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GRAM NOTE.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뭄타즈는 섬세한 남편 하이더르, 가족 내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는 시아버지 아만, 큰형 내외 및 그들의 네 딸과 함께 산다. 몇 년째 전업주부로 살던 하이더르는 카리스마 있는 트랜스젠더 뮤지션 비바의 백댄서로 취직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뭄타즈는 전업주부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하이더르는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비바에게 이끌리고, 뭄타즈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답답함을 느낀다. 자아가 확고한 뭄타즈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비바 뿐 아니라 흔들리는 성적 정체성을 가진 하이더르와 시아버지 아만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억압되고 착취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사임 사디크 감독의 데뷔작 <조이랜드>는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박선영/2022년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POINT.
✔️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상을 비롯, 각종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들이 눈여겨본 영화
✔️ 파키스탄이라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낯선 나라 영화인데, 어디서 <헤어질 결심> 냄새가 나요 킁킁
✔️ 파키스탄 출신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프로듀서로 참여. 말랄라는 여성 교육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 낸 인물이니만큼, 여성을 보는 시각에 대한 우려를 접어도 좋아요
✔️ 보고 난 직후는 물론, 보고 난 이후에도 며칠씩 여운이 계속되는 영화
✔️ 믿고 보는 '슈아픽쳐스' PICK! <행복한 라짜로>, <말없는 소녀> 같은 수작을 우리와 연결해준 곳이에요
✔️ 12월 13일 개봉!
영화 <조이랜드>는 거대한 하나의 일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연로하여 휠체어를 탄 아버지, 큰아들 '살림'과 아내 '누치', 둘째 아들 '하이더르'와 아내 '뭄타즈'. 그리고 살림과 누치 사이 아이들까지. 한 마당을 공유하며 사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옛날 마당 깊은 집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이내 일가족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가 그 마당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시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들의 땅 '라호르'는 파키스탄에서 둘째 가라면 아쉬울 만큼 유서 깊은 도시다. 다양한 왕조의 수도였던 곳, 한때 세계에서 손꼽히는 주요 도시이기도 했던 곳, 그러나 1940년대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되던 시절 무수한 피가 흘렀던 곳. 차이가 차별이 되어 사람을 죽였던 곳. 그 모든 이야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흘러갔을 텐데, 이제 더 이상 차이가 차별이 되는 일은 없을까?
#"단일한" 파키스탄 사람이에요
일가족의 고요한 마당에서도 차별은 넘쳐 흐른다. 딸 넷을 낳았지만 아들이 아니라서 실망하는 것도, "아들"이니 응당 염소 하나쯤은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들에게 일자리가 생겼으니 자신의 커리어를 착착 쌓아 가던 며느리는 이제 전업 주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그 아들의 일자리가 "에로틱한 공연"을 하는 극장이라는 사실은 이웃들에게 좀 비밀로 해두는 것도.
게다가 이런 차별은 절대 "단일한" 기준을 가질 수 없다. 차별은 양날의 칼이므로, 힘을 쥔 쪽에도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성차별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약자지만, 힘을 쥔 남성들이 만든 차별의 굴레가 어떤 남성들에게는 '맨박스'가 되듯이. 다만 힘을 쥔 쪽은 규칙을 이리저리 변용하면서 상처를 피할 길을 도모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차별은 이중 삼중의 잣대를 번복하여 만들어내고, 하나 둘 잣대가 늘어나다 보면 어느새 삐죽삐죽한 창살처럼 우리를 가둔다. 그 창살 안에서 버틸 재간이 없는 사람들이 튀어나올 때, "공동체를 지킨다"는 명목의 제재가 가해진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잣대들은 사실 공동체의 모두를 찌르고 있다. 힘을 쥔 쪽이라는 것도 결국 상대적 개념일 뿐이니까.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사실 모두 그 창살 바깥에 더 잘 어울리는 인물들이다. "전통적인 남성성"과 잘 어울리지 않는 하이더르, 트랜스젠더 비바, 전업주부의 삶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뭄타즈, 받아들였지만 그런 뭄타즈를 이해하는 누치, 심지어 전통의 적극적인 수호자처럼 보였던 아버지나 이웃집 파야즈 부인조차도...
단일하지 않은 차별의 기준들은 각자의 비밀들을 만들어내고, 그 비밀은 거울이 깨지듯 방사형으로 퍼진다. 그 자리의 어느 누가 과연 행복했을까?
마치 "애빌린의 역설" 같다. 집단의 구성원 누구도 원하지 않는 방향의 결정임에도, 모두가 자신의 의사와 상반되는 결정을 하게 되는. 전통이라는 미명을 덮고 있는 것 중 이런 애빌린의 역설이 얼마나 많을까.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하고
영화에는 많은 공간이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하나 매우 인상 깊다. 어느 장소 하나 일면적이기만 한 곳이 없다. 마당과 집안 깊은 곳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는, 이 영화에 뭄타즈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유독 그 대비를 극명히 보여주었던 집. 사회에서 요구하는 엄격한 성별 역할을 내려놓는 공간이었던 극장. 모든 남성 관객들이 스스로에게만 유하게 적용되는 잣대의 틈으로"에로틱한 공연"을 보는 곳인 동시에, 비바에게는 반대로 그 모든 잣대의 창살을 내던지고 나와서 춤을 춘 장소였던 극장. 이름부터 기쁨을 품고 있는, '꿈과 희망의 공간'으로 상징되는 놀이공원 조이랜드. 누치와 뭄타즈가 잠시 일상의 고통을 잊고 소소한 일탈을 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정도의 일탈밖에 할 수 없는 삶의 무게와 거기서조차 존재하는 차별의 비릿한 시선을 느끼게도 하는 공간.
