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1-16 13:40:46
1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1월 13일 - 1월 15일
벌써 1월의 둘째 주도 지나갔네요.
다들 주말 잘 보내셨나요? 봄 날씨가 찾아온 듯하다가 다시 추워졌습니다.
앞으로도 기온이 점차 떨어질 예정이라고 하니 감기 조심하세요!
그럼, 지금부터 씨네픽과 함께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결과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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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 <아바타: 물의 길> (-)
▶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 물의 길>이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장기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누적 매출액이 1200억원을 돌파하였다. 이번 주 역시 설연휴가
겹치면서 흥행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주말 동안 (1월 13일 - 1월 15일) 관객 수 39만 2,28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941만 4,408명을 돌파하였습니다.
2. <더 퍼스트 슬램덩크> (▲1)
▶ 인기 만화 '슬램덩크'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소규모의 스크린 수
속에서도 활약을 하며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였다. SNS에서 화제가 되면서 점점 새로운
관객층이 늘어나고 있다.
주말 동안 (1월 13일 - 1월 15일) 관객 수 23만 21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60만 4,808명을 돌파하였습니다.
3. <영웅> (▼1)
▶ 개봉 4주차에 진입한 <영웅>은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전체 박스오피스에서
3위를 차지하며 장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주말 동안 (1월 13일 - 1월 15일) 관객 수 23만 21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60만
4,808명을 돌파하였습니다.
4.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 (-)
▶ 깜찍한 매력적인 캐릭터와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이
개봉 1주 차와 동일하게 4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번 주에 설연휴가 겹치면서 순위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말 동안 (1월 13일 - 1월 15일) 관객 수 14만 1,208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54만 383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스위치> (-)
▶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가족 영화 <스위치>는 배우들의 1인 2색 캐릭터 연기로
유쾌한 웃음과 따뜻한 감동을 선사하며 관객을 모으고 있다.
주말 동안 (1월 13일 - 1월 15일) 관객 수 6만 9,832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35만 7,943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북미 박스오피스 TOP 5는 국내와 동일하게 5주 연속 동일하게 <Avatar: The Way of Water>가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다.
<Avatar: The Way of Water>는 주말 동안(1월 13일 - 1월 15일) 매출액은
31,118,000 (한화 약 386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은 562,919,348
(한화 약 6,985억)을 달성하였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TOP 5>
1. <아바타: 물의 길> 3,111만 달러 (누적 5억 6,291만 달러)
2. <메간> 1,791만 달러 (누적 5,644만 달러)
3.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 1,340만 달러 (누적 1억 636만 달러)
4. <오토라는 남자> 1,255만 달러 (누적 1,877만 달러)
5. <Plane> 1,000만 달러 (누적 1,000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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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의 1월 둘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
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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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해, 새롭게 뭔가를 떠나보내고 싶은 당신에게
나는 올해를 '여러모로 개 같은 한 해'라고 규정하고 싶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썩 좋지 않은 해라는 뜻이다.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그거 빼고는 다 구렸으니 다 액땜이라 생각하고 싶다. 안 좋은 일만 주구장창 있으면 다행인데 사실 올해는 생각이 많았던 기간이기도 하다. 두려움. 공포. 아쉬움. 뭐 그런 감정들이 1년 내내 들었다. 누군가에게 기가 막힌 해결책을 들었다고 해서 이게 나아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 이미 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생각이 든다. 매일매일 다가오는 두려움과 공포감에 점점 지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무서운 감정이 계속해서 들기 때문에 이 2021년을 견디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인 건 아마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겠지. 근데 나는 점점 이 사람들에게 마음이 깊어져서 평범하게 잊히는 상황을 혼자 그리고 있다.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주위 사람들에 비해 내가 작아 보인다는 열등감에서 비롯됐다는 걸.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 곁에 사람이 많았으면 좋았겠지? 근데 왕따를 심하게 당해 인간관계 능력이 정말 죽어버렸다는 변명이 무색하게 난 오늘도 혼자인 채로 하루를 보냈다. 내 일상에 많은 것에 만족하다가도 '그때 사람들에게 미안하단 말을 더 할 줄 알았더라면'과 같이 죄책감이 남거나 마음속의 누군가에게 화가 났으니 난 아직도 자기혐오의 늪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처를 줬다는 무게감을 생각하면 이게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새 해가 된다면 정말 떠나보내고 싶은 것 중 하나다. 괴롭거든. 좋은 데 들어가서 멋진 사람 만나 꽁냥꽁냥 하는 삶 살아야 사라지지 않을까 싶거든. 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 그러려면 모든 원인이 규명되어 아다리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나는 왜 이리 꼬였나. 어쩐지 2022년이 돼도 나를 일으키는 건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세상이 날 버리면 어떡하지. 번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어느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그리고, 난 여러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이 작품을 보고 난 후의 마음가짐이 길게 가지 않아도 괜찮다. 29살의 감독 PTA가 제시하는 해결책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1. 어떤 것에 관한 영화인가요?
자기혐오에 관한 영화다. 자기혐오를 나무위키에 검색하면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라는 뜻이 나온다.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는 행위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죄책감이 있을 수도 있다. 죄책감은 보통 과거의 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그때 내가 좀 더 용기를 냈더라면. 내가 그때 잘못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누군가에게 욕을 하지 않았더라면. 뭐 이런 식으로 과거의 본인에게서 잘못된 것을 찾는 것이 죄책감의 정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적당한 죄책감이야 말로 사람이 얼마나 올곧은지를 보여주는 굉장히 많은 척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직접 느껴보고 경험했던 인간 군상은 대부분 '적당한 죄책감을 가진 사람이란 드물다'였던 것 같다. 보통 죄책감을 느낄 법한 사람이면 감정이 흘러넘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인간은 보통 자기에게 없는 걸 후회하니까. 그렇게 결핍에서 생긴 이 감정은 우울할 때마다 자기혐오로 변해 사람들을 괴롭힌다. 이렇게 사람을 괴롭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과거는 절대 수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죄책감의 원인은 가지각색으로 다양하다. 과거의 누군가가 준 트라우마 뭐 그런 것 때문에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것도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떠나간 이들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가능할 것이며 학교폭력과 같이 범죄까진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준 경험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행동으로 보여줘 그것에 상쇄하는 행보로 보여줬다면 용서받을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 능사는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줬다 하더라도 떨쳐내지 못하는 경우도 불가능한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사람을 괴롭게 만들기 쉽다. 그렇게 누군가를 못살게 구는 죄책감은 결국 자아존중감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이게 계기가 되어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우물에 들어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 영화처럼 멍청한 실수를 하기도 하고, 마약 같은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귀결이 나며, 메마른 자아를 숨기기 위해 화려한 직업을 갖는 등 가지각색으로 있을 것이다. 자기혐오는 이렇게 사람의 결핍에 찰싹 달라붙어 누군가를 피폐하게 만든다.
이 <매그놀리아>는 9명의 내러티브가 분리되어 자기혐오에 대해 다룬다. 죽어가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 아들과 전 부인을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다는 후회, 아버지에게 받은 핍박과 멸시, 소심한 내면을 꺼내기 어려운 아이와 엄한 아버지, 어릴 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사랑을 나누는 법을 몰라 친구 없이 외로운 소시민 아저씨, 날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 딸에게 못쓸 짓을 했던 바보 같은 과거, 경찰 치고는 어쩐지 허당인 한 인물의 모성 격까지. 가지각색의 사연이 맞물려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사람들 전부 다 과거의 한 에피소드에 붙박여 자기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은 이런 다양한 인물을 제시하고, 각자의 내러티브를 한 지점으로 정교하게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 가지각색의 자기혐오에 대해 한 지점 찍고 전환점을 만든 것이다. '아니 9명이 주인공인데 어떻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이 9명이 극에서 중요한 포지션을 균일하게 잡고 있다는 점이나, 자기혐오의 다양한 인물상을 제시했다는 점이나 결말부의 한 지점의 개연성을 위해 무조건 들어가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읽을 몇 안 되는 분들의 마음에 뭐가 있는지는 모른다. 또 여기 인물과는 다른 상처를 감당하고 있을 수 있다. 난 이 9명의 인간상에 속해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나와 타인을 용서하지 못해 마음이 괴로운 이들이라면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이 영화는 왜 자기혐오가 발생하며, 그게 어떤 영향을 주고 또 어떻게 해야 구원이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니까.
