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1-03-17 00:00:00
우먼 인 할리우드
한줄평 아닌 한줄평
한명만 움직여서는 바뀌지 않을 변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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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이미지라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미디어는 사람의 생각을 형성하고 좌지우지하게 해 미디어가 주입하는 성차별은 많은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여성의 이미지가 불편하다고 느꼈던 것은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고정적으로 같은 이미지를 찍어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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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여성감독과 여성배우들은 할리우드의 장애물을 아무리 뛰어넘어도 그 자리에 있음을 느껴야했다.
다양한 이미지 뒤의 여성들은 가슴과 엉덩이에 초점이 맞춰져야했고 자신을 잃어버린듯 했다.
"그때 깨달았어요. 난 그냥 배우가 아니구나. 난 '여배우'구나"
변화를 위한 걸음은 혼자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같이 나아가야할 길이 되어야 한다.
한걸음 나아갔다고 두걸음 뒤로 물러나서도 안된다.
이것을 찍은 감독조차 남자이지만, 남자의 목소리를 빌려서라도 여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두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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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뤽 다르덴 & 장 피에르 다르덴, 로제타 (1999)
뤽 다르덴 & 장 피에르 다르덴, 로제타 (1999)
- 와플 왕국 노동자의 평범한 삶
karenine
# 이야기를 시작하며
살면서 아주 가까운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어른다운 부모를 두어서 좋겠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대학생 때부터 집을 뛰쳐나가 그야말로 신입생 때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친구였다. 나는 그에 비해 관심도 애정도 통제도 많은 부모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사실은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 감각도 있으면서 아이를 적당히 외롭지 않게 할 수 있는 부모가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성실함은 할아버지로부터 왔다. 할아버지는 60대 초반이 될 때까지 일을 하셨고 65세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중간에 크게 아팠을 때 빼고는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아버지가가 새벽에 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성실한 노동자 집안의 맏이인 나는, 고학력 실업자가 된 이후로 아무도 눈치 안주는 데도 눈치가 보인다. 예컨대 코로나 시대에 청년 취준생이 29만 명이라는 뉴스를 아버지와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에서 듣는 일은 참 불편한 일이다. 결국 다른 뉴스가 나올 때까지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오늘도 아침을 먹고 약간은 무거운 표정으로 출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무슨 부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누군가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기도 했고 내가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열심히 쓸 것이다. 뿌듯함은 잠시였고, 앞으로 내가 벌린 일을 수습할 생각에 아찔했다. 어릴 적엔 작가, 글 노동이라 함은 멋들어진 서막을 열면서(예컨대 등단, 문학상 수상, 등등) 시작하리라 예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로제타가 뒷문을 통해 리케의 자리를 몰래 염탐하듯이 궁상맞고 은밀하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리케의 자리를 바라보는 순간에, 언젠가는 사장의 여러 와플 가게들 중 하나의 점장이 되리라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메이저 지면에 기고하리라는 섣부른 야망을 가지면서 내 기분은 점차 상승했다가, 다시 땅에 내려앉았다.
# 로제타가 겪는 윤리적 각성
딸에게 양육자 구실을 하지 못하는 엄마를 둔 로제타(에밀리 드켄)의 삶은 매일이 진창 같은 전쟁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맨몸으로 싸우는 육박전이다. 사실 로제타의 가장 큰 적군은 엄마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로제타가 남이 준 생선을 버리려고 할 때 딸에게 칼을 들이미는 '어미'다. 유아적이고 파렴치하며, 사창가의 여인 같기도 하고 돌아온 탕자 같기도 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로제타의 생모, 어머니, 엄마.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적이라는 사실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다.
로제타가 "나는 엄마랑 달라 Moi, c'est pas toi (*직역하면 난 엄마가 아니야.)"라고 선언하며 만들어가는 삶의 궤적은 철저하게 스토익하고 윤리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영화는 카메라 기법부터 어지러울 정도로 현장감을 그대로 가져오는 리얼리즘(핸드-헬드) 기법을 쓰고 있다. 반면 로제타의 삶의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감독의 목소리를 은연중에 대변하는 것과 같은 교훈적일 정도로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인물은 마치 순교자의 일생을 기록한 것처럼 의지로 가득 차 있으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이 인물을 고지식하고 때로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게 하며, 로제타라는 인물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형성한다.
이 심리적 거리감이 철저히 전복되고 깨지는 것은 극 후반부이다. 영화 초반부부터 로제타는 이미 어떤 윤리적 각성을 한 소녀이다. 소녀는 엄마의 삶의 방식을 보고 겪으며 절대로 '엄마처럼 살아가는 건 안 된다'라는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사회로 나갔을 때 더 넓은 층위의 문제에 직면한다. 자신을 돕고자 하는 리케(파브리지오 롱기온)의 선의를 어디까지 받아야 하는지, 비슷한 처지나 좀 더 나은 처지인 그가 동료인지 잠재적 경쟁자이자 적인지를 로제타는 아직 판단하지 못한다. 동료 노동자는 그녀에게 자리를 뺏을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자 적이다. 지난 직장에서 경영상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동료의 모함 때문에 그렇게 허무하게 해고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J'ai une vie normale (나는 평범한 삶을 산다)
그런데 리케가 엄마와의 몸싸움 때문에 잃어버린 장화를 주었을 때, 로제타는 그날 밤 비로소 그를 '친구'라고 부른다. 머릿속에 생존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찬 소녀에게는 집에서 재워주는 것도, 오토바이로 태워서 데려다주는 것도, 토스트를 구워주는 것도 아닌, 자신의 생존품인 장화를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마운 사람일 것이다. 전쟁통에서 군화를 잃어버려 행군을 못하는데 군화를 도로 찾아준 이에게 느끼는 전우애랄까. 그런데 리케의 사정은 다르다. 로제타가 리케의 눈을 안 마주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 리케가 그녀에게 인간적인 호감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것을 로제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눈치를 챘을 것이다.
