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9-06 13:50:19
흔적이 모여 기적을 이루다.
영화 <블랙폰> 리뷰
호러 영화 전문 제작사 블룸 하우스와 스콧 데릭슨 감독이 만난 이 영화는 조 힐 작가의 '20세기 고스트' 속 단편 '블랙폰'이 원작이다. 어두운 밤과 비, 그리고 축축함이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이 영화는 9월 7일에 개봉을 한다. 올해 개봉한 호러 영화 중 로튼 토마토 팝콘 지수 최고의 수치를 기록하여 더욱 주목할만하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 납치 사건과 일상에 공포가 스며든 전화기를 들어 올릴 각오가 되었다면 지금 바로 '블랙폰'을 보자.
작은 마을에 연쇄적으로 아이들이 납치되며 마을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하다. 피니를 비롯한 아이들도 그 위험에서 안전하지 않다. 그리고 어느 날, 가면을 쓰고 접근한 남자에 의해 피니는 캄캄하고 축축한 지하실에 납치되고 만다. 전화선이 끊긴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리며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도대체 그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탈출을 위한 사투와 충격적인 이야기 뒤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난다!
지하실에 갇힌 피니는 의문의 전화를 받게 되고 공간에 흔적으로 남은 목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혼란스러움 앞에 또 다른 혼란 앞에 선 피니의 탈출이 시작되고 피니를 찾으려는 그웬의 노력과 탈출하려는 피니의 노력이 대비된다.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내부와 외부의 지점에 의해 공포보다는 스릴감으로 인한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늘 그랬듯 서로를 감싸 안았던 남매가 서로에게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가면과 전화기, 그리고 꿈. 사람을 잇는다.
메가박스 시사회로 미리 관람하고 온 영화 '블랙폰'은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소재가 맞물려 흥미로움을 불러오지만 서사가 부족하다. 폭력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피니와 그웬, 그리고 왠지 모를 범인의 이야기가 다루어지지 않아서 아쉬웠다. 전후 사정이 서술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이야기 속의 의외의 액션이 인상적이다. 정통 호러 영화를 기대한다면 조금 아쉬울 것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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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와 사랑에 빠진 남자, 그에게 빠진 세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우연히 보고 띵작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영화 <오스카 피터슨: 블랙 + 화이트>. 메시지의 전달과 음악의 결합이 굉장히 탁월했고, 오스카 피터슨의 생애와 재즈에 대해 더욱 깊이 알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오스카 피터슨: 블랙 + 화이트> 시놉시스
재즈 아이콘이자 작곡가였던 오스카 피터슨의 사운드와 스타덤, 환상적인 연주를 통해 아티스트의 생애와 그가 남긴 유산을 탐구한 다큐 콘서트 <오스타 피터슨: 블랙 + 화이트>. 명실공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즈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은 피카소나 모차르트처럼 독특한 천재성을 지닌 것은 물론, 거침없는 연주와 개성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천재 재즈 뮤지션의 70년 역사를 담은 영화는 신동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그의 시그니처 사운드가 완성된 트리오 시절의 녹음, 유명 스타들과의 컬래버레이션, 전 세계를 누비며 펼친 솔로 공연뿐 아니라 미국 투어 시절 겪은 인종차별 속에서 그가 보인 불굴의 의지, 그리고 그가 남긴 역사적인 곡 ‘자유를 위한 찬가’(Hymn to Freedom)까지 담고 있다.
* 해당 내용은 전주국제영화제 보도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오스카 피터슨: 블랙 + 화이트>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음반을 사고 싶게 만들다
취미 중 하나는 집에서 LP를 듣는 것이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LP를 들을 때 특히 아무일 없는 주말에 그러고 있으면 편안해져서 자주 듣는 편이다. 그리고 LP로 들었을 때 가장 좋았던 장르는 재즈였다. 그렇다고 재즈에 대해서 잘 알지도,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어서, 이번 영화를 보면서 재즈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스카 피터슨의 이야기를 접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예매를 했던 작품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재즈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스카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그의 곡이 얼마나 훌륭한지 잘 담아내고 있는 영화였다. 오스카 피터슨이 재즈씬에 데뷔한 후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의 업적과 곡들을 순차적으로 담아내고 있어서그 연대기와 흐름을 잘 알 수 있었던 작품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피터슨의 명반을 구매해봐? 이러면서 바이닐 검색을 엄청 했던 것 같다.
