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주2025-05-14 12:19:20
이 태풍이 우리를 해방케 하리라•마고 내시의 <무소유>
영화 <무소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마고 내시: 호주 사회의 도전적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언더커런츠: 힘에 관한 명상>(이하 <언더커런츠>)와 <무소유>다. 최근작 <언더커런츠>는 단편으로, 1994년작이자 장편 극영화인 <무소유>의 이미지들이 일부 들어갔다. 필자는 작년 6개월 동안 호주 시드니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그때 느낀 것은 호주의 문화라는 것이 사실 상 없다는 것이다. 호주는 여기저기서 온 이민자들이 세운 국가다. 필자가 다니던 광고홍보회사에도 정통 순혈 호주인이라는 것은 있는 개념 같지도 않았고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그리스계, 필리핀계, 한국계 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계통의 사람들이 섞여 사는 곳이 바로 호주다.
이러한 다양성은 호주의 정체성이지만, 뭔가 고유한 것이 없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주의 전통 음식이라는 것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하나로 외칠 수 있는 것이 없다. 호주는 이러한 자국 문화의 한계를 선주민들에게서 찾아오려고 하는 것 같다. 마침 필자의 회사 근처에는 ‘Gadigal’이라는 이름의 지하철 역을 짓고 있었다. Gadigal은 부족의 이름으로, 호주 선주민들 중 하나다. (방금 완공된 Gadigal 역의 모습을 찾아보고 애틋한 감상에 잠기고 말았다…) 현재 호주 정부는 이런 식으로 선주민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기리려 하고 있다. 필자가 호주의 예술에 대해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도 호주 선주민들의 페이즐리 무늬를 닮은 전통 문양이다.
<무소유>는 테사가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집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상영 후 게스트 시네필로 초대된 호주의 영화평론가 에이드리언 마틴은 이러한 귀향(Return) 모티프가 호주 예술에서 자주 반복된다고 말한다. 호주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호주인들이 자신의 국가를 어떻게 정의하고 받아들이는가? 호주는 문화적 황무지인가, 혹은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인가? 마고 내시의 영화에서도 이런 질문들이 언급된다.
테사는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지붕이 있고 울타리 형식의 대문이 있는 호주에서 흔한 주택이다. 테사는 원래 언니 케이트의 집에 묵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세 아이를 키우는 케이트는 돈 때문에 집을 팔려고 하고, 테사는 그 집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않느냐며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집을 두 자매 모두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찾으려고 그 집으로 향한다. 영화는 처음에는 두 자매의 갈등으로 시작하여 테사가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어두운 과거로 빠져든다.
테사는 브라를 하거나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집안을 거닌다. 이 상태는 해방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준다. 그녀의 옷은 붉거나 살구색 계통으로, 가슴이 깊이 파여있다. 머리는 검은색 단발머리다. 떡 벌어진 어깨로 스크린을 유유히 걸어다니는 테사의 육체를 보며 이 영화가 정말로 여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적인 에너지를 가득 품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에이드리언 마틴은 여성적 미학(female aesthetic), 어슐러 르 귄의 캐리어백 이론을 언급한다. (어슐러 K. 르 귄은 허구를 운반하는 가방 이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1986)에서 찌르고 때리고 자르는 창의 문명과 채집하고 보존하고 나누어주는 가방의 문명이 분기되는 아주 오래 전을 되돌아 본다. 창이 영웅을, 주인공을 필요로 하고 정복, 개척, 승리와 패배, 구원과 희생의 서사를 구축한다면 가방은 작고 다양한 이름 없는 것들이 뒤죽박죽 순서를 가지지 않은, 구체적인 삶의 진실을 닮은 이야기를 위한 공간이다. 출처: http://leehanbum.com/writing/the-man-who-carried-the-bag)
가부장적 픽션은 폭력이나 사냥의 스릴에 관한 것이다. 대조하여, 여성적 픽션은 모임(gathering), 돌봄(caring), 세상의 파편들을 모으고 기억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테사는 청소년 시절 선주민 남자아이와 사랑에 빠졌고,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전쟁 트라우마로 정신 질환을 앓던 아버지가 남자아이를 총으로 쏘았고 테사는 그 길로 집을 나간다. 아버지가 널 어떻게 할 지 모르니 절대 돌아오지 말라는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장면이 펼쳐진다. 딸은, 엄마는 도대체 아빠를 어떻게 견디면서 사느냐고 질문하고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한다. 딸은 떠난다.
필자가 <무소유>를 보며 한 양동이가 찰 만큼 눈물을 흘렸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고 내시가 여성이라면 연결될 수 있는 감정적 빛의 한 줄기를 영화 속에 흘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부장제의 억압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여성이 될 수 있다.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선주민 여자아이, 밀리와 함께 테사는 집에 들어온다. 밀리와는 풀밭과 집안에서 어느 정도 유대감을 쌓은 사이이다. 집안에는 그토록 마주치기를 두려워 했던 아버지가 있다. 그는 요양원에 있다가 돌아왔다. 세 사람은 테사가 준비한 토마토 스파게티로 저녁을 먹고 밀리가 궁금해 하는 학교 숙제에 관하여 아버지가 몇 마디 말을 해 준다. 그때, 태풍이 들이닥친다. 폭우에 센 바람까지 동반한 태풍이다. 아버지는 지하로 들어가자며 안내하고, 세 사람은 바닥의 작은 네모난 문을 열어 지하로 들어간다. 테사는 불을 피운다. 지하 토굴에서 부녀는 몇 십 년 간 밀렸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격앙될 때마다 밀리가 움찔거린다. 구조대가 찾아오고, 테사의 품에 안긴 밀리는, 선주민 가족들이 집을 사고 싶어한다는 테사의 오해에 대해 해명한다. “그건 그냥 농담이었어요. 왜 백인들은 우리가 모두 가지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죠?”
그 태풍은 긴장감과 그 간의 세월을 씻어내리는 것이었다. <무소유>의 태풍은 여지껏 내가 봤던 어떤 태풍보다 아름답고, 개운하고, 강렬하며, 시원했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오랜 세월에 걸친 것들, 선주민의 차별적 경험과 백인과의 관계, 토지 소유권 문제, 테사와 아버지의 관계, 어머니의 집에 관한 문제가 이 태풍으로 인해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방식으로 한 데 모아졌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떨어진 것이 아니었으니까.
에이드리언 마틴은 그간 매우 억압되었던 호주 역사의 기억이 이 영화를 통해 형체를 갖는다고 말한다. 백인들은 호주에 깃발을 꽂고 이 땅은 아무나 차지해도 된다는 전제로 행동했다. 이는 식민주의의 근간이 되는 법적 폭력이다.
영화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무소유>를 보기 전날, 전주톡톡에서 정지혜 평론가가 던진 질문이다. 실시간 라이브가 가능해진 오늘날, 영화는 지나간 시간을 찍을 수밖에 없는데 뭣하러 영화를 찍어야 하냐는 거였다. 정지혜는 우리는 이미지를 반복하여 경유해야만 사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를 어떻게 불러 올 것인가가 중요한 쟁점이다. 마고 내시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억압되어있던 과거를 불러왔다. 그 과거가 너무나 깊은 저장고에 수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가 더욱 컸고, 필자는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결국에는 필자가 이 영화를 보고 왜 울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을 때는 이유를 찾고 싶다. 어쩌면 필자는 테사처럼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따스한 햇살과 나무로 된 집안 벽과 거세게 부는 바람을 보았을 때, 이미 테사와 한 몸이 된 것인지도. 그래서 이 영화의 생각을 멈출 수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