위에서 로제타에게 갖게 되는 이상한 심리적 거리감은 후반부에 가서 어떤 강렬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휘몰아치고 부서진다. 로제타는 장화를 준 리케가 물에 빠졌을 때 '나 말고 저 사람이 대신 물(진창)에 빠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을 잠시 한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현실인 것은 계산대에 있는 사장의 돈을 훔칠지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와플을 빼돌려서 수익을 남길지 고민하는 것도 아닌, 내 생존을 위해 다른 노동자를 그 자리에서 악의적으로 제거해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라는 점이다.
로제타는 남의 것을 훔치고 구걸하는 게 나쁜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철두철미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존엄을 해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의지로 투철하다. 또한 카라반(트레일러)의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보통의 삶으로 정착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정작 타인의 선의를 어떻게 돌려줘야 하는지, 같은 노동계급의 동료와 어떻게 공존하고 연대를 이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각성은 로제타가 한 번도 맞닥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늘 대체되는 사람이었으므로.
리케가 해고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로제타는 자신이 당했던 '부당한' 해고를 리케에게 덮어 씌움으로써 자신이 당했던 피해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다. 갑자기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 대사가 떠오른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그리하여 그녀는 꿈에 그리던 생산-판매라인의 가장 끝에 오르게 되고, 생전 가장 많은 돈을 만져보게 된다(갖게 된단 소린 아니다). 그러나 사장에게 얻은 신뢰도, 안정적이고 그럴듯한 직장도, 일하면서 그녀의 입가에 걸린 작은 미소도, 리케가 눈앞에 한번 나타나는 순간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 밥벌이의 즐거움과 슬픔
이 영화는 와플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벨기에 출신의 감독들이 만든 영화에 와플이 주연으로 나오는 것은 차라리 어떤 유머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감독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네 벨기에 하면 솔직히 와플밖에 모르지? 와플 말고 벨기에에 대해 아는 게 있나? 그런데 와플 왕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사실 이렇단다.'
와플은 영화 속 다양한 상황에서 등장한다. 첫 등장은 로제타가 해고당하고 얼굴이 벌게져서는 씩씩거리며 와플을 먹는 장면이다. 출근길에 사람들이 하나씩 사가는 아침 대용으로도 나오고, 직장에서 갓 잘렸어도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음식이 바로 와플이다.
영화는 특별할 때 먹는 디저트로서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으로서의 와플을 보여준다. 이로써 관객들은 와플 생산-판매 라인에 대한 모든 것을 보게 된다. 나는 벨기에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왠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일상식인 김밥이나 토스트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새벽부터 재료를 준비하고 김밥을 마는 분주한 아침. 출근하는 손님들의 손에 하나씩 들려가는 김밥들과, 철컥 소리가 나며 열고 닫히는 계산대의 소리. 이것은 벨기에식 밥(빵?)벌이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초상화이자 그 뒷단의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지에 대한 성찰과 고발이다.
호흡이 가빴던 도입부에 비해, 와플가게 사장(올리비에 구르메)이 로제타에게 일을 알려주는 장면은 평화롭기까지 하다. 어떨 때 우리는 지긋지긋한 집안에서 벗어나 노동의 리듬 안에서 가장 큰 평화를 찾기도 한다. 로제타의 경우, 그녀에게 버거 워보이는 밀가루 포대를 제법 잘 들어서 반죽에 능숙하게 섞는다. 언뜻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는 어떤 노동의 배움에 대해서 보여주면서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도 잠시, 로제타는 사장 아들에게 또 밀려나고 만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는 로제타 눈에 비친 와플집 사장, 즉 소부르주아지의 고단함 또한 응시하고 있다. 이것이 다른 영화에서 굉장히 양극화된 계급 묘사와는 사뭇 달랐다. 이미 12개의 점포를 가지고 로제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 것 같은 사장도 실은 무거운 밀가루 포대의 무게 앞에서 쩔쩔맨다. 그 또한 매일같이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또한 사장은 부양 의무가 있는 책임감 있는 부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식을 위해 성실한 노동자를 해고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이렇듯 밥벌이에서 어떤 선택의 순간들은 매일같이 찾아온다. 마음이 불편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야 되는 선택들이 있고 그것이 우리를 지치고 찌들게 만든다.
참고로 올리비에 구르메는 몇 년 뒤 <아들(2002)>이라는 다른 다르덴 영화에서도 소년들에게 목공일을 가르치는 역할로 나온다. 이 때도 무뚝뚝하지만 은근히 마음은 약하고, 자신의 상처와 지친 삶을 내색하지 않고 내면에 간직한 사람의 역할이 정말 잘 어울렸다.
# 다르덴 영화가 유머를 다루는 방식
슬프고 처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임에도, 나는 이 영화가 유머를 잃지 않았음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 유머는 아주 머쓱해지는 뚝 끊김, 갑작스러운 포즈(pause)에서 나온다.
리케네 집에 갔을 때 리케는 그 어색한 공기 속에서 어떻게든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보려 하지만 좀처럼 로제타는 장단을 맞춰주지 않는다. 리케는 음악을 연주하고 들을 만큼 아주 약간은 숨 쉴 틈이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주 법대로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암시한다.
하지만 이윽고 우리는 그에게 변변한 진짜 음반도 하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인이 직접 녹음한 연주 테이프를 들으며 어떻게든 흥을 돋우려는 이 남자아이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로제타는 못 이기는 척 리케가 연주한 이상한 드럼 곡에 맞춰 춤을 춘다. 흥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할 찰나, 갑자기 음악이 뚝 끊긴다. '어, 내가 여기서 틀린 것 같아.' 그리고 연주는 다시 시작되지만 한번 끊긴 '무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베스트 3 안에 꼽을 수 있다.