곡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접하다
영화 <오스카 피터슨: 블랙 + 화이트>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라이브 밴드로 그의 곡을 연주하는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다. 밴드 장면 전후로 이 곡이 만들어지고, 이 곡을 가지고 투어를 다닐 때의 피터슨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곡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물론 피터슨의 곡을 조금 더 듣고 싶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건 솔직히 음원이나 앨범에서 찾아 들을 수 있기에 밴드 음악이 흘러나오고 이 음악은 점차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고, 피터슨의 이야기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 그리고 당시 시대상황을 알려주는 인터뷰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접목되어서 솔직히 좋았다. 이러한 이야기가 끝난 뒤 다시 밴드음악이 메인으로 등장하면서 그 음악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된 상태에서 노래를 듣다보니 그 곡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비를 뛰어 넘은 사람
오스카 피터슨이 언제나 전성기를 달렸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칭송하기에 은퇴하는 그 날까지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사람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뛰어났기에 전성기 시절보다 떨어진 기량임에도 압도적이긴 했지만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더 발전적인 연주를 보여준 오스카 피터슨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예체능계에서는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은퇴를 생각하고 박수칠 때 떠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피터슨의 경우에는 뇌졸증이 와 왼쪽 마비가 오면서 왼손의 기량이 현격하게 떨어졌음에도 이 과정에서 은퇴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피터슨은 기존에 트리오 편성을 쿼터로 바꾸면서 자신의 떨어진 왼손 기량을 받춰줄 기타리스트를 영입해 계속해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간다. 전성기 시절의 피터슨은 왼손으로 베이스를 다 만들었기에 다른 악기의 반주가 없이도 독주가 가능했었다. 이 지점이 다른 피아니스트와의 차별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비 이후 기량이 떨어지자 그만둘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쿼터에 도전함으로써 더 풍부하면서도 기존과는 다른 음악을 만들어내고 연주했다는 그 도전정신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간만에 음악다큐를 보고 그 명반을 찾아 들으면서 영화관을 기분 좋게 나왔던 영화 <오스카 피터슨: 블랙 + 화이트>. 재즈에 관심이 있으신 사람이라면 만족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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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앞에 선 사회적 약자의 환상
2019년 영화 <조커>는 한 사회적 약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심리적 파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무관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절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외감, 무시당하는 상처, 그리고 이를 덮으려는 몸부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했고, 결국 그를 비극의 주인공, 조커로 만들어 갔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 전작의 이야기를 잇는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가 꿈꾸는 사랑과 인정에 대한 허황된 욕망을 탐구한다. 이번 작품은 혁명의 영웅으로 떠오른 조커보다는 다시금 약자로 돌아간 아서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커라는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패배감
아서 플렉에게 패배감은 평생을 관통한 기본 정서였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사회적 인정이나 보호를 받아본 적 없었고, 언제나 비웃음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이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증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그는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의 패배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여러 번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은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패배감은 일종의 디폴트 상태였고, 이로 인해 그는 점점 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감은 그가 조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러한 패배감이 그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는 스스로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극복해내지 못한 채, 끝없이 패배감을 체화하며 살아간다. 그는 조커라는 가면을 쓰며 잠시나마 패배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감정] 조커의 분노
조커로 변신하는 순간, 아서는 더 이상 아서 플렉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쌓여온 패배감을 분노로 감추고,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당당함을 얻는다. 이 순간의 조커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강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관객에게조차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 듯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아서는 조커라는 가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느껴왔던 모든 억압과 무시를 세상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통해 세상에 맞서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당당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그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영화 속에서 할리(레이디 가가)는 아서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사랑한 것은 조커였다. 즉, 그녀는 아서를 사랑한 것이 아닌 그의 분노와 그로 인해 얻어진 위태로운 매력을 사랑한 것이다. 영화는 조커로 변신한 아서의 모습을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장면으로 표현하며 그를 영웅처럼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남은 것은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이다. 이 순간 관객은 아서의 현실과 그가 잠시나마 꿈꾼 조커의 허상을 동시에 보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억울함
아서의 삶에서 억울함은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그저 사회적 보호의 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그를 소외시키고 억압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며, 상황에 의해 끌려 다닌다. 그의 친구조차도 아서를 무서워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아서 스스로 얻고자 해서 얻은게 아니며, 우연히 그에게 찾아온 삶의 굴레들이다.
아서에게 억울함은 그가 조커라는 인물로 주목받을 때조차 여전하다. 그는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해 재판에 나서지만, 여전히 아서 플렉으로서의 자아는 조커가 얻는 주목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조커로서 사람들에게 환호받아도, 아서로 남아도, 결국 그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뿐이었다. 이러한 억울함은 그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이 억울함은 그의 패배감, 분노와 뒤섞여 그를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으며 결국 그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몰락뿐임을 암시한다. 아서는 조커로서의 삶에서도, 아서 플렉으로서의 삶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며, 결국 그 억울함 속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도 그는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다. 그저 한 번 반짝했던 범죄자로 남을 뿐이다.
촬영이나 연기의 완성도는 높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몰락의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악당의 서사를 다루기보다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아서는 태어나서부터 사회적 차별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으며, 할리의 등장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서의 일생 중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조차도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들은 조커의 환상적인 모습이 아닌 아서의 초라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는 감독이 아서의 삶을 끝까지 직시하게 함으로써 그의 서사를 마무리짓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까지 포함해 모두가 조커를 보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끝까지 아서의 현실을 강조하며 이 이야기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연출과 배우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의 연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뮤지컬 장르를 도입하여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장르적 도전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 뮤지컬 장르가 원래의 이야기와 잘 이어 붙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들이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되어버렸다. 촬영이나 화면이 고급스럽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게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 영화에서도 아서와 조커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레이디 가가 역시 할리 역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의 연기는 영화에 감정적인 깊이를 더했다.
이번 영화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사회 변혁 이나 사회 파괴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사회적 약자인 아서 플렉의 삶과 그가 꿈꾸는 허망한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는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의 아름다움, 그리고 뮤지컬 장면의 독창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라는 인물의 화려한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서 플렉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서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며, 그의 몰락이 결국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을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M8_51b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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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가로되 사랑이더라
"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 고은, 순간의 꽃작년 여름 <바비>를 두고 컨셉트가 영화를 압도했다고 말한 중년 남성 평론가에 열광하는 남성들을 보며, 켄 로치와 다르덴 형제와 그 옛날 채플린부터도 ’컨셉트를 위한’ 영화, 정치적 캠페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그 남성 거장들엔 불만 갖지 못하면서 젊은 여성 감독의 페미니즘 컨셉트만 쥐 잡듯 패는 건 너무 속 보이지 않냐고 비꼰 적이 있다.