가장 역설적인 공간은 바다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조악한 조명밖에 없는 방에서 바다의 흔적으로 들고 온 조개 껍데기 하나 덜렁 들고 있지만, 비바는 바다를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평생 라호르에서만 살아온 하이더르 또한, 가보지 못했지만 사실 언제든 마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 반면 카라치에 친척 집이 있어 언제든 해변에 가볼 수 있었음에도 옷이 젖는다는 이유로 발목밖에는 담가보지 못한 뭄타즈.
비바와 하이더르, 뭄타즈. 바다에 대한 이 세 사람의 기억과 접근성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만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마치 <헤어질 결심>에서 "난 인자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바다가 좋아요." 말했던 서래처럼, 이들 또한 인자한 사람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것.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와의 불륜 이야기"로 뭉뚱그리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 비바가 '팜므 파탈'적인 매력으로 일가족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도 아니며 (진짜 아니다), 한 기혼 남성과 결혼 외부자 두 사람이 히히덕거리며 기혼 여성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진짜 아니다). 어쩐지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생각났던 <헤어질 결심>이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듯이.
이 영화는 단지 그 세 사람 모두가 눌려 있던 구조를 보여준다. 그 거대한 구조 아래 세 사람이 어떤 존재였는지 보여주고, 이들이 각각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두껍게 덮인 애빌린의 역설을 걷어내고 끝내 규칙에서 이탈하는 인간들의 자리가 어디인지 묻는다. 아름다운 인물들의 설렜던 마음을 손가락처럼 들어, 그 지점을 슬프게 가리킨다.
#뭄타즈의 이름
이 영화의 인물들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설레지만 슬픈" 인물이었지만, 내 눈에 가장 밟힌 인물은 뭄타즈이다. 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성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므로. 파키스탄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나로서는, '뭄타즈'라는 이름을 살면서 딱 두 번째 들었다.
처음으로 들은 이름 또한 현실에서 마주한 인물은 아닌데, 무굴 제국 황제 샤 자한의 아내였던 뭄타즈 마할이다. 샤 자한이 태어날 때만 해도 무굴 제국의 수도가 라호르였으니, 아주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그가 사망한 곳이자,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건축 사업을 벌인 곳은 라호르가 아닌 아그라였지만. 그 미친 사랑의 결과물이 타지마할이다. 뭄타즈 마할의 무덤.
샤 자한은 뭄타즈를 몹시 "총애"하여, 전쟁터에도 데리고 다녔다 한다.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샤 자한은 타지마할을 짓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력을 쏟아붓는다. 벽면에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일일이 대리석을 파고 돌을 박아 넣었으며, 이탈리아처럼 먼 곳에서 수입해온 자재도 있었다. 똑같은 모양의 검은색 건물을 하나 더 지어 두 건물의 그림자가 포개지게 만들고 싶었다는데, 나라가 휘청일 정도의 건축을 보다 못한 아들 손에 끌어내려지며 이 미친 사랑의 공작이 불발되고 만다.
듣다 보면 늘 양가 감정이 드는 이야기이다. 그 나라 백성이었다면 그따위 무덤 보기도 싫었을 것 같고, 그 모든 이야기가 옛 전설처럼 고여 버린 지금으로서는 아무튼 그 도시를 먹고살게 해 주는 랜드마크가 되었으니. 그러나 그 뭄타즈 마할의 이름과 포개지는, <조이랜드> 속 뭄타즈를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샤 자한이 뭄타즈를 무척 사랑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지만 (누차 강조하지만 "미친" 사랑이다.) 그 사랑이 뭄타즈를 행복하게 했을지는 잘 모르겠기에. 말랄라 같은 프로듀서가 있었다면, 14명의 아이를 낳으며 전쟁터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다면. 시대 정신조차 달랐던 때이니 뭄타즈가 무엇을 원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뭄타즈가 어떤 삶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면,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수백 년 전에 무덤에 갇힌 뭄타즈 마할도, 뭄타즈를 비롯해 각자의 창살에 갇혀 있던 이 영화 속 인물들도, 이 인물들이 표사하는 파키스탄 사회도, 그런 자유로운 선택지의 세상에 갑자기 짠 놓일 수는 없다. 그런 "조이랜드"는 우리에게 없다. 너무 아름답지만 멀고 아득한, 우리의 조이랜드.
그래서 이 영화가 마지막까지 쟁쟁 외친 소리가 며칠씩 여운으로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보지 못한, 가보지 못할 조이랜드가 아득하게 슬퍼서. 말랄라가 어떤 마음으로 프로듀싱에 참여했는지, 어쩐지 조금 알 것도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