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2-08-28 19:47:36
[SIWFF 데일리] 그해 여름, 남매 성장기의 한 페이지
영화 〈남매의 여름밤〉 리뷰
7★/10★(윤단비 감독 작품, 2019년, 104분, 한국.)
〈남매의 여름밤〉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을 법한 유년의 기억 한 페이지를 소재 삼아 아이의 성장기를 담아낸 영화다. 겉보기에는 평온하고 잔잔하지만 아이들은 그 속에서 때로 격정을 느끼고, 아파하며, 성장한다. 여름과 성장의 질감이 짙게 묻어나는 이 영화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철거를 앞둔 재개발 골목에 흰 다마스 한 대가 서 있다.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옥주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동주가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의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서다. 할아버지의 집은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다. 나무로 된 짙은 갈색의 실내 장식에서 나는 냄새가 화면 바깥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어느새 아늑해지는 그런 냄새. 옥주와 동주는 아주 느린 속도로 말하고 걷는 할아버지와 그의 흔적이 담긴 집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이내 적응하고는 금세 웃음을 되찾는다.
영화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빠르게 흘러가는 아이들의 시간은 꽤나 잘 어울려서 관객을 웃음 짓게 한다. 굉장히 섬세하고 구체적인 장면들도 눈길을 끈다. 어떻게 상상하고 연출했을까 싶은 장면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남매의 기분 좋은 여름날에 대한 몰입도도 높아진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시간은 마냥 행복하게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에 아이들은 성장한다. 첫 번째는 어른이라는 문제다. 옥주와 동주는 어려운 형편에도 남매를 잘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 남편과의 문제로 언젠가부터 할아버지 집에서 함께 사는 고모를 잘 따른다. 자신들을 아껴주는 어른들의 마음이 진짜임을 알기 때문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현실에 지친 어른, 현실에 지치다보니 현실과 닮아버린 어른이기도 하다. 두 어른은 거동이 힘들고 용변을 잘 가리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자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집을 팔고자 한다. 이것만으로 아빠와 고모를 욕할 순 없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어른이 엄청난 품이 드는 돌봄노동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매우 힘들다.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간다면 꼭 그 집에서 살 필요가 없는 것도 맞다.
그러나 여기에는 빠진 게 있다. 옥주는 요양원과 집 문제를 두고 아빠에게 묻는다. “그걸 왜 우리가 결정해?”(요양원), “할아버지한테는 얘기했어?”(집). 옥주는 두 어른보다 현실과 윤리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더 잘 알고 있다. 설령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가더라도, 집을 판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가 결정의 주체 혹은 의논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두 어른은 이 당연한 과정을 생략한다. 다소 화가 난 듯이 보이는 옥주의 감정은 정당하다. 어른이 부재한 곳에서, 아이들은 성장한다.
두 번째는 엄마 문제다. 옥주는 늘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동주를 자존심도 없냐며 다그친다. 아마도 엄마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동주에게 엄마를 만나러 가면 혼내주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 그런데 동주가 몰래 나가 혼자 엄마를 만나고 선물까지 받아 온다. 옥주는 화가 나서 이를 뺏으려 하고, 동주는 엄마의 선물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결국 두 남매는 소리 지르며 몸싸움까지 한다.* 그러나 옥주가 이렇게 화가 났던 건 사실 자신도 엄마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 문제에 의연한 척했던 건 어떻게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긍정하기 위한 포장이었을 뿐, 그 역시 동주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어린이와 청년의 경계에서 홀로 의연히 버텨내고자 하는 옥주의 의지가 대견하면서도 쓸쓸하다. 그해 여름 한 소녀의 지극히 사적인 성장통이 보편적 호소로 다가오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덧. 이 영화를 배리어프리 영화(장애인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제작된 영화)로 봤는데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한국어 영화를 자막(일반 자막이 아닌 배경음악 등에 대한 정보까지 포함한 상세한 자막), 내레이션(박정민 배우가 재능 기부한 것으로 화면 움직임에 대한 해설 등으로 구성)과 함께 보며 모두가 볼 수 있는 영화란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었다. 내레이션의 문장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굉장히 문학적인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화면 대신 내레이션만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이 그려냈을 남매의 여름밤도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싸우는 두 남매를 중재하며 달래주는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노쇠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오히려 남매를 다독인다는 것은 아빠와 고모의 판단이 틀린 것일 수 있음을, 우리 시대의 어른됨이 정상성(사회생활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육체적, 정신적 기준) 바깥에서만 가능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현실’이 인간을 찌들게 하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SWIFF)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5일부터 9월 1일까지 이어집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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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포함】판은 깔았으나 재미는 그닥
#영화 #올드가드 #리뷰
액션, 판타지│미국│124분
감독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출연 샤를리즈 테론, 키키 레인오랜 시간을 거치며 세상의 어둠과 맞서운
불멸의 존재들이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또다시 힘을 합쳐 위기와 싸워나가는 이야기#리뷰문의
adonai0919@gmail.comTrack: Syn Cole - Gizmo [NCS Release]
Music provided by NoCopyrightSounds.
Watch: https://youtu.be/pZzSq8WfsKo
Free Download / Stream: http://ncs.io/Gizmo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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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연화 리마스터링 영화 후기 (2020_200)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화양연화 리마스터링” 후기입니다.
쿠키 영상은 없네요.. 영직남의 2020년 영화직관 200편 달성 이벤트에 참여해 주세요~#화양연화, #장만옥, #양조위, #왕가위, #아메리카노,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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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수퍼 소닉2> 메인 예고편
때가 왔다! 초특급 히어로 소닉과 친구들? 소닉&테일즈 VS 너클즈&로보트닉의 대결로 2배 업그레이드 된 어드벤처 4월 6일 극장에서 만나소-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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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이스 로드> 메인 예고편
캐나다 매니토바주,
다이아몬드 광산 폭발 사고로 갱도에 매립된 26명의 광부들.
이들을 구출할 유일한 방법은 제한시간 내
해빙에 접어든 아이스 로드를 횡단해 구조용 파이프를 운반하는 것뿐.
영하 50도에 달하는 극한의 추위와 눈 폭풍이 도사린 ‘하얀 지옥’ 위니펙 호수 위
불가능한 미션의 수행자로 선택된 전문 트러커 ‘마이크’는
대형 트레일러 3대와 구조팀을 이끌고
예측불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아이스 로드를 달리기 시작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단 30시간,
살기 위해 멈추지 말고 질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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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어서
미국에서 거주하는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영문과 교수가 된 지윤은 펨부르크 대학 영문과의 학과장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윤은 인종차별을 뚫고, 우아한 학과장 라이프를 누린 성공한 여성 같아 보이겠지만 펨부르크가 배출한 동양인 최초 여성 학과장은 영문학의 위기를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에 맞닥뜨린다.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트렌디해지는데, 펨부르크의 영문학 교수들은 영문학과를 살려보겠다고 방방 뛰어다니는 지윤에게 빅엿을 날려버린다. 게다가 영문학에 대한 인기가 하락하니, 학교의 윗대가리들은 지윤에게 끊임없이 압박을 넣어대는데, 아무래도 우아한 여성 학과장은 물건너 간 것 같다.
1. 꼰대에서 벗어났다고 광고해봤자 여전히 꼰대인
학교라는 집단은 교수와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은 일정 기간 잠시 머물고 가는 비둘기 같은 존재들이지만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 학교에서 최소 정년까지 근무한다. 최소 정년까지라는 말은 교수는 종신 교수로 재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생들은 매년 최신의 유행을 흡수하고, 종신 교수들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편견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수들처럼 하나의 전공만을 주구장창 파는 직종의 사람들, 특히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의 전공에 있어서 전문가가가 되신 분들은 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일 수는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 유연한 사람들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편견이 젊은 사람들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변화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고려, 여성에 대한 인식에 대한 변화가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표면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여전히 교수 집단 내부에서는 유색 인종, 여성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그저 표면적인 허례허식으로 학생들에게 학교가 한 단계 진보하고 있다고 마케팅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 마케팅의 정점에 서 있는 이가 바로 지윤이었다. 표면적인 학교 개혁의 주인공.