로제타가 진 삶의 무게는 밀가루포대-엄마-가스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무거운 것들 앞에서 로제타는 한 번씩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마지막 결말 부분의 그 안타까운 순간마저도, 영화는 절묘한 순간에 포즈(pause)를 주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로제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갑자기 가스가 끊기는 장면이다. 죽으려고 할 때까지 가스통을 사서 끌고 와야 한다니. 영화는, 죽을 권리도 돈을 지불해야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강렬한 쓴웃음을 짓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리케의 얼굴을 정면으로 안 보여주는 것은, 로제타를 구원한 사람이 리케, 즉 남성-노동자라는 메시지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한다. 로제타가 마지막으로 삶은 달걀의 껍질을 깨듯, 그녀의 내면에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 끝엔 후회의 쓴맛과 현실에 대한 절망이 뒤따른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깨짐을 통해서 로제타는 자신의 과거와, 또 타인인 리케와도 화해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로제타의 두 눈빛을 통해 그녀가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음을, 아직 자신만의 무인도에서 죽을 힘을 다해 구조 신호를 쏘아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마치며
<로제타> 영화가 나온 이후 벨기에 정부의 로제타 플랜은 반짝 효과를 내고 몇 년 만에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 정부가 청년 정책 하며 내놓는 취업지원금이나, 이런저런 임시변통의 대책들도 저렇게 별 효과 없이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질 게 뻔하다.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는 각자가 견디고 자구책을 만드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까진 이 광활한 진창을 없애기 힘드니 최대한 덜 빠지도록 조심하고 자신의 몸과 정신을 드라이로 말리듯이 항상 건조하게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가 준 가장 큰 교훈이 그것이 아니던가. 극악한 환경을 만들어놓았으니, 알아서 생존하시오.
가끔 현실이 팍팍할 때 이 영화를 꺼내어 볼 것 같다. 그 이유는? 에밀리 드켄의 출중한 연기나 블랙 유머 코드 때문에? 아니면 나를 물웅덩이에 밀쳐버리는 엄마가 없으니 차라리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왠지 '진짜 일을 하고 싶어'라는 그녀의 대사를 되새기기 위해 이 영화를 다시 볼 것 같다.
'진짜 일'이란 당최 무엇인가. 최근에 친구랑 통화를 하다가, 친구가 너는 사랑에 있어서 더 원(the one), 일종의 운명적인 사랑이 있냐고 물은 적 있다. 나는 속으로 워너원도 아니고 그게 뭐냐고 생각했으나, 내 속마음은 반반인 것 같다.
친구 말마따나 일에도 나만의 더 원이 있을까? 일찌감치 어떤 직업에 소명 의식을 찾은 사람들이 갑작스레 부럽다.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일'을 찾느라 분투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 어떨 때는 아무 일이든 좋으니 일감만 달라고 하다가도 일하게 되면 좀 더 큰 욕심을 품는다. 아무리 같은 돈을 받아도 뒷단의 구질구질한 일은 하기 싫고, 내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고,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 운명적인 사랑을 찾는 것보다 차라리 그런 일을 찾는 것이 어렵겠다 싶다.
덧, 글을 쓴다고 아직 집에다 말하지 않았다. 그 돈을 버느니 본업에나 충실하라는 말을 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걸 상상하니 욱하는 마음이 들지만 로제타의 구제불능 엄마를 생각하면서 참아야겠다.
[Eurofilm 6. 벨기에, 프랑스]
<이미지 출처>
www.bonjourtristesse.net/2010/12/rosetta-1999.html
www.simbasible.com/rosetta-movie-review/
https://www.etsy.com/listing/192831475/rosetta-limited-edition-movie-poster
https://www.ioncinema.com/reviews/criterion-collection-rosetta-blu-ray-review2020년 11월 23일 감상 / 2020년 11월 25일 씀.
* 본 콘텐츠는 브런치 karenine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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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워내야 채울 수 있다는 깨달음!
비워내야 채울 수 있다는 깨달음! <문경>은 번아웃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이 메시지를 오롯이 전하는 영화다. 이를 위해 인물들은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걷고, 문경의 푸른 산과 맑은 계곡 등 자연을 바라보며 힐링을 얻는다.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를 토로하며,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넌지시 묻는다. 함께 비움을 실천하겠냐고.
직장인들이 매일 힘듦을 겪듯 문경(류아벨)도 예외는 아니다. 예술 전시 기획 담당 팀장인 그는 팀 내 일도 잘하고 성실한 계약직 초월(채서안)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회사는 묵묵부답. 결국 초월은 계약직 만료가 되어 홀연히 사라진다.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까지 했던 문경은 회사 복귀 후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복잡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초월의 고향이자 자신의 이름과 같은 문경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곳에서 우연히 첫 만행을 나선 비구니 가은(조재경), 길 잃은 강아지 길순을 만난 그는 유랑 할매(최수민) 집에서 신세를 진다. 그리고 그날 밤 이들은 저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아픈 과거를 꺼낸다.
<문경>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가진 이들이 만나 펼치는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다. 도시에 사는 직장인 문경과 산 속 사찰에서 지내던 비구니 가은은 문경이라는 특별한 곳에서 조우하고 길순이의 주인을 찾아주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이들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점점 필연이 되어가는 과정이 펼쳐지는데, 서로 접점 하나 없는 이들이 가까워지는 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상실과 부채감이 드러나면서다.
길순이가 맺어준 거나 다름없는 이들은 유랑 할매 집에서 비로소 공통점을 찾는다. 바로 자신과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났고, 그에 따른 상길과 부채감이 마음 깊숙이 자리해 있다는 점이다. 문경은 가수를 꿈꿨던 동생을, 가은은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특히 가은은 과거 일어났던 사회적 참사를 연상케 하는 장소의 유일한 생존자로 그 죄책감에 비구니가 되기로 결심한 것. 이들이 각각 초월과 길순이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이유는 이 전사 때문이다.
