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8-18 10:31:01
[JIMFF 인터뷰] 3년만에 세상 밖으로
'오랜만이다' 이은정 감독 인터뷰
3년만에 세상 밖으로, 이은정 감독의 '오랜만이다' |
개막식부터 이어진 비소식과 더운 날씨에도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찾아주는 관객들이 많다. 이은정 감독은 첫 장편영화이자 음악영화를 선보이며 기쁜 마음을 전했다. 2020년 팬데믹과 맞물려 오랜 기다림 끝에 세상에 나온 영화 '오랜만이다'의 이은정 감독과 ‘연경, 음악, 그리고 이은정 감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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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와 함께 간단한 영화 소개 부탁드립니다. 영화 '오랜만이다'를 연출한 이은정입니다. 영화 '오랜만이다'는 오랫동안 가수의 꿈을 꾼 연경이 서른 초반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꿈을 포기할지 고민하는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시절에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기타 하나가 첫사랑 현수로부터 배달되며 다시금 떠오른 첫사랑, 꿈과 현실 사이 청춘들의 고민을 담은 영화입니다.
영화를 구상하는 과정에 생긴 에피소드가 있다고 들었어요. 영화 제작사 대표님이 ‘지하철에서 첫사랑을 만나 보내는 하루’를 음악 영화로 오랫동안 기획하셨는데요. 제가 연출을 맡았을 때 코로나19로 인해 촬영을 1년 정도 멈추었어요. 그때 절반가량의 시나리오도 다시 썼거든요. 처음에 작성한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촬영을 중단한 1년의 기간이 감독님께는 더욱 깊이 있어진 시간이 되었을까요? 영화 속 연경이도 꿈을 향해 도전하지만, 자꾸만 벽에 가로막히고 좌절하고 어쩌면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닌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사실 촬영이 중단되니 연경과 감정이 동일시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바뀐 시나리오를 감독님과 배우님들께서 좋아하셔서 나머지 절반을 새로운 시나리오와 합쳐 완성했어요. 기존의 시나리오는 로맨틱 코미디 성향이 강했다면 완성작은 훨씬 차분하고 음악인으로서 연경의 성장담이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저에게는 이 영화 자체가 연경이 같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로 작업하는 가운데 촬영이 계속 중단되다 보니 “아냐 넌 할 수 있어, 될 수 있어”라고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거든요. 연경이가 마지막에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데 울컥했습니다. 되든 안 되든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감독님께서 좋아하는 곡 추천 부탁드립니다. 여고생 연경과 잘 어울리는 곡인 '천문학은 모르지만', 현대에서 부르는 '무지개'라는 곡을 추천드립니다. '무지개'를 들을 때 각자의 느낌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제가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감성인 것 같아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감독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처음입니다.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어요. 저 혼자 3년 가까이 영화 '오랜만이다'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언제 세상에 나와 관객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러다 영원히 안 되면 어쩌지 불안감도 생겼어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저의 불안을 해소해 준 느낌이에요.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한 것을 보게 되어 의미가 있고 세상에 나왔다는 것에 감동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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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이은정 감독은 배우들과 함께 영화 상영 후 곧바로 음악 공연을 하는 ‘히든트랙’에 참석했다. 당시 관객과 가까이에서 만나 영화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이게 진짜 음악영화제’라 마음에 와닿았다고 전했다. 이은정 감독은 연경과 음악의 연장선에 서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은정 감독은 영화 '오랜만이다' 음악들이 워낙 좋기 때문에 음원도 나오고 나중에 노래방에서 나오면 따라 부르고 싶다는 즐거운 꿈을 밝혔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김미정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시은
에디터 : 김문숙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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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데믹 속에 열리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는 더 넓은 아시아 지역에서 더 많은 연대를 강조하는 동시에 지역 사회와 더 많은 접촉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올해는 팬데믹 이전 시대에 비해 영화제 규모가 축소되었다. 그러나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는 여전히 70개국지역의 223편의 영화(장편과 단편)를 상영한다.
모든 장편영화는 총 29개의 스크린을 가진 6개 상영관에 걸쳐 여러 차례 상영될 것이다. 영화가 극장에서 한 번만 상영되었던 작년과 달리 상영 횟수가 늘었지만, 각 상영관 전체 좌석은 50%로 제한되며 모든 티켓은 온라인 및 사전 예약해야 한다고 밝혔다.
올해 26회 부산국제영화제는 2021년 10월 6일부터 15까지 열릴 예정이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남동철 수석프로그래머는 갈라프레젠테이션 섹션의 상영이 3회로 제한되는데, 두 명의 외국 감독만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바로 칸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감독상 수상작인 "아네트"의 프랑스 감독 ‘레오 까락스’와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드라이브 마이 카" 의 일본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이다.
<아네트>(감독 레오 까락스)
<드라이브 마이 카>(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식과 폐막식, 오픈 토크, 야외 팬 인사 등은 열릴 예정이다. 하지만 주최 측은 부산영화의전당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개막식은 1,200명으로 제한될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과 달리, 실제 프레스 센터도 운영될 것이다. 그러나 ACF(아시아영화펀드), AFA(아시아영화아카데미), 플랫폼부산은 올해에도 잠정 중단된다.