그렇게 지윤은 학교의 최초 여성 학과장이라는 허울좋은 상징을 등에 업었지만 고참 교수들은 그녀에게 협조해 주지 않는다. 그녀의 상사는 인기없는 수업은 폐강시키라고 하지만 그녀는 동료들의 수업을 폐강시킬 수 없어 전도유망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여자 교수와 합동 수업을 제안한다. 하지만 백인 노교수와 흑인 젊은 여강사의 조합은 시너지보다는 역효과를 발생시킨다. 몇 명 있지도 않은 수업을 진행하던 나이든 교수가 은근히 무시했던 교수의 인기를 목격했을 때의 그 허탈한 표정은 지식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이 정작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을 표현한 듯했다. 또한, 한 교수의 지식적 발전이 그의 의식적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던 포인트도 그 백인 남자 교수, 엘리엇이 교양있게 흑인 여자 교수, 야즈를 무시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흑인 여자가 영문학 교수가 되기까지 백인 남자 교수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이 이 남자 교수가 인격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밉상으로 보이게 만들었고, 지윤의 좋은 사람이자 좋은 학과장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무너뜨리는 주요한 사건이 된다.
결국, 지윤은 학교는 꼰대 집단이라는 학생들의 편견을 깨부시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개혁된 학교의 상징으로서 여성 학과장이 될 수 있었지만 개혁된 학교를 표방하기엔 그녀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개혁한답시고 모여봤자 꼰대는 자신들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저 꼰대로밖에 남을 수 없음을 지윤의 존재가 증명하고 있었다.
2. 놀랍지 않은, 어쩌면 당연했을 영문학의 위기
영문학은 백인들이 시작한 학문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학문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무리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젠더적 연구 등까지 저변을 확대해 오기는 했지만 과거의 죽은 자들의 역작을 연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학문은 현재성을 띌 수 없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학문의 발전은 다른 학문들에 비해 유달리 느리게 보이기는 한다. 우선, 완성된 문장보다는 단편적인 짤,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미지적 메타포에 익숙해져 있는 젊은 세대가 보기에 초서나 셰익스피어, 바이런 등의 영문학 시인, 소설가들은 구시대적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죽은 사람들의 역작을 평생토록 연구한 교수들과의 근본적으로 소통의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노교수들의 한 우물을 판 전문성이 젊은 세대에게는 휴지조각으로 평가받는다. 그 휴지조각은 결국 강의평가로 표현된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학문에 대한 진심, 학문에 대한 전문성이 전문성 따위는 1도 없는 Undergraduate들에게 평가받아야 하는지 화가 나고, 학생들은 현재성이 없는 학문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거침없이 쏟아낸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의 소통 오류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어느 쪽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현 세대와 소통을 거부하는 학문은 환영받을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부분이었다. 필자도 학생으로써 강의평가를 해보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 학생들에게 대학교의 강의는 순수하게 학문을 배워보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어떤 수업을 들어야 더 재미있고,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지 등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노교수님들의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과 상충될 수 밖에 없다. 필자도 영문학 비스무리한 전공이었기 때문에 꽤 SF소설 수업부터 셰익스피어까지 다양한 수업에 발담가보았지만 현재 가장 핫한 문학적 이슈와 관련해 대해서는 수업받아본 기억은 없다. 아무리 영문학이 꾸준히 발전해왔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트렌드에 익숙한 세대와 트렌드보다는 클래식을 중요시하는 교수들 간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영문학, 아니, 인문학 강단의 미래는 밝을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가 없다.
3. 애매하게 착한 사람은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지윤은 학과장으로서는 실패했다. 애매하게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착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상대편의 욕을 먹더라도 정확한 위치를 고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때가 있다. 지윤에게는 학과장으로 당선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정했어야 했다. 야즈를 위했다면, 엘리엇에게는 조금은 매정했어야 했고, 빌을 위해서도 더 매정한 모습으로 일관했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의 왕관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왕관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싶었기 때문에, 군중 심리에 휩싸인 학생들의 외면과 교수진들 모두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나쁜 사람보다 애매하게 착한 사람이 욕은 더 먹는 것이다. 그러니, 지윤도 억울할 수밖에. 지윤은 오히려 학과장직에서 내려온 현재가 가장 그녀답다. 그러니 달리 생각한다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자리 때문에 선천적인 성격까지 바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안될 사람이기에 달리 생각한다면, 지윤의 우당탕탕 학과장 도전기는 오히려 그녀의 내재된 선함이 학과장이라는 자리의 압박감 때문에 변화할 만큼 얄팍한 선함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녀는 학과장이라는 자리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착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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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도를 희생해 시리즈의 초석을 두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자원을 개발하려던 RDA의 공격을 물리친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와 '네이티리(조 샐다나)'. 그들은 '네테이얌(제이미 플래터스)', '로아크(브리튼 달튼)', '투크티리(트리니티 블리스)'를 낳고 '그레이스 박사(시고니 위버)'의 딸 '키리(시고니 위버)'와 인간 아이 '스파이더(잭 챔피언)'를 입양해 행복한 가족을 꾸려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이크는 밤하늘에 낯선 불빛을 발견하고 RDA와 인간들이 판도라에 귀환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가진 무기와 자원을 총동원해 인간들을 공격하나, 도리어 아바타로 되살아난 '쿼리치 (스티븐 랭)' 대령의 기습에 가족을 잃을 뻔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위기를 피하고자 '로날(케이트 윈슬레)'과 '토노와리(클리프 커티스)'의 도움을 받아 온 가족을 데리고 바닷가에 사는 멧카이나 부족 사이로 피신한다. 그러나 포기를 모른 채 복수심에 불타는 쿼리치의 추격은 제이크의 가족에 새로운 시련을 선사한다.
<아바타: 물의 길>은 올해 개봉한 작품 중 가장 많은 기대를 받은 작품이었다. 이유는 많았다. 역대 월드와이드 흥행 1위 영화이자 3D 혁명을 일으킨 <아바타>의 속편이라는 점, 개봉일이 숱하게 연기되어 13년 만에 공개된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라는 점, 제임스 카메론 감독 본인이 가장 비경제적인 영화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자된 작품이라는 점 빼놓을 수 없다. 전편의 주역인 샘 워딩턴과 조 샐다나는 물론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고니 위버와 스티븐 랭이 복귀했고, 케이트 윈슬렛 등이 새로이 합류한 배우들의 면면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아바타: 물의 길>은 감독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에이리언 2>와 <터미네이터 2>로 속편의 대가임을 증명한 바 있는 제임스 카메론도 이번에는 자기 장기를 온전히 발휘하는 데 실패했다. 13년간의 준비 기간 때문이다. 카메론 감독은 5편까지 이어질 시리즈를 모두 계획하기 위해 13년이 필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각본을 모두 완성하고, 모든 캐릭터와 생물을 미리 만들며, 제작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을 사전에 구축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이번 속편이 큰 그림의 일부라는 의미이며, 바로 이 대목이 양날의 검이다. 앞으로의 로드맵이 확실하다 보니 <아바타: 물의 길>이 암시하는 향후 시리즈의 내용이나 전편으로부터 더욱 발전한 주제 의식과 메시지는 화려한 영상미 못지않게 흥미롭다. 반면에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시리즈의 초석을 놓는 데 열중한 나머지 무엇 하나 온전히 완결 짓지 못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캐릭터 '로아크' & '키리'가 암시하는 시리즈의 길
우선 <아바타: 물의 길>은 새로운 캐릭터들을 차례대로 소개하면서 앞으로 <아바타> 시리즈가 나아갈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주력한다. 이는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로맨스가 가족 드라마로 확장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인물을 자연스럽게 극의 흐름에 끼워 넣고 동시에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 제격이므로. 실제로 영화의 내용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양육 방향을 둔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돌, 형제자매 간의 다툼 등으로 가득하다. 특히 둘째 아들 로아크과 양녀 키리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이들의 서사에 담긴 비유와 클리셰는 시리즈의 지향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일단 로아크는 신약 성경 속 '돌아온 탕자'의 판도라 버전으로 보인다. 로아크는 나비족의 영웅이자 위대한 전사인 아버지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들끓지만, 동시에 아바타의 특징이 강한 외모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 아버지처럼 강한 전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완벽한 아들이자 형인 네테이얌처럼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공존한다. 그 때문에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 몫만큼의 유산을 받아 집을 나선 '탕자'가 된다. 그는 만용을 부리다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해 가족과 동료들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좀처럼 가족들과 융화되지 못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자신만의 여정을 겪는다.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한 단계 성숙해진다. 자신처럼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툴쿤 파야칸을 만나 안정을 찾고, 형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아버지를 위험으로부터 구해내면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다'. 결국 <아바타: 물의 길>은 로아크가 물속은 물론 인생의 길까지 찾는 이야기인 셈이다.