2. 러닝타임 180분에 주인공이 9명? 보는 게 어렵지는 않나요?
이야기 잘 만들어서 시간 체감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나는 감독 PTA의 작품 중에서는 쉬운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마스터>가 잘 만든 작품인 건 맞는데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펀치 드렁크 러브>같은 경우 내용만 보면 로맨스 코미디라 슥 봐도 문제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다방면의 미장센이나 비유가 한 번만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에 이 <매그놀리아>는 9명의 인물이 나오고 초입부에 이게 뭔 소리지? 싶은 오프닝 장면이 있어서 그렇지 크게 받아들이는 게 어렵진 않을 듯. 9명의 인물 그거 스토리 어떻게 다 이해하나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9명의 주인공들이 거의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딸에게 못된 짓을 했던 아버지는 TV쇼 진행자인데, 소심해서 아버지에게 자기 내면을 못 꺼내는 아이는 그 진행자의 출연하는 패널이다. 이런 식으로 감독은 인물들의 자기혐오 원인을 최대한 다양하게 제시한 반면 이 사람들이 만나는 계기를 2~3개로 압축시켜 관객의 오해를 줄였다. 이렇게 그냥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 내용을 이해하는데 크게 어렵지는 않을 듯. 또한 영화의 감정이 잔잔한 게 아니라 좀 센 템포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루하다던가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3. 배우들의 연기 합은 어떤가요?
줄리안 무어. 톰 크루즈. 필립 셰이모어 호프만. 존 C. 라일리. 윌리엄 H. 메이시 등등. 이름만 봐도 든든한 국밥 배우들이 포진해 있다. 줄리언 무어나 톰 크루즈는 이미 연기 잘하는 거 다 알아서 아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또 영화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필립 셰이모어 호프만 모를 수가 없다. 감독도 PTA라는 할리우드의 빅 네임 아닌가? 영화의 전체적인 톤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니 보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 이 영화가 그냥 단순히 유명한 사람들이 나오고 거장 폴 토머스 앤더슨이 메가폰을 잡았다고 해서 연기력이 좋은 작품은 결코 아니다. 가령 줄리언 무어가 맡은 캐릭터는 죽어가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으로 서서히 미쳐가는 여성이인데, 이 복잡 미묘한 후회와 자기 자신에 대한 화가 이 인물이 만나는 사람에게 잘 느껴지도록 템포 조절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또 톰 크루즈가 맡은 캐릭터는 잘생긴 외모와 입담 말고도 다른 내면을 묘사해야 했는데, 각본이 너무 좋아서 대사들이 사람의 성격을 표현하기에 아주 효과적이다.
4. 보기 전에 알고 가야 할 지식이 있나요?
읽고 나서 알아야 할 지식은 있다. 엔딩부의 한 사건에 대해 찾아보는 걸 추천한다. 그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듯.
5.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1번에서 언급한 바와 비슷한 말을 쓰고 싶다. 자기혐오에 고통받는 사람이라면 정말 추천해주고 싶다. 나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다. 날 떠났던 사람들에게 돌아가 내가 변했다는 걸 증명하면 이 죄책감이 사라질까. 얼마 전까지, 아니 솔직히 지금도 고민인 내가 존경하는 분에게 평범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사라질까. 근데 사실 이 질문의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이건 다 내가 인간관계를 좁게 만들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걱정이라는 걸. 난 사람들을 사귀기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날 떠날 거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잊힐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원인들을 단적으로 해결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착하는 것이야 말로 날 더 불행하게 만들겠지. 이 결론이 자기혐오가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원인과 결과를 명백하게 규정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걸 반박하는 작품이다. 자기혐오를 가지기에 충분한 인간이라 생각했다면, 단 찰나의 순간으로 감독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고 답한다. 엔딩부의 한 지점이 그 기분을 느끼게 해 줄 것이라 확신한다. 이제 우리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모두에게 자기 자신을 용서할 자격이 있다는 걸. 그리고 이제 그만하면 됐다. 보내 줄 것들은 보내주자.
6.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왓챠에서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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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스완 (2011)
-이 글은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블랙스완>은 이야기 자체의 매력보다도 이야기를 영상으로 다루는 방식이 강렬한 영화다. 영화 <블랙스완>은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과 고뇌, 그리고 자아의 분열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방식이 압도적이다. 믿을 수없는 화자를 내세워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하는 한편, 16mm의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후 디지털화하여 영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상의 노이즈들과 극적인 긴장감을 더하는 웅장한 ‘백조의 호수’, 흑조와 백조를 오가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한데 섞인 이 영화는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괴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렇듯 압도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영상으로 짜여진 이 영화는 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완전히 영화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는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강렬한 방식이 눈에 띄는 영화로, ‘완벽’이라는 허상의 것을 좇는 개인의 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다소 앞서가는 것이거나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는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통해서 완벽주의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이 너무도 강해서 이 영화의 지엽적인 메세지에 불과한 완벽의 추구와 그 허무에 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화두를 뜯어 고치지는 않겠지만, 다소간 확장시키게 될 지도 모르겠다.
1. 보이지 않는 고통들을 드러내는 <블랙스완>.
영화 <블랙스완>이 다루는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은 ‘나탈리 포트만’이 <블랙스완> 시사회 인터뷰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발레 무용수들이 겪는 내적 고통과 유사하다. 아름다운 발레 무용수들의 무대 위 모습과는 달리, 토슈즈를 벗으면 드러나는 성하지 못한 그들의 발과 한번의 무대를 위한 압도적인 연습량으로 닳고 닳은 깡마른 그들의 몸은 그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들이다. 한편, 예술가들이 하나의 보기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쥐어짜내는 고통 역시 보이지 않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고통을 모두 짊어진 ‘니나’를 통해서 두 개의 고통을 포개어 놓는 것으로 그 고통의 상징성을 강화한다. 이렇듯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에서 모티브를 받아 구상되었고, 감독의 누이가 발레 무용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술가와 발레 무용수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의 상징을 함께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우연치 않게 두 가지의 상징이 구성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우연이고 필연이고를 떠나서 상징을 중첩시켜 인물의 고통을 강화한 이 영화의 각본은 굉장히 현명했고, 특별하다.
1-2. 분신(Dvoinik)과 분열된 자아.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 Dvoinik>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나, 그것과는 상당 부분 다르다. <분신>속 자아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한 인간의 덧없는 파멸만을 그려내어 탐구가 다소 얕은 반면, 영화 <블랙스완> 속 분열된 자아는 완벽주의에 이르고자 하는 예술가의 심리적 고통과 함께 파멸과 성장의 이미지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의 주체의 역할을 맡은 ‘백조’는 그동안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두 자아 모두가 니나의 자아라는 점이다.
영화는 발레무용수가 자신이 가진 것 이상(以上)의 연기를 소화해내기 위해 이제껏 가져왔던 자아를 버리고, 백조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자아를 꺼내어 자신의 이상(以上)에 이르고자 한다. 물론 그 이상(以上)의 상태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적인 상태는 아니기에, 이 발레 무용수는 완벽한 예술을 위하여 이전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과정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결과적으로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흑조)과 이전까지 유지해온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백조)은 두 가지의 자아로 나타나며, 두 자아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백조’는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다.