개막작은 임상수의 "행복의 나라로’, 폐막작은 렁록만 감독의 홍콩 가수 겸 배우 매염방의 전기영화 ‘매염방’이 선정됐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행복의 나라로>(감독 임상수)
아시아 콘텐츠&필름 마켓이 다시 한번 올해 온라인으로 열린다. APM과 국내 참가자를 대상으로 E-IP마켓 비즈니스미팅을 운영하며, 온.오프라인 동시 개최와 마켓 현장에서 대면 미팅을 진행한다. 이번 마켓에서는 한국.대만.일본의 원작 45편과 한국.아시아의 장편영화 프로젝트 25편이 소개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국내영화계의 거장 임권택은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에 선정되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직접 상을 받을 예정이며 이전에 발표한 대로, 영화제의 또 다른 명예상인 한국영화공로상은 고 이춘연 제작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임권택 감독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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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th BIFF 데일리] 그들은 왜 독재자의 손을 놓지 못하는가.
블라디미르 푸틴은 어떻게 20년 넘게 러시아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할 수 있었을까. 영화 <크렘린의 마법사>가 이 질문에 해답을 제시한다. 현대 정치사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강력한 권력의 비밀과 전략을 스크린 위에 펼쳐내며 권력의 매커니즘과 그 뒤의 대중 그리고 국가의 운명의 향방까지 생생하게 드러낸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을 알지 못한다면 영화 속 이야기를 이해하기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소련이 붕괴한 뒤 러시아는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으로 인해 침체되었다. 급격한 자유화 정책과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부의 불균형과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켰고, 국민들은 과거의 안정과 질서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 싹텄고, 푸틴은 그 공백을 채우며 절대 권력자로 자리 잡게 된다. 그 뒤에는 푸틴 시대의 통치이념과 현대 러시아 정치 시스템을 설계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러시아 정치의 핵심 전략가로 알려진 바딤 바라노프다. 실존 인물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를 모델로 한 바라노프는 푸틴 정권 초기 핵심 전략가다. 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는 러시아의 정치사가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 푸틴이 어떻게 러시아를 장악했는지를 면밀하게 보여준다.
2025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크렘린의 마법사>는 옐친 시기의 혼란부터 푸틴 체제의 구축 과정까지 현대 러시아사를 관통한다. 경제적 안정과 국가적 영광이 자유와 평등보다 우선시되는 현실, 독재자의 통제 아래 질서와 안전이 강조되는 상황을 연출해낸다. 영화는 사실과 픽션을 섞어 관객이 스스로 무엇이 진실인지 판가름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잘 짜여진 정치 드라마를 통해 현대 러시아 사회와 권력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크렘린의 마법’은 초능력이나 판타지가 아닌 정치 공학적 전략을 뜻한다. 언론 통제, 가짜 야당 조성, 대중 감정의 방향 전환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의 사고와 분노를 관리하는 전략인 것이다. 영화는 스탈린 시대를 거친 러시아 국민들이 왜 다시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하게 되는지 영화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상영 스케줄
09-18 20:00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09-19 16:00 시청자미디어센터
09-24 15:30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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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퀴어 영화가 필요하다
1980년대 계엄령이 해제된 직후의 대만. 장개석은 죽었고, 고등학교는 남녀 공학으로 바뀌었다. 즉, 세상이 변하고 있다. 하지만 자한과 버디를 힘들게 하는 동성애혐오적 세상은 그대로다.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해야 할 이들의 사랑은 주변의 시선, 자기 검열, 회의와 비관으로 얼룩져 어긋나 버린다. 그들은 '수십 년 후'라는 설정 속에서만 유예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스틸컷 ⓒ넷플릭스
하지만 '수십 년 후'에라도 서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건 판타지다. '수십 년 후'라는 설정은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온전히 만끽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장치다. 지나간 시간을 쓸쓸히 추억하든 아름답게 재연하든, 오래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복권하기 위한 장치 말이다.
퀴어 영화나 퀴어 소설에서 이러한 장치의 효과가 더 두드러지는 건 이 때문이다. '보편적' 사랑 담론에는 그들의 자리가 없기에, 대부분의 퀴어는 사랑에 실패한다. 그 실패의 아픔은 먼 미래에야 치유될 수 있는 것으로 상상된다. 즉 퀴어들은 '수십 년 후'라는 장치의 효과를 가장 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나는 퀴어 영화나 소설의 '수십 년 후'라는 설정이 싫다. 이것이 현실적 제약에 더럽혀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패배주의적으로 복기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박탈당한 현재의 아픔을 '환상적인' 미래에 던져버림으로써 지금을 포기해버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한과 버디의 재회가 대만이 아닌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이뤄지는 것도 불만이었다. '수십 년 후'가 '지금'의 시간성을 박탈한다면, '몬트리올'은 '여기'의 장소성을 박탈한다.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의 낭만적 결말이 공허한 이유다. 수십 년 후 몬트리올에서 재회하는 자한과 버디는 '지금 여기'를 빼앗긴 비참한 존재들일뿐이다.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스틸컷 ⓒ넷플릭스
자한과 버디가 '지금 여기'를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힌트를 주는 장면이 있다. 영화 중간에는 괴로워하는 자한을 달래주는 노인이 나온다. 그는 인자한 모습으로 자한을 위로해준다. 그러나 어느덧 돌변해 자한을 애무하기 시작한다. 자한이 소리친다. "전 그런 사람 아니에요. 당신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요!"