미스터리로 가득한 신비한 캐릭터 키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아바타에서 태어난 아기이자, 그 누구도 아버지의 정체를 모르는 존재인 그녀는 등장부터 범상치 않다. 유달리 에이와와 강하게 교감할 뿐만 아니라, 따로 훈련하지 않고도 물속에서 능숙하게 잠수할 줄 안다. 또 온갖 동식물과 소통하고 그들을 뜻대로 조종하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는 그녀가 마치 판도라 버전의 예수와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인간과 나비족의 대립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구세주 메시아로 거듭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 본래 '아바타(avatar)'라는 단어가 지상에 내려온 신의 분신을 의미하는 만큼, 키리가 에이와의 아바타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로아크와 키리의 서사가 중심이 될 <아바타> 시리즈는 제임스 카메론이 써 내려가는 신약 성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시점 알려진 시리즈의 4편과 5편의 부제가 각각 <툴쿤의 기수(The Tulkun Rider)>와 <에이와를 찾아서(The Quest for Eywa)>이기에 더욱 그렇다.
전편으로부터 진일보한 생태학적 메시지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개발에 반대하며 자연을 보호하자는 메시지도 더욱 깊어졌다. <아바타>는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판도라의 모든 생명체는 에이와의 자식으로서 동등한 존재다. 따라서 그들을 소유하고 이용하는 대신 그들과 소통하며 허락을 구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는 제이크가 이크란을 탈 때 그들과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했던 이유였고, 또 사냥할 때마다 "당신을 봅니다(I see you)"라고 말하며 명복을 빌었던 이유였다. 판도라의 모든 나무가 마치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인간처럼 의사소통할 줄 안다는 언급도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설정이었다. 다만 이러한 묘사에도 한계는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설정과 설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판도라의 신기한 생태계와 삶의 방식을 관찰할 뿐, 다른 생명과 존재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는 없었다.
<아바타: 물의 길>은 한발 더 나아간다. 지구의 고래를 닮은 생명체, 툴쿤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작중 툴쿤은 멧카이나 부족의 형제자매, 외관만 다른 부족의 일원으로 여겨진다. 멧카이나 부족과 툴쿤들이 재회하는 장면은 오랜 기간 보지 못했던 가족이나 친척들이 추석이나 설날에 만나 수다 꽃을 피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히 단지 멧카이나 부족이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툴쿤들도 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영화는 로아크와 파야칸이 처음 만난 순간부터 툴쿤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파야칸의 시점에서 로아크가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하고, 도움을 주고, 친분을 맺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 결과 동등한 두 주체가 진정으로 우정을 쌓아나가는 과정에는 설득력이 더해진다. 또 인간과 멧카이나 부족이 결국 전투를 벌이는 결정적인 계기도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체험할 수 있는 주제 의식
즉, 전편이 인간도 자연계의 구성원 중 하나로서 선순환하는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속편은 인간 이외의 주체를 강조하여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정동(affect)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자연과 물질도 인간처럼 세계의 변화에 반응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이며, 인간처럼 의지와 목적을 가진 채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들도 툴쿤 사냥선을 급습하는 파야칸처럼 인간 행위의 방향성을 바꿀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능동적인 반응에 따라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특히 영화 초반부에 RDA의 목적이 망가진 지구를 대신해 판도라를 개척하고 이주를 도모하는 것으로 드러난 만큼, 이는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자연과의 공존을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층 깊어진 주제 의식은 <아바타: 물의 길>이 선보이는 화려한 영상미가 빛을 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이 작품의 CG 효과는 전편 수준의 충격적인 영상미를 재현하지 못한다. 3D 효과도 익숙해졌고, 판도라 행성의 경관도 한 차례 맛을 봤기에 13년 전만큼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판도라를 체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마치 지구의 바다를 촬영하듯이 다른 세상에 있을법한 바다의 상세한 모습을 그래픽과 상상력으로 표현한 결과, 주인공들과 함께 판도라의 바다를 진짜로 경험하고 경이로움을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해양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본의 고래잡이를 비판하는 듯 보이는 툴쿤 사냥 시퀀스도 마냥 교조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관객들은 해당 장면에 심정적으로 몰입하고, 영화의 메시지도 자연히 받아들일 수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아닌 시리즈의 부속품에 가까워진 결과물
그러나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아바타: 물의 길>은 전편에 비하기 어려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전반적인 스토리의 구성과 흐름, 캐릭터의 구축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전편과 달리 몰입도가 떨어진다. 1편은 인간과 아바타(나비족) 중 한 정체성을 골라야 하는 제이크의 고뇌를 그려냈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내적 갈등은 누구나 자신의 성장 경험과 사회적 위치를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반면에 이번 작품은 내적 갈등을 사회적인 이야기로 다양하게 확장한다. 일례로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아이들은 혼혈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심적으로도 괴로워하고 멧카니아 부족의 아이들과도 충돌한다. 이는 현실 속 인종 차별이나 다문화 청소년들이 겪는 집단 따돌림 등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이는 수용자의 경험과 태도에 따라 공감의 수준이 달라질 수 있는 화제이고, 결국 그 때문에 직관적인 몰입도도 덜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수많은 캐릭터의 활용법도 최선은 아닌 듯 보인다. 다음 세 편을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보니 캐릭터들의 이야기도 간신히 시작될 뿐 진행되는 내용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제이크의 서사만 해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작업에 머무르고 있다. 줄곧 인간을 피해 도망치던 그가 인간과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만으로 3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스파이더의 활용도 애매하다. 인간과 나비 양쪽을 오가면서 비극적인 개인사와 가족사를 지닌 인물인 만큼 그는 분명히 향후 시리즈에서 중대한 역할을 맡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정작 이 중요한 캐릭터가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는다. 그는 나비족의 습관과 정서를 이해하고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에서, 말 몇 마디에 쿼리치의 제이크 추적을 돕는 등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캐릭터로 변해 버린다. 이렇게 일관성 없이 플롯의 필요에 따라 캐릭터성이 달라지다 보니 그는 자연히 극의 흐름에 녹아들지 못한다.
갈등의 규모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얼핏 보기에는 전편보다 더욱 커진 전쟁을 그려내는 듯하다. RDA가 아예 실거주 목적으로 판도라 행성에 귀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다음 편을 위한 복선에 불과하다. 정작 종족의 생존을 두고 벌어지는 인간과 나비족의 결전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제이크, 네이티리, 그리고 쿼리치 대령 간의 오래된 악연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쿼리치 대령은 개인적인 복수심을 이유로 제이크와 네이티리를 추격하며, 그저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제이크와 네이티리 역시 아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쿼리치의 도발에 응수하기로 한다. 그 결과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전편에 비해 다소 맥 빠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액션의 스케일이나 전투 시퀀스의 규모도 줄어들었고, 싸움에 임하는 비장함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바타: 물의 길>을 보다 보면 생각나는 두 작품이 있다. 바로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와 <호빗: 뜻밖의 여정>다. <아바타>를 일종의 프롤로그였다고 친다면, <아바타: 물의 길>의 목표는 <반지 원정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시리즈의 세계관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거대한 전쟁에 앞서 선악을 대표하는 인물들 간의 추격전을 그려낸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면 각각의 인물이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하고 편을 정한 후 본격적인 전쟁에 나서기로 하는 흐름도 유사하다.