영화 <블랙스완>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두 자아의 대결을 다루며 이야기의 장력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또 한편으로 ‘니나’의 자아가 분열되어가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여러 차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각적 긴장감을 더하여 ‘시각매체로서’ 영화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2. 완벽이라는 이름의 허상
지금 현재, 존재하는 존재들은 모두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것들은 정해진 운명이 없기에,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관한 이론으로 현존재를 해석하자면, 지금 나의 무수히 많은 선택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무수히 다른 나를 만들기 때문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 중 우위성을 차지할 수 있다. 반면, 시간에 얽매어있는 현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이 무수히 많은 가능함이라는 결과 자체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간대에 놓인 무수히 많은 선택지중 하나의 선택지를 택하면, 다른 모든 선택지가 닫혀버리기 때문에, 현존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얽매어있는 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을 뜻하는 단어 Perfect {per(모두) + fectio(하다)} 는 시간의 속성에 얽매인 존재들은 도저히 이를수 없는 허상의 단어이다.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간은 헛된 일일 수밖에 없으며 완벽을 말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거짓이자 자기 기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지나친 완벽의 추구는 허상의 것을 끊임없이 좇는 일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니나’가 보여주듯이, 완벽한 연기를 위해 겪는 고통과 자멸, 그리고 전락을 암시하는 결말은 허상의 것을 추구하는 행위의 덧없음과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고통을 엿볼수 있다. 그렇다면, 완벽을 추구하는 일이란 결과적으로 한없이 허무할 뿐인가?
3. 완벽이라는 환상의 추구와 그 당위성없는 행위의 당위성.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은 우리가 짊어진 숙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해소되지 않을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결코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가 완전해지고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가는 것, 그 것이 결과론적으로 허상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마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수메르의 바빌로니아에서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여행을 떠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동시대 바빌로니아인들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왕이자 “깊은 곳을 본”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여정이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해도, 그 과정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앞서 말했듯이 완벽은 허상의 것이다. 그렇다면, 완벽의 추구. 절대로 구해지지 않을 것을 구하는 이 일은 어떤 당위성을 얻게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삶의 당위성을 그 목적지에서 찾는 그 전제가 애초에 들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시작하자. 삶의 목적지는 결국 죽음이다. 완벽한 끝. 삶의 문제를 벗어나, 모든 목적은 그저 ‘완벽한 끝’이므로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삶의 의미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오해되는 전제를 깔아놓고, 결말만을 두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모든 행위는 당연 무의미하고, 당위성을 잃는다. 그렇기에, 완벽의 추구 또는 이상의 추구,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이룰수 없는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 당위성 없는 행위의 당위성은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각 개인의 몫이므로, 나는 다만 삶의 의미란 의미를 찾아가는 삶속에 있다고 말할 수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단순히 추구하는 것이 아닌 집착하는 것이다.
4. 추구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블랙스완>의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기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지만, 그 과정속에서 “깊은 곳”에 닿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니나가 완벽한 흑조가 되어 마주하는 것들은 혼란과 고통, 전락, 그리고 결과에 대한 구체적이지 못한 자기만족―나는 완벽했어, 그 모호한 한마디―에 그친다. <블랙스완>의 니나는 결과적으로 완벽에 집착할 뿐인 광적인 예술가의 군상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보자면, 그녀는 흑조가 되기 이전부터 기술적으로 완벽한 무용수였고, 이미 ‘백조’의 순수함과 순종 결백 등에 집착하고 있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다 큰 그녀가 어머님의 말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모습이나 지나치게 순수한 모습들은 그녀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흑조의 날개가 자라나는 환각을 보는 장면이나, 자신의 피부에서 흑조의 깃털이 돋아나는 환각을 보는 것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여 다른 모든 자아와 의지를 억누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이미 백조에 대한 심한 집착과 몰입을 보여준 예술가 니나가 ‘흑조’ 역할을 맡으며 흑조에게 집착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아에 또 다시 자신을 온전히 맡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니나가 예술가로서 완벽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무대는 완벽했다. 하지만, 백조의 추락과 백조의 죽음을 의미하는 마지막 엔딩씬은 광기어린 무용수의 집착이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파멸을 야기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읽힌다. 물론, 이전까지 니나를 가두었던 백조의 이미지가 죽어버리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 니나가 ‘성장’한 것처럼 읽힐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게 감독의 의도이고, 옳은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존재의 공허함을 채우는 과정에서 이전까지의 미숙한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 완전한 존재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의 결핍된 모습들마저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결핍된 자신을 채워가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니나가 백조를 자신 안에서 완전히 살해하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은 니나 자신을 가두는 백조의 틀을 깨버리는 일인 동시에 니나의 미덕이었던 백조의 모습들마저 버리는 것으로, 흑조로 성장하기보다는 흑조로 ‘변이’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니나가 매번 이렇게 변이만을 반복한다면, 그녀는 끊임없이 이전의 자신을 살해하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견뎌내야만 할 것이고, 이 편집증적 고통은 성장통의 고통과는 다르다. 그 고통은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동반한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스완>은 한 예술가가 성장해가는 서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블랙스완>의 니나가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의 광적이고 고통스러운 집착일 뿐이다. 다만 <블랙스완>이 다루는 이야기의 방향성과는 상관없이 영화는 정말 잘 만들어졌으니, 이 영화의 이야기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작품의 완성도는 아주 높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데미안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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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는 내가 직접 만들어주지
여기.
잠들지 못하고, 밤마다 뺏벌을 걸어다니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박인순.
뺏벌이라 불리는 미군 기지촌에서 양공주로 살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은 동료들과 함께 기지촌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죽음을 많이 보았으며, 늘 죽음 가까이에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튼튼한 두 다리로 이 세상에 굳건히 서 있다.
밤새 뺏뻘을 돌아다니는 인순을 보며, 저승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죽어야 잠들 수 있겠군”
그러나 평생을 비가시적(서류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이중으로 은폐된) 존재로 살아온 인순에게는 저승으로 가는 길도 그리 간단치 못하다. 이승에서의 호적은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기에 저승 명부에도 그녀의 이름이 없으며, 저승길에 필요한 ‘그녀만의 이야기’ 또한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과거 여러 차례 문서와 미디어를 통해 기록되고 재현되어왔지만, 그 이야기들은 그녀의 진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 오래된 편견으로 만들어진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고자 한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메인 포스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큐멘터리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김동령 감독과 박경태 감독이 기지촌 여성인 박인순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다. 두 감독은 이미 각자 작업한 <나의 부엉이(2003, 박경태)>, <아메리칸 엘리(2008, 김동령)>와 공동연출한 <거미의 땅>(2016)을 통해 박인순의 이야기를 담아온 바 있으며, 이 같은 작업을 통해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또한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감독들의 앞선 작업들과 분명한 차별점을 지니는데, 그것은 바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다. 감독들이 이전까지는 ‘기지촌이란 무엇이며 기지촌 여성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탐구하였다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는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는 왜 살아남지 못했는가?’를 탐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동령 감독은 이 영화가 “기지촌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기지촌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만들고 그러나 어떻게 사라지는가에 관해 탐구하는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가상 캐릭터와 실존 인물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재현되는 이미지들 속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판명하는 일은 무의미한 행위일 것이다(심지어 이러한 판단은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 와해되고 중첩된 영화적 공간 속에서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이야기’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밤마다 뺏벌을 돌아다니는 '인순'(논픽션/실제인물)과 뺏벌의 유령들을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저승사자들'(픽션/허구의 캐릭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박인순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드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녀가 재현하는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오히려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첫 시작부터 영화는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되는 나레이션이 삽입된다. 그리고 구술 채록을 위해 인순을 찾아온 교수와 뺏벌을 자신의 작품 소재로 사용하고자 하는 대학원생이 등장하여, 그녀들의 삶이 어떻게 타인에 의해 이야기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살해된 기지촌 여성의 기사 사진과 인순의 과거 인터뷰 장면을 통해 그녀들의 삶을 기술하는 미디어의 방식을 폭로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감독 자신이 (아마도 과거에) 핸디 카메라로 촬영하였던 다큐 영상들도 포함된다. 이러한 재현들은 모두 4:3의 답답한 화면비로 삽입되어, 인순을 비롯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어떠한 프레임 속에 가두고 있음을 은유한다.