말하자면 오로지 심미성과 예술적 비장미에만 집중할 수 있는/집중해야 하는, 마치 일본 버블시대 같은 영화적 황금기는 지나갔다는 것.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지 않고, 시대적 부름에 총대 메고 나서 어려운 역할에 충실히 임하는 그레타 거윅이나 켄 로치, 다르덴 형제를 위시한 ‘캠페인’ 전문가들에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로부터 반 년 후. 놀랍게도 그이들은 이제 아예 켄 로치의 컨셉트 - 노동자 정치와 난민에의 연대 -마저 부인하려고 하는 듯하다.
영화의 ‘구조’는 물론 단순하다. 80년대 광부 파업 이후 결국 폐쇄된 (구) 탄광 마을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집도 친구도 다 버리고 도망쳐온 시리아 난민들이 섞여든다. 국가에 의해 생계형 노동이 중단된 폭력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폐광촌의 가난한 영국인들은 이 ‘수용’ 조치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 나 살기도 팍팍한데 ‘두건 대가리’들을 마을에 들이지 말라고 아우성치고, 어떤 이들은 난민이 받는 구호물품을 보며 탐내거나 그들이 자기들의 공적 공간을 침범한다며 적개심을 품고, 일상적 언어폭력을 넘어 실제로 손괴에 준하는 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오래된 바 주인 토미 조 발렌타인이나 그의 친구 로라처럼 적극적 앨라이가 되는 이들도 있고 처음엔 경계하다가 마음을 여는 주민들도 적게나마 있다.
TJ 발렌타인과 야라는 꼴통 대표 청년이 망가트린 야라의 카메라를 계기로 가까워진 후, 마을에서 고립되거나 굶주리는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이런저런 역경을 겪으며 서로의 지난 삶을 다 알게 되며 진짜 친구가 된다. 결말에서 시리아에 남아 억울하게 구금됐던 야라의 아버지가 감옥에서 사망했단 소식에 TJ와 로라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조문을 오며 마을/노동자 공동체의 부활을 암시한다.
상호 연대를 말하는 이 서사가 이토록 쉽게 쓰인 원인은 뭘까. 60년 동안 영화를 만들어온 켄 로치가 영화를 잘 못 만드는 사람이라서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는 순간 짜증내며 쉬운 말로 세 줄 요약해달라고 조르는 반지성주의자들 때문일까?
<공산당 선언>의 장엄한 문장은 한 줄 한 줄 낱낱이 아름답지만 바로 그 복잡성 때문에 그걸 정말 읽었어야 하는 노동자 계급을 전부 포섭하지 못해 실패했다. 켄 로치는 그 딜레마를 잘 아는 노장이고 우리보다 먼저 난민 거부라는 현실을 맞닥뜨려본 유럽인이다.
그는 우리가 최근 몇 년간 봐온 모든 혐오를, 앞으로 보게 될 더 심각한 백래쉬를 이미 전부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자신의 유작이 될지도 모를 이 영화를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만들어서, 미음처럼 곱게 갈아 떠먹여 주기로 결심한 것 같다. 가장 최근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보다도 직설적인 화법으로 직관적 대사와 사건들을 배치한 그의 의도는 약간 절박해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극 중 사건들의 핍진성을 의심하거나 너무 극화된 선악 이분법이라며 중립을 자처하는 건, 자긴 아무리 생각해도 살면서 난민 될 일은 없을 것 같고 오로지 그들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권을 지닌 편에만 속하다 죽을 것 같으니 끝까지 모르고 살겠다는 외면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얼마나 우습고 편협한 착각인가. 얼마나 기계적인 사유 없음인가.
게다가 이 마을의 난민 거부자들이 보이는 폭력성은 실제 난민들이 유럽 사회에서 겪어온 바에 비하면 아주 순하기 짝이 없다. 켄 로치가 폐광촌의 빈곤하고 여유 없는 사람들을 완전히 악인으로 그리지 않고 이해의 여지를 적재적소에 충분히 배치하기 위해 너무나 애쓴 것은 지구 반대편의 관객에게도 분명하게 보이는데, 예를 들면 린다의 엄마가 린다를 집까지 부축해 온 야라가 냉장고를 여는 장면을 보고 냅다 성을 낸 장면이 그렇다.
초라한 냉동실을 보고 야라도 잠시 멈칫할 만큼 그 집의 사정은 좋지 않다. 아마도 소아 당뇨를 겪는 듯한 딸과 게임에만 몰두하는 아들을 홀로 키우는 듯한 린다의 엄마는 미용실 청소 등 저임금 고강도 저퀄리티의 비정규 노동으로 삶을 꾸린다. 부박함은 사람을 여유 없게 만들고, (나보다 불쌍한 사람일 거라 예단했던) 남이 그것을 제대로 목격하고 나를 연민할 때의 수치심은 거의 죽음으로 가는 카운터펀치다. 그 순간 린다의 엄마가 민망함과 슬픔을 분노로 착각해 야라에게 빽 소리지르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 후 길 가는 야라를 멈춰세워 자신이 오해했다며 사과하고 친구가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 놀랍고 어려운 일을 해내고 만다.
