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9-28 18:12:46
그대가 있어 아름다운 인생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리뷰
염정아 배우와 류승룡 배우 주연인 뮤지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왔다. 여러 차례 개봉이 연기되어 아쉬움을 거듭하였지만 올해에는 개봉이 확정되어 드디어 스크린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9월 28일에 개봉한 ‘인생이 아름다워’는 최국희 감독이 연출했고 한국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표현하며 가을과 걸맞은 영화이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따뜻하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자신의 행복보다는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던 이 시대의 부모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미뤄둔 행복과 훌쩍 지나가 버린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추억할 수 있는 세월로서 기억될 수 있는 그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따스하게 감싸안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했던,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그대가 있어 더 아름다웠다고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가족이라는 단어는 먼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가깝고 당연한 사이가 되었다. 당연함은 무관심으로 이어졌으며 일상의 변화에는 포함되지 않는 존재로서 존재한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시절이 있었음에도 내가 살아가는 현재에 몰두하느라 보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버거움을 견디기엔 참으로 미약하다.
지금의 모든 현상은 차마할 수 없는 그 버거움을 감히 할 수 없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버겁고 지치고 힘든 이 삶은 왜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걸까?
인생은 90%의 불행과 10%의 행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행복한 순간보다는 힘들고 지치고 화나고 슬픈 순간이 훨씬 많은 지금 이 순간에는 큰 슬픔을 덮을 수 있는 건 역시 작지만 큰 행복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소확행이라는 말은 사실 큰 행복이 아닐까. 슬픔만큼이나 크게 전염되는 행복의 힘은 생각보다 더 강하다. 그리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은 인생이 아름다워 더 아름답다.
노래 장면이 다소 뜬금없이 등장하지만, 영화 안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이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고 이야기 또한 뻔하지 않아서 재미있게 보았다.
나는 철저히 부모의 입장이 아닌 자식의 입장으로서 볼 수밖에 없었던 것만큼 그 시절의 그 사람들, 그리고 우리 부모님까지 마주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여러 위기를 겪으며 명확해졌다.
내 자체에 대한 정의도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는 또렷하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서있는 공간에서 부모님과 함께하는 순간과 대화로 이 순간이 기억남을 수 있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이 없듯이 완벽하지 않은 우리들이 만나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 아닐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부모님이 생각나는 영화였다. 때론 뻔한 게 더 재미있을 때도 있으니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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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포는 열심히, 세계는 그럭저럭
세포는 열심히, 세계는 그럭저럭
<일하는 세포> 실사화 영화 리뷰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걱정보다는 낫다
실사화는 늘 걱정이 먼저 생긴다. 실사화를 왜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하면 끝도 없으니 넘어가겠다. 일단 실사화가 되었다고 하면 재미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큰 기대도 없다. 실사화로 제작되어서 잘했다는 생각이 든 작품이 많지 않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의 실사화가 그렇다. 미묘한 가발과 미묘한 연출들이 웃기지도, 재밌지도 않을 때 진심으로 마음이 아프다.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마음에 눈물을 흘린다.
<일하는 세포>는 몸속의 세포를 의인화하여 색다른 재미를 만들어 낸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은 각 에피소드에서 다양한 몸속 현상과 세포를 설명하고, 의인화된 캐릭터를 보는 맛이 중심이었다. 그 사이에 백혈구와 적혈구의 러브라인을 소소히 느낄 수 있어서 힐링하면서 보는 애니였다. 실사화 된다고 했을 때, 가장 걱정된 건 역시 비주얼이었다. 너무나 판타지다운 이미지였기에 과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실사화는 그런 걱정보다는 나았다. 과함을 묘하게 숨길려 하지 않고 작정했다는 듯 과함을 드러냈다. 잘 활용했다. 특히 몇몇 장면은 너무 웃겼다. 도파민이 도는 세포들이 미친 것 같았다. 혈소판들은 실사화도 귀여웠고, 빵빵한 배우진이 맡은 캐릭터들은 매력적이었다.
낫기는 해도 좋지는 않아...
문제는 스토리였다. 에피소드 형식으로 엮인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영화로 만들다 보니 개연성은 떨어지고, 흐름이 없었다. 애니메이션과의 차이로 세포들의 주인이자 몸인 니코와 사다오의 이야기가 두드러진다. 이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엮어서 개연성을 만들어보려 한 것 같지만 도움은 썩 안 됐다. 세포 외에 세계가 너무 그럭저럭 흘러가고 지루하다. 차라리 세포들끼리 이야기를 잘 엮어보는 게 낫지 않았나 싶다.
니코와 사다오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기특한 딸과 어리버리하지만 딸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니코는 건강을 잘 챙기는 사춘기 소녀다. 일어나는 초반 일들은 사랑과 관련된 도파민, 우연한 상처 정도다. 몸속 세포 이야기도 영화의 분위기와 맞게 적절히 코믹하고, 힐링이었다. 그런데 후반으로 가면서 극히 어두워진다. 니코가 백혈병에 걸리고 항암을 하며 몸속은 거의 멸망한다. 이런 스토리가 나쁜 건 아니지만 시청자가 원하는 일하는 세포 실사화와 맞는지는 의문이다. 개연성이 떨어지는데 이렇게 어두워지니 다소 지루했다. 너무 많이 시간을 끌었고, 결말도 시간을 끈 것에 비해 극적이지 않았다.
차라리 원작 스토리를 따라가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메인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암세포(영화에서는 돌연변이 세포)가 원작에서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는데 실사화에서는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묘사가 잘 나온다.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알겠지만, 악역의 이야기가 너무 짧다. 안 그래도 과한 설정에 캐릭터인데 이유도 잘 모르니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다. 한 없이 가볍다가 다들 갑자기 무거워져서 당황스럽다. 코믹하게 가려고 했으면 그 톤을 잘 지켰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장면 돌려쓰기 하는 거 너무 티 나서 머쓱하다.
열일하는 배우들
배우들이 놀랄 정도로 빵빵하다. 다들 연기를 너무 잘해서 당황스럽다. 그래서 스토리만 더 잘했어도 괜찮은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본에서는 나름 흥행했다. 흥행과 괜찮은 영화가 되는 건 다르니까... 두 주연의 연기도 대단했고, 조연들의 연기도 대단했다. 나가노 메이가 연기한 후반부는 없던 개연성도 연기로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일하는 세포>에서 무엇보다 재밌는 건 세포였던 것처럼 실사화에서도 무엇보다 열일하고 재밌게 해준 건 배우들이었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각 잡고는 힘들고, 친구랑 같이 킬링타임 정도로 보는 걸 추천한다.