자한과 버디가 빼앗긴 시간성과 장소성을 회복하는 일은 이 노인과 자한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한이 스스로를 노인과 구분 짓지 않을 때, 그와 자신이 연결된 존재임을 자각할 때, 노인을 밀어내는 대신 "당신은 이 슬픔을 어떻게 견뎌오셨나요?"라고 물을 때, 자한과 버디의 사랑은 '지금 여기'의 가능성을 되찾아 올 수 있다. 대만 퀴어의 역사성·계보에 자한과 버디의 사랑이 추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잉태되는 미래의 가능성은 '수십 년 후의 몬트리올'이 표상하는 미래보다 단단하다. 구체적 현실에 발 디디고 있기 때문이다. 퀴어의 행복한 미래는 더 이상 먼 미래 혹은 '퀴어 친화적인 서구'라는 현실도피적 시공간성에 갇혀선 안 된다.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스틸컷 ⓒ넷플릭스
"넌 어디도 갈 수 없어"라는 자한의 말은 이성애규범적 사회에서 개별적 존재로 찢겨 방치된 퀴어들의 연결성을 회복할 때 "갈 수 있어"라는 버디의 말로 나아갈 수 있다. 고립된 채 방치된 존재들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연결됨으로써만 집단적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연결의 매개는 이성애규범적 사회를 살아가는 퀴어들이 실패의 슬픔을 품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자각이다.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의 아름다운 정서는 먼 미래의 환상적 공간에 내팽겨질 만큼 하찮은 것이 아니다. 말랑말랑한 영화의 결말은 '지금, 여기'에서 완결되어야 할 자한과 버디의 사랑을 이성애규범적 사회보다도 더 가혹하게 방치한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에는 '지금, 여기'의 퀴어 정치성을 촉구하는 더 좋은 결말이 필요했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이 영화가 아쉬운 이유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rewr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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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적 시간의 재구성
1.
<인셉션>(2010)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세계 속 시간을 재정의한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도구인 시간을 스크린 위로 불러내서, 영상 언어로서의 시간을 구축한다. 각각의 꿈속에선 단계별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이 편집 기법을 통해 시각화된다. <미행>(1998), <메멘토>(2000)에서 시작한 ‘플롯 게임’을 지탱하는 내러티브적 시간의 혼재된 배열이 <인셉션>에서는 다른 형태의 지위를 획득한 셈이다. 대놓고 시간 흐름의 상대성을 논하는 <인터스텔라>(2014)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셉션>의 변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 시간이라는 관념을 향한 놀란의 집착이 후속작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덩케르크>(2017)의 시간은 <메멘토>와도, <인셉션>과도 다르다. 이 영화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민간 어선에서의 하루, 전투기에서의 한 시간이라는 서로 완벽하게 어긋나는 세 시공간대를 과감하게 교차한다. 그간 놀란이 구상해 온 비선형적 플롯 구조 가운데 <덩케르크>만큼이나 비정형적인 사례는 없다.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가한 <메멘토>의 플롯조차도 컬러의 역순행과 흑백의 순행이 섞이는 최소한의 규칙을 전제로 하지만, <덩케르크>는 플롯을 연결하는 관습적인 규칙마저도 최대한 느슨하게 구축한다. 더 나아가 <덩케르크>의 시간은 <인셉션>처럼 시각화된 물리량 변환이 아닌 다른 형태로 정의되길 바라는 듯 보인다. 이 영화는 물리적 길이가 다른 세 시간대를 교차하는데, 교차된 장면들 총합의 길이가 장편 영화 포맷의 러닝타임에 부합해야 하므로, 잔교의 일주일보다 민간 어선의 하루가, 어선의 하루보다 전투기의 한 시간이 영화상에 더 많이 노출되도록 편집될 수밖에 없다. 즉, 시간대 구간이 짧을수록 각 쇼트마다 더 많은 지속 시간을 할당받는다. 다시 말해 상대적 길이에 따라 재배치된 시간이 필름에 새겨진다. <덩케르크>는 수용자의 관습적인 지각 체계가 작동하기 힘든 영화이다. 관객은 마침내 편집을 통해 재구성한 비선형적 시간 개념을 인식한다. 몽타주로 피어나는 도상적인 운동감과 이미지 간의 리듬을 유도하는 새로운 시간적 개념 또한 동시에 정의된다.
<덩케르크>에서 정의된 영화적 시간은 그간 펼쳐왔던 놀란의 시간 게임 중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테넷>(2020)이 공개되기 전까지 말이다. <테넷>의 시간 여행은 다른 영화에서 표현됐던 시간 이동에 관한 무의미한 기술적 반복이 아니다. <백 투 더 퓨처>(1985) 등이 불연속적 시간 이동을 서사적으로 활용한다면, <테넷>은 시간의 역전이 형상화되는 과정 자체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이 영화에는 <닥터 스트레인지>(2016) 등에 쓰인 단순한 되감기 기법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놀란은 역방향 촬영과 더불어 배우들을 거꾸로 연기하도록 디렉팅했다. <메멘토>에선 되감기 기술을 활용했던 놀란은 이번에는 촬영된 영상을 되감을 뿐 아니라, 피사체(주로 인물)가 직접 거꾸로 행동해서 시간의 역행을 재현하는 장면을 많이 동원한다. <덩케르크>에서 재정의된 시간처럼 <테넷>도 관습적으로 감각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시공간을 제시한다. 시간 순행과 역행이 공존하는 세상 말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정의하려는 많은 작품이 있지만, 감각 불가능한 시간의 역전 관계를 시각화하는 <테넷>의 실험만큼이나 생경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놀란 본인이 단편 <두들버그>(1997)에서 각기 다른 시간 선후 관계에 놓인 세 명의 남자(the man)를 동일한 공간에 중첩해서 표현한 점은 <테넷>의 전조로 볼 수 있지만, <테넷>은 분명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기존 영화들과 다른 양상을 띤다.