그러나 목표와 달리 <아바타: 물의 길>은 정작 <호빗> 1편을 보는 듯한 인상을 남기고 만다. 시리즈의 진행에 필요한 복선을 깔아 두는 데 지나치게 열중할 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는 않으며, 많은 캐릭터가 새롭게 등장했지만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인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유사한 문제점을 공유하는 까닭이다. 내용의 부실함을 전편에 비해 화려해진 시각 효과로 벌충하는 것 역시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아바타: 물의 길>은 장단점이 명확히 갈리는 가운데 향후 시리즈의 향방에 따라 재평가의 여지를 남겨두는 작품인 셈이다. 대서사시를 위한 완벽한 가교이거나, 시리즈의 진행을 위해 소비되어 버린 평범한 속편이거나. 2년 내지는 3년 안에 나올 것이라 공언한 <아바타 3>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재평가는 속편들의 몫으로 남겨둔, 흠잡을 데 없는 시리즈의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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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빼앗긴 레즈비언은 기억과 몸짓으로 말한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리뷰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은 가장 손쉬운 자기 선언의 수단이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30대입니다." "나는 게이입니다." 등의 말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정보를 상대에게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전부는 아니다. 말이 없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릴 수 있다. 때로는 말보다 더 선명한 방식으로. 영화 〈우리, 둘〉(원제: 'Two of Us')은 '말할 수 없는' 레즈비언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선포하는 일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인 니나와 마도다. 둘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마주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은퇴한 둘은 로마로 이주해 한 집에 같이 살 계획을 꾸린다. 그런데 니나와 마도가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마도가 자녀들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고 애인인 니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나는 '말하지 못하는' 마도를 답답해한다.
둘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 마도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관계에 기묘한 변화가 생긴다. 이제 '말하지 못하는' 건 니나다. 니나는 매일 마도를 보고 싶고, 항상 마도의 곁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마도의 간병인은 그런 니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니나는 간병인에게 자신이 마도의 레즈비언 애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니나는 자신이 마도의 이웃, 친구로만 여겨지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영화의 절정, 어머니가 레즈비언임을 알게 된 마도의 딸 앤은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마도를 니나와 분리하려고만 한다. 그럼에도 마도가 계속 니나를 찾자 '제발 자신과 대화를 하자'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마도는 이중적 의미에서 말할 수 없다. 뇌졸중에 걸려 언어능력을 잃은 게 첫 번째 이유고, 이성애규범적 세계가 레즈비언의 발화를 허용하지 않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앤이 애타게 소리쳐봤자, 대답은 오지 않는다. 엄마와의 대화를 막는 건 이성애중심적 체제와 그에 안주하는 앤의 편견이지만, 앤은 끝내 무엇이 자신과 엄마의 대화를 막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말'이 중요한 소재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두 여자아이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한 명이 사라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술래인 아이는 사라진 친구를 애타게 부르지만, 그 목소리는 까마귀 울음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애타게 부르짖어도 들리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는 자신들이 레즈비언 커플임을 말하지 못하는 니나와 마도를 닮았다.
하지만 말이 없다고 니나와 마도가, 그들의 관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말이 아니어도 그들의 존재와 사랑을 증명할 수단은 있다. 말의 강제적 부재라는 상황에서, 니나와 마도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은 기억과 몸짓이다.
먼저 기억의 문제를 보자. 앤이 아무리 부정해도, 마도의 옛 앨범에 담긴 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니나다. 마도의 모든 걸 제일 잘 아는 사람도 니나다. 오랜 기간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밀한 존재였던 둘은 동성애 친밀성을 배제한 가족제도와 규범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경험들을 쌓아왔다. 니나와 함께 쌓아온 내밀한 경험은 '말을 잃은' 마도에게 가장 분명한 언어가 되어 둘의 과거를 소환하고, 현재를 구성하며, 미래를 꿈꾸게 한다. 니나와 마도는 오랫동안 함께 쌓아온 기억으로 소통한다. 이들의 소통이 앤을 비롯한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이다.
두 번째는 몸짓이다. 영화의 마지막, 니나는 요양 병원에 있는 마도를 몰래 자기 집으로 빼돌린 후 함께 블루스를 춘다. 밖에서는 앤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마도를 돌려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마도와 니나는 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듣지 않는 건' 앤이 아닌 마도와 니나다. 세계가 그들을 거부하자,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말은 들리지만, 사랑에 손가락질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 세계를. 서툴고 경직된 그들의 블루스가 무엇보다 단단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렇게 말을 빼앗긴 늙은 레즈비언 커플은 기억과 몸짓으로 자신들을 증언한다. 〈우리, 둘〉은 '말'의 은유를 통해 존재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다루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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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왕이 걸어온 반듯한 왕도
디즈니 르네상스를 이끈 명작 '라이온 킹'이 탄생 3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19년에 선보였던 실사 영화에 이어 새로운 시리즈를 공개했다.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의 이야기를 담은 '무파사: 라이온 킹'(이하 '무파사')을 내놓았다.
실사 영화 '라이온 킹'처럼 '무파사' 또한 원작 애니메이션과는 일부 다른 설정을 갖췄다. 프라이드 랜드의 왕인 무파사가 알고 보니 왕의 혈통이 아닌 점, 친형제였던 무파사와 스카는 의붓형제로 변경됐다. "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거듭난다"는 메시지에 맞춰 무파사의 서사를 극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바꾼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심바(도널드 글로버)와 날라(비욘세)의 딸 키아라(블루 아이비카터)가 동생을 출산하기 위해 떠난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며 라피키(존 카니)에게서 옛날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이는 무파사에서 심바로, 심바에서 키이라로 유산(왕의 자질)을 물려주는 걸 암시하며 3대를 하나로 연결한다.
엄마 아빠와 함께 전설의 낙원 밀레레를 찾아 이동하던 무파사(에런 피에르/브레일린 랭킨스)는 대홍수를 만나 다른 곳으로 떠밀려 왔고, 왕의 혈통이자 예정된 후계자 타카(스카, 켈빈 해리슨 주니어/테오 소몰루)를 만나면서 의형제처럼 지낸다. 어느 날 '외부자들' 백사자 무리의 습격 때문에 무파사-타카는 생존을 위해 자신들이 속했던 무리를 떠나 밀레레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암사자 사라비(티파니 분)와 개코원숭이 라피키를 만난다.
'무파사'의 스토리 구조는 기존 '라이온 킹'과 비슷하나, 전작과 달리 용기와 지혜로 왕이 되는 무파사의 모습을 그리며 현대적으로 표현한다. 이때 '라이온 킹'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 '생명의 순환'을 부각하고자 새로운 빌런인 키로스와 외부자들의 폭력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초원의 밑바닥부터 모든 종이 '생명의 순환' 속에 놓인 동일한 존재라는 걸 모든 동물들에게 전파하고 독려하는 무파사의 리더십을 그린다.
이 영화의 주체가 무파사-타카 두 사자인 만큼, 어렸을 때 친형제처럼 지냈던 이들이 어쩌다 파국으로 치닫게 됐는지 관계성 변화로 영화의 살을 붙인다. 특히 '라이온 킹' 빌런 스카의 타카 시절은 흥미로웠다. 새로운 형제가 생겨 행복해했던 타카는 위기를 맞이하면서 고뇌하다가 어느 순간에 질투심을 느껴 배신하기도 한다. 비겁하고 겁이 많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우정 앞에 용기 내는 순간도 있다. 그에 반해 무파사는 심바와 다르게 완성형 캐릭터로 구축되어 있다 보니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실사 영화 '라이온 킹'에서 진일보한 VFX(시각특수효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스케일과 영상미를 자랑했으나, 동물을 의인화하는 과정에서 대사 싱크로율이 맞지 않는 부분이 보이고 이 때문에 감정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무파사'는 전작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했다. 드넓은 초원부터 폭포, 설경까지 아프리카의 장엄한 대자연부터 다채로운 감정 표현하는 동물 묘사, 디테일한 동물 털 표현까지 리얼하다. 흡사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기술력은 확실히 진화했으나, 무파사, 타카, 사라비가 함께 있을 때에는 조금 헷갈린다. 캐릭터별 특징을 다르게 표현하긴 했지만, 한 앵글에 잡혀있을 때 구분하기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그 외 완벽한 동물 묘사에 비해 물을 표현한 CG의 완성도는 옥에 티다. 물론 이 부분들은 영화를 감상하는 데 크게 불편함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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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색다른 시선으로 그려낸 영화 9선
사랑을 진지하게 탐구한 영화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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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에게 완벽한 짝을 찾아야만 한다. 홀로 남겨진 이들은 45일간 커플 메이킹 호텔에 머무르며, 완벽한 커플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을 얻지 못한 사람은 동물로 변해 영원히 숲 속에 버려지게 된다. 근시란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고 호텔로 오게 된 데이비드는 새로운 짝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숲으로 도망친다.