TJ의 죽마고우 찰리의 사정 역시 만만치 않다. TJ는 반려견 마라가 죽고 몸 가눌 수 없는 슬픔을 다시 겪다가 겨우 난민 공동체와의 식사 연대를 통해 자신을 지탱하던 중이고, 그렇기에 가게의 수도 밸브를 의도적으로 터트려 그 연대를 저지한 40년 단골 일당 벡과 에드 등을 용서할 수가 없다. 그 범죄에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찰리까지 끼어있었다는 사실은 TJ를 미치도록 슬프게 만들지만, 찰리가 TJ에게 거부당한 데에서 분노를 넘어 모욕감과 서운함까지 느꼈단 점, 그리고 그가 휠체어 탄 부인 메리를 돌보는 주 간병인이었단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는 마냥 ’우리 부류‘ ’우리 사람‘들을 강조하며 ‘내 것을 뺏겼다’는 한 꺼풀의 박탈감에만 집중하던 다른 일당과 달리 ’올드 오크는 교회도 보건소도 닫은 후에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공적 공간‘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던 이이기도 하기에 더 복잡한 인물이다.
아주 무심하고 당연한 도리를 한다는 듯 야라와 로라의 작당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친지들의 적극적 혐오에 가담하지 않고 내부고발을 시도한 청년 토니, 역시 가게 수리를 함께해준 노인 자파와 올드 오크의 직원 매기, 이들이 납작한가. 이들이 너무 단순한 선인 같고 반대편의 비열한 혐오자들은 너무 단순한 악인으로 그려진 것 같아서 억울한가. 이상하게 벡과 에드 편에 이입되고 그 마음이 찔려서 너무 편향된 서사라고 비판하고 싶어진다면 거기 내포된 자기의 믿음을 다시 파보는 게 낫지 않을까.
켄 로치의 놀랍도록 세심한 묘사를 또 꼽자면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그릴 때 성별 요인의 영향을 잊지 않았단 점이다. 영화 속 젊은이들 중 적극적 배척의 주동자/공모자들은 대부분 오프닝의 로코 같은 남성들이고 TJ에게 아버지가 보내준 것 같은 상징성을 갖던 반려견 마라(Marra, 광부들 언어로 단순한 친구보다 깊은 의미의 용어라고 한다)를 물어죽인 개의 주인들 역시 책임감 없는 젊은 남자애들이었다. 반면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애들은? 세이디의 딸 조시, 린다의 언니 케이티와 또 이름 없는 무수한 젊은 여자들은 집으로 숨어들고 있고, 엄마들의 ‘우리 딸들’ 걱정을 빌려서만 세상에 드러나는 존재들이다.
꿈도 희망도 자신감도 없고, 자기를 수치스러워하고, 한창 빛나야 할 때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해 히키코모리가 되는 여성들의 양상은 남성들의 타인에 대한 극도의 폭력성과 완전히 구분된다. 이건 영국에 한하지 않은 우리 눈앞의 현실이기도(근 10년 꾸준히 가파르게 오른 20대 여성의 자살률/자살 시도율이나 팬데믹 전후 ‘조용한 학살’을 떠올려보라).
켄 로치가 전 유럽의 청년층 우경화를 거의 반 세기 동안 관찰한 후 형성한 무의식인지, 혹은 의도가 있는 구분인지 정말 궁금한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일 때 폭력성을 외부로 발산하는지 내부로 폭발시키는지 그 방식은 분명하게 성별화된다(또 오인할까봐 굳이 당연한 소리를 덧붙이자면 이건 물론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적 차이, ‘어떻게 키워졌느냐’의 차이).
책이나 뉴스는 전혀 안 보고 오로지 영화만 보는 인물이라 해도, 근 몇 년간 가장 화제였던 디아스포라 서사 <사마에게>와 <가버나움> 또는 <소년 아메드>와 <토리와 로키타> 중에 한 편 정도는 알지 않을까. 난민의 몸에 체화된 공포를, 애써 도망쳐 도착한 사회에서 매 순간 거부당하며 위축되는 감정을 모를 리 없다. 난민을 만드는 내전과 정치적 탄압이 어떤 시절 어느 나라들에서 발원했는지, 강력한 종교적 규제, 소수자 배척과 구금 및 고문 등이 얼마나 잔혹하게 사람을 망가트리는지는 공교육만 제대로 받았다면 더욱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인지 난민-빈민은 인권을 두고 제로섬으로 경쟁할 대상이 아니란 점을 매우 명시적으로 얘기하는 <나의 올드 오크>를 바로 그 경합(을 넘어 거의 적대)의 구도로만 읽어내거나, 영화가 너무 망상적이고 편향적이라며 투정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일 때마다(걱정보다는 적지만) 21세기의 공론장이 얼마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지 오래됐는지 자꾸 상기하게 된다. 이건 모두 우리 사회가 공론장에 올리면 안 될 것을 - 안티 페미니즘을, 난민 ‘수용 거부’론을, 퀴어와 장애 혐오를 - 마치 하나의 대등한 주장처럼 링 위에 올려주고, ‘의견’으로 고려하면 안 될 것을 의견으로 쳐주고, 논쟁의 대상이 아닌 것을 ‘00 논란’으로 체급을 키워주는 바람에 초래된 전 인류의 비극. 모두가 일제히 그 '의견'을 받아들이기 거부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절망하는 와중에 87세의 켄 로치는 침착하게 사태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의견 내지 않기를 선택했던 대다수의 방관자들이 하나하나 ’난민 편‘으로 돌아설 만한 사건들이 여기저기 배치됐다며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는 사람도 있던데 그거야말로 너무 억지스러운 거부를 위한 거부 아닐까. 이 영화의 전제 자체를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내심을 스스로 못 깨달았든지, 아님 부정하고 싶은 마음까진 분명히 인지했는데 그런 자신이 도덕적 사회적 인간이 아니란 점을 인정 못하는 건 아닐까 싶다. 정말이지 얼마나 주류의 규율이 지향하는 디폴트 인간형과 어긋남 없이 살아왔으면,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얼마나 상상을 못해보고 살았으면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나 자신도 악하지 않다고 해달라고 투정을 부릴 만큼 철이 없는 걸까.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설득이 없었다'? 모든 설득이 공청회처럼 자리 만들어주고 오실 분 와서 들으라고 권유하는 형태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어차피 혐오할 사람은 어떤 노력이 선행했든 답을 정해두고 혐오한다. 과연 빅과 에드와 로코 같은 사람들이 시리아 난민 도착 전에 어떤 설명을 들었다면 차분히 환영해줬을까? 버스에 불 지를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기다렸을 거라고 예상한다.