필자는 태어나서부터 출가를 선언한 27살 이전까지 의정부에서 살아왔다. 그 때문에 뺏벌이라는 공간의 지리적 위치 정보가 등장하기 전부터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곳이 의정부임을 금새 알아차렸다. 남들보다 먼저 알아보았음을 자랑하기 위해 나의 출신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고, 나 또한 영화 속 대학원생과 같은 마음, 즉 그녀들의 이야기를 이용해보려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어났음을 고백하려 함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 속 대학원생 아해는 인순을 인터뷰하러 온 교수를 따라 뺏벌에 오게 되었다. 인터뷰 과정에서 인순과 뺏벌에 흥미를 갖게 된 아해는 홀로 인순을 찾아왔다가 인순이 집에 없자 폐허가 된 기지촌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작품 소재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기지촌의 여러 공간을 카메라로 담아내기도 하고, 기지촌 내 클럽에서 술잔과 벽에 붙은 기지촌 여성들의 사진을 몇 장 챙겨가기도 한다. 이러한 수집행위와 더불어 아해는 “이번 전시는 기억과 공간에 관한 작품으로 기획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작가가 이곳을 발견하기 전에 빨리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덧붙인다.
기지촌에서 작품의 소재를 물색하는 '아해'와 클럽 안에 산재한 '그녀들의 흔적'
여기서 필자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아니, 나는 의정부에 30여년간 살면서 왜 저곳을 직접 들어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가... 내가 먼저 발견했으면 나는 지금쯤 엄청난 작가가 되어있었을 텐데...’라고. (참고로 필자는 의정부에 살 때까지만 해도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삶을 산 바 있다. 지금은 아님.)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라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깨달았을 때, 잠시 저런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넘어, 나 또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만들고, 변형시키고, 제거하는 행위에 동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은 부끄러움과 성찰의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박인순이 우리에게 보내는, 그리고 멋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대었던 세상을 향한 통쾌한 복수극일테니.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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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한 영화’는 ‘나쁜 영화’인가?
5★/10★
솔직하게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제라드 버틀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분노의 추격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뻔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별거와 이혼 위기를 겪는 부부가 아내의 고향집으로 향하던 중 아내가 사라졌다. 어떻게든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은 남편은 다급한 마음에 경찰에 연락하지만 베테랑 수사관은 남편을 첫 번째 용의선상에 올린다. 아내에게도, 남편에게도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듯 보이고 범죄 조직이 개입한 듯한 정황도 나온다. 남편과 경찰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진실을 좇고, 꽁꽁 감춰진 거대한 비밀은 영화가 끝날 때쯤 빗장 풀린 듯 쏟아져 모든 갈등을 해소한다.
사실 이런 유의 영화는 적당한 재미와 긴장을 선사하지만 전혀 새롭지는 않다. 〈300〉, 〈런던 해즈 폴른〉 〈지오스톰〉, 〈앤젤 해즈 폴른〉 등 극장에서든 영화 채널에서든 제라드 버틀러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새로움, 전위성 등 예술적 가치에 초점을 맞췄을 때, 이 영화는 분명 낙제점이다.
그러나 새로움과 전위성만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익숙한 쾌락’이 더 끌릴 때가 있는 법이다. 만약 내가 이 영화를 돈을 내고 극장에서 봤다면 솔직히 짜증이 났을 것이다. TV와 OTT에서 얼마든지 대체재를 찾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비싼 돈을 주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금요일 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맥주 한 잔 마시며 TV나 OTT에서 이 영화를 봤다면 꽤 만족했을 것이다. 새로움, 전위성을 가진 영화는 영화의 메시지와 기법을 직접 느끼고 소화하는 데 정신적‧신체적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익숙한 쾌감’을 제공하는 영화는 아무리 지친 상태라도 편안히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론가들이 이런 유의 영화에 박한 것도, 관객들이 평론가들을 욕하며 영화와 자신의 감상 경험을 옹호하는 불만에도 모두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 이들은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를 뿐이다. 영화를 보는 단 하나의 기준 따위는 없다.
〈분노의 추격자〉는 모든 장면이 익숙하다. 하지만 이 말은 〈분노의 추격자〉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능숙히 활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듦새도 매끄럽다. 즉 ‘익숙하고 편안한 쾌감’을 원하는 관객에게 이 영화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제라드 버틀러의 필모그래피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대체로 액션이나 스펙터클에 치중한 그의 전작과는 달리 이 영화는 심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제법 강하다(그렇다고 액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아끼는 관객이라면 〈분노의 추격자〉 역시 충분히 ‘새로울’ 것이다. 이제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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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목적인 믿음에 던지는 물음표 - 누구를 향한 믿음인가?
영화 <계시록>
실종 사건의 범인을 단죄하는 것이 신의 계시라 믿는 목사와,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는 실종 사건 담당 형사가 각자의 믿음을 쫓으며 벌어지는 이야기
1. 종교와 욕망, 누구를 위한 믿음인가?
눈에 보이는 것, 즉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들은 '증명'이 가능하다. 무엇을 샀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에 대한 증명. 그러나 '믿음'은, '종교적 믿음'은 증명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내 눈 앞에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고, 신자들은 그를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절대자인 신이 신자에게 내리는 '계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종교를 다루는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종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신은 존재하는가?'로 모인다. <계시록>의 민찬 또한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고, 신과 신자들을 위해 찬송가를 부르고, '계시'를 받기를 기다린다. 신을 믿는 자들이 바라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다. 제가 잘 되게 해 주세요, 제 아들이 취업을 잘하게 해 주세요, 저 사람보다 제가 성공하게 해 주세요. 결국 간절히 바라는 기도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성취와 욕망 충족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계시록>은 이 지점에서 엿볼 수 있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지방의 작은 교회 목사를 맡고 있는 민찬은 동네에 대형 교회가 들어선단 사실을 알게 되고, 그 교회 목사가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를 기도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한다는 것은, 그리고 어떤 대상에게 기대어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는 신이라는 존재가 위안이 된다면, 그리고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다면 설령 신이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의 대상으로써 기능을 다한 것이므로.
그러나 <계시록>의 민찬은 자신의 욕망을, 그리고 충동을 '신의 계시'라고 스스로 세뇌하고 위안하는 인물이다. 이는 교회에 찾아왔던 낯선 남자, 양래가 성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자신의 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부터 얽히는 사건들 사이에서 드러난다. 하원하는 딸을 데리고 오는 걸 깜빡한 사이, 웬 낯선 남자가 딸을 데리고 갔다는 소식을 들은 민찬은 자연스레 양래를 의심하고 만다. 양래가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양래에게 '신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건넨 것과는 달리, 일이 일어나자마자 자연스레 '그럴 것 같은' 인물로 양래를 떠올린 것이다.
딸을 찾기 위해 양래의 집 앞으로 간 민찬은 우연히 양래의 수상쩍은 행동을 보게 되고, 양래를 쫓아 산 중턱까지 갔다 양래와 몸싸움을 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밀려 굴러 떨어진 양래는 정신을 잃고 만다. 돌에 머리를 부딪힌 채 쓰러져 있는 양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민찬에게 걸려오는 전화. 딸을 찾았다는 전화다. 양래는 딸의 실종과는 관련이 없었고, 이미 양래는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이제, 민찬은 어떻게 해야 할까.
2. 구도의 전복과 새로운 역할 부여, '신의 대리인'과 '범죄자' 사이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 민찬만이 엇나간 욕망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래는 민찬의 딸을 유괴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날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했고, 민찬이 있는 교회에 다니던 여자아이, 아영을 유괴했다. 이 때문에 민찬이 범죄를 저지른 대상은 '완전무결한' 자도, '과거를 청산하고 지금은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도 아닌 채 서 있다. 경찰들은 양래에게 범죄를 저지른 대상을 쫓는 게 아닌,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한 양래를 쫓는다.