웃기는 세포들
웃기는 장면들은 진짜 말도 안 되게 웃으면서 봤다. 어이없이 웃겨서 약간 화가 난다. 아재개그에 웃어버린 기분이다. 근데 웃긴 건 맞긴 하다. 일본 영화의 개그가 잘 맞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영화이다. (뒷부분은 아쉬워해도, 앞부분은 확실히) 그리고 나름 재밌었던 포인트가 사실 하나 더 있다. 전대물에 나올 것 같은 세균들의 코스튬을 보는 재미가 있다. 극히 개인적인 재미이지만 같은 마음인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영화 코스튬을 생각보다 잘 만들었다. 하나씩 나오는 세균들 코스튬 퀄리티가 좋다. 단체로 나오는 세균들은 말하지 않겠다. 이것도 나름 웃기긴 하다. 다들 후드집업을 입고 나와서 웃기다. 세균들이 원작 애니에서 자주 출연하는데 영화에서는 출연 많이 못 해서 아쉽다. 뒷부분에 끄는 부분을 줄이고 몇 가지 에피소드를 더 넣었더라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한 줄 코멘트
세포들은 큰 웃음을 주었고, 스토리는 한숨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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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 오브 더 데드> 질서의 파괴가 아닌 충돌을 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군용 운송 차량이 불의의 사고로 전복되자, 그 안에 갇혀 있던 모체 좀비 '제우스'는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제우스로부터 전염된 좀비들에게 도시가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하는 사이 '스콧(데이브 바티스타)'과 그의 딸 '케이트(엘라 퍼넬)', 친구인 '마리아(아나 데 라 레게라)'와 '반데로(오마리 하드윅)'는 격렬한 사투 끝에 도시가 봉쇄되기 직전 탈출에 성공하고 트라우마와 불안함 속에서 힘겹게 각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업가 '타나카(사나다 히로유키)'는 스콧에게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자신의 금고에 들어있는 거액의 현금을 꺼내 달라고 부탁하고, 비로소 삶의 목표를 찾은 그는 팀을 꾸려 다시금 좀비가 우글거리는 도시에 들어선다.
지금은 <저스티스 리그>, <맨 오브 스틸> 등의 히어로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잭 스나이더 감독. 사실 그는 히어로 영화를 맡기 전부터 혁명적인 좀비 영화 <새벽의 저주>(2004)로 이미 명성을 얻었다. 이는 <새벽의 저주>가 협소한 공간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수많은 좀비들이 조성하는 공포심 대신, 속도와 근력을 갖춘 좀비들이 사회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찰나의 순간과 혼란 속에 응축된 공포와 두려움을 묘사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스나이더 감독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20여 년만에 메가폰을 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아미 오브 더 데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한번 좀비 영화에 '사회 질서의 붕괴와 혼란' 대신 '서로 다른 사회 질서의 충돌과 긴장'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당장 <아미 오브 더 데드>는 시작부터 결이 다르다. <킹스맨>의 교회 액션 시퀀스를 연상시키는 잔인하나 흥겨운 오프닝은 군용 수송 차량에서 탈출한 모체 좀비, 제우스가 라스베이거스를 장악하는 아비규환을 간결하게 묘사한다. 5분가량 되는 이 시퀀스는 카지노에서 유흥을 즐기던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고, 도시는 공습으로 불타며, 라스베이거스가 컨테이너 벽으로 봉쇄되는 와중에 스콧을 비롯한 주인공 일행 중 일부만 간신히 도시 밖으로 빠져나오는 이야기를 함축한다. 좀비 영화 한 편을 만들기에도 충분한 내용을 <아미 오브 더 데드>는 가볍게 짚고 넘어간다. 이는 과거의 관습과 규칙에 갇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기존의 좀비 영화들과는 차별화된 이야기를 보여주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스콧 일행이 라스베이거스가 첫 발을 내딛는 장면에서 영화의 의도는 더욱 분명해진다. 스콧 일행은 좀비들로 가득한 라스베이거스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난장판 일지 걱정한다. 하지만 이미 도시를 드나든 경험이 있는 '릴리(노라 아르네제더)'는 그들에게 좀비도 규칙이 있으며 그 규칙을 따르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 직후 영화는 규칙을 자세히 보여준다. 지능을 가진 이 좀비들은 인간을 봤다고 바로 달려들지 않는다. 그들은 도시에 발을 내디딘 사람들을 즉시 죽이는 대신 그들과 일종의 약속을 맺는다. 인간들이 좀비들의 왕, 제우스에게 바칠 희생양을 내놓으면 좀비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무엇을 하든 관여하지 않는다. 이렇게 좀비들의 세계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아미 오브 더 데드>는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 무너진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투보다는 좀비의 사회와 인간의 사회가 어떻게 만나고 충돌하게 되는지에 주목한다.
이는 플롯이 상당히 유사한 연상호 감독의 <반도>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보이는 지점으로, 두 영화의 시간적 배경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어두운 밤 동안 대부분의 사건이 진행되는 <반도>에서 좀비들이 점령한 한반도는 그저 생존만이 목표인 아비규환이다. 하지만 작중 대부분 밝은 낮 동안 진행되는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사건들은 좀비들의 사회에도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새벽의 저주>의 속편이 아니다. 보여주려는 사회상이 다르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또한 무질서함과 혼란 대신 안정적인 좀비들의 사회나 질서를 중점적으로 묘사하다 보니 자연히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기대에 비해 액션도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이 충돌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는 좀비와 인간이라는 이질적인 존재 간의 사회가 이루는 대립항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하면서 좀비물 특유의 사회비판적 메시지, 더 나아가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다. 우선 스나이더 감독은 곳곳에 종교적, 신화적 상징물을 배치하면서 좀비와 인간 사회의 관계를 고대와 현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유비로 변환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제우스의 존재다. 그리스 신화 속 최고신의 이름을 쓰는 그는 신들의 궁전인 올림푸스의 이름을 딴 호텔을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등장 장면이 의미심장한데, 그는 자유의 여신상 위에서 태양을 등진 채 희생양을 바치는 스콧 일행을 내려다보면서 등장한다. 이러한 구도는 마치 산 위에서 신이 지상의 인간을 내려다보는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좀비에게 신화적인 치장을 덧입히는 연출 덕분에 좀비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좀비가 점령한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의 함의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작중 좀비와 인간의 관계는 신과 인간을 지속 가능한 선의의 관계로 여긴 고대인들의 믿음을 연상시킨다. <고대 이집트의 신전 Temples of Ancient Egypt>의 저자 브라이언 E. 샤퍼(Brian E. Shafer)에 따르면 고대 종교적, 신화적 질서란 신이 인간에게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삶과 세상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이후 인간은 신이 베푼 세상에 대한 감사함과 그 세상을 앞으로도 유지해줄 것에 대한 기대를 공물(희생양)에 담고, 인간의 선물을 받은 신은 다시 인간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이러한 연쇄작용의 결과 신과 인간은 명령과 복종 혹은 단순한 가치의 교환이 아닌 호의의 증식 관계 안에 머문다.*
영화에서도 좀비들은 언제든 인간을 먼저 공격할 수 있었지만,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규칙을 따를지 말지 선택할 기회를 준다. 또한 희생양을 받은 후에는 인간이 자신들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가능한 한 약속을 지키며, 바쳐진 제물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죽이는 대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동일한 가치를 거래,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호의로써 약속을 맺고, 신뢰를 지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라스베이거스에서 형성되는 좀비와 인간의 관계와 그 중심에 위치한 희생제물의 존재는 고대적, 신화적 질서 및 공물과 유사한 측면이 있으며, 라스베이거스는 종교적, 신화적 공간이자 고대적 질서가 자리 잡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반면에 작중 라스베이거스 외부의 공간은 철저히 현대 자본주의적 질서가 자리 잡은 곳으로 묘사된다. 자본주의 사회란 어떤 의미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가 돈으로 치환될 수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있는데, 영화는 좀비 영화에 하이스트 무비를 더하면서 이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돈'이다. 난민 캠프에서 케이트와 친구 '기타(후마 쿠레시)'는 돈만 있다면 캠프 관리자에게 위협과 성희롱을 당하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돈이 그 어떤 사회적 시스템보다도 우위에 서 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기타는 심지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좀비들이 가득한 라스베이거스에 잠입해 카지노에서 현금을 빼돌리려고 한다.
