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10-06 00:31:23
누구를 위한 잔혹함인가.
영화 <늑대사냥> 리뷰
나름 잔인한 영화를 잘 보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진짜 아니었다. 써는 것도 모자라 도려내고 찢어내서 짓이기는 행위를 반복하는 장면들의 연속이 보는 내내 괴롭게 만들었다. 재미가 없어도 영화 신작 리뷰는 꼭 쓰려고 하는 편인데도 나에게 그런 의지를 앗아갔다. 청소년 불가의 범죄물이 고어물로 넘어가기까지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늑대 사냥에 대한 리뷰를 해본다.
영화는 필리핀에서 부산항으로 향할 프론티어 타이탄이라는 배에서 시작된다. 동남아시아로 도피한 범죄자들과 그들을 맡을 베테랑 형사들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긴장감과 더불어 불안함이 스친다. 그렇게 모두가 배에 타게 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형사들이 범죄자들을 수갑으로 채워둔 상태로 절대적인 우위에 놓여있다. 하지만 언제부터 계획된 일인지 종두를 중심으로 하나 둘 씩, 배의 구석구석을 점령해가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뀌어간다. 다른 이들의 일말의 가능성도 끊기 위해 달려간 곳에 있는 존재로 인해, 전반부의 이야기는 말끔하게 사라지며 한올의 희망도 찾을 수 없다.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이 배에서 그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가짜 피를 2.5톤가량을 썼다고 들었는데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많은 노력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도 무엇을 위한 잔혹함인지, 누구를 위한 잔혹함인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공포 그 자체의 공간으로 변화해가며 또 다른 움직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빼곡하게 트라우마를 새길뿐이다. 잔인함을 싫어하는 관객이라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영화다. 남자판 마녀를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 이야기의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아쉬움만 가득하다. 어떤 것도 맺어지지 않은 이야기가 속편까지 바란다면 그건 너무 큰 욕심이 아닌가. 날 것을 탐하기엔 너무 상해버린 혐오 사냥이다. 누군가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거리를 두게 될 것 같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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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지금, 이 순간은 진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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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이 위시하는 이 세계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모르고 게임도 하지 않고 메타버스에 접속할 일이 없는, 나 같은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사람에게는 너무도 낯설다.
AI에게 인격이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숱한 작품들에서 다루어져 왔다. AI 이전에는 복제인간이 있었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클론에게 인간과 똑같이 자의식이 생기는 모습을 보며, 당시의 나는 꽤 두려워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복제인간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아일랜드>로부터 15년이 지났지만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을 보면서도 덜덜 떨었다.
이제는 인간복제의 시대가 아니라, 가상인간 시대가 온 것 같다. 이미 AI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실제 사람처럼 행동한다. 행동하는 것은 누구의 의지일까. AI 인플루언서를 프로그래밍한 사람일까, AI에게 인격이 생겨버린 걸까.
에스파가 4인조가 아닌 8인조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황당함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했지만... 사람들은 에스파의 세계관을 받아들인다. 이제는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물론 지금 에스파의 'æ-에스파'들은 3D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그에 비해 AI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진짜 사람 같다.
출처: 네이버 영화
<프리 가이>의 주인공 '가이'는 '프리 시티'에 산다. 은행원인 가이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보낸다. 금붕어에게 인사하고, 커피숍에서 늘 같은 커피를 마시고, 은행에 강도가 들어오면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르고, 퇴근하고, 또 아침이고, 출근하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매일 똑같이 "좋은 하루 보내지 마세요. 최고의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하는 가이는 40 가까이 연애 한 번 못해본 '모쏠'이면서도 자신과 커피 취향이 같고, 5옥타브의 여자 가수 노래를 좋아하는 여자라는 구체적인 이상형이 있다.
존재에 대한 의심과 자각 없이 반복되는 가이의 일상에 특이점이 나타난다. 5옥타브의 여자 가수 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 '몰로토프 걸'을 만나게 된 것.
그 이후로 가이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과 자신의 '차이'를 알게 된 후, 선글라스를 빼앗은 가이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자아 또한 확장되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그동안 마시던 커피가 아닌 카푸치노를 주문해 보는데, 바리스타와 늘 인사하던 경관 등 모든 사람이 당황한다. 이 장면은 마치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을 때와 비슷하다. 가이가 선글라스를 껴보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인지한 후 절친인 버디에게도 선글라스를 껴보라고 했지만 버디는 삶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가이와 가이의 친구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현실이 썩 만족스럽지 않아도 변하는 것은 두렵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 자신을 밀어넣는 모습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NPC일까? 우리가 NPC라면 주인공은 누구인가. 가이는 NPC가 되기 보다는 주인공이 되기를 택한다.
그래서 가이는 몇 번의 죽었다 살아나는 시도 끝에 몰로토프 걸과 말을 섞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몰로토프 걸은 레벨이 100이 넘고 자신은 1밖에 안 되니, 레벨부터 올려야 한다. 그때부터 가이는 사람을 죽이는 대신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레벨을 올린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 모두는 알고 가이는 모르는 사실. '프리 시티'는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다. NPC인 가이는 선글라스 낀 사람-실제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도, 싸우지도 않아야 한다. 그런 가이가 갑자기 각성을 하고, 가이를 지켜보는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가이에 환호한다. 가이의 게임 속 스킨인 은행원 셔츠를 따 '블루 셔츠 가이'라는 별명까지 생기고, 혹자는 가이가 정체불명의 천재 해커라는 음모설을 제기한다.