아영을 찾기 위해서는 양래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민찬은 경찰들이 양래를 찾도록 가만히 둘 수 없다. 양래를 찾게 되는 순간, 양래의 범죄와 함께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될 자신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순간 민찬의 내면에서 민찬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신의 계시를 받고 '범죄자를 단죄하는' 일을 하게 된, 신의 대리인이 된다. 그 순간부터 일을 수습하기 위해 민찬이 벌이는 일들은 꽤나 흥미롭다. 민찬이 불안함을 애써 지우기 위해 택한 방식은 '계시'다. 자신이 이런 일을 벌이게 된 것도, 다시 살아난 양래를 발견하게 되어 2차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도, 모든 것들이 신이 계시를 준 것이라는 뜻이다. 경찰 대신, 그리고 피해자 대신 신의 계시를 받은 자신이 양래를 단죄할 것이며, 그 단죄의 방식으로 양래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
범죄를 숨기느라 바쁜 민찬에게, SKY평안교회 담임목사인 국환은 동네에 들어설 교회의 목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한다. 원래 내정자였던 국환의 아들이 신자와 연애를 했다는 사실이 공론화가 되면서, 새로운 담당 목사가 필요해진 것. 신을 향해 욕망을 내비치고,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어온 민찬에게 이는 확신을 주는 소식이 된다. 자신이 옳게 행동하고 있다는, 신이 자신에게 계시를 준 것이 맞다는 확신.
다시 발견한 양래가 '아영이 아직 살아 있다'며 자신을 죽이면 아영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한 순간부터 민찬의 욕망은 확실히 엇나간 모습을 보인다. 되레 양래가 '경찰을 부르라'고 말하며 민찬을 '미쳤다'고 비난하고, 민찬은 양래를 납치한 채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의 순간에 서 있다. 민찬과 양래의 피해자-범죄자 구도는 이때 완전히 전복된다. 사실상 민찬은 양래에 의해 피해를 본 게 없음에도(딸이 유괴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었으므로), 민찬의 오해에 의해 시작된, 뒤바뀐 범죄자-피해자 구도가 이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모두가 양래를 범죄자라고 가리키며 쫓고 있을 때, 민찬은 그 범죄자의 숨을 끊기 위해 쫓는다.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서. 피해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면서, '신의 계시'라는, 범죄자를 단죄하는 것이라는 자기위안을 품은 채로.
3.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 우연성 짙은 사건의 마무리
계시록은 그 욕망 아래 벌어지는 사건들, 그리고 범죄자-피해자 구도의 전복을 눈여겨 보았을 때 흥미로운 작품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여성 인물들의 활용은 아쉽게 느껴진다. 민찬의 아내는 오직 '신을 믿지만 바람을 피운', 그래서 민찬이 속죄하도록 만드는 인물로만 소비된다. 연희는 과거 같은 성범죄자에게 피해를 입은 여동생의 환영을 보는 경찰로 등장하는데, 과거 얽혀 있는 서사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침착하며, 경력이나 활동 비중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우연히' 발견하는 것들이 많다.
민찬의 수상쩍은 낌새를 파악하는 것도 우연히 민찬의 흙 묻은 신발을 봐서, 양래를 찾게 되는 것도 혹시나 싶어 찾아간 교회 앞에서 우연히 민찬의 타이어에 묻은 오디를 발견해서 이루어진다. 우연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민찬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방식은 '계시'를 받은 것이 민찬이 아니라 연희라는 느낌이 들게 할 정도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경찰이 된 인물이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같은 입장에 놓여 있는 어린 피해자를 구하게 되는 구도까지도 그 느낌이 해소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인물 각자가 가진 욕망의 정도로만 비교했을 때 엇나간 욕망을 더욱 드러낼 수 있는 건 민찬이 아니라 연희다. 새 교회의 목사가 되고 싶다는,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찬의 욕망에 비해 연희의 욕망은 긴 시간 끌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한 여동생의 환영을 보며 계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리던 연희가, 양래가 잡힌 뒤 여동생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양래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지를 알아보는 모습은 침착하다 못해 건조하게까지 느껴진다. 여동생과 관련된 서사는 '피해자 간의 연대'를 위해서만 쓰이고, 이외의 모든 순간에서 연희는 우연히 단서를 발견하는 경찰 히어로에 가깝게 등장한다는 점은 아쉽다.
4.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
다만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에서 이렇게 신과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작품들은 그 작품들이 드러내는 인물들의 욕망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느끼도록 만든다. 민찬의 욕망을 쫓다 보면 민찬의 행동이 억지스럽다고 느낄 수 없고, 연희의 욕망을 쫓다 보면 연희가 과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이는 모두 그들 각자에게 부여된 서사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욕망 아래 발생한 사건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갈무리지을 것인지에 따라 그 욕망이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을지가 달라질 뿐이다.
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절대자인 신으로부터 온 답신, '계시'. 누구도 해석해줄 수 없고, 누구도 실체로써 존재하는 증거물을 내보일 수 없다. 그래서 이 계시와 답신은 더더욱 그 믿음과 해석에 의해 다르게 읽힌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는 신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우리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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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비 매치업] <레토> VS <비긴 어게인>
- [무비 매치업 Movie Match-Up]:
[무비 매치업]에서는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비슷하지 않은 듯 비슷한 두 영화 혹은 어디를 하나 보더라도 완전히 다른 두 영화를 비교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러한 두 영화가 갖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여 그 속에 숨겨진 의미까지 낱낱히 파헤쳐 본다.어느 여름, 해가 지고 익숙한 도시를 거닐 때에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니 그 곳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누군가가 서 있다. 푸른 눈의 남자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장발의 한 남자, 오합지졸의 밴드 사이에서 웃고 있는 한 여자. 그 시간에 그 곳에 있어서 일까. 이들의 노래는 내가 평소에 들었던 무언가와는 유독 다르게 느껴진다. 이번 [무비 매치업]에서는 다른 시간과 다른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그리고 영화에 담긴, 시간과 도시의 이야기. 그것을 하나로 이끌고 채우는 음악을 중심으로 글을 준비했다. 지금부터 완전히 달라 보이는 음악 영화 두 편 <레토>와 <비긴 어게인>에 담긴 특별한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레토 Лето>
#여름과 영화- 영화: 레토 (2018)
