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10-06 00:31:23
누구를 위한 잔혹함인가.
영화 <늑대사냥> 리뷰
나름 잔인한 영화를 잘 보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진짜 아니었다. 써는 것도 모자라 도려내고 찢어내서 짓이기는 행위를 반복하는 장면들의 연속이 보는 내내 괴롭게 만들었다. 재미가 없어도 영화 신작 리뷰는 꼭 쓰려고 하는 편인데도 나에게 그런 의지를 앗아갔다. 청소년 불가의 범죄물이 고어물로 넘어가기까지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늑대 사냥에 대한 리뷰를 해본다.
영화는 필리핀에서 부산항으로 향할 프론티어 타이탄이라는 배에서 시작된다. 동남아시아로 도피한 범죄자들과 그들을 맡을 베테랑 형사들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긴장감과 더불어 불안함이 스친다. 그렇게 모두가 배에 타게 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형사들이 범죄자들을 수갑으로 채워둔 상태로 절대적인 우위에 놓여있다. 하지만 언제부터 계획된 일인지 종두를 중심으로 하나 둘 씩, 배의 구석구석을 점령해가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뀌어간다. 다른 이들의 일말의 가능성도 끊기 위해 달려간 곳에 있는 존재로 인해, 전반부의 이야기는 말끔하게 사라지며 한올의 희망도 찾을 수 없다.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이 배에서 그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가짜 피를 2.5톤가량을 썼다고 들었는데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많은 노력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도 무엇을 위한 잔혹함인지, 누구를 위한 잔혹함인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공포 그 자체의 공간으로 변화해가며 또 다른 움직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빼곡하게 트라우마를 새길뿐이다. 잔인함을 싫어하는 관객이라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영화다. 남자판 마녀를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 이야기의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아쉬움만 가득하다. 어떤 것도 맺어지지 않은 이야기가 속편까지 바란다면 그건 너무 큰 욕심이 아닌가. 날 것을 탐하기엔 너무 상해버린 혐오 사냥이다. 누군가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거리를 두게 될 것 같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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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적: 도깨비 깃발> 발전적 계승이 돋보이는 리모델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칭 고려 제일검이자 고려 무관 출신 의적단 두목 ‘무치(강하늘)'는 바다를 떠돌다가 ‘해랑(한효주)'과 그녀의 해적단에 의해 간신히 구조된다. 의도치 않게 한 배에서 동행하게 된 의적과 해적은 호랑이와 상어처럼 상극의 면모를 보이면서 항해를 이어간다. 어느 날, 이들은 함께 왜구선을 약탈하던 중 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군 일부가 빼돌린 고려 왕실의 보물이 실존한다는 정보를 얻는다. 일확천금할 기대에 부픈 이들은 불기둥과 번개섬이 기다리는 모험을 떠난다. 한편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명도 신경 쓰지 않는 ‘부흥수(권상우)'도 탐라국 왕을 두고 이방원과 거래를 하며 고려 왕실의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로 향한다.
2013년 여름에 개봉했던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액션 어드벤처 장르다운 유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866만 명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짜임새나 완성도로 인해 혹평을 받기도 했으며, 특히 역사를 과하게 왜곡했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롤모델이라 할 만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역사적 사실과는 큰 관계가 없는 것과 달리, 조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시각이 영화의 스토리의 중심축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는 고려군 무관 장사정(김남길)이 산적이 된 후 사라진 조선의 국새를 찾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보니, 영화에는 이성계를 일방적으로 찬탈자로 규정하고, 이성계의 4불가론을 악의적으로 묘사하거나 숭유억불 정책을 비판하는 묘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에 속편인 <해적: 도깨비 깃발>은 역사를 활용함에 있어 전편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전편과의 연결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차별화된 매력을 더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이는 역사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고, 동시에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적절히 각색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번 영화도 기본적인 시대적 배경은 전편과 동일하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에 반대하는 고려군 일부가 고려 왕실의 보물을 훔쳐 달아나자 해적과 관군이 이를 뒤쫓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해적 2>의 역사관은 전편과 상극이다. 보물을 백성들과 나누겠다는 무치가 고려냐 조선이냐 보다도 백성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시대적 흐름에 맞춰 조선 왕조를 인정하는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편의 역사왜곡 논란을 답습하는 대신, 이야기를 발전적으로 계승함과 동시에 속편으로서의 정체성도 챙겨가는 영리한 작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간 사극에서 두드러지지 않았던 한반도 본토와 탐라국의 이중적인 관계를 적절히 이야기에 녹인 결과 자칫 전편의 반복에 그칠 뻔했던 영화는 새로워지고, 악역인 부흥수도 평면적인 악역을 탈피한다. 본래 독립 국가였던 탐라국은 고려 중기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세습 '성주'가 존재하며 일정 수준의 자치권이 허용되는 등 고려의 속국이자 동시에 독립국가인 이중적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고려 말 '목호의 난' 진행 과정에서도 목호 측과 고려 진압군 측 모두 명목상 탐라의 지배자인 탐라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조선 태종 시기에 탐라국은 그간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탐라의 성주 및 왕자의 명칭을 조선 조정에 반납했고, 제주도로 명칭이 바뀜과 동시에 조선의 행정구역에 온전히 편입되었다. 영화는 이러한 관계의 변화를 고려의 보물을 찾아주는 대가로 태종 이방원에게 탐라국의 왕을 요구한 부흥수 모험의 성공 여부와 연관시키면서 부흥수라는 캐릭터와 전체적인 전개에 무게감을 불어넣는다. 이는 고려-조선 교체기가 안정되어 가는 과정을 영리하게 각색한 또 하나의 예시라 할 수 있다.