'테넷'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2.
문제는 놀란 영화에서 포착되는 시간의 변주나 재정의가 목표하는 지점이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해온 놀란의 세계는 매번 부산스럽게 규모를 늘려가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그 세계의 매혹적인 표층을 걷어내면, 근간에서 발견되는 건 지적 유희를 향한 감독의 개인적인 욕망뿐이다. 이토록 편집증적인 면모로 시간 재구성에 관한 영화를 생산하는 연출자가 누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놀란이 기획한 영화적 시간의 특징적 표지를 읽어내는 순간에 촉발되는 매력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영화가 머금은 지적 유희를 탐닉하려는 수용자의 몸부림이야말로 놀란 영화가 가치를 획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놀란의 영화가 형식을 통한 영상적 구현의 극한을 추구하는 사례라면, 동시대 감독들 가운데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몇몇 영화들은 놀란의 다소 피상적인 결과물들이 가닿을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한다. <보이후드>(2014)는 기술 자본을 등에 업고 욕망을 구현하는 놀란의 영화에서 절대 성취될 수 없는 결과를 제시한다. 링클레이터는 이 영화를 12년 동안 연출했다. <보이후드>의 인물들이 실제로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은 분장이나 특수효과로 구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삶의 순리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사실 태생적으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가두기도 하고 확장하고,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매체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링클레이터의 기획은 현실과 영화의 시간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삶의 재현 수단으로써 영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비포 삼부작(<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 역시 주연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노화 과정이 그대로 반영된 시간성이 필름에 각인된 사례다. 링클레이터의 영화적 시간은 곧 삶과 예술의 관계에 관한 작가의 견해처럼 보인다.
영화적 시간을 사유하는 또 다른 사례는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링클레이터의 영화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시간성을 탐구하고 있다면, 펫졸드의 <트랜짓>(2018)은 과거와 현재를 중첩하는 기묘한 설정을 통해 특정 시기에 구속된 시간 논리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한다. 펫졸드는 그의 작품에서 주로 역사의 흔적을 응시한다. <트랜짓>은 시공간성의 해체가 현대 사회에 산재한 이슈(난민 문제 등)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 사유하는 작업이다. 펫졸드의 사유는 시간의 재구성을 넘어, 시공간성이 반영된 역사에 관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물론 <덩케르크>의 시간은 전쟁 현장에서 생존하려는 자들의 모습을 관객이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공간성의 무화를 유도하는 <트랜짓>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테넷>에서의 과시적 유희는 그 깊이에 도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인셉션>은 <트랜짓>에 비해 시공간의 다층적인 관계가 매력적으로 구축된 작품이지만, 그 형식적인 틀이 <트랜짓>의 사례처럼 사회 문제나 현실 요소와 소통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는 않는다.
3.
한편 형식적인 관점에서 왕가위의 시간과 놀란의 시간을 비교해보는 시도는 흥미로운 논점을 생산할 수 있다. 왕가위의 영화는 시공간을 필름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왕가위는 <중경상림>(1994), <타락천사>(1995) 등에서 스텝프린팅 기법을 적절히 응용하여 형식의 층위에서 그 점을 강조한다. 왕가위는 흘러간 시간과 그 흔적의 공허함, 질감 등을 매력적으로 시각화하는 데에도 탁월한 센스를 보인다. 왕가위의 영화에는 주로 어긋나는 관계와 실패하는 사랑의 순간들, 공간을 맴돌거나 홀연히 떠나는 인물들, 기억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왕가위가 주로 천착하는 소재들은 형식과 긴밀히 맞물려서 영화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왕가위의 영화는 형식을 통해 작가적인 관점을 구현하려는 좋은 사례처럼 보이지만, 놀란의 영화에서는 그 연결고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왕가위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표출하지만, 놀란은 시간을 통해 영화의 구조를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닌가.
다른 영화들도 유의미한 쟁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샘 멘데스와 로저 디킨스는 <1917>(2019)의 의도된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영화적 시간을 현실로 전이시켜 관객에게 생생한 몰입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1917>의 기술적 성취만으로 서사 화법의 지위를 대체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놀란의 영화가 갖는 한계점과 유사하게, 채택된 기술의 당위성에 관한 논의를 만들어낸다. 되감기의 변주 등을 동원한 <테넷>의 시간 역행 묘사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형식적 산물이지만, 그 목적성을 따지기 시작할 때 영화는 급격히 동력을 잃는다. 서사적 측면에서 되감기 기법을 영리하게 활용한 이창동의 <박하사탕>(1999)은 <테넷>이 놓친 요소들을 알뜰하게 챙기면서 작품의 유기성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이와 다르게 <테넷>에서는 작품 내적 요소 간의 호응보다는 기술의 발달을 통해 형상화한 감독 자신의 가공된 욕망과 자의식만이 느껴진다.