-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 출연진: 유태오, 로만 빌릭, 이리나 스타르셴바움 外1980년대 초 소련의 한 해변, 기타를 멘 두 남자가 즐거워 보이는 젊은 무리로 향한다. 두 남자의 이름은 ‘료나 (필리프 아브데예프 分)’와 ‘빅토르 (유태오 分)’. 그들은 ‘펑크’의 소개를 받고 왔다며 유명 락밴드 ‘주파르크’의 멤버 ‘마이크 (로만 빌릭 分)’와 그의 무리에게 자신들을 소개한다. 처음보는 그들에게 던져지는 조롱 섞인 농담들. 그러나 빅토르와 료나의 짧은 노래는 금새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어느덧 완전히 섞인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빅토르와 마이크의 아내 ‘나탈리야 (이리나 스타르셴바움 分)’는 남다른 눈빛을 주고 받는다.새로운 밴드의 재능에 반한 마이크는 그들에게 ‘가린과 쌍곡선’이라는 이름을 선물한다. 그렇게 가린과 쌍곡선의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된 마이크. 가린과 쌍곡선의 공연이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열리도록 담당자를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이크의 도움과는 별개로, 빅토르와 마이크가 갖는 음악적 지향점은 점점 더 극과 극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나탈리야와 빅토르의 가까워진 관계는 마이크의 신경을 조금씩 건드린다.어느덧 공연 날, 주파르크의 무대 바로 다음 순서로 가린과 쌍곡선이 올라온다. 그러나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신생 밴드의 연주에 관객들의 반응은 좋지 못하다. 보다 못한 마이크는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무대에 올라와 그들과 함께 연주한다. 그렇게 공연을 무사히 마쳤지만, 나탈리야가 바라보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빅토르임을 알게 된 마이크는 약속이 있는 척, 그들을 두고 자리를 비킨다.그날 밤, 마이크와 나탈리아 부부의 아파트에는 마이크 대신, 빅토르가 머물게 된다. 그렇게 누구도 막지 않는 빅토르와 나탈리야의 관계는 점점 더 끝을 향해 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애물이 없으니, 죄책감도 쉽게 몰려온 것일까. 나탈리야는 빅토르를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힘들며 마이크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빅토르 역시 그녀의 이야기에 수긍하며 짧지 않았던 그들은 서로를 보내준다.시간이 지나, 가린과 쌍곡선은 레토가 되었고, 하락세인 마이크의 인기와 반대로 빅토르는 소련의 슈퍼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빅토르는 나탈리야를 찾아와 자신의 공연에 초대한다. 밤이 된 레닌그라드 록 클럽, 공연이 시작되고 관객들은 가득 찼다. 그러나 왜인지 노래를 시작하지 않는 빅토르. 그 순간, 손을 잡고 들어오는 마이크와 나탈리야. 그들을 본 빅토르는 노래를 시작하며, 영화는 끝난다.#억압과 자유"날 건드리지 마 폭발 직전이니까"<'Psycho Killer'>
- Alexander Gorchilin & GSH
-원곡: 토킹 헤즈 Talking Heads
https://www.youtube.com/watch?v=uN2s_aLQn28레토의 시간은 억압과 자유의 시간이다. 종교가 고난과 핍박 속에서 만개하듯, 음악도 그러했다.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초 소련은 냉전 시기가 한창이었고, 많은 소련 국민들에게 록 음악은 자본주의에 찌든 부르주아적이고 부패한 적국의 음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저물어가는 전세계적인 흐름에서도 여전히 피와 투쟁만을 외치는 사람들. 그 외침에 평생을 시달린 것은 소련의 젊은이들이었다.그런 그들을 매료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적국의 록 음악이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노래하는 젊은 밴드들의 집에는 ‘AC/DC’, ‘데이비드 보위’, ‘티렉스 와 같은 록과 펑크 가수들의 LP판이 가득했고 이러한 흐름은 소련의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욕망에 대한 가감 없는 표출,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기존에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주제와 이야기는 ‘소비에트 록’ 더 나아가, ‘레닌그라드 록’을 탄생시켰다.#레닌그라드와 음악영화는 1980년 초, 소련의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록 음악씬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는 레닌그라드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다양한 모습들이 등장한다. 흑백의 화면 속에서도 인물들은 레닌그라드 안에서 강하게 숨쉬며 살아간다."혜성이 오고 있다고, 여름"<바닷가- 'Summer'>
- Zveri춤추고 노래하는 젊은이들과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가. 이 곳은 아마 레닌그라드의 주변 도시인 ‘세스트로레츠’의 바닷가일 것이다. 이 해변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여름’이다. 영화의 테마곡이기도 한 이 노래는 영화 초반, 빅토르를 만나기 전 바닷가에서 마이크가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이다. 영화의 제목임과 동시에 노래의 제목, 그리고 여름을 의미하는 단어인 ‘레토’는 노래 내내 반복된다. 춤추는 젊은이들과 마이크의 웃음, 그리고 그의 연인 나탈리야까지. 빅토르는 분명 주인공이며 그의 삶은 아름다워 보인다.하지만 노래가 끝나고 빅토르가 등장하자마자, 영화와 인물들 모두의 초점은 빅토르에게 맞춰진다. 심지어 그녀의 연인 나탈리야까지도. 마이크의 삶에 빅토르는 친구이자 경쟁자가 되었고 마이크의 삶은 예전처럼 즐거울 수는 없게 된다. 바닷가와 노래 ‘여름’은 마이크의 뜨거웠던 마지막 행복을 의미한다. 아무런 걱정이나 불안 없이, 음악적으로나 사랑으로나 완벽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고 춤추며 노래하던 그의 자유롭고 즐거웠던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나는 승객. 차를 타고 또 타고"<도로- 'Passenger'>
-Anton Sevidov
-원곡: Iggy Pop
https://youtu.be/yRfZ4hvI4DU?si=1PbD00qI7JfY6Kn4상점에서 유명 가수들의 앨범 그림을 팔고 있는 빅토르. 그리고 그를 찾아온 나탈리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탈리야는 마이크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줘야 한다며 자리를 떠나려고 한다. 그러자 함께 가자는 빅토르. 마이크가 좋아하는 커피를 가져다주기 위해 커피잔까지 구해, 마이크의 직장으로 가는 그들.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너무나 즐거워보인다. 이들의 목적이 마이크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 그들을 위한 것인지 잠시 까먹을 정도이다. 빅토르와 나탈리야가 버스에 타자 ‘이기 팝’의 ‘Passenger’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옆에 있는 노신사가 노래를 부른다.빅토르와 나탈리야를 빼고 일제히 노래를 부르는 승객들. 정거장을 놓쳤다는 빅토르의 말에도 승객들은 차에서 내리지 말고, 우리는 승객이 되어야 한다며 노래를 부른다. 그러자 버스의 윗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버리는 빅토르. 버스 위를 사뿐 사뿐 밟고, 다시 내려와 버스의 앞문을 열어버린다. 부끄러운 줄 알라는 시민의 말을 뒤로 한 채 빅토르와 나탈리야는 버스에서 내려, 자신들만의 길을 간다. 인형처럼 우리는 승객일 뿐이라고 노래하는 버스의 승객들. 그들은 그들만의 의지를 상실하고 조종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승객들과는 대조적으로, 목표를 위해서라면 없던 길과 문까지 만드는 빅토르와 나탈리야. 금기의 사랑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자유와 주체성이 노래와 비교되며 강조된다."이렇게 완벽한 날, 계속 곁에 있어줘요"<거리- 'Perfect day'>
-Elena Koreneva, Anton Sevidov
-원곡: Lou Reed
https://youtu.be/sp9dFJlmgOI?si=SRN2K3gIsY-o36VA나탈리야가 가져온 커피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씁쓸함, 몰래 토마토를 나눠먹는 빅토르와 나탈리야의 웃음은 마이크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점점 시려오는 마이크의 마음. 여름의 뜨거운 열기마저 마이크의 마음에 따뜻함을 가져오지 못했다. 가린과 쌍곡선의 첫 공연이 끝나고, 마이크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나타샤에게 먼저 들어가라 말한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 빅토르가 있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마이크는 친구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그저 비 오는 밤, 전화 부스에 서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전화하려고 그 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그는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여인에게 자리를 내준다. 동전을 빌려달라는 여인의 말에 동전까지 건네주는 마이크. 여인에게 향한 그의 조건 없는 베풂은 마치, 빅토르에 대한 그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는 듯하다. 물론,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고, 오히려 사랑하는 애인마저 빼앗겼지만 말이다. 노인은 마이크를 향해 노래한다. 이렇게 완벽한 날, 내 곁에 있어달라고, 그러나 마이크는 조용히 듣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이 날은 완벽한 날도 아니었으며, 곁에 있어달라고 말할 누군가도 없기에."난 알아 내 나무가 이 도시에서 죽는다는 걸."<레닌그라드 록 클럽-‘ 'The Tree’>
-Petr Pogodaev, Petr Tishkov, Zveri
https://youtu.be/wNuBq5dmFVo?si=0MvK7yt3xaW1tY7V빅토르와 그의 밴드는 자신들이 처음 공연했던 그 곳, 자신들이 탄생했던 그 곳 ‘레닌그라드 록 클럽’으로 돌아온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키노 (Кино)’라는 이름을 달고 말이다. 그들의 인기는 레닌그라드를 넘어 소련 전체에서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빅토르의 잊지 않았다. 그를 있게 해준 그 도시, 그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도시, 레닌그라드를 말이다.수많은 도시와 휘황찬란한 공연장을 가봤을 그이지만, 초라해 보이는 레닌그라드 록 클럽이 갖는 의미는 그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를 보기 위해 모인 수많은 관중들, 그러나 그가 찾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 마이크와 나탈리야. 결국 오지 않는 그들을 뒤로하고 노래를 시작하려는 그 때, 손을 맞잡은 마이크와 나탈리야가 들어온다. 세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기에 서로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제야 빅토르는 노래한다. 그의 나무는 이 도시에서 죽을 것이라고.#다시 돌아올거야