다만 상술한 변화 내용을 <해적: 도깨비 깃발>이 적절히 부각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이 문제가 전편의 단점이 개선되지 않은 결과라는 점에서 아쉬움은 더욱 크다. 우선 완성도와 대중성 중 후자를 선택한 결과 <해적 2>에는 전반적인 이야기를 뒷받침할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전반적으로 부족하다. 이는 배우의 <런닝맨>에서의 이미지를 그대로 활용해 유머를 전담한 '막이(이광수)'에 비해 눈에 띄게 적은 부흥수의 분량만 봐도 알 수 있다. 작중 부흥수가 탐라국의 왕위를 요구하는 이유나 당위성 등이 암시될 뿐 명시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타율 좋은 유머로 잡은 대중성마저 더 많은 잠재력을 희생시킨 결과물처럼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영화가 전체적으로 익숙한 형식과 장면들로 무장했다 보니 변화를 준 대목이 진부함에 가려지는 문제도 있다. 일부 주인공의 성별이 바뀐 것을 제외하면 1편과 2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 거의 일 대 일로 똑같이 일치한다. 산적이었던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해적에 합류하고, 하나 된 일행이 벽란도를 거쳐 본격적으로 모험에 나서는 등의 전반적인 흐름도 천편일률적이다. 이에 더해 거대한 물회오리를 뛰어난 선장의 역량으로 돌파하는 것이나 물에 잠긴 배가 솟구치는 것 등은 <캐리비안의 해적>과의 유사성이 두드러지는 대목으로, 시각에 따라 재해석 또는 빈약한 상상력의 현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보물을 찾기 위해 또 다른 힌트를 먼저 찾아야 하는 식의 스토리는 새로운 캐릭터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여지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과하게 빠른 영화 템포와 편집을 만나 영화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적: 도깨비 깃발>은 싫어할 수 없는 영화다. 한국의 <캐리비안의 해적>을 표방하는 시리즈답게 액션 영화와 어드벤져물로서의 정체성이 확실해서 보는 재미만큼은 보장하기 때문이다. 액션의 경우 <300> 시리즈나 <안시성>에서 보았던 것처럼 슬로모션과 패스트 모션을 오가는 편집을 통해 맨몸 격투나 결투 장면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또한 전편과 달리 바다와 섬의 비중을 늘려서 '해적'이라는 콘셉트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기대 이상의 재미를 주기도 한다. 일례로 덱스터 스튜디오의 CG 작업을 통해 탄생한 바다의 용을 연상케 하는 불기둥, 급작스럽게 폭풍우가 내려치는 번개섬 등에서 사투를 펼치는 해적선과 선원들의 모습은 단지 고질적인 음향 문제가 발목을 잡을 뿐, 충분히 훌륭한 스펙터클이다.
이에 더해 전편의 주인공들과 비교당할 수 있었던 새로운 캐릭터들을 '지도자'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어내면서 극의 중심을 확실하게 잡은 선택 역시 영리했다. 해적단의 단장인 해랑과 의적단의 두목인 무치가 한 배에 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만큼, 자연히 영화는 누가 해적선의 리더가 될 것인지를 다룰 수밖에 없다. 이때 영화는 세부적인 플롯들을 통해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죽을 수 있는 위기에서도 부하들을 포기하지 않는 해랑과 그녀를 마지막까지 따르는 해적들의 끈끈한 우애는 리더로서의 포용성을 강조한다. 또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도덕성과 인간성은 과거 고려군 소속으로 상사와 부하였던 무치와 부흥수 간 갈등과 두 리더의 차이를 부각할 기회가 된다. 심지어 늘 무시당하는 말단 부하였던 막이가 해적왕이 되는 과정은 다소 과할 수도 있었던 영화의 유머마저 지도자의 자질과 자연스럽게 이어 붙여 준다.