유랑 할매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후 마음의 문을 닫은 손녀 유랑(김주아)을 보살피는 그는 미리 그 아픔을 알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가득하다. 손녀만 생각하면 마음이 디비진다(뒤집히다의 경북 방언)는 그의 말에는 어른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책망이 담겨있다.
이런 이들의 아픔이 치유되는 곳은 유랑 할매의 집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법한 자연처럼, 이 집은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어 주는 공간으로 표현된다. 특히 툇마루에 앉아 문경은 동생, 가은은 친구, 유랑 할매는 손녀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그동안 감춰뒀던 아픔을 끄집어내고 서로 교감한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의 공감과 이해는 비로소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집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마음을 여는 환경을 조성한다. 마치 자연이란 따뜻한 품 안에서 사람으로 받은 상처, 사람으로 치유하는 격이랄까. 물질적인 것이 아닌 마음을 나누고 배려하는 행동만으로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된다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다.
기존 힐링 영화처럼 <문경>은 자극적인 소재나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들이 별로 없다. 선유동계곡, 윤필암, 고모산성, 주암정, 진남교반, 잉카마야박물관 등 문경의 아름다운 풍광이 시선을 사로잡지만, 자칫 문경시의 홍보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사찰 음식을 먹는 듯한 심심함이 영화 전반에 깔리는데, 그 맛이 나쁘지 않다. 건강하다. 장르 영화와 비교했을 때야 단점으로 각인되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도드라지게 보이기 위한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두 시간 동안의 힐링 여정은 그 의미를 더한다.
이 영화가 힐링을 전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 건 신동일 감독의 변화된 연출력에 있다. <방문자>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반두비> 등 서로 다른 위치에 놓인 이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조망했던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문경과 가은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이어 나간다. 단,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전 서로의 다름을 첨예한 대립으로 이끌고 갔던 작품들과 달리, <문경>에서는 그 다름을 이해하는 쪽으로 가져간다. 여성과 여성의 관계, 인간과 개(동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장해 공감을 통한 연대의 가능성도 펼친다. 이는 길순의 시선으로 인간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샷만 봐도 알 수 있다.
<문경>은 소박한 이야기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담는다. 욕심 보단 비움, 인과응보 보단 인연과보(因緣果報, 어떤 일이 일어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원인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의 철학으로 인간 세상의 모습을 담는다. 이런 이유에서 <문경>은 지금 우리 삶에 필요한 영화라고 보인다. 기자간담회에서 문경 역을 맡은 류아벨 배우는 “그냥 우리가 사는 이야기 같은 점이 좋았다”고 작품의 매력을 소개했다. 특별함은 없지만, 봐도 봐도 마냥 좋은 자연의 모습처럼, 이 영화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여름의 마지막 끝자락, 문경으로 힐링 여행을 떠나길 바란다.
사진 제공: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평점: 3.0 / 5.0
한줄평: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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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주차 개봉작, 공개 예정작 추천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오늘은 이번 주 개봉, 공개 예정인 작품들을 소개해드릴 예정인데요.
액션 맛집 <존윅 4>부터, 문소리X김희애 주연의 넷플릭스 <퀸메이커>까지,
장르도, 국적도 다양한 이번주 개봉작들을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존 윅 4
John Wick : Chapter 4
ⓒ 네이버 영화
개요: 액션 | 미국 | 169분
감독: 채드 스타헬스키
출연: 키아누 리브스, 견자단, 빌 스카스가드
개봉: 2023.04.12.
배급: (주)레드아이스 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존 윅'은 '최고 회의'를 쓰러트릴 방법을 찾아낸다.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희망을 보지만, NEW 빌런 '그라몽 후작'과 전 세계의 최강 연합은 '존 윅'의 오랜 친구까지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새로운 위기에 놓인 '존 윅'은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는데..
CINE PICK!
4년만에 돌아온 액션 맛집 <존 윅 4>는 미국 영화 전문사이트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6%를 기록하며 해외에서 시리즈 역대 최고의 영화라는 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존 윅 4>에서는 칼과 활 그리고 쌍절곤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다채로운 액션을 선보일 예정인데요. 키아누 리브스는 58세의 나이에 12주 간의 훈련을 커쳐 스턴트 없는 다양한 액션을 보여줄 것이라 예고했습니다.
거울 속 외딴 성
Lonely Castle in the Mirror
ⓒ 네이버 영화
개요: 애니메이션 | 일본 | 116분
감독: 하라 케이이치
출연: 토우마 아미, 아시다 마나, 키타무라 타쿠미
개봉: 2023.04.12.
배급: 워터홀컴퍼니(주)
시놉시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코코로’. 어느 날, 방 안의 거울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하고, ‘코코로’는 홀린 듯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데… 거울 속 세상은 바다 위에 떠있는 신비로운 성이었고, 그곳에서 처음 보는 여섯 명의 친구들과 늑대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소녀 ‘늑대님’을 만나게 된다. “성에 숨겨진 열쇠를 찾으면, 원하는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지” 열쇠를 찾으며 조금씩 가까워진 ‘코코로’와 친구들은 뭔가 수상한 점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는데…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 펼쳐진다!
CINE PICK!
<거울 속 외딴 성>은 일본 현대 문학을 이끄는 작가 츠지무라 미즈키의 동명의 170만 부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하라 케이이치 감독은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 어른 제국의 역습>,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 태풍을 부르는 장엄한 전설의 전투> 외 다수를 연출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명장으로 자리매김한 감독입니다.