‘부자연스럽다’? 원래 대부분의 사람은 부대끼고 살면서 밥 몇 끼 같이 먹다보면 놀랄 만큼 빠르게 타인에게 적응하고 친밀감 갖고 애정하게 된다. 초대 교회들이 파산 직전으로 가난할 때도, 진짜 죽어나가는 수준으로 핍박받던 로마 왕정 하에서도 이 악물고 ‘같이 밥 먹기’ 강조해가며 교인들 일요일 식사 다 챙겨먹였던 이유 역시, 커뮤니티로서의 식사 공동체가 수행하는 물리적 친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대한지 알기 때문이겠다.
어차피 못 받아들일 빅과 같은 사람은 ‘떼어놓고’ 갈 때, 나머지 다수에게 선 밖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이 사람들도 사람이다’란 사실을 납득시키고 싶을 때 ‘함께 밥 먹기’라는 건 켄 로치가 판단하기에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사람 냄새나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런 <나의 올드 오크>가 영화답지 않게 너무 교조적이거나, 너무 ‘편향된’ 것 같거나, 너무 망상적이고, 난민 혐오자를 너무 단편적인 악으로 그린 것 같은가? 그래서 너무 유치하고 납작하게 느껴진단 이유로 영화의 사회적 제언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가? 축하합니다. 당신은 바로 이 쉽게 떠먹여주기 위한 영화의 정확한 타겟입니다. ‘난민 수용 여부를 떠나’ 영화를 영화로만 사고하고 싶은가? 떠나면 안 될 논제를 굳이 떠나고 싶어하는 건 강자가 여유 부리며 무지한 상태에 남아있고 싶어할 때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켄 로치 감독은 선한 사회주의자라 이 '난민 반대론자'들의 반지성과 혐오까지 사회 구조적으로 이해해보려 애를 쓰며, 또 하나의 영화적 희망을 심어둔다. 바로 야라의 카메라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야라의 카메라는 남성화/보수화/반지성화/구조화된 현대의 폭력에 대응하는 매우 시네마틱한 장치다. 난민 가족들을 실은 셔틀이 마을에 도착하고 어리둥절한 주민들이 이들을 위협하려 몰려드는 오프닝, 셔틀 밖에 있는 그들을 함께 밖에서 찍은 영화적 영상 대신 셔틀 안에서 밖을 찍은 야라의 사진 슬라이드가 전개된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원류 - 모션 픽쳐에 대한 켄 로치 나름의 야심이 드러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즈음 올드 오크의 뒷방(이란 공간이, 이 말이 주는 울림은 왜 이렇게 늘 두근대는가)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야라의 사진 슬라이드를 다같이 숨죽이며 시사하는 장면에선 이 영화적 야심이 기어이 폭발하는 것만 같다. <플라워 킬링 문>의 드 니로가 무심하게 관망하던 바로 그 모션 픽처. <파벨만스>의 어린 스필버그가 비명을 참고 첫 작품을 찍어냈던 바로 그 매체.
야라의 사진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야라라는 경계인이 담은 폐광촌의 사람들, 아직은 외부인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연대체가 되어가고 있는 난민들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켄 로치는 이 아름다운 야라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허투루 다루지 않고 정직하게 3초씩 꾸벅이며 넘어가게 둔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우직함. 아마도 그것이 그의 연대, 그의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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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영화 모음.zip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오늘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영화만큼 재미있는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 총 다섯 편을 추천드릴까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씨네랩이 추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모음집!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
Feels Good Man, 2020
ⓒ 네이버 영화
synopsis
튀어나온 눈알, 기쁜지 슬픈지 모를 표정의 작지만 행복한 개구리 페페.
만화 잡지 속에서 뛰놀던 순수한 페페는 우연히 미국의 익명 커뮤니티인 '4chan'으로 흘러들어가 유저들의 패배감,
소외감을 표현하는 짤이 되어 폭발적으로 사용된다. 급기야 선거철 트럼프 진영의 눈에 띄어 백인 우월주의와 미국
극우파의 마스코트로 이용된 페페! 끝내 혐오 상징물이 되고 마는데..
cine pick!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또 써봤을 밈의 주인공 '페페'. 순수했던 캐릭터는 어느 순간
혐오의 상징물이 되었고, 원작자는 그러한 페페를 구하기 위해 밈 전쟁을 벌인다.