사실 설 명절을 앞두고 개봉하는 <해적: 도깨비 깃발>은 기대보다는 우려가 큰 작품이었다. 흥행은 성공적이었으나 호불호가 갈렸던 전편의 평가는 속편의 안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심지어 출연진이 전부 바뀌어 이야기의 연속성이 사라진 만큼 시리즈의 후광을 기대하기 힘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만나 본 <해적: 도깨비 깃발>은 충분히 기대 이상이라 할 만한 작품이었다. 여전히 완성도는 부족했지만, 장르 영화다운 쾌감을 즐기지 못할 장애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 전편의 실수까지도 역이용해 시리즈로서의 연결성을 확보하며 색다른 재미와 감상 포인트를 선사하는 데 성공한 점 역시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해적: 도깨비 깃발>은 준수한 장르영화로서 오락의, 오락에 의한, 오락을 위한 출항 준비를 모두 끝마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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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cceptable, 무난함)
전편으로부터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 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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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직원’이 〈드래곤볼〉, 〈원피스〉의 주인공이라면
7★/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옥의 화원〉은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했고 관객 사이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일본의 OL(Office Lady) 장르와 액션 만화의 문법을 코믹하게 조합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OL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장르다. 아무래도 액션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지옥의 화원〉에서는 이들 여직원이 ‘주먹’으로 서열을 정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린다. 〈드래곤볼〉, 〈원피스〉 같은 만화처럼 말이다. 괴상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웃음이 신선하다.
여직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구두를 신은 채 근무하는 회사가 있다. 모든 회사가 그러하듯 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건 싸움 실력이다. 부서별로 대장이 있는데 대장을 위시한 직원들은 폭력 조직처럼 행동한다. 상대 부서에 찾아가 대장끼리 맞붙고 이긴 부서가 상대 부서를 접수하는 식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건달처럼 꾸미고 다니는 여직원들도 있는 반면 주먹 세계와 거리를 둔 채 평범하게 회사 생활하는 직원도 있다. 나오코는 후자다. 나오코는 회사 내 주먹 서열에 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소소한 일상을 만족스레 살아간다. 그러던 중 나오코는 우연한 계기로 혈혈단신으로 회사 내 조직을 모두 평정한 란과 친구가 된다. 란의 싸움 실력과 명성을 견제하는 다른 회사 조직원에게 납치를 당하기도 한다.
반전이 있다. 사실 나오코는 싸움 DNA를 타고난 실력자다. 다만 주먹 세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평범한 일상을 산 것뿐이다. 여왕벌로 태어난 운명을 억지로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마주하고야 마는 나오코와 늘 자신이 주인공이라 생각했으나 사실 조연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좌절하는 란. 이 둘 중 누군가는 여직원 주먹 세계를 평정해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2인자가 되어야만 한다.
회사에서 싸움으로 서열을 결정한다는 설정은 황당하다. 하지만 그럴듯한 구석도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지표를 들이대며 성과를 평가하고, 고루한 직급으로만 서열을 정하는 회사보다 싸움 실력으로 서열을 정하는 회사가 차라리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모든 주요 캐릭터가 ‘여직원’, 즉 여성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지옥의 화원〉은 여성이 주인공인 장르(OL)에 남성이 주인공인 장르(액션)를 더해 여자들만의 세상을 구축한다. 남성 캐릭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철저히 여직원들이 구축한 세계의 바깥에 있다. 여직원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싸움 얘기를 하다가도 남직원이 들어오면 방긋 웃으며 친절히 인사한다. 이 장면은 여직원이 기존 성별 위계 따위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남자들이 주인공인 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여직원에게는 자신을 합당하게 평가하는 세계만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더불어 복사, 전화 응대, 휴게실 청소 등 여직원들이 담당하는 ‘잡무’를 진정한 고수가 되기 위한 수련으로 재현해 일과 젠더에 관한 기존 위계를 유쾌하게 뒤집기도 한다. 배우들의 능숙한 코믹 연기와 장르 문법의 재치 있는 차용은 이 모든 쾌감을 한층 더 증폭한다. 〈지옥의 화원〉은 ‘여직원이 사무실에서 손오공과 루피가 되는 이야기’, 즉 듣도 보도 못한(심지어 의미까지 갖춘!) 오피스 코믹 액션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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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나를 사랑한 과거의 너에게
나는 중국의 주동우 배우의 팬이다. '소년시절의너'를 보고 그녀의 팬이 되었다. 그래서 넷플릭스를 돌아다니면서도 이 영화가 주동우 배우의 출연 때문인지 눈에 띄었지만 결국 관람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로맨스인데다가 신파일 것만 같은 편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볼 게 너무 없다고 느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결국 리스트에 올려놓았던 이 영화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볼 거면서 오래도 돌아간다, 나도 참.