가이가 이상형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몰로토프 걸은 AI 캐릭터가 아닌 사람 '밀리'이니까. 게임회사 '수나미'의 대표 앤트완(앙투완)은 개발자인 '키스'와 '밀리'의 게임 '라이프 잇셀프' 코드를 훔쳐서 '프리 시티'를 만들었는데, '프리 시티2'를 출시할 계획이다. 그러나 블루 셔츠 가이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난감해진다.
게임 코드의 개발자인 키스는 수나미에 들어가 앤트완 밑에서 일한다. 자신이 만든 세계를 되찾기 보다는 수나미에서 별 욕심 없이 일한다. 밀리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기업인 수나미 앞에서 일개 개인은 힘이 없다. 그러나 게임 속에 코드를 숨겨두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몰로토프 걸'로서 끝없이 게임 속을 헤맨다. 그러다 가이를 만나고, 게임 속에서이지만 가이에게 호감이 생긴다. AI라는 것을 알면서도.
몰로토프 걸과 가이는 게임 속에서 만났을 뿐인데도 취향이 너무 비슷하다. 그네를 좋아하고, 풍선껌맛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수나미는 '프리 시티2'의 론칭을 위해 블루 셔츠 가이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레벨업을 한 가이를 죽이기가 쉽지 않다. 결국 앤트완은 전 세계의 유저들을 무시한 채 리부트를 감행하고, 가이는 원래의 가이로 돌아간다. 그때 키스는 가이의 소스가 다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가이가 처음 각성했을 때처럼 해보면 어떨까? 바로 몰로토프 걸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몰로토프 걸의 키스와 함께 모든 기억이 되돌아온 가이는 자신과 같은 NPC를 해방하고자 한다. 누군가의 설계대로 만들어졌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해방이다. NPC들은 파업을 시작한다. 키스 역시 앤트완에게 반기를 든다. 앤트완은 결국 서버를 물리적으로 박살내는 것을 택한다. 그러나 가이는 사랑하는 몰로토프 걸을 위해 바다 건너 밀리와 키스의 코드까지 달려간다.
앤트완과의 딜로 겨우 구해낸 '라이프 잇셀프'는 성공을 거둔다. 몰로토프 걸은 '누군가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었겠지만'이라는 가이의 사랑 고백을 통해, 풍선껌맛 아이스크림과 그네, 5옥타브 여자 가수의 노래, 커피 취향이 바로 자신의 것이었음을, 그리고 가이가 몰로토프 걸을 만나면 사랑에 빠지게끔 프로그래밍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때 밀리에게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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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의 각성은 이상형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데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선글라스 낀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하는 의심. <트루먼쇼>, <매트릭스>와 맥락을 같이 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의미없는 반복,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대해 말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프리 가이>는 충분히 들뢰즈적이다. 의미없는 반복의 굴레에서 살아가던 가이와 친구들, NPC들, 그리고 키스도 특이점을 발견한 후 차이를 만들어간다.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삶은 그 전과 같을 수 없다. 모든 캐릭터들이 반복적이고 수동적이던 삶에서 자신을 능동적으로 굴려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키스와 밀리가 만든 '라이프 잇셀프'는 스스로 발전하는 AI들을 관찰하는 게임이다. 발전한다 함은 이전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캐릭터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다. 직업적인 성취, 똑같은 생활이 아니라 창조적이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게임 밖 사람들은 진짜 사람 같은 게임 속 AI들의 발전을 응원하고 지켜본다. 마찬가지로 프리 시티에서의 가이가 불가능할 것 같은 싸움을 마치고 바다 건너 세계로 달려가는 것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의심하지 않으면 반복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헐벗은 반복'. 무한히 반복되는 삶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세트장 속 트루먼의 삶, 빨간 약을 먹기 전 네오의 삶, 앤트완 밑에서 시키는 것만 하던 키스의 삶은 진짜일까.
아무리 게임 속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성장해나가는 AI들에게 그 세상은 가짜가 아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숨쉬고 있음을 느끼는 지금-여기가 바로 진짜 세상이다.
(매번 실패하지만, 그런 이유로 명상을 하라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람 같지 않은 것과 사람 같은 것이 섞여 산다. 때리고 죽이고 배신하는, 사람 같지 않은 인물들이 이끌어가는 서사가 판을 치는 가운데, 인간이 서로를 돕고 스스로, 또는 누군가의 조력으로 성장하는 모습, 사람 같은 영화였다. 물론 주인공이 사람은 아니지만.
관람 포인트
* 라이언 레이놀즈는 그냥 가이가 아니라 핫 가이다.
* 앤트완 역을 맡은 타이카 와이티티의 연기가 킹받는다.