킬링 로맨스
Killing Romance
ⓒ 네이버 영화
개요: 코미디 | 대한민국 | 107분
감독: 이원석
출연: 이하늬, 이선균, 공명
개봉: 2023.04.14.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대재앙 같은 발연기로 국민 조롱거리로 전락한 톱스타 ‘여래’(이하늬).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남태평양 ‘콸라’섬에서 운명처럼 자신을 구해준 재벌 ‘조나단’(이선균)을 만나 결혼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한편, 서울대가 당연한 집안에서 홀로 고독한 입시 싸움 중인 4수생 ‘범우’(공명)는 한때 자신의 최애였던 여래가 옆집에 이사온 것을 알게 되고 날마다 옥상에서 단독 팬미팅(?)을 여는 호사를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조나단의 사업 확장을 위한 인형 역할에 지친 여래는 완벽한 스크린 컴백을 위해 범우에게 SOS를 보내게 되고 이들은 여래의 인생을 되찾기 위한 죽여주는 계획을 함께 모의하는데…
CINE PICK!
영화 <킬링 로맨스>는 콸라섬, 조나단 월드, 발연기 톱스타 등 설정과 배경만 봐도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킬링 로맨스>는 <뷰티 인사이드>의 박정예 작가가 각본을 썼고, <남자사용설명서>의 이원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화제가 되었는데요. 영화는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볼거리를 제공하여 전형적인 것을 탈피한 새로운 재미를 더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사로잡을 또 하나의 킬링 포인트가 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퀸메이커
QUEENMAKER
ⓒ NETFLIX
개요: 드라마 | 한국 | 11부작
감독: 오진석
출연: 김희애, 문소리
공개: 2023.04.14.
채널: 넷플릭스
시놉시스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이자 대기업 전략기획실을 쥐락펴락하던 '황도희'가 정의의 코뿔소라 불리며 잡초처럼 살아온 인권변호사 '오경숙'을 서울 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선거판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이야기
CINE PICK!
<퀸메이커>는 김희애와 문소리의 첫 호흡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연출을 맡은 오진석 감독은 "정치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각 캐릭터들의 스타일과 연기를 보는 것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밝히며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지금까지 액션,애니메이션,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와 일본,한국,미국까지의 다양한 국적의 콘텐츠를 소개해드렸습니다. 꽃샘 추위가 찾아온 요즘,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어 이번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세요!
Editor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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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술과 공명과 기억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서 감상 후 작성하였으며,
줄거리가 일부 서술되어 있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2월 1일입니다.*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푹 젖어드는 영화입니다.
극장에서 보시길 적극 추천 드려요. :-)* * *
영화 <애프터썬>은 20여 년 전 11살 소피가 여름방학 끝자락 아버지와 함께 갔던 튀르키예 여행을 소재로 한다. 그래서 현재의 소피, 과거의 소피, 여행에서 찍은 캠코더 영상까지 다양한 결의 영상이 섞여 있다.
리조트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부녀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며 여행은 시작된다. 광활한 들판을 달리는 튀르키예의 버스. 영화는 캠코더 줌 소리와 캠코더 속 계단 현상으로 조각조각 깨진 영상으로 시작하면서 이것이 영상임을 선명하게 느끼게 만들더니, 이내 버스를 같이 탄 것처럼 가장 현실적인 시야 안에 관객을 둔다. 덕분에 새삼 깨닫는다. 기억은 단순한 저장과 축적이 아니라 편집과 서술에 가까운 행위라는 것을.
촬영한 사람의 1인칭 시선이 반영된 캠코더 영상처럼, 기억은 사실 1인칭으로 서술된 후 편집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에게 공명한 것만을 서술할 수 있으며, 서술한 후에 비로소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두운 방에 앉아 캠코더 속 오래된, 변해버린 기억들을 더듬어 보는 아빠의 모습이야말로 ‘기억을 기억’하는 우리 모습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숨소리만 들리는 이 영화 속 새벽을 가만 집중해 바라보게 되는 것도 어쩌면, 새벽은 모든 추억이 가장 선명하게 요동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에게 소피와 아빠의 기억을 설명하고 보여주기보다, 그냥 그들의 기억 속에 관객을 덜렁 내려놓는다. 덕분에 마치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들처럼 기억에 숨어든 기분마저 든다. 남의 부녀 여행에 별안간 동승해 버린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열심히 두 사람의 세계를 파악한다. 그러다 보면 영화를 본다는 느낌 그 이상으로, 이 영화를 내 기억으로 새로 쓰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을 적극적으로 이끈다. 기억이란 이렇게도 적극적인, 그럼에도 아주 선명할 수만은 없는 행위인 것이다.
수백 가지 감상문이 가능할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튀르키예의 높은 하늘과 어마어마한 광량을 함께 느끼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따끈한 햇볕 아래에서 콧날이 시큰거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 영화의 어떤 순간이 나에게 공명했는지 서술해 보기로 한다. 결국 나에게 이 영화는 나의 서술로 기억될 테니까.
기억은 공명하는 것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지 지금 내 눈앞의 상대뿐 아니라 그의 과거와 미래까지 마주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 순간은 비장하고 묵직한 운명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아주 여상한 순간, 가볍게 찾아온다. 미리 준비할 수도 없게.