그 전쟁을 담아낸 다큐멘터리가 바로 '밈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이다.
소셜 딜레마
The Social Dilemma, 2020
ⓒ 네이버 영화
synopsis
중독과 가짜 뉴스에 시달리는 현대사회. 실리콘 밸리 전문가들이 용기 내어 경고한다.
자신들의 창조물, 소셜 미디어를 주의하라고.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결합한 영화.
cine pick!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봐야 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이다.
칠곡 가시나들
Granny Poetry Club, 2018
ⓒ 네이버 영화
synopsis
때론 컨닝도 하고, 농띠도 피워가며 ‘가갸거겨’ 배웠더니 어느새 온 세상이 놀 거리, 볼 거리로 천지삐까리!
눈만 마주쳐도 까르르르, 열일곱 가시나가 된 할머니들 이제 매일매일 밥처럼, 한 자 한 자 시를 짓게 되는데…cine pick!
2016년 6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사계절을 할머니들과 함께 하며
할머니들의 유쾌 발랄한 매력을 담아내며, 따스한 웃음을 선사했다.
성덕
Fanatic, 2021
ⓒ 네이버 영화
synopsis
10대 시절을 바쳤지만 스타에서 범죄자로 추락한 오빠!
좋아해서 행복했고 좋아해서 고통받는 실패한 덕후들을 찾아 나선
X성덕의 덕심 덕질기를 담은, 2022년 실패 없을 올해의 최애작!cine pick!
지금 누군가를 덕질하고 있는 덕후, 모종의 이유로 현재 덕질을 그만둔 덕후, 모든 덕후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이다. 매 영화제에서 매진이 될 정도로 인기를 끌며, 결국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게 되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의 조우
Marina Abramovic: The Artist Is Present, 2011
ⓒ 네이버 영화
synopsis
자신의 몸을 도구로 이용하는 대담한 도전을 이어감으로써 예술의 정의를 새롭게 내렸다는 평을 받는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때때로 그녀의 도전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기에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이다.
영화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일생 일대의 특별전을 앞두고 있는 마리나를 따라가며 “왜 행위예술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
cine pick!
아마 다들 한 번씩은 위 사진에 보이는 영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영상의 주인공인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삶과 전시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씨스피라시
Seaspiracy, 2021
ⓒ IMDB
synopsis
그가 사랑하는 바다가 죽어간다. 인간이 그 경이의 세계를 파괴한다.
그리하여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간 감독.
그가 맞닥뜨린 것은 전 세계에 걸친 부패의 그물이었다.
cine pick!
바다, 해양 생테계에 관심있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영화이다.
어업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영화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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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 The Fall
<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 The Fall >
올해 두번째 '못 일어나겠어' 작품입니다.
(= 만점영화)
일단 이 영화 진짜 좋습니다.
좋은 이유:
1. No CG, 올 로케이션이 주는 미적 쾌감
영화를 보면서, 씨지로 구현할 수 없는 질감들이 보이길래 '아 설마 올 로케?' 했는데.. 역시나 였다..
진짜 이 영화는 카메라 구도나 미장센 등 이게 현실로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많은데.. 정말 놀랍다.
2. 현실과 이야기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슬픔
이게 내가 이 영화를 극찬하는 포인트다.
물론 미장센, 연출 다 좋지만, 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주인공이 아이를 통해 모르핀을 구해 자살을 하기위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이 이야기와 주인공의 현실이 묘하게 맞물리나 그 사이 간극이 너무나도 커서 마지막에 그것들이 잘 맞물리지 않고 헤매게 된다.
난 이 장면이 진짜 내가 올 해 본 모든 장면 중 세 손가락에 든다고 생각한다.
(이게 그 장면인데 진짜... 너무 슬프다..)
3. 이 세상 모든 '로이'들에게
가장 마지막 장면은 알렉산드리아가 영화들에서 스턴트를 하는 로이를 찾는 나레이션과 함께 여러 고전 액션 영화들의 장면들이 지나간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 뒤의 이 세상 모든 '로이'들에게 헌사하는 장면 같아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나만 그런건가.. 마지막에 다같이 모여 영화를 보고, 영화의 장면장면들이 흘러가는 엔딩을 보고있으니 문득 '시네마 천국'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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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장면
(이 장면도 앞서 말한 장면의 연장선이다. 같은 파트)
이 색감도 너무 좋고, 모든 것을 포기한 로이의 모습이 너무 가슴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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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이란 무엇인가
삶은 항상 고통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언젠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인생이 버려지고 밟히고 피를 흘려도, 믿음을 덤덤하게 손에 쥐고 있는 사람에게 희망은 온다.
희망이 온다는 믿음, 그것이 희망이다.
