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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회사, 집, 회사만 오가는 제과 연구원 ‘치호’(유해진). 그는 과자밖에 모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세상에서 가장 어려워한다. 어느 날, 염치없는 형 ‘석호’(차인표)의 부탁으로 대출 보증을 서 주기 위해 캐피탈사를 찾은 치호 앞에 세상 밝고 직진밖에 모르는 '일영'(김희선)이 나타난다.
밥친구를 핑계 삼아 매일 같이 일영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에 눈을 뜨기 시작한 치호.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 치는 형, 형의 도박 친구인 ‘은숙’(한선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제과회사 사장 ‘병훈’(진선규)도 치호의 삶에 끼어들기 시작하고, 쳇바퀴 같던 치호의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휩싸인다.
화려한 이름값과 흥미로운 결과물
23년 여름 시장의 마지막 주자인 <달짝지근해: 7510>(이하 <달짝지근해>)는 근래 극장에서 보기 힘든 로맨티 코미디다. 이 로코에서 눈길이 가는 대목은 역시나 이름값이다. 유해진, 김희선, 차인표, 진선규, 한선화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기 영역을 구축한 배우들이 한 데 모였다. 제작진도 화려하다. <완득이>, <증인>의 이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각본은 <스물>, <극한직업>, <멜로가 체질>, <드림>의 이병헌 감독이 담당했다.
사실 배우와 제작진의 명성에 비해 <달짝지근해>의 완성도는 실망스럽다. 상업 영화, 팝콘 무비의 본분에는 충실하다. 가볍게 즐기기 충분한 영화인 것도 맞다. 다만 코미디는 올드하고, 로맨스는 익숙하다. <비공식작전>처럼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를 똑같이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전체 스토리를 풀어낼 때 완급조절도 부족하다. 즉, 이름값에 기대할 수 있는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찾기 힘들다.
그런데 <달짝지근해>의 결과물은 아쉬움보다는 흥미를 유발한다. 조금만 뜯어봐도 정확히 의도한 타깃이 있고, 철저히 계획대로 만든 영화라는 티가 곳곳에서 나기 때문. 동시에 한 가지 의문도 같이 불러일으킨다. <달짝지근해>와 같은 접근법은 부진한 한국 영화를 회생시킬 한 수가 될 수 있을까? 답은 '아니요'다.
익숙한 코미디
<달짝지근해>는 웃긴 영화다. 코미디로서 강점이 확실하다. 곳곳에 포진한 아재 개그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뻔뻔하다. 슬랩스틱은 나름 효과적이다. 정우성과 같은 카메오가 출연하는 장면에서는 유머의 타율이 순간적으로 더 높아진다. 치호의 캐릭터도 아슬아슬하게 이용한다. 공개 코미디 프로에서 동네 바보 캐릭터를 활용하듯이 치호의 유치하면서도 순수한 면모를 웃음으로 바꿔낸다.
앞에서 웃기고 뒤에서 울리라는 기본 공식도 착실히 따른다. 웃음을 눈물로 전환하는 방식은 올드하다. 주인공에게는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씩 있다. 그런데 그 사연이 전부 가족과 관련돼 있다. 교통사고로 엄마가 죽거나,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아빠에게 깊은 원한이 있다. 이들은 즉각적으로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달리 말해 지극히 한국적인 코미디다.
배우들의 이미지도 코미디의 재료로 활용한다. 각 배우의 이미지에 맞는 임무를 제각기 맡긴다. 유해진의 코믹 생활 연기는 지나가는 행인과 말다툼하는 장면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김희선은 흥 많고 오지랖 넓은 엄마 역할에 안성맞춤이다. 철저히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조연도 존재감이 확실하다. 차인표의 어딘가 모자란 조폭 연기, 한선화의 푼수 연기는 분위기를 띄우는데 딱이다.
의도한 올드함
이토록 익숙하고, 올드하고, 공식에 들어맞는 코미디는 일견 의아하다. 이한 감독, 이병헌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생각해 보면 너무 안전한 선택이기 때문. 철저히 레트로 감성을 의도한 소품과 아이디어 때문에 더 의심스럽다. 옛날 차나 통닭 장수 같은 옛날 사람들이 나오고, 스마트폰과 SNS는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는 듯한 사랑의 세레나데 장면은 그 정수다.
하지만 몇몇 대목에서는 독특한 시도도 엿보인다. 이병헌 감독의 스타일이라는 게 보일 정도로 클리셰를 비트는 지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넘어지는 여성을 남성이 받쳐주는 대신 몸을 피한다거나, 기절한 여성을 병원에 데려다주다가 자기도 같이 쓰러지는 식으로. 전체적인 틀을 바꾸는 대신 익숙한 프레임을 유지하되 세부적인 내용만 살짝 손보려는 지점이다.