숲에는 커플을 거부하고 혼자만의 삶을 선택한 솔로들이 모여 살고 있다. 솔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그들의 절대규칙은 바로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 것! 아이러니하게도 데이비드는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 그곳에서 자신과 같이 근시를 가진 완벽한 짝을 만나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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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어도 좋아해줄래?” 12살 소년, 영원한 사랑을 만나다.. 눈 내리던 밤, 외로운 소년 오스칼은 옆집에 이사 온 창백한 얼굴의 소녀 이엘리를 만난다. 곧 소년의 가슴 속으로 들어온 이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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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 많은 우체국 직원인 도메크는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연상의 독신녀 마그다를 망원경으로 몰래 훔쳐보며 사랑을 느낀다. 마그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도메크는 그녀의 아파트에 우유를 배달하고, 가짜 송금표를 만들어 그녀를 우체국으로 오게 하고, 마그다의 편지를 몰래 훔치고, 마그다가 사랑을 나눌 때 가스 고장 신고를 하는 등, 항상 그녀의 곁을 맴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보낸 통지서를 가지고 송금을 받으로 온 마그다가 오히려 송금을 조작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우체국을 나서는 걸보고 통지서를 보낸 것도 자신이며, 오랫동안 그녀를 훔쳐 봐왔다고 털어놓는다. 도메크는 용기를 내서 마그다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밤이 되자 두 사람은 마그다의 집으로 향한다. 마그다는 웃옷만 걸친 채 도메크를 유혹하고, 흥분한 도메크에게 '그게 바로 사랑의 전부'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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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도심 한복판, 부고 기사를 쓰고 있지만 소설가가 꿈인 ‘댄’은 출근길에 눈이 마주친 뉴욕출신 스트립댄서 ‘앨리스’(나탈리 포트만)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삶을 소재로 글을 써서 드디어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 ‘댄’은 책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사진작가 ‘안나’에게 ‘앨리스’와는 또 다른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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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5년차인 프리랜서 작가 마고는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남편 루와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다. 어느 날, 일로 떠난 여행길에서 그녀는 우연히 대니얼을 알게 되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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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약혼녀와 이별한 뒤 자살까지 시도한 '레너드' 앞에 그를 지켜주고 싶다고 말하는 다정한 성격의 '산드라'와 이웃인 치명적인 미모의 소유자 '미쉘'이 나타난다. 그리고 '미쉘'에게 이미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점점 그녀에게 빠져드는 '레너드'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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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을 입증하기 위해 오랫동안 눈의 비밀을 추적하고 연구하는 과학자 이안.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소피의 눈에 묘한 끌림을 느끼고, 두 사람은 이내 다시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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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릴러 미스터리 장르의 영화 추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의 큐레이션 주제는 바로 '스릴러와 미스터리 장르의' 영화입니다.
이 게시물 혹은 씨네픽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동일 내용의 콘텐츠 게시물에
자신이 보고싶은 영화에 대해 적어주신다면 다음 콘텐츠를 올릴 때 여러분들의 댓글을 바탕으로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작해볼까요?٩( ᐛ )و
올빼미
ⓒ 네이버 영화
synopsis
밤에만 앞이 보이는 맹인 침술사가 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벌이는
하룻밤의 사투를 그린 스릴러 영화.
cine pick!
오늘 오전 10시 기준으로 누적 관객 수 2,000,395명을 기록하며 200만 관객을 돌파한
<올빼미>는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잘 버무려 호평을 받은 영화이다.
런
ⓒ 네이버 영화
synopsis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었던 클로이는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사랑으로 돌봐주는
엄마 다이앤 덕에 긍정적으로 지내지만, 어느 날 장바구니에서 다이앤의 이름이 새겨진 약통을
발견한다.
cine pick!
개봉 후 30일이 넘도록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를 유지하며 주목을 받은 <런>은 각종 해외
매체에서 호평이 쏟아지며 국내 관객의 기대감을 높이기도 했다. 다양한 장치를 영화 속에 녹여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마녀
ⓒ 네이버 영화
synopsis
시설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은 의문의 사고, 그날 밤 홀로 탈출한 후 모든 기억을 잃고 살아온
고등학생 자윤 앞에 의문의 인물이 나타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액션 영화.
cine pick!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스피디하고 파괴력 있는 액션 스타일을 새롭게 구축하여 관객들의
이목을 끈 영화이다.
실종
ⓒ 네이버 영화
synopsis
연쇄살인마를 목격한 아빠가 갑자기 사라진 후, 일터에서 아빠의 이름을 쓰는 연쇄살인마를 본
딸이 진실을 추적하며 벌어지는 스릴러.
cine pick!
강렬한 스토리 속 빈틈없이 설계된 사건으로 최상의 몰입도를 선사한 영화 <실종>은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며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도 한다.
겟 아웃
ⓒ 네이버 영화
synopsis
주말을 맞아 여자친구 로즈의 부모님 집을 방문한 크리스. 가족들의 과한 친절에 부담을 느끼지만
애써 외면하던 그는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안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다.
cine pick!
공개 6일 만에 메인 예고편 조회수 1,000만 뷰를 돌파한 <겟 아웃>은 북미 개봉 직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다. 제작비의 42배 이상 흥행 수익을 달성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이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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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포함】판은 깔았으나 재미는 그닥
#영화 #올드가드 #리뷰
액션, 판타지│미국│124분
감독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출연 샤를리즈 테론, 키키 레인오랜 시간을 거치며 세상의 어둠과 맞서운
불멸의 존재들이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또다시 힘을 합쳐 위기와 싸워나가는 이야기#리뷰문의
adonai0919@gmail.comTrack: Syn Cole - Gizmo [NCS Release]
Music provided by NoCopyrightSounds.
Watch: https://youtu.be/pZzSq8WfsKo
Free Download / Stream: http://ncs.io/Gizmo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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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연화 리마스터링 영화 후기 (2020_200)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화양연화 리마스터링” 후기입니다.
쿠키 영상은 없네요.. 영직남의 2020년 영화직관 200편 달성 이벤트에 참여해 주세요~#화양연화, #장만옥, #양조위, #왕가위, #아메리카노,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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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수퍼 소닉2> 메인 예고편
때가 왔다! 초특급 히어로 소닉과 친구들? 소닉&테일즈 VS 너클즈&로보트닉의 대결로 2배 업그레이드 된 어드벤처 4월 6일 극장에서 만나소-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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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이스 로드> 메인 예고편
캐나다 매니토바주,
다이아몬드 광산 폭발 사고로 갱도에 매립된 26명의 광부들.
이들을 구출할 유일한 방법은 제한시간 내
해빙에 접어든 아이스 로드를 횡단해 구조용 파이프를 운반하는 것뿐.
영하 50도에 달하는 극한의 추위와 눈 폭풍이 도사린 ‘하얀 지옥’ 위니펙 호수 위
불가능한 미션의 수행자로 선택된 전문 트러커 ‘마이크’는
대형 트레일러 3대와 구조팀을 이끌고
예측불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아이스 로드를 달리기 시작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단 30시간,
살기 위해 멈추지 말고 질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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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어서
미국에서 거주하는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영문과 교수가 된 지윤은 펨부르크 대학 영문과의 학과장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윤은 인종차별을 뚫고, 우아한 학과장 라이프를 누린 성공한 여성 같아 보이겠지만 펨부르크가 배출한 동양인 최초 여성 학과장은 영문학의 위기를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에 맞닥뜨린다.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트렌디해지는데, 펨부르크의 영문학 교수들은 영문학과를 살려보겠다고 방방 뛰어다니는 지윤에게 빅엿을 날려버린다. 게다가 영문학에 대한 인기가 하락하니, 학교의 윗대가리들은 지윤에게 끊임없이 압박을 넣어대는데, 아무래도 우아한 여성 학과장은 물건너 간 것 같다.
1. 꼰대에서 벗어났다고 광고해봤자 여전히 꼰대인
학교라는 집단은 교수와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은 일정 기간 잠시 머물고 가는 비둘기 같은 존재들이지만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 학교에서 최소 정년까지 근무한다. 최소 정년까지라는 말은 교수는 종신 교수로 재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생들은 매년 최신의 유행을 흡수하고, 종신 교수들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편견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수들처럼 하나의 전공만을 주구장창 파는 직종의 사람들, 특히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의 전공에 있어서 전문가가가 되신 분들은 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일 수는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 유연한 사람들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편견이 젊은 사람들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변화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고려, 여성에 대한 인식에 대한 변화가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표면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여전히 교수 집단 내부에서는 유색 인종, 여성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그저 표면적인 허례허식으로 학생들에게 학교가 한 단계 진보하고 있다고 마케팅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 마케팅의 정점에 서 있는 이가 바로 지윤이었다. 표면적인 학교 개혁의 주인공.