<쇼생크 탈출>은 침대 맡에 걸어두고 싶은 바로 그런 영화다. 언제나 다시 봐도 질리지 않는, 보는 사람에게 희망을 건네주는 작품이니까. 담담한 무기징역 수감자 레드(모건 프리먼)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슨)은 절망이 가득한 쇼생크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한줄기 희망이다. 그가 짙은 회색빛 감옥에 덧칠해 나가는 희망이 서린 일상들은 자신뿐 아니라 쇼생크 모두에게 작은 빛을 전해준다. 그 빛은 이 영화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비친다. 앤디가 탈옥 후에 갔다는 지와타네오가 어딘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희망한다. 그곳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절망과 희망은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빛이 난다. 하지만 때론 절망은 희망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무엇이 절망이고 무엇이 희망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는 희망의 두 얼굴을 보여주고 등장하는 숫자에 절망과 희망에 대한 상징을 담아서,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가도록 알려준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번의 총알과 절망, 희망의 다른 얼굴
<쇼생크 탈출>에는 총알을 사용하는 세 번의 장면이 나온다. 총알은 곧 절망이다.
첫 번째는 앤디가 부인과 정남(情男)을 죽였다고 하는 총알이다. 하지만 장전하는 모습만 나올 뿐, 앤디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당시 앤디는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였고, 강에 버렸다고 하는 총도 나오지 않아 증거인멸로 죄가 가중되어 유죄가 된다. 앤디의 죄에 대한 이 모호한 설정은 영화 클라이맥스까지 계속된다. 앤디는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게 정말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다. 사실 그에게서는 무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보단, 모든 걸 체념한 무기력한 사람만이 보인다. 쇼생크의 첫날 다른 죄수들은 억울하다며 울고 난리 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앤디는 억울해하지 않는다.
앤디는 자책을 하고 있었다. 설령 자신의 기억대로 부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부인이 바람피우다 죽은 것은 자신이 부인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해서였다고. 앤디는 부인과 정남을 죽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앤디는 스스로를 죄책감의 감옥에 가둔 셈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이 생기면 사람은 스스로를 절망의 감옥에 가둔다. 마음속에 있는 절망의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용서다. 자신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것을 알면, 자신을 묶었던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두 번째 총알은 앤디의 무죄를 증언할 증인을 죽인 총알이다. 모든 것이 잘 풀릴 수도 있다고 확신한 순간, 그 총알은 앤디를 가장 깊은 절망에 빠트린다. 살다 보면 '아, 이제 희망이 이루어지겠구나'와 같은 날이 온다. 그러나 희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희망의 결과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희망에 차올라서 모든 것을 망가트린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 오든 절망이 오든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은 절망의 얼굴로 바뀐다.
세 번째 총알은 교도소장의 권총 자살이다. 자신의 모든 비리가 밝혀졌을 때, 그리고 자신이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교도소장은 절망의 끝에서 총알을 선택했다. 모든 죄수들에게 끝없는 절망을 주며 군림하던 그가, 사실은 자신에게 오는 절망은 감당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고 뿌려놓은 절망의 씨앗들이, 모두 자신에게 돌아오는 기분이었을 테니. 진짜 절망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작은 절망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고, 남에게 준 절망은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두 개의 밧줄과 구원,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
<쇼생크 탈출>에는 두 개의 밧줄이 있다. 밧줄은 구원이다.
처음 밧줄은 쇼생크에서 가장 나이 많은 브룩스의 구원을 도와주는 밧줄이다. 브룩스는 쇼생크에서 꼬부랑 노인이 될 때까지 갇혀있어서, 쇼생크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감옥에 길들여진' 죄수였다. 영화에 나오는 쇼생크의 가장 무서운 점은 폭력적인 간수도 비리투성이의 교도소장도 아닌, 그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절망 안에 오래 있다 보면 원래의 자신이 어떤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린 채 명령에 따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기르는 개에게 목줄을 채워 그 1미터의 절망으로 '길들이는'것처럼.
브룩스는 가석방을 받았지만 쇼생크에서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 지 알고 있었다. 동료에게 칼부림을 해서라도 절망 속에서 살고 싶어 했다. 절망에 길들여진 사람은 절망이 곧 희망이다. 세상으로 내던져진 브룩스는 희망과 자유라는 절망에 빠지고, 그 구원의 길로 밧줄로 목을 매는 것을 선택한다. 그는 자살함으로써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한다.
두 번째 밧줄은 앤디의 밧줄이다. 앤디 역시 그 절망에서 구원해 줄 도구로 밧줄을 손에 든다. 그러나 앤디는 영화에서 내내 나오듯 쉽게 절망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강한 사람이었고, 결국 절망에서 구원하는 길은 탈옥이라 마음먹는다. 밧줄은 탈옥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였다. 사실 구멍을 파놓은 지는 오래되었고, 단지 탈옥을 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스스로를 절망에서 구원하는 길은 마음먹기가 가장 힘든 법이다.
하지만 절망에 있을 때 언제 올지 모르는 희망을 꿈꾸며 절망에 저항하기보다는, 절망에 순응하고 길들여지는 게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은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으면 천국을 꿈꾸기보단 지옥에 적응하는 게 낫다고 여길수 있다. 그러나 절망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온다. 길들여지느냐, 길들여지지 않느냐. 그 마음가짐이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기도 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도 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밧줄이 '절망'으로 구원하느냐 '희망'으로 구원하느냐의 두 얼굴을 가진 것처럼.
하나의 도구와 증거, 희망을 대하는 태도
<쇼생크 탈출>에는 단 하나의 탈옥도구와 증거가 나온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탈출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절망과 희망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앤디가 유죄를 선고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증거인멸이었다. 앤디가 강에 버렸다는 총이 발견되지 않아서. 총알을 발사하면 총알에 고유의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으로 사용된 총알과 비교할 수 있어 정말 앤디가 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앤디는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총을 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줄 증거를 없애버린 셈이었고, 총이 발견되지 않자 증거인멸로 더 형을 무겁게 받는 원인이 되었다.