스콧이 팀원들을 모으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그는 모든 설득을 돈으로 행한다. 팀원들도 각기 어떤 삶을 살고 있든 간에 거액의 현금을 가져오면 된다는 말만 듣고 미션에 뛰어든다. 또 임무 중에도 각각의 수익을 배분하는 것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역할의 중요도에 따라 좀비의 공격으로부터 구해줄지 말지를 정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불가능한 미션을 맡기는 흑막 타나카의 목표도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돈인 것으로 드러난다. 상대방을 향한 호의나 신뢰 대신 철저한 계산과 교환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아미 오브 더 데드>는 이러한 좀비 대 인간의 구도를 고대 대 현대, 호의적 대 계산적, 신뢰 대 교환의 관계로 점진적으로 치환시킨다. 은연중에 전자를 '이타적이고 배려적인 삶의 태도'로, 후자를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삶의 방식'으로 정의하면서 전자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괜히 가장 황금만능주의적 이미지가 가장 강한 도시인 라스베이거스를 좀비에게 넘겨준 것이 아니다. 스콧의 팀원들이 언제 위험에 처하는지를 봐도 영화의 스탠스를 알 수 있다. 팀원 간의 기대를 저버리고 잘못된 정보를 줄 때 혹은 돈을 노리고 여왕을 공격해서 제우스의 아이를 죽였을 때 스콧의 팀은 좀비들의 공격을 유발하고 엄청난 재앙을 마주한다. 반대로 서로의 기대와 신뢰를 버리지 않고 좀비의 질서에 순종해 제우스와 여왕을 공격하지 않고, 팀워크를 발휘하자 그들은 금고의 문을 여는 데 성공한다.
특히 케이트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가장 명확히 표현하는 캐릭터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관점에서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자신보다 타인의 목숨을 먼저 챙기는 그녀의 독단은 어리석은 행위다. 그러나 호의가 호의를 낳는 새로운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녀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실제로 케이트가 기타를 구하려고 한 행동들은 스콧과 헬기 조종사 마리안, 유튜버 마이키와 릴리의 선의를 낳고, 그들의 선의가 모인 결과 그녀는 목숨을 구한다. 스콧이 '딸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버지'라는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데도 그의 행적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딸이 자살한 감독의 개인사도 영향이 있겠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내러티브와 구도를 통해 좀비에게 신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연출이 좀비보다 우월한 인간의 관계를 역전시킨 결과, 인간의 존재와 가치가 무시되는 각박한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좀비 영화 다운 주제의식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메시지, 주제의식과 감정선과는 별개로 <아미 오브 더 데드>에서 상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은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일 수밖에 없다. 상징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한 화면 안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집어넣는 특유의 스타일은 필연적으로 충분한 상황 설명의 부재로 이어져 불친절한 영화로 인식될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특히 좀비 영화가 캐릭터에 따라 좀비로 변하는 속도가 달라지는 등 유달리 장르 고유의 문법이 두드러지는 장르이다 보니 설명의 부족은 설득력의 저하, 개연성과 핍진성의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주제의식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케이트의 행동이 아무 맥락 없이 답답해 보인다는 사실은 이 작품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미 오브 더 데드>는 분명 완성도에 문제가 있다. 화려한 액션이나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를 기대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그 화법과 스타일이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본인의 커리어 시작점으로 되돌아간 스나이더 감독의 초심과 변화가 동시에 느껴지는, 즉 본인이 제시했던 좀비물의 관습에 머무른 단순한 속편이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 좀비라는 소재로부터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상상력과 세계관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는 점에서 <아미 오브 더 데드>가 장르물의 영역을 한 발짝 더 넓힌 것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지루한 팝콘무비 혹은 상징과 유비가 가득한 좀비 영화의 새 지평
*Byron E. Shafer et al, Temples of Ancient Egypt.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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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솔한 에세이, 자기 구원의 문을 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더 웨일>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웨일>은 불편한 영화다. 엄청난 거구의 찰리가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초반부 장면부터 그렇다. 자기 몸을 지탱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높은 칼로리를 자랑하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입에 밀어넣는 걸 보다보면 팝콘과 콜라를 내려놓고 싶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마치 베일을 하나 하나 벗기듯 찰리가 막무가내로 사는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면 그를 지켜보기가 더 어렵다.
그에게는 삶의 의지가 없다. 그는 1주일 안에 죽을 수 있는 걸 알고도 초콜릿과 피자, 치즈를 추가한 미트볼 샌드위치와 탄산 음료를 계속해서 먹는다. 그에게 폭식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식증에 걸렸던 연인을 돕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죽이려 한. 또 이는 동성애자였던 연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세상에 분노하는 마지막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깊은 자기 혐오에 빠진 채 자기 방에 틀어박힌 그의 모습은 거북하고, 보기 불편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더 웨일> 또 한 번 대런 아로노프스키다운 영화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는 대체로 우울하다. 염세적인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적 가치나 상징을 부정적으로 활용하기로도 유명하다. 평범한 구원이나 행복 대신 인간의 모순과 광기를 보여주는 게 그의 장기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 등장 인물을 인간을 환멸하는 염세주의자로 만들어 버린 영화 <노아>처럼. 얼핏 보기에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더 웨일>은 찰리와 토마스의 만남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자기혐오에 빠진 채 죽어가는 한 남성은 구원 받으려면 신을 믿으라는 전도사의 조언을 가볍게 무시한다.
