters
개요: 다큐멘터리 | 프랑스 | 108분
감독: 카우타르 벤하니야
주연: 올파 함루니, 에야 치카우이, 타이시르 치카우이, 핸드 사브리, 누르 카루이, 이흐락 마타르
개봉: 2025.04.02.
배급: ㈜쇼박스
줄거리
튀니지에 사는 올파에겐 네 딸이 있다.
어느 날 첫째 딸과 둘째 딸이 IS에 가담하기 위해 가출하고,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은 올파 가족의 이 비극을 허구와 실제 사이에서 재현하고자 한다.
화성특급
Mars Express
개요: 애니메이션 | 프랑스 | 89분
감독: 제레미 펜
주연: 레아 드루케, 마티유 아말릭, 다니엘 니호로베
개봉: 2025.04.02.
배급:킨 스튜디오
줄거리
23세기, 일상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뒤섞여 살아가는 화성의 수도 녹티스.
사립 탐정 ‘알린 루비’와 그녀의 안드로이드 파트너 ‘카를로스 리베라’는 부유한 사업가 ‘크리스 로이 데커’에게 실종 사건 의뢰를 받게 된다.
사라진 이는 명문 사립대학에서 인공 두뇌학을 공부하던 여학생 준 초우. 화성을 가로질러 실종 사건을 파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녹티스의 배면
깊숙이 내려가 두뇌 농장, 부패, 로봇에 대한 비밀 그리고 실종된 소녀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화성의 잔혹한 비밀 속에서 그들은 무사히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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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기는 티키타카! 류승룡이 다시 돌아왔다! 장르만 로맨스!
류승룡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 장르만 로맨스가 개봉했습니다.
배우인 조은지 감독의 상업장편 영화 데뷔작이죠.
주요 등장인물들의 티키타카가 매력적이고, 특히 류승룡 배우의 코믹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물론 진중한 연기도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흥미롭고 따뜻하게 볼 수 있어요.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니 주변 관계들을 생각하며 보시면 더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전체 영상을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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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위대한 시> 예고편
현금 수송 일을 하는 두 남자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터에서 군인으로 함께 생활했던 빅터와 로하.
둘은 일도 함께 하지만 업무가 끝나면 함께 시를 가르치는 수업도 듣는다.
항상 붙어다니지만 둘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투계장에 가서 도박으로 돈을 탕진하는 로하는 늘 빚에 쪼들리며 불안해하는 반면
빅터는 위험 앞에서도 침착하고 돈에 대한 욕심도 없어 보인다.
영화의 스포트라이트는 빅터를 향한다.
우크라이나에 파병됐을 때 사람들을 죽인 경험을 가진 그는 평소 조용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로 보인다.
엉뚱하게 시를 발표해서 유명해진 빅터는 한 순간 억눌렸던 폭력성을 폭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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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악마의 다이어리> 예고편
어느 날 밤 오우자 판자를 가지고 놀다가 악마의 공격을 받은 레베카 클락슨.
사람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동안 자신의 웹캠에 비디오 일기 형식으로 그녀의 경험을 기록한다.
고조되는 일련의 사건들, 그림자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점점 소름이 끼치기 시작한다.
초자연적인 움직임이 격렬해지고, 레베카는 마침내 악이 그녀의 몸을 점령할 때까지 악마적인 힘에 의해 반복적으로 공격을 받는다.
레베카는 악마를 물리치고 영혼을 보호할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