4.
각각의 영화에서 다르게 표현되는 영화적 시간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카메라로 시공간을 담아내는 영화예술의 태생적 근간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분석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놀란의 작품들은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텍스트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는 명확한 한계를 안고 있기도 하다. <인셉션>을 기점으로 구체화된 그의 욕망은 <덩케르크>에서 가장 흥미로운 논점을 만들어냈지만, <테넷>에서는 기존의 매력마저 잃어버린 듯 방황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덩케르크>의 비선형적 시간 개념은 형식을 조작해서 관객의 지각 체계에 균열을 가한 뒤, 역사의 흔적과 영화와 현실을 매개하여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담론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테넷>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전제한 채 다시 한번 조작된 시간을 들이밀지만, 어쩐지 표층에만 머무른 채 심도 있는 담론의 장을 제공하진 않는다.
놀란을 향한 상당수의 지적은 생각보다 가혹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가 극복해야 할 숙명과도 같다. 놀란은 현대 영화 산업의 첨단에서 독특한 기질을 발휘하고 있는, 거칠게 말하면 포스트-스필버그처럼 보이는 보기 드문 유형의 창작자이다. 그에겐 16mm 필름 대신 아이맥스 필름이 있고, 열악한 로케이션 현장 대신 특별 제작된 회전 세트나 폭발해도 상관없는 비행기가 있다. 워너브라더스의 전폭적인 지원과 믿음을 토대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내는 자본주의적 연출가 놀란에겐 고삐 풀린 창작욕의 구현과 대중성 기반의 안정적 수익 구조의 창출이 모두 요구된다. 놀란이 영화 산업의 자본 논리에 종속된 이상, 자의식 과잉과 상업성 확보 사이에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영리한 줄타기를 선보여야 한다. <덩케르크>는 장르적 서사 코드를 마냥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메멘토> 이후 정체된 듯 보였던 그의 작가적 역량을 재입증한 사례였지만, <테넷>의 실험이 만들어낸 산물은 영화사와 감독, 대중과 평단 사이의 다층적인 이해관계에 반영된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한 사례로 보인다. 놀란이 재구성하는 영화적 시간은 과연 <테넷> 이후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그가 시간 실험을 지속할지 집착하던 소재에서 손을 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천재 감독의 다음 연출작을 기다리는 일이다.
'인셉션'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 본 콘텐츠는 씨네리와인드에 게재 후 씨네랩에 업로드된 글입니다.* 브런치 드플레 님의 자료를 받아 작성하였으며,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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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광 감독님이 너무 크게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웅남이 탄생
빠라바라빰~ 안녕하세요! 말봉 티비입니다! 유튜버 말봉. 유튜브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초 하이텐션으로 방송을 이끄는 말봉. 구독자는 열 명 밖에 없다. 그래도 돈 벌어야지. 방송 진행을 멈추지 않는다. 짜자잔-! 이번 게스트는 나 웅 남! 이 말을 하자마자 어류를 입에 물고 웅남이가 튀어나왔다. 웅남이에게 멘트를 거는 말봉. 웅남이가 지 맘대로 대답하는 탓에 방송을 갑자기 마무리했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얼핏 보면 무슨 주종관계 같은 느낌이지만 둘은 아무래도 친구다.
웅남이는 좀 특별한 존재다. 웅남이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느 동굴에 있었는데, 곰 사이에 껴있는 아이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이름을 웅남이라고 정했다. 곰이 사람이 된 걸 아는 웅남이의 부모님. 곰이 사람이 됐기 때문에 갖는 특성이 몇 개 있다. 밥을 엄청나게 먹어야 한다. 그것만 있나? 겨울잠도 자야 한다. 근력을 비롯한 운동능력도 뛰어나다. 이런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경찰 일도 했던 웅남이. 곰이 사람이 됐기 때문에 경찰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별안간 사람 같지 않은 웅남이. 이 나웅남에게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과연 웅남이는 흑막의 목표를 제지하고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까?
가장 어려운 시놉시스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놉시스라는 것이 있다. 이 시놉시스는 관객을 어필할 수 있는 외모 같은 존재다(물론 포스터와 예고편도 '외모' 축에 속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이 작품의 '시놉시스'를 쓸 수 있어야 이야기의 토대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싶다. 이야기가 쭉 뻗는 직선 주로 가 아니었던 <타르>도 시놉시스를 쓸 수 있으니, 처음 두 문장으로 영화를 요약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야 영화의 기본적인 설득력이 임팩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요약이 좀 어렵다. 왜냐? 영화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안 웃기는 유머 때문은 아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깔끔하게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퀄리티에 흠이 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글을 쓰는데 문장을 불필요하게 꼬아 쓰는 평론가들이 몇 있다. 아무리 영화 비평이라지만 글쓰기는 상대방과 소통하려고 하는 건데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는 뭘 위해 글을 쓰는지 의문점이 든다. 이 영화는 마치 꼬아 쓴 비평문처럼 시퀀스마다 연결이 되지 않는다. 첨삭이 필요한 영화인 셈이다.