튀르키예를 여행하는 중 딸에게 질문을 받은 아빠 캘럼의 순간이 그러했다. 11살 소피는 몰랐지만 그 질문은 삼십대 아빠가 아닌 과거의 11살 캘럼에게 던져진 것이었다. 아빠가 지금 11살이라면 무엇을 할지, 아빠의 11살 생일은 어땠는지. 아직 충분히 위로받지 못한 자신의 11살을 떠올리며 캘럼은 질문을 피하려다가, 캠코더를 끄고서야 대답한다. 조금 슬펐던 생일, 자신이 했던 선택을. 그러자 소피는 잘 선택했네, 하고 은은하게 대답한다. 십 년이 두 바퀴나 지난 지금, 그때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가 지금 말해주는 것이다. 잘했다고. 과거의 자신에게 공명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30대의 아빠가 11살 소피에게 해준 말이, 언젠가 30대의 소피에게 공명할지 모른다. 지금은 고향에 소속감을 느끼고 행복하다는 소피에게, 훗날 생각이 변한다 해도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을, 아빠는 그래서 남겨두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얘기든 할 수 있는 사이를 꿈꾼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언젠가 스스로가 남들과 다르고 유별난 듯이 느껴질 때, 더 이상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온다면 그때, 지금 이 대화가 떠오를 수 있도록. 두 사람이 앉아있던 바다의 부표처럼 이 기억 위에 앉아 쉴 수 있도록.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변하고, 어떤 말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로 와닿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일도 신날까?”라는 말에 대한 대답도 이미 두 사람의 생애 다른 순간에서 이미 대답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어쩌면, 여전히 섬광 속 아빠를 꿈에서 보는 현실의 소피가 잠에서 깨어 기꺼이 아기 침대로 향하는 선택에는 이런 시간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서술되는 것
아빠와 소피는 기억을 서술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물속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고, 캠코더를 들고 다닌다. 그러나 시간을 물성에 잡아 두는 데에만 얽매이지도 않는다. 담아둘 수 없는 시간도 성실하게 마주한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하나 같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서도 자기들의 행위에 집중하고, 온천에서 머드를 발라 줌으로 미안한 마음을 녹이기도 하면서.
그들이 함께 사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대화에서 금방 드러난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으로 같이 있음으로 같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소피의 말에서 실은 참 그리웠다는 마음이 읽힌다. 같이 있는 가족이 놓치기 쉬운, 애틋한 마음의 무게를 늘 그림자처럼 인지하고 있다. 아마 그 마음이 두 사람의 여행에 보조를 맞춰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눈높이가 그럭저럭 맞는다. 철없는 말도 이따금 툭툭 뱉는 아빠와, 사람들의 어린애 취급마저 여유롭게 소화할 만큼 성숙한 소피는 친구처럼 다양한 대화를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화장솜으로 얼굴을 가만가만 어루만져 주는 저녁처럼, 서로 등을 맞댄 느낌으로 나란히 있다. 함께 있지 못한 사이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런 시간을 공들여 쌓았을 것만 같다. 호신술이라며 잡힌 손 뿌리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시간처럼, 포켓볼도 아마 저렇게 가르쳤을 것이다. 그 시간이 두 사람의 세계를 만들었다.
캠코더에 연결한 호텔 텔레비전 옆에 첩첩 쌓인 몇 권의 책이 두 사람의 세계를 보여준다. <명상하는 법>이라는 가상의 책과 실제 태극권 교본, 마가렛 타이트의 <시, 이야기, 글 쓰기(Poems, Stories, and Writings)>도 놓여 있다. 시인인 동시에 영화인이었던 마가렛 타이트의 책이 놓인 것에 대해, 샬롯 웰스 감독은 독립적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스코틀랜드 영화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라고 대답했다.
문득 궁금해진다. 자기 손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사람의 책을 여행지에서도 읽고 있는 소피가, 훗날 이 순간을 어떻게 서술하고 기억할까. 그러다 불현듯 깨닫는다. 이 영화 자체가 그 대답임을. 극 중 인물의 미래는 영화 이후의 (관객이 알 수 없는) 선형적 시간이 아닌, 영화 안에 이미 들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억을 서술하는 한, 시간은 회전목마처럼 무한히 순환한다.
기억은 기억되는 것
두 사람의 여행은 적당히 무료하고 적당히 나른하며 적당히 신난다. ‘인스타그래머블’하고 요란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여행답게. 두 사람은 튀르키예 구석구석을 살뜰하게 즐긴다. 소피의 머리에 실을 감고, 하나하나 이야기를 넣어 짰다는 카펫을 구경하면서. 실을 얽고 짜는 데 재능이 있는 땅, 이야기를 얽고 짜는 데 재능이 있는 땅이다.
그러나 삶은 카펫이 아니어서,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다 읽어낼 수가 없다. 모든 자식들이 다 그렇듯 우리는 생각보다 아빠를 잘 모른다. 이따금 캘럼이 보이는 어두운 면들을 영화는 자세히 서술하지 않는다. 까만 티셔츠를 입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 카펫 더미에 기대서 짓는 표정 같은 것들에서, 밝아 보이는 아빠 이면의 캘럼이 있음을 어림짐작하게 할 뿐이다.