지옥, 현실을 부정한 대가
하지만 <더 웨일>은 예상했던 전개와 결말을 절묘하게 빗겨 나간다. 영화는 구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더 웨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게 구원의 길이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단지 그 길이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찰리와 그의 주변 사람은 본인들이 만들어 낸 지옥에 빠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지옥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한다. 다 각자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 우선 찰리는 자기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자기가 허락한 몇몇 사람(~~와 토마스)을 제외하면 자기 존재를 숨긴 채 살아간다. 집 밖으로 나서지도 않고 바깥 사람에게 자기 존재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당장 본인은 대학 강사지만, 노트북 카메라를 가린 채 줌으로 강의한다. 매일 저녁 피자를 배달시키지만, 자기 안부를 물으며 걱정해주는 피자 배달부에게 단 한번도 자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새생명 선교회 소속 전도사 토마스는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처음부터 전부 거짓말이다. 그는 새생명 선교회 소속이 아니다. 한때는 소속 전도사였으나,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선교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다. 믿음이 강해서 찰리에게 전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선교 방식이 전정으로 옳다는 걸 증명하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찰리를 간호하는 리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찰리가 곧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찰리가 폭식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알면서도 부정한다. 음식을 한 번만 잘못 삼켜도 심장에 무리가 가는 찰리에게 리즈는 고칼로리 음식을 꾸준히 가져다 준다. 이처럼 영화 속에는 자기가 처한 현실을 부정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기도 믿지 않는 방식으로 남들을 도우려 한다. 찰리는 그의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에세이를 쓰라고 가르친다. 화려한 수식어를 빼고, 그럴듯한 명언도 빼고 오직 자기만의 생각과 느낌을 담아서 글을 쓰라고 한다. 정작 본인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 속했던 교회에서 도망쳐 나온 토마스는 성경을 읽고, 신을 믿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찰리를 설득한다. 리즈의 태도도 모순이다. 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그의 자기 파괴적 행동을 돕다가도, 그가 치료 받지 않고 병원도 가지 않으려 한다며 크게 화낸다. 오랜만에 찰리를 만난 전처 메리도 찰리와 화해하는 듯 하다가 결국 다투고 만다. 자기가 엘리를 잘못 키운 것 같다면서도, 다른 방법은 없다며 찰리의 도움을 무시해버린다. 그 결과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다 상처로 가득하다. 스스로도 믿지 않는 구원을 남들에게 강요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도움이 될 리가 만무하다.
진솔한 에세이의 힘
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지옥 속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 방법이 '진솔함'이다. 본인들이 천국이 아닌 지옥에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진솔하게 쓰라고 강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찰리도 내심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엘리의 에세이를 애지중하는 것은 또 하나의 증거다. 그는 아프거나 힘겨울 때마다 소설 <모비 딕>을 비판하는 엘리의 에세이를 소리 내어 읽는다. 그 에세이는 솔직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사실 <모비 딕>은 읽기 어려운 소설이다. 고래에 대한 설명이 매우 길게 나올 뿐만 아니라 분량도 많다. 또 여러 방면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는 주제를 다루기에 난해하다. 하지만 <모비 딕>이 형편없다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극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모비 딕>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에세이는 다른 사람의 평가나 관점은 의식하지 않는 매우 솔직한 글이다. 바로 엘리의 에세이가 그렇다.
엘리는 <모비 딕>이 지루하고 어려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신 자기 경험을 살려 소설을 읽어나간다. 그녀는 소설 속 고래를 찰리에 비유하고, 고래를 죽이고 싶어하는 애이햅의 입장에서 에세이를 써 내려간다. 어린 시절 엄마와 자기를 떠난 찰리에 대한 미움을 고래에 투영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엘리의 첫인상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찰리에게 상처를 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시를 읽고 감상을 써보라는 이야기에, 엘리는 말도 안 되는 욕을 써놓는다. 찰리가 아빠로서 호소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다가, 그가 모은 전재산 14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자 찰리의 부탁을 들어준다. 찰리의 집에 와서 학교 숙제인 에세이를 쓸 때도 찰리가 추천한 시가 엉망이라고 욕한다. 또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 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심지어 SNS에 올려 그를 조롱한다.
하지만 찰리는 엘리를 다르게 본다. 이미 그녀의 에세이에서 진짜 그녀의 모습을 읽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만의 주관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엘리를 본다. 또 자기 행동 때문에 딸이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도 안다. 그래서 그는 딸의 독한 말들을 듣고서 화를 내기는 커녕 솔직함을 마음에 들어한다. 계속해서 이상한 사진을 찍는 엘리의 행동을 두고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사고뭉치 딸 엘리에게서, 찰리는 자신이 강조하던 '솔직함'의 미덕을 본다. 그래서 그것이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엘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지 못했으므로. 찰리는 앨런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솔직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험상 솔직한 것, 자기만의 시선과 관점을 유지하는 게 삶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단순하고 맹목적인 부성애가 아니다.
구원을 향해 내딛는 고통스러운 발걸음
하지만 엘리의 에세이는 찰리에게 위안을 줄지언정 그를 구하지는 못했다. 찰리가 실천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떳떳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를 실천에 옮기자니 찰리는 용기가 없다. 또 무섭다. 머리로는 알지만, 그런다 한들 자기가 진짜 구원받을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나약함은 피자 배달부를 만났을 때 온전히 드러난다. 매일 같이 피자를 가져다 주던 배달부는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 찰리가 궁금한 나머지 호기심에 가는 척하다가 피자를 받으러 나온 찰리를 목격한다. 그는 거구의 찰리를 마주한 후 혐오스러워하며 자리를 뜬다. 이에 찰리는 미친듯이 폭식한다. 배달부의 호기심이, 찰리에겐 크나큰 불행이었고, 그의 자기 혐오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파괴적인 순간을 거치면서 찰리는 역으로 용기를 얻는다.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외부에 공개한 상황이 되었으므로. 솔직해질 수 있는 계기가 원치 않게 생긴 셈이다. 그래서 찰리는 노트북을 켜서 수강생들에게 제발 솔직하게 글을 쓰라며 욕설 섞인 메시지를 보낸다. 마지막 에세이 수업에서는 자신의 메시지대로 진정성 있는 글을 쓴 학생들을 칭찬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트북 카메라를 키고, 자기 모습을 공개한다.
마침내, 고래는 구원받았다
그러나 찰리가 자기 모습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엘리다. 어느 날, 찰리가 잠자는 사이 토마스와 솔직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생긴 엘리. 그녀는 자기가 교회 소속 전도사도 아니고 가족과의 불화 때문에 집에서 가출했다고 털어놓은 토마스의 이야기를 몰래 녹음한다. 또 SNS를 뒤진 끝에 그의 가족을 찾아내 연락한다. 그 결과 토마스는 마침내 가족에게 돌아간다.
혹자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엘리를 배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속사정을 어렵게 털어놓은 친구를 신고한 셈이니까. 찰리는 다르다. 엘리의 에세이를 읽어 본 찰리에게 이 사건은 다른 의미다. 자기에게 미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듯이, 엘리가 토마스에게도 동정심을 솔직하게 표현했다고 이해한다. 또 솔직함이 구원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예상과 달리 가족과 빠르게 화해하고, 가족에게 돌아가게 되어서 행복해하는 토마스를 보면서 더욱 확신한다. 그래서 찰리는 자기혐오의 끝을 찍은 뒤에 엘리에게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에세이를 읽을 때, 찰리는 마침내 깨달음과 확신을 실천에 옮긴다. 깊은 검은 화면에 스스로를 가뒀던 고래가 드디어 밝은 세상을 마주하고 일어나 걷는다. 그렇게 고래는 자기 혐오를 버리고 구원 받는다.