그렇게 지윤은 학교의 최초 여성 학과장이라는 허울좋은 상징을 등에 업었지만 고참 교수들은 그녀에게 협조해 주지 않는다. 그녀의 상사는 인기없는 수업은 폐강시키라고 하지만 그녀는 동료들의 수업을 폐강시킬 수 없어 전도유망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여자 교수와 합동 수업을 제안한다. 하지만 백인 노교수와 흑인 젊은 여강사의 조합은 시너지보다는 역효과를 발생시킨다. 몇 명 있지도 않은 수업을 진행하던 나이든 교수가 은근히 무시했던 교수의 인기를 목격했을 때의 그 허탈한 표정은 지식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이 정작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을 표현한 듯했다. 또한, 한 교수의 지식적 발전이 그의 의식적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던 포인트도 그 백인 남자 교수, 엘리엇이 교양있게 흑인 여자 교수, 야즈를 무시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흑인 여자가 영문학 교수가 되기까지 백인 남자 교수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이 이 남자 교수가 인격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밉상으로 보이게 만들었고, 지윤의 좋은 사람이자 좋은 학과장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무너뜨리는 주요한 사건이 된다.
결국, 지윤은 학교는 꼰대 집단이라는 학생들의 편견을 깨부시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개혁된 학교의 상징으로서 여성 학과장이 될 수 있었지만 개혁된 학교를 표방하기엔 그녀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개혁한답시고 모여봤자 꼰대는 자신들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저 꼰대로밖에 남을 수 없음을 지윤의 존재가 증명하고 있었다.
2. 놀랍지 않은, 어쩌면 당연했을 영문학의 위기
영문학은 백인들이 시작한 학문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학문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무리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젠더적 연구 등까지 저변을 확대해 오기는 했지만 과거의 죽은 자들의 역작을 연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학문은 현재성을 띌 수 없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학문의 발전은 다른 학문들에 비해 유달리 느리게 보이기는 한다. 우선, 완성된 문장보다는 단편적인 짤,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미지적 메타포에 익숙해져 있는 젊은 세대가 보기에 초서나 셰익스피어, 바이런 등의 영문학 시인, 소설가들은 구시대적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죽은 사람들의 역작을 평생토록 연구한 교수들과의 근본적으로 소통의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노교수들의 한 우물을 판 전문성이 젊은 세대에게는 휴지조각으로 평가받는다. 그 휴지조각은 결국 강의평가로 표현된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학문에 대한 진심, 학문에 대한 전문성이 전문성 따위는 1도 없는 Undergraduate들에게 평가받아야 하는지 화가 나고, 학생들은 현재성이 없는 학문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거침없이 쏟아낸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의 소통 오류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어느 쪽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현 세대와 소통을 거부하는 학문은 환영받을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부분이었다. 필자도 학생으로써 강의평가를 해보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 학생들에게 대학교의 강의는 순수하게 학문을 배워보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어떤 수업을 들어야 더 재미있고,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지 등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노교수님들의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과 상충될 수 밖에 없다. 필자도 영문학 비스무리한 전공이었기 때문에 꽤 SF소설 수업부터 셰익스피어까지 다양한 수업에 발담가보았지만 현재 가장 핫한 문학적 이슈와 관련해 대해서는 수업받아본 기억은 없다. 아무리 영문학이 꾸준히 발전해왔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트렌드에 익숙한 세대와 트렌드보다는 클래식을 중요시하는 교수들 간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영문학, 아니, 인문학 강단의 미래는 밝을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가 없다.
3. 애매하게 착한 사람은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지윤은 학과장으로서는 실패했다. 애매하게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착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상대편의 욕을 먹더라도 정확한 위치를 고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때가 있다. 지윤에게는 학과장으로 당선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정했어야 했다. 야즈를 위했다면, 엘리엇에게는 조금은 매정했어야 했고, 빌을 위해서도 더 매정한 모습으로 일관했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의 왕관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왕관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싶었기 때문에, 군중 심리에 휩싸인 학생들의 외면과 교수진들 모두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나쁜 사람보다 애매하게 착한 사람이 욕은 더 먹는 것이다. 그러니, 지윤도 억울할 수밖에. 지윤은 오히려 학과장직에서 내려온 현재가 가장 그녀답다. 그러니 달리 생각한다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자리 때문에 선천적인 성격까지 바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안될 사람이기에 달리 생각한다면, 지윤의 우당탕탕 학과장 도전기는 오히려 그녀의 내재된 선함이 학과장이라는 자리의 압박감 때문에 변화할 만큼 얄팍한 선함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녀는 학과장이라는 자리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착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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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도를 희생해 시리즈의 초석을 두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자원을 개발하려던 RDA의 공격을 물리친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와 '네이티리(조 샐다나)'. 그들은 '네테이얌(제이미 플래터스)', '로아크(브리튼 달튼)', '투크티리(트리니티 블리스)'를 낳고 '그레이스 박사(시고니 위버)'의 딸 '키리(시고니 위버)'와 인간 아이 '스파이더(잭 챔피언)'를 입양해 행복한 가족을 꾸려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이크는 밤하늘에 낯선 불빛을 발견하고 RDA와 인간들이 판도라에 귀환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가진 무기와 자원을 총동원해 인간들을 공격하나, 도리어 아바타로 되살아난 '쿼리치 (스티븐 랭)' 대령의 기습에 가족을 잃을 뻔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위기를 피하고자 '로날(케이트 윈슬레)'과 '토노와리(클리프 커티스)'의 도움을 받아 온 가족을 데리고 바닷가에 사는 멧카이나 부족 사이로 피신한다. 그러나 포기를 모른 채 복수심에 불타는 쿼리치의 추격은 제이크의 가족에 새로운 시련을 선사한다.
<아바타: 물의 길>은 올해 개봉한 작품 중 가장 많은 기대를 받은 작품이었다. 이유는 많았다. 역대 월드와이드 흥행 1위 영화이자 3D 혁명을 일으킨 <아바타>의 속편이라는 점, 개봉일이 숱하게 연기되어 13년 만에 공개된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라는 점, 제임스 카메론 감독 본인이 가장 비경제적인 영화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자된 작품이라는 점 빼놓을 수 없다. 전편의 주역인 샘 워딩턴과 조 샐다나는 물론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고니 위버와 스티븐 랭이 복귀했고, 케이트 윈슬렛 등이 새로이 합류한 배우들의 면면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아바타: 물의 길>은 감독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에이리언 2>와 <터미네이터 2>로 속편의 대가임을 증명한 바 있는 제임스 카메론도 이번에는 자기 장기를 온전히 발휘하는 데 실패했다. 13년간의 준비 기간 때문이다. 카메론 감독은 5편까지 이어질 시리즈를 모두 계획하기 위해 13년이 필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각본을 모두 완성하고, 모든 캐릭터와 생물을 미리 만들며, 제작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을 사전에 구축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이번 속편이 큰 그림의 일부라는 의미이며, 바로 이 대목이 양날의 검이다. 앞으로의 로드맵이 확실하다 보니 <아바타: 물의 길>이 암시하는 향후 시리즈의 내용이나 전편으로부터 더욱 발전한 주제 의식과 메시지는 화려한 영상미 못지않게 흥미롭다. 반면에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시리즈의 초석을 놓는 데 열중한 나머지 무엇 하나 온전히 완결 짓지 못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캐릭터 '로아크' & '키리'가 암시하는 시리즈의 길
우선 <아바타: 물의 길>은 새로운 캐릭터들을 차례대로 소개하면서 앞으로 <아바타> 시리즈가 나아갈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주력한다. 이는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로맨스가 가족 드라마로 확장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인물을 자연스럽게 극의 흐름에 끼워 넣고 동시에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 제격이므로. 실제로 영화의 내용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양육 방향을 둔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돌, 형제자매 간의 다툼 등으로 가득하다. 특히 둘째 아들 로아크과 양녀 키리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이들의 서사에 담긴 비유와 클리셰는 시리즈의 지향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일단 로아크는 신약 성경 속 '돌아온 탕자'의 판도라 버전으로 보인다. 로아크는 나비족의 영웅이자 위대한 전사인 아버지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들끓지만, 동시에 아바타의 특징이 강한 외모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 아버지처럼 강한 전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완벽한 아들이자 형인 네테이얌처럼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공존한다. 그 때문에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 몫만큼의 유산을 받아 집을 나선 '탕자'가 된다. 그는 만용을 부리다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해 가족과 동료들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좀처럼 가족들과 융화되지 못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자신만의 여정을 겪는다.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한 단계 성숙해진다. 자신처럼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툴쿤 파야칸을 만나 안정을 찾고, 형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아버지를 위험으로부터 구해내면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다'. 결국 <아바타: 물의 길>은 로아크가 물속은 물론 인생의 길까지 찾는 이야기인 셈이다.