* 크리스 에반스가 영화 속에서 잠깐 킹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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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사랑한 '썅년들', 은수, 썸머, 서연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은수, <500일의 썸머>의 썸머, <건축학개론>의 서연. ‘옛사랑이자 썅년’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세 영화의 캐릭터다. 저 말이 맞다면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고 처참하게 짓밟아버리는 아름다운 악당인 셈이다. 정말 은수와 썸머, 서연이가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나빴을까?
우리는 여기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저 영화의 모든 시선은 남자 주인공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은수, 썸머, 서연의 입장은 전혀 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상우, 톰, 승민이 복잡한 심경으로 털어놓는 그 충분한 시간에 비해 세 여자 캐릭터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는 유추해야 할 뿐이다. 남자 캐릭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관객인 우리 역시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고 선을 긋게 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나 역시 무슨 생각이었는지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을 위한 대변을 해주고 싶은 것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인지.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지.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상우, 톰, 승민이 오히려 나쁜 놈은 아닐까?
세 캐릭터의 공통점은 모두 같은 일(회사, 수업)을 하다가 만나 남자 캐릭터에게 먼저 다가왔다는 점이다. 은수는 상우와 함께 자연의 소리를 담아 방송을 하려고 처음 만났다. 처음 대나무숲에서 소리를 녹음하고 간 후 그녀는 비 오는 날 상우에게 전화를 했다. 한번 더 보자고, 그렇게 여러 차례 녹음을 하다가 심지어는 라면 먹고 갈래요? 를 시전하면서 상우의 마음을 가뿐히 들어올렸다. 썸머는 톰에게 엘리베이터에서 나도 이 노래를 좋아한다며 싱그럽게 한 소절 흥얼거리더니 새침하게 복사실에서 키스를 하더니 총총 걸어가버렸다. 종종 톰에게 너가 좋다면서 씩 웃고 지나갔었지. 서연이야 두 캐릭터에 비하면 덜 적극적이라고 볼 수 있다. 건축학개론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고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수업을 혼자 들어서 시작된 것이니까. 어쨌든 그래도 처음 말을 걸며 다가왔고 쭈뼛쭈뼛한 승민의 성격상 아마 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적어도 그에게 첫 눈 오는 날 만나자고 표현을 했고 나오지 않은 건 그였다. 어렵다면 어려운 만남의 물꼬를 튼 이는 그들이 아니라 그녀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자유롭고 변덕스러운 문제의 행동이 시작된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일까? 늘 적극적인 것 같은 세 여자라도 소심한 그들의 마음 한 구석처럼 고민하고 주저하는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남자 주인공들이 그럴 때, 영화는 그런 부분을 생략하거나, 그들이 바뀌었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수는 처음에 무슨 사이다, 라고 말하고 시작하지 않았다. 상우는 그녀가 한번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넘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먼저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아버지가 만나는 사람 있으면 데려오라고 하셔. 그러니까 상우는 그녀의 결혼생활이 어땠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어떤 상처를 얼마나 받았을지도 모르면서 김치를 담그지 못한다며 말을 돌리는 그녀의 소극적인 거절에 김치를 내가 담그겠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상대는 결혼이 사랑으로 쉽게 유지되기 어렵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마음은 변하고, 결혼이 가져오는 수많은 관계의 부산물로 허덕였을 사람이다.
썸머는 처음부터 가벼운 사이가 필요했고, 누군가의 여자친구이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녀도 은수처럼 히스토리가 있다. 톰은 모르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아는 이야기. 부모님의 이혼으로 모든 사랑은 깨진다는 불신이 넘치는 점. 그리고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은 모르겠다는 말. 적어도 그녀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랑이란 것은 그녀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톰와 썸머 사이 역시 확신이 부재했다. 그녀는 그가 좋아하던 스미스며 건축이며 귀를 기울였고,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링고스타를 보며 아무도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놀려댔다. 그녀의 선물로 그가 좋아하는 '행복의 건축'을 샀다. 그러니까 그녀의 취향이 아니라, 그의 취향으로. 그녀는 더 이상 둘이 친구가 아니라며 싸우고 나서 비를 흠뻑 맞고 톰을 찾아온다. 나는 반대로 생각해봤다. 둘다 잠 못이루던 밤, 톰이 그녀의 집에 다시 찾아왔다면. 조곤조곤 속얘기를 했다면. 그녀의 가족을, 그녀의 취향을 좀 더 궁금해하고 존중해주려 했다면. 그러니까 그는 한번도 제대로 질문하지 않은 것이다. 썸머는 가벼운 사이, 친구이고 싶댔어. 그녀가 그렇게 말하게 된 이유가 대체 뭘까.
서연. 이 쪽도 할 말 많다. 그러니까 적어도 승민은 서연한테 화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좋아한다고 고백하려던 날 여자들의 이상형에 가까운 선배가 술에 취한 서연을 집에 데리고 들어갈 때, 끼어들어 그냥 둘이 같이 그녀를 재우고 사이좋게 집을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했는가. 고작 그 선배가 서연이와 함께 들어간 집안 문에 가만히 귀만 대다가 와서 대성통곡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예전과 달라진 승민의 행동에 찾아간 서연에게 그는 어떻게 했는가. 꺼져 버리라고 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는 솔직한 적이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가 그녀에게 뭐라고 할 권리가 있는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그가 생각나서 지어준다던 집 핑계를 대면서 그녀는 그렇게 찾아온 걸, 그래도 한 번쯤은 그녀가 제대로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을 무턱대고 욕할 수만은 없다. 그러고도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현재의 여자친구를 택하며 한번 더 도망갔다.