1. 사랑의 맹점
보다보니 흡입력 있고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로맨스 영화가 흥하려면 결국 인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지만 일반 대중은 캐릭터의 매력으로 모이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여기 두 주인공은 서로의 입장이 너무 이해가 간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남자와 여자의 동상이몽이란 이런 건가 했다. 남자는 외면적인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여자의 마음을 놓쳤고, 여자는 조건을 본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 마음 속 깊은 속에 사람의 마음이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건 따지던 여자도 그 모든 조건들이 필요없어지며 사람 하나만을 바라본다. 하지만 여자의 조건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남자는 여자를 위해 자신이 되어야하는 이상향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에 맞기만 하면 여자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로의 타이밍이 이렇게 안맞는 것이다.
여자의 조건에 맞추고자 했던 남자의 노력이 이루어지려고 하는 그 순간 여자는 그렇게 따지던 조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남자의 진실된 애정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남자에게 그런 추상적인 말은 이해가 될 리가 없다. 자신의 사랑이 상대의 조건을 맞춰주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멘붕이 오는 것이다.
남자는 외적인 요소를 채워주는 것이 중요했고 여자는 남자의 애정이 중요했던 것인데 남자는 여자의 마음 깊이 숨겨진 진짜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잘 모르는 것이 인간 관계이고, 사랑하는 관계로 규정지을 수록 오히려 그걸 더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너는 나를 알아야지'라는 그 말이 결국 그들의 관계의 함정이 되어 버리는 것만 같다.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서로를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현타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2. 만약은 없다. 그것이 운명인 것이니
현재 시점이 되어 남자가 수많은 만일의 가능성을 논하며 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에 대해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만일 내가 그 곳에 갔다면, 내가 그러지 않않다면, 등등 과거에 다른 선택을 하면 헤어지지 않았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의 다른 선택을 했다면 결론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했던 행동의 반대를 행하면 현재와는 정확히 반대의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장담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지하철 앞에서 헤어졌지만 지하철을 탔다고 한들 결코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여자를 상실해 남자는 미친듯이 게임을 만들었고 그가 성공하는 것을 보며 그녀도 자신의 삶을 다시 꾸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상실은 서로의 인생에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팔자라고 생각한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결정하고 그 선택이 곧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 과거에 다른 선택을 어떻게 하는 것이 현재에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는 것은 결국 과거를 후회한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후회가 결국 인생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보면 그 후회는 결국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을 거다.
그 후회를 했기 때문에 그도 더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 상실이 없었다면 그는 어느것도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삶에서 꼭 필요한 삶의 부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지점에서 나는 여자의 입장에 동감한다. 헤어질 팔자였기 때문에 꼭 그 순간이 아니었더라도 결론은 헤어짐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헤어짐은 새로운 성장을 위한 필수였으니까.
총평 주저리주저리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인생의 귀인은 맞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먼 훗날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잘 살고 있는 모습으로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악착같이 베이징에서 버틴 것 같았다. 뭐랄까 두 사람의 애틋함은 아주 깊은 사랑을 했던 나 자신의 풋풋한 청춘을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결혼을 하여 자녀가 있는 남자에게는 그 시절이 가난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만큼 자유로웠던 시절이 없다고 생각할 테고, 여자 또한 그만큼 진득하게 사랑한 경험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다시 재회해 다시 교제한다고 해도 결국 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될 것이다. 좋아하는 이유도 과거와 같지만 헤어지게 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왜인지 더 찬란했던 나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 순간에 언제나 함께 했었던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포인트는 사람이 아니라 순간인데 말이다. '그 순간'을 함께한 '서로'가 아니라 '서로' 함께 해쳐나갔던 '그 순간'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시기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다시 그 순간으로 간다면 더 잘 대해줄 자신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말은 오류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의 마음가짐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가면 나는 또다시 그 철없고 무모했던 시절의 마음가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과거에 철없는 나 자신에서 변화한 모습이기에 과거로 돌아가면 더 나은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철없던 과거의 내가 없으면 현재의 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삶의 궤적과 같아서 내가 한 만큼 되어 있고, 견딘 만큼 평화가 오는 게 인생이다. 그들의 현재도 서로를 상실해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의 현재는 과거 서로를 많이 사랑했고 대가 없이 사랑했던 기억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의 현재 시점에서의 만남은 후회로 남아있던 서로의 관계 속에서의 감정들을 갈무리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기회였던 것 같다. 이제 그들은 서로를 응원하며 다음 phase를 밟을 수 있지 않을까. 나 또한 두 사람 모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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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다섯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개봉직후 1위에 올랐던 <댓글부대>를 꺾고 <파묘>가 1위를 재탈환했습니다.
1100만을 앞두고 있는 파묘의 흥행질주는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국내박스오피스]
영화 <파묘>가 신작 공세에도 주말 극장가에서 1위를 지켰습니다. <댓글부대>는 개봉 당일 <파묘>를 제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으나, 하루 만에 1위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1100만을 앞두고 있는 <파묘>의 관객몰이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며 한편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가 23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모아 3위에 올랐습니다.