미스터리로 가득한 신비한 캐릭터 키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아바타에서 태어난 아기이자, 그 누구도 아버지의 정체를 모르는 존재인 그녀는 등장부터 범상치 않다. 유달리 에이와와 강하게 교감할 뿐만 아니라, 따로 훈련하지 않고도 물속에서 능숙하게 잠수할 줄 안다. 또 온갖 동식물과 소통하고 그들을 뜻대로 조종하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는 그녀가 마치 판도라 버전의 예수와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인간과 나비족의 대립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구세주 메시아로 거듭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 본래 '아바타(avatar)'라는 단어가 지상에 내려온 신의 분신을 의미하는 만큼, 키리가 에이와의 아바타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로아크와 키리의 서사가 중심이 될 <아바타> 시리즈는 제임스 카메론이 써 내려가는 신약 성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시점 알려진 시리즈의 4편과 5편의 부제가 각각 <툴쿤의 기수(The Tulkun Rider)>와 <에이와를 찾아서(The Quest for Eywa)>이기에 더욱 그렇다.
전편으로부터 진일보한 생태학적 메시지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개발에 반대하며 자연을 보호하자는 메시지도 더욱 깊어졌다. <아바타>는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판도라의 모든 생명체는 에이와의 자식으로서 동등한 존재다. 따라서 그들을 소유하고 이용하는 대신 그들과 소통하며 허락을 구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는 제이크가 이크란을 탈 때 그들과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했던 이유였고, 또 사냥할 때마다 "당신을 봅니다(I see you)"라고 말하며 명복을 빌었던 이유였다. 판도라의 모든 나무가 마치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인간처럼 의사소통할 줄 안다는 언급도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설정이었다. 다만 이러한 묘사에도 한계는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설정과 설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판도라의 신기한 생태계와 삶의 방식을 관찰할 뿐, 다른 생명과 존재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는 없었다.
<아바타: 물의 길>은 한발 더 나아간다. 지구의 고래를 닮은 생명체, 툴쿤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작중 툴쿤은 멧카이나 부족의 형제자매, 외관만 다른 부족의 일원으로 여겨진다. 멧카이나 부족과 툴쿤들이 재회하는 장면은 오랜 기간 보지 못했던 가족이나 친척들이 추석이나 설날에 만나 수다 꽃을 피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히 단지 멧카이나 부족이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툴쿤들도 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영화는 로아크와 파야칸이 처음 만난 순간부터 툴쿤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파야칸의 시점에서 로아크가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하고, 도움을 주고, 친분을 맺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 결과 동등한 두 주체가 진정으로 우정을 쌓아나가는 과정에는 설득력이 더해진다. 또 인간과 멧카이나 부족이 결국 전투를 벌이는 결정적인 계기도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체험할 수 있는 주제 의식
즉, 전편이 인간도 자연계의 구성원 중 하나로서 선순환하는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속편은 인간 이외의 주체를 강조하여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정동(affect)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자연과 물질도 인간처럼 세계의 변화에 반응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이며, 인간처럼 의지와 목적을 가진 채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들도 툴쿤 사냥선을 급습하는 파야칸처럼 인간 행위의 방향성을 바꿀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능동적인 반응에 따라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특히 영화 초반부에 RDA의 목적이 망가진 지구를 대신해 판도라를 개척하고 이주를 도모하는 것으로 드러난 만큼, 이는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자연과의 공존을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층 깊어진 주제 의식은 <아바타: 물의 길>이 선보이는 화려한 영상미가 빛을 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이 작품의 CG 효과는 전편 수준의 충격적인 영상미를 재현하지 못한다. 3D 효과도 익숙해졌고, 판도라 행성의 경관도 한 차례 맛을 봤기에 13년 전만큼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판도라를 체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마치 지구의 바다를 촬영하듯이 다른 세상에 있을법한 바다의 상세한 모습을 그래픽과 상상력으로 표현한 결과, 주인공들과 함께 판도라의 바다를 진짜로 경험하고 경이로움을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해양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본의 고래잡이를 비판하는 듯 보이는 툴쿤 사냥 시퀀스도 마냥 교조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관객들은 해당 장면에 심정적으로 몰입하고, 영화의 메시지도 자연히 받아들일 수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아닌 시리즈의 부속품에 가까워진 결과물
그러나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아바타: 물의 길>은 전편에 비하기 어려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전반적인 스토리의 구성과 흐름, 캐릭터의 구축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전편과 달리 몰입도가 떨어진다. 1편은 인간과 아바타(나비족) 중 한 정체성을 골라야 하는 제이크의 고뇌를 그려냈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내적 갈등은 누구나 자신의 성장 경험과 사회적 위치를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반면에 이번 작품은 내적 갈등을 사회적인 이야기로 다양하게 확장한다. 일례로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아이들은 혼혈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심적으로도 괴로워하고 멧카니아 부족의 아이들과도 충돌한다. 이는 현실 속 인종 차별이나 다문화 청소년들이 겪는 집단 따돌림 등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이는 수용자의 경험과 태도에 따라 공감의 수준이 달라질 수 있는 화제이고, 결국 그 때문에 직관적인 몰입도도 덜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수많은 캐릭터의 활용법도 최선은 아닌 듯 보인다. 다음 세 편을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보니 캐릭터들의 이야기도 간신히 시작될 뿐 진행되는 내용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제이크의 서사만 해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작업에 머무르고 있다. 줄곧 인간을 피해 도망치던 그가 인간과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만으로 3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스파이더의 활용도 애매하다. 인간과 나비 양쪽을 오가면서 비극적인 개인사와 가족사를 지닌 인물인 만큼 그는 분명히 향후 시리즈에서 중대한 역할을 맡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정작 이 중요한 캐릭터가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는다. 그는 나비족의 습관과 정서를 이해하고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에서, 말 몇 마디에 쿼리치의 제이크 추적을 돕는 등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캐릭터로 변해 버린다. 이렇게 일관성 없이 플롯의 필요에 따라 캐릭터성이 달라지다 보니 그는 자연히 극의 흐름에 녹아들지 못한다.
갈등의 규모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얼핏 보기에는 전편보다 더욱 커진 전쟁을 그려내는 듯하다. RDA가 아예 실거주 목적으로 판도라 행성에 귀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다음 편을 위한 복선에 불과하다. 정작 종족의 생존을 두고 벌어지는 인간과 나비족의 결전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제이크, 네이티리, 그리고 쿼리치 대령 간의 오래된 악연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쿼리치 대령은 개인적인 복수심을 이유로 제이크와 네이티리를 추격하며, 그저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제이크와 네이티리 역시 아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쿼리치의 도발에 응수하기로 한다. 그 결과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전편에 비해 다소 맥 빠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액션의 스케일이나 전투 시퀀스의 규모도 줄어들었고, 싸움에 임하는 비장함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바타: 물의 길>을 보다 보면 생각나는 두 작품이 있다. 바로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와 <호빗: 뜻밖의 여정>다. <아바타>를 일종의 프롤로그였다고 친다면, <아바타: 물의 길>의 목표는 <반지 원정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시리즈의 세계관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거대한 전쟁에 앞서 선악을 대표하는 인물들 간의 추격전을 그려낸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면 각각의 인물이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하고 편을 정한 후 본격적인 전쟁에 나서기로 하는 흐름도 유사하다.