상우는 헤어지자고 말한 은수를 괴롭히듯 집을 찾아오고 차를 긁어댔다. 톰은 썸머를 지켜주려던 게 아니라 자신을 별 볼일 없는 놈이라고 빈정거리는게 자존심이 상해 주먹질을 했다. 상우와 톰은 은수와 썸머의 수많은 이상신호를 아무렇지 않은 척 문제를 회피했다. 승민은 고백도 못하고 서연이 몰래 입술에 도장이나 찍어보며 좋아하더니 혼자 시작하고 끝내더니 그녀를 첫사랑이자 썅년이라며 날선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도 그녀들이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던 건 그래도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났다고 울어버리고 그녀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그들을 악당이라고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그녀를 정말로 증오했던 게 아니란 걸 안다. 설사 증오했더라도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안다. 바보같이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을, 그렇게 좋아했던 그녀가 끝끝내 자신과 멀어지는 걸 지켜보아야했기에 그랬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결정적으로 그들을 속이거나 이용하지 않았는데도 사랑한 이를 그렇게 악당처럼 욕할 수는 없다. 함께 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만약 진정한 악당을 고르자면 사람과 사랑이라고 답해야 한다.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랑의 관점, 사람들을 구성하고 있는 상처와 더 이상 상처받기 싫은 두려움이라고 답해야 한다.
그러니, 그러니 말이다. 적어도 은수와 썸머, 서연을 썅년이라는 악담을 하기 전에 잠깐만 멈춰보자. 마음이 앞선다는 이유로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고 결혼과 연인, 고백이라는 성공적인 결말을 맺지 못한 그들의 속풀이와 악담이 일면 더 심한 악당일 수도 있다. 그녀는 상처가 많아, 겁이 많아 벽에 부딪혀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썸머와 헤어진 톰에게 누가 묻듯이, 이 셋 중에 바람을 피우거나 그를 이용한 사람이 있는가. 변덕스러워 보였을지언정 진심을 더 많이 표현한 그녀들이, 속 좋은 사람처럼 끙끙 속만 앓고 표현하지 못했던 그들보다 아쉬워 뒤돌아 볼 것이 더 남아 있겠는가. 날 때부터 사랑 앞에 적극적인 사람은 없다. 똑같이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온 그녀들이다. 들어맞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들은 해볼만큼 해봤기에, 차마 욕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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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풋한 종이 내음 첫걸음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들이 있다. 그들의 영역은 확고하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되지는 않는다. 좁은 문을 여는 이들은 강렬하다. 때론 자신을 불태워 버릴 만큼 이글거리기도 하고, 모난 정처럼 망치를 맞는 경우도 있다. 꿈꾼다고 이룰 수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이런 삶을 꿈꾸는 이도 현저히 적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감각적인 언어로 소설을 쓰는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하게 동경만 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꿈꾸는 작가 상도 분명 그런 파괴적 천재는 아니기가 쉽다. 보기 좋은 카페에 앉아, 멋진 도구(노트북이 됐든 만년필이 됐든 연필이 됐든)로 글을 쓰고 있는 모습에 가깝기가 쉽다. 겪어보기 전까지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조차 달콤해 보인다. 이 문장은 저격이라기보다 자아비판이다. 내게도 낯설지 않은 감각이므로.
<마이 뉴욕 다이어리>가 시작되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풋풋한 미소를 짓는 조안나도 그런 단계에 있다. 5개 국어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 소설을 쓰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말하며 웃는다. 그리고 지금은 조안나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사회생활 초년기다. 잡지에 시를 투고해 등단했고, 친구를 만나러 왔던 뉴욕에 눌러앉는다. 싸구려 아파트에서,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일자리도 구한다.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면서, 작가(이자 작가 지망생)인 자신의 정체성은 숨겨 두어야 하는 이중생활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뚜벅뚜벅 혼자 삶을 개척해 가는 젊은이의 성장을 담으려 했다. 해리와 샐리의 설왕설래 없이 혼자서 걷기에도 뉴욕은 아름답다는 것을, 악마도 프라다도 아닌 상사 아래서 충분히 단단한 시간을 쌓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인간의 젊은 날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풋풋한 종이 내음 안에서 따스한 톤의 색깔로 펼쳐 보인다. 다만 영화의 전개도 어쩐지 그만큼 풋풋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이 영화의 원제는 <My Salinger year>다. 여기서 샐린저는 "그 유명한" 소설가 J.D. 샐린저. 이런 "그 유명한" 이들의 작품을 안 봤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걸 안 봤다고?" 하며 놀라는데, '나만 안 본 천만 영화', '나만 안 본 베스트셀러'는 사실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읽고 쓰며 지내온 조안나지만, 미국 십대라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비롯해 샐린저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이런 걸 말할 때는 좀 부끄러운데, 나도 그렇다.) 뉴욕에서 새로 사귄 남자친구도 "믿을 수가 없다"라고 반응하지만, 어쩌겠는가. 안 읽은 걸.