호평할 만한 구석도 있긴 해
뭐 영화 보면서 '여기에 힘을 줬네' 싶은 구석이 있다. 영화는 두 장르를 병치시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나웅남이 갖고 있는 가족 드라마와 이정학이 품고 있는 누아르다. 가족드라마적인 특성은 후에 설명하려고 하니 패스한다. 느와르의 장르 특성을 이끄는 데 있어 박성웅 배우는 장르 전문가답게 어떻게 해야 관객들이 이 작품을 이해할지 잘 끌고 간다. <신세계>의 이중구 역 이후 코미디 영화 많이 나오시는 것 같은데 이 분은 그냥 느와르 하려고 태어나신 분 같았다. 공허한 표정과 이정학의 무력을 묘사하는 액션연기까지 그동안 우리가 알던 박성웅의 카리스마는 여기 다 있다. 또 박성웅 배우와 함께 힘을 합쳤던 최민수 배우 역시 연기가 좋았다. 분명 더 광기 어려야 할 인물의 카리스마가 터지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것이 배우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최민수 배우는 극의 긴장감을 혼자 보여주는 연기로 끌고 갔다는 점에서 호평할 만하다.
또 영화 중반부 찍고 넘어가는 이야기 전개가 있다. 이 이야기 전개를 활용한 방식은 좋은 평을 내릴 수 있다. 큰 틀을 잘 짰다. 영화를 보다 보면 나웅남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긴 설명을 바탕으로 어렵지 않게 '어 그럼 그렇게 되는 것 아냐?' 싶다. 이 부분을 나름 딱딱 맞아떨어지게 회수하는 방식은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훌륭했다고 느낀 지점이다. 이 부분의 내적인 연결고리를, 사건 중심으로 영화를 재구성하면 알 수 있다는 점은 오랜 기간 동안 공들인 부분이 조금 느껴진다.
가학적인 캐릭터
영화를 보면서 캐릭터들에게 의문부호가 생겼던 지점이 굉장히 많았다. 우선 첫 번째. 웅남이의 친구 말봉이다. 말봉이는 유튜버다. 팔로워가 10명밖에 없지만 아무튼 유튜버다. 뭐 유튜브 크리에이터라고 직업의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유튜버라는 직업적 특색에 너무 심취해 있다. 비밀 작전을 하고 있다고 치면, 당연히 카메라를 꺼두는 게 옳다. 아니 초등학생도 그건 다 안다. 영화는 이 유튜브라는 소재를 미친 듯이 쓰고 싶었던 듯이 흐름을 끊을 정도로 남발한다.
또 웅남이와 주변인들의 관계는 가족드라마적인 특성에서 영화의 핵심이 된다. 모르겠다. 웅남이를 바보로 만들면 웃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웅남이만 바보같이 행동하면 모르겠는데 말봉이가 웅남이를 대하는 방식은 불필요함과 동시에 가학적이라고 느꼈다. 웅남이와의 관계에서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다. 어떤 인물은 후반부에 수미상관처럼 재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웅남이의 리액션이 이해 안 가는 건 둘째치고 신을 구성하는 대사가 조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게 2003년이면 웃겼을 것이다. 사람을 사람취급 하지 않고 동물취급하는 게 이 사람의 인물세팅과 조응하지 않는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이렇게 후반부 웅남이의 선택이 설득력이 있게 다가오려면 인물 간의 유대감이 있어야 하는데 염혜란 배우가 밥 해주는 장면만 있으니 아쉬울 뿐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윤제문 배우가 맡은 캐릭터는 연출과 연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제문 배우가 지난 세월 동안 한국영화에서 보여준 얼굴은 무궁무진했다. 괴랄한 작품도 몇 편 나오셨지만 <마더>나 <아수라> <한산 : 용의 출현> 등등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 그런 게 아무 의미가 없다. 배우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연출은 무작정 화만 내라고 한다.
또 영화의 주인공인 웅남이에 대한 연출은 가장 아쉬운 캐릭터 설정으로 뽑을 수 있다. 웅남이는 곰의 운동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멀리서 작은 글씨도 다 보이고 근력도 세며 달리기도 빠르다. 영화에서 제시되는 핵심 과제들이, 이 곰 같은 피지컬로 해결할 수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어떤 때는 능력이 발휘되고 어떤 때는 또 안 되는 불규칙함은 영화의 통일성과 설득력을 깬다.
사족(들)
영화 초반부는 웅남이의 능력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곰이 사람이 됐다. 그럼 운동능력이 비정상적이겠지? 이 부분을 묘사하는 것은 좋았다. 편의점에서 뭐 하고. 싸울 때 뭐 하고. 근력이 세고 어쩌고 등등 이 영화를 구성하는 핵심이 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부분에 너무 길게 할당했다. 초반부에서 스타트를 이상하게 끊었다는 느낌이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어차피 이럴 것 아닌가?' 정확히 그렇게 한다.