사람이 절망에 빠졌을 때, 그 절망에 취해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자신을 구원해주러 오는 손길을 스스로 내치고 더욱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작은 실수나 작은 잘못으로 끝날 수 있던 것을 스스로가 더 키워간다. 그래서 절망에 빠졌을 때는 자포자기의 행동을 하기보단, 희망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중요하다. 절망에 빠졌다고 느낀 그 순간이 진짜 절망이 아니다. 절망이라고 여기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 진짜 절망이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희망이 보인다고 섣부르게 판단하고 기쁨에 겨워하는 순간 희망은 오기도 전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순간적인 감정의 흔들림으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아야 한다.
앤디는 쇼생크에서 사는 동안 찾아온 수많은 절망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번, 무죄를 입증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손에 잡혔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 교도소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어, 희망을 더한 절망으로 빠트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군다나 그 행동으로 탈옥용 굴을 판 것을 들킬 뻔했다.
앤디는 희망으로 가는 길에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았다. 철저한 계획을 세워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탈옥했다는 증거를 경찰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투고한 '쇼생크의 비리'에 진실함이 더해질 테니까. 희망이 완벽한 현실이 될 때까지 묵묵히 계획을 실행했다. 우리도 삶에서 그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희망이 완벽한 현실이 될 때까지 섣불리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는 것 말이다.
실재하지 않는 여성, 희망의 모습
<쇼생크 탈출> 에는 여성이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곧 희망의 모습이다.
앤디의 부인은 사진조차 나오지 않는다. 또 가석방 심사원이나 숙소 관리인으로 여성이 나오지만 존재감이 없다. 하지만 '리타 헤이워드'는 다르다. 리타 헤이워드는 쇼생크 감옥 안 극장에서 매번 틀어주는 영화 <길다>의 히로인이다. 레드를 비롯한 수감자들은 리타 헤이워드가 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하는 컷에 엄청난 환호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죄수들에겐 실제가 아닌 허상이다. 그러기에 쇼생크 수감자들에게 리타는 희망이다. 이 영화의 원작인 스티븐 킹의 소설 제목도 원래는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에서의 구원(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이다.
물론 겉으로 보면 리타 헤이워드라는 허상은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수감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허락되는 여흥에 불과하다. 그 작고 하찮은 여흥이 그나마 수감자들을 웃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의 '포스터에 숨겨진 구멍'은 구원을 주는 희망의 길이었다. 교도소장이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찌르자, 있을 리가 없는 포스터 속으로 팔이 빨려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교도소장에게 자신의 비밀을 훤히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성적 비유로의 여성이 아니라, 앤디를 지켜주고 구원한 여신인 셈이다. 물론 포스터가 계속 바뀌어 나중에는 리타 헤이워드가 아니라 라켈 웰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비현실적인 구멍, 구원, 그리고 희망과 카타르시스는 모두 그 안에 있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믿음으로써만 존재한다. 어쩌면 실제로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리타 헤이워드는 희망이 있다고 믿는 믿음에서 희망이 시작한다고 말해준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믿지 않는 자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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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에 성공한 앤디는, 친구 레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쇼생크 수감자들은 '희망은 위험한 것'이라며 경계한다. 그런 희망이 더 절망에 빠지게 하고 괴롭게 만들다가 죽어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레드에게, 앤디는 희망을 말한다. 레드도 절망에 길들여져 절망이 희망이 되었기에, 자살이라는 절망의 여행을 희망처럼 꿈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앤디가 희망에 대한 믿음을 레드에게 물들였기 때문이다. 앤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가슴속에 간직한 희망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다.
삶에서 절망을 선택할 것인가, 희망을 선택할 것인가는 나에게 달렸다. 둘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절망과 마주하지만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앤디처럼, 레드처럼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다.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니까. 레드가 국경을 넘으며, 간직했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는 문득 내가 아이처럼 흥분해 가만히 앉아있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끝을 알 수 없는 긴 여행을 시작하는 자유인만이 느낄 수 있는 흥분이리라.
나는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길 희망한다.
나는 내 친구를 만나 악수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태평양이 꿈에서 본 것처럼 푸르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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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흥신소] 선을 넘은 소년 "베러 와치 아웃"
흥해라 이 영화
베러 와치 아웃
- 크리스마스 이브 아빠 엄마는 외출한 집 베이비시터와 남게 된 집 알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는데...따분한 공포영화의 선을 가뿐히 넘은 '호러판 나홀로 집에'를 표방하는 이 영화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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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당신은 학생인가> 메인 예고편
왜 우리가 하는 공부는 고통스러울까?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갓 수능을 마친 학생들이 뭉쳤다.
그렇게 시작된 학생주도 교육개혁 프로젝트. 5년간 그들의 움직임은 학교를 다니는 사람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해야할 시사점을 던져준다. 당신은 학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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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장르만 로맨스> 메인 예고편
매일매일 버라이어티한 그 작가의 사생활 개봉박두!
쿨내진동 이혼부부 일촉즉발 비밀커플 주객전도 스승제자 알쏭달쏭 이웃사촌
평범하지 않은 로맨스로 얽힌 이들의 사생활이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