그런 조안나지만 문학 전공을 따라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게 되고, 맡게 된 작가가 하필 샐린저다. 보통의 작가와 달리 계약 관계를 검토하거나 출판 현황을 체크하는 업무보다, 작가의 은둔 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주요 임무다. 세계 곳곳에서 보내오는 팬들의 편지는 잘 검토한 뒤 갈아버리고, 정해진 양식대로 답장을 보내야 하며, 다른 시간에는 타자기로 녹취록을 풀어내는 단순 업무가 대부분이다. 정작 타자기도 칠 줄 모르고, 에이전시에서 선호하지 않는 '작가'지만, 그 사실은 잘 숨긴 채 무사히 취업에 성공한다. 그리고 가끔 샐린저와 통화할 기회가 생긴다.
시고니 위버가 분한 사장 마가렛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고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성공한 직장인이다. 배경인 1995년 기준으로 사무실에 컴퓨터를 들이고 싶지 않다며 타자기 사용을 고수할 만큼 변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감각은 기민하다.
분명한 마이 웨이를 가진 상사와, 정석대로는 가지 않지만 아이디어 반짝이는 신입이라는 클리셰. 샐린저의 팬들에게 '진심 어린' 답장을 보내고 싶다는 조안나는 마가렛과 의견이 부딪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게 되겠지. 상사는 신입을 키워볼 만한 좋은 젊은이로 인정하고, 신입은 상사의 연륜과 보호에서 더욱 성장할 것 같은 느낌이다. 동시에 샐린저를 통해 문학을 향해 힘찬 도약을 이루게 되겠지.
게다가 그 배경은 90년대의 정취가 담긴 아름다운 소품과 의상, 낭만을 가득 담은 뉴욕의 정경, 그 안에서 펼쳐지는 싱그러운 초년의 시절. 아름다운 정서를 담뿍 전달하기에 더할 나위가 없다.
그 기대는 살짝 아쉬운 선에서 충족된다. 마가렛과의 관계도 샐린저와의 관계도 또한 팽팽한 힘 없이 축 늘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유가 뭘까. 나는 조안나라는 캐릭터의 설정에는 공감했지만, 그 설정은 영화 속 언행과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로 등단했다는 점, 대학원을 중퇴하고 뉴욕으로 왔다는 점,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점을 대사로는 설명하는데, 극 중 모든 행동에선 드러나지 않는다는 느낌. 마치 내가 처음 썼던 단편 시나리오 같다.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 급급해서 정작 사건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설정해둔 캐릭터 특성을 대사에 마구 욱여넣었던…
샐린저라는 작가를 맡은 에이전트임에도 러닝타임 후반부에서야 샐린저를 읽기 시작하는 인물이, 샐린저의 책에 감명을 받고 편지를 써오는 사람들에게 대체 무슨 답장을 하고 싶어 하는지? 조안나는 '진심' 어린 답장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보내고 싶은 진심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괴로워한다는 설정도,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잘 아는 감정이기에 넘실넘실 다가올 뿐 영화에서 잘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영화 속 인물이 꼭 실제 직장인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조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여줄 수도 없다. 그러나 결말까지 가는 동안 조안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배경이 직장이고 직업적 성취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 일에서도 글에서도 보여줘야 하는 영역이 있지 않을까? 바둑 두다 낙하산 타고 대기업 들어간 장그래도 '쟤는 언제 자나?' 싶을 정도로 노력하는 모습들을 함께 담아, 가까스로 쌓은 기초 지식에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붙여 자기 자리를 확보해간다는 설정에 개연성을 확보했듯이. 그런 개연성의 노력이 없는 채로 조안나는 엉성하게 그려지다 말았다. 그럼에도 얼기설기 풀려나가는 조안나의 시간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스토리를 눙쳐 버리는 수준이다.
샐린저와 마가렛에게 각각 문학 조언과 업무 조언을 들으며 성장의 양 날개를 펴는 지점에서는 다소 의구심이 일지만, 동시에 그 미숙하고 모자란 면면은 조안나라는 캐릭터의 매력이기도 하다. 미숙하고, 엉망진창이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발을 떼어 보는 것. 그 시기가 아니라면 차마 가질 수 없는 마음. 많이 계산하지 않는 속내. 그래서 어쩐지 응원하고 싶어지는 단계. 그때 동경하는 삶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간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마음이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과 명확한 연관 관계가 있는지 그건 모르겠다. 다만 나는 문학과 얽힌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길 잃은 기분도, 그걸 박차고 풋내 나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의 기분도. 멋진 어른을 보며 존경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는 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과 동시에,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고, 내가 여기 있구나, 새삼스러운 그 기분. 막연함과 외로움, 설렘. 그 자리에 함께 놓여 있는 문학.