저렇게 대화가 많은 부녀여도, 아무리 소피가 성숙해도, 그토록 꼭 끌어안았어도. 아빠와의 기억은 천천히 차오르는 폴라로이드 사진 같아서, 아주 선명하지도 않지만 다시 인화할 수도 없다. 자식에게 부모의 기억이란 대개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두 사람은 헤어지는 순간까지 착실하게 캠코더에 담는다. 지켜보고 있음을 알기에 돌아보고, 장난을 치면서 이별을 조금 유예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이별은 종결될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는 말로든, 잘 가라는 말로든. 밝은 미소로든, 서글픈 미소로든. 우리는 다만 피할 수 없는 종결의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소피는 이제 성인이 되어 그 시절의 기억을 재생해 볼 수 있지만, 어떤 대화와 어떤 뒷모습, 어떤 씁쓸한 미소 같은 것들은 미처 캠코더에 다 담기지 못했다. 그러나 괜찮다. 수영복을 입은 소피의 어깨나 머리칼을 따끈따끈 데워 주었을 어느 여름의 태양 빛처럼, 직면하지 않아도 흔적을 남기는 것들이 있다. 기억으로 서술되고 공명하고 그렇게 끝내 추억이라는 이름을 얻은 어떤 순간들이 있다. 과거의 사람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아빠는 이제 섬광의 기억 속에 있다. 서술되지 않은 것들까지 총합하여 소피는 아빠의 카펫과 다른, 자신의 기억을 써내려갈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뒤에 있는 이를 인지할 수 있다. 등 뒤의 존재를 생각하며 깨닫는다. 삶은 본질적으로 긴 이별임을, 즐겁고 평온한 순간조차 우리는 다 알 수 없는 서로를 더듬거리며 멀어져 가고 있음을, 함께 있는 순간은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그럼에도 서로를 서술하고 서로 공명하고 깊이 기억하는 일이 사랑임을. 그래서 슬프고 그래서 따끈한 어떤 여름 햇살 같은 사랑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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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부족한 서사, 하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영상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같이 생활을 하게 된다. 서류적은 부분을 떠나서 서로 이어진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인체의 화학 작용을 통해 많은 것을 공유하고 주고받는다. 그런 달콤한 시기에 아이를 낳으면 아이와 함께 가족이 된다. 두 사람만 생활할 때와 아이가 생긴 이후의 생활은 다르다. 서로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가졌던 두 사람은 이제 아이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꽤 강하게 쏟아내고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고와 위험에도 대처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경험했던 일들이다. 우리를 키워낸 부모님 세대를 봐도 그렇고 지금 막 부모가 된 젊은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서로 돌보고 지켜줘야 할 대상이 늘어났다는 건, 무언가를 같이 공유할 존재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희생과 배려를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또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상대방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도 추가된다. 그래서 위협적인 것이 주변에 있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좀 더 좋은 환경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집단의 이동은 어쩌면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다니는 인간의 본성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13년 만에 돌아온 <아바타>
최근에 개봉한 <아바타: 물의 길>은 전편에서 연인이 된 제이크(샘 워싱턴)와 네이티리(조 샐다나)가 가족을 만들고 지켜내는 과정이 담겨있다. 13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온 이야기에도 그런 시간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다.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직접 낳은 아이들인 네테이얌(제이미 플래터스), 로아크(브리튼 달튼), 투크티리(트리니티 블리스)와 입양한 아이들인 키리(시고니 위버), 스파이더(잭 챔피언)를 키우고 있다. 한 부족의 리더로서 큰 문제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부족을 이끌 수 있었던 제이크는 어느 날 지구인들이 다시 판도라 행성에 대규모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부족을 떠날 준비를 한다.
사실 제이크는 이 부족에서 투르코 막토 라는 구원자로 불렸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강력한 리더이자 부족을 지키는 존재였지만 자신이 지켜야 할 가족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아빠일 뿐이다. 좀 더 공격적인 부분을 보강하고 돌아온 지구인들을 본 제이크가 처음 느끼는 건, 바로 두려움이다. 자기 자신의 죽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가족과 부족들이 감당해야 할 위험이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 두려움의 감정이 <아바타: 물의 길>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며 영화 내내 이어진다.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그 두려움을 느낀 후, 부족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들이 결정한 건 일단 위험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에 숨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의 부족에 찾아가 조용히 숨어 지내려고 한다. 실제로 그건 꽤 긴 시간 동안 효과가 있었다. 조용히 살며 그의 가족들은 바다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으며 영화는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다. 바닷속의 새로운 생명체들과 아름다운 풍경은 그들이 느낀 두려움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이번 영화의 중심은 제이크 가족 이야기
제이크 가족이 바다 부족과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과정도 담긴다. 특히나 에테이얌이나 로아크 등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바다 부족의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다투는 과정도 꽤 디테일하게 담겨있다. 그러니까 전편이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2편에서는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가족들의 삶과 적응하는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지구인들의 침공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위한 양념 정도로 활용되고 있다.
1편에서 사망한 군인인 쿼리치(스티븐 랭)도 다시 등장한다. 이미 지구인 쿼리치는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의 기억과 습성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아바타에 전송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아바타 모습을 한 쿼리치의 부대원들이 제이크 가족을 추적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빌런이고 쿼리치라는 인물의 카리스마도 여전하지만, 전편과 동일한 인물들이 단지 아바타의 모습으로 바뀌어 재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금은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영화 속 제이크는 전편에서는 인간과 아바타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어떤 식으로 가족을 지켜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줄 알았던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고 이번 이야기 속에서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피하려고 하지만 영원히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이크의 성장은 이번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아이들이 판도라 행성의 바다 생명체들과 교류하고 위협에 맞서는 것을 통해서 성장하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이크와 네이티리 가족 전체의 성장기로 봐야 할 것 같다.
부족한 서사, 그 단점을 잊게 만드는 뛰어난 영상미
1편이 우리에게 그 당시 최고 기술력을 화면으로 보여준 것처럼, 이번 후속편에서도 최고의 영상과 특수효과를 영상에 담았다. 이번엔 바닷속으로 카메라를 옮겨 아름다운 바다 생명체들을 보여주고 주인공들이 그들과 교류하는 과정을 꽤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마치 해상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마치 눈앞에 실제로 있을 것만 같은 화면은 이것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효과가 눈앞에 펼쳐진다.
화면만큼은 최고 수준이지만 이 영화의 이야기는 조금 아쉽다.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가족 서사로 이이기의 규모 자체가 조금은 축소된 느낌이 있고, 19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그렇게 빠르게 이야기가 전개되지는 않아서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제이크 가족이 위협을 피해 숨었다가 위협에 대항하는 이야기 정도로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1편에 비해 좀 더 단순해진 서사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까지 축소시킨다.