[북미박스오피스]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가 개봉 3일 만에 8000만 달러의 스코어를 달성하며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습니다. 영화는 상상초월의 거대한 위협에 맞서 힘을 합친 고질라와 콩이 몬스터버스사상 최강의 팀업을 펼치는 액션 블록버스터로 국내에서도 외화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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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북유럽 복수극의 창조적 파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동으로 파견되어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덴마크군 군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 그는 아내와 딸 '마틸드(안드레아 하이크 가데버그)'가 열차 충돌 사고에 휘말렸고, 아내가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다. 좀처럼 아내와의 사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의 앞에 어느 날 아내와 같은 열차 칸에 탔던 통계학자 '오토(니콜라이 리 카스)'가 등장한다. 그는 데이터 분석가 '에멘할러(니콜라스 브로)', 해커 '렌나르트(라르스 브리그만)'와 함께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열차 충돌 사고가 계획된 범죄였음을 알려준다. 이에 분노로 가득 찬 마르쿠스는 직접 범인들을 심판해 아내의 복수를 이루려 한다.
여기까지가 덴마크의 국민배우 매즈 미켈슨이 주연을 맡은 앤더스 토마스 옌센 감독의 영화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의 줄거리다. 사실 줄거리만 보면 이 작품은 리암 니슨의 대표작인 <테이큰> 시리즈나 최근에 개봉한 <캐시트럭>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이들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 혹은 사랑하는 이의 신체나 정신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한 범죄를 경험한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의 피해를 되갚아 주기 위해서 범인을 추적하고 계획을 세운다. 마지막으로 그는 범인과 대결하고 피비린내 나는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를 앞서 언급한 예시들과 동일한 범주에 놓는 것은 부적절하다. 영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복수의 결과를 보여주기보다는 일반적인 상업 영화 속 복수극의 단계를 뒤틀어 복수의 이면과 본질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이를 위해 옌센 감독은 복수극의 공식을 파괴하는 네 장의 카드를 꺼내 보인다.
첫 번째 카드는 복수극의 단축과 서스펜스의 실종이다. 작중 복수의 계획과 범인의 추적은 막힘 없이 진행된다. 마르쿠스는 직접적인 범인으로 판단한 이를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죽인다. 범인이 속한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라는 이름의 갱단 구성원과 보스가 누구인지, 그들의 집합 장소와 시간을 알아내는 작업도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궁극적인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갱단 보스와의 대결도 총알이 그의 머리에 꽂히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깔끔하게 끝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숙명의 대결은 없다. 그 결과 영화는 러닝타임을 30분가량 남겨둔 상태에서 이미 마르쿠스의 복수를 일단락시킨다.
두 번째 카드로 영화는 일단 복수가 끝난 극의 전개를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중 어느 것에도 도달하지 못한 충격과 혼란 속에 빠트리면서 복수의 이면과 의미에 대한 고찰을 풀어놓는다. 성공적인 복수를 자축하던 찰나에 마르쿠스와 동료들은 지나치게 수월히 진행된 복수가 열차 충돌 사건과 무관한 이를 죽이고, 관련 없는 갱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의 복수는 완벽한 헛발질이었고, 더 나아가 그들의 위치를 복수의 주체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봉변을 당한 갱단의 복수 대상으로 뒤바꿨을 뿐이다.
그 순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마르쿠스의 반응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깊이 절망한다. 단지 자신이 잃은 것을 되갚아 주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에게 복수는 구원을 얻기 위한 속죄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동 파견 군인이라서 아내와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그들이 사고가 발생할 기차를 타는 원인을 직간접적으로 제공했다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던 그. 그의 입장에서 성공한 복수의 아이러니한 실패는 아내와 딸에게 사죄하고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길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더해 그가 복수만을 바라보며 아등바등한 모든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진실도 그의 절규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사실 마르쿠스의 복수극은 명백한 팩트(fact)가 아닌 한 가지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모든 사건에는 우연이 아닌 인과관계가 존재하며, 그 인과관계를 파악하면 특정 사건을 예측할 수 있고 동시에 특정 사건의 원인도 밝혀낼 수 있다는 가설이다. 그래서 오토, 렌나르트, 에멘할러는 마르쿠스에게 수상한 탑승객의 행적이나 갱단의 보스와 관련된 이슈 등을 근거로 내밀며 단순한 사고로 보이는 열차 충돌 사건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예정되었던 테러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이는 그가 복수에 나서는 방아쇠가 된다.