미묘한 아쉬움을 그렇게 젊음과 문학이라는 단어가 벌충한다. 포스터 카피대로 여기는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 첫 페이지니까.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고, 세상을 알아가고, 그렇게 자라날 테지. 내게 이 이야기가 멋진 성장기로 다가오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씩씩하게 발을 떼는 조안나의 첫걸음에서는 풋풋한 종이 내음이 났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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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카라스의 여름 / Alcarras
알카라스의 여름 / Alcarras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으로 개봉 전 미리 보고왔습니다.
/ 줄거리 /
해가 내리쬐는 작은 마을, 알카라스 매 여름마다 복숭아를 수확하기 위해 3대째 모이는 솔레 가족은 찬란한 계절을 누린다 탐스러운 복숭아처럼 영글어가는 가족의 이야기 그 해 여름의 복숭아는 저마다의 기억으로 자란다
- 네이버 영화 -
/ 감상 /
평화롭게 복숭아 농사를 하며 지내온 그들에게 갑자기 떨어진 퇴거명령.
그들의 농장의 실 소유주가 자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농장부지를 개발해야하니 이번 여름까지 정리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한 평생 복숭아 재배만 해온 그들에게 갑자기 나가라니..
복숭아로 생계를 유지해온 그들은 통보를 받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며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생각났다.
결국, 가진 자들의 승리로 끝나는 이야기.
이 가족들도 안다.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인상깊은 것은, 뭘하든 달라지는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여름의 끝까지 복숭아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 '위기'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흩어졌다, 뭉쳤다 하는 모습이다.
그들에게 복숭아는 단순한 경제활동의 수단이 아닌, 그들의 인생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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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나 사는 것은 똑같다.
결국 힘있는 자들이 승리하고,
소시민들은 모든 결과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족의 힘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나라의 어느 가족이든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족이 인생의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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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분명 허구의 일인데, 영화를 보며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대단한 에피소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 떄문일까.
진짜 스페인 카탈루냐의 한 가정의 모습을 들여다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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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깊은 씬은 마지막 씬이다.
다 같이 모여 마지막 복숭아를 즐기며 쓰러져가는 복숭아 나무들을 바라보는..
이 한 장면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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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7점 /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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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이었어
학창 시절 가장 친했던 당신의 단짝을 기억하는가?
나의 단짝을 떠올려본다. '처음'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공유한 타인. 별거 아닌 일에도 눈만 마주쳤다 하면 깔깔 웃곤 했던 그때. 유머 코드도, 대화도 잘 통했던 우리. 오랫동안 함께 하리라고 믿었던 어린 나. 번호조차 모를 미래는 상상도 못 했다. 그 친구는 가끔 꿈에 나온다. 우리는 때로 화해를 하고, 때로 싸우고, 때로 예전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눈을 뜨는 순간 실제 같은 잔상은 빠르게 사라진다. 오묘하다. '오묘함'은 대체 어떤 감정인지 몰라서 어떻게 떨칠 수 있는지 모른다. 추억이 된 단짝과의 기억은 그렇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안생도 비슷한 아침을 보냈을까.
꼬꼬마 시절, 안생과 칠월은 같은 학교에 다녔다. 공통점이라곤 그거 하나인 것 같았다. 칠월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 모범생의 길을 걸었다. 공부도 잘하고, 말썽도 안 피우고, 하라는 일은 착실히 해냈다. 안생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길을 만들어 갔다. 성향이 상극인 두 사람은 종일 붙어있다시피 한다. 정반대여서 끌렸을까?
▶ 그래야만 하는 칠월, 그래도 되는 안생
안생과 칠월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둘이 걷는 방향이 멀어진다. 안생은 공부 대신에 미용을 배우고, 칠월은 어려서부터 듣던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공부한다. 둘의 마음은 멀어지지 않았다. 안생은 여전히 칠월의 가족처럼 식탁에 앉는다. 칠월은 조금 불만이다. 저에겐 타박만 하는 어머니가 안생을 다정하게 대한다.
태도뿐만 아니라 들려주는 말도 다르다. 칠월에게는 바른 삶을 이야기한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고, 그마저도 힘드니까 좋은 대학에 가서 적당한 때에 결혼을 해야 한다며. 칠월은 그 조언을 진리라고 믿었다. 한 번도 엇나가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안생은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자유분방함과 씩씩함, 복스럽게 먹는 모습 따위에 대한 칭찬만 들었다.
칠월은 친딸이고, 안생은 딸의 친구라서 하고 싶은 말이 달랐을까? 어쩌면 둘이 태생부터 다르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칠월은 얌전하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고, 유약한 아이. 안생은 밝고, 쾌활하고, 재밌고, 흥이 많은 아이. 안생이 훔쳐온 귀걸이를 칠월의 어머니께 선물하자, 칠월은 도덕성에 어긋난 안생의 행동을 꼬집는다. 안생은 언젠가 갚을 생각으로 가져온 거라 훔친 게 아니라고 답한다. 칠월의 어머니가 사실을 알게 되면, 안생보다는 친구를 말리지 않은 칠월을 나무랄 것이다. 칠월을 '그래야 하는' 아이로 키워왔다.