전체 이야기 자체는 한 가족이 겪는 혼란과 성장 서사다. 최소 3편까지 제작 중이고 시리즈가 성공적으로 흥행한다면 몇 편이 더 제작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아바타: 물의 길>은 앞으로 이어질 대서사의 발판을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느낌이 강한 영화다. 1편에 비해 서사는 조금 부족하지만 화면으로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은 감각은 뛰어나다. 체험형 영화로서 3D나 아이맥스, 4D, 돌비 사운드관 같은 다양한 특수 상영관에서 체험하면서 보기 좋은 영화다. 이렇게 시각적 만족도가 주는 장점이 다른 단점을 상쇄하고 더 높은 평가를 하게 만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인 샘 워싱턴, 조 샐다나, 시고니 위버, 스티븐 랭 등도 전편과 같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캐릭터들이어서 크게 새로운 느낌은 없지만 전편의 연기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를 연출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속편을 만드는데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최근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CG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 완성도 높은 화면을 보여주면서 급하게 찍어내는 것이 아닌 장인이 만들어낸 영상과 영화가 어떤 식으로 완성되는지를 몸소 보여줬다. 그가 앞으로 계속 이어나갈 <아바타> 시리즈의 다음 서사와 영상이 궁금해진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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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피상적 인간 관계에 대한 독특한 시선
전작 ‘욕창’으로 고령화 사회에서 직면할 수 있는 노인 문제에 대한 가부장적 가족 관계와 돌봄 노동 등을 조명했던 심혜정 감독의 신작 한국 독립 영화 〈너를 줍다〉를 관람했습니다. 신인감독들이 주로 소개되는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당신으로부터는’,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미확인’, ‘밤 산책’, ‘우리와 상관없이’, ‘수궁’, ‘어쩌다 활동가’, ‘폭설’, ‘믿을 수 있는 사람’, ‘잔챙이’와 함께 출품된 작품으로, 아무 생각 없이 버려지는 쓰레기로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지수를 통해 현대 사회 속 사람들 간의 관계를 독특하게 바라봅니다. 자칫 범죄처럼 보일 수 있는 부분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너무 무겁지 않게 풀어가고 있어 색다른 소재의 활용과 더불어 전체적인 분위기도 색달랐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셨을지 궁금하네요.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그의 쓰레기에는 품위가 있다”
사랑에 배신 당한 지수는 타인의 쓰레기를 뒤지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날, 최선을 다해서 깔끔하게 버린 쓰레기가 눈에 띈다. 옆집 남자 우재의 것이다. 지수는 그가 궁금하다. 지수는 쓰레기 정보로 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우재와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의 밝고 따뜻함, 그리고 상처들. 지수는 점차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예고편│Trailer
영제: Flowers of mold│감독: 심혜정│각본: 심혜정, 이수진
원작: 하성란 소설집 ‘옆집 여자’에 수록된 단편 ‘곰팡이꽃’
출연진: 김재경, 현우 외 多│장르: 드라마│상영 시간: 104분
국가: 대한민국│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왓챠피디아 2.6
초청·수상 내역: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 부문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 CGV상)
“버려지는 것들이 그 사람에 대해 더 솔직하게 말해”
사람들이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내용물을 통해 이웃들의 성향과 취향을 기록하는 특이한 버릇 혹은 습관을 가진 지수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지금 사회의 인간 관계를 들여다보며 나아가 특별한 사랑까지 파고듭니다. 시점에 따라 쓰레기를 뒤지는 행위가 범죄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버려진 것을 통해 진짜 모습을 접근하는 방식은 굉장히 독창적이게 다가옵니다. 밀키트 마케터이자, CS라는 직업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그녀의 성향을 보여주며 치장된 말과 행동으로는 알 수 없는 진짜 모습을 판단하는 그녀만의 소통법임을 알려주죠. 그리고 깔끔한 일처리로 인정받는 직장과 180도 다르게 소심하고 내성적인 모습은 왜 그런 행위를 하였는지 궁금증을 일으킵니다.
호실별로 쓰레기를 찾아 세세히 사진과 매일 기록을 꼼꼼히 남기며 타인에게 벽을 느끼는 일종의 정신병처럼 비치는데, 과거 연인의 잘못된 행위가 남긴 상처에 대한 자기방어적 트라우마이자, 보호 본능이었습니다. 다시 상처받기 싫은 그녀의 단단한 잠금장치, 영화는 그것을 해제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게 새로운 관계라 여겼는지 낯선 우재와의 만남으로 전반부의 긴장감과 새로운 출발의 애틋함 사이에서 묘한 기류로 뒤엉키기 시작합니다. 결국 사람의 문제는 사람으로 해결돼야 하고 진정한 관계는 진실한 소통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시선을 애둘러서 보여주며 우리 사회가 만든 단절된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누구에게나 실시간으로 자신을 뽐내지만, 양면이 다른 동전처럼 전혀 알 수 없는 속마음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른 이들을 따라 마치 내 취향인 양 똑같은 모습으로 동질감과 유대감, 관심에 목메는 사회이기 때문에 지수처럼 꾸밀 것 없이 버려진 쓰레기들을 봐야 진짜를 볼 수 있는 가짜로 가득 찬 안타까운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너를 줍다〉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묘하면서도 진지한 시선을 던지며 나아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남깁니다. 지수의 화사해진 스웨터처럼 우재와의 새로운 출발을 통해 더 이상 남들의 흔적이 그녀의 쓰레기봉투에 없길 바라면서 말이죠.
한 줄 평: 피상적 인간관계에 집착하는 사회를 쓰레기봉투에 담은 재밌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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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고장난 론> 30초 예고편
비봇을 갖는 것이 유일한 소원인 소심한 소년 '바니'에게도 드디어 '론'이라는 비봇이 생겼다. 그러나 첨단 디지털 기능과 소셜 미디어로 연결된 다른 비봇들과 달리, 네트워크 접속이 불가능한 고장난 '론' 자유분방하고 엉뚱한 '론'으로 인해 벌어지는 엉망진창, 스릴 넘치는 모험을 함께하며 '바니'는 진실한 우정이 무엇인지 점 점 깨닫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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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퇴마록> 공식 예고편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항할 퇴마사들의 탄생⚡ 하늘이 불타던 날🔥 새로운 전설이 시작된다! 1000만부 베스트셀러 원작 오컬트 블록버스터 [퇴마록] 예언의 시작 예고편 공개! 2025년 2월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