따라서 그들의 총알이 과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을 깨닫는 순간, 열차 충돌 사건이 테러가 아니라 의도가 섞이지 않은 우연이 낳은 사고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복수는 역으로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복수는 본질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현재에 전복하는 행위이기에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 상황에 영향을 끼쳤다는 근거가 있어야만 복수의 대상이 특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마르쿠스의 절규를 통해 복수극을 지탱하는 전제를 파괴하고 기존 복수극의 전개와 구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 연출되었던 자전거 도둑 사건이나 값비싼 샌드위치를 그냥 버려버리던 수상한 남자 등도 이 시점부터는 전부 아무 의미 없는 맥거핀이 되어버린다.
대신 옌센 감독은 복수극의 의미가 없어진 자리에 한 편의 힐링 드라마를 채워 넣는 세 번째 카드를 꺼낸다. 그 중심에는 마르쿠스와 함께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오토, 렌나르트, 에멘할러 삼인방이 위치한다. 그들은 마르쿠스와 계획을 세우고 범인을 찾아다니는 동안 예상치 못한 기행을 하나씩 저지르면서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마주한다.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신체적 콤플렉스에 시달린 이, 헛간에서 가정폭력을 경험한 피해자, 자신의 실수로 가족을 떠나보낸 아버지까지. 여기까지만 보면 그들이 처한 상황은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분노로 삭히지 못해 폭력을 자제하지 못하는 마르쿠스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아픔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르쿠스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서로에게, 또 한 팀을 이룬 마르쿠스와도 자신들의 상처를 공유한다.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아닌 척 서로 신경 써주며 웃음과 유머로 고통과 상처를 보듬어 안으며 마치 가족과도 관계를 이룬다. 이는 삼인방 서로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렌나르트와 에멘할러는 자신들이 받은 심리치료를 바탕으로 아버지 마르쿠스와의 관계가 무너지진 마틸드의 콤플렉스를 발견하고 치유해주며, 오토는 엄마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영화에서도 언급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슬픔의 5단계' 안에서 삼인방과 마르크스의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삼인방은 상실과 슬픔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새롭게 살아가는 법, 즉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보듬어주는 방법을 깨우치고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중 마지막인 '수용' 단계로 넘어가 있다. 반면에 마르쿠스는 여전히 절망과 슬픔 같은 강렬한 감정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우울' 단계에 머무르는 데 그친다. 다만 그 역시 마지막에는 오토에게 안겨 울면서 자신이 외면하던 과거와 진실을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면서 온전히 상처와 고통을 나누고 서로 보호하는 관계에까지 이른다. 이는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붙잡고 형체 없는 대상을 쫓는 복수극 대신, 현실의 아픔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다짐하는 힐링 드라마로 거듭나려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카드로 영화는 덴마크, 곧 북유럽권의 고유한 정서를 부각하며 분량의 절반 가량을 맥거핀으로 만드는 플롯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그 독특한 분위기는 비장함과 황량함, 그리고 이를 버텨내는 일상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뛰어난 북유럽 범죄소설에 주는 유리열쇠상을 '해리 홀레' 시리즈로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가 2014년 방한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작품이 "북유럽 특유의 슬픈 감성"을 담고 있으며, 그 감성은 "커다란 재난이 일어나서 겪게 되는 슬픔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축적된 슬픔"이고, 사람들이 "그 슬픔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소설에 주로 담는다고 밝힌 것이 단적인 예시다. 이러한 북유럽 고유의 감성은 일 년 내내 춥고 거친 황량한 환경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심성적 측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한 정서는 북유럽 신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북유럽 신화는 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인 라그나로크에서 대부분의 신이 사망하는 결말을 맺는다. 신보다 운명이 더 우위에 있고, 신이라 해도 세계의 운명을 극복할 힘은 없다. 단지 운명과 현재를 받아들이면서 견뎌낼 뿐이다. 다만 북유럽 신화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라그나로크를 피한 몇몇의 신과 단 한 쌍의 인간이 새롭게 황금시대를 만들 것이라고 노래하며 종말 그 너머에 있을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만큼은 간직한다. 이처럼 운명에의 순응과 실낱같은 기대가 담긴 신화는 신과 운명에 저항하는 영웅을 사랑하는 그리스 신화 및 비극의 전통과 뚜렷이 구분된다.