안생은 곧 넓은 세계로 나가겠다며 고향을 떠난다. 칠월은 고향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우직하게 자리를 지킨다. 대학교에 입학하자, 이제 꼭 해야 하는 공부는 끝났다. 앞으로 할 일을 직접 찾아야 한다. 호기심과 들뜸을 안고, 저마다 관심 있는 동아리 부스로 찾아가는 사람들. 칠월은 그 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하고 싶다는 욕구를 품어본 것도, 그 욕구를 따라가 해소한 경험도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었다.
결국 주어진 길로 돌아온다. 칠월은 목표했던 신문방송학과 대신 경제학과를 졸업해 은행원으로 취직한다. 스물일곱에 애인과 결혼하면, 적어도 가족이 말했던 여성에게 안정적인 길은 따라갈 수 있다. 안생은 긴 시간 세상 곳곳에서 칠월에게 편지를 쓴다. 매 편지마다 직업도, 머무는 장소도, 어울리는 사람도 다르다. 매일을 다르게 사는 안생은 문득 재미를 잃는다. 지친 것이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고향, 칠월에게 돌아간다.
▶ 나는 네 존재만큼 부족하다
둘은 상해로 여행 간다. 칠월은 처음으로 고향에서 벗어났다. 정해진 길을 충실히 산 덕에 여행자금이 풍족하다. 하루하루 사는 것에 족하던 안생은 돈이 없다. 안생의 안내로 낡은 여관으로 간 둘. 칠월은 자신이 돈을 내겠다며 고급 호텔로 데려간다. 식사를 하러 나온 둘. 안생은 칠월에게 제가 살아온 방식을 보여준다. 바텐더에게 술 10병을 팔면 자신에게 공짜로 1병을 주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테이블로 가 내기를 건다. 20초 안에 안생이 한 병을 다 마시면 추가로 10병 시키기로. 안생은 해낸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술병을 따는 안생. 잠시 머물렀던 테이블에서 두 남자가 다가와 말을 붙인다. 안생은 친구가 술을 못한다며 자연스레 거절하려고 한다. 칠월은 술잔을 단숨에 비운다. 당황한 안생, 다시 빌붙으려는 남자들을 융통성 있게 쫓아낸다. 상황을 가볍게 넘기려고 애써 농담을 붙이는 안생. 칠월은 날카롭게 받아친다. 감정은 말이 오갈수록 격해지고, 결국 안생의 언행이 저급하다고 깎아내린다. 안생도 지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지 못한 칠월을 비꼰다. 상처만 남은 여행은 각자 찢어진 채로 끝난다.
안생에게 있는 것이 칠월에게 없고, 칠월에게 있는 것이 안생에게 없다. 전자는 자유로운 사고, 친화력, 추진력이고 후자는 따뜻한 가정, 안정적인 삶이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동시에 부러워한다. 성격과 가정환경은 후천적으로 창조할 수 없다. 절대 가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갖고 싶어 하고, 그것을 가진 이의 자랑에 자존심이 깎인다.
둘의 사이는 극악으로 치닫는다. 칠월의 삶은 안생과 애인뿐이었다. 칠월이 가졌기에 안생은 가질 수 없는 사람, 칠월의 애인 가명. 오래전, 안생이 떠나기 전에 가명은 가장 소중한 목걸이를 안생에게 주었다. 둘의 이상한 분위기를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칠월은 모른 척했다. 둘 다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안생에게 뺏기기 싫었다. 안생을 다시 만난 칠월은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낸다. 칠월이 이전에 저급하다고 말했던 방식대로 안생을 공격한다.
느지막이 칠월은 깨닫는다. 정해진 수순을 따라서 가명과 결혼을 해도 행복은 없을 것이다. 살면서 온전히 자신 뜻대로 무언가를 한 적도, 원한대로 된 적도 없었다. 칠월은 큰 결심을 단행한다. 가명에게 결혼식 날 도망가라고 말한다. 그래야 자신도 당당하게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며. 그렇게, 둘의 사이는 끝났다. 고향을 벗어나 혼자 살아가던 칠월은 안생을 찾아간다. 부른 배를 안고서.
안생은 직장을 잡고, 결혼할 애인을 옆에 두고, 한 곳에 머문다. 예전의 칠월이 살던, 매일이 똑같은 삶이다. 칠월은 지난 일들을 털어놓으며 미움, 분노, 억울함까지 고백한다. 그리고 자유를 갈망한다. 안생처럼 이곳저곳 정처 없이 떠도는 삶, 정해진 길이 없는 삶, 하고 싶은 것을 주저 없이 따르는 삶. 안생과 칠월은 서로의 인생을 바꾸기로 한다. 칠월의 아이는 안생이 맡고, 칠월은 생애 첫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 그래서 너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이었어
자유를 얻은 칠월은 안생의 흔적을 따라간다. 여관, 유람선, 바, 거리. 안생은 후에 가명을 만나 칠월의 이야기를 전한다. 가명은 안심한다. 하지만 안생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진다. 가명이 현실이라고 믿는 그 이야기는 사실 안생이 쓴 소설의 픽션 부분이었다. 칠월은 아이를 세상에 남기고 죽었다. 자유를 한 번도 느끼지 못하고 떠난 친구의 명복을 안생이 빌어주기로 한다. 적어도 소설 속 칠월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얼마든 머물 수 있고, 무엇이든 즐길 수 있다.