또 러닝타임 중반부에 웅남이가 작전을 위해 훈련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비중이 큰 코미디로 묘사된다. 여기에 들어갔던 인물들 대부분이 소모적이다. 우선 윤제문 배우를 위시로 한 경찰 쪽 캐릭터는 세 명이다. 여기서 윤제문 배우 옆에 있는 남자 경찰 캐릭터는 없어도 큰 문제가 없다. 뿐만 아니라 훈련하는 교관들은 '개그 콘서트'에서 재현 개그로 쓸법한 걸 그대로 영화로 갖고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훈련하는 것이 의미가 있나? 그것도 아니다. 작전 실행에 있어 영화의 핵심이 되어야 할 부분이 웃기지도 않은 채로 표류하는 것이다.
위의 문단과 연장선상의 측면에서 영화의 카메오들은 난잡해 보이는 러닝타임을 더 산만하게 만든다. 영화에 개그맨들 세 분 나온다. 첫 번째 개그맨은 '배우 개그'를 하고 싶었던 듯 보인다. 그거 외에는 이 개그맨 분들이 인물 연출의 뒷심이 모자란 탓에 웃기지 않는다. 그냥 신인 배우 써서 맡았어도 이 캐릭터들을 소화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리고 쿠키영상 즈음에 등장하는 배우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솔직히 이 배우가 등장하는 모습도 의문점이 있으나, 필요한 섭외였나?라는 점도 아쉽게 느껴진다. 그 장면이 있어서 시리즈물을 기획할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도플갱어라는 소재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장면을 굳이 넣은 거는 박성광 감독이나 박성웅 배우가 인맥이 넓다는 거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도전에 박수를
우리는 개그맨 박성광을 잘 알고 있다. '개그 콘서트'가 방영하던 당시 기라성 같은 동기, 선배, 후배들과 함께 개그계를 이끌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용감한 형제들'에도 나오지 않았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도 갖고 있다. 그래서 뭐 글쓴이 같은 20대들에게 박성광 감독의 인지도는 어느 정도 확보가 되는 셈이다. 이게 당연히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영화감독 법 이런 건 없지 않나? 개그맨 출신 영화감독 중 뛰어난 역량을 가진 분들은 많다. <놉>의 조던 필, <돈 룩 업>의 아담 맥케이, <소나티네>의 기타노 타케시가 그렇다. 박성광 감독이 영화 퀄리티로 비판받을 수는 있어도 개그맨이라는 이유로 노력이 폄하되어선 안되지 않나 생각한다. 이는 수많은 선배 영화인들이 필모그래피로 증명한 사실이다. 물론 이 영화는 비판받을 여지가 공-장히 많다. 그러나 박성광 감독이 더 절치부심하는 계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콧대를 짓밟아주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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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지금, 이 순간은 진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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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이 위시하는 이 세계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모르고 게임도 하지 않고 메타버스에 접속할 일이 없는, 나 같은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사람에게는 너무도 낯설다.
AI에게 인격이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숱한 작품들에서 다루어져 왔다. AI 이전에는 복제인간이 있었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클론에게 인간과 똑같이 자의식이 생기는 모습을 보며, 당시의 나는 꽤 두려워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복제인간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아일랜드>로부터 15년이 지났지만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을 보면서도 덜덜 떨었다.
이제는 인간복제의 시대가 아니라, 가상인간 시대가 온 것 같다. 이미 AI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실제 사람처럼 행동한다. 행동하는 것은 누구의 의지일까. AI 인플루언서를 프로그래밍한 사람일까, AI에게 인격이 생겨버린 걸까.
에스파가 4인조가 아닌 8인조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황당함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했지만... 사람들은 에스파의 세계관을 받아들인다. 이제는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물론 지금 에스파의 'æ-에스파'들은 3D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그에 비해 AI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진짜 사람 같다.
출처: 네이버 영화
<프리 가이>의 주인공 '가이'는 '프리 시티'에 산다. 은행원인 가이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보낸다. 금붕어에게 인사하고, 커피숍에서 늘 같은 커피를 마시고, 은행에 강도가 들어오면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르고, 퇴근하고, 또 아침이고, 출근하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매일 똑같이 "좋은 하루 보내지 마세요. 최고의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하는 가이는 40 가까이 연애 한 번 못해본 '모쏠'이면서도 자신과 커피 취향이 같고, 5옥타브의 여자 가수 노래를 좋아하는 여자라는 구체적인 이상형이 있다.
존재에 대한 의심과 자각 없이 반복되는 가이의 일상에 특이점이 나타난다. 5옥타브의 여자 가수 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 '몰로토프 걸'을 만나게 된 것.
그 이후로 가이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과 자신의 '차이'를 알게 된 후, 선글라스를 빼앗은 가이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자아 또한 확장되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그동안 마시던 커피가 아닌 카푸치노를 주문해 보는데, 바리스타와 늘 인사하던 경관 등 모든 사람이 당황한다. 이 장면은 마치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을 때와 비슷하다. 가이가 선글라스를 껴보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인지한 후 절친인 버디에게도 선글라스를 껴보라고 했지만 버디는 삶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가이와 가이의 친구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현실이 썩 만족스럽지 않아도 변하는 것은 두렵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 자신을 밀어넣는 모습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NPC일까? 우리가 NPC라면 주인공은 누구인가. 가이는 NPC가 되기 보다는 주인공이 되기를 택한다.