영화는 이러한 감정들을 주인공들의 서사에 깊숙이 녹여낸다. 성당 장례식에서 모든 비극은 우연이라는 추모사를 모두 부정하며, 신과 산타클로스 따위는 없다던 마르쿠스가 태도를 바꾸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피에타 상처럼 동료의 품에 안기는 그는 아내의 죽음을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연에 가까운 확률이 빚어내는 현실과 운명에 순응한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멸망 속에서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희망과 낙관을 버리지 않는 신화처럼, 마르쿠스와 동료들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날에 프렌치 호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슬픔과 아픔을 딛고 지금보다 따뜻한 미래를 다짐한다. 이처럼 북유럽만의 감성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마무리와 함께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복수극이라는 껍질을 깨부수면서 한 편의 진중하고 따뜻한 힐링 드라마로 온전히 탈바꿈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플롯의 공식과 장르의 관습을 깨부수는 노르딕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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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함이 약점인 뉴 캡틴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과거로 떠났다. 그의 방패를 이어받아야 할 사람은 의외로, 그와 함께 싸워왔던 팔콘 샘 윌슨(안소니 마키)이었다. 사실 스티브 로저스는 캡틴 아메리카로서 끊임없이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가를 고민하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동료들이 다른 의견을 내세울 때도, 혹은 정부가 자신의 신념과 충돌할 때도 스티브는 흔들리지 않는 그의 확고한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에게는 슈퍼 혈청이 선사한 강인한 신체와, 동료인 버키(세바스찬 스탠)와 함께 지켜 온 수많은 전장이 존재했다. 이러한 슈퍼솔저의 힘 덕분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 자체가 일종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티브 로저스가 자신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떠남으로써, 그 자리는 공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레 누구든 그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는데, 바로 샘 윌슨이 그 방패를 쥐게 된다. 이미 디즈니 플러스의 시리즈 <팔콘과 윈터솔져>에서 그는 “내가 과연 캡틴 아메리카가 되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리고 이 질문은 이번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정적 축으로 이어진다.
[첫번째 감정] 샘 윌슨의 의구심
샘 윌슨은 자신의 평범함 때문에 끊임없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슈퍼 혈청을 맞지 않은 그에게 특별한 초인적 능력은 없다. 그저 혹독한 군사훈련을 통해 단련된 군인일 뿐이라는 사실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강력함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에서 샘은 방패나 팔콘윙 같은 장비 없이도 여러 번 직접 싸움을 치르는데, 그 장면에서 우리는 그의 평범함이 큰 한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가 정말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자꾸만 자문한다. 모두가 기다리는 캡틴 아메리카는 거대한 힘과 이상적인 리더십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샘이 처한 불리한 상황은 그의 ‘평범함’을 더욱 부각시키며, 이는 관객들에게도 그를 향한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샘이 겉보기에 강력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관객이 ‘그래서 과연 그가 이기고 극복해 낼까?’라는 긴장감과 흥미를 품게 된다. 그의 평범함이야말로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이야기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장치인 셈이다.
결국 영화는 샘 윌슨이 가진 ‘선함’과 ‘고집스러운 원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옳다고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방패를 든다. 그런 샘의 행동은 관객들에게 “과연 캡틴 아메리카로서 자격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조금씩 ‘그가 바로 캡틴이 맞다’라는 확신으로 바꿔 놓는다. 정작 샘 자신도 의구심을 거듭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 직책에 걸맞은 사람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샘의 평범함은 한계를 드러내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곧 이 영화의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감정] 로스의 두려움
두 번째 감정은 대통령이 된 로스(해리슨 포드)의 두려움이다. 과거 ‘불같은 성격’과 ‘군인의 기질’로 인해 여러 혼란을 일으켰던 그가, 이제는 국가 지도자의 위치에 서서 이미지 관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때문에 그에게 캡틴 아메리카는 정치적으로 유용한 홍보 수단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는 히어로들의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통제하려고 애썼던 그가, 이제는 ‘캡틴 아메리카’의 명성과 상징성을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로스는 어디론가 아픈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어딘가에 극심한 통증이 있어 약을 복용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이것이 훗날 그가 ‘레드 헐크’로 변모하게 될 거라는 떡밥을 깔아 둔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로스의 진짜 감정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다. 임기 내내 강인하고 단호한 리더처럼 굴지만, 실상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 인해 새로운 무기를 찾고, 빌런인 새뮤얼(팀 블레이크 넬슨)을 몰래 이용해 어떤 사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이 그를 더욱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가는 셈이다.
문제는 그가 정말로 ‘개과천선’했는지, 아니면 끝내 자신의 욕망과 본성을 숨기지 못하는 빌런에 가까운 존재인지를 계속해서 헷갈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딸 베티(리브 타일러)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두운 결정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은 그의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가 가진 두려움이 인간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너무 이리저리 줄타기하는 태도 탓에 “정말 믿어도 되는 인물인가?”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 이번 영화에서 로스가 보여주는 가장 큰 아쉬움이자, 동시에 다음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드는 미묘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 감정] 새뮤얼의 분노
마지막으로는 메인 빌런인 새뮤얼(팀 블레이크 넬슨)의 분노다. 그는 감마선 노출 부작용으로 인해 뇌가 지나치게 발달해버린 인물이며, 이에 따라 미래를 상당히 높은 확률로 예측해내는 능력을 지닌다. 치열한 전투 능력을 갖춘 빌런이라기보다는, 제모 남작처럼 지능적이고 전략적인 면모로 상대를 교란하는 인물이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세계 파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정부(혹은 로스)에 대한 불만’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새뮤얼은 직접적으로 수많은 군대를 이끌거나 스스로 물리적 대결에 뛰어드는 대신, 미군이나 우군 세력 내에 스파이·세뇌 등을 활용해 정부와 대립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영화 후반부에는 로스가 촉발시키는 ‘대형 분쟁’의 장면이 펼쳐지고, 캡틴 아메리카인 샘 윌슨은 이러한 교묘한 갈등 속에서 서서히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물리적으로 샘이 ‘슈퍼솔저’만큼 강하지는 않아도, 정신적·도덕적 기준이 확고하다는 점이 새뮤얼의 지능적 공격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열쇠가 되는 것이다.