이병헌만의 말맛도 살아있다. 약국에서 치호와 약사(염혜란)가 티키타카를 주고받는 장면, 치호네 회사 회의 시간에서는 특유의 센스 있는 대사를 맛볼 수 있다. 치호의 형인 석호가 일영을 만나서 으름장 놓는 대목도 뻔한 대사를 어떻게든 피하려는 의지로 가득하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찾기 어려운 극장 상황과 이병헌의 이전 각본을 함께 고려하면, 한 가지 합리적인 추정을 할 수 있다. 이 올드한 코미디는 철저히 의도된 결과물이라는 것. <극한직업>의 대성공과 <멜로가 체질>의 상업적 실패 이후, 안정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 일례로 <드림> 역시 선 웃음, 후 감동이라는 공식에 충실했다. 즉, <달짝지근해>는 과거의 향수를 시대에 맞게 살려내려는 도전인 셈이다.
로맨스마저 올드하다
그런데 <달짝지근해>는 도전의 목적지를 잘못 정한 듯하다. 코미디뿐만 아니라 로맨스 파트에서도 비슷한 연출 스타일을 유지한 선택이 역효과를 낸다. 이는 <드림>과 유사한 문제다. 초중반부에 코미디를 잘 쌓아 올리다가 후반부에 급작스러운 감동 코드로 분위기를 깨버린다. 그 결과 현대적인 느낌을 가미하려는 시도는 무위에 그친다.
로맨스 파트는 정석대로 흘러간다. 남녀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고, 썸으로 발전하고, 연애를 시작하지만 외부 사정이 겹쳐서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진심이 전해지면서 재결합에 성공하고, 행복한 연애를 이어간다. <달짝지근해>의 문제는 진심을 확인하는 클라이맥스에 있다. 과자 전문가로 100분 토론에 나간 치호. 사회자는 그에게 주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그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생방송에서 일영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물론 영화는 그다음 장면에서 여러 변주를 준다. 옛날 방식을 어떻게든 센스 있게 포장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다. 급하게 생방송을 끊은 PD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일영은 공개 고백을 한 발짝 늦게 접하고, 일영과 치호가 서로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도 클리셰를 살짝 비틀었다. 하지만 기대만큼 효과를 보지는 못한다. 공개 고백이 극 중 몇 안 되는 진중한 장면이다 보니 사족처럼 느껴지기 때문.
완급조절에 실패하다
이에 더해 공개 고백 장면은 은은하게 녹아 있던 따뜻한 메시지를 갑자기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도 한다. 이한 감독은 <달짝지근해>를 통해 “사람은 알고 보면 누구나 다 비슷하고, 또 동시에 모두가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달짝지근해>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 간의 로맨스를 보여준다. 어릴 적 교통사고를 당한 치호는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계선 지능인처럼 묘사된다. 영일은 미혼모라서 어려움을 겪는다. 직장 상사가 집적 거리기도 하고, 혼자서 딸을 키우느라 힘겨워한다. 이때 영화는 치호를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사람으로, 영일을 쉽거나 문란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이자 엄마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로맨스를 통해서.
이러한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문제다. 영일이 술자리나 다른 장소에서 모욕당하고, 치호가 주변인에게 살짝 무시당하는 장면에서나 언뜻 느껴질 정도다. 그러니 치호가 카메라에 대고 사람 한 명 한 명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갈하고 영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급작스럽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코미디에만 열중하다가 뒤늦게 로맨스 파트를 챙기려는 형국이다. 후반 추가 시간, 장신 공격수를 넣고 롱볼만 노리는 축구경기처럼. 이는 영화가 '착하다'는 인상을 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세련되지는 않은 이유다.
과연 이게 최선일까
사실 <달짝지근해>의 성적은 준수하다. 아직 손익분기점(165만 명)을 넘을 거라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일일 박스오피스 3위는 놓치지 않고 있다. 무거운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오펜하이머>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틈새를 노린 전략이 효과를 내고 있다.
<달짝지근해>의 흥행은 한국 영화계의 현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손익 분기점은커녕 관객수 100만 명도 넘기기 어렵다 보니 익숙한 맛에 새로운 양념을 살짝 더해서 생존을 도모하는 전략이 트렌드로 떠올랐다. 특히 이번 여름 영화 시장을 기점으로 레트로, 올드함이 한국 영화계의 돌파구가 됐다. 당장 <밀수>가 70년대 레트로 감성을 내세워 여름 시장 승자가 됐듯이.
다만 이 트렌드가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지는 의문이다. 관객의 니즈 변화는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감지됐기 때문. 2019년에 흥행한 작품만 봐도 전통적이 흥행 공식을 따른 작품은 많지 않다. 외려 뭔가 하나 독특한 면이 있는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했다. <알라딘>, <기생충>, <엑시트>, <극한직업>처럼. 올해 <범죄도시 3>나 <엘리멘탈>도 마찬가지다. 중독적인 음악, 파격적인 스토리, 경쾌한 액션, 우직한 코미디처럼 뭐라도 특이점이 있는 영화에 관객은 반응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달짝지근해>의 접근법은 우려스럽다. 전략이 지나치게 근시안적이지 않나 싶다. 무난하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은 아직 변할 생각이 없다는 신호로 읽힐 여지가 다분하다. 즉, 익숙함을 유지하되 약간의 변주만 주겠다는 의도가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올드함이나 이름값에 비해 부족한 완성도보다. 설령 손익분기점을 넘긴다 해도.
Poor 형편없음
영화의 완성도보다 걱정되는 의도와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