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 음식을 음미한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그것도 길~~게! <프렌치 수프>는 미식의 나라 프랑스 음식을 시청각으로 맛보는 영화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은 물론, 그 안에 담긴 재료가 어떻게 맛있는 예술 작품으로 탄생하는지의 과정, 그리고 이 음식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까지 코스요리처럼 쫙 펼쳐진다. 이 만찬의 정수는 바로 사랑과 평등, 그리고 존경. 음식에 담긴 이 의미의 맛은 긴 여운을 남긴다.
미식 연구가 도댕(브누아 마지멜)과 함께 음식을 만드는 천재 요리사 외제니(줄리엣 비노쉬)는 아침부터 바쁘다. 도댕의 미식가 친구들이 방문을 하기 때문. 텃밭에서 공수한 채소는 물론, 에피타이저부터 본식, 디저트까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메뉴와 레시피를 음식으로 구현한다. 도댕 또한 외제니와 함께 독창적인 미식의 세계를 펼친다. 이 집에서 최상의 파트너로 지낸 지도 20년. 서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몇 번이고 오갔고, 도댕은 몇 번이고 청혼했지만, 외제니의 거절로 결혼이란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외제니는 몸이 아파 쓰러지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든다.
| 음식을 통한 평등한 사랑과 관계의 의미
<프렌치 수프>는 음식을 통한 평등한 사랑과 그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오랜 시간 끓이고 정성을 들여야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곰국(또는 프랑스 가정식 수프 ‘포토푀’) 것처럼, 영화 또한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하는 음식들이 가득하다. 이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짧은 시간 안에 자극적인 맛으로 만들어 내놓는 음식이 아닌, 오랜 시간을 들여 풍미를 살려 내놓는 음식처럼, 사랑이란 복잡미묘한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감독은 말한다.
두 주인공을 통해 평등한 사랑이란 건 무엇인가를 재차 강조한다. 외제니는 도댕을 사랑하고 육체적인 관계도 맺는 사이이지만, 그의 청혼을 매번 거절한다. 그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아내로서가 아닌 동등한 요리사로서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그녀는 되도록 주방을 떠나지 않는다. 요리사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사랑을 느낄 있는 주 공간이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이란 시대적 배경인 영화에서 남성과 여성의 계급과 역할 차이는 확연하다. 따지고 보면 도댕은 고용주고 외제니는 고용인이라는 갑을 관계다. 게다가 만약 결혼한다면 외제니는 더 이상 요리사로 살기 힘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요리사로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길 바라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함께 바라보는 사랑의 눈높이가 매번 같아지길 바란다.
| 이렇게 섹시한 음식 조리 과정이라니?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드러내지 않는 섹시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도댕과 외제니는 함께 음식을 만드는데, 중요한 건 이 자체가 섹시하게 느껴진다. 극 중 이들은 멋진 협업을 통해 음식을 만들면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한다. 여느 영화였다면 한 번쯤은 아름답고도 고혹적인 이들의 베드신을 보여줄 법한데, 트란 안 홍 감독은 그 생각을 갖기도 전에 컷을 외친다. 마치 아까 베드신 보다 더 야릇한 장면을 봤는데, 또 찍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음식을 만들며 맺는 관계는 유사 성적인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절묘한 이들의 합, 그리고 이들이 내놓은 결과물은 사랑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기까지 한다. 조리 과정 이후의 장면이지만, 도댕이 요리를 연구하기 위해 설탕에 절인 배를 손으로 꺼내어 만진 후, 외제니의 방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이때 나체로 누워 있는 외제니의 뒷모습은 마치 도댕이 끈적한 터치가 이뤄졌던 배 모양과 흡사하다. 에로틱함은 물론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장면 또한 도댕의 터치 이후 가차 없이 컷 한다.
계절로 따지면 영화는 가을에 가깝다. 설렘과 열정을 지나, 따뜻하고, 사려 깊고, 농익은 사랑의 감정이 곳곳에 묻어 있다. 안 먹어도 그 맛을 아는 것처럼, 영화 또한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이들이 나눈 사랑과 그 관계의 농도를 가늠할 수 있다. 감독은 결은 다르지만, 관계 속에서 빗어지는 섹시한 사랑의 맛을 보라고 펼쳐놓는다. 아는 맛이 무섭다는 걸 트란 안 홍도 아는 듯하다.
| 프랑스 주방에서 덕임이를 만나다?
<프렌치 수프>는 도댕과 외제니의 평등한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사랑과 결혼이란 굴레에 저당 잡히지 않으려 하는 한 여성의 몸부림을 담는다. 도댕과 함께하고 싶지만, 자신의 일 또한 소중한 그녀에게 사랑, 그리고 결혼은 얻는 것 보다 잃을 게 많은 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외제니는 계속해서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동거인으로서 살아간다. 결국 도댕과의 결혼을 승낙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외제니를 보며 떠올린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덕임(이세영)이다. 덕임이 또한 궁녀로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었는데, 이산(이준호)과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다. 훗날 정조가 된 이산은 사랑하는 덕임에게 승은을 내리지만, 그녀는 무려 두 번이나 거절했다. 이유는 사랑보다 권력보다 자신의 삶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시대와 국가가 다른 이들이지만 사랑 뒤에 감춰진 불평등의 늪에 빠지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여성들이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결은 다르지만, 이들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도댕, 정조 모두 뒤늦게 이들의 소중한 사랑을 깨닫는 부분도 오버랩된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평등한 사랑을 나눴던 주방에서 도댕과 외제니의 대화 회상 장면이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이때 그 공간을 채운 이들의 질문과 대답을 찬찬히 음미하길 바란다. 이 세상 다양한 음식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세상 다양한 사랑은 존재하는 법. 급하지도, 빠르지도 않고 천천히 가을 녘에 물든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감상하길 바란다.
p/s: 일단 뭘 먹고 영화를 보는 걸 권한다. 빈속에 보면 떨어지는 군침에 스스로 당황할지 모른다. 프랑스 유명 요리사 피에르 가니에르가 요리를 감수할 정도로 음식 퀄리티가 너무 좋아, 영화가 끝난 후에 프랑스 전문 레스토랑을 방문해서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시각이 아닌 청각에 의존해 감상하는 것도 추천한다!
사진 제공: 그린나래미디어
평점: 4.0 / 5.0
한줄평: 사랑, 평등, 존경이 담긴 음식의 맛!
* 〈씨네랩〉 초청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