결국 새뮤얼의 분노는 스스로를 더 파멸로 몰아넣고 만다. 그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풀어내기 위해 뛰어난 두뇌를 활용하지만, 샘 윌슨이라는 존재가 그가 예상한 경로와 다르게 움직이며 그의 계략을 하나씩 차단해 나간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분노’와 ‘두뇌’만으로는 결코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 정의와 올바름을 지키는 자의 의지가 결국 지능적인 빌런의 분노를 이긴다. 이처럼 새뮤얼의 이야기는, ‘힘’이 아닌 ‘정의’가 승리한다는 마블 특유의 주제 의식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장치가 된다.
무난하게 재미있는 마블 영화
결국 이번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샘 윌슨’이 진정한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나는 과정에 집중한다. 슈퍼 혈청 없이 평범한 군인이지만,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라는 것이 샘의 강점이다. 그래서일까, 전체적인 액션의 강도나 임팩트는 과거 스티브 로저스 시절의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보다 다소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대신 팔콘윙을 활용한 빠른 공중 액션이 그 공백을 메워주며, 정치적 긴장감과 첩보 요소가 강하게 녹아들어 있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통령이 된 로스와의 관계를 다루는 장면들이 흥미롭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상징이 한 개인의 영웅성을 넘어, 국가적 정치적 무기로 활용되는 모습을 보면 ‘힘의 사용’과 ‘정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샘 윌슨은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로스를 이해하려 애쓰며 필요한 순간엔 협력한다. 그 점에서 우리는 샘의 ‘포용력’을 확인하며, 그가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안소니 마키가 보여주는 샘 윌슨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는 스티브 로저스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다. 힘에 의존하지 않고, 대신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싸움을 이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마블 영화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진 관객들도, 이 영화가 주는 다른 매력과 새로운 시작점으로서의 의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개봉 전부터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받았던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결과적으로 ‘무난한 재미와 새로운 정체성’을 동시에 잡아냈다고 평하고 싶다. 스티브 로저스의 시리즈에 비해 파괴력이나 액션 스케일은 다소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와 정치적 긴장감을 잘 살려내며 마블 유니버스의 새로운 출발에 걸맞은 이야기를 완성했다.
만약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를 사랑했던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에서도 낯설고 새로운 캡틴이 만들어가는 서사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영화는 마블의 방대한 세계관을 잘 몰라도, 독립된 스토리로 충분히 이해하며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으니 부담 없이 관람해도 좋다. 샘 윌슨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고민과 성장 스토리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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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Rabel Moon> 공식 티저 예고편
12월 22일, 넷플릭스에 새로운 우주가 열린다. 《300》 《맨 오브 스틸》 《아미 오브 더 데드》 감독 잭 스나이더가 수십 년간 제작해 온 장대한 SF 판타지 《REBEL MOON》이 찾아온다. 은하계 변방의 식민지. 평화를 누리던 이곳에 포악한 지배 세력이 위협을 가한다. 생존을 위한 희망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사는 미스터리한 인물, 코라(소피아 부텔라)뿐이다. '마더 월드'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맞설 노련한 전사들을 찾아야 하는 코라는 각자 다른 세계에서 온 아웃사이더와 반역자, 소작농, 전쟁고아들을 모아 작은 군단을 구성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구원과 복수를 꿈꾼다는 것. 온 세상에 대한 위협이 뜻밖의 행성을 짓누르는 가운데, 계속되는 은하계 전투 속에서 새로운 영웅 군단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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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몬스터 아카데미> 메인 예고편
상위 1%의 천재들만 다니는 ‘크랜스턴 아카데미’ 그곳에 전학 온 괴짜 천재 소년 ‘대니’! 학교 최고의 엄친딸 ‘리즈’와 묘한 라이벌 신경전을 벌이며 아슬아슬한 학교생활을 이어간다. ‘대니’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발명에 도전하던 중 무심코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포털을 열게 되고, 그곳에 봉인되어 있던 수많은 몬스터들이 학교를 뒤덮는데! 저세상 몬스터들이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