더 나아가 진솔함이라는 깨달음은 찰리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준다. 자기에게 진솔해진다는 것은 곧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이는 타인에게 간섭하고, 구속하고, 원하는 바를 강제하는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반부에 리즈는 과거 찰리가 자기 오빠인 앨런을 도와주었듯이, 자기도 찰리를 돕고 싶었다고 말한다. 설령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오빠 대신 애정을 쏟을 사람으로 찰리를 고른 셈이다. 동시에 자기 욕심을 직시하면서 찰리와 화해한다. 그녀는 찰리가 병원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그가 병원비를 낼 수 있는 돈을 엘리에게 주겠다고 결정하자 크게 화를 낸 것이 모두 본인의 욕심과 바람 때문이었다고 인정한다. 이처럼 <더 웨일>은 찰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있던 모든 이들이 문을 열고, 스스로 채운 족쇄를 마침내 풀어버리는 구원의 이야기다.
찰리의 집이 인상적인 이유
물론 <더 웨일>의 이야기는 보편적이다.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자아 성찰의 이야기. 이는 누구에게나 익숙할만한 메시지다. 그러나 <더 웨일>의 진가는 메시지에만 있지 않다.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찰리의 집을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몇몇 대목을 제외하면 모든 장면은 찰리의 집 안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집이 매우 좁다보니 찰리의 거구와 대비를 이루면서 유달리 답답하고 음울하다. 덕분에 이 공간에 담긴 여러 의미가 잘 드러난다. 찰리를 감싸고 있는 죽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이 집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나 상처가 더 강조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고해소 같기도 하다. 자기 밑바닥을 마주하면서 진실을 깨닫는 공간도 되기 때문이다.
촬영 방식 덕분에 공간적 특성은 더 잘 살아난다. 1.33:1의 화면비를 선택한 게 대표적이다. 가로로 좁은 화면비에서 좁은 공간과 거구의 몸은 전체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한다. 그 결과 공간의 분위기와 다층적인 의미는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협소한 공간을 주된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영화는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때 클로즈업 컷은 대화의 흐름에 따른 각 인물의 감정선 변화를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인물의 표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공간 미술, 촬영, 각본에 이르는 모든 영화적 선택을 최선의 결과로 엮어낸다. 찰리는 사실상 영화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혼자 힘으로 감정 굴곡이 심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이다. 브랜든 프레이저는 이러한 캐릭터가 버겁지 않고, 그의 심경 변화가 충분히 이해되는 연기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동성 성추행 피해, 과도한 스턴트 연기로 인한 혹사, 이혼과 같은 배우 본인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더 짙은 호소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크리틱스 초이스와 미국배우조합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 남우주연상 후보로 꼽히는 이유를 궁금해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내 모습을 직시할 때, 비로소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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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번 믿어 보고 싶은 감독 '최동훈'
첫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첫인상이 좋았던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인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첫인상이 좋은 사람은 마음을 열고 대하게 된다. 아, 너무 괜찮네…하고 느꼈던 사람의 다음 만남 그 다음 만남이 계속해서 좋으면 호감은 복리로 쌓이게 되는 법이다.
충격적으로 좋았던 ‘범죄의 재구성’을 보고나서,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작품이 누군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생동감 있는 캐릭터, 찰진 대사, 속고 속이는 사건들. 잘 짜여진 구조와 세련된 연출.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한 새내기PD였던 시절.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감정은 부러움을 넘어선 충격이었던 것이다. '천재가 나타났네.’ 내게 최동훈 감독은 첫인상이 좋은 그런 감독이었다.
타짜, 도둑들, 암살까지 …데뷔 후 10년동안에 연이어 대박을 터트리며 천만 영화를 두 작품이나 만든 감독. 그 작품들이 나의 취향에도 잘 맞아 믿고 보는 감독이었는데 외계+인 1부를 보고 나오며,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포스터를 보며 어쩐지 서늘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래도 감독 이름 하나만 보고 선택한 영화였는데… 알 수 없는 배신감과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외계+인> 1부는 잘되면 속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다른 시리즈들과 다르게 처음부터 2부가 존재함을 드러내 놓고 개봉했다. (아니 이럴거면 OTT시리즈로 만들었어도 되었지 않나)
2022년 현재의 세계에 ‘가드’’와 ‘썬더’는 인간의 몸에 가두어진 외계인 죄수를 관리하며 지구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서울 상공에 우주선이 나타나고 형사 ‘문도석’은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한편, 630년 전 고려에선 얼치기 도사 ‘무륵’과 천둥 쏘는 처자 ‘이안’이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신검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속고 속이는 가운데 신검의 비밀을 찾는 두 신선 ‘흑설’과 ‘청운’, 가면 속의 ‘자장’도 신검 쟁탈전에 나선다. 그리고 우주선이 깊은 계곡에서 빛을 내며 떠오른다. 고려와 현재, 그리고 외계의 세계가 뒤섞여 스토리를 이해해야 한다. 2022년 인간 속에 수감된 외계인 죄수를 쫓는 이들 그리고 1391년 고려 말 소문 속의 신검을 차지하려는 도사들 사이 시간의 문이 열린다.
사실 1부는 자..이제 배경을 설명해줄게…정도의 느낌이랄까. 선명하게 줄거리를 말하기에 세계관이 복잡하지만 이상하게도 참신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기이함. 미래형 SF와 오리엔탈 판타지가 섞인 영상은 어딘가 어수선하고, 캐릭터는 어디선가 본 것 같았고, 스토리는 뻔했다. ‘저기요 …감독님…왜그러셨어요?어디서 부터 잘 못 된건가요?’ 이해가 되지 않아 붙잡고 물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까지 감독에 대해 고민하는 나는 또 뭔가…나는 왜 그를 좋아했는지 반문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 <암살> 창작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소재에서 시작된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 왔다. 인물을 충분히 탐구하고 인터뷰하며 디테일을 놓치지 않아 캐릭터가 살아있었다. 영화적이지만 사실적인 그런 인물들이 어우러져 촘촘하게 극이 진행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외계+인>은 어쩌면 최동훈 감독이 ‘하고 싶은 거 다해’ 본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오롯이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세계관과 타임슬립이나 썬더, 하바와 같은 장치들. 아마도 내가 <외계+인>을 보고 그토록 당혹스러웠던 것은 화려한 CG나 숨막히는 액션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최동훈 다운 작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감독의 정체성이 명확히 보이지 않은 작품 인 것은 그가 변했기 때문이거나 변화하는 중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 그가 만든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 그는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게다가 이 영화는 둘로 나뉜 영화의 겨우 1부 일 뿐이었으니까. 그가 펼쳐 놓은 것들을 어떻게 마무리 하려고 하는지. 나는 아마도 또 한번 그를 믿고 2부를 보러 갈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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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승부를 그려내다
조승우 필모깨기를 열심히 하며 발견한 작품 <퍼펙트 게임> 2010년대만 하더라도 스포츠 관련 영화가 굉장히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딱히 흥행하는 것이 없어보인다. 영화 <퍼펙트 게임> 역시 그 무렵에 나온 작품이다.