그러나 목표와 달리 <아바타: 물의 길>은 정작 <호빗> 1편을 보는 듯한 인상을 남기고 만다. 시리즈의 진행에 필요한 복선을 깔아 두는 데 지나치게 열중할 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는 않으며, 많은 캐릭터가 새롭게 등장했지만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인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유사한 문제점을 공유하는 까닭이다. 내용의 부실함을 전편에 비해 화려해진 시각 효과로 벌충하는 것 역시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아바타: 물의 길>은 장단점이 명확히 갈리는 가운데 향후 시리즈의 향방에 따라 재평가의 여지를 남겨두는 작품인 셈이다. 대서사시를 위한 완벽한 가교이거나, 시리즈의 진행을 위해 소비되어 버린 평범한 속편이거나. 2년 내지는 3년 안에 나올 것이라 공언한 <아바타 3>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재평가는 속편들의 몫으로 남겨둔, 흠잡을 데 없는 시리즈의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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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빼앗긴 레즈비언은 기억과 몸짓으로 말한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리뷰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은 가장 손쉬운 자기 선언의 수단이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30대입니다." "나는 게이입니다." 등의 말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정보를 상대에게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전부는 아니다. 말이 없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릴 수 있다. 때로는 말보다 더 선명한 방식으로. 영화 〈우리, 둘〉(원제: 'Two of Us')은 '말할 수 없는' 레즈비언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선포하는 일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인 니나와 마도다. 둘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마주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은퇴한 둘은 로마로 이주해 한 집에 같이 살 계획을 꾸린다. 그런데 니나와 마도가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마도가 자녀들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고 애인인 니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나는 '말하지 못하는' 마도를 답답해한다.
둘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 마도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관계에 기묘한 변화가 생긴다. 이제 '말하지 못하는' 건 니나다. 니나는 매일 마도를 보고 싶고, 항상 마도의 곁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마도의 간병인은 그런 니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니나는 간병인에게 자신이 마도의 레즈비언 애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니나는 자신이 마도의 이웃, 친구로만 여겨지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영화의 절정, 어머니가 레즈비언임을 알게 된 마도의 딸 앤은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마도를 니나와 분리하려고만 한다. 그럼에도 마도가 계속 니나를 찾자 '제발 자신과 대화를 하자'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마도는 이중적 의미에서 말할 수 없다. 뇌졸중에 걸려 언어능력을 잃은 게 첫 번째 이유고, 이성애규범적 세계가 레즈비언의 발화를 허용하지 않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앤이 애타게 소리쳐봤자, 대답은 오지 않는다. 엄마와의 대화를 막는 건 이성애중심적 체제와 그에 안주하는 앤의 편견이지만, 앤은 끝내 무엇이 자신과 엄마의 대화를 막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말'이 중요한 소재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두 여자아이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한 명이 사라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술래인 아이는 사라진 친구를 애타게 부르지만, 그 목소리는 까마귀 울음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애타게 부르짖어도 들리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는 자신들이 레즈비언 커플임을 말하지 못하는 니나와 마도를 닮았다.
하지만 말이 없다고 니나와 마도가, 그들의 관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말이 아니어도 그들의 존재와 사랑을 증명할 수단은 있다. 말의 강제적 부재라는 상황에서, 니나와 마도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은 기억과 몸짓이다.
먼저 기억의 문제를 보자. 앤이 아무리 부정해도, 마도의 옛 앨범에 담긴 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니나다. 마도의 모든 걸 제일 잘 아는 사람도 니나다. 오랜 기간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밀한 존재였던 둘은 동성애 친밀성을 배제한 가족제도와 규범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경험들을 쌓아왔다. 니나와 함께 쌓아온 내밀한 경험은 '말을 잃은' 마도에게 가장 분명한 언어가 되어 둘의 과거를 소환하고, 현재를 구성하며, 미래를 꿈꾸게 한다. 니나와 마도는 오랫동안 함께 쌓아온 기억으로 소통한다. 이들의 소통이 앤을 비롯한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이다.
두 번째는 몸짓이다. 영화의 마지막, 니나는 요양 병원에 있는 마도를 몰래 자기 집으로 빼돌린 후 함께 블루스를 춘다. 밖에서는 앤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마도를 돌려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마도와 니나는 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듣지 않는 건' 앤이 아닌 마도와 니나다. 세계가 그들을 거부하자,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말은 들리지만, 사랑에 손가락질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 세계를. 서툴고 경직된 그들의 블루스가 무엇보다 단단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렇게 말을 빼앗긴 늙은 레즈비언 커플은 기억과 몸짓으로 자신들을 증언한다. 〈우리, 둘〉은 '말'의 은유를 통해 존재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다루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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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왕이 걸어온 반듯한 왕도
디즈니 르네상스를 이끈 명작 '라이온 킹'이 탄생 3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19년에 선보였던 실사 영화에 이어 새로운 시리즈를 공개했다.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의 이야기를 담은 '무파사: 라이온 킹'(이하 '무파사')을 내놓았다.
실사 영화 '라이온 킹'처럼 '무파사' 또한 원작 애니메이션과는 일부 다른 설정을 갖췄다. 프라이드 랜드의 왕인 무파사가 알고 보니 왕의 혈통이 아닌 점, 친형제였던 무파사와 스카는 의붓형제로 변경됐다. "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거듭난다"는 메시지에 맞춰 무파사의 서사를 극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바꾼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심바(도널드 글로버)와 날라(비욘세)의 딸 키아라(블루 아이비카터)가 동생을 출산하기 위해 떠난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며 라피키(존 카니)에게서 옛날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이는 무파사에서 심바로, 심바에서 키이라로 유산(왕의 자질)을 물려주는 걸 암시하며 3대를 하나로 연결한다.
엄마 아빠와 함께 전설의 낙원 밀레레를 찾아 이동하던 무파사(에런 피에르/브레일린 랭킨스)는 대홍수를 만나 다른 곳으로 떠밀려 왔고, 왕의 혈통이자 예정된 후계자 타카(스카, 켈빈 해리슨 주니어/테오 소몰루)를 만나면서 의형제처럼 지낸다. 어느 날 '외부자들' 백사자 무리의 습격 때문에 무파사-타카는 생존을 위해 자신들이 속했던 무리를 떠나 밀레레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암사자 사라비(티파니 분)와 개코원숭이 라피키를 만난다.
'무파사'의 스토리 구조는 기존 '라이온 킹'과 비슷하나, 전작과 달리 용기와 지혜로 왕이 되는 무파사의 모습을 그리며 현대적으로 표현한다. 이때 '라이온 킹'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 '생명의 순환'을 부각하고자 새로운 빌런인 키로스와 외부자들의 폭력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초원의 밑바닥부터 모든 종이 '생명의 순환' 속에 놓인 동일한 존재라는 걸 모든 동물들에게 전파하고 독려하는 무파사의 리더십을 그린다.
이 영화의 주체가 무파사-타카 두 사자인 만큼, 어렸을 때 친형제처럼 지냈던 이들이 어쩌다 파국으로 치닫게 됐는지 관계성 변화로 영화의 살을 붙인다. 특히 '라이온 킹' 빌런 스카의 타카 시절은 흥미로웠다. 새로운 형제가 생겨 행복해했던 타카는 위기를 맞이하면서 고뇌하다가 어느 순간에 질투심을 느껴 배신하기도 한다. 비겁하고 겁이 많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우정 앞에 용기 내는 순간도 있다. 그에 반해 무파사는 심바와 다르게 완성형 캐릭터로 구축되어 있다 보니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실사 영화 '라이온 킹'에서 진일보한 VFX(시각특수효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스케일과 영상미를 자랑했으나, 동물을 의인화하는 과정에서 대사 싱크로율이 맞지 않는 부분이 보이고 이 때문에 감정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무파사'는 전작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했다. 드넓은 초원부터 폭포, 설경까지 아프리카의 장엄한 대자연부터 다채로운 감정 표현하는 동물 묘사, 디테일한 동물 털 표현까지 리얼하다. 흡사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기술력은 확실히 진화했으나, 무파사, 타카, 사라비가 함께 있을 때에는 조금 헷갈린다. 캐릭터별 특징을 다르게 표현하긴 했지만, 한 앵글에 잡혀있을 때 구분하기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그 외 완벽한 동물 묘사에 비해 물을 표현한 CG의 완성도는 옥에 티다. 물론 이 부분들은 영화를 감상하는 데 크게 불편함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