그래서 가이는 몇 번의 죽었다 살아나는 시도 끝에 몰로토프 걸과 말을 섞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몰로토프 걸은 레벨이 100이 넘고 자신은 1밖에 안 되니, 레벨부터 올려야 한다. 그때부터 가이는 사람을 죽이는 대신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레벨을 올린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 모두는 알고 가이는 모르는 사실. '프리 시티'는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다. NPC인 가이는 선글라스 낀 사람-실제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도, 싸우지도 않아야 한다. 그런 가이가 갑자기 각성을 하고, 가이를 지켜보는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가이에 환호한다. 가이의 게임 속 스킨인 은행원 셔츠를 따 '블루 셔츠 가이'라는 별명까지 생기고, 혹자는 가이가 정체불명의 천재 해커라는 음모설을 제기한다.
가이가 이상형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몰로토프 걸은 AI 캐릭터가 아닌 사람 '밀리'이니까. 게임회사 '수나미'의 대표 앤트완(앙투완)은 개발자인 '키스'와 '밀리'의 게임 '라이프 잇셀프' 코드를 훔쳐서 '프리 시티'를 만들었는데, '프리 시티2'를 출시할 계획이다. 그러나 블루 셔츠 가이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난감해진다.
게임 코드의 개발자인 키스는 수나미에 들어가 앤트완 밑에서 일한다. 자신이 만든 세계를 되찾기 보다는 수나미에서 별 욕심 없이 일한다. 밀리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기업인 수나미 앞에서 일개 개인은 힘이 없다. 그러나 게임 속에 코드를 숨겨두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몰로토프 걸'로서 끝없이 게임 속을 헤맨다. 그러다 가이를 만나고, 게임 속에서이지만 가이에게 호감이 생긴다. AI라는 것을 알면서도.
몰로토프 걸과 가이는 게임 속에서 만났을 뿐인데도 취향이 너무 비슷하다. 그네를 좋아하고, 풍선껌맛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수나미는 '프리 시티2'의 론칭을 위해 블루 셔츠 가이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레벨업을 한 가이를 죽이기가 쉽지 않다. 결국 앤트완은 전 세계의 유저들을 무시한 채 리부트를 감행하고, 가이는 원래의 가이로 돌아간다. 그때 키스는 가이의 소스가 다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가이가 처음 각성했을 때처럼 해보면 어떨까? 바로 몰로토프 걸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몰로토프 걸의 키스와 함께 모든 기억이 되돌아온 가이는 자신과 같은 NPC를 해방하고자 한다. 누군가의 설계대로 만들어졌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해방이다. NPC들은 파업을 시작한다. 키스 역시 앤트완에게 반기를 든다. 앤트완은 결국 서버를 물리적으로 박살내는 것을 택한다. 그러나 가이는 사랑하는 몰로토프 걸을 위해 바다 건너 밀리와 키스의 코드까지 달려간다.
앤트완과의 딜로 겨우 구해낸 '라이프 잇셀프'는 성공을 거둔다. 몰로토프 걸은 '누군가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었겠지만'이라는 가이의 사랑 고백을 통해, 풍선껌맛 아이스크림과 그네, 5옥타브 여자 가수의 노래, 커피 취향이 바로 자신의 것이었음을, 그리고 가이가 몰로토프 걸을 만나면 사랑에 빠지게끔 프로그래밍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때 밀리에게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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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의 각성은 이상형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데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선글라스 낀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하는 의심. <트루먼쇼>, <매트릭스>와 맥락을 같이 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의미없는 반복,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대해 말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프리 가이>는 충분히 들뢰즈적이다. 의미없는 반복의 굴레에서 살아가던 가이와 친구들, NPC들, 그리고 키스도 특이점을 발견한 후 차이를 만들어간다.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삶은 그 전과 같을 수 없다. 모든 캐릭터들이 반복적이고 수동적이던 삶에서 자신을 능동적으로 굴려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키스와 밀리가 만든 '라이프 잇셀프'는 스스로 발전하는 AI들을 관찰하는 게임이다. 발전한다 함은 이전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캐릭터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다. 직업적인 성취, 똑같은 생활이 아니라 창조적이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게임 밖 사람들은 진짜 사람 같은 게임 속 AI들의 발전을 응원하고 지켜본다. 마찬가지로 프리 시티에서의 가이가 불가능할 것 같은 싸움을 마치고 바다 건너 세계로 달려가는 것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의심하지 않으면 반복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헐벗은 반복'. 무한히 반복되는 삶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세트장 속 트루먼의 삶, 빨간 약을 먹기 전 네오의 삶, 앤트완 밑에서 시키는 것만 하던 키스의 삶은 진짜일까.
아무리 게임 속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성장해나가는 AI들에게 그 세상은 가짜가 아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숨쉬고 있음을 느끼는 지금-여기가 바로 진짜 세상이다.
(매번 실패하지만, 그런 이유로 명상을 하라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람 같지 않은 것과 사람 같은 것이 섞여 산다. 때리고 죽이고 배신하는, 사람 같지 않은 인물들이 이끌어가는 서사가 판을 치는 가운데, 인간이 서로를 돕고 스스로, 또는 누군가의 조력으로 성장하는 모습, 사람 같은 영화였다. 물론 주인공이 사람은 아니지만.
관람 포인트
* 라이언 레이놀즈는 그냥 가이가 아니라 핫 가이다.
* 앤트완 역을 맡은 타이카 와이티티의 연기가 킹받는다.
* 크리스 에반스가 영화 속에서 잠깐 킹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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