"이 여름도 곧 끝이 나겠지"<'Summer Will Be Over Soon'>
-KINO영화는 고려인 출신 소련의 슈퍼스타 록 가수 ‘빅토르 초이’의 전기영화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영화는 빅토르 한 명이 아닌, 두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 인물은 빅토르, 그리고 마이크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지지하는 동료 사이에서 갖는 그의 개인적 고뇌는 레토의 또 다른 핵심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마이크 (마이크 나우멘코)는 빅토르가 1991년 사망하고, 바로 1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그는 생애 후반, 빅토르에게 인기를 상당 부분 넘겨주게 되지만, 마이크 역시 훌륭한 재능이었고 당대를 빛낸 스타였다. 이처럼 짧은 시기, 두 재능을 잃은 소련의 음악계는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음악적 지향점이나, 사상적으로나, 그리고 사랑이나, 끊임없이 엇갈렸던 빅토르와 마이크의 대립은 영화 내내 흥미진진한 요소였다. 그들은 자유를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달랐다. 정면돌파를 통해 쟁취한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 빅토르와, 주변을 챙기고 돌아보며 모두와 함께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던 마이크. 그들의 미묘한 차이는 작품에서 느껴진다.<레토>는 흑백영화이지만, 다양한 편집과 연출들로 보는 재미가 있다. 중요한 장면 속 노래들과 등장하는 뮤직비디오와 같은 연출. 거기서 오는 펑키한 편집과 흑백 배경과 대조되어 더욱 튀는 갖가지 색들. 꿈과 상상처럼 표현한 자유에 대한 욕구. 그리고 이러한 욕구가 불러일으킨 상상과 현실의 간극을 리마인드시키는 ‘회의론자’라는 이름의 관찰자 캐릭터. 이것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 속에서 연극, 광고 아니면 또 다른 작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이처럼 레토에서만 볼 수 있는 재치 있고 세련된 요소들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눈부신 재능에서 온 것이다. 가진 것 없던 이방인이 거둔 꿈만 같은 성공과 짧지만 강렬했던 삶. 영화라는 의미의 러시아어 ‘키노’처럼 참 영화 같은 이야기이다. 여름은 끝이 났지만, 다시 찾아온다. 뜨거웠던 그때 그 여름처럼 잊혀지지 않고 찾아올 영화 ‘레토’였다.
<비긴 어게인 Begin Again>
#젊음과 희망- 영화 : 비긴 어게인 (2014)
- 감독 : 존 카니
- 출연진 :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애덤 르빈 外뉴욕의 한 바, 그 곳에서 ‘그레타 (키이라 나이틀리 分)’가 노래를 부른다. 모두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오직 한 사람 ‘댄 (마크 러팔로 分)’만이 숨겨진 재능을 알아본다. 그레타에게 다가가 자신이 유명한 프로듀서라고 소개하는 댄. 그러나, 볼품 없고 허세 부리는 듯한 그의 모습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댄의 끈질긴 설득으로 그레타는 결국 앨범을 만들기로 한다. 사실 그레타와 댄은 비슷한 처지였다.남자친구 ‘데이브 (에덤 르빈 分)’를 따라 뉴욕에 오게 된 그레타. 그레타처럼 무명 가수였던 데이브는 그의 노래가 영화에 삽입되며 한 순간에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평생을 행복할 것 같았던 그들. 그러나 데이브가 LA 출장을 다녀왔고 자신이 만든 노래 “A Higher Place”를 들려준다. 그 노래를 듣자마자, 그레타는 데이브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결국 그들은 이별한다. 성공한 음악 프로듀서였던 댄 역시도 아내 ‘미리엄 (캐서린 키너 分)’의 불륜으로 결국 이혼하고, 딸의 양육권 문제까지 앓고 있는 그야말로 나락에 떨어진 상태였다.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댄과 그레타는 다시 희망을 가지고 앨범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앨범의 컨셉은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뉴욕을 돌아다니며 야외녹음을 하는 것이었다. 앨범을 만들면서, 댄은 그의 딸 ‘바이올렛 (헤일리 스테인펠드 分)’와 화해했고, 그레타 역시 과거를 잊고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었다. 그들의 앨범은 뛰어난 완성도로 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댄과 그레타는 점점 가까워졌지만 더 나아가지 않고, 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짧은 포옹을 끝으로 헤어진다.시간이 지나, 그레타의 노래를 들은 데이브. 그는 그녀에게 사과하며 공연장에 찾아와달라 부탁하게 된다. 고민을 하다 데이브의 공연장에 간 그녀. 공연에서 데이브는 그레타를 바라보며 그녀가 선물해준 ‘Lost Stars’를 원곡의 버전으로 부르지만, 이내 대중들이 좋아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꿔 부르게 된다. 그 모습을 지켜 본 그레타는 결국, 공연장을 떠난다. 그리고 그레타는 댄과 보낸 시간의 상징인 듀얼잭을 돌려주며 그동안의 시간을 정리한다. 댄은 이 듀얼잭을 통해 아내, 미리엄과 다시 화해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댄의 아파트에 찾아온 그레타. 그녀는 앨범을 인터넷에 올리고 싶다고 말하고, 그 결정을 댄은 존중해준다. 그리고 그들의 찬란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들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실패와 도전
"우린 길 잃은 별인가요"<'Lost Stars'>
-Keira Knightley
https://youtu.be/3RPkTAMNvSY?si=CdfSlP0DYHz84n6U<레토>의 시간이 억압과 자유의 시간이라면, <비긴 어게인>의 시간은 실패와 도전의 시간이다. 연인과 꿈 모두를 잃고 떠나려던 그레타에게 댄은 거칠지만 진심이 담긴 손을 내밀었다. 댄이 데이타에게 향했을 때, 그들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댄이 먼저 손을 건넸을 뿐, 그레타가 용기를 내어 그 손을 잡아주었기에 그들은 함께 할 수 있었다. 서로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고 누구보다 서로를 위했다. 가장 뜨거웠던 사랑을 잃어버렸던 그레타와 댄. 그들은 사랑과 함께, 꿈과 희망마저 잃어버렸다. 완전히 추락해버렸고, 그들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도전은 불가능해 보였다.그러나 그들은 음악을 통해, 그리고 서로를 통해 위로 받았고 도전했다. 길 잃은 두 별은 어둠 속에서 다시 용기를 내었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다른 별들과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가시밭길을 지나자, 새로운 길이 보였다.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주저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함께하는 별이 그 여정동안 함께 빛나주었기에 그들은 그 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 밝게 빛났다.#뉴욕과 음악
비긴 어게인은 음악 영화이기도 하지만, 음악과 함께 뉴욕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레타와 댄은 자연스러운 뉴욕의 소리를 앨범에 담기 위해, 골목과 차도, 건물 옥상 등 다양한 곳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뉴욕의 모든 것을 담은 앨범, 그리고 영화는 특별했다."마지막 한걸음을 내딛을 준비가 되었나."<바- 'A Step You Can’t Take Back'>
-Keira Knightley
https://youtu.be/--byHxoPRwQ?si=cclo6k6O9utkl2pp그레타와 댄이 처음 만난 뉴욕의 작은 바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었다. 최악의 하루를 보내고 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댄. 그런 그에게 들려오는 그레타의 노래. 통기타 하나를연주하며 진솔하게 노래하는 그녀는 댄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댄에게는 그녀의 뒤에서 저절로 연주되는 악기들이 보였다. 그녀에게 조금의 도움만 있다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도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함께 앨범을 만들자고.댄의 허름한 모습을 보고 프로듀서가 맞는지 의심하며, 무례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그레타. 하지만 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의 집착에 가까운 제안에 그레타는 결국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그들의 음악색은 영 맞지 않는다. 그레타는 음악성을, 댄은 대중성이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인연은 성사되지 못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는 길만 달랐지, 결국 댄과 그레타의 진정성은 같았다.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 그들은 다시 만났고, 정말 마지막이 될 한걸음을 내딛었다."내 인생도 이제 풀리기 시작했거든."<골목 -' Coming Up Roses'>