영화 <퍼펙트 게임> 시놉시스
대결을 원한 세상 속으로 꿈을 던진 두 남자, 최동원 선동열의 고독하고도 치열한 맞대결!! 불안과 격동의 1980년대, 프로야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전국민을 사로잡고 있었다!
노력과 끈기로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로 자리잡은 롯데의 최동원! 그리고 최동원의 뒤를 이어 떠오르는 해태의 천재 투수 선동열! 세상은 우정을 나누던 선후배였던 두 사람을 라이벌로 몰아세운다.
전적 1승 1패, 그리고 1987년 5월 16일, 자신들의 꿈을 걸어야 했던 최동원과 선동열의 마지막 맞대결이 펼쳐진다! 선동열 앞에서만은 큰 산이고 싶었던 최동원. 그 산을 뛰어 넘고 싶었던 선동열.
*해당 내용은 네이버 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퍼펙트 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비지엠 하나는 정말 잘 썼다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자이를 꼽아보자면 아마 영화에서 그 역할을 음향이 하지 않나 싶다. BGM을 비롯한 다양한 음향 요소들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미세한 감정을 증폭시키면서 순간적으로 영화의 몰입도를 극대화 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의 매력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이 영화 <퍼펙트 게임>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이 와,,, BGM하나는 정말 잘 썼다! 였으니 말이다.
야구 경기의 스펙타클하고 빠른 전재를 보일 때와 최동원이 좌절하는 장면, 그리고 선동렬이 이 악물고 연습하는 장면 등 그때 그때의 캐릭터의 감정과 경기장의 분위기를 정말 잘 살릴 수 있는 음향적 요소를 굉장히 잘 활용해서 2시간이 넘는 조금은 긴 러닝타임 속에서도 지루함 없이 집중해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관객을 울리는 영화
개인적으로 영화를 감사하는 태도는 감독이 정해놓은 포인트대로 감상하며 눈물을 쏟아주고, 웃어주고 다 해놓고 비판하는 타입이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영화 <퍼펙트 게임>은 울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 작품이었다. 스포츠 정신을 강조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두 선수를 응원하며 두 선수를 중심으로 규합하는 롯데와 해태의 선수들을 보면서 그 찐한 우정과 승부욕에 감동을 안받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 장면이 과했다. 약간 스리스을쩍~ 넌지시 포인트를 잡는게 아니라 울어라!! 여기서 안 울면 이상한거다!! 이렇게 연출을 하고 있어서 그리고 그 당시에는 최동원과 선동렬이 거의 스포츠계의 영웅과 같은 사람들이었겠지만 약간 너무 신화화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까지?? 해야되나 싶었다. 물론 그 때 살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그들의 경기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두 선수의 빅매치가 어떠한 무게감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뭔가 그들의 이야기를 너무 극단적으로 신화화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신화화를 통해서 애써 감동포인트를 주려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그래도 연기력만큼은 뛰어났던 작품
최동원과 선동렬의 경기를 직접 봐본적이 없다. 심지어 유튜브를 통해서 남은 자료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나에게는 조승우와 양동근이 연기한 캐릭터로써 존재할 뿐이었다. 실제 인물과의 비교는 어렵겠지만 문외한으로써 느낀 영화 <퍼펙트 게임>은 야구선수들이 저렇게 훈련을 하고 경기에 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는 스토리라인만 제외한다면 약간 시대를 풍미했던 야구와 야구 선수들의 다큐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조승우와 양동근은 극 중에서 조승우와 양동근이라는 배우로 보인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초반 캐스팅이 됐을 때는 미스캐스팅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하던데 외적으로는 닮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최동원과 선동렬 선수의 캐릭터와 야구를 대하는 진심, 그들의 내적인 모습을 잘 캐치해서 표현했다고 느껴졌다.
시대의 이야기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재밌었던 영화 <퍼펙트 게임>. 감정과 신파에 예민하지만 않다면 뜨거운 승부를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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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서의 페이스
<헤어질 결심>(2022, 박찬욱)
<사막의 왕>(2022)
<그녀의 취미생활>(2023, 하명미)
<살인자ㅇ난감>(2024)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 포함.
3주 내리 <헤어질 결심>을 보러 극장으로 향하던 2022년, 나는 예감했다. 배우 정이서를 좋아하게 되리란 것을. 영화 속 하고많은 신스틸러 중 가장 눈에 밟혔던 이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망설임 없이 ‘일하는 경찰 미지’, 정이서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는 입체적일 필요가 없는 기능적 조연이었다. 고경표처럼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어필하지도 않았고, 김신영처럼 배우 자신의 이미지를 인물에게 그대로 덧씌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미지의 개성은 톡톡히 빛났다. 정이서는 작품이 인물에게 부여한 테두리를 철저히 지켰다. 테두리를 철저히 지키는 자, 그게 미지다. 눈치 빠르고 칼 같이 선을 긋고 제 할 일을 다하며 불쾌를 숨기지 않는. 능숙하게 일하는 제스처, 찰나의 눈빛, 독특한 효과음만으로 캐릭터가 파악되었다. 미지처럼 야무진 연기였다. 자잘한 디테일이 살아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가 깔끔했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다. 주변 인물들의 사연에 관심이 없는 영화 속에서, 미지는 사연 따위 없어서 더 매력적이었다. 화면을 벗어난 그에게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화면에 잡히면, 해준을 뚫어져라 보면서도 곁눈질로 미지의 움직임을 붙들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도 일하는 미지’ 초단편 외전 같은 것을 슬며시 그려보며, 스크린 속 정이서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유사하거나 색다른 톤의 조연도 고팠고, 제 1화자가 되어 내면을 모조리 꺼내는 역할을 맡아줬으면 싶기도 했다.
그해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사막의 왕>은 그 갈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정이서의 넘치는 재치를 비격식적이고 입체적인 모양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상한 회사에 떨어진 ‘앨리스’ '이서'. 그는 시청자가 픽션의 세계에 입장하도록 돕는 평범한 화자다. 면접관의 질문에 허허 웃으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라고 답했기에 회사에 최종으로 합격했다. 멍하고 느린 표현법은 뒤에서 다룰 <그녀의 취미생활> 초반의 정인과 닮은 데가 있으나, 그 기반이 다르다. 정인은 살아남기 위해 연기로 무장했다. '이서'는 특수한 상황에 던져졌고, 진심으로 얼떨떨해 하는 중이다.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물음표는 크기를 달리하며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서'는 연기를 잘 못하는 이다. ‘척’을 하면 다 티가 나고, 속마음도 대부분 읽힌다. 그것이 장면의 재미다. 알아들은 척 하는 함박웃음, 신나 날뛰는 실루엣. 은은하게 배어 있는 사투리가 맛깔나는 말투를 완성한다. 이름도 비슷한 ‘이서’는 작가가 점찍어 두고 쓰기라도 한 듯 정이서와 어울리는 캐릭터다.