누가 만든지도 모를 길을 견뎌내느라 지쳤을 칠월, 자유에 손 뻗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헐뜯던 칠월, 자유를 쉽게 얻은 안생을 미치도록 부러워했던 칠월. 신중하고, 겁 많고,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화재경보기를 장난으로 울리려고 한다. 안생은 경보기를 감싼 유리를 깨뜨리려고 돌멩이를 쥐었지만, 망설인다. 뒤에 있던 칠월이 안생의 손을 잡고 유리를 부쉈다. 스릴을 즐기고, 겁 없고, 장난기 많았던 칠월. 정해진 길을 걷기 위해서 제거해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안생이 그린 칠월의 자유로움은 칠월의 바람이 깃든 것만은 아니다. 잃어버린 칠월을 되찾은 이야기이다.
'너 자신을 알라'.
사회의 무수한 기준, 잣대, 평가에 나를 욱여넣던 지난날. 이제 뒤돌아 자신이 찍은 발자국을 살펴볼 시간이다. 내가 원했던 방향을 걷고 있는지, 이상과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그래서 어떻게 할지. '나'에 관한 답을 만들어 갈수록 생각은 명확해지고, 길은 뚜렷해진다. 물론 어렵고 힘든 여정이다. 하지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사진 출처는 모두 네이버 영화입니다.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드라마
원작
도서 칠월과 안생
러닝타임
110분
감독
증국산
출연
주동우(안생 役), 마사순(칠월 役), 이정빈(가명 役) 등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박윤혜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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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의 권력과 폭력성을 직면하다
작품을 수입하여 부제를 붙이거나 새로운 제목을 붙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제목은 작품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선택은 작품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무척이나 어울리는 '분열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한국의 극장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는 어떤 ’분열‘이 벌어지고 있는가? 일차적으로는 ’내전‘으로 인한 분열이다. 한 나라의 국민임에도 갈라선 이들. 이들이 어떤 이념으로 인해 갈라서게 됐는지에 이 영화는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한 인물이 기자인 주인공과 동료들을 향해 묻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Which kind of American are you?”. 이 질문을 던진 뒤, 그의 총구는 아시아 출신 미국인들에게 먼저 향한다. 이차적으로는 ‘종군사진기자’들의 분열이다. 주인공인 이들은 내전 상황에서 내면의 분열을 겪으며, 이 작품은 후자에 초점을 둔다.
이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사진으로 다뤄내어 사람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진 인물들로 보인다. 그렇게 이들은 ’Great photo’를 찍기 위해 현장을 누빈다. 내전 상황 속에 펼쳐지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들. 그 순간 카메라를 들이밀어 극적인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총탄이 오가고 피가 솟구치는 순간들이 화면에 연속적으로 보여진다. 전쟁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울려퍼지는 파티에서나 나올법한 음악은 우리의 의식을 혼란하게 만든다. 그 현장을 좋은 구도로 포착한 이들은 현장을 떠나며 말한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그러나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이들은 집단 내부에서 동료의 죽음을 맞이하자 온전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쾌감 속에 익명의 인물들의 죽음을 담아내던 이들은 자신의 동료를 ‘그들’ 정도로 칭하자 그들도 이름을 가졌다며 분노를 표출한다. 게다가 집단의 정신적 지주격인 이의 죽음에는 절망하며 고함을 쏟아낸다. 이 순간, 이들의 음성은 음소거되어 이미지로만 비춰진다. 즉, ‘분열의 시대’라는 부제 속에 담긴 의미는 단순히 ‘내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열의 시대‘는 이들 내부에서도 진행 중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찾아오고, 총과 카메라는 번갈아가며 보여진다. 그렇게 시선의 권력이 가진 폭력성은 상징적으로 재현된다. ’shoot’은 ‘총을 쏘다’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진을 촬영하다’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알려주는 순간이다. 그리고 찾아온 클라이막스의 이미지는 예상 가능함에도 충격적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했던 ‘결정적 순간’은 그순간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의 곁에 오랜 시간 머물러왔다. 그렇기에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을 때의 쾌감을 안다. 불행이 만드는 스펙터클은 끔찍하며 아름답다. 그때 나도 이들과 같은 표정을 지었을까. 일찍이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폭력이나 잔혹함이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스펙터클로 뒤덮인 사회에서 우리는 끝없이 폭력에 무뎌진다. 이는 온갖 매체들이 점점 더 폭력적인 이미지를 양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이상 예전 같은 자극으로는 대중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이 작품의 특장점은 그러한 스펙터클을 끝없이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 스펙터클을 온힘을 다해 포착하는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여과없이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한 뜻이 있다는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사실 우리는 스펙터클을 담아내는데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장점이다. 충분히 교조적인 흐름일 될 수 있었을 것임에도, 시선의 권력과 폭력성에 대해 인정하고 직면하는 이 영화가 좋다. 그렇다면 보는 이이자 찍는 이로서 나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이 질문을 남긴 채 이 영화는 우리의 손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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