-Keira Knightley
https://youtu.be/K6wiDpf5ogk?si=oPCbIWv3Tu41BNNf다양한 곳에서 밴드의 구성원들을 모아온 댄과 그레타. 그들은 뉴욕의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잘 담기 위해, 여러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뉴욕의 한 골목, 쓰레기통과 낙서 가득한 벽 옆에 그들은 악기를 설치했다. 댄과 그레타의 절실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농구를 하며 놀고 있는 아이들. 댄은 그 아이들의 목소리까지, 모두 음악에 사용하기로 한다. 이 모든 소음이 하나의 음악이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고함 소리 모두 음악에 고스란히 들려온다. 그러나 그레타가 노래를 시작하고,내 인생도 이제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하자, 걱정거리였던 소음들은 모두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순탄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레타와 댄을 괴롭히던 걱정거리와 고민거리들. 이것들은 골목의 소음들과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했을 때의 소음은 그들을 무너지게 할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악기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시작하니, 소음은 그저 그레타와 댄이라는 사람을 더 다채롭게 해주는 것들이 되었다."그대여, 돌아갈 건지 말해줘."<옥상- 'Tell me If you Wanna go home'>
-Keira Knightley
https://youtu.be/Tk1G5DVWRp8?si=DjosSlx3JhPxaagX골목에서의 녹음을 끝낸 그들의 다음 장소는 건물의 옥상이었다. 엠파이어 빌딩이 보이는 높은 건물. 밤이 되자 그들이 준비한 조명이 반짝였다. 이번 녹음에는 특별한 이가 함께했다. 바로 댄의 딸 바이올렛이다. 준비가 되면 시작하라며 긴장을 풀어주는 아빠, 댄. 댄도 이 날은 베이스 기타를 연주했다. 노래가 시작되자, 천천히 일어나 무대로 나오는 바이올렛. 딸이 연주하는 리드 기타와 아빠가 연주하는 베이스 기타.오해와 갈등을 끝내고 완전히 하나가 된 이들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보아도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다시 돌아갈 것인지 말해달라는 노래 가사에, 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픔과 고통을 혼자만 감내했던 댄. 그는 이 슬픔과 고통을 넣어두고 딸 바이올렛과 화해했으며, 좋은 아빠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 아내 미리엄과도 화해한다. 그렇게 가족과 집으로 돌아간 댄.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는 그레타. 아마 이 노래는 댄과 그레타의 관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있어 ‘끝’이라는 대답이다."내 이름을 부르는 너의 목소리를 들었지."<공연장- 'Lost Stars'>
-Adam Levine
https://youtu.be/5U-JroWwFkw?si=TNdT4X1SK6yZ0QAY댄과의 인연을 끝내고, 데이브의 공연장에 찾아온 그레타. 그녀가 공연장에 찾아오기까지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자신을 찾아온 그녀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데이브. 데이브는 그레타가 선물했던 ‘Lost Stars’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레타가 선물한 그때 그 발라드 버전으로 부르는 노래. 그레타 역시 웃음으로 화답한다. 그러나 2절이 시작되자 데이브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발라드가 아닌 자신만의 빠르고 신나는 버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변해버린 자신의 곡과 변해버린 데이브. 결국, 그레타는 공연장을 떠나고, 데이브는 그레타가 떠난 자리를 허무하게 바라본다. 수많은 사람이 가득 찬 공연장. 모든 사람들이 데이브를 보기 위해 모였다.하지만 데이브는 그레타만이 신경 쓰인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때처럼 수염 없는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이브. 영화 속 시간이 지나면서 자라나는 데이브의 수염은 점점 인기를 얻고 변해가는 그의 상태를 의미했다. 그러나 데이브가 마지막 장면이 되어서, 원래 모습처럼 깔끔하게 면도했다는 것은 그레타와 다시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겉만 돌아왔지, 데이브는 결국,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레타와 데이브가 부른 완전히 다른 버전의 ‘Lost Stars’처럼 그들은 너무나 달라졌다. 그레타는 분명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데이브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그녀는 떠났다.#사랑을 말하지 않아도"그래도 난 널 사랑해왔어"
-Keira Knightley
https://youtu.be/KvZLvJc_ry8?si=8j6tSWjgSRZhzaP_영화는 결국, 음악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감독은 댄과 그레타에게 사랑의 정서를 입히지 않는다. 분명 둘 중 한명이라도 조금만 더 다가갔으면 그들은 연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그러지 않았다. 결국, 댄은 가족에게 돌아가고, 그레타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영화는 끝난다. 실제로 댄과 그레타의 키스신도 존재했으나, 최종 편집과정에서 사라졌을 정도로 둘의 관계는 애틋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존 카니’ 감독이 직접 영화를 만들었던 누구도 그들의 키스신을 바라지 않았고, 이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둘이 이어지는 것은 작품의 의미와는 맞지 않았다. 댄과 그레타가 서로를 아꼈고 사랑했기에 더 나아가지 않고 멈췄다는 것이다. 댄은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그레타는 새로운 사랑을 하기를 그 둘은 바랬을 것이다.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첫사랑과 같은 둘의 관계는 바보 같지만 아름다웠다. <원스>와 <싱 스트리트>처럼 음악을 주제로 영화를 만드는 존 카니답게 <비긴 어게인>역시 음악 자체나 음악과 영화 속 장면의 조화는 더할 나위 없었다. 원스나 싱 스트리트보다 등장인물의 정서를 이해하기 쉽게 묘사했고 영화의 톤 역시도 어둡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던 영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주제마저 가벼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레타와 댄의 정서를 섬세하게 묘사했으며, 이야기의 흐름도 억지 없이 논리적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이를 통한 결말은 현실적이었고 이해도 갔다. ‘그래도 난 사랑해왔어’라는 노래 가사처럼 댄과 그레타는 말은 하지 않았도 서로를 사랑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사랑할 가치가 있는 영화 ‘비긴어게인’이었다.
#흑백의 사실, 컬러의 픽션<레토>와 <비긴 어게인>은 흑백영화와 컬러영화라는 차이점에서 시작하여 사실과 픽션, 기존 명곡의 사용 여부 등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시대와 인물 중 어디에 초점을 맞췄는지도 다르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사상적/사회적으로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국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역시 달랐다. 공통점도 존재한다. 레닌그라드로 온 빅토르와 뉴욕으로 온 그레타라는 이방인. 마이크와 데이브라는 음악과 인생의 라이벌.배우로서 작품에 참여하게 된 두 뮤지션 ‘즈베리’의 ‘로만 빌릭’과 ‘마룬5’의 ‘에덤 르빈’. 빅토르와 마이크, 댄과 그레타라는 투톱 주인공 체제 등의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끝으로 두 영화 모두 인간의 의지와 자유, 그리고 사랑을 노래한다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영화와 음악을 사랑한다면, <레토>와 <비긴 어게인>을 한번쯤은 감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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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코난: 제로의 일상》은 《명탐정 코난》의 원작자 아오야마 고쇼의 감수를 받아 아라이 타카히로가 그린 스핀오프 작품이다. 공안 경찰, 사립 탐정, 검은 조직의 일원, 세 얼굴을 가진 이 남자의 진짜 사생활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 줄만 알았는데. 빛과 그림자에 둘러싸인 남자, 아무로 토오루의 소소한 일상이 지금 공개된다. 《명탐정 코난: 제로의 일상》, 2022년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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