납득하기 힘든 일을 반복하던 '이서'는, 팀장에게 언어폭력 섞인 질책을 듣는다. 그 순간 정이서의 신체 표현이 압권이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내 잘못인 것 같고, 억울한데 까닭을 모르겠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데 내 의지로는 불가능하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안 나오는’ 상태. 머리 꼭대기부터 혀, 발끝까지 얼어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움츠러들어 쭈뼛거린다. 정이서는 <사막의 왕>이 다크코미디임을 잊지 않는다. 속내를 겉으로 다 드러내면서도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연기는 지양한다. 그 덕에, 월급 액수를 보고 필터없는 감탄사를 토하며 기뻐하는 씬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쯤 ‘이서’의 인물됨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는 ‘세계’에 혼입되어 안주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의미없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없음’의 정체를 깨달았다면, 참을 수 없다. 태도가 달라지니, 진정으로 정인이 겹쳐 보였다. 북받치는 분노와 모멸감을 다 터트리는 대신 꾹꾹 누르며 표출한다. 그의 결심이 ‘순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서'가 “사막”을 밟고 당당하게 오피스를 퇴장하며 1화가 끝나고,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이서는 작품의 장르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면, 연기 톤을 바꾸어 장르를 뒤집어 놓는 데에 한몫을 한다.
<사막의 왕>은 원톱 주인공을 둔 장편 시리즈보단 리미티드 연작에 가깝다. 라스트 에피소드에서 대놓고 말해주듯- (대부분) 돈을 둘러싸고 갈등하다 언젠가 엇갈렸던 자들의 이야기다. 개중 가장 평범해 보였던 ‘이서’는, 돈을 버린 자이기에 특별했다. 그는 3화의 엔딩 무렵 자그마한 회오리를 몰고 재등장한다. 쫓아오는 엄마를 피해 낯선 차에 덥석 올라 고개를 한껏 숙이고 ‘빨리 출발하라’고 하는 이 인간을 어찌할 것이냐. 그 다급함은 진심인 것을. 그의 꽁트 같은 끼어듦과 이후의 능청스러운 태도는 서은과 해일 사이 흐르던 불안한 코미디의 기운에 안정감(?)을 불어넣는다. 얼떨결에 ‘강원도로 일출을 보러 가는 핵가족’의 그림을 구성하게 된 젊은이 둘과 어린이 하나. 그 기이한 동행을 마지막으로 셋 모두 카메라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서은과 닮아 있는 ‘이서’의 눈빛을 보며, 이번엔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 <사막의 왕>을 통해 정이서의 꾸밈없고 다채로운 표정들을 목격했고, 거대한 가능성을 확신했다.
<사막의 왕>(2022)
이듬해, <그녀의 취미생활> 포스터를 본 나는 곧 극장으로 가야만 함을 깨달았다. 저리도 사연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니. 본격적으로 좋아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인물을 한계까지 몰아가 폭발을 유도해 관객을 빠르고 시원하게 만족시키지 않는다. 정인이 제 페이스대로, 즐기고,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도록 돕는다." 당시 리뷰에 적었던 내용을 옮겼다. 정이서는 서두르거나 과시하지 않았다. 작품에 어울리는 저만의 페이스(face/pace)를 찾아 신중하게 자리 잡았다. 드라마틱한 ‘각성’ 연기가 요구되었다면 그또한 가능했을 터이나, 정인에게 안 맞는 옷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작품과 배우는 클리셰의 울타리에서 탈출했다.
오프닝은 정인의 뒷모습이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곧 땅으로 꺼지기라도 할 것처럼 터덜터덜 밤길을 걷는다. 몸의 피로와 더불어 과거와 생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걷는 방법을 고민해 결정한 최선의 결과물이라기보단 체화한 인물이 자연스레 발현된 걸음걸이일 테다. 정인에게 실려 있던 그늘의 무게는 날이 밝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상적인 질책과 조롱에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반응하거나 들릴 듯 말 듯 ‘에’라고 답하는 정도로 존재감을 지우며 살아남았다. 조용해 보이는 그의 내면엔 톡 건드리면 터질 듯한 울분이 있고, 커다란 가위를 옆에 두고 선잠을 자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 만큼의 불안과 공포가 있다. 그 원인은 그가 위치하는 공간과, 그곳을 채운 특정한 타인들이다.
홀로 풀숲에 숨거나 사람들 가운데 섞여 말없이 관찰하는 정인, 그의 응시는 자체로 그의 언어다. 흐엉에게 달라붙는 재순을 정인은 먼발치에서 노려본다.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준다. 목표물에게 효과적으로 가닿는 감시와 경고의 응시다. 창수는 어떤가, ‘응시하지 못함’에 가깝다. 산속에서 그를 마주치자 정인은 필요 이상으로 놀란다. 상대가 몸을 기울이거나 손을 들 때마다 소스라치고, 극도로 움츠러들어 겨우 견딘다. 다음, 그다음 조우에서도 그렇다. 불투명한 창문을 사이에 두고도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고, 입보다 눈물샘이 먼저 열린다. 창수는 정인의 숨을 틀어막고 피를 굳히는 인간이라고, 정이서가 말해주고 있었다. 관객은 정인의 수많은 사연 중 하나가 거기 얽혀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혜정에겐 자꾸 시선이 간다. 상대가 알아챘으면 하는 마음으로 훔쳐보는 듯하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건 매한가지이나, 창수에게 보이던 두려움 대신 조심스러운 호의와 관심이 감지된다. 만남 후엔 여운을 돌이킨다. 순수한 호기심과 동경, 그리고 앞으로 풍부한 정서들로 채워질 빈칸이 느껴진다. 영영 벗어난 줄 알았던 고향에 붙들린 정인에게 혜정은, 지긋지긋한 공간에 신선한 공기를 끌고 온 존재다. 웃는 둥 마는 둥, 긍정을 하는 둥 마는 둥. 그건 익숙한 가면이다. 느릿하고 분명한 말투, 배시시 흩어지는 미소는 정인의 캐릭터다. 혜정과 함께 생계 외 삶에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며 정인의 얼굴에선 점점 그늘과 주저가 걷힌다.
작품은 종종 혜정의 대사로 정인을 묘사한다. “다 알고 있는” 사람,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 혜정은 정인을 구하는 자 보다는 정인이 스스로를 구하도록 돕는 자다. 정인은 원래 품고 있던 강함을 꺼내는 법을 배운다. 혜정과 가까워지기 전 시작된 첫 번째 ‘행동’은 충동적이지만 계획적이기도 했다. 가위를 툭 떨어뜨리는 차분한 손놀림, 서늘하게 다물린 입과 내리깔린 눈꺼풀. 후에 일련의 복수를 실행하고 참을성 있게 지켜볼 때도 유지되는 온도다. 느닷없이 내려앉은 온도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나 전남편 광재를 대하며, 정인은 무표정 아래 켜켜이 쌓인 응어리 사이로 차가운 혐오를 언뜻 내비치곤 했다.
정인의 응어리는 원인을 제공한 대상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뜨겁게 터지기도 한다. 부녀회장이 집에 찾아왔을 때, 한계에 다다른 정인은 불덩이를 내뿜는다. 정이서는 인위적으로 발산하려 애쓰기보단, 최대한으로 눌러담아 저절로 폭발하도록 유도한다. 이후 정인은, 다시는 그렇게 터져 버리지 않는다. 창수와의 독대에서 다시금 분노를 표출하나, 이번 덩어리는 서릿발 같다. 오래된 가해자를 내려다보며 열 여섯 살에 느꼈던 그대로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수 년 동안 압축된 무게를 얹어서. 모조리 쏟아내는 대신 저쪽이 알아들을 만큼만, 눈물이 흐르고 몸이 떨려도 무너지지는 않을 정도로. 그것은 상대를 겨냥한 독백, 복수의 마무리였다. 이와 같이 복수의 단계들은 대개 차갑고, 한 치의 어긋남이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불안과 공포는 필연적이다. 혜정이 재순을 ‘실종’되게 만든 것이 그러했듯, 정인이 광재에게 독을 먹이고 총을 쏘는 행위는 적극적인 자기방어다. 작품과 정이서는 그역시 놓치지 않았다.
정인처럼 절제의 미학을 체화한 영화, ‘광재의 최후’는 그것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장면 중 하나다. 정인은 공격적으로 죄다 발산하는 대신, 뿌리깊은 분노와 삶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총 끝에 단단히 드리운다. 광재는 엉망으로 망가지기보단, 그저 늘어져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다. 정이서와 우지현, 대단한 집중력을 지닌 두 배우가 곤조 있는 연출과 만나 완성한 씬이다. 주연 배우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늠해보(지조차 못하)게 하는 작품- 우지현에게 <더스트맨>이 있다면 정이서에게는 <그녀의 취미생활>이 있다. 정이서는 능히 홀로 극을 이끌며 상대 배우와 화면을 나누거나 포커스를 적절히 넘겨주기도 했다. 거세게 덮쳐오는 파도가 되기도, 고요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흩어지는 물결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취미생활>(2023)
싱그럽다. 티없이 활짝 웃는 정인을 보니 그 표현이 절로 적혔다. 비슷하게 씩 웃는데, 선여옥은 징그럽다. 한 번 더 우지현과 나란히 두어 보자. 우지현이 <그녀의 취미생활>을 통해 해냈듯, 정이서는 <살인자ㅇ난감>으로 ‘빌런력’을 증명한다. 빗물과 핏물로 범벅이 된 골목, 원피스를 입고 부드럽게 안내견을 이끄는 선여옥의 목소리는 이질적이다.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입체적이라기보단 반전을 숨긴 인물, 그의 꿍꿍이가 드러나며 정이서가 보였다. 출연진을 훑어보지 않고 시청한 내게 있어서는, 하상민의 첫등장과 더불어 일종의 서프라이즈적 모먼트였다. 선여옥은 단순히 이기적인 것을 넘어 선악에 무관심하다. 제 욕망에만 충실하며 타인을 도구삼는다. 뻔뻔하고 염치없고 눈치는 있다. 괜찮은 사람인 척할 생각도 없어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정이서 특유의 미소는 음흉하게 발현된다. 딜리셔스하고 분명한 말투는 주인공과 시청자의 신경을 긁는 방향으로 던져진다. 문장을 새되고 짧게 끊어 뱉으며 분리된 음절을 효과음처럼 사용하는 정이서. 다른 인물이었다면 매력포인트로 작용했을 디테일은 선여옥과 만나 비호감의 요소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기생충>에서 거리를 두고 화면을 공유했던 최우식과의 재회다. 최근 정이서의 필모그래피에서 ‘피자 사장’을 발견한 후 해당 클립을 검색했고, ‘아!’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게 당신이었구나. 여러 해가 지난 현재, 밀접한 긴장감을 주고받으며 훌륭한 다이내믹을 형성하는 두 배우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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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쯤 나는 배우로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나의 이상과 실제 내 그릇의 차이가 크게 느껴져 몹시 불안했다. 그럴 때 <그녀의 취미생활>이 내게 왔다. 정인으로 사는 동안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한 인물에게 집중하다 보면 느릴지언정 조금씩 나갈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 작품이 정말 소중하다.” - 정이서, [씨네21]
세 해에 걸쳐 있는 네 작품을 다루며 정이서의 일부를 담아보려고 시도했다. 정이서는 천연덕스럽고 능숙하다. 바른 중심 주위로 자잘한 디테일을 자아내, 군더더기 없는 짜임으로 완성한다. 모호하게 머물러야 한다면 그렇게 하며, 그 얼굴에 관객의 시선이 머무르게 한다. 이해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배우인 그는, 매번 작품의 결을 찾아내 적절하게 녹아들거나 성공적으로 엇갈렸다. 그 개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정 반대의 모습을 꺼내며 손끝에서 빠져나갔다. 그 잠재력을 엿보았다고 여기자마자, 아직 보지 못한 깊이가 어마어마함을 깨닫게 했다. 흰 원피스와 장총이 각각 또 함께 어울리는 정이서. 그는 마치 정인처럼, 자신의 페이스대로 신중하게, 범상치 않은 걸음을 떼는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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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영상은 홍보마케팅사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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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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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bjW9...
음악 출처
Kevin MacLeod의 Heartwarming은(는)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라이선스(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 따라 라이선스가 부여됩니다.
출처: http://incompetech.com/music/royalty-...
아티스트: http://incompete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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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스: 발할라》는 1,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간 11세기 초를 배경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바이킹들의 영웅적인 모험담을 그린다. 그 주인공은 전설적인 탐험가 레이프 에릭손(샘 콜릿)과 불같은 성격의 완고한 여동생 프레이디스 에릭스도테르(프리다 구스타브손), 그리고 야심 있는 노르웨이 왕자 하랄드 시구르드손(리오 수터). 바이킹과 잉글랜드 왕실 사이의 긴장이 핏빛의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바이킹 내부에서는 기독교도와 이교도의 충돌로 싸움이 벌어지면서 이 세 바이킹의 장대한 여정이 시작된다. 그렇게 세 사람은 생존과 영광을 위해 싸우면서 바다와 전장을 넘나들며 카테가트에서 잉글랜드, 그리고 그 너머로 나아간다. 《바이킹스: 발할라》: 넷플릭스에서 곧 공개 예정. 《바이킹스: 발할라》를 시청하세요,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